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도시의 여왕, 콘스탄티노플

[열두 도시로 살펴보는 세계사]
이해영 전임기자 / 서울관악도장


동서 교역의 중심지



우리에게 형제의 나라로 알려진 튀르키예Türkiye의 최대 도시 이스탄불Istanbul은 과거에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라 불렸다. 이 도시는 고대 로마 제국, 동로마 제국, 오스만 제국 등 시대별로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한 세 대국이 수도로 삼은 곳이며, 고대부터 중세까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세계사의 핵심 도시였다.

그리스인이 처음 건설한 콘스탄티노플은 2,700년에 가까운 역사 속에서 로마 제국의 내분, 십자군 원정, 이슬람 세력의 침공 등 수많은 전란을 겪으며 유럽과 아시아 문화가 한데 어우러진 도시로 성장했다.


새로운 로마




이곳은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인 ‘비잔티움’Byzantium으로 존립하는 시기를 거쳤고, 4세기에 로마 제국의 새로운 수도가 되면서 한때 ‘노바 로마’Nova Roma(신 로마)’라고 했다가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후 15세기에 오스만 제국의 수도로 바뀌면서 ‘코스탄티니예’Kostantiniyye가 되었고, 튀르키예 공화국 건국 이후 1930년부터는 공식적으로 ‘이스탄불’Istanbul이 되었다.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에서 언뜻 ‘이스턴’ 즉 ‘동방’을 연상할지 모르지만, 이 도시명은 그리스어의 ‘이스 띠 뽈린(도시로)’이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튀르키예 인근에 사는 그리스인은 동로마 제국 시대에 부르던 이름에 따라 현재도 이곳을 그리스풍 호칭인 ‘콘스탄티누폴리’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η라고 부른다. 흑해와 에게해를 잇는 보스포루스Bosporus 해협에 인접한 이스탄불은 옛날부터 유럽과 아시아가 맞닿은 요충지였다. 위도는 북위 약 41도이고, 한여름의 평균 기온은 섭씨 29도, 한겨울은 4도로 사람들이 비교적 생활하기 좋은 기후이다.


도시의 기원



기원전 658년, 그리스 메가라족의 비자스왕은 보스포루스 해협의 유럽 쪽에 상륙한 뒤 식민 도시 비잔티움을 건설했다. 이후 비잔티움은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지배를 거쳤고, 기원전 4세기 이후에는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은 자치 도시가 되었다. 그 뒤 기원전 1세기에 로마 제국의 세력권으로 편입되었다.

190년, 비잔티움은 로마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와 시리아 총독인 페스켄니우스 니제르Pescennius Niger의 항쟁에 휘말려 황제군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지만, 몇 년 후 재건되어 시가지는 이전보다 배로 확장되었다.


동서 로마 분열과 천도遷都




3세기 말, 로마 제국은 방대한 영토를 동서로 분할하여 각각 정제正帝와 부제副帝가 나누어 지배하는 체제가 도입되었다. 이때 서쪽 영토를 통치하던 부제 콘스탄티우스 1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1세는 각지의 정적을 제압하며 강자로 부상했는데, 기독교사에서는 그를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us the Great)로 통칭하고 있다.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영토의 동서를 아우르는 정제가 된 후, 330년에 동방의 비잔티움으로 수도를 옮기겠다고 선언했다. 천도 이유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천도의 이유를 헤아려 볼 수는 있다. 이 무렵 로마 제국 경제의 중심지는 동쪽 지역으로 옮아간 상태였다. 즉 이집트와 시리아 및 지금의 튀르키예 소아시아 지역이 로마 제국을 지탱하는 젖줄 역할을 하고 있었다. 여기에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전통적으로 다신교 신앙의 뿌리가 깊은 로마를 벗어나 심기일전을 도모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새로운 수도의 이름을 처음에는 ‘노바 로마’라고 했지만, 이후 콘스탄티누스의 이름을 따서 라틴어로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olis, 영어로는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정하게 되었다.


