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정을 꽃피운 철학과 문화의 도시, 아테네

[열두 도시로 살펴보는 세계사]
도시都市는 인류 문명 활동의 줌심이 되는 장소이며 역사의 변천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함축하고 있다. 본지는 지난 한 해 동안 주요 열두 개 도시 기행 연재를 통해 우리 국통 맥의 역사와 문화를 더듬어 본 바 있다.
이어 올 한 해에는 세계의 주요 열두 개 도시를 개관하며 세계사의 전체 맥락을 살펴보고 역사 문화에 대한 이해도를 제고하기 위해 <열두 도시로 살펴보는 세계사>라는 기사를 연재한다.
본 기사에서는 현재 세계 주요 도시들의 역사와 문화, 시대 배경 및 발전 과정 등을 간명하게 서술하면서 전체적인 도시의 모습 및 위상을 조감해 보려 한다. [편집자 주註]


이해영 전임기자 (서울관악도장)


민주정을 발전시킨 아테네




고대 그리스Greece 시절 민주정을 완성한 아테네Athens. 이곳은 소크라테스Socrates,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등 세계사에 이름을 남긴 철인哲人들의 도시로 불린다. 최초의 민주주의 국가로 고대 그리스 문명의 꽃이자 모든 유럽 국가의 문명 요람이 된 뿌리가 아테네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테네에서 절정을 이룬 그리스 문명은 이후 로마와 중세 유럽, 근대 유럽, 현대 세계로 이어진다.

당시 그리스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도시국가들이 발달했는데, 그중 특히 아테네에서 민주정을 발전시키고 크게 번영을 누렸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 이유를 찾아가 보자.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오해



우리의 정체政體는 이웃 나라들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남을 모방하기보다 남에게 본보기가 되고 있습니다. 소수자가 아니라 다수자의 이익을 위해 나라가 통치되기에, 우리 정체를 민주 정치라고 부릅니다.


이는 페리클레스Pericles의 추도 연설(Pericles’ Funeral Oration)로,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 전사한 병사들을 기리며 시민들에게 아테네의 위대함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상기시키기 위해 행해졌다. 투키디데스Thucydides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기록되어 있으며, 고대 민주주의의 이상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연설로 평가받는다.

현재 우리 대한민국을 비롯한 대다수의 나라는 민주주의民主主義 정치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민주주의(democracy)는 인민을 뜻하는 그리스어 ‘데모스demos’와 통치를 뜻하는 ‘크라티아kratia’의 결합으로, 민주주의의 어원은 ‘시민(인민)에 의한 통치’를 뜻한다. 그리고 공직자 등을 뽑는 ‘선거選擧’를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일컫는다.

그런데 아테네의 민주정은 이와 달랐다. 고대 아테네 민주정의 꽃은 ‘선거’가 아니라 ‘엘리트 선출’ 방식인 ‘추첨抽籤’이었다. 아테네에서는 민회, 평의회, 시민 법정, 행정관 등 네 가지 주요 기관이 국가를 운영했는데, 군사나 재정 같은 특수한 전문성이 필요한 일부 행정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공직을 추첨으로 뽑았다. 이는 자원을 많이 가진 엘리트가 권력을 독점하지 않도록 하고, 모든 시민이 정치에 참여할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하려는 목적이었다.

입법부에 해당하는 민회民會(에클레시아Ecclesia)는 1년에 6,000여 명의 시민들이 40회 이상 모여 의제들을 심의했다.시민 법정市民法廷(디카스테리아Dikasteria)은 오늘날 사법부인 법원과 헌법재판소 역할을 했다. 법을 집행하는 행정관行政官(아르콘Archon)은 민회와 법정에서 내려진 결정을 시행하는 행정부 역할을 맡았다. 

이 추첨제와 관련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선거로 선출되는 것은 과두정치이고, 추첨으로 공직을 임명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생각했다. 몽테스키외Montesquieu와 루소Rousseau 같은 근대 계몽주의 사상가들 역시 “대표자를 추첨으로 뽑는 것은 민주주의의 방식이며 선거로 뽑는 것은 귀족정의 방식”으로 보았다고 하니 우리가 알던 상식과 달라 좀 충격이 올 것이다.

