AI가 인간을 닮아 갈 때, 인간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 기계 문명 앞에서 다시 묻는 인간의 본질과 개벽의 방향
[[특집] ChatGPT에게 묻는다]
노성현 PD / STB 상생방송
‘이 글은 사람이 쓴 게 맞을까? 저 사진과 영상은 AI가 만든 거 같은데?’
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의문을 갖습니다. 한때 인간만의 고유한 영역으로 여겨지던 창작과 예술의 세계에서조차, 오늘날 우리는 인공지능의 솜씨에 감탄하고, 때로는 그 결과물에 감동까지 느끼고 있습니다. ChatGPT는 감정이 담긴 에세이를 써내고, 미드저니Midjourney는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은 명화에 가까운 이미지를 만들어 냅니다. SNS에서는 딥페이크Deepfake 기술로 만들어진 가짜 얼굴이 실제 사람보다 더 매력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고, 인간과 AI를 구분해 내는 이른바 ‘튜링 테스트Turing test 게임’이 어느새 일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지금, “내가 진짜 인간임을 증명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과거의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했다면, 오늘날의 인공지능은 인간의 생각과 감성, 창조와 관계의 영역까지 깊숙이 침범하고 있습니다. 이제 문제는 ‘인간만의 고유함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옮겨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두려움과 경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역설적으로, 인공지능의 눈부신 발전은 인간다움에 대한 깊은 자기 성찰을 촉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 왔던 감정과 직관, 의미와 윤리에 대해 다시 질문하고 있습니다. ‘기계도 이 일을 해낸다면, 나는 과연 누구인가?’ 이 거대한 질문 앞에서 우리는 두 가지 선택지와 마주하게 됩니다. 인공지능에 기대어 인간됨을 포기할 것인지, 아니면 인간만이 지닌 고유한 본질을 다시 깨우고 회복할 것인지 말입니다.
이 글은 바로 그 선택의 갈림길에서, 진리의 관점으로 인간다움을 다시 묻고자 합니다. AI 기술은 하나의 도구이자 단순한 산업 혁신이나 기술 진보를 넘어, 인류 문명 전체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 변화의 흐름을 하나의 큰 이름으로 다시 불러야 할 때에 이르렀습니다. 문명 대전환, 곧 ‘개벽開闢’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Q1. AI가 이렇게까지 잘하는데… 그래도 인간에게만 남은 게 있긴 한 걸까?
스마트폰 하나로 우리는 무한한 지식과 창조물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이런 질문이 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걸 만든 건 사람인가요, 아니면 AI인가요?” 한때는 가벼운 농담처럼 들렸던 이 물음이, 이제는 인간 존재의 근거를 묻는 시대적 질문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AI의 속도는 실로 놀랍습니다. 바둑에서는 이미 인간을 넘어섰고, 의료⋅법률⋅예술⋅심리 상담에 이르기까지 그 영역을 넓혀 가고 있습니다. 인간만의 영역이라고 믿어 왔던 일들이 하나둘 무너져 내리는 장면 앞에서, 우리는 감탄과 혼란 사이를 오가고 있습니다.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AI는 반복적인 업무를 대신해 주는 ‘도구’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이제 AI는 감정과 맥락까지 포착하며 사람처럼 말하고 표현합니다. 그 결과물 앞에서 우리는 진짜와 가짜를 쉽게 구분하지 못하고, 어느새 AI가 만든 음악에 감동하고, 영상 앞에서 울컥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쯤 되면 자연스레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인간만의 영역이 정말로 남아 있기는 한 걸까요?” 이 질문은 단지 기술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근대 이후 오랫동안 스스로를 기능으로 정의해 왔습니다. 이성, 생산성, 판단력, 효율성. 그런데 이제 AI가 그러한 기능을 인간보다 더 잘 수행할 수 있다는 사실 앞에서, 인간 존재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질문은 그다음에 있습니다. “기계가 더 잘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날수록, 인간은 어떤 존재로 다시 정의되어야 할까요?” AI는 기능을 복제할 수는 있지만, 인간의 전부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슬픔, 직관과 경외심, 그리고 “왜?”라고 묻는 능력은 단순한 계산이나 예측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AI는 문장을 조합하고, 문맥을 따라 음악을 만들지만, 인간은 그 음악에 자신의 인생을 투영합니다.
