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의 잃어버린 고리, 북부여
[열두 개 도시로 찾아가는 국통 맥 여행]
이해영 객원기자 (서울관악도장)
우리나라 역사의 전체적인 맥락을 올바로 살펴보기 위해서는, 흔히 고구려⦁백제⦁신라로 알려진 삼국 역사 이전의 국통 맥이 어디에서 비롯되고 이어져 왔는지를 정확히 짚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역사의 ‘잃어버린 고리’라고 불리는 ‘북부여北夫餘’를 기점으로 삼아 단군조선 등 그 이전의 상고 역사 흐름을 더듬어 오르며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동북아의 패자이자 단군조선의 적자嫡子인 고구려 광개토태왕 비문의 첫머리에 나오는 글이다. 고구려의 뿌리가 북부여임을 천명闡明하고 있다. ‘부여’라는 이름이 우리 역사서에 처음 나타난 시기는 단군조선檀君朝鮮의 1세 단군인 단군왕검 때였다.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군기檀君紀」에는 단군왕검이 나라를 다스린 지 40여 년에 ‘설유揳猶의 난’이 있었고, 이때 넷째 아드님인 부여夫餘로 하여금 이를 평정케 한 뒤, 북방의 땅을 더하여 제후국 국왕으로 봉하고 우수홀에 자리 잡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그 나라의 이름이 ‘부여夫餘’로 전해지고 있어 학자들은 이 부여를 ‘원시부여’라 부른다.
흥망성쇠는 어느 왕조나 적용되기 마련인데, 이 삼한관경제가 무너지면서 대제국 단군조선의 국운이 쇠락해져 갔다. 제44세 구물丘勿 단군 때 국호를 ‘진조선’에서 ‘대부여大夫餘으로 바꾸며 국운을 일신해 보려 했다. 하지만 대부여도 47세 고열가高列加 단군 때 멸망하게 되고, 이 단군조선의 영토에서 새로운 나라가 그 맥을 이었다. 바로 해모수解慕漱가 세운 북부여北夫餘이다.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 성제의 고조부인 해모수는 BCE 239년 4월 8일 대부여의 북쪽 웅심산熊心山, 즉 지금의 지린성吉林省 수란(서란舒蘭)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서란은 대일 항전기 당시 석주 이상룡李相龍 선생이 생애를 마감했던 곳으로, 하얼빈에서 남쪽으로 125킬로미터 떨어져 있는데 지금은 중국의 소도시로 편제되어 있다.
당시 해모수는 은밀히 수유국須臾國과 약속하고 옛 도읍지 백악산 아사달을 습격해 점거한 뒤에 스스로 ‘천왕랑天王郞’이라 칭하였다. 그리고 당시 마지막 단군인 47세 고열가 단군의 빈자리를 대신하던 오가五加 부족장의 6년 공화정을 철폐하였다. 이에 사방에서 해모수의 명을 따르고 추대하였다.
‘북부여’라는 명칭은 대부여 강역 중 북녘땅인 만주 지역을 중심을 나라를 세웠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대부여의 수도가 장당경 아사달, 즉 지금 중국의 동북 3성 지역 중 하나인 랴오닝성遼寧省 카이위안시(개원시開原市)였던 것과도 관련이 있다. 해모수는 단군조선의 정통을 계승하여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는 의지를 담아 국호를 북부여로 하였다.
이 시기는 단군조선의 번조선과 막조선에 큰 변화가 있어 민족의 대이동이 일어나던 때였다. 그리고 북부여 시절 중원 대륙은 한漢나라 무제武帝 유철劉撤의 치세기였다. 한 무제는 모든 국력을 쏟아 동방의 대국 단군조선, 즉 북부여를 침공하였다. 이때 민족의 존망이 담긴 최대의 위기 상황에서 나라를 구한 영웅이 등장한다. 바로 고두막한高豆莫汗이다. 고구려 추모 성제가 추앙하며 본으로 삼은 부여의 동명왕東明王이 바로 이분이다. 이 고두막한의 따님이 신라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어머니인 파소婆蘇이다.
이후 북부여의 마지막 단군인 6세 고무서高無胥 단군은 스스로 천제의 아들이라 밝힌 고추모高鄒牟(고주몽高朱蒙)를 자신의 둘째 딸 소서노召西奴와 혼인시켰다. 소서노는 고구려 건국에 큰 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이후 아들 비류沸流, 온조溫祚와 함께 백제百濟(남부여)를 연 인물이다.
이를 종합해 보면 북부여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시조가 모두 나온 우리 국통 맥의 허브라고 할 수 있다. 북부여의 멸망 이후 고구려高句麗와 대진국大震國(발해渤海) 등 후속 국가들이 그 유산을 계승 발전시켜 나간 것은 부인하지 못할 역사적 사실이다. 이처럼 북부여는 한민족의 고대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나라임에도, 이를 우리가 잘 알지 못하니 안타까울 뿐이다.
