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우리돌의 들녘 - 역사는 무엇인가를 남겨 놓고자 한 투쟁의 결과다
[이 책만은 꼭]
대한인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우리 뭉우리돌 이야기
역사는 기억하는 자의 것이다. 단재 신채호申采浩(1880~1936) 선생은 “민족을 버리고는 역사가 없을 것이며, 역사를 버리고는 한 민족의 자기 국가에 대한 관념이 크지 못할 것”이라며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과거 현재 미래의 다른 시간대가 하나의 선으로 이어질 때 온전히 한 편의 서사敍事가 완성된다. 그것은 내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우리는 왜 위대한지를 깨닫게 해 준다. 필자는 우연히 『뭉우리돌』 시리즈를 접했고, 저자의 글과 사진을 통해 조상, 선배들의 삶과 만났다.
영국의 언론인 프레더릭 매켄지Frederick Arthur McKenzie의 저서 『한국의 자유 투쟁(Korea’s Fight for Freedom)』에는 헐벗은 독립운동가들을 보고 쓴 대목이 있다. “그들은 불쌍해 보였다. 그들은 죽을 운명이었고, 전혀 가망이 없는 명분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곧 오른편에 있는 지휘관을 보았고, 그의 반짝이는 눈과 미소는 나의 이런 생각을 비웃는 듯했다. 동정. 내가 동정해야 할 대상은 그들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오늘을 있게 한 독립운동의 역사를 살펴보고 이 나라가 어떻게 지켜졌는가를 되새기며, 역사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된다. 저자의 말처럼, “이제 기억하는 것이 곧 독립운동이다.”
거의 대다수의 사람이 함께 꿈꾼 대한의 광복과 신념을 품고 가시밭길을 선택해 모든 삶을 걸었으며 이름조차 남기지 않은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지난 과거에 대해 이해든 용서든 부정이든 긍정이든, 한 번쯤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가 안내하는 공간의 기록과 흔적을 통해서.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미래로 나아갈 것이다. 그래서 이 뭉우리돌의 이야기는 계속되어야 한다.
실패했으나 단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던 위대한 독립 영웅들
『뭉우리돌의 들녘』은 러시아와 네덜란드에 남겨진 우리 독립운동의 흔적을 발굴하고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뭉우리돌’은 둥글둥글하게 생긴 큰 돌을 뜻하는 우리말로, 김구의 『백범일지』에서 비롯됐다. 김구가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을 때 일본 순사가 “지주가 전답의 뭉우리돌을 골라내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냐!”라고 말하며 그를 고문했다. 그 말에 김구는 “오냐, 나는 죽어도 뭉우리돌 정신을 품고 죽겠고, 살아도 뭉우리돌의 책무를 다하리라”라고 답했다.
작가 김동우는 김구의 말에서 착안하여 뭉우리돌처럼 굳건히 박혀 독립운동에 생을 바친 이들을 직접 찾아다니고 있다. 인도, 멕시코, 쿠바, 미국, 러시아, 네덜란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중국, 일본, 국내 등 10개국 300여 곳의 현장을 사진으로 기록했으며, 현재까지 작업을 이어 가고 있다. 2021년 7월 인도, 멕시코, 쿠바, 미국의 한인 독립운동 작업물을 엮어 『뭉우리돌의 바다』를 출간했으며, 『뭉우리돌의 들녘』은 그 두 번째 책으로 러시아와 네덜란드 이야기다.
주요 내용
한반도와 맞닿은 땅, 극동 러시아. 1864년 기근을 피해 두만강을 건너간 조선인들이 연해주沿海州에 한인 마을을 세워 정착했다. 이후 연해주는 한인들의 생존을 위한 땅이자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의 항일투쟁 본거지이자 최전선이 되었다. 수백의 독립운동가들이 탄생하고 스러져 간 땅, 가장 먼저 임시정부가 설립된 땅. 그곳에 망국 앞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이 책 표지 사진은 독립운동가 최재형崔在亨의 가옥이다. 많은 사람이 안중근 의사는 잘 알고 있지만,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던 재력가이자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은 잘 알지 못한다. 이 최재형의 외조카이자 안중근安重根의 의형제로 홍범도洪範圖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독립운동 지도자로 주목받았던 ‘밀정’ 엄인섭嚴仁燮이 끼친 해악도 잘 알지 못한다.