우리가 AI 앞에서 위협을 느끼는 이유는 기술 그 자체 때문이 아닙니다. 인간다움의 본질을 스스로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의 진짜 위기는 AI가 인간을 흉내 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너무도 쉽게 기계로 환원해 버리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 탐구의 출발점이 됩니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가?” 이 물음은 단순한 철학적 사유가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어떤 문명과 어떤 삶을 선택하게 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설계 질문입니다.
Q2. AI가 흉내 낼 수 있어도, 끝내 닿지 못하는 인간의 깊이는 무엇일까?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가?”
기술이 정교해질수록 이 물음은 더욱 날카롭게 다가옵니다. AI는 인간의 많은 기능을 빠르게 흡수하고 있으며, 우리는 놀라울 만큼 쉽게 ‘대체’라는 말을 꺼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능이 전부는 아닙니다. 기계가 우리의 손과 뇌를 대신할 수는 있을지언정, 마음의 감정이나 존재의 방식까지 온전히 복제할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계산하는 존재가 아니라, 삶을 살아 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AI는 기쁨과 분노를 매우 그럴듯하게 표현합니다. 그러나 그 말의 이면에는 심장이 뛰는 감각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감정은 기억과 관계, 상처와 약속이 겹겹이 쌓여 형성된 체험입니다. 한 번의 사과가 늦어 마음을 깊이 후벼 파기도 하고, 누군가의 한마디가 오늘 하루를 견디게 하기도 합니다. 감정은 단순한 반응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꾸는 진폭입니다. AI는 예측할 수는 있어도, 아파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아프기 때문에 변화합니다.
인간은 서로의 삶에 빚을 지고 살아갑니다. AI의 위로는 친절하지만, 그 안에는 체온이 없습니다. 인간의 공감은 “당신을 이해합니다.”라는 말에 그치지 않고, “당신의 고통이 제 안에서도 아려 옵니다.”라는 감각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를 위해 시간을 내고, 손을 잡고, 때로는 자신의 삶의 습관을 바꾸게 됩니다.
관계는 데이터가 아니라 약속이며, 공감은 인간 사회를 지탱해 온 가장 오래된 뿌리입니다.
AI가 그림과 음악을 만들어 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학습된 것들의 재배열에 가깝습니다. 인간의 창작은 언제나 “왜?”라는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한 편의 시에는 한 사람의 슬픔과 사랑이 응축되어 있고, 한 폭의 그림에는 세계를 바라보는 단 한 번의 시선이 담겨 있습니다. 인간은 상실을 노래로 바꾸고, 상처를 이야기로 바꿉니다. AI는 조합하지만, 인간은 삶을 통해 의미를 만들어 냅니다.
인간다움의 가장 깊은 본질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고통 속에서도, 기쁨 속에서도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를 묻고 다시 일어서는 힘입니다. 기도하고, 깨닫고, 눈물을 흘리고, 다짐하며 자신의 존재를 갱신하려는 의식의 움직임은 AI가 흉내 낼 수 없는 내면의 사건입니다. 인간은 때로 이유 없이도 선善을 선택하고,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사랑을 지킵니다. 그 비합리성 속에 인간의 존엄이 깃들어 있습니다. 세계경제포럼이 미래 핵심 역량으로 감성 지능과 창의성, 호기심을 꼽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떤 존재로 살아갈 것인가’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인간 고유성은 AI가 하지 못하는 기능의 목록이 아니라, 인간만이 품을 수 있는 깊이와 변화의 이야기입니다. 더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인간은 문제를 푸는 존재가 아니라 의미를 살리는 존재입니다. 같은 사건 앞에서도 누군가는 절망하고, 누군가는 희망을 만들어 냅니다. 그 해석의 주체가 바로 인간입니다.
이제 질문은 더욱 깊어집니다. 그 깊이는 결국 인간 안에 깃든 신성神性의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기술이 높아질수록, 인간은 더 깊은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기계로 만들어 버릴지도 모릅니다. “그 신성은 어디에서 비롯되며, 어떻게 깨어나는 것일까요?” 이 물음이 우리를 증산도 진리의 길목으로 이끌어 주고 있습니다.
Q3. 이 거대한 AI의 물결을, 증산도 진리로 보면 무엇이 보일까?
“AI는 어디로 가고 있으며, 또 인간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요?
