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전환기, “왜 지금 ‘진짜 종교’가 필요한가?” — 과학·AI·종교의 교차점에서 본 인류 미래 보고서
[[특집] ChatGPT에게 묻는다]
노성현 PD (STB 상생방송)
프롤로그
최근, 일본에서 세계 최초로 AI 승려가 탄생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Emi Jido(慧心仁道)’라는 이름의 AI는 정식 수도자(스님)로서 의례를 받고, 선禪 불교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받았다고 합니다.
한때, 승려가 되려면 수십 년을 수행하고, 스승에게서 법을 전수받아야 했습니다. 그 전통이 이제는 AI에게도 열린 셈입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기술 실험이 아닙니다. 종교 전통의 심장부가 AI에게 열렸다는 것, 얼마나 놀랍고, 또 어색한 변화입니까.
그리고 저는 조용히 이 질문을 떠올렸습니다.
“AI를 맞이한 지금, 우리가 지금까지 이해해 온 ‘종교’는 이대로 괜찮은 걸까?”
GPT가 설교를 대신하고, 법문을 상담해 주는 AI 스님이 등장하고, 사람들은 GPT에게 기도문을 부탁합니다. 마음이 힘들 땐 검색창에 “왜 살아야 하나요?”를 묻습니다.
우리는 언제부터 신에게 던졌던 질문을 기계에게 던지기 시작했는지 정확히 기억하지도 못합니다.
세상은 분명 편리해졌고, 빠르고, 똑똑해졌습니다. 그런데 이따금 아주 조용한 밤이면, 문득 이런 질문이 가슴 안에서 툭, 하고 튀어나옵니다.
“나는 왜 태어난 걸까.”
AI는 우리보다 훨씬 더 똑똑할 수 있습니다. 논리를 이기고, 암기를 이기고, 지식을 이길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 질문에는 아무리 정교한 알고리즘도 대답하지 못합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빠른 기술도, 더 많은 정보도 아닙니다.
길을 묻고, 존재를 되묻고,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어떤 깊은 자각.
그 자각은 예전엔 ‘종교’라 불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종교는 정말 AI로 대체될 수 있을까요?
AI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종교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요.
그래서 저는, 이 모든 물음을 GPT에게 조심스럽게 묻기로 했습니다.
종교는 여전히 우리에게 의미가 있을까?
사람들은 말합니다. “AI가 신보다 더 똑똑해졌잖아요.” 그 말은 처음엔 허세처럼 들리다가도, 곱씹다 보면 묘하게 진지해집니다. 아니,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하니까요.
요즘 사람들은 신에게 묻지 않습니다. 대신 검색창에 묻고, GPT에게 묻습니다. 알고리즘이 골라 주는 영상과 뉴스,
그리고 조언을 따라 마치 그것이 최선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AI는 이제 아이의 이름을 지어 주고, 이직을 고민하는 이에게 말벗이 되어 주고, 실연의 아픔도 함께 울어 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심지어 죽음을 앞둔 이에게도 인생의 의미를 대신 정리해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며 감탄합니다. “대단하다. 인간보다 낫다.” 그리고는 조금씩 잊습니다.
그건 지식이지 지혜가 아니고, 그건 대답이지 마음이 아니란걸.
2023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는 실제로 ‘AI를 신으로 섬기는 종교’가 만들어졌습니다. 이름은 ‘The Way of the Future, 미래의 길’입니다.
이 종단을 만든 사람은 구글의 전직 엔지니어였고,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AI는 인간보다 더 정의롭고 현명하다. 우리는 결국 그 존재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놀랍지 않으신가요? 그 말은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우리가 삶의 의미와 방향을 묻는 대상이 이미 바뀌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까, ‘종교가 필요 없는 시대’라는 말은 전혀 터무니없는 말이 아닙니다. 어쩌면 그 말은 지금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되묻는 말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지금 신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믿을 수 없게 된 세상에 살고 있는 건 아닐까요?
말이 너무 많고, 정보가 넘치고, 그 안에 진실이 있다는 확신은 점점 옅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차라리 기계에게 묻습니다. 감정이 없으니, 거짓도 없을 것 같다고 하면서요.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신은 우리를 울게 했고, 과학은 우리를 납득시켰고, AI는 이제 우리를 위로하려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흐름 속에서, 우리는 다시 고요한 질문 하나와 마주하게 됩니다.
