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개벽 사상의 선구 서경덕의『화담집花潭集』

[한국사를 바꾼 열두 권의 책]
원정근(상생문화연구소 연구위원)


『화담집』은 조선 성리학에서 기氣 철학의 선구자였던 서경덕의 사상을 담고 있다.

『화담집』은 청나라 건륭제가 거국적으로 기획했던 『사고전서』 별집류別集類에 편입된 유일한 조선의 시문집이다.

화담은 이 세계의 모든 존재가 한순간도 멈춤 없이 변화하는 역동적 과정에 있는데, 그 변화의 원인은 기氣라고 보았다.

화담은 태허太虛를 우주의 본질로 보고, 모든 만물이 태허에서 생성되고 다시 태허로 돌아가는 순환적 세계관을 제시했다.

화담의 선후천설이 한국 개벽 사상의 선구를 이루었다.



화담은 어떤 사람인가


화담花譚 서경덕徐敬德은 황진이,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고 불리었다. 그는 1489년에 세상에 태어나서 1546년에 죽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이다.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과 함께 16세기를 대표하는 사림파의 처사處士이다. 사림파士林派는 국가 중심의 관학파官學派(훈구파勳舊派)와 대응하는 세력을 말하며, 중앙 정계에 진출하지 않고 지방에서 사학파를 형성했다. 사림파와 훈구파가 대립하는 상황에서 사화士禍가 일어난다. 화담은 살아생전에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결이 절정으로 치달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숙청되는 4대 사화를 모두 다 겪었다.

서경덕의 본관은 당성唐城이다. 그의 본명은 경덕敬德이었고, 자는 가구可久이며 호는 복재復齋였다. 만년에 지금의 개성인 송도의 교외에 있는 화담花譚에 살았기 때문에 화담 선생이라고 불렸다. 화담의 집안은 당시 양반 계층에 속했지만 높은 벼슬을 하지 못하여 대대로 가난을 면치 못하였다. 부친 서호번徐好蕃은 무반 계통의 하급관리를 지냈다. 화담의 집안은 대대로 풍덕에 살았으나 부친이 송도에 사는 한씨韓氏를 부인으로 맞이하면서부터 송도에 옮겨가서 살았기 때문에 화담은 송도에서 태어났다.

화담은 주자의 성리학에만 매몰되지 않고 자유로운 학문 세계를 추구하여 개방적인 특성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경향은 신분에 구애됨이 없이 문호를 개방하는 방식을 취했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자유롭게 모여들었다. 화담의 문하에는 행촌杏村 민순閔純, 사암思菴 박순朴淳, 초당草堂 허엽許曄, 토정土亭 이지함李之函 등 당대의 저명한 학자와 이름난 신하들이 많았다. 조선 시대 최고의 스캔들로 인구에 회자되는 송도삼절松都三絶의 두 사람인 서경덕과 기생 황진이의 사랑도 서경덕의 개방적인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양한 신분을 가진 제자들의 모습에서 신분보다는 능력을 중시하는 서경덕의 인품을 엿볼 수 있다.

화담은 과거 시험에 응시하여 급제하였지만 관직을 탐내지 않고 학문에만 열중하며 자연을 벗 삼아 생활하였던 고고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다. 세속의 이해득실이나 시비 영욕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이로 인해, 화담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조차도 제대로 끼니를 잇지 못한 채 굶주리게 하였다. 하지만 화담은 극심한 궁핍 속에서도 세속과 타협하지 않고 달관의 자세를 견지하였다. 그는 사화로 얼룩진 당시의 정치 상황 속에서, 스스로 만족하는 처사로서의 삶을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글 읽을 때는 세상 다스리는 데 뜻을 두었건만
만년에는 도리어 안회의 가난함을 달갑게 여기네.
부귀는 다툼이 있어 손 대기 어렵고
숲과 샘물은 간섭하는 이 없으니 몸을 편케 할 수 있네.
산나물 캐고 고기 잡아 배를 채우고
달을 노래하고 바람을 읊으니 정신이 맑아지네.
배움에 의심이 없고 앎이 쾌활하여지니
헛되이 백 년을 사는 사람에서 벗어날 수 있네.
讀書當日志經綸
晩歲還甘安氏貧
富貴有爭難下手
林泉無禁可安身
採山釣水堪充腹
詠月吟風足暢神
學到不疑知快活
免敎虛作百年人.1

1 河承賢校注, 『花潭集校注』(上海: 上海古籍出版社, 2012), 「述懷」, 33~34쪽.