676년 11월에 신라新羅는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 중국 당唐나라의 수군을 섬멸하여 이 땅에서 당나라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냈다. 신라 제30대 문무왕文武王은 비로소 당나라와 치열한 전쟁을 승리로 마감한 것이다. 660년 백제 사비성 함락, 668년 고구려 평양성 함락 이후 끊임없이 거듭된 전쟁의 마침표를 찍으면서 삼한을 통일하는 대업을 이루었다. 532년 금관가야, 562년 대가야가 신라에 멸망한 이후 100여 년 만의 일이었다.
이때 문무왕을 비롯한 신라 지도부가 내세운 명분이 ‘삼한일통三韓一統’이다. 즉 우리는 본래 한 나라에서 나왔으며 이제 다시 하나로 합해진 것이다. 여기서 ‘삼한’은 한반도에 있었던 남삼한南三韓(진한辰韓⦁마한馬韓⦁변한弁韓)을 통칭하는 말로 불려 왔지만, 본래의 의미는 단군조선의 영역인 북삼한北三韓(진한辰韓⦁번한番韓⦁마한馬韓)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신라는 단군조선의 본래 영역을 회복하지는 못하였으나, 그 영토의 사람과 문화를 하나로 아우르게 되었고, 이를 통해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을 다독이며 하나의 나라로 만들어 나간 것이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소위 ‘단군신화’를 들어 왔다. 하늘의 신 환인의 아들 환웅이 인간 세상에 내려오고, 곰이 쑥과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되어 환웅과 혼인해 단군을 낳았다는 이야기 말이다.
이 신화적 상징이 담긴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어서 우리가 곰의 자손이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망발이다. 진실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단군조선을 세운 이는 초대 단군왕검檀君王儉(신인왕검神人王儉)이시다. 초대 단군이 환웅의 아드님인 것은 맞다. 하지만 그 환웅이 초대 환웅님은 아니다. 최초의 환웅께서 배달을 개국한 지 1,500여 년이 지난 18세 거불단居弗檀 환웅의 아드님이 곧 단군왕검이시다. 초대 단군께서는 14세부터 24년간 웅씨 족의 비왕裨王으로 있으면서 제왕 수업을 받았고, 38세에 천제의 아들로 추대되어 제위에 올랐다. 당시는 배달倍達 말기의 혼란한 시기였는데 이를 잠재우고 구환족九桓族 전체를 하나로 통일하여 한민족 전성기인 조선朝鮮을 열게 되었다. 이를 훗날 태조 이성계가 세운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 ‘고古조선’이나 ‘단군조선’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본고에서는 ‘단군조선’이라 칭한다.
단군왕검은 조선의 개국시조로 삼신상제三神上帝님께 천제天祭를 올렸다. 우리 역사를 보면 역사의 주요한 변곡점이나 중요한 일에 직면한 때에는 늘 상제님께 천제를 올렸다. 단군께서는 쑹화강(송화강松花江) 유역(지금의 헤이룽장성黑龍江省 하얼빈哈爾濱)의 ‘아침 태양이 빛을 비추는 땅’인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였다. 이 시기는 BCE 2333년부터 BCE 1286년 21세 소태蘇台 단군 때까지 1,048년간 지속되었다. 이때를 단군조선 제1왕조 송화강 아사달 시대, 삼한(진한⦁마한⦁번한)이라고 부른다.
이때 단군조선은 진한辰韓(지금의 만주滿洲 지역)에 대단군이 계시고, 번한番韓(지금의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서부와 허베이성河北省 북부를 비롯한 산둥성山東省에서 양쯔강揚子江 유역까지의 동부 지역)과 마한馬韓(지금의 한반도)에 부단군을 두었고 주변 64개국을 통치한 광대한 제국이었다. 이 삼한이 바로 북삼한北三韓이며, 이후 단군조선이 몰락한 후 유민들이 한반도로 내려와 다시 삼한을 세우니 이를 현재 교과서에서 배우는 남삼한南三韓이라고 한다.
신라가 이 북삼한을 염두에 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삼한을 하나로 통일한다는 기치를 내세웠던 것은 사실이다. 하나였다가 갈라진 후 다시 통합하는 이 과정과 이후 통일의 모습으로 200여 년간 전성기를 누린 점에서 현재 남북한이 대치하고 있는 우리 대한민국에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단군조선의 영역이 가장 넓었을 때는 만주 대륙과 한반도를 중심으로 북으로는 러시아의 바이칼호, 서로는 중국 산시성陝西省, 남으로는 산둥성山東省을 포함한 양쯔강 유역까지였다. 동아시아 전체를 아울렀다고 할 수 있다.
