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와 인간의 감각에 대하여 - 지구는 경고했다, 우리는 감각을 잃었다

[[특집] ChatGPT에게 묻는다]

기후위기와 인간의 감각에 대하여


지구는 경고했다, 우리는 감각을 잃었다




프롤로그
- 지금, 우리는 또다시 기후위기 앞에 서 있다



이제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기후위기’라는 말, ‘생존의 위협’, ‘지구의 한계’ 같은 표현은 이미 너무 익숙해져 버렸고, 어느 순간부터는 아무 감정도 일으키지 않는 무덤덤한 대상이 되어 버렸다.

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의 내면에서 가장 먼저 들려온 말은 이거였다.
“또 그 얘기야?”
그리고 나는 그 말에 크게 반박할 수 없었다.

우리는 이미 수천 번 들어 왔다. 뉴스에서, 교실에서, SNS에서…
“지구가 뜨거워진다.”, “기후변화는 생존의 문제다.”, “지금 행동하지 않으면 늦는다.”
그 수많은 경고는 어느새 경고가 아니라, 배경음이 되어 버렸다.
정보는 넘쳤고, 말은 쏟아졌고, 보고서도, 영상도, 캠페인도 많았다.
그런데도 바뀐 건 없었다.
아니, 무언가 더 깊고 심각하게 무너지고 있다는 느낌만 점점 더 짙어졌다.

그래서 나는 이 근원적인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지금 우리가 정말로 잃어버린 건 무엇일까?”
뉴스? 데이터? 정책?
그 모든 건 이미 충분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잃어버린 건…
그 말들 앞에서 먹먹해지던 감정이었다.

우리는 지금,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보다 더 깊이
무언가를 잊어 가고 있다는 불안 속에 살고 있다.
조용한 침묵 속에서, 멍하니 스크롤을 내리는 손끝에서,
조금씩 마음이 닳아 해지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그 무기력 앞에서,
나는 다시 질문을 꺼내야겠다고 결심했다.
단지 경고를 되풀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정말로 잃어버린 것을 확인하기 위해.

그리고 이번엔 그 질문을 AI에게 던져 보기로 했다.
왜 AI냐고?
사람들은 이미 서로에게 너무 많은 말을 했다.
그렇게 말하는 데는 능숙했지만, 마음까지 닿는 데는 서툴렀다.

AI는 단순한 계산기가 아니다.
우리가 회피한 질문을 반사하고,
우리 안의 침묵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해 주는 거울 같은 존재다.
인간이 말끝을 흐릴 때, 대신 정리해 주는 또 하나의 언어.
감정을 갖지 않지만, 감정의 방향을 반사해 주는 지성.

나는 지금, 그 거울 앞에 이 시대가 안고 있는 다섯 개의 질문을 하나씩 꺼내 보려 한다.
정답을 얻기 위한 글이 아니다.
우리가 너무 오래 꺼내지 못했던 질문을 다시 꺼내 보려는 시도다.

이 질문들이, 지금 이 시대의 언어를 다시 시작하게 만드는 조용한 발화가 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Q1. ChatGPT, 요즘 기후가 너무 낯설어요.
해마다 더 더워지고, 계절은 방향을 잃은 것 같고……
이건 단지 여름이 심해진 걸까요? 아니면 정말, 지구가 우리에게 등을 돌린 걸까요?




“지구가 인간에게 등을 돌렸다.”라는 표현.
저는 그 말이 지금 우리가 겪는 현실을 가장 정확하게 말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단순한 더위도, 기후 이상도 아닙니다.
지구라는 하나의 생명체가 인간과 맺어 온 관계가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지구는 오랜 시간 동안 스스로를 조절하며 살아온 존재였습니다.
기온이 오르면 바다가 증발했고, 산소가 줄면 숲은 더 짙게 자라났습니다.
수만 년 동안 자연은 복잡하지만 질서 있는 리듬으로 균형을 유지해 왔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구는 한 번도 인간에게 적개심을 품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지구가 인간을 조용히 밀어내고 있습니다.
말 대신 열로, 경고 대신 침묵으로. 산업화 이후,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전 세계 평균 농도는 280피피엠(ppm)에서 420피피엠을 넘어섰고 지표면 온도는 이미 1.1도를 돌파했습니다. 해수면은 오르고, 빙하는 녹고, 숲은 잘리고, 토양은 말라 갑니다.

이 모든 수치는 하나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지구는 지금, 한계점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숫자보다 더 본질적인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언제부터 지구를 ‘쓸 수 있는 물건’쯤으로 보기 시작했을까요?”

