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의 도시, 로마

[열두 도시로 살펴보는 세계사]

이해영 전임기자 / 서울관악도장


서양인에게 로마는?



우리 대한 사람에게 환국, 배달, 고구려, 대진국(발해)과 단군조선의 수도 아사달이 던져 주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아마도 웅혼한 기상과 가장 찬란하고 위대한 제국의 역사, 우리가 되찾아야 할 고토 회복의 이미지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아니면 우리 민족이 기원한 곳으로 돌아가야 할 마음의 고향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만약 이탈리아의 ‘로마Rome(이탈리아어⋅라틴어: Roma)’를 대상으로 서양인들에게 유사한 질문을 한다면 어떤 답변이 나올까? 서양인들에게 이탈리아의 로마는 도시 이상의 의미를 준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역사적 의미를 살펴볼 때, 로마를 수도로 했던 로마 제국은 서양 문명의 뿌리로서 법, 정치, 건축, 언어 등의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문화적 상징으로 서양인에게 로마는 웅장한 콜로세움을 비롯한 로마 신화, 르네상스의 출발점 같은 이미지로 다가온다.

또한 정치적⋅철학적 유산으로 공화정, 시민권, 법치주의 같은 개념은 현대 서양 민주주의의 기반이 되었다. 종교적 중심지로서 가톨릭교회의 본산인 ‘바티칸’은 서양 종교 문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로마는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 서양인의 정체성과 세계관을 형성한 근원적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는 세계를 세 번 정복했다



“로마는 세계를 세 번 정복했다.”라는 말이 있다. 독일의 저명한 법학자 루돌프 폰 예링Rudolf von Jhering이 했다는 이 말은 크게 세 분야에서 현재까지도 로마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첫 번째로 로마는 단순한 도시국가에서 출발해 지중해 전역을 “우리들의 바다(Mare Nostrum)”라 부를 정도로 장악했다. 지중해 연안의 지역을 포함해 유럽과 소아시아 일대를 실제로 지배했고 다른 곳을 속주로 간접 지배했었다. 이는 군사적 정복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기독교가 로마를 통해 제도화되면서 서양인의 가치관과 윤리관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는 정신적 정복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중세에 계승되어 현재 서양 법의 근간을 제공하는 로마법 체계를 마련한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를 비롯한 현대 법률은 모두 로마법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다수의 나라들은 로마법을 뿌리로 하는 대륙법大陸法 계통의 법전(성문법成文法)을 사용하고 있다(일관된 법전이 아닌 판례 중심의 불문법不文法을 채택하는 나라는 영국과 미국 등으로 이를 영미법계英美法系라고 한다). 이는 제도적 정복이라 할 수 있다.
군사적⋅정신적⋅제도적 측면에 걸친 로마의 ‘세 번의 정복’은 단순한 과거 사건이 아니라 현대 세계 질서와 사고방식의 토대로 이어지고 있다.


역사상 로마는 세 번 존재했다.



역사상 로마 제국은 세 번 있었다. 왕정에서 시작한 로마 제국은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즉위로 제국이 되었다가 서기 476년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서 ‘서로마 제국’은 멸망하고, 당시 콘스탄티노플에 있다가 1453년 멸망한 ‘동로마(비잔틴) 제국’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로마와는 상관없이 독일 지역을 중심으로 했던 ‘신성로마 제국’까지. 서양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 세 번의 제국에 대한 이해는 필요하다.


시작은 미미했던 로마




이탈리아 수도 로마는 이탈리아반도 서쪽에 펼쳐진 지중해 중부 티레니아해로 흘러드는 테베레Tevere강의 하구에서 25킬로미터쯤 거슬러 올라간 동쪽 강가에 자리 잡고 있다.

건국 신화에 따르면, 전쟁의 신 마르스와 알바롱가의 공주 레아 사이에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인 로물루스Romulus와 레무스Remus가 테베레강에 버려지자 지나가던 암컷 늑대에게 건져져 키워졌고 이후 양치기 파우스툴루스Faustulus가 둘을 발견해 키웠다고 한다. 이후 도시를 세울 자리를 두고 언쟁을 벌이다가 급기야 전쟁을 벌였고, 로물루스가 레무스를 제거하고 팔라티노 언덕에서 기원전 753년 4월 21일에 로마를 세웠다고 한다. 로마라는 이름은 이 로물루스에서 기원했다고 하는데, 이 로물루스란 말 자체가 ‘로마의 사람’이기 때문에 이상한 점은 있다.