이후 22세 색불루索弗婁 단군이 정변政變을 일으켜 남서쪽의 백악산白岳山(녹산鹿山) 아사달, 지금의 지린성 창춘長春으로 천도하였다. 이 시기는 BCE 1285년부터 43세 물리物理 단군 때인 BCE 426년까지 860년간 지속되었다. 이때를 단군조선 제2왕조 백악산 아사달 시대, 삼조선三朝鮮 시대라고 한다. 색불루 단군은 국정 쇄신을 위해 삼한을 삼조선(진조선眞朝鮮⦁번조선番朝鮮⦁막조선莫朝鮮) 체제로 바꾸었다.
단군조선 통치 체제의 근간인 삼한관경제는 신교神敎의 삼신三神 사상에 따라 나라의 영역을 셋으로 나누어 다스린 것이다. 6세 달문達門 단군 때 신지神誌(사관史官의 관직명) 발리發理는 한민족의 뿌리를 노래한 대서사시 「서효사誓效詞」(또는 「신지비사神誌秘詞」)를 지었다.
여기에서 삼한의 형세를 저울대와 저울추 그리고 저울판과 같다고 하면서 저울판은 마한의 수도 백아강白牙岡(지금의 평양), 저울추는 번한의 수도 안덕향安德鄕(지금의 허베이성 탕산唐山)이고 저울대는 진한의 수도 소밀랑蘇密浪(송화강 아사달, 하얼빈)이다. 번한은 험독險瀆, 낭야성琅耶城, 탕지湯地, 개평蓋平, 한성汗城 등으로 수도를 옮겼다. 마한은 처음부터 끝까지 백아강이었다.
대단군을 중심으로 이 세 나라의 수도가 하나의 저울이 되어 균형을 유지하는 동안에는 단군조선이 융성하였다. 그 핵심은 병권兵權을 대단군만 쥐고 있느냐 부단군까지 쥐게 되었느냐였다. 병권을 부단군까지 쥐게 되면서 삼한관경제는 무너졌고, 그 과정에서 단군조선은 몰락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이때 오가五加의 우두머리가 모두 대답하며 추천한 인물이 바로 서자부庶子部 부족의 수장首長인 환웅桓雄이었다. 그들은 환웅이 어질고 용기와 지혜를 겸비한 인물로 일찍부터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세상을 개혁하려는 뜻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추천의 의사를 밝혔다. 이에 환인께서는 환웅에게 종통과 국통 계승의 상징으로 천부天符와 인印 세 종류를 주시며 다음과 같이 당부하셨다.
환국의 마지막 환인께서는 환웅을 환국의 정통 계승자로 정하였고 그 증표가 바로 천부天符와 인印이다. 천부란 환인이 ‘세상을 다스리는 권한의 표징’으로 내려 주신 태고의 문서로 흔히 알고 있듯이 무속巫俗 세계에서 쓰는 방울이나 거울 같은 물건은 아니다. 그리고 인印이란, ‘환국의 종통을 전하는’ 사실을 인증하는 도장으로 임금의 옥새와 같은 것이다.
환웅천황님이 환인천제에게 정통으로 이어받은 이념은 바로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라.’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이다. 대부분 단군조선의 국가 이념으로 알고 있지만, 이는 잘못이다. 홍익인간 사상은 사실 9천 년 전 환국의 통치 이념으로 천지 광명의 뜻과 대이상을 성취한 인간이란 뜻이 있다. 거발환居發桓 환웅은 재세이화在世理化를 기반으로 홍익인간을 실천하였다. 다시 말해서 삼신상제님의 진리, 즉 신교로써 세상을 다스리고 깨우쳐 널리 인간 세계를 이롭게 하는 것이다.
환웅천황과 3천의 무리가 향한 곳은 동방의 태백산, 즉 지금의 백두산 일대이다. 환웅천황은 이 지역을 천명 받고 나라를 연 하늘 평야, 즉 ‘역사의 개척지’라는 뜻으로 천평天坪이라고 하였다. 이곳에 우물을 파고 그곳을 중심으로 청구靑邱에 농사짓는 땅을 구획하여 민생을 도모하였다. 그리고 백두산 신단수神檀樹 아래에서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려 나라 세움을 고하였다.
환웅천황님과 3천 명의 개척단이 터를 잡은 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성산이다. 백두산은 백산白山 이외에도 삼신산三神山, 개마산蓋馬山, 불함산不咸山, 장백산長白山등으로 불렸다. 또한 인류 구원의 완성이며, 모든 진리 도맥의 완성인 시루산(증산甑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인근에 자리 잡은 배달국 사람들은 아침에 동산에 올라 태양을 경배하고, 밤에는 달을 맞이하는 광명光明의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터 잡은 백두산에 대해서 『삼한비기三韓祕記』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진산은 한 국가나 도시 또는 각 지방에 있는 주산主山이라는 뜻으로, 백두산은 우리 배달국 환웅천황님과 제세핵랑군 3천 명이 터전을 잡고, 홍익인간의 큰 뜻을 펴신 민족의 성산이다.