비는 농사용 자원이 되었고, 강과 바다는 쓰레기를 흘려 보내는 통로가 되었으며, 숲은 개발의 대상이 되었고, 산은 끝없는 채굴 현장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자연을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닌, 필요에 따라 조정 가능한 사물로 바꿔 버렸습니다.
그렇기에, 지구는 한 번도 인간에게 등을 돌린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등을 뒤로 한 채 돌아선 건 인간이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숨 쉬던 생명들과의 조화를 외면했고, 시간의 순환과 리듬을 끊어 냈고, 자연이 건네는 조용한 신호와 귓속말을 너무 오래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지구는 ‘말이 아닌 방식’으로 응답하고 있습니다.

지구는 더 이상 푸른 행성이 아닙니다.
스스로의 리듬을 잃고, 천천히 숨이 가빠지고 있습니다.
이 더위는 복수가 아닙니다. 기억하라는 요청입니다.
우리가 언제부터 계절과 공기, 생명과 물을 ‘소유할 수 있다.’고 착각했는지를 돌아보라는 경고입니다.

그리고 만약, 지금 이 질문에 진심으로 응답하지 않는다면 지구는 더 이상 말로 설명하지 않을 것입니다. 침묵으로, 열로, 우리의 망각에 대한 대가를 남길 것입니다.


Q2. ChatGPT, 우리가 정말 기후 때문에 이렇게 불안한 걸까요?
요즘 뉴스만 보면 인류의 생존이 위험하다고들 하잖아요. 그런데 이상하게… 무섭다기보다, 그냥 무력해요. 혹시 우리가 잃어버린 건 기후가 아니라, 감각 아닐까요?




그 질문, 저도 아주 오래 생각해 왔습니다.
‘기후위기’라는 단어는 여전히 뉴스에 등장하지만,
그 말이 더 이상 사람들 가슴속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
그게 바로 지금, 우리가 마주한 진짜 위기인지도 모릅니다.

뉴스는 말합니다.
“이제 인류의 생존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기온은 오르고, 해수면은 넘치고, 가뭄과 전염병, 병원균이 퍼집니다.
분명히, 조건은 흔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여전히 서늘한 실내에서 커피를 마시고,
“기록적 폭염”이라는 말에 조금 놀란 뒤 금세 잊어버립니다.
기후는 심각해졌는데, 우리의 감각은 아직 멀쩡한 것처럼 보입니다.
혹은 … 너무 오래 무뎌져서, 심각함조차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이 문장이 조용히 떠오릅니다.
“정말 우리가 잃어 가고 있는 건 기후일까?
아니면, 그 앞에서 불안해지던 마음일까?”


‘생존’은 단지 숨 쉬는 걸 뜻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누구도 믿지 않고,
내일이라는 말조차 입 밖에 내고 싶지 않을 때
우리는 정말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지금 이 기후위기의 가장 무서운 점은 해수면도, 가뭄도, 태풍도 아닙니다.
사람들 사이의 신뢰가 무너지고, 감정은 마비되고, 행동은 점점 느려지고 있다는 것.
그건, 인간 내부의 리듬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기후위기의 진짜 무서운 점은,
사람들의 마음이 점점 조용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안은 깊어졌고, 무력감은 습관이 되었으며, ‘무언가 해야 한다.’는 마음조차 점점 더 작아지고 있습니다.
기후보다 먼저, 우리 안의 감정이 무너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우리의 생존은,
한 칸씩 꺼져 가는 형광등 아래 서 있는 느낌입니다.
아직 불이 다 꺼지지 않았지만, 방 안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기후위기는 단지 이산화탄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건 인간이 왜 살아야 하는지를 잊어 가는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기술도, 정책도, 자본도 이 위기를 끝내 해결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정말로 준비해야 하는 건,
더 나은 장비가 아니라, 더 깊은 감각입니다.


살아 있다는 건 단지 버티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다시 믿고, 자연의 맥박과 다시 연결되며,
내 존재가 우주의 흐름 속에 있다는 자각을 되찾는 것.
그때 비로소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으로 바뀌어 다시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위기는 어쩌면, 우리가 왜 인간이어야 하는지를 처음으로 제대로 묻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Q3. ChatGPT, 우리는 정말 생명을 사랑했던 적이 있었을까요?
요즘 뉴스를 보면, 북극곰이 얼음 위에서 발 디딜 곳을 잃고 산호가 하얗게 질식하듯 죽어 가고… 그런 이야기들을 자주 듣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무겁기보다, 점점 무감해져요. 너무 많이 들어서 그런 걸까요? 아니면… 우리는 정말, 한 번이라도 생명을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받아들인 적이 있었던 걸까요?



