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맞은 한국사
[이 책만은 꼭]
우리 역사만 왜 이러는 걸까?
우리 역사에 관심을 두고 공부를 해 보거나 연구해 보면 가슴이 답답해지는 경우가 많다. 보이지 않은 투명 유리 벽으로 막혀 있는 느낌이다. 우리의 시원 역사부터 해서 무엇인가 뿌연 안개 속에 가려져 있다. 어떤 정해진 틀 안에서만 역사를 바라봐야 하고, 이에 대해서 어떤 의문 제기나 논의는 일체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틀 밖을 벗어나면 ‘재야’나 ‘비전문가’, ‘사이비’라는 모독적인 프레임을 덧씌우는 것도 비일비재하다. 역사 연구는 특정 집단만이 소유한 것처럼 보이는 게 우리 역사다.
우리 자신이 이러다 보니, 이웃에서 바라보는 우리 역사 역시 본래 모습이 아닌 왜곡된 형태로 보고 있다는 인상을 버릴 수 없다. 어느 나라든 신화와 전설로 시작되어 늘 ‘찬란한 우리 역사의 시작’이라는 자부심이 섞여 있는 뿌리 역사가 유독 우리나라에선 잘려 나가 있다. 단군조선 이전 역사는 말할 것도 없이 국조國祖를 부정하면서 소위 건국절이니 하는 논란을 만들어 내고 있다. 중국이나 일본만 해도 자신들 국조를 부정하지는 않는데 말이다.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을 부정적으로만 보고, 외세의 영향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모습이 너무 많이 보인다. 우리가 쓴 기록보다는 선입견과 편견을 가진 외국인이 쓴 몇 줄 안 되는 기록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며 우리 모습을 그려 내려 하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 역사를 연구하는 이들의 자세 또한 마뜩잖다. 당대에 쓰인 사료인 1차 사료를 우선시해야 함에도, 1차 사료를 보고 쓴 논문이나 저서인 2차 사료를 절대 가치가 있는 것처럼 말하고, 이를 바탕으로 교과서를 서술해 오고 있다. 도대체 우리 역사만 왜 이러는 것일까? 답답함을 금할 수 없다.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이덕일 선생의 저서들
이런 때에 우리 민족사를 제대로 서술하기 위해 한결같이 외롭게 분투하고 있는 이덕일 선생의 『도둑맞은 한국사』는 가뭄의 단비와 같은 저서가 될 것이다. 혹자는 “이덕일의 이야기, 다 같은 거 그냥 쓰는 것이 아니냐.”라고 물을 수 있다. 물론 그렇게 말하는 주장도 이해한다. 이덕일 선생의 주장이 다 맞는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한 사람이 평생에 걸쳐 같은 주장을 계속해서 반복해야 할 만큼 그 문제는 심각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덕일 선생은 1차 사료를 중심으로 그 주장을 전개하고 있으므로 충분히 토론과 숙의 과정을 거칠 수 있다. 이는 기존 사학계의 모습과는 다르다.
이 문제와 관련해, 첫 단추부터 잘못된 편견과 의도된 시각에 맞춰 짜인 편향된 역사관으로, 몇 세대에 걸쳐 우리 대한인뿐 아니라 전 세계인들에게 왜곡 날조된 지식을 주입하고 있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냐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에, 먹고살기 힘든데 무슨 역사 타령이냐고 말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다른 이유를 떠나 자본주의 사회의 관점에서 보면, 경제적으로 역사 문화적 가치가 있는 대상이나 이야깃거리는 소위 ‘팔리는 물건’이 될 수 있다. 우리의 역사 이야기}는 풍부한 관광 사업과 함께 이에 부가되는 상품을 충분히 많이 만들어 {{전 세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릴 만큼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 가치가 ‘홍익인간弘益人間’이나 ‘상생相生’과 같이 인간이 추구하는 이상향을 향한 평화의 메시지라면 더욱 그렇지 않을까?
이 시대에 이 책이 가지고 있는 특징은?
