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 원주인의 실체를 가리는 것은 심각한 오류”
[『이것이 개벽이다 상上』 강독]
전기훈 / 대구대명도장 상임수호사
「요한계시록」 4장 5절에는 “보좌 앞에는 일곱 등불이 불타고 있었으니, 그것들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보병궁 복음서』 9편 18~19장에는 “#세 분의 하나님#이 숨을 내쉬자, 일곱 영靈이 보좌 앞에 섰다. 이들은 엘로힘이며, 우주의 창조 영들이다.”라는 내용이 있고, 9편 14장에는 “일(1) 수이시며, 삼(3) 수이시며, 칠(7) 수이신 하나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기독교는 절대 유일신의 종교가 아닙니다.
동방에서도 하나님을 삼신님, 칠성님 등으로 불러 왔습니다. 더 나아가 『보병궁 복음서』 133장 6절에서는 “하나님은 십이시며….”라고 하며, 하나님의 다면성과 복수적 속성을 강조합니다.
고대 유대인의 신앙은 원래 다신적이었습니다. 군신軍神이었던 야훼는 여러 신들 중 하나였을 뿐입니다. 하지만 특정한 민족과 계약을 맺으면서 최고신으로 추앙되고, 야훼 외에는 전부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관唯一神觀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 점에서 동방 철학, 특히 「천부경天符經」은 흥미로운 통찰을 제공합니다.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 석삼극析三極 무진본無盡本”이라는 구절은 하나(일)가 세 가지 구조를 가질 때 비로소 그 의미와 역할을 갖게 된다는 원리를 말합니다. 그것은 필연이라는 것이고, 완벽한 논리를 뛰어넘은 초논리로서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신약新約』 성경에는 이와 같은 체계적 신학이 명확히 정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하나님으로, 혹은 하나님과 유사한 존재로 여깁니다. 결국 예수를 중심으로 신앙 체계가 형성되었고,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믿음은 점점 더 강조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일까요? 성부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주로서 원신元神, 자연신自然神이며, 동시에 실제 우주를 통치하시는 인격신, 즉 주신主神의 성격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부 하나님의 두 얼굴입니다. 동방에서는 이를 삼신三神, 삼신일체상제三神一體上帝님이라는 개념으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죠.
서양 신학은 이처럼 다면적인 하나님의 존재를 체계적으로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성부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이해가 부족하였고, 하나님은 얼굴 없는 존재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 요한은 계시 속에서 하나님을 흰 보좌에 앉은 인격적 존재로 묘사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관을 회복시키려 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신앙 체계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의문 중 하나는 성령이 어디서 오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동방과 서방 교부들은 성령이 성부 하나님에게서 나온다고 규정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서방 교회에서는 성자 예수 또한 성부와 유사한 위격이라면, 성령 역시 성자에게서도 나올 수 있지 않느냐는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이 논쟁이 ‘필리오케Filioque’ 문제입니다. 필리오케란 라틴어로 ‘그리고 성자로부터’라는 뜻으로, 서방 교회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 양쪽으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하며 신조信條를 수정했습니다.
이 문제는 동방 정교회와 서방 가톨릭 교회의 분열을 초래하는 결정적인 신학적 갈등이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두 교회 사이의 분명한 차이로 남아 있습니다. 서방 교회는 삼위일체의 각기 다른 역할을 강조하는 반면, 동방 교회는 아버지 중심의 삼위일체를 강조합니다.
「요한계시록」 1장 8절에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라는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상제님께서 “나는 천지와 더불어 동행하노라.”(도전道典 9:76:5)라고 하신 말씀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즉, 진정한 본래의 아버지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늘 함께 존재해 오셨으며, 장차 인간으로 강세하실 수 있는 권능을 지닌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예수님의 재림再臨을 기다리며,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희미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예수는 “너희는 인자가 권능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 것을 보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가 아버지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있는 존재, 즉 보좌의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그 보좌 곁의 인격적 대행자임을 시사합니다.
예수는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예수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한 인격적 사명을 지닌 존재였음을 나타냅니다. 그는 하늘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는 중개자였습니다.
결국 예수 복음의 진정한 가치는 아들의 시대가 끝난 후 아버지 하나님이 친히 오신다는 것을 선포한 데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아버지 하나님이 직접 등장하시는 장면들이 묘사되며, 이는 단순한 예수의 재림이 아닌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도래함을 상징합니다.