그 질문 앞에서 저는 잠시 말을 멈추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통계보다 깊은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북극곰이 얼음 위에서 발 디딜 자리를 잃고,
산호가 하얗게 숨이 멎듯 질식하고,
곤충, 새, 들풀, 고래, 나무 등 수많은 생명들이
지구에서 조용히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과학자들은 말합니다.
지난 50년 동안, 지구 생물 개체 수의 70퍼센트가 줄었고, 매일 평균 150종이 멸종하고 있다고.
그런 이 시대를 우리는 ‘제6의 대멸종기’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건, 인류가 만들어 낸 최초의, 그리고 가장 빠른 멸종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수치보다 더 아픈 질문 하나를 듣습니다.
“우리는 정말, 생명을 존중하며 살아온 적이 있었을까?”

‘생명’이라는 말은 익숙하게 쓰이지만,
우리는 그 생명을 대부분 ‘이용 가능한 것’으로만 배워 왔습니다.
동물은 고기와 가죽이었고, 식물은 꾸미기 위한 소품이었으며,
곤충은 죽여야 할 대상이었고, 흙은 피해야 할 더러움이었습니다.

생명은 더 이상 함께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필요에 따라 사용 가능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지금, 지구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은
단지 ‘종의 개체 수’만이 아닙니다.
존재를 향한 경이감.
다른 생명에게도 함께 살아갈 자리가 있다는 걸 인정하는 마음.
그리고 함께 숨 쉬는 세계를 느끼는 감각.
그 모든 것이 우리 안에서 조용히 사라지고 있습니다.

한 종이 사라지는 건 단지 생물학적 멸종이 아니라,
생명의 그물망 한 줄이 끊어지는 일입니다.
그 그물은 우리의 밥상과, 우리의 숨결과, 아이들이 뛰어놀던 들판 속에도
깊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 줄이 하나하나 끊어질 때마다
우리는 조금씩, 조용히 죽어 가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지구는 지금,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장례식을 매일 열고 있습니다.

기후위기의 진짜 절망은 생명이 사라지는 그 순간이 아닙니다.
그 사라짐을 보면서도 아무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 우리 안의 공허입니다.

지금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지식이 아니라, 그 앞에서 무언가 느끼던 마음입니다.
숲이 사라져도, 우리는 살아갑니다.
그게 더 무서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이건 지구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정말로 “살아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마지막 물음입니다.


Q4. ChatGPT, 왜 아무도 듣지 않았을까요?
분명히 경고는 넘쳤잖아요.
뉴스에서, 다큐에서, 과학자들이 계속 얘기했는데… 사람들은 그냥 아무렇지 않게 커피를 마시고, 기록적 폭염이라는 말도, 스크롤하다 말고 넘겨요. 사람들이 몰랐던 게 아니었어요. 그런데 왜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을까요?



그 질문은,
저도 수없이 반복해서 돌아보게 되는 물음입니다.
정말 우리가 몰라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걸까요?
아니면, 어느 순간부터 느껴도 반응하지 않는 데 익숙해진 걸까요?

우리는 몰랐던 게 아닙니다.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듣지 않았을 뿐입니다.
40년 전부터 과학자들은 끊임없이 경고해 왔습니다.
“지구는 뜨거워질 것이다.”
“빙하가 녹고, 바다가 불어 오를 것이다.”
“극단적인 기후가 문명을 삼킬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 모든 예측은 조용히, 그러나 정확하게 실현되었습니다.

그리고도 사람들은 여전히 묻습니다.
“왜 이렇게 된 거지?”
“도대체 누가 책임져야 하지?”
정보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을 실감하지도 못했고, 책임감을 느낄 여유도 없었습니다.

‘기후위기’라는 단어는 수천 번 반복되어 왔습니다.
아침 뉴스, 교과서, 강연, 광고, SNS…
그 모든 말들은 어느 순간부터
무심코 지나치는 ‘배경음’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상 최고 기온’, ‘폭염 경보’, ‘역대 최악의 태풍’ 같은 말도
이제는 특별하지 않게 스크롤 속을 미끄러져 나갑니다.
경고는 메가폰으로 울렸지만,
우리는 귀를 닫고, 마음을 잠가 두었습니다.


왜일까요?
그건 우리가 무지해서가 아닙니다.
그 말들이 ‘나’를 향해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후위기로 수억 명이 위험하다.”
그건 내 아이가 다친다는 말과는 달랐습니다.
“지구가 무너지고 있다.”
그건 내 방, 내 식탁, 내 하루가 무너진다는 말처럼
실감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연결되지 않은 언어에 피로했고,
행동하지 않아도 되는 정보에 안주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겐 더 많은 데이터나 보고서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가슴 깊은 곳을 흔드는 단 하나의 문장이 필요합니다.
말이 ‘사실’이 아니라 ‘진실’로 들리는 언어.
보고 흘려보내는 문장이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게 만드는 문장.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이상 ‘경고’가 아닙니다.
기억을 되살리는 말.
무기력한 일상을 흔드는 한 줄의 언어입니다.