특별히 공들인 식수 확보와 난공불락의 테오도시우스 성벽



새로운 수도의 주요 건축물은 이탈리아 로마 시내의 일곱 언덕을 본뜬 일곱 군데의 언덕에 배치되었다. 도심 중앙에 건설한 콘스탄티누스 광장을 기점으로 도로망도 정비되었다.

그런데 콘스탄티노플은 세 방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담수淡水를 얻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었다. 이의 해결 방안으로 식수 확보를 위해 광장 지하에 거대한 저수조貯水槽를 만들었다. 375년경에는 도심과 서북쪽 숲에 있는 수원水源을 잇는 ‘발렌스Valens 수도교水道橋’가 설치되었다. 높이 약 20미터, 길이 1킬로미터가량의 이 다리는 19세기까지 약 1,400년 동안 사용되었다.

5세기에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2세는 본격적으로 콘스탄티노플 정비에 나서 성벽과 항만을 건설하였다. 이때 만들어진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walls)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어하는 삼중의 성벽이 되었다. 성벽의 높이는 약 12미터나 되며 이중 삼중으로 건설되어 훌륭한 방패막이 역할을 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난공불락의 도시로 불리게 된 데에는 이 성벽의 도움이 컸다. 성벽의 위력은 매우 강력해서, 제국이 외세의 침략을 받아 수도 바로 앞까지 영토가 유린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해도 이 성벽을 넘어 수도를 점령할 수 있었던 군대는 14세기까지 아무도 없었다.

1453년 튀르크군도 15만에 달하는 대군을 몰고 왔으나, 성내의 7천 명 남짓한 군대를 상대로 한 달 반가량의 고전을 치른 끝에 간신히 성벽을 넘을 수 있었다. 당시 동로마 제국과 오스만튀르크군 간에 최후의 일전을 벌여 아시아와 유럽의 역사가 바뀌기도 하였다. 또한 이 성벽 때문에 군사 전략과 전술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군사적 축성 기술에 변혁을 불러일으킨 대포大砲가 화려한 데뷔를 하기도 했다.


번영하는 콘스탄티노플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죽은 뒤, 로마 제국은 동서로 분열되고 콘스탄티노플은 동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서로마 황제가 공석이 된 이후 서유럽은 군웅할거의 시대로 돌입한다. 이렇듯 본래 로마는 쇠퇴해 간 반면 콘스탄티노플은 동로마 제국 융성과 함께 5세기에는 50만 명을 헤아리는 기독교 세계 최대 도시로 번영을 누렸다.

또한 동서 교역의 중심지로 ‘모든 도시의 여왕’, ‘세계의 부富 3분의 2가 모인 곳’이라고 불렸으며, 고대 건축물을 보존한 대도시로 위용을 떨쳤을 뿐 아니라 정교회 수장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있는 정교회의 중심지로 비잔틴Byzantine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이 도시의 수호성인守護聖人은 성모 마리아로 알려져 있다.

7세기경 동로마 제국에서는 지배 계급과 주민 모두 로마인이 아닌 그리스인이 대다수를 차지하면서, 그리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은 동쪽의 이슬람 세력과 충돌을 반복하면서도 지중해 무역의 거점으로서 계속 번영했다. 이와 더불어 고대 그리스 철학과 그리스도교를 융합시킨 독자적인 신학, 그리스의 조각이나 회화와 그리스도교의 미술이 융합한 비잔틴 미술이 발달했다.


동방 정교회 중심지의 상징 아야 소피아 성당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로 인정된 후. 신학자들 사이에 교리 해석을 두고 의견이 분분했지만, 381년에 개최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公議會에서 신과 예수와 성령의 관계를 정리한 ‘삼위일체설’三位一體說이 정통으로 인정받았다. 그 후에도 콘스탄티노플에서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정통과 이단을 판단하는 공의회가 여러 차례 열렸다.