대한제국이 국제사회에 마지막으로 국권 회복을 호소해 보려 한 헤이그 특사가 무엇인지 역사 교과서에서 배웠지만,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유라시아 대륙의 끝 네덜란드까지 내달려 간 특사들의 절박함과 결연함, 그리고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그들의 최후는 어땠는지 잘 알지 못한다. 남과 북으로 갈라진 이념 갈등 역사 때문에 지워진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 또한 제대로 알지 못한다.
나라의 위기 앞에 여지없이 뭉쳤던 백성도 있다. 그들은 독립운동가들의 무장武裝을 위해 기꺼이 가장 소중한 가락지와 비녀, 놋요강 등을 내어놓았다. 이는 대한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봉오동, 청산리 승리의 기반이 되어 주었다.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실제 모티프가 된 철혈광복단의 ‘15만 원(현재 가치 150억가량) 탈취 의거’도 연해주 일대를 배경으로 한다. 이 책에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이기에 한국에서 조명받지 못했던 홍범도 장군의 외손녀 김알라 여사와 독립 활동을 기록한 독립운동가 이인섭의 막내딸 스베틀라나 여사를 직접 만나 인터뷰한 내용도 들어 있다.
지은이 김동우
대학에서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신문사 기자로 일한다. 그러다 행복이 직장에 없음을 깨닫고 과감히 사표를 던진다. 한동안 여행자의 삶을 살던 중 우연히 인도 델리에 위치한 레드 포트Red Fort가 한국광복군 훈련지란 사실을 알게 된다. 목덜미를 타고 이상한 기운이 흐르는 기묘한 체험이었다.
그렇게 독립운동가들의 삶에 사로잡혀 2017년부터 국외 독립운동 사적지를 찾아 사진과 글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중국, 인도, 멕시코, 쿠바, 미국, 러시아, 네덜란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일본 등 10개국의 독립운동 사적지와 그곳에 살고 있는 후손들을 취재했으며, 현재까지 작업을 이어 가고 있다.
꾸준히 관련 전시와 강연을 하고 있으며, 지은 책으로는 『뭉우리돌의 바다』, 『뭉우리돌을 찾아서(사진집)』, 『세계에 남겨진 독립운동의 현장』, 『걷다 보니 남미였어』, 『트레킹으로 지구 한 바퀴』 등이 있다. 국가보훈부 보훈문화상, 다큐멘터리 온빛사진상, 국가기록관리유공자 표창 등을 수상한 바 있으며, 국가보훈부 정책 자문위원을 역임했다.
(인스타그램 @road_dongwoo | 페이스북 @dw1513)
네덜란드 헤이그, 하늘에 핀 대한제국 특사의 충혼
120년 전인 1905년 을사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은 일본에 의해 강압적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는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게 된다. 절치부심하던 고종高宗 광무제光武帝는 1907년 4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에 특사를 파견하기로 결심한다. 불법적 국권 침탈과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전 세계에 알리려는 시도였다.
특사의 구성은 정사로 강압적인 을사늑약 현장을 증언할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李相卨을, 부사는 국제법 등 법리를 다룰 전 평리원 예심판사 이준李儁, 그리고 부사 및 통역으로 어학 천재인 러시아 공사관 참서관 이위종李瑋鍾이었다. 이들을 지원하는 역할로 선교사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1863~1949)가 제4의 특사로 낙점되었다. 을사늑약이 맺어진 덕수궁 중명전에서 고종을 알현한 이준은 고종 광무제가 자필로 서명(Sign)하고 비밀리에 국새가 찍힌 백지 위임장과 친서를 가지고 한양을 떠나 부산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을 만났다.