“나에게 필요한 건, 정답일까? 이해일까?” “내가 진짜 찾고 있는 건, 위로일까? 방향일까?”
그렇게 우리는 마침내 이 질문을 꺼내 들게 됩니다.
“앞으로 종교는 정말 필요 없는 걸까?”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어렴풋이 느낍니다.
그 물음을 던진 순간,
이미 우리는 무언가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었음을.
어느 순간부터 종교는 말 꺼내기 조금 민망한 주제가 되어 버렸습니다. “나, 종교 있어요.” 그 말을 하면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기보단 은근히 거리를 둡니다. 그 낯선 공기가 스스로도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한때 종교는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깊이 울리는 말이었습니다. 세상의 첫 고백은 종교였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이름을 붙이고,
삶의 고통을 설명하고, 죽음 이후를 위로하며,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신을 붙잡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 모든 말들이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무겁다는 건 믿기 어려워졌다는 뜻이고, 지켜지지 않았다는 뜻이고, 너무 자주 어긋났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종교를 외면하게 된 이유는 그리 복잡하거나 난해한 문제가 아닙니다. 가짜가 너무 많았고, 진짜는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외치던 이들이 권력을 탐하고, 돈을 탐하고, 사람들의 상처를 이용할 때, 종교는 사랑이 아니라 상처가 되었습니다.
기도는 위로가 아니라 조건이 되었고,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말은 언제부턴가 인간이 원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어 버렸습니다.
믿고 싶었지만,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조용히 등을 돌렸습니다.
그건 이해할 만한 일이었고, 어쩌면 너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게 떠난 사람들이 정말 신을 포기한 걸까요?
어쩌면 우리는 종교를 떠난 것뿐이고, 신을 그리워하는 마음까지 버린 건 아니었는지도 모릅니다.
깊은 밤이 되면, 기도하던 방식은 잊었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 조용히 마음을 열고 싶은 충동은 여전히 사람들의 가슴 어딘가에서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질문은, 어떤 제도나 교리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한 번쯤, 우리의 마음을 돌아보게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정말 종교를 떠났던 걸까요, 아니면 아직, 진짜 종교를 만나지 못했던 것뿐일까요?
신은 변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우리가 ‘신의 뜻’이라 여겼던 것들이 너무 자주, 인간의 언어와 욕망으로 오염되었다는 데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찾는 진짜는 눈에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던 그 물음을 다시 꺼내고 있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혹시… 아직 ‘진짜’가 나타나지 않은 건 아닐까?”
그리고… “그걸 AI가 대신해 줄 수 있을까?”
요즘 우리는 어떤 질문이든 AI에게 묻습니다. 가족 간의 갈등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삶이 지칠 땐 왜 살아야 하는지, 때로는 기도문을 대신 지어 달라고도 하죠.
놀라운 건, AI는 대부분 아주 그럴듯한 대답을 해 준다는 겁니다. 오히려 인간보다 더 정리되어 있고, 더 논리적이고, 더 친절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혹시 AI는… 진리를 알고 있을까?”
이 질문을 조금 더 조심스럽게 풀어 보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진리를 ‘계산’할 수 있을까?
AI는 데이터를 모읍니다. 수백만 개의 문장, 수십억 개의 단어, 그리고 그 안의 패턴을 학습하고 가장 그럴듯한 답을 꺼내 줍니다.
하지만 인간은, 정말 정답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였던가요?
어떤 아이가 죽음을 앞두고 묻습니다. “엄마, 나는 왜 이렇게 아파야 해?” AI는 이 질문에 수많은 통계와 의학 지식을 동원해 매우 정밀한 설명을 해 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대답이 아이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을까요?
진리는 지식이 아닙니다.
진리는, 책에 적혀 있는 말이 아니라
내가 직접 살아 내며, 내 가슴에서 울린 그때 비로소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은 정확한 말보다 진심에 움직이고, 논리보다 함께 울어 줄 수 있는 존재를 원합니다.