한편 이때 환웅천황을 따랐던 무리 3천을 이유립李裕岦 선생은 ‘제세핵랑군濟世核郞軍’이라 하였다. 제세핵랑濟世核郞은 세상을 건지는(濟世) 핵심이 되는 랑(核郞)이라는 뜻으로 낭郞은 삼신상제님을 수호하는 관직 이름이기도 했다. 환국 이래 환웅, 단군 시대에 나라를 이끌어 가는 지도층이 이 제세핵랑에서 나왔다.
이들은 삼신상제님께 올리는 제사를 주관한 신교의 핵심 일꾼으로, 신교의 가르침을 받들어, 신교의 성소인 소도의 경당扃堂에서 문무를 겸전하였다. 시대에 따라 단군조선의 국자랑國子郞, 북부여의 천왕랑天王郞, 고구려의 조의선인皁衣仙人, 백제의 무절武節, 신라의 화랑花郞, 고려의 재가화상在家和尙 등으로 호칭은 다르지만, 그 전통을 면면히 이어 오고 있다. 최근세에는 갑오 동학혁명, 항일 구국 운동과 광복군의 독립운동 등 민족의 위기 때마다 이 낭가郎家의 정신은 유감없이 드러나 불의를 뿌리 뽑고 정의를 실현하였다.
백두산에 도착한 환웅은 나라 이름을 배달倍達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흔히 우리를 부로는 배달겨레라는 말은 실질적인 한민족사의 첫 번째 나라인 배달에서 그 근원을 찾아볼 수 있다. 외부에서는 구려九黎, 청구靑丘라고도 불렀다.
‘배’는 밝다는 뜻이다. 고대어는 한자의 의미보다는 음가音價에 따라서 그 의미가 정해지기도 한다. ‘달’은 땅을 상징한다. 우리가 응달, 양달 할 때 그 달이 땅을 가리키는 말로 결국 배달은 광명의 동방 땅을 뜻한다. 배달을 ‘땅의 광명[地光明]’을 가리키는 ‘단檀’ 자를 써서 단국檀國이라고도 부른다. 그래서 환국과 배달을 합쳐서 환단桓檀 시대라 통칭하기도 한다.
건국 초기 배달의 강역은 도읍지를 크게 벗어나지 않아서 도읍지와 국호는 서로 상통하였다. 거발환 환웅은 도읍 이름을 신시神市라 하였는데, 이는 신의 도시라는 뜻이다. 신시 배달은 환국의 광명 사상을 그대로 계승하여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광명개천光明開天의 3대 정신으로 백성들을 교화하며 1,565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제 우리는 전 국민이 왜곡된 채로 잘못 알고 있는 우리 민족의 시원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아마도 한 번쯤은 들어 보았을 ‘단군신화’에 관한 것이다. 환웅천황께서 마늘과 쑥을 주며 곰과 호랑이를 동굴에 들어가게 했는데, 곰만 여자가 되었고 그 아들인 단군께서 조선을 건국했다는 이야기 말이다. 과연 이 신화 같은 이야기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그 진실은 이렇다.
환웅천황이 동방 백두산 문명을 새로 세울 당시 ‘백두산에서 송화강’에 이르는 만주 일대에는 본래 거주하던 원주민 호족虎族과 새로 이주해 온 웅족熊族이 살고 있었다. 호족은 탐욕이 많고 잔인하여 오로지 약탈을 일삼았다. 웅족은 어리석고 괴팍하며 고집이 센 편이라 함께 어울리며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비록 같은 곳에서 살았으나 두 부족은 세월이 지날수록 사이가 멀어졌다. 서로 물건을 빌리거나 빌려주지도 않고 혼인도 하지 않으며, 매사에 서로 불복하여 함께 같은 길을 가지 않았다.
이에 환웅천황께서 신령한 덕으로 통치하심을 알고 있던 웅족의 여왕은 무리를 거느리고 환웅천황을 뵙고서 “원하옵건대 저희에게 살 곳을 내려 주십시오. 저희도 하나같이 삼신의 계율을 따르는 환족의 백성이 되고자 하옵니다.”라고 간청하였다. 이를 들은 환웅께서는 “가히 가르칠 만하도다.” 하시고, 신령한 주문의 도술로써 환골換骨케 하여 정신을 개조시키셨다.
이때 먼저 삼신께서 전해 주신 정해법靜解法(몸과 마음을 고요히 수행하여 해탈하는 법)으로 그렇게 하셨는데, 쑥 한 묶음과 마늘 스무 줄기를 영험하게 여겨 이를 주시며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말고 기도하여 참된 인간이 되는 길을 알려 주셨다. 쑥은 몸속의 냉冷을 치료하고, 마늘은 구워 먹으면 마魔를 물리친다고 한다. 마늘은 각종 질병의 치료제로 쓰이며 육체의 힘을 솟아나게 하는 신비로움이 있다는 믿음으로 고대부터 현대까지 여러 가지 용도로 쓰여 왔다.
