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이것이 개벽이다 상上』 강독]
전기훈 / 대구대명도장 상임수호사


본 기사는 2024년 7월부터 시행된 삼랑대학 교육 내용을 정리해 연재하는 강좌입니다. 『이것이 개벽이다 상上』 개정판의 특강 형식으로 진행된 교육이며, 이번 호에서는 제3부 2장 내용을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註]



3부 선천 종교의 구원관과 상제님 강세 소식


2장 예수와 백보좌의 아버지 하나님 (1)


오늘은 『이것이 개벽이다』 상권 중 3부 선천 종교의 구원관과 상제님 강세 소식, 제2장 예수와 백보좌의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 공부합니다.

‘예수와 백보좌의 아버지 하나님’, 이 말씀에 다 들어 있다고 보는데요.

며칠 전 도장에 있을 때 전화를 받았는데,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시니 가까운 교회에 나가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가야 한다.”라고 권유하는 기독교인의 전화였습니다. 진리 논쟁이 벌어질 수도 있었지만, 저는 상황상 교리 논쟁을 하기 어려워 조용히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런데 이 전화를 받은 후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고, 오늘 이 내용을 함께 전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다시 책을 정리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라는 구절과, “또 내가 큰 백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보니, 그의 면전에서 땅과 하늘이 사라졌고 그들의 설 자리도 보이지 않더라.”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말씀들을 통해 우리는 기독교의 본질을 제대로 깨우쳐 잘못 알고 있는 이들을 바르게 이끌어야 한다는 사명을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제3의 성서, 보병궁 복음서

『이것이 개벽이다』 334쪽에 나오는 『보병궁 복음서』는 ‘제3의 성서’, 또는 ‘성약성서成約聖書’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보병궁 복음서』는 기존 신약의 공고한 복음서와 상치相馳되는 부분이 거의 없으면서도 동양 종교의 정신적 틀까지 담고 있어, 기독교뿐 아니라 동양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이 복음서는 예수님의 숨겨진 생애와 함께 기존 성경에는 없는 새로운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지만, 기존 가르침과의 공통점도 많아 예수님이 전하고자 한 진리 본질을 더욱 깊이 돌아볼 수 있게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보병궁寶甁宮’이란 서양의 고대 천문학에서 황도대를 따라 움직이는 태양의 길을 열두 별자리로 나누어 시대정신을 구분한 것입니다. ‘금우궁金牛宮’은 약 6천 년 전 아담부터 아브라함까지의 구약 시대, ‘백양궁白羊宮’은 아브라함부터 시작된 약 4천 년 전의 시대, ‘쌍어궁雙魚宮’은 예수님께서 활동하신 약 2천 년 전의 시대를 의미합니다. 이제는 새로운 별자리 시대인 ‘보병궁’ 시대로 접어들면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이루어지는 새로운 시대가 펼쳐지게 됩니다.


특히 『보병궁 복음서』에는 기존 성경에 나타나지 않은 12세부터 29세까지 예수님의 숨겨진 삶과 진정한 메시지가 담겨 있어 기독교의 본질적 진리를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보병궁 복음서(The Aquarian Gospel of Jesus the Christ)』를 집필한 사람은 리바이 다울링Levi H. Dowling이라는 목사입니다. 그는 미국 오하이오주 출신으로, 1908년에 이 책을 출간했습니다. 1908년이면 예수님 탄생 이후 약 2000년이 지난 시점으로, 쌍어궁 시대가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이 책이 나온 것이 결코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활동하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오랜 세월 동안 많은 법문을 남기신 것에 비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제자들에게 충분히 전달되고 소화될 시간이 부족했으리라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쌍어궁 시대가 끝나는 시점에 이르러, 성령으로 충만했던 리바이 다울링 목사를 통해 우주심宇宙心(Universal Mind, 아카샤Akasha)의 기록이 세상에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성령과의 깊은 교감을 통해, 우주심에 기록된 예수님의 숨겨진 생애와 그 진정한 가르침들을 이 책에 그대로 옮겼다고 합니다.