인공지능은 이제 인간처럼 말하고, 판단하고, 창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술의 성취 앞에서 감탄을 느끼는 동시에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을 함께 느끼고 있습니다. 이 변화는 너무도 빠르고 깊어, 때로는 숨이 막히는 듯한 감각마저 안겨 줍니다. 그러나 이 흐름을 단지 ‘기술의 진보’로만 이해한다면, 어쩌면 가장 얕은 해석에 머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것은 도구의 변화가 아니라, 문명 전체의 방향이 꺾이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증산도 『도전道典』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전해집니다.
“선천은 기계선경이요, 후천은 조화선경이니라.” (도전道典 7:8:3)
여기서 말하는 기계선경이란, 인간이 외적 기술의 힘으로 세상을 다스리려 했던 시대를 뜻합니다. 효율과 속도, 계산과 성과가 최고의 가치가 되었고, 사람은 점차 하나의 기능으로 환원되어 왔습니다. AI는 바로 이 문명의 정점에 서 있습니다. 인간이 해 오던 일을 대신 수행하고, 때로는 인간보다 더 정확하게 처리합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지점에서 새로운 질문이 시작됩니다. 기계가 모든 것을 더 잘해 낼수록, 인간은 무엇으로 남게 되는 것일까요?
증산도가 말하는 후천의 조화선경은 기술의 완성이 아니라 인간의 각성입니다. 『도전』은 후천을 인간이 신명과 하나 되어 만사를 아는 시대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많은 정보를 소유한다는 뜻이 아니라, 바르게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천지의 이치와 자신의 내면이 조화를 이루는 앎, 계산을 넘어선 통찰의 세계입니다. AI가 아무리 방대한 정보를 다룰 수 있다 하더라도, 삶의 고통을 끌어안고 윤리를 선택하며 존재의 의미를 묻는 앎은 오직 인간에게서만 나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AI는 결코 목적이 아닙니다. AI는 인간을 밀어내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을 시험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계가 극치로 발전할수록, 인간은 더 이상 기술로 자신을 증명할 수 없게 됩니다. 결국 남는 것은 마음의 깊이와 양심의 방향, 그리고 자기 안에 깃든 신성을 깨우는 일입니다.
후천 문명은 그렇게 깨어난 인간이 중심이 되는 세계입니다. 기술이 주인이 되는 문명이 아니라, 의식이 주인이 되는 문명입니다. 해원과 보은, 상생과 자비가 삶의 질서가 되는 인존 시대입니다. AI가 물질문명의 극치라면, 인간은 신성의 극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기계가 아니라, 그 사실을 잊어버린 인간 자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에필로그
AI가 글을 쓰고, 노래를 만들며, 사람처럼 말하는 시대에 이 질문은 다시금 우리 삶의 가장 깊은 곳을 조용히 건드립니다. 기계와 점점 닮아 가는 세상 속에서, 인간다움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기계는 우리보다 더 똑똑해질 수는 있을지언정, 우리 삶을 대신 살아 주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이 글을 통해 AI 시대의 변화 한가운데를 걸어오며, 인간의 본질을 하나씩 되짚어 보았습니다.
모든 경계가 무너지는 듯 보이는 시대 속에서도, 끝내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감정의 미세한 떨림이었고, 양심 앞에서 멈칫하게 되는 망설임이었으며, 타인의 고통 앞에서 마음이 흔들리는 공감이었고, 삶의 의미를 끝내 묻고자 하는 영성이었습니다. AI는 계산할 수 있지만, 인간은 괴로워하며 선택합니다. AI는 조합할 수 있지만, 인간은 사랑하고 책임집니다. 이 내면의 깊이는 기술이 끝내 닿지 못하는 자리입니다.
증산도는 인간을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천지와 연결된 존재이며, 신성과 하나 될 가능성을 지닌 존재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우연히 태어난 기능적 개체가 아니라, 우주의 뜻을 품고 살아가는 진리의 씨앗입니다. AI 시대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분명합니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물음입니다. 기술은 거대하지만 스스로의 방향을 갖고 있지는 않으며, 도구는 강력하지만 중심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 중심은 언제나 인간이며, 인간 안에 깨어 있는 의식입니다.
그러므로 기계문명이 몰고 온 거대한 파도를 두려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파도 위에서 방향을 잡아 주는 등불은, 바로 이 질문 앞에 서 있는 우리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부디, 그대 안의 빛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빛이야말로, 다가오는 새 문명의 길을 밝히는 등불이 될 것입니다. ■
프롤로그 : AI와 인간, 경계가 흐려지다
‘이 글은 사람이 쓴 게 맞을까? 저 사진과 영상은 AI가 만든 거 같은데?’