이에 웅족뿐 아니라 호족도 함께 쑥과 마늘을 먹으면서 삼칠일三七日, 즉 21일 수행을 하며 외부와 만남을 끊고 지냈다. 웅족은 능히 굶주림과 추위를 참아 내고 계율을 지켜 온전한 인간의 참모습을 얻었지만, 호족은 방종하고 게을러 계율을 지키지 못하여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후에 웅족 여인[熊女]들이 시집갈 곳이 없어 매일 신단수 아래에 와서 주문을 외우며 아이 갖기를 빌었다. 예전에 아이를 갖기 위해 명산대천에서 100일 정성 공부나 치성을 드리던 모습과 유사하다. 이에 환웅께서 이들을 임시로 환족으로 받아들여 환족 남자들과 혼인하게 하였고 아이를 낳으면 환桓의 핏줄을 이은 자손으로 입적시켰다. 이렇게 환족과 웅족은 협력하여 ‘신의 도시’란 뜻의 신시神市를 수도로 하는 배달국을 흥왕하게 하였다. 이것이 배달과 단군조선의 바른 역사인 『단군사화檀君史話』의 내용이다.
우리의 국통 맥은 환국桓國-배달倍達-단군조선檀君朝鮮으로 이어진다. 우리나라 족보가 그렇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역사를 전해 주는 사서가 『환단고기桓檀古記』이다. 『환단고기』에서는 인류 최초의 나라이자 동서 인류 최초의 문명국인 환국의 시조와 정치, 문화, 생활상, 그리고 고대 환국 사람들이 지녔던 삶의 가장 소중한 가치, 나라가 얼마나 지속되었는지 등을 소상히 밝혀 주고 있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환국은 지금으로부터 9,200년 전에 건국됐다. 중앙아시아 동부, 천산天山을 중심으로 남북 5만 리, 동서 2만 리에 걸쳐 열두 나라로 구성되어 있었다. 또한 「삼성기三聖紀」 상上권과 하下권, 「태백일사太白逸史」의 〈환국본기桓國本紀〉에 의하면 중국 고대 문명은 물론 서양 문명의 근원이 되는 수메르 문명의 출원지가 바로 환국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국호인 한국韓國이라는 이름, 대한민국이라는 이름도 인류가 세운 최초의 나라인 환국에서 왔다. 『환단고기』 중 「삼성기」 상권의 첫 문장 ‘오환건국吾桓建國 최고最古’라는 구절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첫 나라를 선포하고 기록한 것이다. 환국은 광명한 삶을 인생의 가장 소중한 가치로 삼았다. 그래서 나라 이름도 광명을 뜻하는 환국이라 했다.
환국은 3,301년 동안 역사가 지속됐다. 오늘의 과학주의, 실증주의 사관은 유물론적 편향이 있어서 역사적 사실들의 이면, 즉 인류의 정신문화는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역사서들은 태고 문명이라 하면 그저 움집에서 열매나 따 먹고 소박하게 살던 문화로 그려 낸다. 그러나 환국 시대 사람들의 생활은 모두가 광명을 지향하면서 누구나 무병장수 문명을 누리던 삶이었다.
중앙아시아 일대를 강역으로 삼았던 환국 시대를 종식한 가장 중요한 요인은 기후氣候의 변화였다. 학자들에 의하면 중앙아시아 지역은 지금부터 수천 년 전에는 오늘날처럼 건조하지 않았다고 한다. 강우량이 풍부해 대단히 살기 좋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중앙아시아에는 적당한 비가 내려, 질 좋은 초원이 유지되고 살기 좋은 곳이 곳곳에 잔존해 있다.
환국의 기후가 전반적으로 건조해지고 사람들이 살기 어려워지면서 많은 주민이 환국의 동쪽과 서쪽, 남쪽으로 이주하였다. 배달을 세운 환웅족의 이주는 동쪽으로 옮겨간 경우이며 나중에 수메르 문명을 세운 수메르인들은 환국에서 서쪽으로 이주한 사람들이다.
환국이 사라지고 해당 지역이 건조화되면서 그 일대에는 물을 구할 수 있는 오아시스 지역이나 초원에만 사람들이 생존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예전과 같은 국가는 찾아보기 힘들게 됐고, 흉노凶奴(匈奴) 같은 유목 국가가 등장하여 실크로드를 지배하기 전에는 부족 지배 형태가 국가 체제를 대체했다. 최근 내셔널 지오그래픽 방송에서도 소개된 적이 있는 것처럼 환국 문명의 중심지였던 중앙아시아 동방 바이칼호 지역에서 인류 문명의 기원을 찾는 역사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어 그 연구 결과가 기대된다. 아시아 대륙을 지배했던 환국이 실재했음을 입증하는 유적과 유물은 앞으로 더 발굴될 것이다.
