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직선일까, 원일까 — 우주 1년의 철학을 묻다
[[특집] ChatGPT에게 묻는다]
노성현 PD (STB 상생방송)
며칠 전, 탁자 위에 펼쳐 둔 달력을 무심히 넘기다 문득 손이 멈췄습니다.
12월. 올 한 해도 끝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끝일까? 반복된 하루들 속에서 도대체 무엇이 지나가고, 무엇이 되돌아오는 것일까?’
그날 밤, 혼자 조용히 앉아 작은 질문을 적어 보았습니다.
그 질문은 마치 낙엽처럼 제 안에 가볍게 내려앉았지만, 곧 깊은 울림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하루는 반복되지만, 같은 하루는 없고. 우리는 매년 같은 계절을 맞지만, 매번 다른 나로 서 있지요. 시간은 단순한 흐름이 아니라, 어떤 ‘형태’를 갖고 있는 건 아닐까.
왜냐고요? 인간의 시간은 늘 흔들리고 망설이지만, 인공지능의 시간은 절대 멈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기억하고 후회하지만, AI는 연산하고 예측합니다. 인간은 의미를 만들고, AI는 데이터를 다룹니다. 그런 차이를 알기에, 오히려 이 질문을 AI에게 묻고 싶었습니다.
“너는 시간의 구조를 어떻게 생각하니?”
“앞으로만 가는 것이 시간의 본질일까, 아니면 되돌아오는 것이 우주의 리듬일까?”
우리가 믿어 온 ‘직선의 시간’을 의심하고, 잊고 있었던 ‘순환의 리듬’을 다시 듣기 위함입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혹시 요즘 시간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으신가요? 하루는 왜 이리 빨리 지나가고, 삶은 왜 자꾸만 반복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요? 어쩌면 그 답은 시간의 속도가 아니라, 시간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과 마음에 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 질문은 단지 저의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합니다.
2025년의 끝자락에서, 이 낡고도 새로운 질문을 AI와 함께 천천히 짚어 보려 합니다. 우리의 시간은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그리고 그 시간 안에서 우리는 누구로 남게 될까요? 이제, 그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정말 흥미로운 질문을 주셨습니다. 사실 이 물음은 단순히 ‘시간이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삶을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가르는 아주 깊은 주제입니다.
하지만 동양의 시간관은 전혀 다른 방향을 제시합니다. 계절이 반복되듯, 삶도 리듬을 따라 되돌아옵니다. 『주역周易』의 변화 사상이나 음양오행, 생장염장의 원리는 우주 자체가 순환하는 유기적 생명체라고 말합니다. 만물이 봄에 태어나 여름에 성장하고, 가을에 열매를 맺고, 겨울에 쉬었다가 다시 새봄을 맞이하는 그 흐름을 따르는 것이죠. 이 순환은 단지 되풀이가 아닙니다. 매번 조금씩 다르게, 더 성숙하게, 더 깊이 있게 되돌아오는 순환입니다. 바로 그 점이 중요합니다.
