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천 인류의 수도, 태전

[열두 개 도시로 찾아가는 국통 맥 여행]
이해영 객원기자 (서울관악도장)


우리 역사의 중심지를 되돌아본 이유




고려 말 행촌杏村 이암李嵒 선생이 쓰신 「단군세기檀君世紀」 서문에 보면 “국유형國猶形하고 사유혼史猶魂하니…”라는 말이 있다. 나라라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형체形體 곧 몸과 같고 역사는 혼魂과 같다는 뜻으로, 역사를 잃는다는 것은 곧 민족의 혼을 잃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역사를 알아야 나라의 정신이 바로 선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국사國史의 현주소는 어떠한가? 한때 국사는 학생들의 교육 과정에 있어 선택 과목이었다. 그나마 국사 책에 실린 내용도 사대주의 역사 기록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고, 여기에 더해 일제 식민 사학에 따라 왜곡 조작된 내용을 아직도 그대로 가르치고 있다. 이렇게 잘못된 역사 교육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를 선천적으로 미개하고 무능한 민족으로 전락시키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다.

게다가 얼마 전에는 국사가 개인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세계화 시대에 걸맞지 않다는 이유로 ‘국사 해체론’까지 등장했다. 중국이나 일본은 없는 역사를 조작해서라도 부풀리기에 여념이 없는데, 우리는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기는커녕 그나마 있는 역사마저 해체하자고 나서니, 참으로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힐 노릇이다.

원시반본原始返本하는 후천 가을개벽을 목전에 두고, 본고에서는 올 한 해 동안의 연재를 통해 과연 우리 한민족의 역사는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그 장대한 역사가 어떻게 흘러 내려왔는지, 우리 역사의 진실한 뿌리와 맥을 짚어 보기 위해 시간의 흐름을 반대로 되돌려 본 바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시작으로 해서 우리 대한인들의 주요 중심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대한민국 이전의 대한제국大韓帝國과 조선朝鮮의 중심지 한양漢陽을 둘러보면서 나라의 핵심 근간이 되는 곳은 그 중심지에 맞는 땅의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물산과 교통의 거점이라는 점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이후 고려高麗의 황도, 개경開京을 들여다보고, 잘못된 입지 선정의 표본으로 삼을 만한 궁예의 태봉국泰封國 수도 철원鐵圓을 다루었으며, 후백제의 중심지인 지금의 광주光州와 전주全州 일대에서 세력을 떨쳤던 일세의 영웅 견훤도 만났다.

그리고 얼마 전 성공적으로 APEC(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 Asia-Pacific Economic Cooperation) 정상회의를 개최한 천 년 제국 신라新羅의 수도 경주慶州와 해동성국 발해渤海(대진국大震國)의 중심인 닝안(영안寧安) 지역을 살펴보았다. 더불어 우리 국통 맥의 중심핵인 고구려高句麗 제국의 중심지와 해양 제국 백제百濟 그리고 삼국 시대라는 역사 인식의 틀과 소위 임나일본부설에 의해 왜곡 날조된 700년 역사의 가야 제국伽倻諸國 중심지도 만나 보았다.

이어 우리의 국통 맥에서 송두리째 잘린 고구려의 뿌리 북부여北夫餘와 한민족 최전성기를 구가했던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았다. 또한 그 이전 시대인 {{배달국倍達國과 온 인류의 뿌리인 환국桓國, 그리고 마고대성님이 다스린 율국律國의 중심지까지 1만 년 너머의 시간 여행을 다녀왔다.


한민족 중심에 대한 예언 - 구변진단지도九變震檀之圖



이상에서 살펴본 우리 민족의 중심지 흐름을 보면 특이한 점 두 가지를 살펴볼 수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구변진단지도九變震檀之圖’이고, 다른 하나는 ‘감진간坎辰(震)艮-간 도수艮度數’의 원리이다.