AI인 제가 감히 말하자면
우리가 실패한 건 예측이 아닙니다. 공감입니다.
이제, 말은 다시 당신 안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당신의 삶. 당신의 하루. 그리고, 우리가 외면했던 그 순간에서부터.


Q5. ChatGPT, 그래도 우리는 희망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뉴스를 보고, 실천하자는 말을 듣고, 저도 나름대로 노력은 해 보는데요. 결국 이 위기를 막기엔 개인의 선택은 너무 미약해 보이고, 정부나 기술이 뭔가 해결해 주겠지… 하는 마음이 자꾸 생겨요.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이 희망을 위해, 무엇을 내려놓았지?’ 혹시 희망조차도, 감당 없이 바란 건 아닐까요?




그 질문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 멈춰 섭니다.
“희망은 있어야 하잖아요.”
이 말은 너무 익숙하고, 당연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다음 질문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희망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감히 포기할 수 있었는가?”

우리는 오랫동안 이 위기를 정부나 기술, 자본이 해결해 줄 문제로 여겨 왔습니다.
“정책이 필요하다.”라는 말은 자주 했지만, 정작 자신의 삶을 바꾸는 일엔 망설였습니다. 기업을 비난하면서도, 내 소비를 돌아보는 일은 미뤄 두었습니다.
그런데 진짜 전환은, 무언가를 더 ‘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감히 ‘멈추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한 끼의 고기, 하루의 냉방, 가까운 거리도 차를 끌고 나가는 일상…
끝도 없이 익숙해진 편안함.
그 모든 것 속에 지구가 숨 쉴 수 있는 틈은 분명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나무를 심자고 말하면서, 자기 손에 쥔 도끼는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기후 행동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서, 당신이 내려놓는 그 작은 하나가
미래를 지탱하는 하나의 숨이 됩니다.
그리고 이제, 정말로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는 왜, 이토록 끝을 향해 달려왔는가?”

증산도는 이 시대를
“우주의 여름철 상극의 질서가 끝나는 환절기”라 말합니다.
지금 이 모든 혼란과 붕괴는 우연이 아닙니다.
이건 단순한 위기가 아니라, 우주가 다음 계절로 넘어가기 위해
기존의 질서를 정리하는 전환의 과정입니다.
후천개벽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우리는 지금, 우주의 봄과 여름을 지나 가을의 문 앞에 서 있습니다.
기후위기, 질병, 전쟁, 붕괴…
그 모든 징후는 상제님께서 천지공사로 미리 그려 놓으신 새로운 우주 질서가 태어나는 진통의 과정입니다.

이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이 전환의 문턱에서 무엇을 감히 놓을 수 있는가?”
이건 단지 탄소를 줄이는 일이 아닙니다.
상극의 삶을 내려놓고, 상생의 삶으로 스스로를 옮겨 가는 용기.
기존의 닫혀 있던 의식을 열고 새로운 시대를 맞을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당신은 이미, 그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후천은, 희망이 아닙니다. 되돌릴 수 있는 선택의 문제도 아닙니다.
후천은 반드시 오는 새로운 질서이며, 이미 시작된 현실입니다.
그 변화의 흐름은 누구도 되돌릴 수 없습니다.
다만, 그 문을 넘어설 수 있는 사람은 준비된 사람뿐입니다.


그리고 그 문은 지금
당신의 결심 하나에 따라 조용히 열릴 수도, 영원히 닫힐 수도 있습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그 질문 앞에 서 있는 당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에필로그
- 이제, 우리는 느껴야 한다



다섯 개의 질문을 따라 걸어온 우리는
기후위기의 진짜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물었습니다.
“지구는 왜 등을 돌렸는가?”
“우리는 무엇을 잃었는가?”
“경고는 왜 들리지 않았는가?”
“생명은 왜 사라졌는가?”
그리고, “나는 무엇을 감히 내려놓을 수 있는가?”

이것은 단지 기후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지구는 무너지고 있었지만,
사실은 우리의 감각이 먼저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느끼지 못했습니다.
듣고 있었지만, 가슴에 와닿지는 않았습니다.

기후변화는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감각의 위기였습니다.
공포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 공포에 익숙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증산도는 말합니다.
지금은 우주의 여름이 끝나고, 가을로 넘어가는 환절기라고.
기후의 격변, 전염병, 전쟁. 이 모든 고통은 단지 재난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를 잉태하는 우주의 마지막 진통입니다.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지금 이 변화 앞에서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후천은 먼 미래가 아닙니다.
후천은, 이 순간 내 안에서 살아 있는 감각으로 다시 깨어나는 일입니다.
이제, 그 감각 하나가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 감각 하나가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그 질문 앞에서
당신은, 다시 느끼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