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왜 항상 ‘그것 아닌 것’과 함께 있는가”
[『마음이란 무엇인가?』]
한자경 / 이화여대 철학과 교수
최정원(16세): 우리는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남을 이기려는 경쟁심으로 발전을 이뤄 나가는 것 같은데, 그런 경쟁을 어떻게 나쁘다고만 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렇게 물을 수 있죠. 현재에 머무르지 않기 위해 경쟁을 통해 더 노력하게 되고, 그래서 사회가 발전한 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지금의 발전은 인간의 경쟁심 덕분이다.’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죠.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은, 그런 ‘경쟁하려는 마음’, ‘더 나아지려는 마음’이 필요 없다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 마음이 할 수 있는 활동의 전부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경쟁도 방식이 여러 가지입니다. ‘내가 친구보다 더 나아지겠다.’라는 식으로 남과 비교해서 이기려는 경쟁이 있는가 하면,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조금 더 나아지겠다.’라는 식으로 스스로를 넘어서는 경쟁이 있습니다. 후자가 더 건강한 경쟁이지요.
남을 밟고 올라서야 한다는 식의 경쟁에만 머무르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선의의 경쟁, 긍정적 의미의 경쟁은 좋지만, 그러면서도 남을 배려하고 같이 공감하는 마음의 활동이 함께 가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우리의 일상적인 마음, 분별 의식이 어떤 방식으로 굴러가는지 보았습니다. 이제는 그 의식 너머의, 더 본래적인 마음으로 가기 위해 마음이 세계를 이해하는 두 틀, 실체론實體論과 연기론緣起論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불교에서는 이런 개별적 실체를 ‘자아’, 사물의 실체를 ‘법法’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실체들이 있다고 보는 관점이 실체론입니다.
이에 비해 연기론은 ‘인연 따라 일어남(緣起)’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에는 그 자체로 홀로 서 있는 궁극적 실체가 없고, 모든 것은 인연과 관계를 따라 생겨난 것이라고 보는 사유입니다.
그래서 어떤 A라는 것이 있다면, A 혼자서 있는 것이 아니라, A가 생겨나도록 조건이 된 다른 것들, 곧 ‘A가 아닌 것들’을 인연으로 해서 존재한다고 봅니다.
‘나는 나 혼자 따로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체론적 사유이고, ‘나는 부모를 인연으로 해서 존재한다. 부모가 없었으면 나는 없다.’라고 보는 것은 연기론적 사유입니다. 전자는 관계를 2차적인 것으로 보고, 후자는 관계를 존재의 조건으로 보는 것이지요.
실체론에서 개별자들은 서로 부딪히는 당구공과 같습니다. 하나가 세게 치면 다른 하나는 밀려나고, 힘의 대결, 충돌, 상극의 관계가 됩니다. ‘누가 이기면 누군가 져야 한다.’라는 경쟁의 틀이지요.
연기론에서 관계는 조금 다릅니다. ‘A가 있음으로 B가 있고, B에 기대어 A가 있다.’라는 식으로 서로가 서로의 조건이 됩니다. 한 사람이 기뻐하면 그 기쁨이 전해져 같이 기뻐할 수 있는 관계, 서로를 밀어내는 관계가 아니라 한쪽이 느끼고 행동하면 다른 쪽도 공감하고 따르며 함께 살아나는 관계를 상생, 공명이라 할 수 있겠죠.
실체론적 사유 속의 관계가 경쟁競爭과 상극相克의 관계라면, 연기론적 사유 속의 관계는 상생相生과 공명共鳴의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화지에 사과를 그린 그림을 떠올려 봅시다. “여기 사과가 있다.”라고 말하려면, 도화지 안에 “여기까지는 사과고, 여기부터는 사과가 아니다.”라는 경계가 보여야 합니다. 사과의 부분만 늘려서 도화지를 빨간색으로 꽉 채워 버리면, 도화지는 온통 사과색이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 사과를 찾지 못합니다. 사과 아닌 부분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종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앞에 종이를 딱 붙여 놓으면 처음에는 이것이 종이인지 잘 모릅니다. 옆으로 밀어 경계가 보일 때 비로소 ‘아, 여기까지가 종이구나.’ 하고 알게 되지요.
이처럼 X가 X로서 드러나기 위해서는 not X, 즉 X 아닌 것(~X)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X만 따로 떼어서는 X가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X와 ~X가 만나는 경계가 중요하고, 둘은 서로를 통해서만 드러납니다.
우리는 삶과 죽음을 서로 완전히 반대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삶만 있고 죽음은 없으면 좋겠다.”라고 말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삶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이 삶으로 인식됩니다.