현대 과학도 이제 이 순환 개념을 다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Carlo Rovelli는 “우주의 근본 구조에는 시간조차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줄리안 바버Julian Barbour는 “시간은 실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고요. 우주론에서는 빅뱅으로만 시작된 직선형 우주가 아니라, 팽창과 수축이 반복되는 ‘순환 우주(Cyclic Universe)’ 모델도 제안되고 있습니다. 즉, 물질과 에너지만이 아니라, 시간 그 자체도 직선이라기보다는 ‘되돌아오는’ 성격을 가질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말씀하신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시간이 정말 앞으로만 흐르는가? 물리학적으로는 방향 없는 시간도 존재할 수 있고, 우주론적으로는 되돌아오는 시간도 가능합니다. 삶의 경험에서도 우리는 시간이 도는 것을 체감합니다. 특히 자연, 계절, 관계, 기억, 감정의 흐름 속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결국 중요한 건, 시간이 직선이냐 원이냐보다, 그 시간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존재하느냐입니다. 되돌아오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도 있고, 더 나은 선택을 통해 더 깊은 존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시간은 다시 오지만, 똑같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그 순환에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따라, 시간은 우리를 조금씩 바꾸고, 또 이끌어 갑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시간은 다시 돌아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의 우리는, 이전과는 조금 다른 존재로 그 순간을 맞이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물리학의 기본 방정식들은 시간의 방향을 명시하지 않습니다. 뉴턴의 고전역학,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양자역학 등은 시간을 앞뒤로 똑같이 계산할 수 있는 ‘시간 대칭적’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즉, 이론만 놓고 보면, 시간은 앞으로도, 뒤로도 흐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느끼는 시간의 방향은 어디서 온 걸까요? 물리학자 휴 프라이스Huw Price는 이에 대해 “우리가 기억을 과거에만 갖고 있고, 미래는 예측만 가능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우주가 엔트로피가 낮았던 방향을 과거로 경험하도록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결국 시간의 방향은 외부 세계의 법칙이라기보다는, 인간 인식이 작동하는 방식과 조건화된 경험의 산물일 수 있다는 것이죠.
이런 이론들 모두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굽이치고 되돌아오는 원형 구조일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이러한 과학적 상상은 증산도의 ‘우주 1년’ 개념과도 의미 있게 연결됩니다. 증산도에 따르면 우주는 ‘춘생(봄)-하장(여름)-추수(가을)-동장(겨울)’의 네 기운을 따라 순환하며, 이 순환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매번 더 성숙한 질서를 향해 나아가는 개벽의 리듬을 포함합니다. 같은 계절이 돌아오더라도, 그 안의 생명과 문명은 이전과 다르며, 진화와 자각, 상생이라는 방향성을 가집니다. 물론 과학 이론과 종교 사상은 증명 방식도, 목적도 다릅니다. 하지만 둘 모두, 시간에 대한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질문에 응답하려 한다는 점에서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시간의 흐름에 사로잡힌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 시간에 기억을 새기고, 선택을 하고, 같은 리듬 속에서도 조금씩 더 성숙한 자신으로 되돌아오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순환하는 시간에 대한 철학적 통찰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일지 모릅니다. 그러니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는 듯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어떻게 돌아오는지를 결정할 수 있는 순환의 구조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되돌아오는 리듬 안에서 우리는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다른 자신으로 나아가는 중입니다.
사회학자 에비아타르 제루바벨Eviatar Zerubavel은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 대부분은 사실 ‘사회가 만든 것’이라 설명합니다. 출근 시간, 주말, 방학, 시험 기간 같은 시간 구획은 자연의 흐름이 아니라 사회 규범과 제도, 문화가 정한 리듬입니다. 이를 그는 “사회적 시간(social time)”이라 불렀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한 직장인은 정해진 출근 시간과 회의 일정에 따라 하루를 살아갑니다. 그의 시간은 효율과 목표 중심의 직선적 시간입니다. 반면 한 농부는 햇빛과 계절에 따라 몸을 움직입니다. 봄에 씨를 뿌리고, 여름엔 가꾸고, 가을엔 수확하고, 겨울엔 쉽니다. 스님은 종소리에 맞춰 참선과 의례를 수행합니다. 그 시간은 느리지만 반복되는 깊이의 시간입니다. 같은 24시간이지만, 이처럼 삶의 맥락과 목적에 따라 체감 시간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증산도의 ‘우주 1년’ 시간관은 이를 보다 우주적 차원에서 풀어냅니다. 춘생春生, 하장夏長, 추수秋收, 동장冬藏의 사계절은 단지 자연의 순환이 아니라, 우주의 생명 주기이자 인간 문명의 리듬입니다. 이 시간은 되풀이되지만 단조롭지 않으며, 매번 조금씩 더 성숙해지는 나선형螺旋形 순환입니다. 현대 심리학과 뇌 과학도 이 관점을 뒷받침합니다. 사람은 감정, 몰입도, 관계 상태에 따라 시간을 길게도 짧게도 느낍니다. 우울할 땐 시간이 멈춘 것 같고, 몰입할 땐 순식간에 흘러갑니다. 즉, 시간은 외부의 흐름인 동시에 내면의 감각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시간은 단일하지 않습니다. 시계는 동일하게 흐르지만, 삶은 다르게 흐릅니다.