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의문을 갖습니다. 한때 인간만의 고유한 영역으로 여겨지던 창작과 예술의 세계에서조차, 오늘날 우리는 인공지능의 솜씨에 감탄하고, 때로는 그 결과물에 감동까지 느끼고 있습니다. ChatGPT는 감정이 담긴 에세이를 써내고, 미드저니Midjourney는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은 명화에 가까운 이미지를 만들어 냅니다. SNS에서는 딥페이크Deepfake 기술로 만들어진 가짜 얼굴이 실제 사람보다 더 매력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고, 인간과 AI를 구분해 내는 이른바 ‘튜링 테스트Turing test 게임’이 어느새 일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지금, “내가 진짜 인간임을 증명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과거의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했다면, 오늘날의 인공지능은 인간의 생각과 감성, 창조와 관계의 영역까지 깊숙이 침범하고 있습니다. 이제 문제는 ‘인간만의 고유함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옮겨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두려움과 경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역설적으로, 인공지능의 눈부신 발전은 인간다움에 대한 깊은 자기 성찰을 촉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 왔던 감정과 직관, 의미와 윤리에 대해 다시 질문하고 있습니다. ‘기계도 이 일을 해낸다면, 나는 과연 누구인가?’ 이 거대한 질문 앞에서 우리는 두 가지 선택지와 마주하게 됩니다. 인공지능에 기대어 인간됨을 포기할 것인지, 아니면 인간만이 지닌 고유한 본질을 다시 깨우고 회복할 것인지 말입니다.
이 글은 바로 그 선택의 갈림길에서, 진리의 관점으로 인간다움을 다시 묻고자 합니다. AI 기술은 하나의 도구이자 단순한 산업 혁신이나 기술 진보를 넘어, 인류 문명 전체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 변화의 흐름을 하나의 큰 이름으로 다시 불러야 할 때에 이르렀습니다. 문명 대전환, 곧 ‘개벽開闢’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Q1. AI가 이렇게까지 잘하는데… 그래도 인간에게만 남은 게 있긴 한 걸까?
: 창작까지 넘보는 AI, 인간은 무엇을 할 것인가
스마트폰 하나로 우리는 무한한 지식과 창조물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이런 질문이 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걸 만든 건 사람인가요, 아니면 AI인가요?” 한때는 가벼운 농담처럼 들렸던 이 물음이, 이제는 인간 존재의 근거를 묻는 시대적 질문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AI의 속도는 실로 놀랍습니다. 바둑에서는 이미 인간을 넘어섰고, 의료⋅법률⋅예술⋅심리 상담에 이르기까지 그 영역을 넓혀 가고 있습니다. 인간만의 영역이라고 믿어 왔던 일들이 하나둘 무너져 내리는 장면 앞에서, 우리는 감탄과 혼란 사이를 오가고 있습니다.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AI는 반복적인 업무를 대신해 주는 ‘도구’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이제 AI는 감정과 맥락까지 포착하며 사람처럼 말하고 표현합니다. 그 결과물 앞에서 우리는 진짜와 가짜를 쉽게 구분하지 못하고, 어느새 AI가 만든 음악에 감동하고, 영상 앞에서 울컥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쯤 되면 자연스레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인간만의 영역이 정말로 남아 있기는 한 걸까요?” 이 질문은 단지 기술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근대 이후 오랫동안 스스로를 기능으로 정의해 왔습니다. 이성, 생산성, 판단력, 효율성. 그런데 이제 AI가 그러한 기능을 인간보다 더 잘 수행할 수 있다는 사실 앞에서, 인간 존재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질문은 그다음에 있습니다. “기계가 더 잘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날수록, 인간은 어떤 존재로 다시 정의되어야 할까요?” AI는 기능을 복제할 수는 있지만, 인간의 전부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슬픔, 직관과 경외심, 그리고 “왜?”라고 묻는 능력은 단순한 계산이나 예측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AI는 문장을 조합하고, 문맥을 따라 음악을 만들지만, 인간은 그 음악에 자신의 인생을 투영합니다.