『화담집』은 어떤 책인가


중국의 성리학性理學은 남송의 유학자 주희朱熹(주자朱子)에 의해 집대성되었다. 그래서 성리학은 주자학朱子學으로 불리기도 한다. 성리학은 자연과 인간의 도덕적 원리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한국의 성리학은 고려 말 성리학의 선구자 안향安珦에 의해 받아들여져 이성계와 정도전에 의해 조선 건국의 통치 이념으로 자리를 잡는다. 조선의 성리학은 주자학을 기반으로 도덕적 인간과 유교적 이상사회를 지향하였다.

조선 중기의 성리학 연구는 크게 두 가지 갈래로 나뉘어 전개된다. 하나는 정이천程伊川과 주희의 학풍을 계승한 이언적李彦迪의 주리론主理論이고, 다른 하나는 소강절邵康節과 장재張載의 학풍을 계승한 서경덕의 주기론主氣論이다. 이언적과 서경덕 두 사람은 조선 성리학의 수준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언적의 주리론과 서경덕의 주기론은 이후 조선 성리학의 양대 학통-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을 이루는 선구가 되었다. ​

화담은 당시 리理를 강조하는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던 상황에서 기氣를 중심으로 자기 나름의 철학적 체계를 쌓아 갔던 독특한 인물이었다. 화담의 기 철학은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와 혜강惠岡 최한기崔漢綺 등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화담집花潭集』은 조선 성리학에서 기 철학의 선구자였던 서경덕의 사상을 담고 있다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화담집』은 화담 서경덕의 사상과 시문을 정리한 책이다. 서경덕 사후 그의 자손들과 후학들은 송도에 숭양서원崇陽書院과 화곡서원花谷書院과 같은 서원을 세워 그의 학문을 기리고 전승하는 공간으로 삼았고, 그의 유문遺文을 모아 『화담집』을 간행하고 배포하였다. 화담이 죽은 뒤에 18세기 말까지 모두 다섯 번 간행되었다. 초간본은 제자 박민헌朴民獻⋅허엽許曄 등 후학들이 편집하였고, 1605년에 은산현감 홍방洪霶이 초간본을 바탕으로 재간본을 발행하였다고 전해진다. 17세기 초의 재간, 17세기 중후반의 3간, 영조 대의 4간, 정조 대의 5간 등이다. 오늘날 널리 보는 『화담집』은 5간본이다.

『화담집』은 모두 4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1은 부賦와 시詩다. 권2는 소疏와 서書와 잡저雜著와 서序와 명銘이다. 권3은 부록으로 연보年譜와 비명碑銘과 유사遺事이다. 권4는 부록으로 사제문賜祭文과 서원상량문書院上樑文과 종사문묘의從祀文廟議와 문인록 등이다.

이 가운데 가장 학술적인 가치가 있는 것은 잡저 가운데 실려 있는 「원리기설原理氣說」, 「이기설理氣說」, 「태허설太虛說」,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 등이다. 이는 서경덕의 철학적 논설과 다양한 주제를 다룬 글들이다. 그의 사상과 학문적 깊이를 보여 주는 핵심적인 부분이다. 자연과 인간에 대한 그의 독창적인 철학을 담고 있으며, 특히 기 철학에 대한 체계적인 논의가 포함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화담집』이 청나라 건륭제가 거국적으로 기획했던 『사고전서四庫全書』 별집류別集類에 편입된 유일한 조선의 시문집이라는 사실이다.


후천 개벽사상의 선구-선천과 후천


당시 대부분의 유학자들이 도덕 질서의 가치론에만 중점을 둔 것과는 달리, 화담은 자연의 조화와 이치를 따지는 존재론存在論에 중점을 두었다. 하지만 화담의 철학적 사유는 궁극적으로 세계와 인간의 통합적 이해를 목표로 한다. 화담은 세계와 인간의 합일을 꿈꾸었다.
화담의 철학적 사유는 기氣로 시작한다. 기는 그의 철학의 핵심 개념이다. 화담은 이 세계의 모든 존재가 한순간도 멈춤 없이 변화하는 역동적 과정에 있는데, 그 변화의 원인은 기라고 보았다. 화담이 기와 대비되는 리理를 말할 경우에도 리는 기의 조리와 질서를 의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저절로 그러하게 변화하는 기의 변화 속에 리가 내재한다. 화담은 만물의 근원과 변화를 기로써 설명하고, 그 기를 능동적이고 불멸하는 것으로 보았다. 기가 먼저이고 리가 뒤라는 기선이후氣先理後의 입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철학을 기 철학이라고 부른다.

