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우리돌의 바다 - 국외 대한 독립 운동 이야기 1
[이 책만은 꼭]
실패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던 역사
저자가 이 책을 만들게 된 것은 하나의 운명이었을지 모른다. 사진작가이자 여행자로 살던 작가는 인도 델리의 ‘레드 포트’Red Fort가 우리 독립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곳이란 걸 알게 되면서 인생이 바뀌었다. 여행에서 발견한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놀라운 우리 역사였다.
2017년 인도에서 국외의 독립운동 사적지를 찾아다니는 전혀 예상치 못한 여정을 시작하여 멕시코, 쿠바, 미국, 네덜란드, 러시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중국, 일본 등 10개국으로 확장되었다. 저자는 끊임없이 대한의 독립운동가 후손을 찾았다. 고국 땅을 밟지 못한 그들은 사무치는 그리움만큼 이 땅을 잊지 않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쳤다.
우리 조상들의 역사는 실패했다. 나라를 빼앗기고 백성들을 보살피지 못했다. 민족을 외세에 팔아넘긴 매국노들은 꽃길만 걸었다. 침략자에 부역한 이들에게 주어진 이익의 단꿀은 대대손손 이어 갔다. 반면 부끄러운 역사를 남길 수 없다는 양심 어린 이들에게 주어진 길은 온통 자갈과 가시밭길뿐이었다. 그들은 제각각으로 투쟁하였으며, 그에 대한 대가는 혹독했다. 가족이 잡혀가고, 동지가 죽고, 자신도 감내하기 힘든 고통에 스러져 가야만 했다. 그리고 남은 것은 대를 이어 가는 곤궁한 삶뿐이었다. 그렇게 그들과 후손들은 잊혀 갔다.
그동안 우리는 이런 역사의 실체를 모른 채 해방을 맞이했다. 매국노를 단죄하지도 침략자들의 사과를 받아 내지도 못한 채, 이에 대해 목소리를 내면 과거에 얽매이지 말라는 비난만 돌아왔다. 무관심과 냉소, 외면으로 찬란한 대한 민족 항일 투쟁의 대서사시는 그 빛이 바래 갔다.
조상들은 실패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이제 우리는 그들을 잊지 않고 기억해 내야만 한다. 역사는 기억하는 이들의 몫이다. 거짓은 결코 진실을 가릴 수 없으며 어둠은 빛을 이겨 낼 수 없다.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내고 기억하고 전하는 일, 그것은 이 시대 우리가 해야 할 광복 운동, 독립운동, 빛의 혁명이다.
지은이 김동우
대학에서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신문사 기자로 일한다. 그러다 행복이 직장에 없음을 깨닫고 과감히 사표를 던진다. 한동안 여행자의 삶을 살던 중 우연히 인도 델리에 위치한 레드 포트가 한국광복군 훈련지란 사실을 알게 된다. 목덜미를 타고 이상한 기운이 흐르는 기묘한 체험이었다. 그렇게 독립운동가들의 삶에 사로잡혀 2017년부터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 사적지를 찾아 사진과 글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그중 바다를 건너 인도, 멕시코, 쿠바, 미국으로 간 한인들의 독립운동사를 다룬다. 앞으로 유라시아 곳곳에 숨겨진 이야기를 계속 정리해 나갈 예정이다. tvN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럭〉 제67화 광복절 특집 편 감동의 출연자이기도 하다.
뭉우리돌이란?
책 제목에 나오는 ‘뭉우리돌’은 둥글둥글하게 생긴 큰 돌을 뜻하는 우리말이다. 이 말은 백범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에 나온다. 백범이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을 때 일본 순사가 “지주가 전답의 뭉우리돌을 골라내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냐!”라고 말하며 고문을 하고 자백을 강요했다. 이에 백범은 “오냐, 나는 죽어도 뭉우리돌 정신을 품고 죽겠고, 살아도 뭉우리돌의 책무를 다하리라.”라고 답해 대한 독립 정신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이에 작가는 백범의 말에서 착안하여 올곧은 일에 생을 바치고자 했던 뭉우리돌들의 역사, 오늘날 반드시 기억해야 할 자랑스러운 대한의 독립운동사를 직접 찾아다니고 있다.