이 책의 서두에서 말하고 있듯이 역사 공부란 다른 말로 1차 사료史料 공부이다. 사료는 크게 1차 사료와 2차 사료로 나누는데 1차 사료는 당대에 쓰인 사료를 뜻한다. 2차 사료는 1차 사료를 보고 쓴 논문이나 저서를 뜻한다.
예를 들면 고려나 조선의 강역에 관해서 연구한다면, 1차 사료는 우리 측의 『고려사』, 『태종⋅세종실록』, 『세종실록지리지』와 중국의 『명사』 등이 될 것이다. 이런 사료들은 고려⋅조선의 북방 강역이 지금의 랴오닝성遼寧省 선양 남쪽부터 두만강 북쪽 700리까지라고 말하고 있다.
정상적인 역사학자라면 당연히 이런 1차 사료를 기준으로 고려⋅조선의 북방 강역을 연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일본의 이케우치 히로시池内宏, 이마니시 류今西龍,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같은 식민 사학자들이 ‘반도 사관’으로 조작한 2차 사료를 1차 사료인 것처럼 높이면서 교과서를 서술해 왔다. 이는 무언가 본말이 전도된 것이 아닌가.
비단 고려⋅조선의 북방 강역만이 아니다. 이 책에서 비판하고 있는 것처럼 민족의 시조인 단군을 지우고, 동이족을 지우고, 사도세자를 정신병자로 만들고 있는데 여기에 교육부 장관을 역임했고, 국내 명문 대학 총장을 역임한 이 나라의 쟁쟁한 역사학자들이 총동원되었으니, 누가 뭐라 할 수 있을까?
역사 광복은 오는 것일까?
1945년 8월 15일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에 패배한 일본 왕의 무조건 항복으로 전쟁은 막을 내렸다. 그동안 대한인들이 치열하게 항일 전쟁을 벌였기 때문에, 이때를 기점으로 이 나라는 해방이 된 것이다. 누군가는 미국이 일본에 승리했기 때문에 부여된 선물처럼 말하지만, 이는 잘못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항일 전쟁의 명맥이 면면히 이어졌기 때문에 열강에서도 대한과 일본은 다른 나라인 것을 인식하고 해방을 선언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되자 일제를 조국으로 일왕을 주군으로 삼고 같은 동포를 억압하며 자신들의 이득만 챙겼던 친일 매국노들은 망연자실했다. 그러나 해방과 동시에 미국과 소련이 이 땅을 분할 점령하면서 외세에 의해 분단이 되었다. 미군정은 친일 세력들을 처단하기는커녕 그대로 중용하면서 그들을 이 사회의 기득권으로 만들어 버리는 큰 정책적 오류를 범했다. 이것이 해방 공간이라고 불리는 1945~1948년까지 발생했던 혼란의 가장 큰 원인이기도 했다.
친일 매국 세력은 단 한 번도 실제로나 역사적으로 그 죄과에 대한 벌을 받지 않았고, 오히려 이 사회의 기득권이 되면서 자신들의 뿌리를 깊게 내리며 대한의 암적 존재가 되어 버렸다. 특히나 역사학계는 조선총독부 사관에 그대로 잠식되었고, 그 결과 겉 포장만 바뀐 채 지금까지도 우리나라 역사 인식의 기준이 되고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역사를 도둑맞았다. 무지와 무관심으로 중요한 사실이 빠지고 왜곡과 날조로 조작된 역사가 온전한 역사인 양 둔갑해 있다. 한번 잘못된 역사 인식은 되돌리기가 어렵다. 어린아이부터 우리가 곰의 자손이니, 우리 역사 영역이 한반도뿐이라는 식의 역사 교육을 받으면, 우리 역사를 바르게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정말 외롭게 바른 목소리를 내며 활동하는 이들이 너무도 미약한 지금, 과연 우리에게 역사 광복은 올 것인가?
