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천 년의 고도古都 경주
[열두 개 도시로 찾아가는 국통 맥 여행]
신라의 전성시대에 서울 안 호수가 178,936호戶에 1,360방坊이요, 주위가 55리里였다. 서른다섯 개의 금입택金入宅(황금을 집에 씌운 저택으로, 시기상으론 헌덕왕 전후로 추정)이 있었다.
- 『삼국유사三國遺事』 제1 기이紀異 진한辰韓
- 『삼국유사三國遺事』 제1 기이紀異 진한辰韓
왕이 좌우의 신하들과 함께 월상루月上樓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았는데, 서울 백성의 집들이 서로 이어져 있고 노래와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왕이 시중 민공敏恭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지금 민간에서는 기와로 덮고 짚으로 잇지 않으며, 숯으로 밥을 짓고 나무를 쓰지 않는다고 하니 사실인가?”라고 물었다. 민공이 “신도 역시 일찍이 그와 같이 들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헌강왕憲康王 6년(880) 9월 9일 기사
-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헌강왕憲康王 6년(880) 9월 9일 기사
신라의 건국 시조, 박혁거세
신라新羅의 첫 임금은 박혁거세朴赫居世(BCE 69~CE 4)이다. 흔히들 큰 알에서 태어나 알같이 큰 박이라고 해서 성을 ‘박朴’이라고 했다지만, 사실은 ‘밝다’는 뜻으로 광명 사상을 상징하는 말이다. 박혁거세 출생의 비밀을 담은 『환단고기桓檀古記』를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사로시왕 선도산성모지자야
斯盧始王은 仙桃山聖母之子也라
석 유부여제실지녀파소 불부이잉 위인소의
昔에 有夫餘帝室之女婆蘇가 不夫而孕하니 爲人所疑하야
자눈수 도지동옥저 우범주이남하
自嫩水로 逃至東沃沮하고 又泛舟而南下하야
저지진한나을촌
抵至辰韓奈乙村하니
사로斯盧(신라)의 첫 임금(박혁거세)는 선도산仙桃山 성모聖母의 아들이다. 옛적에 부여 황실의 딸 파소婆蘇가 지아비 없이 잉태하여 남의 의심을 사게 되었다. 이에 눈수嫩水(만주 헤이룽장성의 눈강)에서 도망하여 동옥저(지금의 함경도와 강원도 일대)에 이르렀다가 또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한辰韓의 나을촌에 이르렀다.
- 『환단고기桓檀古記』 「태백일사太白逸史」 〈고구려국 본기高句麗國本紀
신라 사람들이 시조의 모친으로 신성시한 선도산 성모가 사실은 부여, 더 정확하게는 북부여北夫餘의 단군이신 고두막한高豆莫汗의 따님이라는 사실이다. 단군조선의 통치 체제가 붕괴되면서 동아시아 정세가 어지러울 때, 만주에 있던 진한辰韓 사람들이 대거 남으로 내려왔다. 또한 흔들리는 단군조선의 맥을 이어 해모수解慕漱 단군이 북부여를 건국하였다.
그런데 뒤에 한漢 무제武帝가 침략해 오자 이에 맞서 의병을 일으킨 이가 있었다. 바로 단군조선의 마지막 단군 고열가古列加의 후예인 서압록 사람 고두막한高豆莫汗이다. 고두막한은 한 무제를 격파하고 나서 부여의 옛 도읍(농안 장춘 지방)을 점령하고 나라를 동명東明이라 했다. 이곳을 신라의 옛 땅(신라고양야新羅故壤也)이라고 하는데, 단군조선과 북부여를 이은 정통 국통 맥으로서 졸본부여 또는 동명부여라고도 하였다. 이 고두막한의 외손자가 바로 박혁거세이다.