특사 이상설과 이위종
안중근이 가장 존경했던 인물 이상설은 과학자이자 수학자였으며 법률가였다. 을사늑약 당시 고종에게 죽음으로 나라를 구하란 취지의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이후 가산을 정리하여 망명길에 올라 북간도 용정에서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열어 운영하고 있었다.
이준과 이상설은 경비가 부족해서 연해주 동포 사회에 손을 내밀었다. 여비를 마련하여 겨우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하얼빈哈爾濱과 이르쿠츠크Irkutsk를 거쳐 장장 보름을 달려 6월 4일에 상트페테르부르크Sankt Peterburg에 닿는다. 이곳에서 러시아 공사 이범진李範晋과 그 아들 이위종을 만나게 된다. 이위종은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과 싸운 포도대장 이경하의 손자로 미국 공사인 아버지의 이동에 따라 프랑스와 러시아에서 지내면서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거의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특사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를 예방하여 대한제국의 처지를 호소하고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니콜라이 2세는 특사들을 만나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의 의장이자 러시아 전권 대표 넬리도프에게 대한제국 특사들을 멀리하라는 밀지를 보낸다. 러일전쟁에서 패전 이후 러시아와 일본은 외몽골과 대한제국의 지배력을 상호 인정코자 하였기에 러시아가 대한제국을 향해 휘두른 배반의 칼은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대한제국의 호소
이런 사실을 모른 채 특사들은 마지막까지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 성명서를 번역하고 회의를 준비해 갔다. 그러나 의장국 러시아는 특사들에게 참석 불가를 통보하였다. 헐버트는 일제 감시망을 피해 특사들의 이동을 돕고 서방 언론과 접촉해 나갔다.
헤이그(현지어는 덴 하그Den Hagg)에 도착한 특사들은 드 용 호텔(De Jong Hotel, 현 이준 열사 기념관)에 여장을 풀고 첫 공식 일정으로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특사들은 활동은 곧장 일본 대표단에 흘러 들어갔고, 일본은 대한제국의 회의 참석을 방해했다. 특사들은 장외 활동을 벌였다. ‘무슨 이유로 대한제국을 제외하였는가?’란 논설, 성명서 전문을 게재하였다. 각국 기자단의 국제 협회에서 이위종은 ‘대한제국의 호소(A Plea for Korea)’라는 프랑스어 연설로 청중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열리지 않은 문 앞에서
1907년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던 비넨호프 왕궁 기사의 전당은 현재 네덜란드 국회의사당으로 쓰이고 있다. 이상설, 이준, 이위종이 그토록 들어가고 싶었던 곳, 외교권이 없어, 초청장이 없어서 그리고 나라의 힘이 없어서 결국 열어젖히지 못한 문.
대한제국 제1호 검사 이준은 지탱할 수 없던 패배감과 무력감 앞에 무릎이 꺾였다. 비애감에 식음을 전폐하고 스스로 죽음으로 몰아갔다. 이 부분을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바람에 나부끼는 태극기 아래로 특사들이 드나들었을 문을 열었다.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 삐거덕대는 나무 마루 위를 걸었다. 마치 그 소리가 시간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것 같았다. ‘이 방에서 이준 열사가 순국했습니다!’ 방문 위에 쓰인 문구가 보였다. 1907년 7월 14일 저녁 숨을 거둔 이준의 죽음은 지금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원인 미상 그의 죽음을 놓고 화병설(분사), 단독 감염설(일본 정보문서 기록), 자살설, 독살설, 할복설 등 추측만 무성할 뿐이다. 할복설은 『대한매일신보』의 의도적 오보일 가능성이 높다. 이 신문에서 일하던 양기탁, 신채호, 어니스트 베델 등이 민족 공분을 촉발하기 위해 허구의 기사를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준이 순국한 방 벽에는 그의 사망 진단서가 걸려 있다. 애석하게도 거기에는 사인死因이 빠져 있다…. 방 한쪽 구석에는 이준의 무덤에 처음 썼던 비석이 놓여 있다. 그것은 온전한 형태가 아니었다. 누군가 비석을 훼손했고 그걸 나중에 되찾은 거라 했다. 눈길이 이준의 유훈 중 한 대목에 가 멈췄다.