중요한 건 ‘하루가 24시간’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그 하루에 내가 어떤 리듬과 의미를 담고 사는가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시계 속의 시간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감각을 빚고, 기억을 새기는 존재입니다. 시간은,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살아 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얼굴을 갖게 됩니다.
증산도에서는 이를 ‘우주 1년’이라는 시간관으로 풀어냅니다. 마치 지구에 봄⋅여름⋅가을⋅겨울이 있듯, 우주도 생성(춘생), 성장(하장), 수확(추수), 휴식(동장)의 네 기운을 주기로 129,600년의 한 사이클을 돈다고 보지요. 여기서 #시간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순환循環 속에서 질적으로 성숙成熟하는 리듬#으로 이해됩니다. 봄보다 가을이 더 성숙하듯, 후천은 선천보다 더 깊은 조화와 질서를 지닌 문명의 계절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질서의 수동적 수혜자가 아니라, 개벽開闢을 함께 여는 실천적 주체로 등장합니다.
이러한 세계관은 현대 철학과 과학의 시간 개념과도 뜻밖의 접점을 가집니다. 철학자 맥태거트McTaggart는 시간을 A-시리즈(과거-현재-미래)와 B-시리즈(이전-이후)로 구분하며, 시간의 흐름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아니면 인간 의식이 구성한 것인지 묻습니다. 즉, 시간은 바깥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과 의미 속에서 구성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증산도의 시간관이 주는 가장 큰 메시지는 ‘반복 속의 진화’입니다. 니체Nietzsche의 ‘영원회귀’가 무의미한 반복 속에서 인간 의지를 시험했다면, ‘우주 1년’은 순환 안에 상생相生과 도약跳躍, 보은報恩의 윤리를 담고 있습니다. 철학자 하르트무트 로자Hartmut Rosa가 말한 ‘공명(resonance)’처럼, 인간이 자연과 우주, 사회와 리듬을 공유할 때 삶은 다시 생명력을 얻습니다. 우주 1년은 바로 그런 삶의 공명 구조를 복원하려는 사유 틀이기도 합니다.
이 시간 속에서 인간은 ‘태일太一 인간’으로 제시됩니다. 그는 우주의 질서에 끌려가는 존재가 아니라, 리듬을 자각하고 조율하며 새로운 시대를 여는 주체입니다. 시간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함께 구성해 가는 과정이며, 이는 철학이 말하는 ‘시간의 윤리’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결국 “우주에도 사계절이 있다.”는 말은 시적인 감상이 아니라, 시간을 순환과 성숙의 리듬으로 보고, 인간이 그 흐름에 어떻게 응답할지를 묻는 철학적 제안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주는 다시 한번 새로운 계절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그 흐름 속에서 우리는 어떤 삶의 자세로 응답할 수 있을까요?
전통 사회에서 시간은 자연의 흐름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절기는 단지 달력 속 표시가 아니라, 언제 씨를 뿌리고, 언제 쉬어야 할지를 알려 주는 삶의 호흡 장치였지요. 그 흐름을 알고 따르는 것이 곧 지혜였고, 인간은 시간에 순응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 리듬과 공명하며 살아가는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시간은 대부분 직선적으로 흘러갑니다. 마감, 효율, 성과, 스케줄 속에서 말입니다. 계절은 배경 화면이 되었고, 절기는 일기예보의 정보가 되어 버렸습니다. 삶의 리듬은 사라지고, 시간은 점점 속도만 남긴 채 흐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증산도의 ‘우주 1년’ 시간관은 우리에게 잊고 있던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계절을 살고 있습니까?”