여하튼 로물루스는 조세와 징병을 위해 시민들을 세 개 부족으로 나누고, 친위대인 켈레레스를 창설하고, 여성 인구 부족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사비니 여인들을 약탈하는 등 초기 로마라는 국가 기틀을 세웠다. 로물루스는 재위 37년째 되던 해 실종되었는데, 귀족들에게 암살되었다는 설도 있고, 퀴리누스Quirínus라는 신이 되어 승천했다고 한다. 퀴리누스는 ‘창을 든’이라는 뜻이다.


일곱 개 언덕에서 발전하는 로마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실제적인 로마의 시초는 기원전 10~9세기 팔라티노 언덕에 라틴인이 집단으로 거주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은 다른 언덕에 정착한 사비니인을 공격했고 이후 로마 시민으로 편입시켰다. 기원전 7세기가 되자 이탈리아 중부 지역을 거점으로 삼은 에트루리아인이 세력을 확장하며 로마에 영향을 끼쳤다.

기원전 616년에는 에트루리아인 타르퀴니우스Tarquinius가 로마 왕의 양자가 되어 왕위를 이어받았다. 에트루리아인은 고도의 금속 가공 기술과 토목 기술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주변의 일곱 개 언덕을 천연 방어벽으로 삼고 로마를 발전시켰다. 오늘날 로마의 일곱 언덕 중 아벤티노Aventino 언덕, 첼리오Celio 언덕, 에스퀼리노Esquilino 언덕, 퀴리날레Quirinale 언덕, 비미날레Viminale 언덕의 다섯 언덕은 모두 기념물, 건물, 공원이 있는 장소로 변모해 있다. 카피톨리노Capitolino 언덕에는 로마 시청이 있고, 팔라티노Palatino 언덕은 주요 고고학 유적지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또한 언덕 사이의 평지를 광장으로 만들어 그곳에 신전과 집회소를 세웠고 하수도를 정비하고 약 10킬로미터에 달하는 ‘세르비우스Servius 성벽’을 쌓아 도시를 에워쌌다. 공화정⋅제정 로마의 수도다운 도시 구조의 원형은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로마는 건국 초부터 지도자층의 입법 자문기관인 원로원, 즉 세나투스Senatus가 존재했는데, 기원전 509년 원로원과 협의 없이 제멋대로 권력을 휘두르던 에트루리아인 왕이 분노한 로마 시민들에 의해 추방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로마 공화정共和政이 시작되었다.


가장 오래된 콘크리트와 상하수도, 가도街道로 건축된 도시




점점 내정을 안정시키며 세력을 확장한 로마는 기원전 264년에서 기원전 146년 사이 100여 년간 카르타고Carthago와 지중해 패권을 놓고 세 차례에 걸쳐 벌인 포에니Poeni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리고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함을 넘어서 지중해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점령한 지역에는 속주를 설치하며 번영을 구가했다.

공화정 시대 로마는 도시 기반 시설을 정비하며 적극적으로 도시 개발을 추진했다. 테베레강 강가에는 항만 시설과 밀 저장고를 지었는데, 이 건물들은 천연 시멘트를 이용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콘크리트 건축물이다. 중앙 광장에는 원로원 의사당과 농업의 신 사투르누스Saturnus를 모시는 신전을 세웠고, 주변은 상점이 들어섰다.

기원전 312년에는 정치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Appius Claudius Caecus에 의해 전체 길이 16.5킬로미터에 달하는 로마 최초의 수로 ‘아피아Appia 수도水道’가 건설되었다. 이후에도 로마는 도시의 확장과 함께 상하수도를 계속 증설해 나갔다.


