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뒤집어 보기, 역썰 시즌 2〉49회 - 만들어진 기자조선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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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기자조선의 실체
〈역사 뒤집어 보기, 역썰 시즌 2〉 49회
『상서』 원전에는 기자동래설이 없다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자가 동방으로 왔다.’라는 말인데 동방으로 와서 조선을 건국했다는 설입니다.
이 기자동래설이 나타난 최초의 문헌은 『상서대전尙書大全』 「은전殷傳」입니다. 『상서대전』은 중국 최초의 역사서로 평가되는 『상서』에 주석과 본문을 추가한 유교 경전입니다. 그런데 한漢나라 이전 본래의 『상서』 원전에는 기자동래설이 없습니다. 한나라 이후에 첨삭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사마천 『사기史記』의 왜곡 세 가지
사마천 『사기』의 대표적 왜곡 사례
본기 : 금살치우擒殺蚩尤
세가 : 기자조선箕子朝鮮
열전 : 위만조선衛滿朝鮮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는 역사 왜곡의 대표적 사례들이 담겨 있는데, 그중 ‘기자조선’에 관한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 “봉기자어조선이불신야封箕子於朝鮮而不臣也.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임명했으나 신하로 삼지 못했다.”(『사기史記』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라는 구절이 등장하는데, 이 말의 원래 뜻은 주나라 무왕이 신하로 삼지 못했다는 것,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봉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 『한서漢書』에는 “기자가 조선에 가서 그 백성에게 예의와 농사와 양잠 기술을 가르쳤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 『삼국지三國志』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에는 “옛날 기자가 이미 조선으로 갔다. 8조의 가르침을 만들어 가르치니 문을 닫지도 않았고 백성들이 도둑이 되지 않았다.”라고 기록해 문명국으로 전환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에도 “옛날 기자가 쇠망하는 은나라의 운수를 피하여 조선 땅에 피난하였는데, 8조의 법을 시행하였다.”라고 하는 부분이 동일하게 나와 있습니다.
고려 중기, 기자 사당은 있는데 단군 사당은?
이에 대해 윤내현 교수는 “우리 고대사가 잘못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 중기, 숙종肅宗 때부터였던 것 같다.”라고 지적합니다.
- 실제로 고려 숙종(재위 1095~1105년) 시절 예부禮部에서 “우리나라의 교화와 예의가 기자로부터 비롯하였습니다. 바라옵건대, 기자의 무덤을 찾고 사당을 세워서 제사를 지냈으면 합니다.”라고 요청했고, 숙종이 이를 받아들여 평양에 기자 사당이 지어졌습니다.
- 1102년에 기자 사당이 건립된 이후 1425년, “기자 사당은 있는데 단군 사당은 없습니다.”라는 신하의 건의를 받아들여 조선 세종 때가 되어서야 단군 사당이 지어졌습니다. 320년이 넘게 지나서야 단군을 모시게 된 것입니다. 이를 통해 기자 존숭, 기자 사대주의가 얼마나 강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이후에도 기자조선설은 여러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고구려 풍속에는 음사淫祀가 많아서 영성靈星 및 일日⋅기자箕子⋅가한可汗 등의 신에게 제사 지낸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당의 『배구전裵矩傳』에 이르기를, ‘고려는 본시 고죽국孤竹國, 지금의 해주海州이다. 주周가 기자箕子를 봉하고 조선이라 하였다. - 『삼국유사三國遺事』
이전 중국 문헌에서는 기자조선의 존속을 기자 이후 “40여 대가 지나서”라고 표현했지만 여기서는 정확하게 41세라고 규정을 했습니다.
41세손을 준準이라 부르는데 여기서 준은 기준箕準, 준왕準王을 말합니다. 준왕에 이르기까지 기자조선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 년이 아니라 정확히 928년을 다스렸다고 하는 구체적인 연도가 나옵니다. 이렇게 기자조선은 더 구체화되기 시작했습니다.
- 220년 후 고려 충숙왕 때(1325년)에는 평양부에 명을 내려 기자의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기자 사후 2,600여 년이 지난 14세기에 평양에 기자의 가짜 무덤이 생긴 것입니다. 이 무덤은 20세기까지 존속하다 60여 년 전에 사라졌습니다.
평양에 기자의 묘가 있었을까?