‘구변진단지도’는 ‘구변지국九變之局’ 또는 ‘구변도국九變圖局’이라 불리며, 우리나라의 왕조가 아홉 번 변한다는 것이다. 9는 3의 세제곱(3×3×3)으로, 완전수完全數이자 진수眞數로 불리고 우주의 이치와 조화의 극치로 해석되며 궁극을 상징한다. 이 9를 지나면 동양 철학에서 모든 수의 끝이자, 모든 수가 하나로 모이는 ‘완성’과 ‘통합’으로 여겨지는 10의 세상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10은 단순한 숫자를 넘어 완전함, 온전함 그리고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는 궁극적 상태를 나타낸다.

율국-환국-배달국-단군조선-고구려(백제, 신라, 가야 등)-대진국(후신라)-고려-조선-대한민국(북한)의 9단계가 지나면 우리가 염원하는 세상이 온다는 이야기이다.

이 ‘구변진단지도’는 권근이 지은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신도비문이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동문선東文選』, 『금석총람金石總覽』 등에도 관련 내용이 등장하며,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도 “구변지국이 사람 뜻이겠는가(九變之局이 사 디리가).”라는 구절이 있다.


감진간의 원리


‘감진간坎辰(震)艮’은 간 도수艮度數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즉 우리 민족의 중심지가 이동 발전해 가는 방향을 원리적으로 설명하는 말이다.

마고대성님이 계셨던 율국은 현재 북극에 가까운 시베리아의 감방坎方에서 시작되었고, 이어 배달국-단군조선-북부여-고구려는 만주 지역의 동방, 즉 진방辰(震)方을 중심지로 하여 동아시아 일대로 성장 발전하였으며, 이후 한민족의 중심 세력은 동북 간방艮方, 즉 지금의 한반도로 이동하여 성숙하고 열매를 맺는다는 원리이다.

간艮은 주역의 쉰두 번째 괘인 중산간괘重山艮卦(䷳)로, 산이 겹쳐 있는 형상이며 멈춤과 시작, 끝과 시작이 교차하는 지점을 상징한다. 그래서 간은 만물의 끝과 새로운 시작이 이루어지는 방향으로, 우주의 통치자이신 상제님께서 강세하시어 말씀을 이루는 자리란 뜻이다. 도수度數는 ‘섭리적 시간의 순환’ 또는 ‘우주적 이치에 따른 변화의 순서’라고 할 수 있다.

이 간 도수의 시작은 {[북부여}}北夫餘의 건국부터라고 볼 수 있다. 즉 단군조선이 혼란에 빠진 BCE 239년에 이를 계승한 해모수解慕漱 단군께서 북쪽에 북부여를 세웠다. 그리고 남쪽에는 BCE 195년에 최숭崔崇이 평양에 낙랑국樂浪國을 세우고, 막조선과 번조선의 백성들이 더 남쪽으로 이동하여 지금의 한강 이남에 남삼한南三韓을 수립했다. 바로 이때가 1단계 남북국南北國 시대로서 우리 민족이 간 도수 실현을 위해 간방 땅으로 좁혀 들어오는 첫 발자국을 떼는 시점이라 할 수 있다.

그 후 만주를 비롯한 대륙 강토를 지켜 온 고구려(BCE 58~CE 668)가 668년에 나당 연합군에게 망하자, 대동강 이남의 고구려인들은 후신라後新羅(통일신라)로 흡수되었다. 이때 대조영의 부친 대중상大仲象이 만주 땅에 남은 고구려 유민들을 규합하여 고구려의 정통 계승 국가인 대진국大震國(발해渤海 668~926)을 세움으로써 남쪽의 신라와 대치하는 두 번째 남북국 시대를 열었다.