우주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우주심이라는 거대한 우주 도서관에 기록됩니다. 리바이 다울링 목사는 바로 이러한 우주심의 기록을 성령님들과의 교감을 통해 책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보병궁 복음서』는 기존의 성경 내용뿐 아니라, 뒤에서 다룰 ‘영지주의 복음서’ 등과 함께 통합적으로 기독교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영지주의 : 그노시즘

위 그림은 스티븐 횔러Stephan A. Hoeller의 『이것이 영지주의다』라는 책의 표지이다. 이 그림에는 영지주의의 세계관이 잘 나와 있다. 밤하늘의 별들 너머에 무한한 빛의 세계가 있다. 이 세계는 모든 존재의 근원인 초월적 신적 존재이며, 이 세계로부터 방출이 우리에게 도달하고 있음이 별빛과 햇빛을 통해 상징된다.

이어서 영지주의靈知主義에 대해서도 알아보겠습니다. 영지주의는 서양어로 ‘그노시즘Gnosticism’(또는 ‘나스티시즘’)이라고 불리며, ‘영적인 지식’을 의미합니다. 초기 기독교 시대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두고 정통파 기독교와는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는 또 다른 흐름이 존재했습니다. 이로 인해 정통파와 영지주의 사이에 치열한 논쟁과 대립이 발생했습니다.

정통파 기독교 교부敎父(Church Fathers)들은 자신들이 정통이라는 입장을 취하며 영지주의를 이단으로 몰아 심하게 탄압하였고, 성경이 정리되기 이전에 존재했던 영지주의 복음서들은 제목만 남은 채 구체적인 내용은 완전히 잊혔습니다.


그러다가 1945년, 한국이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된 해에 이집트의 나그 함마디Nag Hammadi 마을에서 우연히 영지주의 복음서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중 대표적인 것이 도마복음서(The Gospel of Thomas)입니다.

원래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의 3대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synoptic Gospels)와 요한복음까지 포함된 4대 복음서는 예수님의 말씀들, 즉 ‘로기아logia’라고 불리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구전口傳(oral tradition)으로 전해 내려오던 말씀들을 기초로 작성되었습니다. 이 말씀들은 초대 기독교 신자들이 탄압을 피해 동굴과 같은 은신처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반복하며 전해 왔던 내용들로, 후대에 일부는 복음서로 고정되고 나머지는 사라졌습니다.

이러한 말씀의 원본, 즉 ‘로기아’는 독일어 크벨레Quelle, 즉 ‘출처⋅자료’라는 말에서 유래하여 큐Q 복음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복음서를 기록한 편집자들은 각자의 시각에 따라 이 말씀들을 배열하고 구성하여 복음서를 제작했습니다. 그 결과로 복음서 간에 서로 상당한 차이가 생겼으며, 현대의 신학자들이 이를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통파 기독교에서는 신과 인간 사이에 결코 건널 수 없는 깊은 심연이 존재한다고 강조하며, 인간은 근본적으로 죄인이며 죄는 죽음을 초래하므로 회개悔改가 필수적이라고 봅니다. 반면 영지주의는 인간이 자신을 깨닫는 것이 곧 하나님을 깨닫는 것이며, 인간의 본질적인 자아와 하나님의 신성은 동일하다는 입장을 취합니다. 또한 영지주의는 불교의 ‘제행무상諸行無常(세상의 모든 것은 고정되지 않고 늘 변화함)’과 같은 깨달음의 개념을 가지고 있어 정통파 기독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정통파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로 여깁니다. 이로 인해 예수는 점점 더 신격화되고, 인간과 건널 수 없는 거리를 둔 초월적인 존재로 인식되었습니다. 반면 영지주의에서는 예수 역시 인간과 같은 근원에서 온 존재로 보며, 인간의 내면에서 신성을 찾는 길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 역시 크게 다릅니다. 정통파 기독교는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야훼Yahweh를 사랑의 하나님으로 보지만, 영지주의에서는 야훼를 전쟁을 좋아하고 제사를 즐기는 군신軍神, 즉 세상을 창조한 악한 존재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차이점은 단순한 해석의 차이를 넘어 신의 본질에 대한 전혀 다른 철학을 보여 줍니다.

또 하나의 큰 차이는 윤회輪廻에 대한 인식입니다. 정통파 기독교는 창조-타락-구원이라는 직선적인 시간관을 가지고 있는 반면, 영지주의는 윤회적 세계관을 수용합니다. 또한 영지주의는 어머니 숭배 사상, 제사장이 두 분이라든지 여성적인 신성에 대한 인식도 갖고 있으며, 이를 통해 신앙의 남성 중심적 구조를 넘어서는 넓은 시야를 제시합니다.