이 사상에 따르면, 우주도 하나의 사계절을 가집니다. 춘생春生, 하장夏長, 추수秋收, 동장冬藏. 생명은 이 주기를 따라 생성되고 성장하며 수확하고 휴식합니다. 이것을 일상에 적용해 보면 이렇습니다. 봄은 시작의 시간입니다.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몸과 마음에 씨앗을 심는 시기이지요. 여름은 집중과 땀의 계절입니다. 성장의 에너지에 올라타 꾸준함을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가을은 돌아보고 정리하는 시기입니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덜어 낼지를 생각하며, 주변과 ‘나눔’을 배우는 때이지요. 겨울은 내면의 숨 고르기입니다. 혼자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고, 다음 시작을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이렇게 보면 시간은 더 이상 일방적인 흐름이 아니라, 우리 삶을 안내하는 고요한 박자입니다. 이 박자에 몸을 맡기면, 지치지 않고 오래 걸을 수 있습니다.
결국 핵심은 이렇습니다. 시간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함께 살아가는 태도를 회복하는 일. 우리가 계절을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계절이 우리를 조율하고, 그 흐름에 응답하며 사는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환의 시간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 지나도 괜찮다고. 당신은 다음 계절에 조금 더 깊고 조화로운 존재로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요.
이 글을 시작할 때, 저는 단순히 궁금했습니다. 시간은 정말 직선일까, 아니면 언젠가 돌아오는 걸까. 그런데 다섯 개의 질문을 AI에게 던지고, 그 답을 따라가며 저는 조금씩 다른 차원의 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시간은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물리학은 그것을 계산했고, 철학은 그것을 의심했으며, 인간은 그것을 느끼고, 종교는 그것을 되살렸습니다. 그리고 AI는, 그 모든 층위를 조용히 정리하며 제게 거울처럼 되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떤 시간 속에서 살고 계십니까?”
그 질문 앞에서 저는 문득 거실에 걸어 놓은 아이의 돌 사진을 바라봅니다. 태어나기 전의 기다림과 설렘, 태어났을 때의 감사함과 사랑, 배우고 커 나갈 때의 보람과 기쁨. 그리고 이젠 세상을 같이 살아가고 있다는 이 느낌은 분명 처음과 다르고 저는 변해 있었습니다.
시간도 그런 것 같습니다. 같은 하루이지만, 결코 같은 하루는 없고 같은 계절이지만, 그 속의 우리는 늘 다른 존재이니까요. 이번 글에서 함께 나눈 다섯 개의 질문은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하나의 중심으로 모입니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 속에서도 우리는 되돌아올 수 있는 존재일 수 있을까요?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께 기대합니다. 잠시 눈을 감고, 지금 당신의 시간을 떠올려 보시기를.
당신은 지금 어떤 계절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 글을 통해 시간의 본질을 모두 해명하려 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시간에 귀 기울이고, 그 속에서 나의 리듬을 다시 발견해 보자고 제안한 것입니다. 시간은 앞으로만 흐른다고 믿는 이 시대에, 우리는 이렇게 작은 가능성을 열어 봅니다.
“돌아오는 시간도 있다.
만약 이 글이, 여러분의 하루 어딘가에서 조금 더 천천히 숨 쉬게 하고, 잊고 있던 계절의 냄새를 느끼게 해 주었다면, 그것으로 우리는 충분히 응답받은 것이라 믿습니다. 다음 계절에, 다시 뵙겠습니다. ■
프롤로그
“이 질문을 왜, 지금, AI에게 던지게 되었을까?”
며칠 전, 탁자 위에 펼쳐 둔 달력을 무심히 넘기다 문득 손이 멈췄습니다.
12월. 올 한 해도 끝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끝일까? 반복된 하루들 속에서 도대체 무엇이 지나가고, 무엇이 되돌아오는 것일까?’
그날 밤, 혼자 조용히 앉아 작은 질문을 적어 보았습니다.