시간에 파묻힌 영웅들
일제와 친일 매국노들이 남김없이 골라내고 지워 버리려 했던 뭉우리돌은 비단 상해와 만주, 국내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 세계 곳곳에 굳건히 박혀 대한의 독립을 일궈 냈다. 찬란하고 강인했던 그들의 흔적을 — 어떨 때는 이름 석 자만 남아도 —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 대한인들은 어느 땅에 자리를 잡든 먼저 학교를 세워 우리말과 역사를 아이들에게 가르쳤고, 독립군을 양성하는 기관을 만들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총장(현 국방부 장관) 노백린盧伯麟이 “독립전쟁이 일어나는 날, 도쿄의 하늘로 날아가리라. 우리 공군이 일본에 날아가 도쿄를 쑥대밭이 되도록 폭격하자.”라는 각오로 공군을 양성했던 미국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Sacramento 인근 ‘한인 비행사양성소’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 공군의 모태가 되는 이곳을 수많은 한인이 지원했고, 특히 백미 왕이라 불리던 한인 최초의 백만장자 김종림(1884~1973)은 한 달에 비행기 한 대 값 이상을 운영 지원금으로 내놓았다. 이들은 모두 대한의 독립을 위해 기꺼이 일생을 바친 ‘뭉우리돌’이었다.
2015년 한국일보 통계자료를 보면 국가의 지원을 제대로 받는 독립운동가 후손은 10퍼센트 미만에 불과하다. 75.2퍼센트에 달하는 후손이 월 개인소득 200만 원 미만이며, 70퍼센트는 고등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지 못했다. 10년이 지난 지금이라고 더 나아지지는 않은 거 같다.
작가는 후손을 의도적으로 흐릿하게 찍는다. 불과 백 년이라는 시간 만에 우리의 기억과 역사 속에서 희미해진 독립운동을 표현한 방법이다. 카메라 셔터 속도를 길게 설정하고, 셔터가 떨어지기 전에 후손을 파인더 밖으로 나오게 한다. 흐릿하게 사라져 가는 독립운동의 역사, 그 현장에서 만난 후손들의 이야기는 짙고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중요 내용들
Ⅰ. 인도 - 한국광복군 인도 미얀마 전투지역 파견 공작대 활동지
인도 무굴제국의 5대 황제로 제국의 번영과 안정을 이루었고, 사랑하는 아내 뭄타즈 마할의 무덤(‘타지마할’)을 조성한 샤 자한Shah Jahan은 1648년 델리Delhi에 붉은 사암으로 ‘레드 포트Red Fort’란 궁성을 만들었다.
이곳이 2차 세계대전 당시 주駐인도 영국군 총사령부 주둔지로 사용되었는데, 이곳은 한국광복군의 인도 미얀마 전투지역 파견 공작대 일명 인면전구공작대印緬戰區工作隊의 활동지이기도 했다. 영국군은 일본어에 능하고 외모도 비슷한 한국군에게 심리전단心理戰團 공작 활동 등 특수전을 맡겼다. 한국광복군 최정예 인원 아홉 명이 선발돼 체계적인 훈련을 받았다.
이곳에서 훈련의 하나로 영어 수업을 받는데 수업은 남쪽으로 떨어진 인그라함 학교에서 시행됐다. 이 학교 교장이 미국인 프랭크 윌리엄스Frank E. C. Williams인데, 그는 한국에 선교사로 와서 1906년 충청남도 공주에 영명학교(지금의 공주영명고등학교)를 설립한 인물이다. 이 영명학교는 유관순 열사의 모교이다. 파란 눈의 한국인 윌리엄스는 1940년 11월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되고, 교육 사업을 위해 인도로 왔는데, 이곳에서 한국광복군을 만나게 됐다. 유창한 한국말을 사용하는 미국인과 한국광복군의 만남. 참으로 반갑고 기쁜 운명적 만남의 순간이지 않았을까?