부여 황실의 딸인 성모 파소와 박혁거세는 만주의 눈수 지역에서 남하하여 동옥저에 이르렀다가, 이미 만주에 있던 진한辰韓 사람들이 이주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그곳 진한 육부六部 중 하나인 돌산突山 고허촌高壚村의 촌장 소벌도리蘇伐都利(?~?)가 박혁거세를 데려다 길렀고, 13세가 되자 총명하고 숙성하여 진한 6부가 함께 박혁거세를 받들어 나라를 세웠다.
초기의 나라 이름은 진한辰韓, 사로斯盧라고 했으며, 도읍은 서라벌徐羅伐에 정하고 박혁거세는 거세간居世干(혹은 거서간居西干, 거슬한居瑟邯)이 되었다. 거세간은 ‘임금’, ‘귀인貴人’, ‘제사를 맡은 웃어른’이라는 뜻이다. 천 년 제국 신라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초기 서라벌 - 구황동
그 뒤 101년 반월 모양으로 월성月城을 쌓아 확대, 보강했다. 왕궁 서쪽에는 계림鷄林이 있다. 60년 이곳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려 가 보니 아기가 든 금궤가 있었고, 그 아기가 바로 경주 김씨의 시조이자 신라의 김씨 성을 가진 모든 왕의 조상인 김알지金閼智이다. 그 후로 이곳은 닭과 관련되었다고 계림으로 불렸고, 이는 곧 신라의 별칭이 되었다. 닭은 동방에서 봉황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CE 32년(유리儒理왕 9년)에 경주와 신라 최초의 축제가 있었다. 6촌六村을 6부六部로 개편하고 편을 나눠 음력 7월 16일부터 8월 15일까지 길쌈 경기를 벌이고 진 쪽의 부담으로 잔치를 벌였다. 이를 가배嘉俳라 하였는데, 오늘날 추석, 한가위의 시초라고 한다.
356년 제17대 군주로 내물奈勿왕이 즉위하면서 신라 최초로 ‘마립간麻立干’을 왕의 칭호로 사용했고, 이전까지 박朴씨와 석昔씨가 돌아가며 이어받던 왕위를 김金씨 일족이 고정 세습하게 되었다. 400년에는 백제百濟와 가야伽倻 그리고 왜倭의 총공격으로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하자,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구원으로 연명하게 되고 한동안 고구려의 속국처럼 되어 버리는 아픔도 있었다.
하지만 6세기에 접어들어 지증왕智證王, 법흥왕法興王, 진흥왕眞興王이 잇달아 즉위하면서 백제를 누르고, 가야를 정복하고 고구려를 물리쳐 한강 유역까지 차지하면서 국력이 신장하였다. 왕권 신장과 불교 공인이 이루어지면서 이 기념물이 구황동 일대에 들어서게 되었다. 553년 진흥왕이 황룡사皇龍寺를, 645년 선덕여왕이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운다. 634년 분황사芬皇寺가 건립되었고, 652년보다 앞선 어느 시점에 황복사皇福寺가 세워지면서 모두 아홉 군데 임금 황皇 자 돌림의 웅장한 사찰이 들어서서 이 구역이 구황동이 되었다.
구황동 바로 서쪽 부근에는 동궁東宮과 월지月池가 만들어지고 계림 어귀에 첨성대瞻星臺가 세워졌다. 이때는 7세기 중후반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와 문무왕文武王 김법민의 시대로, 융성하는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기염을 토해 냈다.