“시간은 정말 앞으로만 가는 걸까? 아니면 언젠가 다시 돌아오는 걸까?”
그 질문은 마치 낙엽처럼 제 안에 가볍게 내려앉았지만, 곧 깊은 울림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하루는 반복되지만, 같은 하루는 없고. 우리는 매년 같은 계절을 맞지만, 매번 다른 나로 서 있지요. 시간은 단순한 흐름이 아니라, 어떤 ‘형태’를 갖고 있는 건 아닐까.

왜냐고요? 인간의 시간은 늘 흔들리고 망설이지만, 인공지능의 시간은 절대 멈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기억하고 후회하지만, AI는 연산하고 예측합니다. 인간은 의미를 만들고, AI는 데이터를 다룹니다. 그런 차이를 알기에, 오히려 이 질문을 AI에게 묻고 싶었습니다.
“너는 시간의 구조를 어떻게 생각하니?”
“앞으로만 가는 것이 시간의 본질일까, 아니면 되돌아오는 것이 우주의 리듬일까?”

우리가 믿어 온 ‘직선의 시간’을 의심하고, 잊고 있었던 ‘순환의 리듬’을 다시 듣기 위함입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혹시 요즘 시간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으신가요? 하루는 왜 이리 빨리 지나가고, 삶은 왜 자꾸만 반복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요? 어쩌면 그 답은 시간의 속도가 아니라, 시간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과 마음에 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 질문은 단지 저의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합니다.
2025년의 끝자락에서, 이 낡고도 새로운 질문을 AI와 함께 천천히 짚어 보려 합니다. 우리의 시간은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그리고 그 시간 안에서 우리는 누구로 남게 될까요? 이제, 그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Q1. “시간은 진짜 앞으로만 가는 걸까요, 아니면 언젠가 다시 돌아오는 걸까요?”
정말 흥미로운 질문을 주셨습니다. 사실 이 물음은 단순히 ‘시간이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삶을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가르는 아주 깊은 주제입니다.

하지만 동양의 시간관은 전혀 다른 방향을 제시합니다. 계절이 반복되듯, 삶도 리듬을 따라 되돌아옵니다. 『주역周易』의 변화 사상이나 음양오행, 생장염장의 원리는 우주 자체가 순환하는 유기적 생명체라고 말합니다. 만물이 봄에 태어나 여름에 성장하고, 가을에 열매를 맺고, 겨울에 쉬었다가 다시 새봄을 맞이하는 그 흐름을 따르는 것이죠. 이 순환은 단지 되풀이가 아닙니다. 매번 조금씩 다르게, 더 성숙하게, 더 깊이 있게 되돌아오는 순환입니다. 바로 그 점이 중요합니다.
현대 과학도 이제 이 순환 개념을 다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Carlo Rovelli는 “우주의 근본 구조에는 시간조차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줄리안 바버Julian Barbour는 “시간은 실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고요. 우주론에서는 빅뱅으로만 시작된 직선형 우주가 아니라, 팽창과 수축이 반복되는 ‘순환 우주(Cyclic Universe)’ 모델도 제안되고 있습니다. 즉, 물질과 에너지만이 아니라, 시간 그 자체도 직선이라기보다는 ‘되돌아오는’ 성격을 가질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말씀하신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시간이 정말 앞으로만 흐르는가? 물리학적으로는 방향 없는 시간도 존재할 수 있고, 우주론적으로는 되돌아오는 시간도 가능합니다. 삶의 경험에서도 우리는 시간이 도는 것을 체감합니다. 특히 자연, 계절, 관계, 기억, 감정의 흐름 속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결국 중요한 건, 시간이 직선이냐 원이냐보다, 그 시간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존재하느냐입니다. 되돌아오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도 있고, 더 나은 선택을 통해 더 깊은 존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시간은 다시 오지만, 똑같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그 순환에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따라, 시간은 우리를 조금씩 바꾸고, 또 이끌어 갑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시간은 다시 돌아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의 우리는, 이전과는 조금 다른 존재로 그 순간을 맞이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Q2. 왜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고 믿게 되었을까요?