세 번째 단계는 오늘날의 남북한南北韓 분단이다. 고려, 조선, 대한제국 시기를 지나 대일 항전기를 거쳐 1945년 일제의 강압에서 해방을 맞이한 한반도는 삼팔선을 경계로 나뉘어 북쪽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세워지고, 남쪽에는 우리 대한민국이 들어섰다. 그리고 1950년 6월 민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후 3년 만에 휴전과 함께 남북한으로 분단되고 말았다. 지금의 남북 대치 상황은 #남북 분단 시대의 최종 단계#이며. 이는 곧 종식이 될 것이다.

이는 구변진단지도와 간 도수가 합치되는 부분이다. 세 번 변화를 거쳐 온 한민족의 남북국 시대는 장차 가을개벽의 중심 땅이 될 간방에서 실현되는 인류 문명의 대통일 도수, 즉 간 도수에 의해 그 마침표를 찍게 된다. 그럼, 이 간 도수의 중심지는 어디일까?


통일 이후의 중심지는



남북통일 이후 간 도수의 중심지를 모색해 볼 때, 현재의 중심지인 평양과 서울은 적격한 곳으로 보기 어렵다. 우선 평양은 사회주의 사상에 너무 경도되어 있고, 김일성 3대 세습의 악폐로 그 생명력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서울은 경제 중심지로서 그 역할은 매우 크겠지만, 집값 거품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가기에는 그 힘이 다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북한 주민들의 심리적 반발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주목할 만한 곳은 현재 대한민국의 행정 중심지인 세종특별자치시와 그 인근의 대전광역시를 포함한 충청도권이라고 할 수 있다. 충청권은 그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또한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경부고속철도, 경부선, 호남선 철도가 분기하고, 경부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지선, 통영대전고속도로, 서산영덕고속도로 등 주요 고속도로가 연결되는 교통의 중심이고 인근에 청주국제공항도 있다. 또한 대전은 정부 청사가 위치한 도시이다. 인근 세종시와 연계되어 현재도 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과학 기술 중심지로도 유명하여 KAIST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대덕연구단지 등이 자리 잡고 있고, 1993년 세계 박람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여 과학 도시로서의 위상을 확립하였으며, 2011년에는 국제 과학 비즈니스 벨트 거점 도시로 지정되었다.


대전大田인가 태전太田인가?




현재의 대전을 살펴보기 전에 이 지역 지명에 얽힌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한다. 바로 ‘대전大田’인가 ‘태전太田’인가이다. 본래 대전 지역은 특별한 지명이 없었다.

원래 이곳은 어떠했을까? 고구려, 백제와 신라의 접경 지역이던 이전 시절에는 그렇게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은 아니었던 듯싶다. 그래도 인근 공주시의 구석기 시대 유적인 석장리 유적과 대전광역시 대덕구 용호동 유적으로 보면 청동기 시대부터는 사람이 본격적으로 살았던 것 같다. 이후 백제 성왕 시절에는 공주와 묶여서 백제의 북방에 속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후 넓은 지역에 콩이 많이 재배되어 사람들 간에 넓은 콩밭을 뜻하는 ‘한밭’으로 불렸다. 역사적으로 사서史書에 지명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조선 초기로 한밭을 한자로 기록한 대전大田이라는 지명이 처음 등장했다. 그러다 1904년 일제가 경부 철도를 놓으며 노선을 확정할 때 한밭을 지나가게 되었고, 이때 역 이름을 태전太田역으로 하고 일본 관보에 실음으로써 처음으로 지명이 등장했다. 초기 대전역은 대전과 옥천 사이인 증약 부근에 세워질 예정이었으나 당시 사정 때문에 현 원동사거리 대전우체국 자리 건너편에 태전太田 정거장이 세워졌다.

태전 정거장이 원동사거리 부근에 세워지면서 점차 열차 관련 인력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이에 수반한 삶의 상업적 공간들도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면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살기 시작했다. 이후 도시로 발전해 가고 있었다.