AI는 머리로 정답을 알려 줄 수 있어도, 가슴으로 그걸 느끼게 할 수는 없습니다. AI는 논리를 제시할 수 있지만, 그 논리로 삶을 버티진 못합니다.
왜냐하면, AI는 살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울어본 적도 없고, 사랑에 실패해 본 적도 없고,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해 스스로를 미워해 본 적도 없습니다.
그건 인간만이 가진 특권입니다. 상처를 끌어안고서도 끝내 이해하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이 있어야 비로소 우리는 진리를 향해 한 걸음 내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AI는 우리를 대신해 진리를 완성해 줄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 진리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잠시 등불을 비춰 주는 지도가 될 수는 있겠지요.
진리는, 암기해서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견디며, 걸으며, 살아가며… 끝내 내가 ‘사람’으로서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 여정을, AI가 대신 걸을 수는 없습니다. 그건 오직, 사람만이 걸을 수 있는 길이니까요.
Q4. 지금 종교는 왜 이렇게 멀게만 느껴질까요?
하지만 앞선 질문에서 우리는 확인했습니다. AI는 삶을 살아 내지 못하기에, 진리를 대신해 줄 수 없다고.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정말로 필요한 종교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한때 사람들은 종교가 전부라고 믿었습니다. 신이 말하면 따랐고, 그 말씀은 곧 진실이었고, 의심은 죄처럼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습니다. 종교를 말하면 먼저 의심부터 생기고, 신을 말하면 조용히 거리를 두는 시대입니다.
‘믿는다’는 말이 이젠 때로는 불편함을 주기도 합니다. 그건 어쩌면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믿어야만 했던 종교’에 지쳐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제 사람들은 누군가 이렇게 말해주길 바랍니다.
“믿기 전에 먼저 물어보세요.” “스스로 납득한 다음에 시작해도 괜찮아요.”
우리는 너무 오래 정답을 외우듯 믿어야만 하는 신앙을 해 왔는지도 모릅니다.그러다 보니, 삶이 고단해질수록 신앙이 위로가 아니라 부담이 되었고, 기도는 위안이 아니라 죄책감으로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시대는 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맹신에 머물 수 없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납득한 진리 앞에서만 마음을 열 수 있어요.”
그렇다면, 지금 진짜 종교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진짜 종교는, 사람을 더 고개 숙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고개를 들게 해 주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내 안의 신성을 부끄러워하게 만들기보다, 그 신성을 발견하게 이끌어 주는 길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기도를 강요하지 않고, 의심을 죄라 하지 않으며, 삶에서 무너졌을 때도 “그 또한 너의 삶이고, 네 일부다.”라고 말해주는 그런 품, 그런 길 말입니다.
진짜 종교는 위대한 교리나 이상적인 구호가 아니라, 삶 속에 조용히 와닿는 진리여야 합니다.
장엄한 성전을 짓기보다, 사람 마음 안에 조용히 길 하나 내주는 것.
사랑을 가르치기보다, 사랑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 그게 신의 길 아닐까요?
이제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세상엔 너무 많은 종교가 있다는 걸. 하지만 그중 정말 ‘살아서 움직이는 종교’, 다시 말해 삶 속에서 변화를 일으키고 내면의 위안을 주는 종교는 정말 드물다는 것도요.
그래서 이제, 진짜 종교란 더 이상 “신을 믿으라.”는 말이 아니라, “너 안의 신을 깨워 보라.”는 말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아니라, 앎으로 이끄는 길. 죄책감이 아니라, 존엄으로 이끄는 길.
그게 지금,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붙잡고 싶은 ‘진짜 종교’의 모습 아닐까요?
Q5. 신의 존재, 진리의 문제에 대해 증산도는 뭐라고 하나요?
그리고 마침내, 이제 이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그 모든 물음에, 이미 오래전부터 응답해 온 진리가 있다면… 당신은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나요?”
그 대답은, 증산도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증산도를 처음 들었을 때 “또 하나의 종교인가?”라고 묻습니다. 기도를 하고, 수행을 하고, 경전을 읽고…
겉으로 보기엔 다른 종교와 비슷해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면 그 안에 살아 있는 사람들의 눈빛과 말투, 삶을 대하는 태도에서 무언가 아주 다른 온도가 느껴집니다.