훈련을 마친 광복군은 제2차 세계대전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승패를 가르는 분수령으로 불린 ‘임팔 대회전’에 참전하게 된다. 영국군은 미얀마를 점령해 중국군과 공동전선을 구축하고 일본군은 이를 저지하려고 하는 상황. 이곳에서 광복군은 맹활약을 펼쳐 1945년 5월 미얀마 양곤을 탈환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이 왜 먼 이곳까지 온 것일까? 바로 2차 세계대전 참전국 지위를 얻기 위해서였다. 연합군 편에서 전쟁에 참여하고 이를 인정받는 건, 전후 강대국들에 자주독립을 강력하게 요구할 수 있는 카드였기 때문이다. 임시정부는 혼란스러운 국제 정세 속에서 독립에 필요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려고 했다. 저자는 바로 이곳에서 독립운동사를 만났고, 이 일은 이후의 행보를 이어 가게 하는 동기가 되었다.
인도에서 우연찮게 인면전구공작대 이야기를 찾아보고 머리털이 쭈뼛 섰다. 인도라니, 그것도 우리 독립운동사라니, 처음엔 잘 믿어지지가 않았다. 무지를 책망했고 동시에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에 자긍심이 솟았다. 보통 여행에선 전혀 느껴 보지 못한 감정들이었다. 레드 포트의 고목 하나, 허물어져 가는 건물 하나, 현지인들의 표정 하나까지 모든 게 다르게 다가왔다. (책 40쪽)
Ⅱ. 애니깽의 멕시코
멕시코 이민은 사기 계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존 마이어스John G. Myers라는 이민 브로커가 일본의 대륙 식민 회사와 결탁해 멕시코 이민자를 모집했다. 땅도 좋고 기후도 좋고, 병도 없고, 이득을 볼 것이라는 달콤한 말과 함께 통상 조약은 체결하지 않았지만 최혜국 대우로 마음대로 왕래할 수 있다는 사기성 발언으로 1,033명을 모집하여 1905년 제물포에서 출발하였다.
이들을 통역한 이는 을사늑약 오적 중 하나인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의 사촌 권병숙으로 사기와 절도 등으로 해고를 당한 인물이다. 멕시코에서 그는 애니깽Henequen 농장주 편에서 한인들의 참담한 생활이 알려지지 않도록 검열하거나 금지하는 악행을 일삼고 2년 뒤 혼자 대한제국으로 돌아왔다. 동포들을 사지 아닌 사지로 내모는 데 앞장서 놓고 말이다.
이곳에서 한인들은 노예는 아니지만 노예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대우를 받았다. 당시 돼지 한 마리가 80전 정도였는데, 한인 노동자 한 사람 몸값이 불과 30전이었으니 그 실상이 얼마나 참혹했겠는가? 을사늑약과 경술년 국권 피탈로 이들의 희망은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 덫에 걸린 사슴 같은 형국이 된 것이다.
농장에 도착하자마자 한인 남성들의 분신 같던 상투가 모조리 잘려 나간다. 농장주들은 한인들의 문화를 이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 괴상한 옷을 입고 상투가 잘린 채 일터로 나간 사람들, 난생처음 보는 작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애니깽이었다. 한인들에겐 큰 육체적 시험이었다. 작렬하는 유카탄의 햇볕은 지옥 불같이 뜨거웠다. 목은 바짝바짝 타들어 갔고 살갗은 뱀처럼 허물이 벗겨졌다. 애니깽 가시는 악마의 손톱인 양 사정없이 온몸을 찔러 댔다. (93쪽, 상투가 잘린 사람들)
그곳에서 이주 한인들은 도산 안창호 선생을 만날 수 있었다. 당시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이었던 안창호는 멕시코에 방문해 한인들의 노동 문제 해결에 앞장섰다. 멕시코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며 한인들의 독립운동 참여를 독려하고 삶의 방향을 제시했던 인물이 바로 도산이다.