심지어 선거(election)와 엘리트(elite)는 그 어원이 라틴어로 ‘뽑다’, ‘가려낸다’는 뜻을 가진 말 Eligo, Eligere에서 나왔다. 그러니까 우리가 현재 시행하는 선거는 필연적으로 소수의 엘리트를 뽑을 수밖에 없는 귀족적인 방식이었다.

현대와 같이 ‘선거 대의제’가 민주주의의 상징처럼 여겨지게 된 것은 프랑스대혁명 이후부터였다. 과거의 귀족층 대신에 권력을 잡기 시작한 중산층들이 자신들의 통치를 정당화하고 사회 경영에 도덕적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현실적 필요에서 비롯된 역사적 구성물이 바로 선거라는 제도였다. 특히 1800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기점으로 혁명가들, 신흥 중산층, 지식인과 학자들에 의해 선거제가 꾸준히 전파되었고, 마침내 1920년경에 이르러 사회 일반에 수용되기에 이른 것이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통념과는 반대이니 신기하지 않을 수 없다.


지혜의 여신 이름을 딴 도시




여기서 아테네란 도시는 어디서 온 것일까? 고대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올림포스 12신 중 제우스Zeus의 머리에서 나온 지혜의 여신 아테나Athena와 제우스의 동생 포세이돈Poseidon*이 이 도시의 수호신 자리를 놓고 다투었다. 삼촌과 조카가 경쟁한 셈인데, 당시 사람들은 아테나를 선택했다고 한다.
*포세이돈Poseidon - 본래 제우스Zeus의 형으로 태어났으나, “아들에 의해 쫓겨난다.”는 예언을 들은 아버지 크로노스Cronos가 포세이돈 등 태어난 아이들을 족족 삼켜 버렸다. 이에 어머니인 레아Rhea가 여섯 번째 아이인 제우스를 몰래 숨겨서 구했고, 남편에게는 구토제를 먹여 예전에 삼킨 아이들을 토해 내게 만들었다. 제우스가 장성한 후 포세이돈은 제우스와 힘을 합쳐 크로노스 세력과 전쟁을 벌여 승리했다.


포세이돈은 원래 서열상 제우스보다 형이었지만 크로노스의 배 속에 들어갔다 나옴으로써 남동생이라고도 할 수 있게 되었다. 헤시오도스Hesiodos의 『신들의 계보(Theogonía)』에서는 제우스가 막내지만 다른 형제들이 크로노스의 배 속에서 성장이 멈춰 있었기 때문에 더 어려진 걸로 나오며, 호메로스Homeros의 『일리아드(The Illiad)』에선 그냥 제우스가 첫째, 포세이돈이 둘째, 하데스가 셋째로 언급된다.

하지만 이는 실제와는 다르다. 아테네라는 명칭에 대해 19세기 독일의 고전학자 크리스티안 로베크Christian August Lobeck는 그 어원이 ‘anthos(꽃)’, 즉 ‘꽃의 도시’라고 보았다. 당대 독일의 문헌학자 루트비히 되데를라인Ludwig Döderlein은 그 어원을 ‘the-(비옥한)’으로 보고 ‘비옥한 곳’이라고 해석하였다. 또한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 서정시의 마지막을 장식한 시인 핀다로스Pindaros는 아테네를 ‘제비꽃 화관을 쓴 빛의 도시’라고 묘사하였다.

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정확한 어원은 알 수 없다고 여긴다. 역사가 미케네 문명(Mycenaean civilization) 이전의 선사 시대까지 올라가는지라 테베Thebae, 미케네Mycenae와 마찬가지로 그리스인 도래 이전부터 쓰이던 이름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실제로는 여신의 이름이 도시에서 온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사실 인명에서 유래한 지명 상당수가 사실은 지명에서 인명이 유래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가 다음 회에 다룰 로마의 의인화로 여겨지는 로물루스Romulus이다.

1976년에 그리스 정부는 표준 그리스어를 개혁하면서 ‘아시나Αθήνα’를 아테네의 공식 명칭으로 공표했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 영어는 ‘Athens’로 표기하며 애씬즈[ǽθinz]로 발음한다. 우리의 옛날 책에서는 이를 ‘아덴스’로 표기했다.