모든 길은 로마로



그리고 로마를 중심으로 각지에 방사선 모양으로 뻗은 군용 도로인 ‘아피아Appia 가도街道’도 이즈음에 건설되기 시작했다. ‘모든 길은 로마로’란 말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로마는 점령한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신속한 군사 이동과 물류 이동을 중요시했는데, 이는 로마라는 나라가 얼마나 적극적이고 개방적인 모습을 지녔는지 알려 준다.

기원전 88년 이탈리아반도 전역의 자유민에게 시민권이 부여되었고 평민들의 발언권이 커졌다. 이때 로마는 도시국가에서 로마와 동등한 권리를 가진 도시들을 포함하는 영역 국가가 되었다. 한편 원로원元老院과 평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호민관護民官의 대립이 나타나게 되었고, 원로원의 귀족들은 권력 과시를 위해 유피테르Jupiter(그리스 신화의 제우스Zeus에 해당) 신전과 국가 공공 건축물을 짓고 로마의 도시 경관을 바꾸었다.


공화정에서 제정帝政으로




이후 로마의 세력은 지중해 연안뿐 아니라 소아시아와 지금의 유럽 내륙까지 확장되었다. 늘어나는 세력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공화정보다는 제정帝政을 더 필요로 하는 시점이 된 것이다. 이때 카이사르Caesar, 폼페이우스Pompeius, 크라수스Crassus가 ‘제1차 삼두三頭 정치’를 실시했고, 폼페이우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카이사르의 독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불과 2년 만에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양자 옥타비아누스Octavianus가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제2차 삼두 정치’를 실시했으며, 카이사르의 부관 출신인 안토니우스Antonius와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Cleopatra의 연합 세력을 악티움Actium 해전에서 승리하면서 무너트리고, 권력을 잡았다. 이후 그는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칭호를 받으며 기원전 27년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었다. 이제 로마는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가면서 그 세력이 더 확장되어 갔다.


로마 제국의 수도, 100만 인구를 지탱하다




아우구스투스는 “벽돌로 지어진 로마를 이어받아 대리석의 도시로 남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의사당, 신들을 모신 판테온Pantheon(만신전萬神殿), 극장과 같은 건축물의 건설 사업을 벌이는 한편, 로마를 14구로 나누는 등 도시 정비를 추진했다.

이후 로마 황제들은 권력을 과시하고 시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공공 건축물을 건설했다. 약 5만 명(수용할 수 있는 인원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음) 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 경기장 ‘콜로세움Colosseum’은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 황제 때 착공되어 기원후 80년에 티투스Titus 황제 때 완성되었다. 이곳에서 로마 시민은 오락거리 삼아 검투사 노예들의 싸움을 관람했다.

이 무렵 로마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기원전 300년경 3만 명 정도였던 인구가 기원후 14년경에는 80만 명, 164년경에는 100만 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급격하게 늘어난 인구로 인해 로마시는 세르비우스 성벽 밖으로 확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3세기 아우렐리아누스Aurelianus 황제 때는 세르비우스 성벽의 바깥에 시가지를 에워싸듯이 전체 길이 19킬로미터의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을 새롭게 축조하여 신시가지를 완성했다.

로마에 100만 명 이상의 많은 사람이 거주할 수 있었던 이유는 수도水道가 갖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312년 아피아 수도를 필두로 해서 기원후 226년 안토니니아나Antoniniana 수도까지 총 열한 개의 수도를 건설했고, 하루에 약 110만 세제곱미터 이상의 물을 공급했다. 이 물은 식수로 이용되었을 뿐 아니라 공중목욕탕(테르마이thermae)에도 공급되었다. 4세기 로마에는 크고 작은 목욕탕이 900개 정도 있었다고 한다.

귀족과 같은 부유층은 도심에 넓은 부지의 단독 주택(도무스domus)을 소유했지만, 대다수 평민은 ‘인술라insula’라는 7층 정도 되는 고층 공동 주택에서 살았다. 로마 시내는 인구 과다로 건물이 빽빽이 밀집한 상태였다.