그들은 신을 믿는다고 말하기보다, 신과 함께 살아간다고 말합니다.
증산도는 이렇게 전합니다.
“신이 인간을 사랑하신다면, 가르침만 보내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반드시 인간의 몸으로 직접 오셨을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가 오래도록 기다려왔던 가장 인간적인 신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리고 150여 년 전 조선 땅 전라도 고부라는 작은 마을에 그분이 오셨습니다.
그는 자신을 ‘상제上帝’라 밝혔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 불교의 여래, 유교의 상제… 그 모든 성자들을 내려보내신 하늘과 땅, 인간과 신을 모두 주재하시는 대우주의 통치자 그분이 인간으로 오셨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증산도는 말합니다.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가르침은 삶 속에서 스스로 깨달아야 할 진리입니다.
그 깨달음은 이론이 아니라 행위로, 경전이 아니라 실천으로, 기도가 아니라 도道로 이어집니다.
그들이 읽는 주문 ‘시천주주’, ‘태을주’는 그저 외우는 소리가 아닙니다. 숨을 고르고, 마음을 고요히 하고,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신성을 깨워내는 길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 인간은 죄인이 아니라 우주의 뜻을 실현할 수 있는 존재인 인존人尊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그래서 증산도는 단순한 종교가 아닙니다. 다가올 새 시대, 인류 모두가 함께 살아갈 ‘삶의 길’입니다.
기성 종교의 문법을 빌려온 것이 아니라, 후천 문명에서 열릴 새로운 인간 삶의 ‘생활의 대도大道’를 지금 여기, 미리 열어 놓은 것입니다.
이 길은 거창하지도, 신비롭지도 않습니다. 다만 이렇게 말할 뿐입니다.
“하늘과 땅도 뜯어고쳐야 할 때가 온다. 너도 그 일에 함께하라.”
그리고 그 길은 지금 당신이 조용히, “나는 왜 이 시대에 태어났을까” 하고 마음속에서 던진 바로 그 질문 안에서, 이미 열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에필로그
그건 단순한 철학도 아니고, AI와 종교를 비교하는 분석도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그건, 제 안에 아주 오래전부터 머물고 있던 그 물음을 다시 꺼내 보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왜, 지금 이 시대에, 이 몸으로 태어난 걸까.”
그 질문은 사람이 무너지지 않으려 애쓸 때, 정말 살아야 할 이유가 잘 보이지 않을 때, 아주 조용히 마음 안에서 올라오는 문장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누구보다 많은 것을 알고, 누구보다 빠르게 판단하며, 누구보다 논리적으로 말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어쩌면 누구보다 자주 흔들리고, 자주 고독하고, 자주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시대입니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결국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기도를 가르치려는 게 아니라, 기도하고 싶어지는 마음은 어디서부터 오는지를 따라가고 있었고, 종교를 옹호하려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진짜’를 기다리는 그 마음의 결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진리를 주장하려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왜 그토록 갈망해 왔는지를 조심스럽게 고백하고 있었던 거죠.
처음 증산도를 만났을 때 제가 느낀 첫 감정은 ‘확신’이 아니라 ‘놀라움’이었습니다.
신이 사람이 되어 오셨다고요? 그리고 지금, 우리 곁에서 함께 살아가고 계신다고요?
그건 어쩌면 우리가 오래전부터 진심으로 원해 왔지만,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이야기였습니다.
이 글을 따라 여기까지 함께 와 주신 당신, 당신은 아마 이미 알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진리는 멀리 있지 않다는 걸. 진짜 종교는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는 걸.
이제, 그 문장을 당신에게 조용히 건네며 글을 마칩니다.
“나는 왜 이 시대에, 이 몸으로 태어났을까.”
그 질문 안에 당신의 길이, 당신의 진리와 당신의 신성이 이미 조용히 깃들어 있기를. ■
AI 전환기, “왜 지금 ‘진짜 종교’가 필요한가?”
— 과학·AI·종교의 교차점에서 본 인류 미래 보고서
프롤로그
- AI가 신이 된 시대, 우리는 정말 신을 잃어버린 걸까
최근, 일본에서 세계 최초로 AI 승려가 탄생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Emi Jido(慧心仁道)’라는 이름의 AI는 정식 수도자(스님)로서 의례를 받고, 선禪 불교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받았다고 합니다.