로마 제국의 동부에서는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좌가 중심적인 교회가 되었다. 360년에 총주교좌가 있는 ‘아야 소피아Αγία Σοφία(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 성스러운 지혜)’ 성당이 콘스탄티노플에 창건되었는데, 이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재건되었다. 하지만 6세기에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1세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시민들이 ‘니카Nika의 반란’을 일으켜 다시 파괴되었다. 537년, 두 번째 재건 때 아야 소피아는 지름 22미터의 거대 돔을 갖춘 건축물로 재탄생했다. 규모나 형상에서 이전까지 로마 제국에서 전례가 없던 모습이었다. 건물 본채는 벽돌로, 내부 벽은 모두 대리석으로 장식되었다.

8세기에 들어서자, 서유럽 각국에 영향력을 가진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플 교회가 교리 해석을 둘러싸고 충돌했다. 결국 11세기에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의 분열이 발생했다. 이후 유럽에서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자, 이탈리아반도의 베네치아Venezia와 제노바Genova의 상인들이 지중해의 운항과 통상을 주도했다. 이들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동로마 제국의 제해권과 무역 이권을 위협했다.

결국 1204년에는 베네치아 상인에게 선동당한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들은 현재의 벨기에와 프랑스 북부를 다스리던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Baudouin을 강제로 내세워 라틴 제국을 건국했다.

동로마 제국은 동방의 아나톨리아반도에 있는 니케아Nicaea(니카이아Nikaia)로 옮겨갔다가 1261년에 수도를 다시 탈환했다. 이렇듯 혼란을 거듭하던 와중에 이슬람 세력인 튀르크계의 셀주크 왕조가 침공하자, 동로마 제국은 급속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배가 산을 넘었다 - 중세 유럽의 마침표




14세기 지중해 동부에서는 셀주크 왕조가 무너지고, 오스만 제국이 세력을 확장했다. 오스만 제국의 야심만만한 젊은 술탄 메흐메트Mehmet 2세는 1453년에 약 15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동로마 제국은 폭이 약 800미터에 이르는, 보스포루스Bosporus 해협의 금각만金角灣(할리치Haliç, Golden Horn)에 굵은 쇠사슬을 쳐서 적함이 침입할 수 없도록 봉쇄했다. 바닷길로 진입할 수 없어진 것이다.

이에 메흐메트 2세는 오스만 제국군에게 72척의 함대를 육로로 옮기라는 명령을 내렸다. 결국 이들은 대규모 함대를 끌고 해발 60미터의 갈라타Galata 언덕을 넘어 해협으로 들어갔다. 여기에 오스만 제국은 공성전을 위해 대형 우르반 거포도 동원하였다.

치열한 공성전과 격전 와중에 시민들의 출입구로 이용되던 비밀 쪽문이 열리는 일이 발생한다. 성벽 안으로 진입할 절호의 기회를 노리던 오스만 제국 최고의 정예군인 예니체리 군단은 이 문으로 돌진한다. 아비규환 속에 이 문은 제대로 닫히지 못하고, 오스만군은 이 문을 통과해 방어 탑을 점령하고, 성문엔 오스만 군기가 세워졌다. 1,000년 동안 적의 침입을 단 한 번밖에 허용하지 않던 철벽의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어이없게도 방어군의 실수로 인해 적의 침입을 허용한 것이었다. 난공불락의 도시 콘스탄티노플은 이렇게 함락됐다.

로마의 천 년 고도이자 정교회의 심장이었으며 기독교의 5대 총대주교좌 도시 중 로마와 더불어 이슬람의 정복을 면한 곳이었던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이 전투에서 패하면서 이슬람교도 튀르크인의 영토로 넘어가 버렸다. 그리고 기원전부터 이어져 온 로마 제국의 역사도 마침표를 찍었다.