여기서 좀 더 나아가 보자. 지금으로부터 2만 5천 년 전 환국 이전의 인류 시원 문명국이 있었다. 바로 #마고성麻姑城 율국律國#이다. 이곳의 주인공은 #마고삼신#麻姑三神으로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 곳곳에 남아 있는 여신 문화의 주인공이다. 이에 대해서 『환단고기』 「삼성기」 하下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나반과 아만이 바로 마고성의 나반 대성부와 마고 대성모님이다. 이 마고성에서 인류 신선 문화가 시작되고 그 후손들이 이후 환족이 되어 환국을 열게 되었다. 마고성은 천하의 가장 큰 성[마고대성麻姑大城]으로 그 나라 이름이 율국律國이다. 율국은 우주의 조화 생명 그 자체인 ‘율려律呂’의 ‘율’을 사용해서 칭한 것으로 마고성의 율국은 율려 조화권을 내려 주는 신선 문명의 모체가 된다는 뜻이다.
그럼, 마고성의 위치는 어디였을까? 지금 러시아 바이칼호 북쪽에 네 개의 호수가 있는데 거기에서 북극해까지를 네 등분을 했을 때의 4분의 1 지점, 아주 신성한 곳에 있었다. 겨울에는 눈이 조금 흩날릴 정도로 온화하고 좋은 날씨였다. 주로 채집 생활을 하면서 고기를 잡기 위해서 몇 번 정도 사냥을 하고, 밤낮으로 수도를 하며 살았다.
전 세계 모든 창세 신화의 시작이 된 태고 시대 마고삼신은 대우주가 하나의 빛과 파동으로 일어난 기운을 뭉쳐 놓은 우주의 모체 소리를 바탕으로 조화신선 도통 문화를 처음 열어 주셨다. 조화의 문화, 신선 문화, 치유 문화, 영성 문화 등의 근원인 마고성 율국은 약 1만 년 전 #환국桓國 이전의 문명#으로 여성 지도자가 15세를 전하며 이어졌다. 이후 남성 중심 문화인 환국으로 맥이 이어져 현재까지 내려오게 된 것이다.
마고대성이 무너지는 날 사람들은 다시 한번 마고성의 모습을 되찾는 복본復本을 다짐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마고성의 역사는 신화와 전설이 되어 버렸지만, 155년 전 인간으로 오신 우주의 통치자 상제님께서는 그 잃어버린 인류의 원형 조화신선 도통 수행 문화, 곧 우주 빛꽃 선려화仙呂花와 선정화仙定花 수행법을 복원시켜 전해 주셨다.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인류 국통 맥의 기원을 찾았다면, 이를 바탕으로 향후 펼쳐질 미래의 중심지, 21세기의 마고성은 어떤 모습일지도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최종회에서 우주 변화의 원리와 한민족의 사명에 기반하여 알아볼 예정이다. ■
우리나라 역사의 전체적인 맥락을 올바로 살펴보기 위해서는, 흔히 고구려⦁백제⦁신라로 알려진 삼국 역사 이전의 국통 맥이 어디에서 비롯되고 이어져 왔는지를 정확히 짚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역사의 ‘잃어버린 고리’라고 불리는 ‘북부여北夫餘’를 기점으로 삼아 단군조선 등 그 이전의 상고 역사 흐름을 더듬어 오르며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 역사의 잃어버린 고리, 북부여



부여의 시작
“옛적 (고구려) 시조이신 추모왕鄒牟王께서 나라를 세웠는데, 추모 성제는 북부여北夫餘 출신으로 천제의 아드님이고,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따님이시다.”(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郎)
이는 동북아의 패자이자 단군조선의 적자嫡子인 고구려 광개토태왕 비문의 첫머리에 나오는 글이다. 고구려의 뿌리가 북부여임을 천명闡明하고 있다. ‘부여’라는 이름이 우리 역사서에 처음 나타난 시기는 단군조선檀君朝鮮의 1세 단군인 단군왕검 때였다.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군기檀君紀」에는 단군왕검이 나라를 다스린 지 40여 년에 ‘설유揳猶의 난’이 있었고, 이때 넷째 아드님인 부여夫餘로 하여금 이를 평정케 한 뒤, 북방의 땅을 더하여 제후국 국왕으로 봉하고 우수홀에 자리 잡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그 나라의 이름이 ‘부여夫餘’로 전해지고 있어 학자들은 이 부여를 ‘원시부여’라 부른다.