한 사람이라도 우리 역사를 제대로 연구하고 이를 세상에 알린다면 역사 광복이 실현되리라는 확신은 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고, 어둠이 강할수록 새벽은 다가오기 때문이다. 바로 『도둑맞은 한국사』와 같은 책을 읽고 여러 사람에게 소개해 주면서, 역사 광복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들에 관심을 가지면 될 것이다. 왜곡과 날조에서 벗어난 우리 대한의 역사가 복원되는 그날까지 자기 눈으로 역사를 보고 불의에 맞서는 의로운 시민들이 주변에 많다는 것을 우리는 최근에도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지은이 이덕일
그는 역사학자로서 사료에 대해 철저하고 세심한 고증, 대중과 호흡하는 집필자로서의 본능적인 감각과 날카로운 문체로 한국사에 숨겨져 있고 뒤틀려 있는 가장 비밀스러운 부분을 건드려 왔다. 언제나 발표하는 저술마다 논쟁의 중심에 섰으며 역사 인식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해 왔다. 그는 모든 권위와 기득권을 거부하며 주류 학계에 편입되지 않고, 그들이 외면하거나 감히 드러내지 못하는 치부를 적나라하게 폭로하여 대중의 지지와 인기를 얻었다.
방송, 신문, 잡지의 기고 활동과 대중 강연 등의 활동을 통해 자신의 지식과 열정을 함께 나누는 데에 힘을 쏟았다. 그의 대표적인 저술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 왕 독살 사건』,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이회영과 젊은 그들』, 『조선 왕을 말하다』, 『근대를 말하다』 등은 이러한 활동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중요 내용 세 가지
우리 역사의 시간과 공간은 제대로 설정되었는가?
이 책에서 주되게 다루는 부분은 우리 역사의 공간空間에 대한 것이다. 역사를 연구할 때 가장 기초적인 사항이 공간과 시간이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강역疆域은 어디부터 어디까지인지, 그리고 존속 시간대가 언제부터 언제까지인지가 역사 연구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한반도를 우리 민족의 영역으로만 인식하고 있다. 이렇게 된 이유 역시 그렇게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절대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서지 않아야 하고. 그러다 보니 이 선을 넘은 국가나 시기에 대해서는 최소한도의 언급만 하는 경향이 있다.
2024년 3월 KBS 드라마 〈고려-거란 전쟁〉이 13.8%라는 높은 시청률로 막을 내렸다. 이 드라마는 고려의 세종대왕이라 할 수 있는 현종顯宗을 전면에 내세웠고,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고려의 영웅들을 다루고 있다. 이 드라마의 홈페이지 ‘기획 의도’에는 “이제 세계에 KOREA를 보여 줘야 할 때이다. 세계는 이 드라마를 통해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드라마를 통해 세계에 보여 준 KOREA는 어떤 모습인가?
‘고려-거란전쟁’의 시간은 맞다. 그러나 공간은 그렇지 않다. ‘고려-거란전쟁’ 제1회에서 제시한 지도는 고려를 지금의 한반도도 다 차지하지 못한 작은 나라로 그려 놓았다. 세계인들이 이를 보면 고려(KOREA)라는 나라는 한반도의 2/3 정도의 작은 강역을 갖고 있었던 보잘것없는 나라라고 생각할 것이다. 실제 고려 강역이 그랬다면 사실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와는 달리 축소해서 그렸다면 ‘역사 왜곡’이란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 『도둑맞은 한국사』 172쪽, 6장 「고려 땅 2000리를 잘라먹은 한국사 교과서」 중에서
- 『도둑맞은 한국사』 172쪽, 6장 「고려 땅 2000리를 잘라먹은 한국사 교과서」 중에서
‘고려-거란전쟁’ 제작진은 억울할 수 있다. 한국사 교과서에 나온 대로 그렸기 때문이고 우리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때는 물론 광복 이후 지금까지 사용하는 모든 한국사 교과서는 고려 북방 국경을 압록강 부근에서 원산만 부근까지 비스듬히 그려 놓고 있고, 세종 때 4군 6진을 설치해 비로소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영토를 확장한 것이 지금의 국경선이라고 결론을 짓고 있다.