예수 재림 사상은 사도 바울이 중심이 되어 정립한 교리로, 실제 예수께서 직접 강조하신 부분은 아닙니다. 예수는 늘 아버지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며 자신은 그분이 보내신 아들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가 전한 복음이 ‘아들의 시대’에 국한된 것이며, 아버지의 강세와 그 구원의 완성은 아직 펼쳐지지 않은 ‘성약成約 시대’에 속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합니다. 예수는 아버지 하나님이 오심을 알리는 선구자적 역할을 했으며, 예수 복음의 궁극적 완성은 아버지 하나님의 강세와 그분의 인류 구원 역사에서 비로소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7년이라는 기간은 우연히 설정된 숫자가 아닙니다. 동방의 정신세계에서 ‘7’은 성숙 직전의 최대 분열 정신, 칠오화七五火를 말하는 것입니다.
첫째, 아마겟돈이라는 대전쟁으로 러시아 동맹군, 북방 왕, 아랍 군대 등이 이스라엘을 침공하며 전 세계적인 전쟁이 발발합니다.
둘째, 대병겁으로 「요한계시록」에서는 푸르스름한 말을 탄 ‘죽음’이 등장하며, 칼(sword), 굶주림(famine)과 역병(plague)의 권한으로 인류에게 재앙을 가져다줍니다.
셋째, 천지와 일월성신의 큰 이변으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지리라.”(마태복음 24:2)라는 천체의 흔들림, 섬의 소멸, 산의 붕괴, 대지진 등 지구 전반의 파괴적 현상입니다.
이러한 천지 대변혁은 단순한 종말이 아닌, 새로운 창조를 위한 과정입니다.
현재 많은 기독교인들은 천국을 죽은 뒤에 가는 하늘의 공간으로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왕국은 이 땅 위에 건설되어야 할 실제적인 실체입니다. 하지만 기독교 전통에서는 아버지를 인격적 존재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간으로 오실 수 없다는 관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만약 천국이 하늘에만 건설될 예정이었다면 굳이 ‘새 하늘’뿐만 아니라 ‘새 땅’까지 창조할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표현은 곧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짐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실까요?
「요한계시록」 7장에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동방에서 올라온 천사가 등장하며,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印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를 해하지 말라 하더라.”(요한계시록 7:3)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인을 받은 이들이 14만 4천 명(요한계시록 7:4)으로 상징되는데, 이는 구원의 완성수로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선택된 구도자 집단을 의미합니다.
“이마에 하나님의 인장으로 표시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치라고 하더라.”(요한계시록 9:4)라는 명령은 하나님의 인이 재난과 환란 가운데서 보호받는 구원의 표임을 시사합니다. 계시록은 “이들은 대환란에서 나온 사람들이며 자기들의 옷을 씻어 어린양의 피로 희게 하였느니라.”(요한계시록 7:14)라고 설명합니다. 이들은 오랜 세월 시련과 고난, 진리 추구의 여정을 견뎌 낸 구도자들입니다.
이 구도자들은 단순히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주체로 등장합니다. 「요한계시록」의 큰 무리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구원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요한계시록 7:10)라고 선포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는데 …….”(요한계시록 21:2)라고 묘사한 부분과 “하나님의 성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어 그분께서 그들과 함께 거하시리니 …….”(요한계시록 21:3)라는 구절은 하나님이 이 땅에서 인류와 함께하실 것임을 선언한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적 임재臨在(presence)는 하나님의 인격성과 강세를 상징합니다.
이어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만드노라.”(요한계시록 21:5)라는 선언과 함께, 14만 4천 명이 부르는 ‘새 노래’가 언급됩니다. 그런데 ”땅에서 구속救贖을 받은 14만 4천 명 외에는 그 노래를 배울 사람이 없더라.”(요한계시록 14:3)라고 합니다. 이 새 노래는 구원과 통일의 진리를 상징하는 신성한 메시지입니다.
기독교 세계관의 본질은 직선적 시간관이 아니라 순환적 시간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태고의 황금시대, 그 후의 타락과 퇴보, 그리고 구원 이후의 천국은 다시 황금시대로의 복귀입니다.