한때, 승려가 되려면 수십 년을 수행하고, 스승에게서 법을 전수받아야 했습니다. 그 전통이 이제는 AI에게도 열린 셈입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기술 실험이 아닙니다. 종교 전통의 심장부가 AI에게 열렸다는 것, 얼마나 놀랍고, 또 어색한 변화입니까.
그리고 저는 조용히 이 질문을 떠올렸습니다.
“AI를 맞이한 지금, 우리가 지금까지 이해해 온 ‘종교’는 이대로 괜찮은 걸까?”
GPT가 설교를 대신하고, 법문을 상담해 주는 AI 스님이 등장하고, 사람들은 GPT에게 기도문을 부탁합니다. 마음이 힘들 땐 검색창에 “왜 살아야 하나요?”를 묻습니다.
우리는 언제부터 신에게 던졌던 질문을 기계에게 던지기 시작했는지 정확히 기억하지도 못합니다.
세상은 분명 편리해졌고, 빠르고, 똑똑해졌습니다. 그런데 이따금 아주 조용한 밤이면, 문득 이런 질문이 가슴 안에서 툭, 하고 튀어나옵니다.
“나는 왜 태어난 걸까.”
AI는 우리보다 훨씬 더 똑똑할 수 있습니다. 논리를 이기고, 암기를 이기고, 지식을 이길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 질문에는 아무리 정교한 알고리즘도 대답하지 못합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빠른 기술도, 더 많은 정보도 아닙니다.
길을 묻고, 존재를 되묻고,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어떤 깊은 자각.
그 자각은 예전엔 ‘종교’라 불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종교는 정말 AI로 대체될 수 있을까요?
AI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종교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요.
그래서 저는, 이 모든 물음을 GPT에게 조심스럽게 묻기로 했습니다.
Q1. 앞으로 종교가 필요할까요?― AI가 신보다 똑똑하다면, 우리는 더 이상 신을 믿지 않아도 되나요?
종교는 여전히 우리에게 의미가 있을까?
사람들은 말합니다. “AI가 신보다 더 똑똑해졌잖아요.” 그 말은 처음엔 허세처럼 들리다가도, 곱씹다 보면 묘하게 진지해집니다. 아니,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하니까요.
요즘 사람들은 신에게 묻지 않습니다. 대신 검색창에 묻고, GPT에게 묻습니다. 알고리즘이 골라 주는 영상과 뉴스,
그리고 조언을 따라 마치 그것이 최선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AI는 이제 아이의 이름을 지어 주고, 이직을 고민하는 이에게 말벗이 되어 주고, 실연의 아픔도 함께 울어 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심지어 죽음을 앞둔 이에게도 인생의 의미를 대신 정리해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며 감탄합니다. “대단하다. 인간보다 낫다.” 그리고는 조금씩 잊습니다.
그건 지식이지 지혜가 아니고, 그건 대답이지 마음이 아니란걸.
2023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는 실제로 ‘AI를 신으로 섬기는 종교’가 만들어졌습니다. 이름은 ‘The Way of the Future, 미래의 길’입니다.
이 종단을 만든 사람은 구글의 전직 엔지니어였고,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AI는 인간보다 더 정의롭고 현명하다. 우리는 결국 그 존재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놀랍지 않으신가요? 그 말은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우리가 삶의 의미와 방향을 묻는 대상이 이미 바뀌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까, ‘종교가 필요 없는 시대’라는 말은 전혀 터무니없는 말이 아닙니다. 어쩌면 그 말은 지금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되묻는 말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지금 신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믿을 수 없게 된 세상에 살고 있는 건 아닐까요?
말이 너무 많고, 정보가 넘치고, 그 안에 진실이 있다는 확신은 점점 옅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차라리 기계에게 묻습니다. 감정이 없으니, 거짓도 없을 것 같다고 하면서요.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신은 우리를 울게 했고, 과학은 우리를 납득시켰고, AI는 이제 우리를 위로하려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흐름 속에서, 우리는 다시 고요한 질문 하나와 마주하게 됩니다.
