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심 신앙으로 다시 서다 | 밀양도장 김은자

[상생 인터뷰]

수많은 풍파와 전환, 포교의 기쁨과 오해의 시간까지 김은자 도생(밀양도장 상임포정)은 ‘일심 신앙’ 네 글자에 인생을 다시 묶었습니다. 대순 신앙을 거쳐 증산도에 입도하기까지, 그리고 도장 살림을 일으키고 책임자의 길을 걷기까지의 여정을 듣습니다.



Q 증산도를 만난 과정이 어떠했나요?




저는 어려서부터 온 가족이 상제님 신앙을 했습니다. 시천주 주문을 읽으며 치성을 올렸지요. 어린 마음에도 늘 ‘이 세상에 진리가 있다.’는 확신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결혼 후 부산에서 숯불갈빗집을 운영하며 사업이 잘되었지만, 삶의 풍파가 이어졌습니다. 결국 창원으로 옮겨 자갈구잇집을 열었는데, 그곳을 자주 찾던 손님들이 알고 보니 상제님을 신앙하는 단체의 간부들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그들과 교류하면서 대순 신앙을 시작하였고, 나름대로 열심히 포교도 하며 지냈습니다. 하지만 내부에서 여러 갈등과 어려움을 겪으면서 ‘참진리’에 대한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때 예전에 제가 포교했던 한 분이 찾아와 “증산도라는 진리를 꼭 보라.”며 『대순진리회의 비극』이라는 책을 건네주셨습니다. 처음엔 마음이 열리지 않았지만, 힘든 시기를 지나며 다시 책을 꺼내 읽었고 단 15분 만에 ‘이것이 참진리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날 밤 한숨도 못 자고 다음 날 바로 증산도 도장을 찾아갔습니다. 그곳에서 처음 어진을 뵙고, 이전과는 다른 따뜻함과 평안함을 느꼈어요.

‘아, 내가 찾던 진리가 바로 여기 있었구나.’라고 느끼던 그 순간이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습니다.


Q 입도 과정은 어떠셨나요?




도장 포정님께 “사업을 정리하고 입도하겠습니다.” 하고 말씀드린 뒤 당시에 운영하던 레스토랑을 정리하려 했는데, 팔리지가 않는 거예요. 하루라도 빨리 도장으로 가고 싶었지만 상황이 꼬이기만 했습니다. 그 스트레스가 너무 커서 결국 온몸에 대상포진이 번졌어요. 병원에 가도 낫지 않고, 옷조차 입기 힘들 만큼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때 깨달았어요. ‘이제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이걸 놓지 않으면 내가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가게도, 살림도 다 정리하고 정말 몸만 빠져나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입도하려니 입도 성금을 낼 돈이 없었습니다. 일할 수도 없으니 막막했지요. 당시에 보험을 거의 다 해약한 상태였는데, 문득 하나 남은 게 떠올라 그걸 찾아가 보니 딱 성금을 낼 만큼의 돈이 나오는 거예요. 그걸로 헌성을 하고 입도를 했습니다.

그때 저는 대상포진으로 거의 움직이지 못했는데, 그래도 병원에 가지 않고 도장에서 낫겠다는 마음으로 수행에 들어갔습니다. 4층 도장에 힘겹게 올라가 첫날부터 500배를 했어요. 그렇게 매일 수행하니 어느 순간 몸이 스스로 회복되더군요.


Q 신앙한 지 3개월 만에 포감, 1년 만에 천록 봉직을 시작하셨다고요?



그때 대순진리회에서 함께 나왔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을 제가 한 분 한 분 포교하기 시작했어요. 가족 단위로 입도하는 분들도 생겼죠. 그런데 그분들이 기존 습관을 완전히 내려놓지 못해 포감님들이 많이 어려워하셨습니다.

그 상황을 보신 포정님께서 “직접 맡아보라.”고 하시며 저를 3개월 만에 포감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그리고 1년 남짓 지나 천록 간부로 봉직하게 되었죠.