우리가 AI 앞에서 위협을 느끼는 이유는 기술 그 자체 때문이 아닙니다. 인간다움의 본질을 스스로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의 진짜 위기는 AI가 인간을 흉내 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너무도 쉽게 기계로 환원해 버리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 탐구의 출발점이 됩니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가?” 이 물음은 단순한 철학적 사유가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어떤 문명과 어떤 삶을 선택하게 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설계 질문입니다.

Q2. AI가 흉내 낼 수 있어도, 끝내 닿지 못하는 인간의 깊이는 무엇일까?
: 인간은 문제 너머 ‘의미’를 찾는 존재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가?”
기술이 정교해질수록 이 물음은 더욱 날카롭게 다가옵니다. AI는 인간의 많은 기능을 빠르게 흡수하고 있으며, 우리는 놀라울 만큼 쉽게 ‘대체’라는 말을 꺼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능이 전부는 아닙니다. 기계가 우리의 손과 뇌를 대신할 수는 있을지언정, 마음의 감정이나 존재의 방식까지 온전히 복제할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계산하는 존재가 아니라, 삶을 살아 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AI는 기쁨과 분노를 매우 그럴듯하게 표현합니다. 그러나 그 말의 이면에는 심장이 뛰는 감각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감정은 기억과 관계, 상처와 약속이 겹겹이 쌓여 형성된 체험입니다. 한 번의 사과가 늦어 마음을 깊이 후벼 파기도 하고, 누군가의 한마디가 오늘 하루를 견디게 하기도 합니다. 감정은 단순한 반응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꾸는 진폭입니다. AI는 예측할 수는 있어도, 아파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아프기 때문에 변화합니다.

인간은 서로의 삶에 빚을 지고 살아갑니다. AI의 위로는 친절하지만, 그 안에는 체온이 없습니다. 인간의 공감은 “당신을 이해합니다.”라는 말에 그치지 않고, “당신의 고통이 제 안에서도 아려 옵니다.”라는 감각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를 위해 시간을 내고, 손을 잡고, 때로는 자신의 삶의 습관을 바꾸게 됩니다.
관계는 데이터가 아니라 약속이며, 공감은 인간 사회를 지탱해 온 가장 오래된 뿌리입니다.
AI가 그림과 음악을 만들어 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학습된 것들의 재배열에 가깝습니다. 인간의 창작은 언제나 “왜?”라는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한 편의 시에는 한 사람의 슬픔과 사랑이 응축되어 있고, 한 폭의 그림에는 세계를 바라보는 단 한 번의 시선이 담겨 있습니다. 인간은 상실을 노래로 바꾸고, 상처를 이야기로 바꿉니다. AI는 조합하지만, 인간은 삶을 통해 의미를 만들어 냅니다.
인간다움의 가장 깊은 본질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고통 속에서도, 기쁨 속에서도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를 묻고 다시 일어서는 힘입니다. 기도하고, 깨닫고, 눈물을 흘리고, 다짐하며 자신의 존재를 갱신하려는 의식의 움직임은 AI가 흉내 낼 수 없는 내면의 사건입니다. 인간은 때로 이유 없이도 선善을 선택하고,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사랑을 지킵니다. 그 비합리성 속에 인간의 존엄이 깃들어 있습니다. 세계경제포럼이 미래 핵심 역량으로 감성 지능과 창의성, 호기심을 꼽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떤 존재로 살아갈 것인가’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인간 고유성은 AI가 하지 못하는 기능의 목록이 아니라, 인간만이 품을 수 있는 깊이와 변화의 이야기입니다. 더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인간은 문제를 푸는 존재가 아니라 의미를 살리는 존재입니다. 같은 사건 앞에서도 누군가는 절망하고, 누군가는 희망을 만들어 냅니다. 그 해석의 주체가 바로 인간입니다.
이제 질문은 더욱 깊어집니다. 그 깊이는 결국 인간 안에 깃든 신성神性의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기술이 높아질수록, 인간은 더 깊은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기계로 만들어 버릴지도 모릅니다. “그 신성은 어디에서 비롯되며, 어떻게 깨어나는 것일까요?” 이 물음이 우리를 증산도 진리의 길목으로 이끌어 주고 있습니다.

Q3. 이 거대한 AI의 물결을, 증산도 진리로 보면 무엇이 보일까?
: 기계선경에서 조화선경으로, 문명개벽의 문턱에서
“AI는 어디로 가고 있으며, 또 인간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요?