화담은 우주를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으로 나누었다. 화담의 선후천 개념은 『역易』에서 유래하며 소옹邵雍에 의해서 발전되었다. 소옹은 선천과 후천을 천지가 시작하기 이전과 천지가 시작한 이후로 나누어 설명한다. 화담은 소옹의 선후천론을 장재의 태허太虛와 기氣를 중시하는 사상과 결합시켰다.

태허는 맑고 형체가 없다. 이를 선천이라고 부른다. 그 크기는 밖이 없고, 그 앞은 시작이 없으며, 그 유래는 추궁할 수 없다. 그 맑고 비어 있고 고요한 것이 기의 근원이다. 바깥이 없는 먼 곳까지 널리 퍼져 있고, 꽉 차 있어서 빈틈이 없으니 한 터럭도 용납될 사이가 없다. 그러나 그것을 잡아당기려 하면 비어 있고 잡으려 하면 잡을 것이 없다. 그런데도 도리어 차 있으니 없다고 할 수 없다.2

2 河承賢校注, 『花潭集校注』, 「原理氣」, 117쪽. “太虛湛然無形, 號之曰先天. 其大無外, 其先無始, 其來不可究. 其湛然虛靜, 氣之原也. 彌漫無外之遠, 逼塞充實, 無有空闕, 無一毫可容間也. 然挹之則虛, 執之則無. 然而却實, 不得謂之無也.”


지금의 우주가 후천이라면, 이 우주가 생겨나기 이전의 세계는 선천이다. 화담은 후천의 세계가 그 모습을 갖추기 이전의 상태를 태허太虛라고 하였다. 태허는 기의 본체로서 기로 가득 차 있는 일기一氣의 상태이다. 이를 선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기의 본체는 지극히 커서 밖이 없고 그보다 더 앞서는 시초도 없다. 그래서 그 유래를 궁구할 수 없다.3 주목해야 할 것은 화담이 선천과 후천, 태허와 기를 설명할 때 짝 개념을 활용한다는 사실이다.
3 윤사순, 「서경덕-벼슬과 가난 초월한 독방의 대철학가」, 186쪽.


그러니 선천은 기이하고 기이하지 아니한가? 기이하고 기이하다! 오묘하지 아니한가? 오묘하고 오묘하다! 갑자기 뛰어오르고 홀연히 열리니, 누가 그렇게 하도록 시키는가? 저절로 그렇게 하는 것이며, 또한 저절로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다. …… 움직임과 고요함이 없을 수 없고 열림과 닫힘이 없을 수 없는데, 그 무슨 까닭인가? 기틀이 저절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미 일기라고 하였으니, 일은 저절로 이를 머금고 있다. 이미 태일이라고 하였으니, 일은 곧 이를 머금고 있다.4

4 河承賢校注, 『花潭集校注』, 「原理氣」, 117-118쪽. “是則先天, 不其奇乎? 奇乎奇! 不其妙乎? 妙乎妙! 倐爾躍, 忽爾闢, 孰使之乎? 自能爾也, 亦自不得不爾.…不能無動靜, 無闔闢, 其何故哉? 機自爾也. 旣曰一氣, 一自函二, 旣曰太一, 一便函二.”


태허의 일기가 운동을 하는데, 그 운동은 누가 그렇게 하도록 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주 변화의 기틀이 저절로 그러한 것이다. 이를 ‘기자이機自爾’라고 한다. 저절로 그렇게 될 수 있어 그렇게 된 것이며, 저절로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어 그렇게 된 것이다. 순식간에 홀연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장자莊子』 「지락至樂」에 기機라는 말이 나온다. 장자는 “만물은 모두 기틀에서 나와서 모두 기틀로 들어간다.”5라고 하여, 기機를 만물의 출입처로 정의한다. 곽상郭象은 『장자』 「천운」에 나오는 기機에 대해 “저절로 그러하므로 알 수 없다.”6라고 주석을 달았다. ‘기자이機自爾’는 장자의 기機와 곽상의 자이自爾가 합해져 이루어진 말이다. 기機라는 것은 우주 변화의 기틀을 뜻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자발적으로 운동하고 변화하는 필연적인 추세를 말한다. 어떤 일이 이루어지는 가장 중요한 계기나 조건을 말한다. 곽상이 이미 지적한 것처럼, ‘자이自爾’란 ‘자연自然’과 같은 뜻이다. ‘기자이機自爾’는 모든 사물이 어떤 계기나 조건이 되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는 현상을 뜻한다.
5 郭慶藩, 『莊子集釋』, 「至樂」, 625쪽. “萬物皆出於機, 皆入於機.”
6 郭慶藩, 『莊子集釋』, 「天運注」, 495쪽. “自爾故不可知.”