솔직히 감사하면서도 부담이 컸습니다. 다른 간부님들은 오랜 세월 공력을 쌓아 올라오셨는데, 저는 너무 빨랐거든요. 그래서인지 시기와 오해가 많았습니다. 저보다 포정님이 더 마음고생을 하셨죠.

그럴수록 ‘여기서 그만두면 나는 갈 곳이 없다, 꼭 이겨 내겠다.’는 마음으로 버텼습니다.


Q 힘들었던 시기를 새벽 수행을 통해 극복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려웠던 시기에 저는 새벽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도장이 멀어서 새벽 첫차를 타고 내려와 도장 불이 켜지길 기다렸어요. 두 시간쯤 지나서야 도생 한 분이 내려오시더군요. 그때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도장 근처로 이사했습니다. 그리고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청수를 올리고 5시에 수행을 했는데, 그 시간이 제 신앙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그때 의지했던 말씀이 『도전』 2편 43장이었습니다.

“천지신명이 나의 명을 받들어 가을 운의 대의大義로써 불의를 숙청하고 의로운 사람을 은밀히 도와주나니 악한 자는 가을에 지는 낙엽같이 떨어져 멸망할 것이요, 참된 자는 온갖 과실이 가을에 결실함과 같으리라.” (도전道典 2:43:5~6)

이 말씀을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언젠가는 진심이 드러날 것이다. 결국 저를 괴롭히던 분들이 모두 자연스럽게 떠나갔고, 저는 그 일을 계기로 더 큰 도장으로 옮겨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Q 가정의 큰 고비도 있으셨다고요?




할머니 손에서 자라던 제 둘째 아들을 초등학교 5학년 때 데려와 함께 도장에서 상주하게 됐습니다. 아이가 워낙 밝고 재능이 있어서 도장 식구들도 “저 아이는 누구냐.”라고 물을 정도였어요. 수행도 잘하고 친구들을 데려와 포교까지 도와주는 든든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학교에도, 도장에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께서 “며칠째 학교에 오지 않는다.”며 연락을 주셨고, 저는 곧장 찾아갔습니다. 사춘기였던 아이가 여러 사정으로 힘든 시간을 겪고 있었던 거예요.

그때 저는 상제님과 태모님 전에 “제 아이를 꼭 찾아 주세요.”라며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매일같이 천 배례를 올리며 울며 빌었습니다. 그러던 중 태상종도사님께서 꿈에 나타나셨습니다. 지하의 어두운 공간에서 하얀 도포를 입으시고 손을 펼쳐 한 바퀴 도셨는데, 흉한 형상의 존재들이 모두 사라지는 꿈이었어요. 그 순간 ‘아, 척신 복마를 쫓아 주셨구나.’ 하는 사실을 직감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 바로 소식이 왔습니다. “혹시 ○○○의 어머니신가요?”라는 전화였어요. 그렇게 아들을 무사히 찾았습니다. 아이를 마주했을 때는 나무라기보다 이해가 먼저였습니다. ‘사춘기니까 그럴 수도 있지.’라고 했지만, 현실적으로는 도장 상주를 계속할 수 없었고 아이의 안정을 위해 밖으로 나가야 했습니다. 그 일로 인해 천록 봉직을 내려놓았지요.

그 시점에서 저는 정말로 “내 신앙은 여기서 끝나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하루도 도장에 가지 않으면 신앙이 안 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런 상황 속에서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마음이 들었지만 쓸쓸한 마음으로 도장을 떠나게 되었어요.

그때 저는 ‘신앙이 끝났구나’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세상에서의 모든 일들이 점점 더 무겁게 다가왔고, 그 모든 책임을 내려놓아야만 한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제님께서는 저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Q 어떻게 마음을 다시 다잡으셨나요?




도장을 떠난 뒤에도, 상제님께서는 저를 완전히 놓지 않으셨습니다.