영지주의의 신령한 지식은 단순한 믿음이나 이성적 지식보다 우월한 것으로 여겨졌고, 그 가르침은 #동방의 고대 종교들과도 일치#하는 면모를 보입니다. 이는 서양과 동양의 사상 체계가 보편적 진리의 차원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영지주의는 단순히 기독교의 이단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잃어버린 역사(예수의 18년간의 공백기)를 밝혀 주는 중요한 열쇠로도 볼 수 있습니다. 더 깊이 들어가 보면 동서 보편의 뿌리인 #신교神敎의 가르침과 인류를 궁극의 만사지 문화, 도통 문화로 이끄는 제3의 초종교 가르침과도 모종의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 구도의 길

예수의 청소년기부터 29세까지의 생애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보병궁 복음서』를 비롯한 다양한 고대 기록들은 예수가 여러 지역을 다니며 수행하고 가르침을 얻었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 12세의 예수는 인도 남부 오릿사Orissa 지방의 쟈간나트Jagannath 사원에서 4년간 수학하였고, 이후 베다Vedas 성전과 마니 법전(Manic laws)을 배우며 인도 최고의 의사 우드라카의 제자가 되어 의술도 익혔습니다.

그는 네팔의 가빠비츄Kapavistu 사원에서 성자 비쟈빠찌를 만나고, 티베트의 사원에서 성현 멍쯔를 만나 그의 도움으로 고전古典을 배웠습니다. 또 페르시아로 이동해, 예수의 탄생을 축복한 동방 박사들과도 교류하였으며, 아브라함의 고향 갈데아 우르에서는 성자 아시비나와 도담을 나누었습니다.

그 후 그리스 아테네에서 성자 아폴로를 만나고, 이집트에서는 엘리후와 살로메 성자를 통해 수련을 이어 갔습니다. 특히 태양의 도시 헬리오폴리스Heliopolis에서는 성자들의 모임인 형제단에 입회해 일곱 가지 시험을 통과한 후, ‘그리스도’(하느님의 사람)로서 임명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이후 알렉산드리아에서 세계의 일곱 성현 모임에도 참석한 뒤, 마지막으로 티베트를 거쳐 29세에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러한 예수의 수행 여정은 단순한 전설이 아닙니다. 인도나 티베트의 사원들에 ‘이사Issa’라는 걸출한 인물이 수행을 하고 공부를 했다고 전해지는 책과 기록들이 있는데, 그 내용이 이 『보병궁 복음서』에서 말하는 내용과 같습니다.

이 구도를 하는 과정에서 예수님의 깨달음이 어떻게 펼쳐지는가를 살펴보려면, 『보병궁 복음서』가 전하는 승려 라마아스와 예수님 간의 대화를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대화에서 예수는 ‘믿음이란 하나님과 인간이 전능하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라 말하고, 인간이 신과 같은 삶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임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인간관과 신관은 영지주의의 시각과도 일치하며, 기독교의 기존 구원론과는 다른 새로운 차원의 구원 이해를 보여 줍니다.


또한 『보병궁 복음서』에서는 구원을 “인간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이르는 사다리”로 표현하며, 구원에 대해 세 가지 단계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신념, 둘째는 믿음, 그리고 셋째는 성취입니다. 성취는 구원의 마지막 단계로, 인간이 진리 그 자체가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 단계에 도달해야 비로소 구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 구원관은 인간의 내면에 숨어 있는 신성을 강조하며, 인간이 신과 같은 삶에 도달함으로써 신성과 하나 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이는 기존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 중심의 구원관과 큰 차이를 보입니다.


『보병궁 복음서』에서 묘사된 우드라카와의 만남에서도 이러한 내면 중심적 구원관의 흐름을 볼 수 있습니다. 우드라카는 예수에게 인간의 의지가 중요한 치료법이라는 사상을 가르쳤고, 말씀이 모든 병을 치유할 수 있다는 믿음을 전수했습니다. 예수가 병자들을 고치던 기적의 배경에는 바로 이러한 수행과 가르침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단순한 치유자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 치유를 가능케 하는 조화력의 전달자였습니다.


또한 예수는 성자들 중에서도 뛰어난 인물로 인정받아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받습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히브리어 ‘메시아’Messiah와 동일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는 단순한 칭호가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려는 신의 사랑을 구현할 수 있는 인격체를 지칭하는 명칭입니다.