나라를 떠날 때도, 척박한 멕시코에서 생사를 넘나들 때도 대한제국은 아무것도 해 준 게 없다. 버려졌단 절망감 앞에 조국을 원망하고 등을 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상황. 그러나 멕시코의 대한 사람들은 고향의 땅과 하늘을 추억했고, 그리운 가족과 친구들의 얼굴을 잊지 않으려 했다. 망했지만 우리나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꿈이 꿈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암담한 현실에 그들은 주저앉지 않았다.
우리 조상들은 서로 다독이며 놀랍게도 멕시코 땅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10년 11월 17일 독립군 양성을 위해 한인 무관양성학교인 숭무학교崇武學校를 설립한다. 1905년 11월 17일은 을사늑약 체결일로, 193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선 이날을 잊지 않기 위해 ‘순국선열 공동기념일’로 제정하였고, 최근 ‘순국선열의 날’로 기리고 있다.
이들은 나와 우리 민족이 살아 있음을 세계만방에 알렸고, 매일같이 본인이 누구인지 자각해야 했던 사람들이다. 그게 그들의 존재 이유였다. 숭무학교에서 배출된 생도들이 독립전쟁 최전선 연해주로 가려 했지만,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지리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멕시코혁명이 터지면서 1913년 3월 숭무학교는 문을 닫고 말았다.
그렇다고 포기할 대한인은 아니지 않은가. 자체적인 독립군을 양성하는 일에서 자금 모금으로 방향을 바꿔 묵묵히 독립운동가들의 뒤를 받쳐 주었다. 소득의 20분의 1을 독립 자금으로 기부하고 술, 담배, 커피 등을 줄여 독립 자금을 납부하는 곳도 생겼다.
Ⅲ. 쿠바
1921년 멕시코에 살던 270명의 한인이 더 나은 삶을 꿈꾸며 쿠바로 이동해서 살았다. 쿠바 관광산업은 혁명가 체 게바라Ché Guevara와 소설가 헤밍웨이Ernest Hemingway가 다 먹여 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무기여 잘 있거라』 등을 집필한 미국의 소설가로 낚시광이었던 헤밍웨이는 1928년에 쿠바를 처음 찾았다. 이곳에서 모티프를 얻어 『노인과 바다』를 써서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이 헤밍웨이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우리 조상들이 있다.
대한민국과 쿠바는 그간 외교 관계가 전혀 없다가 2024년 2월에서야 공식 수교 관계를 맺었다. 과거 대일 항쟁기 당시 대한인들이 쿠바에 도착하자, 일제는 대한제국이 일본의 통치를 받은 지 오래이니, 한인 이민자도 일본 재외 국민이 돼야 한다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국권 피탈 이전 고향을 떠난 그들에게 일본 국민이 된다는 건 치욕이자 굴욕이었다. 신속히 대한인국민회 쿠바 지방회를 설립하였다. 대한인국민회 지방회는 매년 3.1 혁명 기념식을 거행하는 등 게으름 없이 민족의 자존심과 자부심을 지켜 나가기 위해 노력했고, 일제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주적 민족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울타리가 되었다.
쿠바의 한인들은 1940년 마탄사스Matanzas에서 광복군 후원회를 결성하고 일본과의 일전을 준비하였다. 그런데 일제가 진주만을 폭격하면서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자 쿠바 정부는 대일 선전포고를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쿠바의 한인들을 일본 스파이로 의심하거나 오해하기도 하였다. 잠재적 간첩 취급을 한 것이다.
실제 쿠바의 한인 중 친일파도 있었다. 그들은 외국인 증명서에 국적을 일본으로 등록하고 도리어 이를 영광으로 여긴 이들이었고, 일본을 찬양하고 쿠바 내 독립운동을 헐뜯고 다녔다. 전 세계 곳곳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조상들, 그리고 그들 곁을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던 친일파 세력, 그 망령의 역사는 쿠바에서도 이어지고 있었다.