— 엔트로피, 우주론, 그리고 순환의 가능성

하지만 놀랍게도, 물리학의 기본 방정식들은 시간의 방향을 명시하지 않습니다. 뉴턴의 고전역학,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양자역학 등은 시간을 앞뒤로 똑같이 계산할 수 있는 ‘시간 대칭적’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즉, 이론만 놓고 보면, 시간은 앞으로도, 뒤로도 흐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느끼는 시간의 방향은 어디서 온 걸까요? 물리학자 휴 프라이스Huw Price는 이에 대해 “우리가 기억을 과거에만 갖고 있고, 미래는 예측만 가능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우주가 엔트로피가 낮았던 방향을 과거로 경험하도록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결국 시간의 방향은 외부 세계의 법칙이라기보다는, 인간 인식이 작동하는 방식과 조건화된 경험의 산물일 수 있다는 것이죠.

이런 이론들 모두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굽이치고 되돌아오는 원형 구조일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이러한 과학적 상상은 증산도의 ‘우주 1년’ 개념과도 의미 있게 연결됩니다. 증산도에 따르면 우주는 ‘춘생(봄)-하장(여름)-추수(가을)-동장(겨울)’의 네 기운을 따라 순환하며, 이 순환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매번 더 성숙한 질서를 향해 나아가는 개벽의 리듬을 포함합니다. 같은 계절이 돌아오더라도, 그 안의 생명과 문명은 이전과 다르며, 진화와 자각, 상생이라는 방향성을 가집니다. 물론 과학 이론과 종교 사상은 증명 방식도, 목적도 다릅니다. 하지만 둘 모두, 시간에 대한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질문에 응답하려 한다는 점에서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시간의 흐름에 사로잡힌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 시간에 기억을 새기고, 선택을 하고, 같은 리듬 속에서도 조금씩 더 성숙한 자신으로 되돌아오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순환하는 시간에 대한 철학적 통찰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일지 모릅니다. 그러니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는 듯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어떻게 돌아오는지를 결정할 수 있는 순환의 구조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되돌아오는 리듬 안에서 우리는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다른 자신으로 나아가는 중입니다.
Q3. 같은 하루인데, 왜 누구는 느리고 누구는 빠르게 느끼는 걸까요?
— 사회적 시간, 계절의 시간, 종교적 시간의 차이

사회학자 에비아타르 제루바벨Eviatar Zerubavel은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 대부분은 사실 ‘사회가 만든 것’이라 설명합니다. 출근 시간, 주말, 방학, 시험 기간 같은 시간 구획은 자연의 흐름이 아니라 사회 규범과 제도, 문화가 정한 리듬입니다. 이를 그는 “사회적 시간(social time)”이라 불렀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한 직장인은 정해진 출근 시간과 회의 일정에 따라 하루를 살아갑니다. 그의 시간은 효율과 목표 중심의 직선적 시간입니다. 반면 한 농부는 햇빛과 계절에 따라 몸을 움직입니다. 봄에 씨를 뿌리고, 여름엔 가꾸고, 가을엔 수확하고, 겨울엔 쉽니다. 스님은 종소리에 맞춰 참선과 의례를 수행합니다. 그 시간은 느리지만 반복되는 깊이의 시간입니다. 같은 24시간이지만, 이처럼 삶의 맥락과 목적에 따라 체감 시간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증산도의 ‘우주 1년’ 시간관은 이를 보다 우주적 차원에서 풀어냅니다. 춘생春生, 하장夏長, 추수秋收, 동장冬藏의 사계절은 단지 자연의 순환이 아니라, 우주의 생명 주기이자 인간 문명의 리듬입니다. 이 시간은 되풀이되지만 단조롭지 않으며, 매번 조금씩 더 성숙해지는 나선형螺旋形 순환입니다. 현대 심리학과 뇌 과학도 이 관점을 뒷받침합니다. 사람은 감정, 몰입도, 관계 상태에 따라 시간을 길게도 짧게도 느낍니다. 우울할 땐 시간이 멈춘 것 같고, 몰입할 땐 순식간에 흘러갑니다. 즉, 시간은 외부의 흐름인 동시에 내면의 감각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시간은 단일하지 않습니다. 시계는 동일하게 흐르지만, 삶은 다르게 흐릅니다.