<천혜의 지형과 풍부한 자원을 품은 땅



아테네는 현재 그리스 공화국의 수도로 발칸반도 끝자락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 땅에 처음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중석기 시대나 신석기 시대라고 한다. 에게해를 중심으로 한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는 발칸반도 남부의 미케네 문명이 기원전 1600년부터 발전을 이루었다가 기원전 1200년경에 갑작스럽게 붕괴했다. 이 미케네 문명을 이룬 사람들은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에게해 주변으로 이동했고, 기원전 8세기에 그리스 각지에 ‘폴리스polis’라고 부르는 도시국가를 건설했다.

그리스는 산맥과 섬이 많은 지형인 데다 큰 강도 없어서 서로 교류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여러 폴리스는 통일 국가로 합쳐지지 않고, 교역에 유리한 연안부를 중심으로 독립적으로 발전했다. 아테네는 내륙 쪽에 외적의 침입을 막아 주는 산들이 있었고, 근교에 대리석이나 은과 같은 천연자원이 풍부하였는데, 이는 아테네 번영의 토대가 되었다.


고대 그리스 세계를 견인한 도시 아테네의 영광




그리스 폴리스는 오르기 쉽고 군사 요충지로 적합한 높은 곳에 종교적, 군사적 역할을 겸한 언덕을 아크로폴리스Acropolis로 정했다. 아크로폴리스는 폴리스 중심지의 언덕을 의미한다. 아테네는 구릉지와 평탄한 토지가 공조하는 기복이 많은 땅이어서 중심부 언덕이 아크로폴리스가 되었다.

기원전 6세기, 이곳에 (옛) 파르테논Parthenon 신전神殿이 건립되었다. 파르테논 신전의 이름은 폴리스의 수호 여신 아테나가 ’파르테노스‘ 즉 그리스어로 처녀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즉 파르테논은 ’처녀 여신의 신전‘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이때 아테네는 귀족과 평민이 항쟁하는 정치적 과도기였다.

아테네는 본래 왕정王政으로 시작했으나, 9인의 아르콘이 통치하는 귀족정貴族政이 정착했고, 기원전 600년을 전후로 솔론Solon의 개혁이 이루어져 부유한 평민의 정치 참여가 보장되는 금권金權 정치가 실행되었다. 다만 기원전 6세기 후반에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가 독재자에 오르는 참주정僭主政이 되었다가, 클레이스테네스Cleisthenes에 의해 민주정民主政이 본격 도입되었다.


페르시아 전쟁

이때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주변 지역의 오리엔트 지역을 통일한 대제국 아케메네스 왕조(Achaemenid Empire)가 통치했던 페르시아Persia는 많은 폴리스를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에 불만을 품은 폴리스들은 이오니아Ionia(소아시아 서부 일대의 그리스 식민지 도시국가들)의 반란을 도화선으로 기원전 500년경 페르시아와 전쟁을 시작했다. 아테네는 반란을 일으킨 폴리스들을 지원함으로써 페르시아와 대립하였고, 기원전 490년에는 아테네 중심의 폴리스 연합군이 마라톤Marathon 전투에서 페르시아 대군을 격파하였다. 이 전투에서 자비로 참전한 시민들로 구성된 중무장重武裝 보병대의 이른바 밀집 대형 전술 팔랑크스Phalanx는 상당한 효과를 발휘했다. 그리스 북쪽 마케도니아Macedonia 왕국은 이 대형을 도입하여 보완했고, 훗날 알렉산드로스Alexandros대왕이 세력 확장을 하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은銀 광맥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이 시기에 때마침 아테네 근교의 라우리온Laurion에서 은銀 광맥이 발견되었다. 설왕설래 끝에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의 제안에 따라 은 수익으로 최신예 전함인 트리에레스Triērēs, 즉 삼단 노선三段櫓船을 건조했다.
강력해진 아테네 해군은 기원전 480년 세계 3대 해전 중 하나인 살라미스Salamis 해전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격파하였다. 3차에 걸친 페르시아 제국의 침공에서 비록 한 번 도시가 점령되어 불타긴 했지만, 결국 승리한 아테네의 그리스 내 입지는 급상승했고, 페르시아의 재침공에 대비한 폴리스들의 군사 동맹인 ’델로스Delos 동맹의 맹주‘가 되어 동지중해의 패권을 쥐게 되었다.