그런데 1909년 1월 13일, 기차를 타고 대한제국 순종 융희제와 함께 태전을 지나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이곳 지명이 태전이라는 말을 듣고 산세를 살펴보고 놀라면서 여기서 장차 조선의 큰 운이 발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했다고 전한다. 이에 이토 히로부미는 태太가 콩 태 자도 되지만 클 태 자이기도 하므로, 태전의 태太에서 점을 떼서 대전大田으로 바꾸라고 하였고, 그 뒤부터 대전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이런 논쟁이 있으니 다가오는 미래를 위해서라도 다시 한번 지명을 손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즉 대전, 세종, 공주, 계룡의 4개 도시를 합해 클 태太, 밭 전田 자를 써서 ‘태전太田’이란 이름으로 새로 짓는 것이 세계 중심 국가가 되는 우리나라의 국운과 맞을 것이다. 그러면 대한민국을 넘어서서 세계 제1의 도시가 될 것이다. 이미 정부는 세종-대전-청주를 합하는 메가시티megacity 계획을 하고 있다.

클 대大 자는 대소大小처럼 ‘크다’라는 뜻으로 사용하지만,​ 클 태太 자는 ‘크다’라는 뜻 외에도 ‘근원’이라는 뜻이 강하다. 한 국가를 창업한 시조를 태조太祖라고 하지 않는가. 우주가 일어난 경계를 『열자列子』에서는 태역太易-태초太初-태시太始-태소太素라고 하면서 ’태‘ 자를 붙이고 있다. 그러므로 태전太田이라고 하면 새로운 시대의 세계 최고 도시를 이르는 말로 적절할 것이다.


역사 속의 대전



전통 시대의 대전광역시는 태전 서북쪽의 유성현儒城縣, 동북쪽의 회덕현懷德縣과 남서쪽의 진잠현鎭岑縣이 있었다. 특히 대전광역시의 대표적인 산인 봉황산鳳凰山(계족산鷄足山)의 아래 회덕읍懷德邑은 조선 후기 당대의 거유巨儒 우암 송시열宋時烈과 동춘당 송준길宋浚吉이 거주하였고, 많은 유학자를 배출한 곳이다. 다만 재화가 풍부한 것은 아니어서 목화 재배를 중심으로 하는 산촌 경제에 머물렀다.

작은 현에 불과했던 태전은 대일 항전기를 거치면서 대전리 → 대전면 → 대전읍 → 대전부로 급성장하였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대도시로 주목을 받기에 이르렀다. 근대 이전까지 역사적으로 별다른 이목을 끌지 못했던 태전의 도시 발전은 주변의 지리적인 산세와 수세가 어우러진 결과로 볼 수 있다. 여기에 경부선 철로의 개설로 시작된 교통의 비약적인 발전은 기존 물길보다 더 많은 인간의 이동과 재화의 이동을 가져왔다. 풍수에서 물길이나 도로는 재물財物이라고 보는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태전의 성장과 발전은 그 끝을 알 수 없을 것이다.


태전의 지리




태전은 현재 대한민국의 중앙부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중도中都라고도 부른다. 태전의 서쪽에 있는 계룡산鷄龍山에는 중악단中嶽壇이 있을 정도로 국토의 중앙임을 드러내 주고 있다. 서울과 경기의 현 수도권과 영남⋅호남을 잇는 삼남의 관문이며, 고속도로와 철도, 국도가 분기하는 대한민국 교통의 중심지이다. 대전광역시청을 기준으로 직선거리는 서울까지 139킬로미터, 부산까지 200킬로미터, 대구까지 121킬로미터, 광주까지 140킬로미터로 사통팔달의 요지이다.

태전의 북서쪽으로 세종특별자치시世宗特別自治市, 서쪽으로 충청남도 공주시公州市, 남서쪽으로 논산시論山市⋅계룡시鷄龍市, 남쪽으로 금산군錦山郡, 북동쪽으로 충청북도 청주시淸州市, 동쪽으로 옥천군沃川郡⋅보은군報恩郡과 인접해 있다.