쿠바 한인 중, 아르헨티나 출신 혁명가인 체 게바라의 친구가 있었다. 바로 헤로니모 임(한국명 임은조)이다. 1926년생인 그는 마탄사스 종합대학 법학과에 합격했다. 넉넉하지 못한 살림 탓에 입학금을 걱정하자 동포들이 십시일반 모금하여, 그는 쿠바 한인 2세 중 최초의 대학생이 되었다. 그는 부패한 관리들의 행태에 맞서다가 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하지만 다시 쿠바 최고 명문 아바나 대학교 법학과에 합격하는데, 이때 동갑내기 쿠바 청년을 사귀게 된다. 바로 쿠바의 혁명 지도자가 되는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였다. 이후 쿠바 혁명에 참여해 공적을 세운 헤로니모의 나이는 33세, 함께 혁명의 주역으로 참여한 체 게바라는 31세였다. 쿠바 정부에서 체 게바라와 산업부를 이끌며 관료로 재직하다 은퇴한 그는 택시를 몰며 한인회 조직과 자기 뿌리를 찾기 위해 여생을 헌신했다.
그의 아버지는 쿠바의 대표 독립운동가인 임천택林天澤이다. 1903년 경기도 광주 출생으로 두 살 때 어머니 품에 안겨 멕시코에 도착한 후 18세 때 쿠바로 넘어와 애니깽 농장 노동자로 일했다. 먹고 사는 일을 제외하면 한인들의 가장 큰 고민은 후세들의 민족 교육과 독립운동이었다. 그는 민성국어학교를 설립하고 교사와 교장으로 활동하였고, 본래 감리교인이었다가 천도교인으로 전환해 쿠바 천도교 종리원장이 되었다. 3.1 혁명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천도교인이었던 최린崔麟이 친일로 돌아서자, 임천택은 바로 천도교 종리원을 폐쇄해 버렸다. 그는 쿠바 한인들의 이민 역사서인 『쿠바 이민사』를 남기기도 했다.
Ⅳ. 미국
하와이 이민자는 대한제국이 허가한 처음이자 마지막 집단 이민이었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가장 필요한 게 바로 값싼 노동력이었다. 이들은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인종차별과 고된 중노동에도 불구하고 가벼운 월급만 손에 쥐었다.
을사늑약 이후 조국이 처한 풍전등화의 현실 앞에 고향을 등지는 길을 선택했으며, 비록 아무것도 해 준 게 없는 나라지만, 그들은 태평양 한가운데서 발을 동동 구르고 손을 모아 기도하며 자신들이 할 일을 또 해냈다. 하와이 한인 이민자들은 1907년까지 20여 개 한인 단체를 결성한다. 그러다 1908년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스Stevens를 저격한 장인환張仁煥과 전명운田明雲의 의거를 계기로 통합 움직임이 가속화된다. 그 결과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가 만들어지는데, 이는 미주 지역 최대 항일 애국단체의 탄생이었다.
로스앤젤레스는 도산 안창호 관련 사적지가 많이 남아 있다. 안창호가 만든 흥사단 건물도 있고, 캘리포니아 남가주대학교(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내에는 안창호 가족이 거주했던 집도 있다. 남가주대학교 후문을 나가 길을 건너면 엑스포지션 공원(Exposition Park)이 나오는데 이 입구 일대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가 캘리포니아 국방경위군 지원을 받아 1942년 2월부터 1943년 6월까지 로스앤젤레스 한인국방경비대(맹호군, 한인경위대)을 설립하고 훈련했던 장소다. 맹호군은 1942년 3월 3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설립 인준을 받아 한국광복군 산하로 정식 편입됐다. 독립운동가들이 잠들어 있는 로즈데일 공동묘지도 있는데,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은 매년 이곳에서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 등을 개최하고 있다.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남자 주인공 유진 초이(배우 이병헌 분)는 독립운동가 황기환黃玘煥을 모델로 했는데, 그 묘소가 뉴욕에 있다. 황기환은 평안남도 순천 사람으로 10대 후반인 1904년 하와이 이민 길에 올라 1917년 미군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주로 부상자 구호 등을 담당했다. 전쟁이 끝난 뒤 김규식을 만나 그의 권유로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서기장이 된다. 이곳에서 일본의 잔혹함과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설득해 나간다. 황기환은 1921년 이승만, 서재필 등을 돕기 위해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온 뒤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결혼하지 않아 유족이 없었는데, 그의 묘소를 찾아가는 저자의 모습은 한 편의 영화와 같다.