이윽고 64년 폭군 네로Nero 황제 시대에 로마에서 큰 화재가 발생했다. 불은 삽시간에 번졌고 소화용 물을 확보하지 못해 진화가 늦어지면서 로마는 7일 동안 계속 불타올랐다. 대화재 후 네로는 도시 재건에 나섰다. 도로의 폭을 넓히고 목조 건물을 금지했으며, 인술라에는 반드시 중정中庭(가운데뜰)을 갖추게 하는 등 화재를 대비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수도 이전과 게르만족에 의한 피해




로마는 다섯 명의 현명한 황제 시대인 오현제五賢帝(네르바Nerva → 트라야누스Trajanus → 하드리아누스Hadrianus →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시기에 ‘팍스 로마나Pax Romana(로마에 의한 평화)’라 불리는 최전성기를 맞았다. 트라야누스 황제 때는 서유럽 대부분을 차지했고, 남쪽으로 북아프리카 대륙, 동쪽으로 메소포타미아까지 판도를 확장했다.

하지만 이 시대를 정점으로 로마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오현제 이후 50년간 열여덟 명(공동 통치자를 더하면 스물여섯 명)의 군인 출신 황제가 번갈아 황위에 오르는 군인 황제 시대를 거치며 내정이 몹시 불안했다. 이 상황에 마침표를 찍은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황제는 이대로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293년에 로마 제국을 동서로 나눠 각각 정•부 황제를 두는 ‘사두四頭 정치(테트라키아Tetrarchia)’ 체제를 시작했다.

그 후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황제가 제국을 재통일하고 수도를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현재의 이스탄불)로 옮겼다. 이때부터 콘스탄티노플은 ‘제2의 로마’로 불리게 되었다. 또한 313년에 반포한 ‘밀라노Milano 칙령’에 따라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가 공인되었고, 392년에는 로마의 국교로 제정되었다. 395년,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황제는 죽기 전에 두 아들에게 영토를 나누어 주었다. 이에 따라 밀라노를 수도로 하는 ‘서로마 제국’과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하는 ‘동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이 성립했다. 이제 로마는 서로마 제국에 속한 한 도시로 전락했다.


서로마 제국 멸망과 로마 교황령의 시작



이 무렵 서로마 제국은 동방 훈족의 압박으로 시작한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인해 혼란이 계속되었고, 로마도 역시 그 영향을 받았다. 410년에는 게르만계 서고트족에게 약탈당했고, 455년에는 역시 게르만계인 반달족에게 건축물과 기반 설비가 파괴되는 심각한 피해를 보았다. 476년, 결국 서로마 제국은 멸망한다. 이후 로마는 게르만인 용병대장 오도아케르Odoacer의 지배를 거쳐 게르만인의 동고트 왕국에 점령당했다. 그 후 동로마 제국이 로마를 지배하에 두었지만, 그들에게 로마는 더 이상 중요한 곳이 아니었다.

8세기 중반, 로마가 게르만계 랑고바르드족의 위험에 노출되자 로마 교황은 미덥지 않은 동로마 제국이 아니라 침략자와 같은 게르만족인 프랑크 왕국에 도움을 청하였다. 원래 로마 교황(4세기 말부터 교황敎皇이라는 칭호를 사용)은 각지의 교구를 감독하는 주교 중 하나였지만,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면서 점차 로마 가톨릭교회 최고위 성직자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로마 교황의 요청에 응한 프랑크 왕국의 피핀Pippin 3세는 로마를 침략한 랑고바르드족을 격퇴하고, 획득한 영지를 로마 가톨릭교회에 헌납했다(756년). 이리하여 로마는 이탈리아 중부의 독립 세력, 즉 로마 교황령의 중심 도시가 되었다.


로마의 몰락과 르네상스기의 부흥



9세기에 프랑크 왕국이 분열하고 이탈리아 왕국이 성립했지만, 이탈리아 왕국은 약 80년 만에 붕괴했다. 신성로마 제국의 지배하에서 베네치아와 제노바 등의 도시국가가 번영하는 한편, 교황령은 독립을 유지했다. 이런 와중에 로마시에 있는 콜로세움과 극장은 이교와 관련한 건축물이라는 이유로 방치되었다. 중세 시대에 로마는 교황과 각국 군주와의 투쟁으로 농락당했다. 13세기 교황 인노첸시오Innocentius 3세 시대에 교황의 권력은 절정을 맞지만, 14세기에는 프랑스 왕에 의해 교황청이 강제적으로 이전될 정도로(아비뇽Avignon 유수幽囚) 교황의 권위가 추락했고 로마도 피폐해졌다.