콘스탄티노플 함락의 의미 - 르네상스의 시작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은 유럽 중세의 종말을 상징하는 유력한 사건 중 하나였다. 이 전투에서는 중세의 종언을 고할 만한 무기인 공성포가 사용되었고, 중세를 상징하는 성벽의 의미도 무너졌다. 이 전투로 소아시아 및 남유럽과 서유럽 및 중부유럽의 문화적, 정신적 연결 고리가 끊기고, 유럽 문명의 시조라고 할 만한 로마 제국의 최후가 이슬람의 손에 넘어간 것이다.

더불어 그리스⋅로마에 대해 연구한 고전학자들과 그들의 연구 결과들이 서유럽으로 넘어가면서 르네상스Renaissance(문예 부흥)의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또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과 함께 발칸반도가 이슬람 국가들의 손에 넘어가는 결과를 낳았다.


이슬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놓이자 콘스탄티노플이라는 도시 이름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1457년경부터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리스인의 구어 표현에서 유래한 ‘이스탄불’이라는 호칭이 정착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시내의 많은 그리스도 교회를 모스크로 고쳤다. 그 과정에서 아야 소피아 성당에 있던 그리스도상 모자이크화는 회반죽으로 덧칠했다. 다만 동방 정교회의 총주교좌는 계속해서 그대로 시내에 두었고, 17세기 이후에 구시가지 북부의 성 게오르기오스(St. George) 대성당으로 옮기도록 했다.
1478년에는 황제가 머무는 톱카프Topkapi 궁전(‘대포의 문’이라는 의미)이 완공되었다. 부지 면적이 무려 70만 제곱미터에 이르는 이 궁전은 이후에도 계속 증개축을 반복하면서 중동과 유럽의 건축 양식이 섞인 독특한 건물이 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지중해와 발칸반도의 패권을 둘러싸고 지금의 서유럽과 중유럽에 위치한 독일의 전신인 신성로마 제국과 대립하며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이 때문에 모스크나 궁전의 내부 장식을 하면서 프랑스에서 도입한 바로크 양식이 적용된 장식들이 사용되기도 했다.


이슬람 최고 천재 건축가 ‘미미르 시난’의 셀리미예 모스크




오스만 제국의 최전성기를 구축한 술탄은 1520년에 즉위한 쉴레이만Süleyman 1세다. 명소로 꼽히는 셀리미예 모스크Selimiye Mosque는 그의 이름을 딴 것으로, 1557년 이스탄불의 중심부에 건설되었다. 높이 54미터, 지름 27미터나 되는 거대 돔을 만들고 건물을 에워싸는 네 개의 첨탑(미나레트minaret) 표면도 치밀하게 장식했다. 이 모스크를 설계한 건축가 미마르 시난Mimar Sinan(1489~1588)은 같은 시기 이탈리아에서 활약한 미켈란젤로와 어깨를 나란히 한 천재로 꼽힌다. 미마르Mimar는 건축가를 의미한다.

오스만 제국에는 우수한 그리스도교도의 아들을 이슬람교로 개종시켜 황제의 직속 경호대이자 친위대 역할을 하는 정예 상비군단인 ‘예니체리yeniçeri’가 있었다. 14세기에 처음 조직되어 1826년에 마흐무트Mahmud 2세가 해산할 때까지 존재하였다. 예니체리는 튀르크어 ‘예니센’에서 유래한 말로 “새로운 병사”라는 뜻이다. 시난도 원래는 그리스교도 집안의 그리스인 출신의 예니체리였다. 그는 작전을 수행하면서 자신의 건축 기술과 공학 기술을 가다듬었으며 도로, 다리 같은 군사 기반 시설이나 요새화 작업에 있어서 전문가가 되었다.

1616년에는 시난의 문하생인 메흐메트 아아Mehmet Aga가 건축을 담당한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Sultan Ahmet Mosque(통칭 블루 모스크Blue Mosque)가 완성되었다. 통상적으로 모스크에는 건물을 둘러싼 첨탑을 네 개까지 만든다. 하지만 이 모스크에는 여섯 개를 세웠는데, 이스탄불이 이슬람 세계의 중심이라는 점을 알리기 위해 성지 메카에 있는 모스크보다 더 많은 첨탑을 세운 것이다.