땅이 크고 사람이 많은 나라가 큰 나라가 아니고
땅이 작고 사람이 적어도
위대한 인물이 많은 나라가 위대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
(책 196~198쪽, ‘이준의 위대한 나라’)
땅이 작고 사람이 적어도
위대한 인물이 많은 나라가 위대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
(책 196~198쪽, ‘이준의 위대한 나라’)
이준 열사 기념관 이야기
네덜란드에서 무역업을 하던 이기항⋅송창주 부부는 자비로 드 용 호텔을 사들였고, 1995년부터 ‘이준열사기념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1992년 네덜란드 신문에 이준 열사에 관한 기사가 실린 것을 본 이기항 원장은 호텔 건물을 찾았다. 1층은 당구장으로, 2에서 3층은 무주택자 임시 숙소로 쓰이고 있는 다 허물어진 건물이었다. 재개발이 추진 중이었는데, 사방으로 뛰면서 문제 해결 방안을 찾았다. 시장에게 헤이그 특사와 건물의 역사적 가치를 설명하는 청원서를 보냈고, 다행히 시장이 이런 사정을 잘 이해해 주어 건물을 사게 되었다고 한다. 이 건물을 박물관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자금도 턱없이 부족했지만, 자료도 매우 부족했다고 한다. 네덜란드와 러시아, 일본 등에서 발품을 팔며 하나씩 자료를 모았고, 암스테르담 자택에서 헤이그까지 왕복 120킬로미터를 출퇴근하면서 여기를 지키고 있다고 한다.
이상설 선생과 이위종은 이준 열사의 유해를 임시로 매장하였고, 1907년 9월 5일 묘지를 영구 임대로 확보하여 정식으로 장례를 치렀다. 56년이 흐른 1963년에서야 이준 열사의 유해는 서울 강북구 수유동에 봉환된다. 세 명의 특사 중 유일하게 고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독립운동 성지 연해주, 안중근의 단지
두만강 하구에는 크라스노예 셀로Krasnoe Selo란 곳이 있다. 우리 이름으로 녹둔도鹿屯島. 조산보 만호였던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이 여진족과 싸움을 벌였던 곳이다. 이곳에서 좀 더 올라가면 크라스키노Kraskino가 있다. 이른바 연추延秋라 불리는 곳이다. 군 요새였던 크라스키노라는 곳의 인근에 있고 대표적인 한인 마을로 꼽히던 곳이 ‘연추’인데, 크라스키노와 아주 가까이 위치했던 탓에 종종 연추와 크라스키노가 혼용되어 불리곤 했다. 깊고 기름진 검은 땅, 새로운 희망을 심은 터전이었던 곳이다. 대한제국 말기 연해주 한인 의병 운동의 중심지로 수많은 애국지사가 북한과 중국의 훈춘, 북간도 등을 오갈 때면 반드시 거쳐 가던 곳이었다.
1908년 봄. 최재형崔在亨(1860~1920), 이범윤李範允(1856~1940), 이위종李瑋鍾(1887~미상) 등이 독립운동 단체 동의회同議會를 조직한다, 그해 여름 안중근安重根은 동의회 산하의 군대인 대한의군 참모 중장으로 국내 진공 작전에 나섰다. 처음에는 회령 방면으로 진출하면서 몇 번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만국공법(국제법)에 따라 일본군 포로를 풀어 주는데, 여기에 불만을 가진 엄인섭嚴仁燮은 휘하 병사를 데리고 조직을 이탈한다.
이즈음 엄인섭은 1908년 11월 스스로 일본 영사관을 찾아가 자신을 밀정으로 써 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한다. 단지斷指 이전부터 밀정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밀정의 길을 간 이유는 돈 때문이다. 방탕했고 도박에 손을 댄 그에게 필요한 건 돈뿐이었다. 그는 홍범도 체포 계획, 항일 논조 신문사의 ‘인쇄 활자 절도 사건’ 등을 일으켰다. 1920년 독립 자금 마련을 위한 ‘15만 원 탈취 의거’가 일어나고 신한촌에서 철혈광복단 단원들이 체포되면서, 여기에 연루된 밀정이 엄인섭인 것으로 탄로 난 것이다. 이후 그는 일본에서도 버림을 받고 “일본 정탐 놈”이란 손가락질 속에 1936년 지린성吉林省 훈춘琿春에서 피를 토하며 죽었다.
