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독립을 외치다 김구 편

[STB하이라이트]
※ STB상생방송의 프로그램 중 다시 주목할 만한 방송 내용을 시청자 여러분과 함께 살펴봅니다.


대한독립을 외치다 김구 편




본 프로그램은 잊힌 역사와 인물을 재조명해 민족 자주 의식과 독립 정신을 되새기고, 후손들에게 올바른 역사 인식을 전달하기 위해 기획되었습니다. 엄혹한 일제 강점기에 생사를 무릅쓰고, 대한의 자주독립을 위해 헌신한 다양한 인물들의 삶과 숭고한 희생을 생생하게 전달하며,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뿌리를 돌아보게 하는 고품격 프로그램입니다. 역사 광복을 꿈꾸며 조국을 지키고자 했던, 대한의 독립지사들에 대해 알아봅니다.


동학과 의병 활동



김구金九는 1876년 7월 11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풍수, 관상, 병법서에 관심을 두었으며 1893년에 동학東學에 가입하여 팔봉도소접주八峰都所接主로 활동했고, 동학군의 선봉장이 되어 해주성을 공격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나라에 보탬이 되기 위해 힘썼습니다. 동학혁명을 시작으로 의병 부대에 입대해 전투를 벌이기도 했으며, 1895년에는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복수를 위해 일본인을 처단하는 등 적극적인 투쟁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애국 계몽 운동과 신민회



1897년 김구는 사형에 처할 운명이었으나 광무 황제(고종 황제)의 특사로 가까스로 생명을 구했습니다. 이후 감옥을 탈출하여 충남 마곡사에서 스님 생활을 하며 숨어 지내기도 했습니다. 1904년 무렵부터는 애국 계몽 운동을 위해 사람을 길러 내기로 하여, 황해도에서 교사와 교장을 지내며 구국 운동을 위한 교육에 힘을 쏟았습니다.

1910년 한일합병韓日合倂으로 대한제국이 무너지자, 신민회新民會를 결성하고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돌입해, 황해도 대표로 적극 활동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옥에 갇혔을 때, 미천하고 무식한 범부凡夫까지도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해야 완전한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의지로 백범白凡이라는 호를 짓기도 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1919년 3·1 운동 이후 김구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경무국장警務局長으로 임명되어 독립운동을 이끌었습니다. 임시정부는 국내와의 연계를 위해 연통부와 교통국을 운영했으나 일제에 발각되며 쇠락하기 시작합니다.

이를 극복하고자 국민대표회의가 열렸지만, 개조파와 창조파의 갈등으로 실패했고, 이후 민족 유일당 운동으로 통합을 모색합니다. 김구는 극심한 자금난 속에서도 임시정부를 지키며 국무령제를 개편하고,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해 정부의 중심을 유지했습니다. 또한 임시정부의 침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그는 의열義烈 투쟁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한인애국단과 광복군



1931년 김구는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조직해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주도했고, 이는 중국인들의 지지를 얻는 계기가 됩니다. 이후 중일전쟁과 내부 갈등 속에서도 임시정부는 여러 당파의 통합을 시도하며 계속 독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1938년 김구가 피격당하는 사건이 있었지만 회복 후 다시 활동을 이어 갔고, 1940년 중경으로 이동해 임시정부 체제를 재정비하며 광복군光復軍을 창설합니다.

그는 카이로 회담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국제사회에 요청했고, 이는 선언문에 반영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광복군의 국내 진입 하루 전에 일제가 항복함으로써, 김구는 자력으로 해방을 이루지 못한 현실에 깊은 슬픔을 느껴야 했습니다.


통일 국가 수립의 꿈



광복 이후 그는 임시정부의 정통성과 자주 통일 국가 수립을 위해 힘썼지만, 미군정美軍政의 비협조와 남북 분단으로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1948년에는 마지막 희망으로 평양 남북협상에 참여했으나 끝내 통일은 이루지 못했습니다.

1949년 6월 26일 통일을 바라던 그는 암살당했고, 이후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습니다. 그는 우리나라가 무력이 아닌 문화의 힘으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꿈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 뜻을 이어받아 역사 왜곡을 바로잡고, 문화 강국으로서 진정한 자주독립을 완성해야 할 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