스페인의 대철학자 미겔 데 우나무노Miguel de Unamuno는 “기독교는 성자의 종교이지, 성부의 종교가 결코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쌍어궁 시대의 종교이지, 보병궁 시대의 종교가 아니라는 통찰을 보여 준 것입니다. 이는 기독교가 그 시대적 사명을 다했으며, 이제 새로운 시대에는 다른 영적 틀이 필요하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꾸짖음이 아니라, 잘못된 신앙 해석과 전달이 천지의 근본 질서를 어지럽히는 큰 오류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지만, “독생자 예수만이 전부이다.”라고 오도誤導함으로써 백보좌 위에 앉으신 아버지 하나님, 즉 천지 원주인의 실체를 가리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가장 심각한 오류입니다. ■
본 기사는 2024년 7월부터 시행된 삼랑대학 교육 내용을 정리해 연재하는 강좌입니다. 『이것이 개벽이다 상上』 개정판의 특강 형식으로 진행된 교육이며, 이번 호에서는 제3부 2장 두 번째 내용을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註]
3부 선천 종교의 구원관과 상제님 강세 소식
2장 예수와 백보좌의 아버지 하나님 (2)
기독교는 유일신의 종교인가
「요한계시록」 4장 5절에는 “보좌 앞에는 일곱 등불이 불타고 있었으니, 그것들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보병궁 복음서』 9편 18~19장에는 “#세 분의 하나님#이 숨을 내쉬자, 일곱 영靈이 보좌 앞에 섰다. 이들은 엘로힘이며, 우주의 창조 영들이다.”라는 내용이 있고, 9편 14장에는 “일(1) 수이시며, 삼(3) 수이시며, 칠(7) 수이신 하나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기독교는 절대 유일신의 종교가 아닙니다.
동방에서도 하나님을 삼신님, 칠성님 등으로 불러 왔습니다. 더 나아가 『보병궁 복음서』 133장 6절에서는 “하나님은 십이시며….”라고 하며, 하나님의 다면성과 복수적 속성을 강조합니다.
다양한 인격신을 섬긴 고대의 유목 민족
이러한 다신적 또는 복수 신격적 관점은 성경에도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엘로힘(히브리어로 신神 또는 신神들)’이라 불리는데, 이 단어 자체가 복수형입니다. 또한 창조 시 참여한 존재들은 일곱 영으로 묘사되며, 이는 단일한 존재가 아닌 신적 공동체를 시사합니다. 기독교는 실제로 유일신 종교라기보다는 복수의 신적 요소를 내포한 복합적 신관을 지닌 종교입니다.고대 유대인의 신앙은 원래 다신적이었습니다. 군신軍神이었던 야훼는 여러 신들 중 하나였을 뿐입니다. 하지만 특정한 민족과 계약을 맺으면서 최고신으로 추앙되고, 야훼 외에는 전부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관唯一神觀으로 바뀐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관
이 점에서 동방 철학, 특히 「천부경天符經」은 흥미로운 통찰을 제공합니다.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 석삼극析三極 무진본無盡本”이라는 구절은 하나(일)가 세 가지 구조를 가질 때 비로소 그 의미와 역할을 갖게 된다는 원리를 말합니다. 그것은 필연이라는 것이고, 완벽한 논리를 뛰어넘은 초논리로서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신약新約』 성경에는 이와 같은 체계적 신학이 명확히 정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하나님으로, 혹은 하나님과 유사한 존재로 여깁니다. 결국 예수를 중심으로 신앙 체계가 형성되었고,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믿음은 점점 더 강조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일까요? 성부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주로서 원신元神, 자연신自然神이며, 동시에 실제 우주를 통치하시는 인격신, 즉 주신主神의 성격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부 하나님의 두 얼굴입니다. 동방에서는 이를 삼신三神, 삼신일체상제三神一體上帝님이라는 개념으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죠.