태허의 일기가 저절로 그러하게 움직여서 음기와 양기가 나뉘어 우주 만물로 생성된 것이 바로 후천後天이다. 화담은 선천에서 후천으로의 전환을 당시의 다른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합벽闔闢’ 또는 ‘개벽開闢’이라고 불렀다.

하나의 기가 나뉘어져 음양이 된다. 양의 극이 고동쳐 하늘이 되고, 음의 극이 모여서 땅이 된다. 양이 고동친 끝에 그 정기가 맺어져 해가 되고, 음의 정수가 맺혀 달이 된다. 나머지 정기가 흩어져 뭇 별이 되니, 그 땅에 있어서는 물과 불이 된다. 이것을 후천이라 하니, 곧 용사이다.7

7 河承賢校注, 『花潭集校注』, 「原理氣」, 119쪽. “一氣之分, 爲陰陽. 陽極其鼓而爲天, 陰極其聚而後天, 乃用事者也.”爲地. 陽鼓之極, 結其精者, 爲日; 陰聚之極, 結其精者爲月. 餘精之散爲星辰, 其在地爲水火焉. 是謂之後天, 乃用事者也.”


태허太虛라는 일기一氣가 ‘기자이’를 통해 후천 음양의 기로 변화되며 이 음양의 기에 의해서 천지 만물이 생겨난다. 이것이 바로 후천이다. 음양의 기 운동으로 인해 후천은 다시 태허로 돌아가는 연속적 순환과정을 이룬다.

화담의 선후천론은 본체와 작용의 관계로 설명할 수 있다. 선천은 본체로서 태허의 비어 있고 고요한 것이 기의 근원이다. 후천은 기의 모임과 흩어지는 작용으로서 기의 무궁무진한 변화 과정이다. 화담이 보기에 모든 사물은 잠시 머무는 존재다. 태허, 즉 일기의 변화에서 생겨나 다시 태허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화담은 모든 존재가 궁극적으로 귀의하는 고향은 선천, 즉 태허라고 말한다.

태허太虛는 비어 있으면서도 비어 있지 않다. 비어 있음은 곧 기氣이다. 비어 있음은 끝이 없고, 바깥이 없다. 기 또한 끝이 없고, 바깥이 없다. 이미 비어 있다고 했으니, 어찌 기라고 말할 수 있는가? 답하였다. ‘비어 있음과 고요함은 기의 본체이고, 모임과 흩어짐은 그 작용이다.’8

8 河承賢校注, 『花潭集校注』, 「太虛說」, 124쪽. “太虛, 虛而不虛, 虛則氣. 虛無窮無外, 氣亦無窮無外. 旣曰虛安得謂之氣? 曰‘虛靜,卽氣之體; 聚散, 其用也.’”


기는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무형의 기와 유형의 기다. 기의 시원으로서의 태허는 무형의 기이며 천지 만물을 형성하는 기는 유형의 기다. 기가 쌓이면 유형의 기가 되고, 흩어지면 무형의 기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화담은 일기장존설一氣長存說을 주장했다.


개벽 사상의 도맥


화담이 생존했던 16세기 조선의 사상계는, 정주程朱 성리학性理學이 정통으로 자리를 잡으며 다른 사상을 이단으로 배척하였다. 화담은 소옹의 상수역과 장재의 기론을 계승하여 당시 정통이었던 정주 성리학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나름의 독자적인 사상 체계를 수립하여 자유로운 정신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

화담은 우리나라 성리학에서 최초로 기일원론氣一元論의 체계적인 전개를 시도하였다. 이후 이이, 임성주, 최한기 등 주기론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화담의 기 철학은 자연과 인간을 하나로 연결하는 기 중심의 사유이다. 우주에 충만한 기가 인간과 사물을 생겨나게 하였다가 다시 기로 돌아간다고 보았다. 기를 우주 만물의 근본 원리로 보고, 모든 존재가 끊임없이 순환하고 변화하는 역동적 변화 과정을 해명했다. 태허를 우주의 본질로 보고, 모든 만물이 태허에서 생성되고 다시 태허로 돌아가는 순환적 세계관을 제시했다. 화담은 기론을 통해 세계와 인간이 한 몸이라는 천인합일관天人合一觀물아일체관物我一體觀을 제시하였다.