생화生花는 살아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시듭니다. 살고 있기 때문에 죽을 수 있는 것이지요. 죽지 않는 것은 생화가 아니라 조화造花입니다. 조화는 죽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살아 있다.”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삶도 아니고 죽음도 아닌 상태입니다. #삶과 죽음은 서로 원수처럼 떼어 버리고 싶은 두 개가 아니라, 서로를 통해서만 성립하는 한 쌍입니다.#
즐거움과 고통도 그렇습니다. 인생이 즐겁기만 하면 좋을 것 같지만, 즐거움이라는 것도 고통과 대비될 때 선명해집니다. 평소에는 아침에 눈을 뜨며 ‘행복하다.’라고 느끼지 않지만, 한동안 앞이 보이지 않는 고통을 겪다가 다시 보이게 되면, 그때 비로소 ‘눈을 뜰 수 있어 행복하다.’라는 감정이 생깁니다. 그 행복은 이전의 고통 때문에 가능해진 것입니다.
밝음과 어둠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 밝기만 하면 ‘밝다’는 것도 모르게 됩니다. 어두웠다가 밝아지고, 밝았다가 어두워지기 때문에 ‘지금은 밝다, 지금은 어둡다.’를 알 수 있습니다. 두 가지는 서로 반대되지만, 서로를 통해서만 드러나는 상즉의 관계에 있습니다.
우리는 ‘좋은 것만 남고 나쁜 것은 다 없어지면 좋겠다.’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것이 디지털적, 이분법적, 실체론적 사고입니다. 그런데 연기론적으로 보면 ‘저것에 의해 이것이 있고, 이것을 통해 저것이 있다.’라고 보게 됩니다. 이것과 이것 아닌 것이 서로 연기하고 상즉하는 관계라는 것을 깨달으면, 상대를 없애서 내가 살겠다는 태도에서 벗어나, 서로가 함께 살아가는 상생의 길을 생각하게 됩니다.
김가은(13세): 왜 사람마다 마음이 다른가요?
일상에서 우리는 ‘쟤는 슬픈데 나는 안 슬퍼.’, ‘쟤는 좋다는데 나는 별로야.’ 하면서 서로 마음이 다르다고 느낍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감정과 생각만 보면 분명히 다른 마음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서로 공감하는 경험도 있습니다. 누군가 슬퍼하면 나도 마음이 저릿해지고, 아기가 아파서 울면 엄마도 같이 아파집니다. “저 사람 마음은 나와 전혀 다를 것” 같았는데, 막상 그 사람이 기뻐하면 나도 같이 기쁘고, 슬퍼하면 같이 슬퍼지는 경험을 합니다.
고체를 생각하면, 각각의 입자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음을 그렇게 보면 모두 완전히 다른 존재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마음의 활동을 기체나 파동처럼 생각해 보면, 장벽을 쌓아도 서로 스며들고 통합니다. 그런 식으로 소통하는 마음의 차원에서는 사실 하나의 큰마음, 하나의 바다와 같은 마음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은 표층에서는 분명 서로 다르게 나타나지만, 심층에서는 서로 통하고 연결된 ‘한마음’의 차원을 함께 공유하고 있다, 이렇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김동주(18세): 불교에서는 연기하기 때문에 자아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나라는 존재가 없다면, 그러면 지금의 나는 누구인가요?
‘나라는 존재가 없다.’라는 것은, 나라는 것이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자아가 없다, 무아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고요. 그렇다고 해서 현상적으로 내가 존재하는 건 분명하잖아요, 그렇죠? 그건 “연기해서 생겨난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죠.
그러니까 실체론적으로 고립된 개별적인 자아가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이야기이고, 연기적인 관계 안에서 형성되는 자아는 분명히 존재한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박주현(15세): 그러면 나 자신이라는 자아가 없으면, 이 세상은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닌가요?
그러니까 자아를 포함해서 세계 전체의 의미를 묻는 거라면, 자아를 개별적이고 분별적인 자아로만 보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 타인이나 세계와 소통하고 있는 그런 참된 자아, 참된 마음이 무엇인가를 찾아 나간다는 데 의미가 있는 거지요. 그걸 통해서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고, 타인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열리는 거다, 뭐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까지는 우리의 일상적인 표층 의식이 실체론적 사유라는 것을 말씀드렸고, 그와 구분되는 연기론적 사유를 설명했으며, 또 그것이 상즉의 관계라는 걸 이야기했습니다. 오늘 강연은 여기까지 마치겠습니다. ■
본 기사는 STB초청특강 44회 내용을 정리한 강좌입니다. 『마음이란 무엇인가?』 1강 분별의식과 그 너머의 내용 중 두 번째 부분입니다. [편집자 주註]
상생방송 초청특강
마음이란 무엇인가? 1강 분별의식과 그 너머 ②

경쟁과 발전, 그리고 ‘좋은 경쟁’은 무엇인가
최정원(16세): 우리는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남을 이기려는 경쟁심으로 발전을 이뤄 나가는 것 같은데, 그런 경쟁을 어떻게 나쁘다고만 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렇게 물을 수 있죠. 현재에 머무르지 않기 위해 경쟁을 통해 더 노력하게 되고, 그래서 사회가 발전한 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지금의 발전은 인간의 경쟁심 덕분이다.’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죠.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은, 그런 ‘경쟁하려는 마음’, ‘더 나아지려는 마음’이 필요 없다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 마음이 할 수 있는 활동의 전부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경쟁도 방식이 여러 가지입니다. ‘내가 친구보다 더 나아지겠다.’라는 식으로 남과 비교해서 이기려는 경쟁이 있는가 하면,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조금 더 나아지겠다.’라는 식으로 스스로를 넘어서는 경쟁이 있습니다. 후자가 더 건강한 경쟁이지요.