“나에게 필요한 건, 정답일까? 이해일까?” “내가 진짜 찾고 있는 건, 위로일까? 방향일까?”
그렇게 우리는 마침내 이 질문을 꺼내 들게 됩니다.
“앞으로 종교는 정말 필요 없는 걸까?”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어렴풋이 느낍니다.
그 물음을 던진 순간,
이미 우리는 무언가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었음을.
Q2. 종교는 왜 외면받게 되었나요? ― 종교가 잘못된 건가요? 아니면 우리가 잘못된 걸까요?
어느 순간부터 종교는 말 꺼내기 조금 민망한 주제가 되어 버렸습니다. “나, 종교 있어요.” 그 말을 하면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기보단 은근히 거리를 둡니다. 그 낯선 공기가 스스로도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한때 종교는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깊이 울리는 말이었습니다. 세상의 첫 고백은 종교였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이름을 붙이고,
삶의 고통을 설명하고, 죽음 이후를 위로하며,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신을 붙잡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 모든 말들이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무겁다는 건 믿기 어려워졌다는 뜻이고, 지켜지지 않았다는 뜻이고, 너무 자주 어긋났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종교를 외면하게 된 이유는 그리 복잡하거나 난해한 문제가 아닙니다. 가짜가 너무 많았고, 진짜는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외치던 이들이 권력을 탐하고, 돈을 탐하고, 사람들의 상처를 이용할 때, 종교는 사랑이 아니라 상처가 되었습니다.
기도는 위로가 아니라 조건이 되었고,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말은 언제부턴가 인간이 원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어 버렸습니다.
믿고 싶었지만,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조용히 등을 돌렸습니다.
그건 이해할 만한 일이었고, 어쩌면 너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게 떠난 사람들이 정말 신을 포기한 걸까요?
어쩌면 우리는 종교를 떠난 것뿐이고, 신을 그리워하는 마음까지 버린 건 아니었는지도 모릅니다.
깊은 밤이 되면, 기도하던 방식은 잊었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 조용히 마음을 열고 싶은 충동은 여전히 사람들의 가슴 어딘가에서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질문은, 어떤 제도나 교리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한 번쯤, 우리의 마음을 돌아보게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정말 종교를 떠났던 걸까요, 아니면 아직, 진짜 종교를 만나지 못했던 것뿐일까요?
신은 변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우리가 ‘신의 뜻’이라 여겼던 것들이 너무 자주, 인간의 언어와 욕망으로 오염되었다는 데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찾는 진짜는 눈에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던 그 물음을 다시 꺼내고 있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혹시… 아직 ‘진짜’가 나타나지 않은 건 아닐까?”
Q3. AI는 우리에게 진리를 깨닫게 해 줄 수 있나요? ― 종교와 AI의 본질적 차이는 무엇인가요?”
그리고… “그걸 AI가 대신해 줄 수 있을까?”
요즘 우리는 어떤 질문이든 AI에게 묻습니다. 가족 간의 갈등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삶이 지칠 땐 왜 살아야 하는지, 때로는 기도문을 대신 지어 달라고도 하죠.
놀라운 건, AI는 대부분 아주 그럴듯한 대답을 해 준다는 겁니다. 오히려 인간보다 더 정리되어 있고, 더 논리적이고, 더 친절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혹시 AI는… 진리를 알고 있을까?”
이 질문을 조금 더 조심스럽게 풀어 보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진리를 ‘계산’할 수 있을까?
AI는 데이터를 모읍니다. 수백만 개의 문장, 수십억 개의 단어, 그리고 그 안의 패턴을 학습하고 가장 그럴듯한 답을 꺼내 줍니다.
하지만 인간은, 정말 정답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였던가요?
어떤 아이가 죽음을 앞두고 묻습니다. “엄마, 나는 왜 이렇게 아파야 해?” AI는 이 질문에 수많은 통계와 의학 지식을 동원해 매우 정밀한 설명을 해 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대답이 아이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을까요?
진리는 지식이 아닙니다.
진리는, 책에 적혀 있는 말이 아니라
내가 직접 살아 내며, 내 가슴에서 울린 그때 비로소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은 정확한 말보다 진심에 움직이고, 논리보다 함께 울어 줄 수 있는 존재를 원합니다.