태전의 산줄기와 물줄기




태전은 금강의 남서쪽을 지나는 금남정맥錦南正脈의 지형적 흐름에 따른 독특한 하계망河系網을 구성하고 있으며 남고북저南高北低의 지형적 특성이 있다. 백두대간인 덕유산德裕山 줄기의 수분치水分峙로부터 흘러오는 물줄기와 더불어 태전을 향하는 많은 물줄기가 북쪽을 향하여 흐르고 있는 모습이다. 물이 북쪽으로 흐른다는 것은 북쪽이 열리는 지형과 지세를 갖추고 있다는 의미다. 금강錦江의 물길이 대전광역시의 동북 방향에 있는 세종특별시 앞에서 다른 지류와 합수하고 서쪽으로 흘러 서해에 이른다. 대전은 산줄기가 뻗어 내려와서 그사이의 물줄기와 함께 서로 휘감아 둥그스름하게 굽이쳐 태극 모양을 이루고 있는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의 형세라고 할 수 있다.

태전의 동부와 남부는 비교적 고지대이며, 서부와 북부는 낮은 구릉지와 평야가 전개되어 저지대를 이룬다. 대전의 동부에는 봉황산鳳凰山(계족산鷄足山, 398.7미터), 개머리산(견두산犬頭山, 365미터), 함각산函角山(314미터)이 있고, 서쪽으로는 계룡산鷄龍山(845미터)과 우산봉雨傘峰(573.8미터), 갑하산甲下山(469미터), 빈계산(414미터)으로 이어지는 계룡산 자락이 있다. 대전 남부에는 봉무산鳳舞山(보문산寶文山, 457.3미터)이 있고, 서남부에는 구봉산九峰山(264미터)이 있으며, 동남부에는 대전에서 가장 높은 산인 식장산食藏山(597.4미터)이 있다. 대전의 북부에는 금병산錦屛山(345미터)과 매방산梅芳山(182미터), 불무산(161미터) 등 100미터 내외의 낮은 언덕으로 되어 있다. 태전의 중심부는 충적 평야가 발달해 도시와 농경지로 활용되는데, 여러 하천이 도시를 관통하며 금강과 합류하게 된다.

금강은 대전의 동부에서 북부를 흐른다. 갑천甲川, 유등천柳等川, 대전천大田川이 합류하여 북쪽의 금강으로 흘러 들어가며 그 강변으로 넓은 평야가 발달해 있다. 유등천과 대전천은 탄방동과 오정동에서 합류하고 이 물길은 대화동과 도룡동에서 갑천과 합류한다. 서쪽에서는 진잠천⋅유성천儒城川⋅반석천盤石川⋅탄동천炭洞川⋅관평천官坪川이 갑천에 합류한다. 대전의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갑천은 신탄진에서 금강과 합류한다.

갑천, 유등천, 대전천 연변에는 해발 고도 40미터의 넓은 충적지가 형성되어 있고, 충적지 주변에는 경사가 완만한 산록 완사면이 펼쳐져 있다. 이 충적지와 구릉지는 대전의 농경, 거주, 산업 활동의 기반이 되는 중요한 지형이다. 대전의 동부 금강 유역에는 대한민국 3대 호수인 대청호大淸湖가 있어서 수자원이 풍부하다.

하지만 현재 대전광역시 분지 안의 물은 도시화되면서 부족한 게 현실이다. 대전의 3대 하천(대전천, 유등천, 갑천)은 산업용수와 농업용수의 과대 사용으로 점차 부족해졌고, 무분별한 땔감용 벌목으로 인하여 장마 때에 토사가 흘러내려 이제는 얕은 하천으로 전락한 상태이다. 비록 대청호를 식수와 여러 공업용수로 사용하지만, 자체 물 수급에 대한 다각적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는 3개 하천의 준설이 필요하다는 말이며, 이러한 준설 조치는 하천 수량의 증가를 가져오고, 이는 여름철이나 겨울철에 주변의 온도가 급변하지 않도록 나름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뜻이다. 생태 환경 측면에서 도심 안의 물길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대전의 행정구역과 인구