중요한 건 ‘하루가 24시간’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그 하루에 내가 어떤 리듬과 의미를 담고 사는가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시계 속의 시간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감각을 빚고, 기억을 새기는 존재입니다. 시간은,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살아 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얼굴을 갖게 됩니다.
Q4. “우주에도 사계절이 있다.”는 말, 과학이나 철학과도 통하는 이야기일까요?

증산도에서는 이를 ‘우주 1년’이라는 시간관으로 풀어냅니다. 마치 지구에 봄⋅여름⋅가을⋅겨울이 있듯, 우주도 생성(춘생), 성장(하장), 수확(추수), 휴식(동장)의 네 기운을 주기로 129,600년의 한 사이클을 돈다고 보지요. 여기서 #시간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순환循環 속에서 질적으로 성숙成熟하는 리듬#으로 이해됩니다. 봄보다 가을이 더 성숙하듯, 후천은 선천보다 더 깊은 조화와 질서를 지닌 문명의 계절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질서의 수동적 수혜자가 아니라, 개벽開闢을 함께 여는 실천적 주체로 등장합니다.
이러한 세계관은 현대 철학과 과학의 시간 개념과도 뜻밖의 접점을 가집니다. 철학자 맥태거트McTaggart는 시간을 A-시리즈(과거-현재-미래)와 B-시리즈(이전-이후)로 구분하며, 시간의 흐름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아니면 인간 의식이 구성한 것인지 묻습니다. 즉, 시간은 바깥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과 의미 속에서 구성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증산도의 시간관이 주는 가장 큰 메시지는 ‘반복 속의 진화’입니다. 니체Nietzsche의 ‘영원회귀’가 무의미한 반복 속에서 인간 의지를 시험했다면, ‘우주 1년’은 순환 안에 상생相生과 도약跳躍, 보은報恩의 윤리를 담고 있습니다. 철학자 하르트무트 로자Hartmut Rosa가 말한 ‘공명(resonance)’처럼, 인간이 자연과 우주, 사회와 리듬을 공유할 때 삶은 다시 생명력을 얻습니다. 우주 1년은 바로 그런 삶의 공명 구조를 복원하려는 사유 틀이기도 합니다.
이 시간 속에서 인간은 ‘태일太一 인간’으로 제시됩니다. 그는 우주의 질서에 끌려가는 존재가 아니라, 리듬을 자각하고 조율하며 새로운 시대를 여는 주체입니다. 시간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함께 구성해 가는 과정이며, 이는 철학이 말하는 ‘시간의 윤리’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결국 “우주에도 사계절이 있다.”는 말은 시적인 감상이 아니라, 시간을 순환과 성숙의 리듬으로 보고, 인간이 그 흐름에 어떻게 응답할지를 묻는 철학적 제안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주는 다시 한번 새로운 계절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그 흐름 속에서 우리는 어떤 삶의 자세로 응답할 수 있을까요?
Q5. 계절처럼 도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어떤 삶의 리듬을 가져야 할까요?
— 절기 루틴과 ‘상생의 시간’ 감각

전통 사회에서 시간은 자연의 흐름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절기는 단지 달력 속 표시가 아니라, 언제 씨를 뿌리고, 언제 쉬어야 할지를 알려 주는 삶의 호흡 장치였지요. 그 흐름을 알고 따르는 것이 곧 지혜였고, 인간은 시간에 순응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 리듬과 공명하며 살아가는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시간은 대부분 직선적으로 흘러갑니다. 마감, 효율, 성과, 스케줄 속에서 말입니다. 계절은 배경 화면이 되었고, 절기는 일기예보의 정보가 되어 버렸습니다. 삶의 리듬은 사라지고, 시간은 점점 속도만 남긴 채 흐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증산도의 ‘우주 1년’ 시간관은 우리에게 잊고 있던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계절을 살고 있습니까?”