한편, 안중근이 이끄는 대한의군은 일본군 포로를 풀어 준 것이 부메랑이 돼 회령군 영산靈山 전투에서 대패하고 만다. 동지 우덕순禹德淳은 일본군에 잡혔고, 의병은 뿔뿔이 흩어지고 안중근도 산속을 헤매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천신만고 끝에 연추에 복귀한다. 절치부심한 안중근은 연해주 동포 사회를 순회하며 교육에 힘쓰고, 단체를 조직하도록 했다.
그러나 극동 러시아 정부의 의병 활동 제지와 최재형에 대한 압박, 여기에 의병 세력 내 갈등 등으로 동포들의 싸늘한 시선을 받으며 별 소득 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여기에 더해 안중근은 친일 단체 일진회一進會 일당들에게 둘러싸여 집단으로 구타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나라가 금한 의병 활동을 왜 하냐며’ 목숨을 위협한 것이다. 몸과 마음이 상한 안중근은 결심했다. 단지斷指! 한마음으로 뭉쳐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고 목적을 이루기를 기약하며 손가락을 자르기로 한 것이다.
1909년 3월 연추의 눈 덮인 자작나무 숲에서 뜻을 같이하는 동지 12인과 함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고 왼쪽 손의 약손가락(넷째 손가락) 한 마디를 끊었다. 안중근의 수인手印은 이때부터 찍기 시작한 것이다. 태극 모양이 그려진 천 사방에 ‘대한독립大韓獨立’이라고 혈서를 써서 결의를 다졌다.
이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신체를 훼손하면서까지 명세한 그 행위는 무엇을 의미할까. 공자 또는 그의 제자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는 효도 경전 『효경』 첫머리에는 ‘신체 발부 수지부모’란 말이 나온다. 부모에게 받은 몸을 잘 보존하는 게 효의 첫걸음이란 뜻이다. 단지동맹을 맺은 사람들은 그것을 몰랐을까. 단지는 머리카락을 잘라 내는 ‘단발’과는 다른 차원이다. 피를 봐야 하고 극심한 고통을 감내하는 일이다. 그리고 생채기를 평생 눈으로 보고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단지는 효의 실천보다 나라의 존립이 우선돼야 한다는 의미 아닐까. 그것은 효를 사사로운 감정으로 밀어내, 그 자리에 독립이란 두 글자를 채우는 일이다.
(88~89쪽, ‘단지, 단지는 단지가 아니다’)
(88~89쪽, ‘단지, 단지는 단지가 아니다’)
이후 안중근은 대한의군 참모 중장 자격으로 1909년 10월 26일 9시 30분 하얼빈역에서 일본국 초대 내각총리대신이자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 일본을 만든 개국공신인 공작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초대 조선 통감을 지내면서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케 하여 대한제국 병탄에 원흉으로 꼽히는 자였다.
안중근은 『동양 평화론』을 집필하고자 했으나, 일제는 그런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아 결국 1910년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향년 32세로 순국하였다. 안타깝게도 그의 유해는 지금까지 발견되지 못하였고, 서울 효창공원 삼의사묘에 가묘가 조성되어 있다.