우연히 도장 바로 아래층에 있는 식당에서 주방 실장이 그만두는 일이 생겼는데, 제가 그 자리를 대신 맡게 되었어요. 낮에는 일하고, 밤 10시에 일이 끝나면 도장으로 올라가 배례와 수행을 하는 생활을 이어 갔습니다. 몸은 힘들었지만, 신앙을 이어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그러던 중 또 한 번의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도장이 이전하면서, 제가 근무하던 곳과 정반대 방향으로 옮겨진 거예요. 퇴근 후 도장에 갈 수 없다는 게 너무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도장과 집 중간 지점에 있는 다른 식당으로 직장을 옮겼습니다.

그곳에서도 저는 늘 도장을 향했습니다. 일을 마치면 식당에서 남은 반찬을 챙겨 도장으로 가져갔습니다. 그 반찬을 도생님들이 맛있게 드시고 “잘 먹었습니다.” 하고 인사하실 때면 마음이 따뜻해졌어요. 피곤해도 그 발걸음이 제게는 수행이자 감사의 시간이었습니다.

물론 반찬 봉지를 든 채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냄새가 나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면 눈물이 났어요.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다가도 막상 도장에 도착하면 마음이 풀리고, 또 다음 날이면 아무 일 없던 듯 새벽에 일어나 수행을 이어 갔습니다.
그렇게 다시 신앙의 끈을 놓지 않고 포교에도 힘썼습니다. “책임자는 못 되더라도 포교는 하자.” 그 마음 하나로 정성을 다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 시기가 제게 진정한 ‘생활 신앙’을 가르쳐 준 시간이었습니다.



Q 포교 과정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인연이 있을까요?



저는 신앙의 가장 큰 보람이 ‘한 사람을 진리로 인도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포교를 한 분들 중에 잊지 못할 대상자가 있습니다. 그분은 3대째 기독교를 이어 오던 집안의 장손으로, 가족 중에 목사님도 계셨고 집터에 교회까지 세운 분이었어요. 역사 찾기 서명 운동 현장에서 우연히 만나 인연이 되었는데, 그만큼 포교가 쉽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도장까지 인도했지만, 여러 사정으로 입도는 미뤄졌습니다. “진리는 맞지만, 지금 내 생활과는 맞지 않는다.”라는 게 이유였죠.

그 말을 들은 저는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보자는 각오로 천 배례를 시작했습니다. 하루하루 절을 하며 그분의 이름을 올렸고, 어느 날 도복이 닳아 떨어질 정도로 정성이 깊어졌습니다. 그때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며 “이래도 안 하시겠습니까?” 하고 전했습니다.

그분은 크게 감동했고, 이후 꾸준히 공부하며 결국 입도하셨습니다. 지금은 서로를 “친구야.”라고 부를 만큼 가까운 도반이 되었죠.

Q 도장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2019년 동지치성 때는 도장 전체가 큰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다른 도장들이 10명, 20명씩 입도 소식을 전할 때, 우리 도장은 단 한 명뿐이었어요. 책임자님이 많이 마음고생을 하셨죠. 그 모습을 보며 ‘우리라고 못 할 게 있나.’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불을 싸 들고 도장으로 들어가 새벽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수호사님과 저까지 단 두 사람이었지만, 꾸준히 청수 올리고 5시에 수행을 열어 가다 보니 도생님들이 한 분 두 분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새벽 수행 문화가 자리를 잡았어요.

수행만으로는 안 되겠다 싶어 본격적으로 입도 대상자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구역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포교했고, 그 결과 다섯 명의 입도 성과를 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다른 구역에서도 활발한 포교 열풍이 일었고, 도장 전체가 활기를 되찾았습니다.

그 무렵 제 하루는 늘 같았습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도장에서 청소와 수행을 하고, 7시에 출근했습니다. 퇴근 후에는 피곤해도 꼭 활동을 했습니다.

하루에 전단 한 장이라도 붙이지 않으면, 마치 천지에 죄를 짓는 것처럼 마음이 불편했거든요. 그래서 밤 12시가 넘어도 우리 집 근처 아파트 단지를 돌며 전단을 꽂곤 했습니다.

그 시절의 저는 단 한 가지 마음뿐이었습니다.
“상제님 진리를 전하는 일보다 더 큰 일은 없다.”


Q 다시 책임자를 맡게 된 계기와, 그 후 도장 생활은 어땠나요?