세계 최대의 도시였던 신라의 수도, 서라벌
신라 전성기에 서라벌의 호수戶數는 17만 8,936호라고 한다. 한 자리 수치까지 나온 것으로 보아 단순한 추산은 아니고, 어떤 근거가 있는 숫자일 것이다. 가구당 4~6명이 살았다고 가정해 추산해 보면 대략 70~100만의 인구가 나온다. 8세기를 기준으로 볼 때, 당시 세계 최대 도시인 중국 장안長安과 이슬람 제국 바그다드Baghdad의 인구가 100만 정도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대로 믿기는 쉽지 않은 숫자이다. 현재 경주 인구가 25만 명, 18세기 기준 한양 인구가 30만 정도이니 과연 이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수도권처럼 근교까지 포함한 것이라는 설, 골품제의 신분 유지를 이유로 호적만 경주에 두고 지방으로 이주해 간 위장 전입 인구까지 포함한 수치라는 설, 호戶가 아닌 구口의 잘못된 표기로 보고 35만여 명 정도로 파악해야 한다는 설 등이 주장되고 있다. 당시 일본 헤이안 시대의 수도 헤이안쿄平安京(지금의 교토京都)에는 20만 명의 인구가 거주했는데, 그 시기에 교토와 경주의 면적이 비슷했고 국력도 대등했다고 보이는 만큼, 과연 지금의 경주가 신라의 서라벌이 맞는지에도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불국사와 석굴암을 만든 까닭은?
중앙집권적 유교 군주의 도성이 되어 갔지만, 도성 안팎으로 귀족과 백성의 불만이 차츰 커져 갔다. 귀족들은 자유로운 옛날을 그리워하거나, 왕위를 노렸다. 중앙 정부는 고구려와 백제 출신자들을 완전히 융합시키지 못했고, 백성들의 불만은 늘어갔다.
당시 임금인 제35대 경덕왕景德王은 불국사佛國寺와 석굴암石窟庵을 만들었다. 이 건립 사업과 관련하여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김대성金大城이란 인물의 개인적인 창건 사업처럼 되어 있다. 그런데 김대성은 민간인이 아니라 관직을 맡은 재상宰相이다. 즉 불국사와 석굴암 건립은 국가 규모의 투자와 지원 없이는 이뤄 낼 수 없는 거대한 국책 사업이었다. 그래서 실제 추진자는 경덕왕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불국사는 말 그대로 불국토佛國土를 속세에 건설하겠다는 염원을 드러낸 건축물이다. 초기 신라에 처음 불교가 들어왔을 때는 왕즉불王卽佛, 즉 신라 왕이 곧 부처의 현신이므로 부처님 섬기듯 왕을 받들라고 했었다. 그러나 원효元曉의 사상과 선종禪宗의 유행으로 중생즉불衆生卽佛, 즉 귀천을 불문하고 누구나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이 퍼져서 더 이상 왕을 부처로 섬기라는 이야기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불국토 사상을 내세웠다. 신라는 부처의 가호로 통일과 번영을 성취한 국가, 지상에 이루어진 부처님 나라이니, 이를 어지럽히는 자나 반역하는 자는 모두 부처님을 거역하는 것과 같다는 주장이다. 불만 가득한 귀족과 백성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였다.
하지만 경덕왕 이후 아들 혜공왕惠恭王이 겨우 일곱 살에 즉위하고 모후가 섭정을 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조선에서는 어린 왕의 즉위와 대비의 수렴청정이 자주 있었지만, 신라는 처음이었다. 결국 왕권은 약화하고 귀족과 호족이 발호하는 계기가 되었다. 780년 선덕왕宣德王 즉위로 시작한 신라 하대下代에는 더 이상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건축물이 들어서지 않았다. 그만큼 정치와 사회는 어지러워졌기 때문이다.
궁성은 쿠데타와 반역, 암살의 도가니가 되었고, 지방민은 중앙 권력의 약화와 부패에 질려 호족 편으로 돌아섰다. 말세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륵 신앙이 유행하고, “내가 미륵이다.” 또는 “미륵님의 가호를 받고 있다.”라고 외친 궁예弓裔와 견훤甄萱 등의 군벌들이 득세하며 고구려와 백제를 다시 세웠다.