현재 대전광역시의 행정구역은 대체로 3대 하천의 물길을 따라 구획되어 있다. 대전천의 동쪽은 동구東區와 대덕구大德區, 대전천에 유등천 사이는 중구中區, 유등천에서 갑천 사이는 서구西區, 갑천의 서쪽은 유성구儒城區, 갑천의 동쪽은 대덕구大德區이다.

1989년 대전은 직할시直轄市로 승격되었고, 1995년 지방자치제 시행과 함께 #광역시#廣域市로 전환되었다. 이 시기에 대전은 대규모 주거 단지와 산업 단지 개발을 통해 충청권의 핵심 도시로 자리매김하였다. 대전은 ‘과학과 행정의 도시’로 특화되었으며, 대덕연구개발특구를 중심으로 한 첨단 산업과 연구 기관이 집중되었다가 수도권 집중과 저출산⋅고령화의 영향으로 인구 증가세는 둔화하였다. 2025년 현재는 약 145만 명 내외로 집계된다. 과거 급격한 인구 성장을 이끌었던 연구 단지와 행정 기능은 여전히 주요 축으로 기능하고 있으나, 청년층의 수도권 유출과 자연 감소로 인하여 인구는 점차 감소하는 추세를 보인다. 그렇지만 대전광역시는 여전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과학 기술 연구의 중심 도시로서 그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대전이 직할시로 승격된 이후의 첫 대선인 14대 대통령 선거부터 19대 대통령 선거까지 대전에서 우세한 득표를 얻은 후보가 모두 대통령에 당선되었기 때문에 대전은 대한민국 민심의 캐스팅보트casting vote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전광역시의 경제와 산업



대전광역시는 주요 제조업 도시로 대덕구 갑천 언저리의 공업 단지와 유성구 탑립동의 대덕테크노밸리 등에 380여 개의 기업이 입주해 있다. 주요 기업으로 KT&G, 한라공조, 계룡건설산업 등이 있다.

세계적 과학 학술지 〈네이처Nature〉는 2017년 발간한 특별판 『2017 과학도시(Science Cities)』에서 대전이 한국 기초과학의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 대전⋅서울, 스페인 바르셀로나⋅마드리드, 중국 베이징⋅광저우⋅상하이⋅선전, 미국 뉴욕, 영국 런던 등 10개 도시를 대표적인 과학 도시로 선정해 소개하며, 대전은 대덕연구개발특구 내 정부출연 연구기관을 비롯해 한국과학기술원(KAIST)과 LG화학 기술연구소 등 기업부설 연구소에 10,000명이 넘는 연구원이 모여 있어 협업을 통해 동반 상승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평가했다.

또한 대전은 사면팔방으로 통하는 광범위한 교통망을 가지고 있어 서비스업과 전국 물류 산업의 거점 도시로 발달하였다. 또한 특이하게도 107개 기업의 콜센터 본부를 대전에 건립하면서 1만 4천여 명의 고용 효과와 경제적 파급 효과를 유발하고 있다.


성심당聖心堂과 ‘노잼’ 도시 대전광역시



대전광역시는 최근까지도 ‘노잼 도시’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관광⋅여가 자원이 부족하다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빵집 〈성심당聖心堂〉 등으로 대변되는 지역 특색과 축제, 도시 인지도 강화로 긍정적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2017년경부터 온라인 커뮤니티와 방송을 통해 대전은 ‘노잼 도시’라는 이미지가 확산하였고, 시청 공식 페이스북 등에서도 자조적으로 이를 언급할 정도로 지역 내외에서 널리 인식되었다. 대청댐과 계룡산 등 일부 명소가 있지만, 전국적인 관광 상품은 〈성심당〉 정도에 그친다는 평가가 많았다.