민주정의 발전

마라톤 전투까지만 해도 중장重裝 보병에 복무한 귀족과 부유층 중심의 엘리트 민주정이던 아테네는 에피알테스Ephialtes와 페리클레스Pericles의 주도 아래 노꾼(노잡이)인 무산계급 시민이 활약하게 되었고, 이후 이들의 발언권이 점차 커지면서 다수의 평민 남성도 참여하는 보편 민주정으로 거듭났다. 당시 25만가량의 인구 중 5만여 명에게 참정권이 있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 전쟁이 한창일 때, 에게해 교역의 요충지에 있는 아테네 남서부의 피레우스Piraeus에 항구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 피레우스항은 해군 기지로 사용되는 데 그치지 않고 후에 무역항으로 정비되어 아테네의 경제를 뒷받침하였다. 현재도 피레우스항은 무역선과 여객선을 맞이하는 항구로 기능하고 있다.


노예가 뒷받침한 영광



아테네는 아크로폴리스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이 아크로폴리스 북서쪽 기슭은 ’아고라Agora‘라는 광장이 건설되었다. 아고라는 ‘모이다’라는 뜻으로 많은 사람이 모이는 시민 생활의 중심지를 의미한다. 초기에는 시장이었지만, 많은 사람이 모이면서 점차 시민들의 정치 토론장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래서 정치색이 강한 아고라에는 오늘날 국회 의사당에 해당하는 건물이나 시 청사, 재판소와 같은 공공 관청이 세워졌다.

현재 아고라 유적지는 야외 박물관으로 활용되어 관람할 수 있다. 또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 민회는 아크로폴리스 서쪽에 자리 잡는 프닉스Pnyx 언덕에서 열렸다. 이곳에는 지금도 당시 정치가들이 연설하던 연단이 남아 있다.

약 1.5킬로미터 사방의 시가지를 둘러싼 성벽 바깥에 펼쳐진 농경지는 시민이 노예를 부려서 운영했다. 가장 번성한 시기에 아테네의 총인구는 약 25만 명이었고, 그중 3분의 1에 달하는 노예들이 가사일이나 은광 채굴 등에 종사했다. 아테네의 민주 정치는 이런 사람들에 의해 유지되었다.


철학과 문화의 도시



민주정을 확립한 아테네는 기원전 5세기 후반에 최대 번영기를 맞았다. 평화가 이어지며 아테네는 지중해 해상 무역의 중심이 되었고, 수학과 우주의 조화를 강조한 피타고라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소포클레스, 헤로도토스, 히포크라테스, 투키디데스, 아낙사고라스, 아이스킬로스, 에우리피데스, 아리스토파네스 등의 국내외 학자 및 작가들이 한데 모여 활약하는 등 문화적으로도 전성기를 맞았다.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 알렉산드로스대왕의 교육을 맡은 후 아테네로 돌아와 학당을 열기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방대한 학문을 집대성했고, 그 사상은 이슬람 철학과 중세 유럽의 철학 및 신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민주 정치 체제의 아테네에서는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극장은 또 하나의 민회장民會場으로 변론가가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 것처럼 극작가는 작품을 통해 시민의 마음을 흔들기 위해 무대를 만들어 연극을 상연했다. 대표적으로 아크로폴리스 기슭에 ’디오니소스Dionysos 극장‘이 있는데, 연극 감상은 시민에게 일종의 의무이기도 하였다.