한편 14세기 이탈리아반도에서 고전 문화 부흥 운동, 즉 르네상스Renaissance가 시작되었고 이에 로마도 영향을 받았다. 로마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교황 니콜라오Nicolaus 5세는 ‘비르고Virgo 수도水道’를, 교황 식스토Sixtus 4세는 ‘시스토Sisto 다리’를 재정비했다. 현재 로마에서 볼 수 있는 교회나 교회를 장식한 회화와 벽화 등의 예술 작품이 탄생한 것도 이 시기다. 2만 명 남짓했던 로마의 인구는 이 무렵 약 5만 명까지 증가했다.


로마 약탈과 스위스 용병




잠시 고대 로마와 같은 번영의 분위기가 되살아난 듯했지만, 로마는 1527년에 신성로마 제국 군대의 공격을 받게 된다(로마 약탈). 도시 로마가 있는 이탈리아는 과거 찬란했던 로마 제국의 문명과 정신이 깃든 곳으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로마 제국의 정통성을 계승한 지도 국가의 지위를 공인받기 위해서 상징적 의미가 있는 이탈리아 반도를 차지하려 했다. 또한 유럽이 가톨릭화되면서 교황청이 있는 로마가 가톨릭 문화와 정신문명의 중심지가 되어 갔다.

이런 분위기로 인해 이탈리아반도는 유럽 각국이 패권을 다투는 각축장으로 변해 갔다. 그러나 정작 이탈리아반도는 십여 개의 작은 도시국가로 분열되어 있어 외세 침략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혼란만 거듭하고 있었다.

교황 클레멘스Clemens 7세(재위 1523~1534)의 재위 초반 유럽은 신성로마 제국과 프랑스 두 강대국 간의 패권 다툼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계속 이어졌다. 특히 이탈리아반도 내에서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두 강대국이 크게 대립하고 있었다. 자존심이 걸린 다툼으로 비추어지기도 한 이 싸움은 16세기 전반기에 출현한 신성로마 제국의 젊은 황제 카를Karl 5세(1500~1558)와 프랑스의 프랑수아François 1세(1494~1547) 간에 주로 벌어졌다. 클레멘스 7세는 이탈리아에서 카를 5세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군사 동맹을 결성하기 시작했고 그 여파로 신성로마 제국이 이탈리아를 침략하게 되었다.

그 무렵 가톨릭교회는 로마 부흥의 상징인 성聖베드로 대성당 재건을 계획하면서 막대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이른바 ‘면죄부免罪符’를 남발했다. 이러한 행위는 루터Luther의 종교 개혁을 촉발했는데, 대부분 루터의 가르침을 신봉하던 신성로마 제국의 병사들은 성도聖都 로마를 무차별적으로 약탈하고 파괴했다. 이 과정에서 다른 나라 용병들은 모두 도망갔지만, 스위스 출신 용병은 끝까지 교황을 지켰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한 이들의 용맹함으로 인해 이후 주로 스위스 용병 출신들이 교황청 근위대에 기용되는 전통이 생겨났다.

이때 로마의 인구는 약 3만 명으로 급감했다. 16세기 후반에 교황 식스토Sixtus 5세는 도시 계획을 수립하여 주요 교회와 광장을 잇는 직선 도로를 정비하고 고대 로마의 수도를 복원해서 물이 부족한 지역에 충분히 공급되도록 했다. 그 후 로마는 크게 쇠퇴하지도 발전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을 보내게 된다.