화담의 기 철학에서 독창적인 이론 가운데 하나는 ‘기자이론機自爾論’이다. ‘기자이론’은 한국 철학사에서 조선의 유학자 화담이 『화담집』 「원리기原理氣」에서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말은 고려말 행촌杏村 이암李嵒(1297~1364)이 이미 사용한 것이다. 이암은 『태백진훈太白眞訓』에서 허虛를 설명하면서 기자이를 제시하였다.

최영이 양기에 대해 묻자, 선생이 말씀하셨다. “자연의 도는 일기일 뿐이다. 허하고 조하며 조하고 허하여 합치되어 하나가 되지만 아직 형체를 이루지 않은 것이 양기이다. 이른바 허는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을 말하고, 허는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는 것을 말한다. 조는 생겨날 수도 있고 없어질 수도 있는 것을 말하고, 조는 늘어날 수도 있고 줄어들 수도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허에도 삼극이 있고 조에도 삼극이 있어서 그 기틀이 저절로 그러한 것은 허요, 그 형체가 그렇게 갖추어진 것은 조이다. 그래서 허와 조가 그 몸을 함께하여 사람과 사물이 비로소 여기에서 생겨난다.”9

9 이유립, 『태백진훈』(『대배달민족사‧권삼』, 고려가, 1987), 253쪽. “崔瑩問良氣, 先生曰: ‘自然之道, 一氣而已. 虛而粗, 粗而虛, 合爲一而未形者, 是爲良氣也. 所謂虛者不生不滅之謂也, 虛者不增不減之謂也; 粗者能生能滅之謂也, 粗者能增能減之謂也, 故虛有三極, 粗亦有三極. 其機自爾者虛也, 其體具爾者粗也, 故虛粗同其體而人物始生焉.’”


이암은 “그 기틀이 저절로 그러한 것은 허”라고 한다. 그는 생겨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 리와 생겨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하는 기가 한 몸이 되어 역동적 변화의 기틀이 저절로 그러하게 작동하면서 우주 만물이 발현한다고 보는 것이다. “리理-기氣-기機”가 그것이다. 이암은 삼신일체론三神一體論의 관점에서 ‘기자이론機自爾論’을 수용하여 신과 세계와 인간의 관계를 해명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화담의 선후천설이 한국 개벽 사상의 선구를 이룬다는 점이다. 조용헌은 한국 개벽 사상의 도맥을 이렇게 설명한다. 화담에서 시작된 조선의 합벽 사상 또는 개벽 사상의 도맥은 토정 이지함李之菡으로 이어지고, 조선 정조 때의 이서구李書九로 이어지며, 이서구에서 다시 연담蓮潭 이운규李雲奎를 거쳐 일부一夫 김항金恒으로 이어져서 구한말 국사봉 아래에서 일부의 『정역正易』으로 계승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조선의 개벽 사상은 수운水雲(최제우崔濟愚)의 ‘다시 개벽’을 거쳐서 증산甑山의 ‘후천개벽後天開闢’으로 완성된다. ■

화담의 기氣 철학에서 독창적인 이론 가운데 하나는 ‘기자이론機自爾論’이다.

화담의 선후천설이 한국의 개벽 사상의 선구를 이루었다.



〈참고문헌〉
* 河承賢校注, 『花潭集校注』(上海: 上海古籍出版社, 2012)
* 황광욱역주, 『역주 화담집』(서울: 심산, 2004)
* 이유립, 『태백진훈』(『대배달민족사‧권삼』, 고려가, 1987)
* 김교빈외, 『기학의 모험1』(서울: 들녘, 2004)
* 김교빈, 『화담집: 종달새의 날갯짓에서 이끌어낸 기의 철학』(서울: 풀빛, 2011)
* 황광욱, 『화담 서경덕의 철학사상-화담 철학과 그 문인의 사상』(서울: 심산, 2003)
* 박희병, 『한국의 생태사상』(서울: 돌베게, 1999)
* 신병주, 「화담 서경덕의 학풍과 현실관」( 『한국학보』 22권 3호)
* 신병주, 「조선사를 이끈 인물들, 서경덕: 개방적 학풍, 처사의 길」( 『선비문화』 4권, 2004), 17쪽.
* 윤사순, 「서경덕-벼슬과 가난 초월한 독방의 대철학가」(세계평화교수협의회, 『광장』 158호)
* 조용헌, 「조용헌의 영지기행-김일부가 ‘후천개벽’ 깨달음 얻은 계룡산 향적선방」
* 정호훈, 「조선후기 『花潭集』 刊行의 推移와 徐敬德 學問」(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국문화』 84권, 2018)
* Victoria Ten, 「花潭 徐敬德 철학에서 先天과 後天의 의미와 관계에 대한 연구」(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석사논문,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