AI는 머리로 정답을 알려 줄 수 있어도, 가슴으로 그걸 느끼게 할 수는 없습니다. AI는 논리를 제시할 수 있지만, 그 논리로 삶을 버티진 못합니다.
왜냐하면, AI는 살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울어본 적도 없고, 사랑에 실패해 본 적도 없고,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해 스스로를 미워해 본 적도 없습니다.
그건 인간만이 가진 특권입니다. 상처를 끌어안고서도 끝내 이해하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이 있어야 비로소 우리는 진리를 향해 한 걸음 내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AI는 우리를 대신해 진리를 완성해 줄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 진리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잠시 등불을 비춰 주는 지도가 될 수는 있겠지요.
진리는, 암기해서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견디며, 걸으며, 살아가며… 끝내 내가 ‘사람’으로서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 여정을, AI가 대신 걸을 수는 없습니다. 그건 오직, 사람만이 걸을 수 있는 길이니까요.
Q4. 지금 종교는 왜 이렇게 멀게만 느껴질까요?
― 믿음 말고, 내 삶을 바꿔 주는 종교는 없을까요?
하지만 앞선 질문에서 우리는 확인했습니다. AI는 삶을 살아 내지 못하기에, 진리를 대신해 줄 수 없다고.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정말로 필요한 종교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한때 사람들은 종교가 전부라고 믿었습니다. 신이 말하면 따랐고, 그 말씀은 곧 진실이었고, 의심은 죄처럼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습니다. 종교를 말하면 먼저 의심부터 생기고, 신을 말하면 조용히 거리를 두는 시대입니다.
‘믿는다’는 말이 이젠 때로는 불편함을 주기도 합니다. 그건 어쩌면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믿어야만 했던 종교’에 지쳐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제 사람들은 누군가 이렇게 말해주길 바랍니다.
“믿기 전에 먼저 물어보세요.” “스스로 납득한 다음에 시작해도 괜찮아요.”
우리는 너무 오래 정답을 외우듯 믿어야만 하는 신앙을 해 왔는지도 모릅니다.그러다 보니, 삶이 고단해질수록 신앙이 위로가 아니라 부담이 되었고, 기도는 위안이 아니라 죄책감으로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시대는 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맹신에 머물 수 없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납득한 진리 앞에서만 마음을 열 수 있어요.”
그렇다면, 지금 진짜 종교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진짜 종교는, 사람을 더 고개 숙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고개를 들게 해 주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내 안의 신성을 부끄러워하게 만들기보다, 그 신성을 발견하게 이끌어 주는 길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기도를 강요하지 않고, 의심을 죄라 하지 않으며, 삶에서 무너졌을 때도 “그 또한 너의 삶이고, 네 일부다.”라고 말해주는 그런 품, 그런 길 말입니다.
진짜 종교는 위대한 교리나 이상적인 구호가 아니라, 삶 속에 조용히 와닿는 진리여야 합니다.
장엄한 성전을 짓기보다, 사람 마음 안에 조용히 길 하나 내주는 것.
사랑을 가르치기보다, 사랑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 그게 신의 길 아닐까요?
이제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세상엔 너무 많은 종교가 있다는 걸. 하지만 그중 정말 ‘살아서 움직이는 종교’, 다시 말해 삶 속에서 변화를 일으키고 내면의 위안을 주는 종교는 정말 드물다는 것도요.
그래서 이제, 진짜 종교란 더 이상 “신을 믿으라.”는 말이 아니라, “너 안의 신을 깨워 보라.”는 말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아니라, 앎으로 이끄는 길. 죄책감이 아니라, 존엄으로 이끄는 길.
그게 지금,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붙잡고 싶은 ‘진짜 종교’의 모습 아닐까요?
Q5. 신의 존재, 진리의 문제에 대해 증산도는 뭐라고 하나요?
― 신이 인간으로 왔다는 이야기를… 믿어도 될까요?
그리고 마침내, 이제 이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그 모든 물음에, 이미 오래전부터 응답해 온 진리가 있다면… 당신은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나요?”