‘무방비도시(비무장도시)’ 로마



18세기 말에 유럽은 크게 변동한다. 프랑스혁명을 계기로 전격적으로 등장한 나폴레옹Napoléon이 프랑스 황제에 오르고 유럽 전 영역에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에 1809년에 교황령은 프랑스 제국에 일시적으로 병합된다. 프랑스혁명의 여파로 이탈리아반도에서는 통일 운동이 활발해졌고, 1861년에 사르데냐 왕국이 이탈리아 왕국을 수립했다. 수도는 토리노Torino, 피렌체Firenze를 거쳐 1870년 왕국에 병합된 로마Roma로 정해졌다. 이 무렵 로마의 인구는 약 20만 명이었고, 교회 이외의 시설은 부서진 옛 건축물, 과수원, 창고와 귀족의 주택 정도밖에 없었다. 그래서 왕국 정부는 청사, 병원, 공원과 같은 공공시설의 건설을 급속하게 추진했고 새로운 도로를 정비하는 등 구획 정리를 실시했다. 이때 중세 시대 이후의 로마 구시가지 거리 풍경이 사라지게 되었다.

1918년에 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스트당의 독재 정치가 시작되었다. 정권을 장악한 무솔리니Mussolini는 로마의 근대화를 내세우며 ‘로마 개조 계획’을 가동했다. 도시 계획이 실행되면서 로마는 중세 이후의 거리 일부를 잃었지만, 이탈리아의 수도가 되었고 이후 발전을 거듭하여 1936년에 인구 100만 명을 돌파했다.

1939년에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이탈리아는 문화재 보호를 주목적으로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등 세 도시를 교전의 의도가 없다는 ‘무방비 도시(비무장 도시)’로 선언했다. 이 덕분에 로마는 독일군에 점령당했지만, ‘로마 약탈’ 때와 같은 파괴를 면할 수 있었다. 1945년에 전쟁이 끝난 후 이탈리아는 왕정을 폐지했고 다음 해에 공화정 국가가 되었다. 로마는 계속해서 수도로 남았다.

로마는 ‘영원의 도시’로 불린다. 이는 단지 고대 로마의 유산을 보존하고 있어서가 아니다. 로마 제국의 붕괴 이후 여러 차례 침공을 받아 파괴되었지만, 그때마다 꿋꿋이 재건과 발전을 거듭해 왔기 때문에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다. ■


도시 안의 나라, 바티칸 시티Vatican City

전 세계 가톨릭의 총본산이 위치한 도시국가 바티칸 시국(Status Civitatis Vaticanæ), 통칭 바티칸(Vaticanus)은 역사적 및 전통적으로 로마의 일부로 여겨진다. 바티칸 영토의 전체를 차지하고 있어 사실상 바티칸시가 곧 바티칸이라는 국가나 마찬가지이다. 다만 바티칸시 외에도 로마에는 바티칸의 역외 영토가 있는데, 교황좌敎皇座가 위치한 라테라노 대성당(Basilica di San Giovanni in Laterano)이 대표적이다.

면적 0.44제곱킬로미터의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인 바티칸은 국가로서의 역사가 그리 길지는 않다. 본래 바티칸 언덕은 고대 로마 시가지의 일부였다. 지금의 영역은 1929년 이탈리아와 로마 교황청 사이에 체결된 라테라노 조약(Patti Lateranensi) 이후에 형성됐다.

본디 로마의 바티카누스 언덕은 로마 외곽의 꽤 넓은 영역이었다. 개발 이전의 서울 강남 지역처럼 원래 바티칸은 로마에서 테베레강 너머에 있는 보잘것없는 지역이었다. 여기에 전차 경주장이 있었고, 주로 무덤으로 사용되었으며, 기독교인도 이곳에 상당수가 마구잡이로 매장된 탓에 훗날 기독교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인 394년 황제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1세 시대에 베드로의 무덤이 있다고 믿어지는 이 장소에 성聖베드로 대성당이 건축되었다. 이 대성당 옆에 바티칸 궁전이 있는데, 여기에 로마 교황이 거주하고 있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756년 카롤링거 왕조의 피핀 3세가 바티칸을 포함한 라벤나 지역을 헌납했을 때부터 로마 가톨릭교회의 총본산으로 자리 잡았다.


〈참고문헌〉
* 『30개 도시로 읽는 세계사』, 조 지무쇼 저자(글)⋅최미숙 번역⋅진노 마사후미 감수, 2020, 다산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