성경에는 시대마다 등장하는 메시아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 시대에는 멜기세덱Melchizedek이 그리스도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아브라함 시대에 살렘Salem의 평화의 왕이자 의의 왕으로 불리며, 인류를 위해 자기를 희생한 인물이었습니다. 멜기세덱은 제사장이자 구세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고, 신약 시대에는 그의 맥을 이어 예수Jesus가 그리스도가 되어 등장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6장 20절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班次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


이 말씀은 메시아가 시대를 초월하여 일정한 맥을 따라 이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는 쌍어궁 시대의 메시아로서 멜기세덱의 반차(계열)를 잇고, 자신의 목숨을 희생함으로써 인류의 죄를 구원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쌍어궁 시대가 끝난 지금, 우리는 새로운 보병궁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인류 보편의 구원이 성취되는 성약의 시대이며, 제3의 그리스도, 즉 아버지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친히 강세하시는 시기입니다. 이는 메시아와 그리스도의 개념이 단일 사건이 아닌, 시대마다 인류의 구원과 진리를 위해 출현하는 초월적 존재임을 의미합니다.

예수가 2천 년 전 사역을 하신 이후, 제자들을 통해 그 가르침이 전해졌지만, 오늘날까지 인류가 완전한 구원을 얻었는지는 의문입니다. 여전히 전쟁과 고통, 불의가 만연한 세상을 보면, 우리는 더 고차원적이고 보편적인 구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됩니다. 제3의 그리스도가 나와야 할 필요성이 여기서 비롯됩니다.


예수가 가르친 인간관 역시 기존 기독교의 인간관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입니다. 정통 기독교는 인간을 하나님의 피조물被造物로 보며, 원죄로 인해 타락한 존재이자 구원받아야 할 존재로 여깁니다. 그러나 『보병궁 복음서』에서는 인간에 대해 이렇게 선언합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자손이며 …… 사람은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이다. …… 모든 인간은 육체를 입은 신이기 때문이다.”


『보병궁 복음서』에서 말하는 인간의 신성은, 「천부경天符經」에 나오는 “천일天一, 지일地一, 인일人一” 혹은 “태일太一”의 개념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인간은 신성과 본래부터 하나이며, 하나님과 같은 존재라는 선언은 곧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자각을 요구하는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에게 이는 신성 모독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인간을 신이라 말하다니, 그 자체가 신을 모욕하는 행위라고 여긴 것이지요. 이로 인해 예수는 핍박을 받았고 결국 형극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율법에 기록(「시편」 82:6)된 바 내가 너희를 신*(gods)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 「요한복음」 10:34

구약 자체에서도 인간이 신이라 불리운 구절들이 있으며, 모든 인간이 인격적 신으로 간주된다는 관점이 있음을 지적한 것입니다.
* 대문자 God은 대우주의 변화 정신과 그 주재자인 하나님(상제님)을 뜻하지만, 이 구절에서 소문자 gods는 일반적인 복수複數의 인격신을 뜻한다.


돌아오라, 그대여!

예수는 인간이 본래 하나님과 같은 신성을 가진 존재임을 깨우치기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며, 그 사상은 『보병궁 복음서』에서 명확히 드러납니다. 「마태복음」 3장 2절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는 말씀은 매우 잘 알려진 복음의 핵심 문장입니다. 여기서 ‘회개’란 단순히 죄를 뉘우치는 의미를 넘어선 보다 깊은 개념을 담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회개’는 ‘테슈바teshuvah’이며, 이 단어에는 세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첫째, ‘되돌아오다(return)’, 둘째, ‘대답하다(answer)’, 셋째, ‘회개하다(repent)’입니다. 김영욱 교수는 이와 관련해 ‘회개’는 헬라어 ‘메타노이아metanoia’와 유사하다고 설명하며, 이 단어는 단순히 죄를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바꾼다(change of heart)’, ‘생각을 바꾼다(change of mind)’는 뜻으로, 인생의 방향과 목적을 회향回向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회개는 내면의 방향 전환이며, 신의 부름에 대한 응답이라는 보다 능동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오쇼 라즈니쉬Osho Rajneesh는 이를 더 깊이 있게 풀어냅니다. 그는 “신에게 돌아가는 것이 신에게 대답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테슈바의 ‘되돌아오다’와 ‘응답하다’라는 두 가지 뜻을 동시에 살려낸 해석을 제시합니다. 만약 우리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를 “돌아오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로 바꾼다면, 기존의 죄 중심적 교리 해석은 크게 흔들릴 것입니다. 많은 교회와 성당이 ‘회개’라는 개념에 의존해 왔기 때문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