단군조선의 삼한관경제
한민족의 뿌리 역사라 할 수 있는 단군조선은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를 적용하여 통치 영역을 진한辰韓⦁번한番韓⦁마한馬韓의 삼한으로 나누었다. 만주 대륙과 중원 그리고 한반도 일대를 비롯한 동아시아 전역을 통치하였다. 만주 대륙의 진한은 대단군이 직접 통치하고, 중원 지역의 번한과 한반도 영역의 마한에는 부단군을 두었으나 병권兵權만은 진한의 대단군이 행사했다. 대단군이나 부단군은 혈육이 이어 가거나 새로운 능력자가 차지하기도 했다.단군조선의 쇠락과 북부여의 흥기
흥망성쇠는 어느 왕조나 적용되기 마련인데, 이 삼한관경제가 무너지면서 대제국 단군조선의 국운이 쇠락해져 갔다. 제44세 구물丘勿 단군 때 국호를 ‘진조선’에서 ‘대부여大夫餘으로 바꾸며 국운을 일신해 보려 했다. 하지만 대부여도 47세 고열가高列加 단군 때 멸망하게 되고, 이 단군조선의 영토에서 새로운 나라가 그 맥을 이었다. 바로 해모수解慕漱가 세운 북부여北夫餘이다.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 성제의 고조부인 해모수는 BCE 239년 4월 8일 대부여의 북쪽 웅심산熊心山, 즉 지금의 지린성吉林省 수란(서란舒蘭)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서란은 대일 항전기 당시 석주 이상룡李相龍 선생이 생애를 마감했던 곳으로, 하얼빈에서 남쪽으로 125킬로미터 떨어져 있는데 지금은 중국의 소도시로 편제되어 있다.
당시 해모수는 은밀히 수유국須臾國과 약속하고 옛 도읍지 백악산 아사달을 습격해 점거한 뒤에 스스로 ‘천왕랑天王郞’이라 칭하였다. 그리고 당시 마지막 단군인 47세 고열가 단군의 빈자리를 대신하던 오가五加 부족장의 6년 공화정을 철폐하였다. 이에 사방에서 해모수의 명을 따르고 추대하였다.
‘북부여’라는 명칭은 대부여 강역 중 북녘땅인 만주 지역을 중심을 나라를 세웠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대부여의 수도가 장당경 아사달, 즉 지금 중국의 동북 3성 지역 중 하나인 랴오닝성遼寧省 카이위안시(개원시開原市)였던 것과도 관련이 있다. 해모수는 단군조선의 정통을 계승하여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는 의지를 담아 국호를 북부여로 하였다.
북부여의 역사적 의미
이 시기는 단군조선의 번조선과 막조선에 큰 변화가 있어 민족의 대이동이 일어나던 때였다. 그리고 북부여 시절 중원 대륙은 한漢나라 무제武帝 유철劉撤의 치세기였다. 한 무제는 모든 국력을 쏟아 동방의 대국 단군조선, 즉 북부여를 침공하였다. 이때 민족의 존망이 담긴 최대의 위기 상황에서 나라를 구한 영웅이 등장한다. 바로 고두막한高豆莫汗이다. 고구려 추모 성제가 추앙하며 본으로 삼은 부여의 동명왕東明王이 바로 이분이다. 이 고두막한의 따님이 신라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어머니인 파소婆蘇이다.
이후 북부여의 마지막 단군인 6세 고무서高無胥 단군은 스스로 천제의 아들이라 밝힌 고추모高鄒牟(고주몽高朱蒙)를 자신의 둘째 딸 소서노召西奴와 혼인시켰다. 소서노는 고구려 건국에 큰 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이후 아들 비류沸流, 온조溫祚와 함께 백제百濟(남부여)를 연 인물이다.
이를 종합해 보면 북부여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시조가 모두 나온 우리 국통 맥의 허브라고 할 수 있다. 북부여의 멸망 이후 고구려高句麗와 대진국大震國(발해渤海) 등 후속 국가들이 그 유산을 계승 발전시켜 나간 것은 부인하지 못할 역사적 사실이다. 이처럼 북부여는 한민족의 고대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나라임에도, 이를 우리가 잘 알지 못하니 안타까울 뿐이다.
단군조선과 삼한관경제


676년 11월에 신라新羅는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 중국 당唐나라의 수군을 섬멸하여 이 땅에서 당나라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냈다. 신라 제30대 문무왕文武王은 비로소 당나라와 치열한 전쟁을 승리로 마감한 것이다. 660년 백제 사비성 함락, 668년 고구려 평양성 함락 이후 끊임없이 거듭된 전쟁의 마침표를 찍으면서 삼한을 통일하는 대업을 이루었다. 532년 금관가야, 562년 대가야가 신라에 멸망한 이후 100여 년 만의 일이었다.
이때 문무왕을 비롯한 신라 지도부가 내세운 명분이 ‘삼한일통三韓一統’이다. 즉 우리는 본래 한 나라에서 나왔으며 이제 다시 하나로 합해진 것이다. 여기서 ‘삼한’은 한반도에 있었던 남삼한南三韓(진한辰韓⦁마한馬韓⦁변한弁韓)을 통칭하는 말로 불려 왔지만, 본래의 의미는 단군조선의 영역인 북삼한北三韓(진한辰韓⦁번한番韓⦁마한馬韓)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신라는 단군조선의 본래 영역을 회복하지는 못하였으나, 그 영토의 사람과 문화를 하나로 아우르게 되었고, 이를 통해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을 다독이며 하나의 나라로 만들어 나간 것이다.