인공지능은 이제 인간처럼 말하고, 판단하고, 창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술의 성취 앞에서 감탄을 느끼는 동시에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을 함께 느끼고 있습니다. 이 변화는 너무도 빠르고 깊어, 때로는 숨이 막히는 듯한 감각마저 안겨 줍니다. 그러나 이 흐름을 단지 ‘기술의 진보’로만 이해한다면, 어쩌면 가장 얕은 해석에 머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것은 도구의 변화가 아니라, 문명 전체의 방향이 꺾이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증산도 『도전道典』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전해집니다.
“선천은 기계선경이요, 후천은 조화선경이니라.” (도전道典 7:8:3)
여기서 말하는 기계선경이란, 인간이 외적 기술의 힘으로 세상을 다스리려 했던 시대를 뜻합니다. 효율과 속도, 계산과 성과가 최고의 가치가 되었고, 사람은 점차 하나의 기능으로 환원되어 왔습니다. AI는 바로 이 문명의 정점에 서 있습니다. 인간이 해 오던 일을 대신 수행하고, 때로는 인간보다 더 정확하게 처리합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지점에서 새로운 질문이 시작됩니다. 기계가 모든 것을 더 잘해 낼수록, 인간은 무엇으로 남게 되는 것일까요?
증산도가 말하는 후천의 조화선경은 기술의 완성이 아니라 인간의 각성입니다. 『도전』은 후천을 인간이 신명과 하나 되어 만사를 아는 시대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많은 정보를 소유한다는 뜻이 아니라, 바르게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천지의 이치와 자신의 내면이 조화를 이루는 앎, 계산을 넘어선 통찰의 세계입니다. AI가 아무리 방대한 정보를 다룰 수 있다 하더라도, 삶의 고통을 끌어안고 윤리를 선택하며 존재의 의미를 묻는 앎은 오직 인간에게서만 나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AI는 결코 목적이 아닙니다. AI는 인간을 밀어내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을 시험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계가 극치로 발전할수록, 인간은 더 이상 기술로 자신을 증명할 수 없게 됩니다. 결국 남는 것은 마음의 깊이와 양심의 방향, 그리고 자기 안에 깃든 신성을 깨우는 일입니다.
후천 문명은 그렇게 깨어난 인간이 중심이 되는 세계입니다. 기술이 주인이 되는 문명이 아니라, 의식이 주인이 되는 문명입니다. 해원과 보은, 상생과 자비가 삶의 질서가 되는 인존 시대입니다. AI가 물질문명의 극치라면, 인간은 신성의 극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기계가 아니라, 그 사실을 잊어버린 인간 자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에필로그
: 우리는 왜 인간인가요?
AI가 글을 쓰고, 노래를 만들며, 사람처럼 말하는 시대에 이 질문은 다시금 우리 삶의 가장 깊은 곳을 조용히 건드립니다. 기계와 점점 닮아 가는 세상 속에서, 인간다움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기계는 우리보다 더 똑똑해질 수는 있을지언정, 우리 삶을 대신 살아 주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이 글을 통해 AI 시대의 변화 한가운데를 걸어오며, 인간의 본질을 하나씩 되짚어 보았습니다.
모든 경계가 무너지는 듯 보이는 시대 속에서도, 끝내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감정의 미세한 떨림이었고, 양심 앞에서 멈칫하게 되는 망설임이었으며, 타인의 고통 앞에서 마음이 흔들리는 공감이었고, 삶의 의미를 끝내 묻고자 하는 영성이었습니다. AI는 계산할 수 있지만, 인간은 괴로워하며 선택합니다. AI는 조합할 수 있지만, 인간은 사랑하고 책임집니다. 이 내면의 깊이는 기술이 끝내 닿지 못하는 자리입니다.
증산도는 인간을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천지와 연결된 존재이며, 신성과 하나 될 가능성을 지닌 존재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우연히 태어난 기능적 개체가 아니라, 우주의 뜻을 품고 살아가는 진리의 씨앗입니다. AI 시대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분명합니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물음입니다. 기술은 거대하지만 스스로의 방향을 갖고 있지는 않으며, 도구는 강력하지만 중심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 중심은 언제나 인간이며, 인간 안에 깨어 있는 의식입니다.
그러므로 기계문명이 몰고 온 거대한 파도를 두려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파도 위에서 방향을 잡아 주는 등불은, 바로 이 질문 앞에 서 있는 우리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부디, 그대 안의 빛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빛이야말로, 다가오는 새 문명의 길을 밝히는 등불이 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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