927년 금성 일대 정도로만 쪼그라든 신라를 견훤의 군대가 급습했다. 포석사鮑石祠에서 나라를 위해 제를 지내던 경애왕景哀王은 사로잡혀 자결하고, 이종사촌 형제인 김부金傅가 즉위하니 바로 신라의 마지막 56대 임금 경순왕敬順王이다. 견훤의 경주 함락으로 인해,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한 번도 수도가 함락된 적이 없음을 자랑해 온 신라 왕실의 권위는 바닥으로 추락했고, 신라는 사실상 멸망했다. 그로부터 8년 뒤 경순왕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에게 항복함으로써 천 년 제국 신라는 문을 닫았다.
금성에서 경주로
경주慶州는 신라의 처음과 끝을 함께한 도시였다. 신라 때는 서라벌徐羅伐, 금성金城이라 했다. 서울이라는 단어의 유래를 이 서라벌에서 찾고 있다. 이웃한 고구려와 백제가 계속 수도를 옮겼음을 생각하면 이례적이다.
신라와 서라벌
경주는 신라라는 나라의 수도라기보다는, 서라벌이라는 읍성이 확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제1 기이紀異 편 신라 시조 혁거세왕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나라 이름을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지금 경京 자의 뜻을 우리말로 서벌이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이라 하고 더러는 사라斯羅 또는 사로斯盧라고도 하였다. (해석 출처 : 한국 고대 사료 DB)
서라벌과 신라 둘 다 사로국, 사라 등 ‘ㅅㄹ’ 계통의 동일 어원으로 지증왕智證王 때 국호를 ‘덕업일신德業日新 망라사방網羅四方’에서 따와서 신라라고 했지만, 고유어를 한자로 바꾼 정도의 의미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하나의 도시에서 시작해 영역 국가로 성장했고 도시 이름이 곧 나라 이름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지구 반대편의 도시 로마와 로마 제국의 관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 신라와 로마는 실크로드의 양극단이었지만 서로 교류가 있었다.
경주의 도시 계획은 처음 자연 발생적인 상태부터 시작해, 시대 변천에 따라 꾸준히 성장하면서 부분적으로 개편된 구역이 혼재해 있다. 그래서 계획적이고 네모반듯한 모양의 동아시아 주변국들 수도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발전하였다.
신라 멸망 이후
고려와 후백제의 패권 전쟁은 이 경주를 얻기 위해서였고, 이후 신라의 항복을 받은 왕건은 경사스러운 도시란 의미로 경주慶州라 하였고, 고려高麗는 안동대도독부安東大都督府, 동경東京 등으로 부르며 존중하는 뜻을 보였다. 하지만, 천 년 왕국 신라의 수도였고 문명의 중심지였던 경주의 사람들이 북쪽 변두리에서 장사로 번 돈을 밑천으로 왕이 된, 출신도 미천한 이들의 지배를 고분고분 받아들일 리가 없었기에 좀처럼 고려에 대한 충성심을 쉽게 가질 수 없었다.이후 경주 출신 최승로崔承老는 고려 체제 개혁과 정비의 주역이 되었고, 경주 출신 김부식金富軾은 묘청의 난을 진압하고, 신라를 삼국의 중심으로 서술한 『삼국사기三國史記』 편찬의 주역이 되었다. 이후 무신 집권기의 이의민李義旼은 스스로 경주의 아들로 자처하며 신라 부흥을 내건 남적南賊과 선이 닿아 있었다. 최충헌崔忠獻은 전격적으로 이의민을 암살하고 남적을 진압하였는데, 13년이나 걸릴 정도로 그 뿌리가 깊었다. 이후 동경을 경주로 격하, 소속 현도 마구 잘라내어 규모를 축소하고, 안동과 대구를 높여 경주를 견제하게 했다. 결국 1238년 몽골 제국의 침입으로 황폐해지고, 경주의 상징인 황룡사 9층 탑도 소실되었으며 고려 말 왜구의 침입으로 유적은 사라지고 잊히면서 점점 퇴락하게 되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지는 동안 경주에는 웅대하고 화려한 대도시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불국사는 돌 기단만 남은 폐허가 되고 석굴암은 묻힌 채 존재도 잊혔고, 건물은 모두 사라지고 연못만 남아 있던 월지는 그 이름조차 잊혀 ‘안압지’雁鴨池라고 불렸다. 지금은 동궁과 월지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경상도 내에서 경주의 현재 위상
조선朝鮮에 들어서는 경상도라는 도의 명칭이 경주와 상주에서 따올 정도로 중요한 도시로 다시 두드러졌다. 조선 시대 경주는 부府로 지정되었고, 경주부의 수장인 부윤府尹은 종2품으로 도지사 격인 관찰사와 동급이었다. 지금으로 본다면 광역시급 지위로 경상도에서 가장 큰 도시임과 동시에 안동시와 함께 영남 남인의 구심점이자 대표적인 양반 도시가 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경주가 배출한 걸출한 학자인 회재 이언적李彦迪을 모시는 옥산서원玉山書院이 들어서면서 영남 유림을 양성하는 주된 보금자리가 되었다. 이후 중심 도시로 살아나면서 폐허가 된 불국사 등 고찰들도 일부 다시 지어졌다.