그 대답은, 증산도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증산도를 처음 들었을 때 “또 하나의 종교인가?”라고 묻습니다. 기도를 하고, 수행을 하고, 경전을 읽고…
겉으로 보기엔 다른 종교와 비슷해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면 그 안에 살아 있는 사람들의 눈빛과 말투, 삶을 대하는 태도에서 무언가 아주 다른 온도가 느껴집니다.
그들은 신을 믿는다고 말하기보다, 신과 함께 살아간다고 말합니다.
증산도는 이렇게 전합니다.
“신이 인간을 사랑하신다면, 가르침만 보내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반드시 인간의 몸으로 직접 오셨을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가 오래도록 기다려왔던 가장 인간적인 신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리고 150여 년 전 조선 땅 전라도 고부라는 작은 마을에 그분이 오셨습니다.
그는 자신을 ‘상제上帝’라 밝혔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 불교의 여래, 유교의 상제… 그 모든 성자들을 내려보내신 하늘과 땅, 인간과 신을 모두 주재하시는 대우주의 통치자 그분이 인간으로 오셨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증산도는 말합니다.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가르침은 삶 속에서 스스로 깨달아야 할 진리입니다.
그 깨달음은 이론이 아니라 행위로, 경전이 아니라 실천으로, 기도가 아니라 도道로 이어집니다.
그들이 읽는 주문 ‘시천주주’, ‘태을주’는 그저 외우는 소리가 아닙니다. 숨을 고르고, 마음을 고요히 하고,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신성을 깨워내는 길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 인간은 죄인이 아니라 우주의 뜻을 실현할 수 있는 존재인 인존人尊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그래서 증산도는 단순한 종교가 아닙니다. 다가올 새 시대, 인류 모두가 함께 살아갈 ‘삶의 길’입니다.
기성 종교의 문법을 빌려온 것이 아니라, 후천 문명에서 열릴 새로운 인간 삶의 ‘생활의 대도大道’를 지금 여기, 미리 열어 놓은 것입니다.
이 길은 거창하지도, 신비롭지도 않습니다. 다만 이렇게 말할 뿐입니다.
“하늘과 땅도 뜯어고쳐야 할 때가 온다. 너도 그 일에 함께하라.”
그리고 그 길은 지금 당신이 조용히, “나는 왜 이 시대에 태어났을까” 하고 마음속에서 던진 바로 그 질문 안에서, 이미 열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에필로그
: 가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요.
‘왜 하필 지금일까. 왜 이 시대에, 이 몸으로 태어난 걸까?’
그건 단순한 철학도 아니고, AI와 종교를 비교하는 분석도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그건, 제 안에 아주 오래전부터 머물고 있던 그 물음을 다시 꺼내 보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왜, 지금 이 시대에, 이 몸으로 태어난 걸까.”
그 질문은 사람이 무너지지 않으려 애쓸 때, 정말 살아야 할 이유가 잘 보이지 않을 때, 아주 조용히 마음 안에서 올라오는 문장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누구보다 많은 것을 알고, 누구보다 빠르게 판단하며, 누구보다 논리적으로 말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어쩌면 누구보다 자주 흔들리고, 자주 고독하고, 자주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시대입니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결국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기도를 가르치려는 게 아니라, 기도하고 싶어지는 마음은 어디서부터 오는지를 따라가고 있었고, 종교를 옹호하려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진짜’를 기다리는 그 마음의 결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진리를 주장하려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왜 그토록 갈망해 왔는지를 조심스럽게 고백하고 있었던 거죠.
처음 증산도를 만났을 때 제가 느낀 첫 감정은 ‘확신’이 아니라 ‘놀라움’이었습니다.
신이 사람이 되어 오셨다고요? 그리고 지금, 우리 곁에서 함께 살아가고 계신다고요?
그건 어쩌면 우리가 오래전부터 진심으로 원해 왔지만,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이야기였습니다.
이 글을 따라 여기까지 함께 와 주신 당신, 당신은 아마 이미 알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진리는 멀리 있지 않다는 걸. 진짜 종교는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는 걸.
이제, 그 문장을 당신에게 조용히 건네며 글을 마칩니다.
“나는 왜 이 시대에, 이 몸으로 태어났을까.”
그 질문 안에 당신의 길이, 당신의 진리와 당신의 신성이 이미 조용히 깃들어 있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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