서양 신학은 이처럼 다면적인 하나님의 존재를 체계적으로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성부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이해가 부족하였고, 하나님은 얼굴 없는 존재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 요한은 계시 속에서 하나님을 흰 보좌에 앉은 인격적 존재로 묘사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관을 회복시키려 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신앙 체계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의문 중 하나는 성령이 어디서 오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동방과 서방 교부들은 성령이 성부 하나님에게서 나온다고 규정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서방 교회에서는 성자 예수 또한 성부와 유사한 위격이라면, 성령 역시 성자에게서도 나올 수 있지 않느냐는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이 논쟁이 ‘필리오케Filioque’ 문제입니다. 필리오케란 라틴어로 ‘그리고 성자로부터’라는 뜻으로, 서방 교회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 양쪽으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하며 신조信條를 수정했습니다.
이 문제는 동방 정교회와 서방 가톨릭 교회의 분열을 초래하는 결정적인 신학적 갈등이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두 교회 사이의 분명한 차이로 남아 있습니다. 서방 교회는 삼위일체의 각기 다른 역할을 강조하는 반면, 동방 교회는 아버지 중심의 삼위일체를 강조합니다.
「요한계시록」 1장 8절에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라는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상제님께서 “나는 천지와 더불어 동행하노라.”(도전道典 9:76:5)라고 하신 말씀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즉, 진정한 본래의 아버지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늘 함께 존재해 오셨으며, 장차 인간으로 강세하실 수 있는 권능을 지닌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예수님의 재림再臨을 기다리며,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희미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예수는 “너희는 인자가 권능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 것을 보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가 아버지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있는 존재, 즉 보좌의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그 보좌 곁의 인격적 대행자임을 시사합니다.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했는가
예수는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예수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한 인격적 사명을 지닌 존재였음을 나타냅니다. 그는 하늘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는 중개자였습니다.
결국 예수 복음의 진정한 가치는 아들의 시대가 끝난 후 아버지 하나님이 친히 오신다는 것을 선포한 데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아버지 하나님이 직접 등장하시는 장면들이 묘사되며, 이는 단순한 예수의 재림이 아닌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도래함을 상징합니다.
예수 재림 사상은 사도 바울이 중심이 되어 정립한 교리로, 실제 예수께서 직접 강조하신 부분은 아닙니다. 예수는 늘 아버지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며 자신은 그분이 보내신 아들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가 전한 복음이 ‘아들의 시대’에 국한된 것이며, 아버지의 강세와 그 구원의 완성은 아직 펼쳐지지 않은 ‘성약成約 시대’에 속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합니다. 예수는 아버지 하나님이 오심을 알리는 선구자적 역할을 했으며, 예수 복음의 궁극적 완성은 아버지 하나님의 강세와 그분의 인류 구원 역사에서 비로소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종말론 - 7년 대환란
7년이라는 기간은 우연히 설정된 숫자가 아닙니다. 동방의 정신세계에서 ‘7’은 성숙 직전의 최대 분열 정신, 칠오화七五火를 말하는 것입니다.
첫째, 아마겟돈이라는 대전쟁으로 러시아 동맹군, 북방 왕, 아랍 군대 등이 이스라엘을 침공하며 전 세계적인 전쟁이 발발합니다.
둘째, 대병겁으로 「요한계시록」에서는 푸르스름한 말을 탄 ‘죽음’이 등장하며, 칼(sword), 굶주림(famine)과 역병(plague)의 권한으로 인류에게 재앙을 가져다줍니다.
셋째, 천지와 일월성신의 큰 이변으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지리라.”(마태복음 24:2)라는 천체의 흔들림, 섬의 소멸, 산의 붕괴, 대지진 등 지구 전반의 파괴적 현상입니다.
이러한 천지 대변혁은 단순한 종말이 아닌, 새로운 창조를 위한 과정입니다.
백보좌 아버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
직접 강세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신학자 볼트만R.Bultmann은 기독교의 핵심이 ‘하나님의 왕국(Kingdom of God)’을 건설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왕국은 죽은 후 가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지상에 건설되는 실질적인 공간입니다. 이를 위해 아버지 하나님의 지상 강세가 필요합니다.현재 많은 기독교인들은 천국을 죽은 뒤에 가는 하늘의 공간으로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왕국은 이 땅 위에 건설되어야 할 실제적인 실체입니다. 하지만 기독교 전통에서는 아버지를 인격적 존재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간으로 오실 수 없다는 관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만약 천국이 하늘에만 건설될 예정이었다면 굳이 ‘새 하늘’뿐만 아니라 ‘새 땅’까지 창조할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표현은 곧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짐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실까요?