대일 항쟁기는 경주에게 양날의 칼이기도 했다. 오랫동안 잊히거나 방치된 유적들이 발굴되거나 복원되었다. 석굴암은 1907년에 발견되어 1912년부터 3년간 발굴, 복원되었고, 금관총金冠塚, 금령총金鈴塚, 서봉총瑞鳳塚 등의 발굴 조사가 있었다. 불국사의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도 다시 쌓았다. 천 년 고도 경주가 부활한 것이다. 그러나 석굴암과 불국사의 복원이 어설퍼서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남겼고, 다보탑多寶塔 석사자상石獅子像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재가 일본으로 빼돌려졌다. 일제는 경주를 유흥 도시로 키워서 유곽과 술집들이 옛 성터나 절터에 빼곡히 들어서기도 했다.
그러나 해방 이후 문화 유적이 많다는 특성으로 건축물 규제 및 고도 제한이 걸려 있어 시가지를 개발하기가 어려워졌고, 바다와 이웃한 해안 도시이지만, 대규모 항만 조성 또한 어려웠다. 그래서 산업 발전이 미흡해지면서 이웃한 공업 도시인 포항시와 신라 시대에는 경주의 무역항 역할을 했던 울산광역시가 대신 성장해 버렸다.
여기서 경주가 해안 도시라는 점에 의아심을 가질 수 있는데,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이 어디 있는지 생각해 보면 이해될 것이다. 문무대왕릉이 있는 곳이 바로 봉길 해수욕장이다. 그 옆에는 천년 고도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게 월성 원자력 발전소와 대표적인 기피⋅혐오 시설인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이 있다.
한때는 수학여행도, 신혼여행도 으레 경주로 가던 적이 있었다. 한때 국내 관광업의 중심지로 떠오르기도 했지만,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고 관광 수요도 다변화되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다. 고적 답사보다는 서울 인사동이나 전주 한옥 마을처럼 일정한 주제에 맞춰서 구경하고, 맛보고 즐기는 여행이 주류가 되면서 관광업도 빛을 잃어가고 있다. 이제 천 년 고도 경주는 과거 웅비했던 신라인의 문화적 기상을 되찾기 위한 새로운 방향 모색이 필요하다. 문화 관광과 산업 개발이라는 선택지를 넘어서는 조화로운 해결책을 찾아내야 할 때가 왔다.
경주의 지형
또한 기계천杞溪川이 합류하는 안강읍安康邑 일대에도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면적 자체는 경주 분지보다도 더 넓다. 다만 산내면山內面은 형산강이 아닌 낙동강洛東江, 그중에서도 동창천東倉川 유역으로 경주시 다른 지역과는 지리적으로 구분된다.