남을 밟고 올라서야 한다는 식의 경쟁에만 머무르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선의의 경쟁, 긍정적 의미의 경쟁은 좋지만, 그러면서도 남을 배려하고 같이 공감하는 마음의 활동이 함께 가야 합니다.
실체론과 연기론 – 세상을 이해하는 두 가지 방식
지금까지는 우리의 일상적인 마음, 분별 의식이 어떤 방식으로 굴러가는지 보았습니다. 이제는 그 의식 너머의, 더 본래적인 마음으로 가기 위해 마음이 세계를 이해하는 두 틀, 실체론實體論과 연기론緣起論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불교에서는 이런 개별적 실체를 ‘자아’, 사물의 실체를 ‘법法’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실체들이 있다고 보는 관점이 실체론입니다.
이에 비해 연기론은 ‘인연 따라 일어남(緣起)’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에는 그 자체로 홀로 서 있는 궁극적 실체가 없고, 모든 것은 인연과 관계를 따라 생겨난 것이라고 보는 사유입니다.
그래서 어떤 A라는 것이 있다면, A 혼자서 있는 것이 아니라, A가 생겨나도록 조건이 된 다른 것들, 곧 ‘A가 아닌 것들’을 인연으로 해서 존재한다고 봅니다.
‘나는 나 혼자 따로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체론적 사유이고, ‘나는 부모를 인연으로 해서 존재한다. 부모가 없었으면 나는 없다.’라고 보는 것은 연기론적 사유입니다. 전자는 관계를 2차적인 것으로 보고, 후자는 관계를 존재의 조건으로 보는 것이지요.
실체론적 관계와 연기론적 관계 – 경쟁과 상생
실체론에서 개별자들은 서로 부딪히는 당구공과 같습니다. 하나가 세게 치면 다른 하나는 밀려나고, 힘의 대결, 충돌, 상극의 관계가 됩니다. ‘누가 이기면 누군가 져야 한다.’라는 경쟁의 틀이지요.
연기론에서 관계는 조금 다릅니다. ‘A가 있음으로 B가 있고, B에 기대어 A가 있다.’라는 식으로 서로가 서로의 조건이 됩니다. 한 사람이 기뻐하면 그 기쁨이 전해져 같이 기뻐할 수 있는 관계, 서로를 밀어내는 관계가 아니라 한쪽이 느끼고 행동하면 다른 쪽도 공감하고 따르며 함께 살아나는 관계를 상생, 공명이라 할 수 있겠죠.
실체론적 사유 속의 관계가 경쟁競爭과 상극相克의 관계라면, 연기론적 사유 속의 관계는 상생相生과 공명共鳴의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과와 종이 - ‘그것’은 왜 항상 ‘그것 아닌 것’과 함께 있는가

도화지에 사과를 그린 그림을 떠올려 봅시다. “여기 사과가 있다.”라고 말하려면, 도화지 안에 “여기까지는 사과고, 여기부터는 사과가 아니다.”라는 경계가 보여야 합니다. 사과의 부분만 늘려서 도화지를 빨간색으로 꽉 채워 버리면, 도화지는 온통 사과색이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 사과를 찾지 못합니다. 사과 아닌 부분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종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앞에 종이를 딱 붙여 놓으면 처음에는 이것이 종이인지 잘 모릅니다. 옆으로 밀어 경계가 보일 때 비로소 ‘아, 여기까지가 종이구나.’ 하고 알게 되지요.
이처럼 X가 X로서 드러나기 위해서는 not X, 즉 X 아닌 것(~X)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X만 따로 떼어서는 X가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X와 ~X가 만나는 경계가 중요하고, 둘은 서로를 통해서만 드러납니다.

삶과 죽음, 즐거움과 고통 – 서로 비추는 한 쌍
우리는 삶과 죽음을 서로 완전히 반대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삶만 있고 죽음은 없으면 좋겠다.”라고 말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삶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이 삶으로 인식됩니다.