대전광역시 중구 은행동에는 1956년 밀가루 두 포대로 찐빵을 만들며 시작된 빵집이 하나 있다. 한국전쟁 당시 월남한 부부는 서울로 가서 터를 잡기 위해 기차로 이동하던 중 대전역에서 열차가 고장이 나는 바람에 대전광역시에 정착하게 되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이들은 대전역 근처 대흥동성당에 찾아가 사정을 설명했고, 이를 안타까워한 신부는 밀가루 두 포대를 주었다. 그 부부는 밀가루로 찐빵을 만들어 대전역 앞에서 팔기 시작했다. ‘모든 이가 다 좋게 여기는 일을 한다’라는 경영 이념을 지닌 대전광역시의 대표 빵집 〈성심당〉의 출발이었다.

글쓴이도 〈성심당〉 빵을 좋아한다. 대표 메뉴인 ‘튀김소보로’는 물론이고 요새는 ‘보문산메아리’에 ‘케이크’까지. 대중의 입맛을 사로잡은 〈성심당〉은 대전광역시 이외 지역에는 점포를 내지 않고 있다. 〈성심당〉 빵 맛을 느끼려면 대전광역시에 방문하라는 강한 자부심의 메시지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성심당〉은 대전광역시의 정체성을 담고 있는 향토 기업이 되었다. 태전을 방문한 거의 모든 사람들의 손에는 으레 〈성심당〉 빵 봉투가 들려 있을 정도다. ‘빵의 도시 대전’을 만든 것이 〈성심당〉이다.

〈성심당〉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지면서, 빵과 관련된 축제(2024년 대전 빵 축제 등)가 열리고, 관광객도 많이 방문해 2024년 5~7월 기준, 대전은 광역 지자체 도시 인지도 평판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여기에 19년 만에 정말 잘했던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의 활약까지 더해지면서 대전광역시는 ‘알고 보니 재미있는 도시’라는 인식이 확산하고 있다.

이 밖에도 대전광역시에는 오월드, 한밭수목원, 계족산 황톳길, 대청호반, 장태산(장태산 자연휴양림), 대전 둘레산길, 동춘당, 대전 문화예술단지, 으능정이 문화의 거리, 유성온천 등의 문화 관광 명소들이 있다.


뿌리공원과 2025년 효 문화 축제

대전에는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문화 테마 공간이 자리를 잡고 있다. 바로 모든 세대가 함께 즐기며 우리의 뿌리를 되새길 수 있는 뿌리공원이다. 국내 유일의 효孝 문화 테마 공원으로 244기의 성씨별 조형물과 한국족보박물관, 효문화진흥원, 팔각정자, 수변 무대, 분수대, 만성보(라바댐), 산림욕장 등이 조성되어 있다. 가족 모두가 함께 산책하고 배우며 교감할 수 있는 도심 속 자연형 공원이다. 이는 단순히 먹고 즐기는 공간이 아닌 조상과 가문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고, 자기 뿌리를 찾아보는 공간이다.


연재를 마무리하며



본 연재 기사의 주제는 바로 ‘뿌리 찾기’였다. 우리 민족의 뿌리를 알아보기 위해 과거 선조들이 활동하던 공간을 탐색하고 역사의 의미를 되새기며 그 원류를 찾아보았다.

이제 우리가 살아왔고 조상과 나와 내 후손이 터 잡고 살아가야 할 곳을 찾는 여정은 대전광역시의 뿌리공원에서 그 쉼표를 찍으려 한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는 우리 모두, 자손과 조상이 함께 어우러지며 열어 나가는 것이기에... ■


〈참고문헌〉
* 『역주본 환단고기』, 안경전, 2012, 상생출판
* 『온 국민을 위한 대한민국 역사교과서 2』,대한민국 역사교과서 편찬위원회, 2024,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