아테네 민주정의 최전성기에 아크로폴리스에는 새로운 파르테논 신전이 들어섰다. 페르시아 전쟁 때 파괴된 옛 파르테논 신전이 정치가 페리클레스에 의해 재건된 것이다. 이 신전은 근교에 있는 펜텔리콘Pentelikon산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아름다운 색채를 자랑하고 있다. 파르테논 신전은 힘차고 장엄한 느낌이 특징인 도리아Doria식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옛 영광을 뒤로 하고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의 맹주로서 폴리스들을 이끌었지만, 페리클레스가 두창痘瘡(천연두天然痘, 시두時痘)으로 세상을 떠나자 혼란에 빠졌다. 여기에 펠로폰네소스Peloponnesos 동맹의 맹주인 스파르타Sparta와 싸운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기원전 404)을 거치며 경제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그리스 세계의 혼란을 틈타 필리포스Philippos 2세가 이끄는 마케도니아군이 북방에서 침입했고, 이후 스파르타를 제외한 폴리스들은 마케도니아 왕국의 지배 아래 놓였다. 이 마케도니아 왕국도 알렉산드로스대왕 사후 분열하였다. 기원전 276년 알렉산드로스대왕 휘하 장군의 손자가 안티고노스Antigonos 왕조 마케도니아를 건국하여 그리스 일대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168년 로마군이 안티고노스 왕조를 멸망시키면서, 그리스는 로마Roma 제국의 속주가 되고 말았다.

융성한 로마 제국은 기존 건물을 고치거나 공공 건축물을 새로 건설했고, 아테네도 잠시 활기를 되찾는 듯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가 널리 퍼지면서 도시의 신전들이 파괴되고 6세기에는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1세에 의해 철학 학원이 폐쇄되었다. 이렇게 학문과 철학의 중심이었던 아테네의 영광은 점차 잊혀 갔다.

이후 아테네는 십자군 국가와 오스만 제국과 같은 강대국의 지배를 받았고, 19세기에 독립 전쟁을 거쳐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그리스 왕국으로 독립을 이루었다. 당시 아테네는 전쟁으로 황폐해졌지만, 고대 그리스 문화를 화려하게 꽃피웠던 역사성을 인정받아 1834년 그리스의 공식 수도가 되었다. 이후 그리스는 1975년까지 왕정과 공화정을 거쳤지만, 아테네는 안정적으로 수도로 자리를 잡았다.

현재의 아테네는 아크로폴리스와 같은 유적지 등이 있지만 다른 유럽의 수도에 비해 관광지로서의 명성은 떨어진다. 고대 그리스의 중요한 도시였던 것은 맞지만 그 후 2천 년가량 별달리 중요한 역할을 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있던 유적도 거의 다 파괴되었고 녹지대도 가장 적은 편이다. ■


수메르 문명과 그리스 문명
서양 문화의 뿌리는 그리스⋅로마 문명이 아니다. 그보다 더 오래전에 꽃피었던 수메르Sumer 문명이다. 인류 문명의 시원 나라인 환국桓國 문명의 한 지류인 수메르 문명은 기원전 4000년경 지금의 이라크 땅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지역에서 시작된 도시 문명이다. 수메르 사람들은 동방의 ’검은 머리 족속‘에서 왔다고 한다. 이들은 설형문자楔形文字, 법전, 천문학, 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기초를 마련했다.

그리스 아테네는 기원전 5세기경 민주주의와 철학이 꽃피운 도시국가로, 수메르와는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 두 문명 사이에는 일정한 연관성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수메르Sumer → 바빌로니아Babylonia → 이집트Egypt → 크레타Creta → 그리스Greece 본토로 이어지는 문화 전파 경로가 있는 것이다. 크레타섬의 미노아Minoa(미노스Minos) 문명은 수메르와 이집트 문명에서 문자, 건축, 천문학, 수학 등을 받아들였고, 이는 다시 그리스 문명의 기초가 되기도 했다.

수메르의 60진법과 천문학은 바빌로니아를 거쳐 이집트와 그리스로 전파되어 그리스의 수학자들과 천문학자들에게 기초 지식을 제공해 주었고, 수메르의 신화와 종교 체계는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를 통해 그리스 신화에 일부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면 고대 바빌로니아의 길가메시Gilgamesh 서사시는 그리스의 영웅 서사와 유사한 구조를 보인다.

즉, 수메르 문명은 직접적으로 아테네와 연결되진 않지만, 중간 문명을 통해 서양 문명의 뿌리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 『30개 도시로 읽는 세계사』, 조 지무쇼 저자(글)⋅최미숙 번역⋅진노 마사후미 감수, 2020, 다산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