그렇다면 ‘간도間島는 우리 땅’이라는 말 자체도 억지가 되어 버린다. 우리는 1909년 일본과 청이 맺은 간도협약間島協約이 무효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만강 북쪽 간도는 대한제국의 영토였는데 일본이 남만주 철도 부설권을 얻는 대가로 청나라에 ‘불법적으로’ 넘겨주었다고 비판해 오고 있다. 하지만 고려 시대뿐 아니라 조선 시대 세종이 개척한 이후에도 이 지역은 우리 땅이 아니었는데, 무슨 근거로 간도를 일본이 불법적으로 넘겨주었다고 주장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왜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하는지 묻고 싶을 뿐이다.
그럼, 진실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1차 사료를 바탕으로 해서 말하고 있다. 요약하면 이렇다.
『세종실록世宗實錄』에는 「지리지地理志」가 있다. 공험진이 두만강 북쪽으로 몇 리 지점에 있는지 정확하게 밝혀 놓았다. 바로 두만강 강가에 있는 ‘경원 도호부’의 사방 경계에 대해서 윤관이 비석을 세운 공험진은 두만강 북쪽으로 700리, 선춘령까지는 두만강 동북쪽으로 700리라고 정확하게 밝혀 놓았다.
조선의 세종은 고려와 조선의 북방 강역이 두만강 북쪽 700리 공험진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이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 4군郡 6진鎭 개척이었다. 저자는 이를 잘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세종 재위 8년(1426) 4월의 책문策問이라고 하고 있다. 책문은 경전의 뜻이나 당면한 정치 현안에 관해 묻는 시험으로, 이에 대한 답변을 대책對策이라고 한다. 이때 세종은 어디에 군사와 백성들을 주둔시킬 것인지에 관해 물었다. 가장 북쪽이 공험진이고, 두 번째가 두만강 가의 경원이고, 세 번째는 그 밑의 경성이라는 것이다(194~195쪽). 그만큼 세종은 우리 역사에 대해 밝았다.
이 밖에도 여러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고려의 북방 강역을 우리는 제대로 알고 있는가? 오늘날 우리 사회는 고려 북방 강역의 기본인 공험진이 어디인지도 제대로 모르는 채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고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만 역사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다.
역사를 조작하고도 반성할 줄 모르는 이들
- 사육신이 일곱 명이 된 기막힌 사연서울시 동작구 노량진에는 ‘사육신死六臣공원’이 있다. 공원 홈페이지에는 ‘사육신공원’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하위지河緯地, 성삼문成三問, 유성원柳誠源, 이개李塏, 유응부兪應孚, 박팽년朴彭年, 김문기金文基 등 일곱 분의 묘”가 이 공원에 모셔져 있다고 말하고 있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 무덤을 조성한 사람들은 6자와 7자도 구분하지 못했을까? 설명문이 이렇게 만들어진 이유를 저자의 설명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잘 알다시피 사육신은 세조 3년(1457) 상왕 단종端宗을 복위시키려다 실패하여 사형당한 여섯 인물을 뜻한다. 물론 이들 외에 많은 이들이 희생당했지만,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인물들이다. 이 여섯 사람을 ‘사육신’으로 명명한 인물은 생육신의 한 사람인 추강 남효온南孝溫으로 그는 『육신전六臣傳』을 지어 그들의 사적을 적었다.