안중근과 페치카 최재형 선생
연해주沿海州는 러시아 말로 프리모르스키 크라이Primorsky krai 즉 ‘바다에 인접한 지역’이란 뜻이다. 이곳의 주도는 ‘정복’이란 뜻의 ‘블라디’와 동방이란 의미의 ‘보스토크’가 합쳐진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다. 즉 동방의 지배자란 호전적 이름이었다. 이곳을 우리 조상들은 해삼이 많이 잡히는 어촌이라 해서 해삼위海蔘威라고 했다. 우리 조상들이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로 이주한 건 1863년 무렵이었다.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을 전후해서 이 지역에는 약 10여만 명 정도의 한인들이 살았다. 이 중 한인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친 인물이 최재형崔在亨(1858~1920)이다. 그는 엄청난 부를 일군 상인이었고, 한인들의 친구이자 동지였다. 그리고 엄혹한 시기 연해주 독립운동의 상징이었다. 그의 별명은 페치카Pechka였다. 러시아나 만주 등 추운 지방에서 쓰는 난방 장치로 돌, 벽돌, 진흙 따위로 만든 난로를 의미한다. 아마 2000년 이전 군 생활을 했던 사람들은 이 이것으로 난방했다는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때는 빼(뻬)치카로 불렀다. 그만큼 연해주 한인들에게 최재형은 한겨울 페치카 같은 믿음직한 분이었다.
가난한 어린 시절, 가난과 형수의 구박을 못 이겨 가출한 그는 무역선 빅토리아호 선장에게 구조되었다. 여기에서 어린 선원으로 새 삶을 준비하고 ‘표트르 세묘노비치 최’란 러시아식 이름을 가진 무역선 선원이 된다. 이후 상사 직원으로 일하고 가족도 다시 상봉하는데, 러시아가 연해주에서 군사력을 증강할 때 통역을 맡게 된다. 중간에서 사리사욕을 채우는 다른 통역과 달리 차별적이고 불합리한 임금을 조정하는 등 처지가 어려운 동포 편에서 그들의 권익 보호에 앞장섰다.
신임을 받은 그는 지금의 면장 또는 군수에 해당하는 연추 도헌都憲에 임명되어 교육 사업에 열을 올렸다. 월급을 모아 장학금으로 출연하여 매년 우수 학생을 선발해 유학을 보냈다고 한다. 그는 동아시아 지역 진출에 박차를 가하는 러시아 극동함대 사령부 식료품 납품권을 따냈다. 여기에 농업, 축산업, 건축업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는데, 필요한 일손은 동포들의 몫이 되었다.
이런 그의 노력은 한인 사회 안정과 직결되었다. 최재형은 러시아가 러일전쟁에서 패전하고 일본이 불법적으로 맺은 을사늑약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간도 관리사 이범윤(러시아 초대 공사 이범진의 6촌 아우이자 헤이그 특사 부사 이위종의 7촌 숙부)과 함께 국권 회복을 위해 의병 모집에 앞장섰다.
1908년 최재형의 집에 의병대가 창설되는데, 조직 운영과 활동에 드는 비용과 의병을 입히고 먹이는 일까지 거의 모든 부분에 관여한 대한의군 총장이었다. 그래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뒤 안중근이 자기 상관이자 조선 8도 독립운동을 총괄한다고 주장한 김두성을 바로 이 최재형이라고 보기도 한다.
최재형은 1909년 1월 31일 『대동공보大東共報』 사장으로 취임해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이 신문사는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를 배후에서 도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신문의 후신이 『대양보大洋報』인데 밀정 엄인섭이 이 『대양보』 인쇄소에서 95킬로그램에 달하는 한글 활자 1만 5천 개를 훔쳐 달아나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 사건으로 한인 민족지 발행에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국권피탈 이후 일본과의 관계를 우려하던 러시아는 항일 운동을 더욱 강하게 탄압했고 『대동공보』도 폐간되었다.
당시 연해주는 망명한 독립지사의 집결지였는데, 그는 점진적인 온건 투쟁 노선으로 변화를 꾀하며 1911년 5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최대 한인 단체인 권업회勸業會를 꾸리게 된다. 최재형은 권업회의 발기회 회장을 맡았고, 발기회 부회장으로는 홍범도가 참가했다. 권업회 의장으로는 당시 유명한 독립운동가이자 헤이그 특사의 정사였던 이상설이 추대되었다. 권업회는 1914년 #대한광복군정부#를 출범하며 국외에서 가장 먼저 정부 조직을 꾸린 단체가 됐다.