희끗희끗 잔설이 남아 있는 소연한 공동묘지 끝자락. 모걸음질하며 비석들을 하나씩 확인해 나갔다. 장철우 목사의 말대로 중간중간 비석이 없는 묘지 터도 보였다. 그러다 정말 ‘대한인 황긔환지묘 민국오년사월십팔일영면 EARL K. HWANG BORN IN KOREA DIED APRIL 18.1923’이라고 두 줄로 쓰여 있는 50센티미터도 안 돼 보이는 작은 비석을 발견했다. 황기환이 남몰래 한 세기 가까이 잠들어 있던 장소였다.
“아이고! 선생님, 여기 계셨군요?”
나도 몰래 낮은 목소리로 되뇌었다. 절을 두 번 올렸다. 긴 외로움과의 사투, 설움이 올라와 목 안 여기저기에 엉겨 붙기 시작했다. 왈칵 감정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아 꿀떡꿀떡 침을 삼켰다.
침묵을 말벗 삼아 오랜 시간 묘지를 지키고 있던 황기환, 그가 정말 망각의 깊고 어두운 터널을 뚫고 내 앞에 있었다. 구슬프게도 하늘마저 잔뜩 흐려 내가 흘려야 할 눈물을 대신 쏟아낼 것만 같았다. 스트로보 빛을 보내 그의 생을 다시 반짝이게 만드는 것,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추모였다.
“그대여 다시 반짝여라.” (416쪽)
“아이고! 선생님, 여기 계셨군요?”
나도 몰래 낮은 목소리로 되뇌었다. 절을 두 번 올렸다. 긴 외로움과의 사투, 설움이 올라와 목 안 여기저기에 엉겨 붙기 시작했다. 왈칵 감정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아 꿀떡꿀떡 침을 삼켰다.
침묵을 말벗 삼아 오랜 시간 묘지를 지키고 있던 황기환, 그가 정말 망각의 깊고 어두운 터널을 뚫고 내 앞에 있었다. 구슬프게도 하늘마저 잔뜩 흐려 내가 흘려야 할 눈물을 대신 쏟아낼 것만 같았다. 스트로보 빛을 보내 그의 생을 다시 반짝이게 만드는 것,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추모였다.
“그대여 다시 반짝여라.” (416쪽)
마무리하며
끝으로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선대의 독립운동에 대한 자부심과 애환, 고되었던 어린 시절에 대한 원망, 독립 정신을 이어야 한다는 책임감 또한 모두 간직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독립운동은 한국인으로서 그 시대의 사명이었습니다. 가족들은 그 사명 때문에 엄청난 고통에 시달렸죠. 하지만 난 자라면서 내 가족이 아버지에 대해 불평불만을 말하는 걸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가족 모두 독립운동을 자신의 사명으로 받아들인 거죠.” (301쪽, 안창호의 막내아들 안필영)
“아버지의 독립운동이 가족에게 남긴 게 도대체 뭐냐고요. 예전에는 우리 아버지가 참 훌륭한 분이란 자부심 하나로 살았어요. 그런데 점점 그게 아닌가 봐요.” (424쪽, 청산리 대첩 마지막 생존자 이우석의 후손 이춘덕 여사)
이 책의 또 다른 가치는 국외 독립운동사의 현장을 집요하게 추적한 취재기로 연신 놀라움과 흥미로움을 선사해 준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 다큐멘터리 작가이자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으로서 작가가 가졌던 깊은 고민과 애정이 담긴 110장의 사진이 책에 실려 있다. 이는 하나의 역사적 사료로 그 가치가 더해질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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