북천과 남천 사이에는 경주 시내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태종로太宗路와 분황로芬皇路가 엇갈리지 않게 뻗어 있는데, 이 두 길을 기준으로 남쪽은 옛 서라벌 영역이고, 북쪽은 오늘날의 경주 시가지다. 남쪽 서라벌 구역의 동쪽은 황룡사皇龍寺, 분황사芬皇寺, 월성月城(반월성半月城), 월지月池(안압지雁鴨池), 계림鷄林, 첨성대瞻星臺, 석빙고石氷庫, 향교鄕校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라벌 시대의 왕궁, 관아, 사찰 구역으로 그 모서리에 오늘날의 국립 경주 박물관이 있다.
서쪽에는 박혁거세의 오릉五陵, 대릉원大陵苑이 있는 황남동, 쪽샘지구라 불리는 황오동, 인왕동의 고분古墳들이 퍼져 있고 태종로 건너 노동동, 노서동 시가지가 깊숙이 들어가 있다. 노동동과 노서동에는 금관이 출토된 금관총, 금령총, 서봉총, 그리고 신라 고분 중 가장 규모가 큰 봉황대鳳凰臺가 있다. 그러니까 경주는 도심 속에 신라 고분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도시가 팽창하면서 시가지가 신라 고분 영역으로 파고들어 온 것이다.
그런데 이 노서동路西洞과 노동동路東洞의 지명 유래는 정말 싱겁다. 이 지역은 거대한 신라 고분 약 20기가 모여 있는 곳으로 본래 큰 길이 없었다. 그러다 사람들이 몰려들어 살면서 봉황대와 금관총 사이로 시내와 연결되는 길을 냈다. 길을 내면서 길 동쪽은 노동路東, 길 서쪽은 노서路西라고 불러 왔는데, 이를 1914년에 행정구역으로 삼으면서 노동리와 노서리로 명명했다고 한다. 참으로 무개념에 무미건조한 동네 이름이 되어 버렸다.
경주 시내 남쪽이 신라의 왕실과 고분 구역이라면, 북쪽은 민가 구역으로 시장, 학교, 병원, 소방서, 경찰서 등이 모두 모여 있다. 신라 고분은 경주 시내뿐 아니라 외곽 동서남북으로 널리 퍼져 있는데, 시내에 있는 것은 고신라 시기(마립간까지의 시기)이고, 교외에는 후신라(통일신라) 시기의 무덤이다.
경주는 분지 지형이라 여름에 몹시 덥다. 위도상 남쪽이고 동해 근처라 겨울철에 다른 지역보다 덜 춥다는 장점은 있지만, 비나 눈이 잘 안 내려 산불 위험이 있고, 많은 활성단층이 지나가는 길목에 놓여 있는 곳이라 소규모, 중규모의 지진地震이 한국 내에서 상당히 잦은 편이다. 신라 시절에도 경주에서 가끔 지진이 났는데, 신라 중대中代 시기의 마지막인 혜공왕 때에 극심한 지진이 있었다고 한다.
또 다른 경주 이야기
동경이
경주에는 토박이 격인 견종犬種으로 동경이가 있다. 기록상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한국의 토종개인데, 고려 시대에 경주가 ‘동경東京’으로 불리기도 했던 만큼 ‘동경이’라는 이름은 이 지명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머리가 명석하고 훈련 습득 능력이 매우 뛰어난 동경이는 꼬리가 매우 짧거나 거의 없는 견종인데, 경주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지만 일제 강점기를 지나면서 멸종 위기에 처했다. 해방 후에도 국내에서는 진돗개와 풍산개, 삽살개 정도만 토종견으로 인정하였을 뿐 동경이는 토종견으로 공인되지 못하다가, 2010년이 되어서야 엄격한 심사를 거쳐 한국의 네 번째 토종견으로 공인되었고 2011년에는 아시아 견종 인증까지 마쳤다. 2012년 11월 16일에는 천연기념물 제540호로 지정되었다. 2018년 1월 1일 기준으로 동경이 개체수는 487마리였는데, 전국적인 분양 실시로 향후 개체수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경주를 본으로 하는 성씨
우리나라에서 인구가 많은 5대 성씨(김金, 이李, 박朴, 최崔, 정鄭)는 모두 본관本貫을 경주로 하고 있다. 이외에도 87개 성씨가 경주에 본관을 두고 있으며, 빙冰씨와 봉鳳씨는 아예 경주 단본單本이다.조선 선조 때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항복李恒福은 경주 이씨이다. 그의 봉호로 알려진 ‘오성鰲城’은 바로 경주의 별호別號로, 본관인 경주의 별호를 따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의 작위를 받았다. 그의 후손으로 대일 항쟁기에 신흥무관학교 등을 세운 이회영李會榮 형제가 있다.