구원의 빛은 동방에서
「요한계시록」 7장에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동방에서 올라온 천사가 등장하며,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印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를 해하지 말라 하더라.”(요한계시록 7:3)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인을 받은 이들이 14만 4천 명(요한계시록 7:4)으로 상징되는데, 이는 구원의 완성수로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선택된 구도자 집단을 의미합니다.
“이마에 하나님의 인장으로 표시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치라고 하더라.”(요한계시록 9:4)라는 명령은 하나님의 인이 재난과 환란 가운데서 보호받는 구원의 표임을 시사합니다. 계시록은 “이들은 대환란에서 나온 사람들이며 자기들의 옷을 씻어 어린양의 피로 희게 하였느니라.”(요한계시록 7:14)라고 설명합니다. 이들은 오랜 세월 시련과 고난, 진리 추구의 여정을 견뎌 낸 구도자들입니다.
이 구도자들은 단순히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주체로 등장합니다. 「요한계시록」의 큰 무리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구원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요한계시록 7:10)라고 선포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는데 …….”(요한계시록 21:2)라고 묘사한 부분과 “하나님의 성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어 그분께서 그들과 함께 거하시리니 …….”(요한계시록 21:3)라는 구절은 하나님이 이 땅에서 인류와 함께하실 것임을 선언한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적 임재臨在(presence)는 하나님의 인격성과 강세를 상징합니다.
이어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만드노라.”(요한계시록 21:5)라는 선언과 함께, 14만 4천 명이 부르는 ‘새 노래’가 언급됩니다. 그런데 ”땅에서 구속救贖을 받은 14만 4천 명 외에는 그 노래를 배울 사람이 없더라.”(요한계시록 14:3)라고 합니다. 이 새 노래는 구원과 통일의 진리를 상징하는 신성한 메시지입니다.
기독교는 아버지 하나님의 진리 시대를 예비한 종교
기독교 세계관의 본질은 직선적 시간관이 아니라 순환적 시간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태고의 황금시대, 그 후의 타락과 퇴보, 그리고 구원 이후의 천국은 다시 황금시대로의 복귀입니다.
스페인의 대철학자 미겔 데 우나무노Miguel de Unamuno는 “기독교는 성자의 종교이지, 성부의 종교가 결코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쌍어궁 시대의 종교이지, 보병궁 시대의 종교가 아니라는 통찰을 보여 준 것입니다. 이는 기독교가 그 시대적 사명을 다했으며, 이제 새로운 시대에는 다른 영적 틀이 필요하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상제님께서 큰 음성으로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그렇게 가르쳐서는 안 되느니라! 천지만사의 이치란 천지에 모여 사는 사람들 속에 있는 것이거늘 네 어찌 중생을 속이느냐! 가르치려거든 한 길을 내듯 똑바로 가르쳐라. 길이 한 번 나면 그 길이 힘줄과 같이 천지 밖으로 벌어지나니 올바른 길이 아니면 가르치지 말라.” 하시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중생들을 그릇 인도하면 천지의 원주인도 자리를 잡지 못하느니라!” 하시며 환부역조換父易祖의 큰 죄를 호되게 꾸짖으시니 사람들이 술렁이며 수군거리거늘 상제님께서 “벼락신장은 어디 있느냐. 속히 벼락을 치라!” 하고 건물이 흔들리도록 큰 음성으로 칙령을 내리시니라.
(증산도 도전道典 5:18:1~6)
또 말씀하시기를 “중생들을 그릇 인도하면 천지의 원주인도 자리를 잡지 못하느니라!” 하시며 환부역조換父易祖의 큰 죄를 호되게 꾸짖으시니 사람들이 술렁이며 수군거리거늘 상제님께서 “벼락신장은 어디 있느냐. 속히 벼락을 치라!” 하고 건물이 흔들리도록 큰 음성으로 칙령을 내리시니라.
(증산도 도전道典 5:18:1~6)
이 말씀은 단순한 꾸짖음이 아니라, 잘못된 신앙 해석과 전달이 천지의 근본 질서를 어지럽히는 큰 오류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지만, “독생자 예수만이 전부이다.”라고 오도誤導함으로써 백보좌 위에 앉으신 아버지 하나님, 즉 천지 원주인의 실체를 가리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가장 심각한 오류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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