그런데 이 중 유응부를 빼고 김문기를 넣어야 한다는 주장이 박정희 대통령 정권의 유신 말기에 대두되었다. 방송 작가 구석봉具錫逢이 『조선일보』 1977년 7월 27일 자에 “추강 남효온이 쓴 『육신전』 중 유응부는 김문기를 잘못 기재한 것이므로, 사육신은 유응부가 아닌 김문기이어야 한다.”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우리 역사학계는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 역사에 대해 언급하면 그 주장의 사실 여부를 떠나, 사료가 있든 없든 일단 무시하고 본다. 오만도 이런 오만이 없다. 여기에 역사는 역사학자들의 전유물이니 다른 분야 사람들은 손대지 말라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면서 적극 발 벗고 나섰다. 당시 3대 국사편찬위원장인 최영희崔永禧는 즉각 특별위원회를 조직하고 당시 한국의 국가 대표 역사학자들을 위원으로 위촉한 것이다. 이에 이병도李丙燾, 신석호申奭鎬 등 15명은 구석봉의 주장을 그대로 추종해 만장일치로 “김문기를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현창顯彰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결의하였다. 1977년 9월 24일 자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사육신 유응부는 김문기의 잘못이며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교과서 개편에 착수한다.”라고 전하고 있다. 한 작가의 독특한 견해에 당시 국사학계의 쟁쟁한 국가대표급 인물들의 만장일치로 사육신의 인물이 바뀐 일대 사건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한 사안을 처리하기 위해 특별위원회를 조직한 것도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고, 이를 전광석화처럼 처리하여 교과서 자체를 바꿔 버리는 일도 초유의 일이다.
무엇인가 학문적으로 옳고 그름의 문제만이 아니라 막강한 권력의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 권력의 배경이란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였다. 김문기의 후손인 김재규가 짧은 역사적 견해 속에서 사육신을 유응부에서 김문기로 바꾸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중정부장이 배후에 있다고 해도 어떻게 갑자기 사육신을 바꿔치기할 수 있었을까?
여기에 바로 이른바 국사학계의 태두라고 불리는 이병도의 적극적 작용이 있었다. 김재규의 부탁을 받은 이병도는 ‘내가 하면 바꿀 수 있다.’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움직였고 실제로 그의 자신감대로 흘러갔다. 이 사건은 한국 역사학계의 거장이라는 사람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역사 조작을 자행하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 것이었다. 1977년 한국 역사학계는 공식적으로 파산을 선언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저자는 말한다.
여담으로 당시 이런 움직임에 퇴계 이황 선생의 후손인 연세대 이가원 교수는 이의를 제기하고, 이재호 부산대 사학과 교수 등 여러 쟁쟁한 사학자들도 가세하였다. 이가원 교수는 필사본 『규원사화揆園史話』가 조선 중기에 써진 원본임을 확인한 인물이다. 그리고 김문기 역시 단종 복위 과정에서 희생된 충신으로 사육신보다 먼저 제사를 받는 판서급의 삼중신三重臣으로 사육신보다는 위격이 높은 인물이다.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식민 사학의 현주소
- 진정한 우리 역사를 되찾는 역사적 소양을 위해이 책을 통관하는 전체 맥락을 표현하자면 충격, 당혹, 분노, 슬픔 그리고 각성일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우리가 배운 역사의 실체를 알게 되었을 때 느끼는 충격파는 상상 이상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역사를 학자의 양심에 따라 제대로 적어야 할 이 시대의 사관이 역사학자들인데, 그들의 충격적 실체를 알게 되면 누구라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분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정치가와 고위 관료들이 대부분 자국 역사에 무지하고, ‘우리 역사를 사랑하는 대다수 시민’과 대학을 비롯한 역사 관련 국가기관을 장악한 ‘엘리트주의에 빠진 역사학자’들이 대립하는 전 세계에서 유일한 국가이다. 그래서 매우 슬프다.
일제 강점기부터 따지면 110여 년, 광복 후부터 따져도 80여 년 동안 역사를 조작해도 처벌을 받기는커녕 승승장구하다 보니 이제는 국가기관이 국제기구에 역사를 팔아먹는 경지에 이르렀다. 가야 고분군을 유네스코에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 신청을 하는 과정에서, 식민 사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조작한 대로 전라북도 남원을 위서가 확실한 『일본서기』의 기문국己汶國으로 조작하고, 경남 합천을 『일본서기』의 다라국多羅國으로 조작해서 등재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에 일부 학자들과 전국의 역사 시민운동가들이 강력히 문제 제기를 하고 나서면서 ‘기문국’과 ‘다라국’이란 임나일본부설을 삭제해 바로잡은 가야 고분군을 유네스코에 등재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전북⋅광주⋅전남의 지방비 24억을 들여서 편찬한 『전라도 천년사』는 호남 지역이 고대부터 야마토 왜倭의 식민지라고 서술했다가 호남 지역과 전국의 여러 역사 시민운동가의 지난한 노력 끝에 발간이 중지되기도 했다.