- 『사기집해史記集解』에서 『사기』 「송미자 세가」 부분의 주석을 보면 “기자의 무덤은 양국梁國 몽현蒙縣에 있다.”라는 진晉나라 두예杜預(222~285)의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양국 몽현은 허난성(하남성河南省) 상추(상구商邱) 지역입니다. 지금은 산둥성(산동성山東省) 하택시菏泽市 차오현(조현曹縣)에 위치한 곳인데, 이 조현이라고 하는 곳이 바로 하남성 상구시와 접해 있기 때문에, 하남성 상구시에 있다라고 해도 무방한 것이죠.
- 고려 말기에 주자학이 수용되면서 기자는 우리 역사에서 유교 문화의 시원으로 상정되었고, 기자에 대한 믿음도 강화되었습니다. 1325년 평양에 기자 사당을 세운 이후 고려 공민왕 때는 두 차례나 기자 사당을 중수하기도 했습니다.
- 이제 조선 시대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기자에게 한 달에 두 번 제사를 지냈습니다. 일 년 동안 스물네 번을 지내는 셈입니다.
그럼 단군왕검의 제사는 어떻게 지냈을까요? 일 년에 딱 두 번,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후 신하들의 건의로 바뀌게 되지만 당시 기자 존숭이 얼마나 강했는지 제사를 지낸 횟수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것이죠.
기자는 한반도 땅에 온 적이 없다
기자 사거서화 사절인사
箕子 徙居西華 謝絶人事
기자가 서화에 살면서 인사를 사절하였다.
- 『단군세기檀君世紀』 솔나率那 단군 조
箕子 徙居西華 謝絶人事
기자가 서화에 살면서 인사를 사절하였다.
- 『단군세기檀君世紀』 솔나率那 단군 조
서화는 현재 중국의 하남성을 말하는데 실제 서화를 가면 기자가 독서를 했던 기자 독서대가 있습니다. 기자 독서대는 서화에 있고, 기자의 묘는 조현에 있습니다. 가까운 거리죠. 이 두 곳만 보더라도 기자의 활동 무대가 어딘지를 알 수 있습니다. 기자는 한반도 땅에 온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진조선 47세 단군의 행적이 왜곡되다
- 『환단고기』 「단군세기」에는 진조선眞朝鮮 47세 단군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후대에 수유족須臾族의 우두머리 기후箕詡가 번조선番朝鮮의 왕이 된 이후 가문의 업적을 미화하는 방식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진조선 47세 단군의 행적이 기자와 그의 후손 35명의 업적으로 바뀌었고, 수유족 기씨 가문의 번조선 왕 6명의 업적으로 둔갑되었습니다. 기록은 후대 역사서에 반영되었고, 진조선 단군의 원래 행적이 왜곡된 채 책으로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 우리 민족의 역사를 왜곡시킨 원흉인 기자조선, 이 기자조선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사마천의 ‘봉기자어조선封箕子於朝鮮’이라는 문장으로부터 시작된 조작입니다. 기자조선은 중국에서 꾸며 낸 말이고 기자의 무덤도 한반도에 있지 않았습니다.
- 기자조선의 위치 역시 평양이 아니었습니다. 기자동래설 또한 사실이 아닙니다. 기자조선은 BCE 4세기 기후가 번조선의 왕이 되면서부터 기획되었습니다. 수유족인 기후는 번조선의 왕이 되면서 자신의 조상인 기자를 왕으로 추존하였습니다. 그럼으로써 기자의 모든 후손들이 왕이 되어 버렸습니다.
- 기씨 왕들의 행적을 구체적으로 만들고 싶어 했던 조선의 학자들은 후대로 가면서 『단군세기』에 적혀 있는 47세 단군의 행적을 추존된 왕들의 행적으로 둔갑시켜 버립니다. 가짜 역사를 만든 것이죠.
그리고 기후의 행적을 기자의 행적으로 둔갑시키고, 서우여徐于餘의 행적을 기자의 행적으로 둔갑시켰습니다. 색불루索弗婁 단군의 팔조금법八條禁法 역시 기자의 치적으로 바뀝니다.
가짜 역사는 언젠가는 드러나게 됩니다.
기자조선의 실체는 진한辰韓, 마한馬韓, 번한番韓의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로 통치했던 단군조선檀君朝鮮의 국가 시스템을 알아야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이 삼한관경제와 단군조선의 역사를 정확히 보여 주고 있는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를 통해서만 기자조선의 실체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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