유럽인도 환대받았던 이슬람 도시



쉴레이만 1세는 다른 민족의 다양한 종교 활동을 보호했다. 그래서 이스탄불에는 지배 민족인 튀르크인과 기존에 거주하던 그리스인, 유대인, 불가리아인, 샐비어인 외에도 발칸반도의 여러 민족, 오스만 제국 통치하의 아랍인, 아프리카 북부의 흑인 등 다양한 민족과 인종이 유입되었다. 프랑스나 영국의 상인들은 이스탄불에서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는 통상 특권을 부여받았고, 유럽 각국이 금각만(Golden Horn)의 갈라타 지구에 거류지를 건설했다.
16세기에 이스탄불의 인구는 70만 명에 달했다. 로마 제국 시대부터 이어진 공중목욕탕뿐 아니라 카페가 사교의 장 역할을 했다. 또 지중해의 어패류나 올리브를 사용한 그리스 요리와 요구르트 등의 유제품, 그리고 양고기를 사용한 튀르키예 요리가 융합하여 풍부한 식문화가 발달하였다.


현대에서 동서를 잇는 요충지 이스탄불




17세기 이후에 서구 국가들의 주요 교역 활동 무대가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옮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지중해 도시의 중요도는 낮아졌다. 하지만 이스탄불은 여전히 중동 진출의 거점으로 주목받아 왔다. 1883년에는 이스탄불에서 독일의 뮌헨, 프랑스의 파리를 잇는 오리엔트 급행 열차가 운행되기 시작했다.

오스만 제국이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고, 영국, 프랑스, 그리스 등 연합국이 이스탄불을 점령했지만, 케말 아타튀르크Kemal Atatürk(케말 파샤) 등이 이끄는 국민군이 맞서 싸워 연합군을 물리쳤다. 하지만 황제의 권위는 실추되었고 결국 오스만 제국은 해체되었다.

1923년 튀르키예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아타튀르크는 마치 콘스탄티누스 1세가 천도로 심기일전을 도모했듯이 대국민의회가 있던 아나톨리아반도 내륙의 앙카라Ankara로 수도를 옮겼다. 이로써 이스탄불은 수도 자리를 내주게 되었지만, 여전히 튀르키예 최대 인구의 상업 도시로 자리를 잡았다.

현재 이스탄불은 유럽 지구의 베이올루Beyoglu, 에미뇌뉘Eminönü, 파티흐Fatih와 아시아 지구의 위스퀴다르Üsküdar, 카디쿄이Kadiköy 지역으로 나뉜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이스탄불의 구시가지는 파티흐 지구에 속한다.

로마 제국에서부터 오스만 제국까지 각 시대의 건축물이 한데 어우러진 이스탄불은 전 세계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높다. 흑해에서 지중해로 나가는 러시아나 우크라이나의 선박 등을 포함해, 보스포루스 해협에서는 연간 약 4만 척의 배가 운항하고 있다.

1973년에는 이스탄불의 유럽 지구와 아시아 지구를 잇는 전체 길이 1,560미터의 보스포루스 대교(Bosporus Bridge, 공식 명칭은 7월 15일 순교자 다리)가 완성되었고, 2016년에는 이스탄불 보스포루스 해협을 가로지르는 5.4킬로미터의 유라시아 해저터널Eurasia Tunnel(Avrasya Tuneli)이 세계 최초의 자동차 전용 복층 터널로 개통되었다. 이스탄불은 지금도 변함없이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교통상의 중요한 요충지이며 문화가 교류하는 도시로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참고문헌〉
* 『30개 도시로 읽는 세계사』, 조 지무쇼 저자(글)⋅최미숙 번역⋅진노 마사후미 감수, 2020, 다산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