새벽 수행과 포교 활동을 계속 이어 가던 어느 날, 수호사님께서 저를 부르셨어요. “이제 다시 봉직을 하시지 않겠습니까?” 하고 정중히 말씀하셨죠.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지만, 진심이었습니다. 저는 손사래를 쳤어요.

“저는 나이도 많고, 부족한 게 너무 많습니다. 절대 안 됩니다.”라고 했죠. 특히 자신이 없었던 이유는 제가 ‘컴맹’이었기 때문입니다. 도장에서는 집정님과 수호사님들이 컴퓨터로 자료를 만들고 카톡으로 회의를 하는데, 그게 너무 두려웠습니다. ‘저건 대통령보다 더 대단한 일 같다.’고 생각했을 정도예요. 그래도 수호사님께서 “배우면 됩니다. 할 수 있습니다.” 하시기에, 용기를 내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다시 봉직의 기회가 열리면서 책임자의 길을 걷게 되었고, 한 달 만에 밀양도장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 보니 상황이 쉽지 않았어요. 봉사하시는 할머니 한 분과 저, 단 둘뿐이었고, 재정 부분 미정산 같은 현실적인 문제도 남아 있었죠. 처음엔 막막해서 눈물이 나더군요. 울려고 운 것도 아닌데, 매일 눈물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곧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내가 천하사 일을 하러 왔는데, 이렇게 있을 수는 없다.”라고 말이죠.

그때부터 직접 거리로 나가 패널 활동과 전단지 활동을 시작하고 컴퓨터도 배웠습니다. 그렇게 차근차근 배우다 보니, 어느 순간 컴퓨터도, 카카오톡도 두렵지 않게 되었어요.

처음엔 도장에 어르신들만 계셨습니다. 젊은 사람은 드물었지만, 저는 그분들과 친구처럼 지내며 함께 수행하고 이야기와 웃음을 나눴습니다. 때로는 서로의 사연을 들으며 함께 울기도 했죠.

낮에는 직장에 다니느라 바쁜 분들이 많지만, 그래도 시간이 될 때마다 도장에 와서 식사를 함께 하고 수행도 하면서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 주십니다. 이제 도장은 다시 웃음과 정성으로 채워졌습니다.


Q 봉직을 고민하는 분들에게 하실 말씀이 있나요?




자리가 사람을 만듭니다. 컴맹이던 저도 이렇게 섰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주저하지 말고, 과감히 도전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한 걸음 나서면, 그 자리가 여러분을 성장시켜 줄 것입니다. 다들 용기 내어 봉직자의 길에 나서 주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태상종도사님께서 주신 생명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며 마치겠습니다.

“사람은 망해 봐야 인생을 안다. 망해 보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인생의 그늘진 곳과 밝은 곳, 두 얼굴을 다 알 수 있겠는가. 살아서 평생토록 신앙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죽어서 신명이 되어서도 변하지 말고 받들어야 한다. 이것이 사상 신앙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정성이 지극할 것 같으면 하늘도 감동한다. 신명이 감응하는 그런 빨간 정성, 피가 지글지글 끓는 정성, 빙산도 녹일 그런 빨간 정성! 일심 신앙을 부탁한다.”

저는 이 말씀을 늘 마음속에 새기며 살아갑니다. 태상종도사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바로 그 ‘일심 신앙’, 저 역시 평생 그 길을 걸어가겠습니다.


김은자 포정의 신앙 여정은 한마디로 ‘일심一心’이었습니다.
풍파와 오해 속에서도 놓지 않았던 그 마음이, 다시 일어설 힘의 근원이 되었지요.
포교의 정성과 수행의 꾸준함은 한 인간이 어떻게 진리 안에서 새로 태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도장을 향해 반찬 봉지를 들고 걸어가던 그 걸음, 새벽 어둠 속에서 청수를 올리던 그 순간들이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그녀의 이야기가 신앙 앞에서 망설이는 이들에게 ‘할 수 있다.’는 용기와 ‘정성은 결코 헛되지 않는다.’는 믿음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