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 중 러시아가 일본의 동맹국이 되면서 결국 권업회는 해산되고 만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인하여 러시아 국내의 상황이 바뀌게 되자, 그는 일본과 반대되는 입장에 서면서 자동으로 적군 편에 합류했다. 이후 연해주 일대는 일본군이 중심이 된 백군과 적군의 치열한 전쟁터가 되었기 때문에 그 역시 자주 거처를 옮겨야 할 정도로 불안정한 생활을 지속하였다.
1918년 6월 제2회 ‘특별 전로 한족 대표자 회의特別全露韓族代表者會議’에서 이동휘와 함께 명예회장으로 선출되는데, 여기서 조직된 ‘전로 한족 중앙총회全露韓族中央總會’가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로 확대 개편되고 최재형은 여기서 외교부장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4월 상하이에서 성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그는 재무 총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그의 활약은 여기까지였다.
연해주 일대에서 적극적으로 러시아 내전에 참가 중이던 일본군은 1920년 우수리스크를 급습해 연해주 4월 참변을 일으켜, 그를 제일 먼저 즉결 처형했다. 향년 61세. 그는 충분히 피신할 수 있었으나, 자기가 사라지면 가족이 고통당할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피하지 않았다. 자신보다 가족들의 안위를 걱정했던 최재형은 동지 김이직, 엄주필등과 함께 총살되었다. 이곳을 답사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우스리스크)시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소비에트 스카야 언덕. 이곳은 4월 참변 당시 400여 명이 총살된 현장이다. 최재형도 이곳에서 숨을 거둔 것으로 추정된다. ... 하루는 아침 댓바람에, 또 하루는 해가 중천일 때, 어떤 날은 어스름한 시간을 골랐다. 처음에는 또박또박 정직하게 사진을 찍어 봤다. 성에 차는 컷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다 카메라를 흔들어 보기도 하고, 스트로보Strobo(플래쉬, 섬광등閃光燈)를 미친 듯 쏘아 댔다. 이도 마음에 안 들면 삼각대를 꺼내 필터를 끼고 시간을 흘려 보냈다. 나중에는 아예 카메라를 들고 뛰기도 했다. 언덕에 오르면 매번 어떤 막연함 앞에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방향을 잡기 힘들었다. 할 수 있는 건 카메라를 들고 언덕 위 숙살지기 앞에서 버둥질하는 게 다였다. 그러다 그 누구의 죽음과 아무 상관도 없는 십자가 옆으로 해가 넘어가는 걸 보고 터벅터벅 언덕을 내려왔다. 걸음이 더해질수록 ‘그는 도대체 어떤 빛을 보고 절명했을까?’ 걸음걸음 떨쳐 낼 수 없던 의문이 몸집을 키웠다. 그리고 다음 날 구원받지 못한 그 누구의 꿈을 찾아 부득불 다시 언덕을 올랐다. (263~264쪽, ‘한 언덕에서의 버둥질’)
저자는 뭉우리돌을 찾는 작업을 계속한다고 밝혔다. 안중근 의사와 홍범도 장군을 다루는 『몽우리돌의 광야』이다. 국경을 초월한 이야기가 사진과 함께 언제 정리될지는 모른다고 하지만, 언젠가는 우리와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 자신이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억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이 작업을 하는 신념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 있어 여기에 적어 본다.
“들녘을 터벅터벅 걸어 어렵사리 목적지를 찾아가면 황량한 빈터가 전부이거나, 누군가 두 팔 벌려 환영해 줄지 모른다는 상상이 얼마나 허황된 것이었는지 재차 확인하는 순간이 온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기록해 놓을 순 없다. 또박또박 찍어 나가는 사진은 분에 넘치는 도구를 사용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다. 편하자고, 비용을 줄여 보자고 카메라를 잘못 선택하면 두고두고 후회가 남을 것 같다. 누가 정해 놓거나 시킨 게 아니다. 단지 당당하고 떳떳하고자 했을 뿐이다. 누구에게? 나보다 먼저 나라를 생각하며 지금을 존재케 한 과거의 그들에게. 〈뭉우리돌을 찾아서〉는 내게 그런 작업이다.” (2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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