이제는 시민들이 각성해서 이 나라와 역사를 지켜야 한다. 우리나라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주체적 역사관으로 무장하여 제2의 독립 전쟁을 벌여야 한다. 이에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마무리를 짓고 있다.
구한말 일본 제국주의의 영토 침략은 “단군은 가짜”, “가야는 임나일본부”라는 역사 침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떨쳐 일어났던 국민들이 의병과 동학 농민군 같은 민초들이었다. 지배층이 팔아먹은 역사와 나라를 민초들의 항쟁으로 되찾은 것이 이 나라의 역사다. 더 이상 상황이 심각해지기 전에 도둑맞은 역사를 되찾아 우리 역사의 본모습을 복원해야 한다. 그것이 이 나라와 이 민족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 351쪽 「나가는 글」 중에서 ■
- 351쪽 「나가는 글」 중에서 ■
『도둑맞은 한국사』 책의 구성
들어가는 글
1장 누가 단군을 지웠는가?
2장 동이족 역사까지 빼앗아 가려는 중국
3장 공자는 동이족인가?
4장 진시황의 만리장성은 평양까지 내려왔는가?
5장 삼한 땅 4천 리는 어디로 갔는가?
6장 고려 땅 2천 리를 잘라먹은 한국사 교과서
7장 요령성 심양 남쪽은 고려·조선 땅이었다.
8장 어떻게 사육신이 일곱 명인가?
9장 세상을 버린 신동, 김시습
10장 사도세자는 정신병자였는가
나가는 글
이 책은 총 10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략적으로 본다면,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인한 역사 왜곡 부분과 잃어버린 우리 역사 강역 그리고 인물들에 대한 편협한 왜곡과 그 이면에 깃든 역사 왜곡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군은 그저 신화 속 인물일까? 진시황의 만리장성은 평양까지 내려왔는가? 고려는 압록강과 두만강조차도 차지하지 못한 나라일까? 사육신을 일곱 명이라고 우기는 자들은 누구인가? 사도세자는 정말 정신병자라서 뒤주에 갇혀 죽은 건가?’ 등의 의문에 대한 진실을 찾아 가는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거짓과 진실을 구분하는 역사적 소양과 판단력을 기를 수 있을 것이다.
들어가는 글
1장 누가 단군을 지웠는가?
2장 동이족 역사까지 빼앗아 가려는 중국
3장 공자는 동이족인가?
4장 진시황의 만리장성은 평양까지 내려왔는가?
5장 삼한 땅 4천 리는 어디로 갔는가?
6장 고려 땅 2천 리를 잘라먹은 한국사 교과서
7장 요령성 심양 남쪽은 고려·조선 땅이었다.
8장 어떻게 사육신이 일곱 명인가?
9장 세상을 버린 신동, 김시습
10장 사도세자는 정신병자였는가
나가는 글
이 책은 총 10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략적으로 본다면,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인한 역사 왜곡 부분과 잃어버린 우리 역사 강역 그리고 인물들에 대한 편협한 왜곡과 그 이면에 깃든 역사 왜곡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군은 그저 신화 속 인물일까? 진시황의 만리장성은 평양까지 내려왔는가? 고려는 압록강과 두만강조차도 차지하지 못한 나라일까? 사육신을 일곱 명이라고 우기는 자들은 누구인가? 사도세자는 정말 정신병자라서 뒤주에 갇혀 죽은 건가?’ 등의 의문에 대한 진실을 찾아 가는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거짓과 진실을 구분하는 역사적 소양과 판단력을 기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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