생화生花는 살아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시듭니다. 살고 있기 때문에 죽을 수 있는 것이지요. 죽지 않는 것은 생화가 아니라 조화造花입니다. 조화는 죽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살아 있다.”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삶도 아니고 죽음도 아닌 상태입니다. #삶과 죽음은 서로 원수처럼 떼어 버리고 싶은 두 개가 아니라, 서로를 통해서만 성립하는 한 쌍입니다.#
즐거움과 고통도 그렇습니다. 인생이 즐겁기만 하면 좋을 것 같지만, 즐거움이라는 것도 고통과 대비될 때 선명해집니다. 평소에는 아침에 눈을 뜨며 ‘행복하다.’라고 느끼지 않지만, 한동안 앞이 보이지 않는 고통을 겪다가 다시 보이게 되면, 그때 비로소 ‘눈을 뜰 수 있어 행복하다.’라는 감정이 생깁니다. 그 행복은 이전의 고통 때문에 가능해진 것입니다.
밝음과 어둠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 밝기만 하면 ‘밝다’는 것도 모르게 됩니다. 어두웠다가 밝아지고, 밝았다가 어두워지기 때문에 ‘지금은 밝다, 지금은 어둡다.’를 알 수 있습니다. 두 가지는 서로 반대되지만, 서로를 통해서만 드러나는 상즉의 관계에 있습니다.
음양, 천사와 악마 – 상즉 관계의 또 다른 예


우리는 ‘좋은 것만 남고 나쁜 것은 다 없어지면 좋겠다.’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것이 디지털적, 이분법적, 실체론적 사고입니다. 그런데 연기론적으로 보면 ‘저것에 의해 이것이 있고, 이것을 통해 저것이 있다.’라고 보게 됩니다. 이것과 이것 아닌 것이 서로 연기하고 상즉하는 관계라는 것을 깨달으면, 상대를 없애서 내가 살겠다는 태도에서 벗어나, 서로가 함께 살아가는 상생의 길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마다 왜 마음이 다른가 – 표층의 차이와 심층의 ‘한 마음’
김가은(13세): 왜 사람마다 마음이 다른가요?
일상에서 우리는 ‘쟤는 슬픈데 나는 안 슬퍼.’, ‘쟤는 좋다는데 나는 별로야.’ 하면서 서로 마음이 다르다고 느낍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감정과 생각만 보면 분명히 다른 마음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서로 공감하는 경험도 있습니다. 누군가 슬퍼하면 나도 마음이 저릿해지고, 아기가 아파서 울면 엄마도 같이 아파집니다. “저 사람 마음은 나와 전혀 다를 것” 같았는데, 막상 그 사람이 기뻐하면 나도 같이 기쁘고, 슬퍼하면 같이 슬퍼지는 경험을 합니다.

고체를 생각하면, 각각의 입자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음을 그렇게 보면 모두 완전히 다른 존재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마음의 활동을 기체나 파동처럼 생각해 보면, 장벽을 쌓아도 서로 스며들고 통합니다. 그런 식으로 소통하는 마음의 차원에서는 사실 하나의 큰마음, 하나의 바다와 같은 마음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은 표층에서는 분명 서로 다르게 나타나지만, 심층에서는 서로 통하고 연결된 ‘한마음’의 차원을 함께 공유하고 있다, 이렇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연기와 자아, 그리고 무아의 의미
김동주(18세): 불교에서는 연기하기 때문에 자아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나라는 존재가 없다면, 그러면 지금의 나는 누구인가요?
‘나라는 존재가 없다.’라는 것은, 나라는 것이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자아가 없다, 무아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고요. 그렇다고 해서 현상적으로 내가 존재하는 건 분명하잖아요, 그렇죠? 그건 “연기해서 생겨난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죠.
그러니까 실체론적으로 고립된 개별적인 자아가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이야기이고, 연기적인 관계 안에서 형성되는 자아는 분명히 존재한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박주현(15세): 그러면 나 자신이라는 자아가 없으면, 이 세상은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닌가요?
그러니까 자아를 포함해서 세계 전체의 의미를 묻는 거라면, 자아를 개별적이고 분별적인 자아로만 보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 타인이나 세계와 소통하고 있는 그런 참된 자아, 참된 마음이 무엇인가를 찾아 나간다는 데 의미가 있는 거지요. 그걸 통해서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고, 타인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열리는 거다, 뭐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까지는 우리의 일상적인 표층 의식이 실체론적 사유라는 것을 말씀드렸고, 그와 구분되는 연기론적 사유를 설명했으며, 또 그것이 상즉의 관계라는 걸 이야기했습니다. 오늘 강연은 여기까지 마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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