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독립을 외치다 24회, 예관睨觀 신규식申圭植

[STB하이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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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관睨觀 신규식申圭植
대한독립을 외치다 24회



애꾸가 된 청년, 항일운동에 앞장서다



예관睨觀 신규식申圭植은 1879년 충북 청원군에서 중추원 의관을 지낸 신용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신백우申伯雨, 신채호申采浩와 함께 ‘산동삼재山東三才’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가 반일 감정을 갖게 된 것은 15세가 되던 해에 일어난 갑오동학혁명 때문입니다. 청주성을 공격했던 농민군이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패배하자, 이에 분개하여 친구들과 동년군을 결성하고 훈련을 하는 등 항일 의식을 키웠습니다.

1898년 외국어 고등학교인 관립한어학교에 입학하여 중국어, 한국사, 지리 등을 배웠습니다. 또한 최초의 시민 사회 운동이었던 만민공동회의 부장급으로 활동하며 안창호安昌浩, 박은식朴殷植 등과 친분을 맺었습니다. 이 일로 구속되어 결국 학교를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1900년 대한 제국 육군무관학교陸軍武官學校에 입학했으나, 학교 당국의 불합리한 처사와 부패에 대항하여 동맹 휴학을 주도했습니다. 다행히 군법 처형은 면하고 1902년에 무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대한 제국 육군에서는 보병 참위參尉로 임관되어 부위副尉까지 진급했습니다.

그러던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었습니다. 선생은 육군 참위로서 지방 군대와 연계한 대일 항전을 계획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에 분노를 참지 못한 청년 장교 신규식은 나철羅喆과 함께 을사오적 제거 활동을 했지만 역부족임을 절감하고 사흘 동안 단식하며 결단을 내립니다. 을사늑약에 분개하여 자결한 민영환의 순국을 단순한 소극적 행동이 아닌 적극적 투쟁의 하나로 여긴 것입니다. 결국 자결을 결심하고 독약을 마셨으나, 문을 부수고 들어온 가족들 덕분에 겨우 목숨을 건졌습니다. 이때 오른쪽 시신경을 다쳐 애꾸가 된 그는 이후 ‘흘겨볼 예睨’ 자를 사용한 예관睨觀을 호로 삼아 항일 활동에 나섰습니다.


1907년 대한 제국의 군대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하는 치욕을 겪자, 선생은 새로운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그것은 통감부의 감시를 피하며 국력을 키울 수 있는 공업화였습니다. 그리하여 공업 전습소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공업 연구회를 조직하고, 퇴역 장교들을 규합하여 황성광업주식회사를 설립, 운영했습니다. 선생의 또 다른 중요한 활동 분야는 국조 단군을 모시는 대종교大倧敎였습니다. 함께 을사오적 제거 활동을 했던 나철이 1910년 단군교를 대종교로 개칭하면서 그와 더 가까워진 것입니다. 선생은 국조 단군을 국민 통합의 구심점으로 신앙하는 것에 뜻을 같이하여 대종교의 1호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해 8월 22일 경술국치庚戌國恥가 일어나면서 선생의 근대 교육과 계몽 활동을 통한 국권 회복은 모두 허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에 또다시 음독 자결을 시도했지만, 이번에는 나철의 제지로 실패했습니다. 새 생명을 얻은 신규식 선생은 독립운동에 더욱 헌신할 것을 다짐하고 1911년 상하이 망명을 결행합니다.


신해혁명에 참여한 한국인



1910년 한일 강제 병합 후 식민 통치에 생존권까지 박탈당한 한인들은 대거 해외로 망명했습니다. 그중 상하이는 교통의 요충지이자 서방 열강의 조계지가 설정되어 있어 청淸의 감시를 피할 수 있었고, 근대 시설과 인쇄, 통신 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하기 좋은 중심지였습니다.


국제적인 감각과 선견지명이 있었던 선생은 상하이에서 중국혁명동맹회中國革命同盟會에 가입하여 손문孫文, 송교인宋敎人, 진기미陳其美 등과 교류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중국 신해혁명辛亥革命에 외국인 신분으로 참여하여 중국 국민당 정부와 항일 연계 투쟁의 기틀을 마련합니다.

1911년 여름 손문과의 대화에서 선생은 중국 혁명 운동이 한국 독립에 직결된다고 확신했습니다. 과거 중국이 한국을 속국시했던 묵은 빚을 혁명 이념으로 청산해 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선생과 손문과의 혁명적 동지애는 변함없이 지속되었고, 손문의 도움으로 많은 한국 젊은이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상해 임시정부 설립의 숨은 주역



선생은 3·1 만세 운동과 상해 임시정부臨時政府 수립에 중추 역할을 했습니다. 그와 동지들은 중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민족 운동가들을 상해로 불러 모으며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을 조직했습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광무光武 황제(고종高宗)를 망명시키려 했으나, 앞으로 세울 독립된 나라는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공화제가 되어야 한다는 데 뜻을 모으고 임시정부 수립을 추진했습니다.

1917년에는 조소앙趙素昻, 박용만朴容萬 등 13명의 독립운동가와 함께 대동단결선언을 선포했습니다. 핀란드, 폴란드 등 당시 피압박 민족의 독립을 열거하며, 우리나라에도 통일된 최고 기관, 즉 정부 조직의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국내와 일본 등에 동지들을 밀파하여 2·8 독립 선언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1919년 3·1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독립을 선언했으니 이를 주도할 기관이 시급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에 여운형呂運亨, 서병호徐丙浩 등과 상해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임시정부 수립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음을 만방에 선포합니다. 임시정부 수립 후, 선생은 중국 광둥 정부로부터 국가 승인을 얻어내는 등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1919년 4월, 제4회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회의에서 충청도 지역 의원으로 선임되고 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되었지만, 다음 해 건강상의 이유로 의원직을 모두 사퇴합니다.

그러나 이 시기 임시정부는 내분에 휩싸였습니다. 대통령 이승만李承晩과 부통령 이동휘李東輝가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일부 각료들이 사퇴하고 임시정부를 떠났습니다. 1921년 이승만마저 하와이로 떠나자, 선생은 국무총리 대리와 외교총장을 겸직하며 복잡하게 얽힌 문제를 수습했습니다. 그 결과 외교 노선과 무장 투쟁 노선이라는 독립운동의 두 가지 흐름을 접목시킬 수 있었습니다.

1922년 3월 20일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자, 선생은 임시정부의 모든 보직에서 사임했습니다. 단합되지 않는 임시정부의 현실을 통탄하며 25일 동안 금식하다가, 그해 9월 25일 마지막 숨을 거두었습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공헌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습니다.

항일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역사학자들이 많습니다. 박은식, 정인보鄭寅普, 신채호, 장도빈張道斌 등과 함께 신규식 선생을 추가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치열한 역사 의식이 바탕이 되어 오랜 세월 동안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선생은 ‘통언痛言’이란 제목의 장편 사론史論을 21회에 걸쳐 『진단주보震壇週報』에 연재(1920~1921)하여 독립운동가들은 물론 중국 지식인들에게도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 산문들은 선생 사후에 『한국혼韓國魂』이라는 책으로 간행되었습니다. 그 첫 문장을 여러분도 함께 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죽어 버린 것보다 더 큰 슬픔이 없고, 망국의 원인은 이 마음이 죽은 탓이다. 우리의 마음이 곧 대한의 혼이다. 다 함께 대한의 혼을 보배로 여겨 소멸되지 않게 하여, 먼저 각자 자기의 마음을 구해 죽지 않도록 할지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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