오덕종시설五德終始說로 본 왕조 교체의 모습
2024년 계엄 선포, 탄핵, 조기 대선 등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드는 생각이 있다. 흔히 신라는 ‘황금의 나라’라고 불렸다. 신라 김씨 일족은 북방 유목민 흉노족匈奴族의 후손으로 전해진다. 신라는 금金의 기운이 강한 나라라고 할 것이다. 이런 신라의 뒤를 이은 나라는 후삼국 쟁패 시기를 평정한 고려이다.
고려의 주된 건국 세력은 서해와 남해를 중심으로 한 해상 무역 세력으로 이들은 용의 자손이라고 하였다. 용은 물을 다스리는 신수神獸로 고려는 물[水]의 기운이 강한 나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를 이은 나라는 ‘목자득국木子得國’이라는 참언讖言에 등장하는 조선이다. 조선의 왕성이 ‘자두 리李’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목木의 기운이 강한 조선이 망하고 들어선 대한민국은 과연 어떤 기운의 나라일까?
동양에는 오덕종시설五德終始說이라는 게 있다.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 등 오행五行의 순서대로 역사가 전개되고 그 과정이 순환⋅반복된다는 설이다. 이 오행에 대응하여 인간 사회에서는 오행의 덕 가운데 하나를 갖추어 왕조를 열게 되고, 모든 왕조는 이 오행의 순서에 따라 -주로 상생相生하는 방향으로- 흥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위에서 보았듯 신라 왕실이 금金을 상징한다면, 고려의 황실은 물[水]의 기운을 상징하고 있다. 바로 금생수金生水의 모습이다. 고려와 조선은 물이 나무를 생하는 수생목水生木이니. 이 이론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목생화木生火로 화火의 기운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은 통일이라는 과제와 함께 여러 가지 문제들을 안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새롭게 거듭나야 할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여러 문제를 극복하고 장차 세계 중심국으로 우뚝 설 우리 대한민국의 기운은 화생토火生土, 즉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토土의 세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천 년 제국 신라의 도읍지 경주를 보면서 떠오른 생각이다. ■
〈참고문헌〉
* 『역주본 환단고기』, 안경전, 2012, 상생출판
* 『30개 도시로 읽는 한국사』, 함규진, 2023, 다산초당
* 『온 국민을 위한 대한민국 역사교과서 1』,대한민국 역사교과서 편찬위원회, 2024,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 『고려사의 재발견』, 박종기, 2021, 휴머니스트출판그룹
* 『역사 저널 그날』, KBS 역사저널그날 제작팀, 2021, 민음사
* 『국토박물관 순례2』, 유홍준, 2023, 창비
* 『역주본 환단고기』, 안경전, 2012, 상생출판
* 『30개 도시로 읽는 한국사』, 함규진, 2023, 다산초당
* 『온 국민을 위한 대한민국 역사교과서 1』,대한민국 역사교과서 편찬위원회, 2024,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 『고려사의 재발견』, 박종기, 2021, 휴머니스트출판그룹
* 『역사 저널 그날』, KBS 역사저널그날 제작팀, 2021, 민음사
* 『국토박물관 순례2』, 유홍준, 2023,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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