이 사상에 따르면, 우주도 하나의 사계절을 가집니다. 춘생春生, 하장夏長, 추수秋收, 동장冬藏. 생명은 이 주기를 따라 생성되고 성장하며 수확하고 휴식합니다. 이것을 일상에 적용해 보면 이렇습니다. 봄은 시작의 시간입니다.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몸과 마음에 씨앗을 심는 시기이지요. 여름은 집중과 땀의 계절입니다. 성장의 에너지에 올라타 꾸준함을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가을은 돌아보고 정리하는 시기입니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덜어 낼지를 생각하며, 주변과 ‘나눔’을 배우는 때이지요. 겨울은 내면의 숨 고르기입니다. 혼자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고, 다음 시작을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이렇게 보면 시간은 더 이상 일방적인 흐름이 아니라, 우리 삶을 안내하는 고요한 박자입니다. 이 박자에 몸을 맡기면, 지치지 않고 오래 걸을 수 있습니다.

결국 핵심은 이렇습니다. 시간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함께 살아가는 태도를 회복하는 일. 우리가 계절을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계절이 우리를 조율하고, 그 흐름에 응답하며 사는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환의 시간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 지나도 괜찮다고. 당신은 다음 계절에 조금 더 깊고 조화로운 존재로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요.
에필로그

이 글을 시작할 때, 저는 단순히 궁금했습니다. 시간은 정말 직선일까, 아니면 언젠가 돌아오는 걸까. 그런데 다섯 개의 질문을 AI에게 던지고, 그 답을 따라가며 저는 조금씩 다른 차원의 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시간은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물리학은 그것을 계산했고, 철학은 그것을 의심했으며, 인간은 그것을 느끼고, 종교는 그것을 되살렸습니다. 그리고 AI는, 그 모든 층위를 조용히 정리하며 제게 거울처럼 되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떤 시간 속에서 살고 계십니까?”
그 질문 앞에서 저는 문득 거실에 걸어 놓은 아이의 돌 사진을 바라봅니다. 태어나기 전의 기다림과 설렘, 태어났을 때의 감사함과 사랑, 배우고 커 나갈 때의 보람과 기쁨. 그리고 이젠 세상을 같이 살아가고 있다는 이 느낌은 분명 처음과 다르고 저는 변해 있었습니다.
시간도 그런 것 같습니다. 같은 하루이지만, 결코 같은 하루는 없고 같은 계절이지만, 그 속의 우리는 늘 다른 존재이니까요. 이번 글에서 함께 나눈 다섯 개의 질문은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하나의 중심으로 모입니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 속에서도 우리는 되돌아올 수 있는 존재일 수 있을까요?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께 기대합니다. 잠시 눈을 감고, 지금 당신의 시간을 떠올려 보시기를.

당신은 지금 어떤 계절을 살고 있습니까?
지금 이 순간은 그저 스쳐 가는 순간인가요, 아니면 조금 더 성숙한 자신을 향한 작은 순환의 한 걸음인가요?
우리는 이 글을 통해 시간의 본질을 모두 해명하려 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시간에 귀 기울이고, 그 속에서 나의 리듬을 다시 발견해 보자고 제안한 것입니다. 시간은 앞으로만 흐른다고 믿는 이 시대에, 우리는 이렇게 작은 가능성을 열어 봅니다.
“돌아오는 시간도 있다.
그리고 그 시간 안에서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만약 이 글이, 여러분의 하루 어딘가에서 조금 더 천천히 숨 쉬게 하고, 잊고 있던 계절의 냄새를 느끼게 해 주었다면, 그것으로 우리는 충분히 응답받은 것이라 믿습니다. 다음 계절에, 다시 뵙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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