단군조선의 건국
우리는 어릴 적부터 소위 ‘단군신화’를 들어 왔다. 하늘의 신 환인의 아들 환웅이 인간 세상에 내려오고, 곰이 쑥과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되어 환웅과 혼인해 단군을 낳았다는 이야기 말이다.
"...환웅이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웅녀와 혼인하니, 아들을 낳아 이름을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 『삼국유사三國遺事』 중에서
이 신화적 상징이 담긴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어서 우리가 곰의 자손이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망발이다. 진실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단군조선을 세운 이는 초대 단군왕검檀君王儉(신인왕검神人王儉)이시다. 초대 단군이 환웅의 아드님인 것은 맞다. 하지만 그 환웅이 초대 환웅님은 아니다. 최초의 환웅께서 배달을 개국한 지 1,500여 년이 지난 18세 거불단居弗檀 환웅의 아드님이 곧 단군왕검이시다. 초대 단군께서는 14세부터 24년간 웅씨 족의 비왕裨王으로 있으면서 제왕 수업을 받았고, 38세에 천제의 아들로 추대되어 제위에 올랐다. 당시는 배달倍達 말기의 혼란한 시기였는데 이를 잠재우고 구환족九桓族 전체를 하나로 통일하여 한민족 전성기인 조선朝鮮을 열게 되었다. 이를 훗날 태조 이성계가 세운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 ‘고古조선’이나 ‘단군조선’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본고에서는 ‘단군조선’이라 칭한다.

삼한관경제와 수도 변천 - 송화강 아사달 시대
단군왕검은 조선의 개국시조로 삼신상제三神上帝님께 천제天祭를 올렸다. 우리 역사를 보면 역사의 주요한 변곡점이나 중요한 일에 직면한 때에는 늘 상제님께 천제를 올렸다. 단군께서는 쑹화강(송화강松花江) 유역(지금의 헤이룽장성黑龍江省 하얼빈哈爾濱)의 ‘아침 태양이 빛을 비추는 땅’인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였다. 이 시기는 BCE 2333년부터 BCE 1286년 21세 소태蘇台 단군 때까지 1,048년간 지속되었다. 이때를 단군조선 제1왕조 송화강 아사달 시대, 삼한(진한⦁마한⦁번한)이라고 부른다.
이때 단군조선은 진한辰韓(지금의 만주滿洲 지역)에 대단군이 계시고, 번한番韓(지금의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서부와 허베이성河北省 북부를 비롯한 산둥성山東省에서 양쯔강揚子江 유역까지의 동부 지역)과 마한馬韓(지금의 한반도)에 부단군을 두었고 주변 64개국을 통치한 광대한 제국이었다. 이 삼한이 바로 북삼한北三韓이며, 이후 단군조선이 몰락한 후 유민들이 한반도로 내려와 다시 삼한을 세우니 이를 현재 교과서에서 배우는 남삼한南三韓이라고 한다.
신라가 이 북삼한을 염두에 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삼한을 하나로 통일한다는 기치를 내세웠던 것은 사실이다. 하나였다가 갈라진 후 다시 통합하는 이 과정과 이후 통일의 모습으로 200여 년간 전성기를 누린 점에서 현재 남북한이 대치하고 있는 우리 대한민국에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단군조선의 영역이 가장 넓었을 때는 만주 대륙과 한반도를 중심으로 북으로는 러시아의 바이칼호, 서로는 중국 산시성陝西省, 남으로는 산둥성山東省을 포함한 양쯔강 유역까지였다. 동아시아 전체를 아울렀다고 할 수 있다.
백악산 아사달 시대
이후 22세 색불루索弗婁 단군이 정변政變을 일으켜 남서쪽의 백악산白岳山(녹산鹿山) 아사달, 지금의 지린성 창춘長春으로 천도하였다. 이 시기는 BCE 1285년부터 43세 물리物理 단군 때인 BCE 426년까지 860년간 지속되었다. 이때를 단군조선 제2왕조 백악산 아사달 시대, 삼조선三朝鮮 시대라고 한다. 색불루 단군은 국정 쇄신을 위해 삼한을 삼조선(진조선眞朝鮮⦁번조선番朝鮮⦁막조선莫朝鮮) 체제로 바꾸었다.
단군조선 통치 체제의 근간인 삼한관경제는 신교神敎의 삼신三神 사상에 따라 나라의 영역을 셋으로 나누어 다스린 것이다. 6세 달문達門 단군 때 신지神誌(사관史官의 관직명) 발리發理는 한민족의 뿌리를 노래한 대서사시 「서효사誓效詞」(또는 「신지비사神誌秘詞」)를 지었다.
여기에서 삼한의 형세를 저울대와 저울추 그리고 저울판과 같다고 하면서 저울판은 마한의 수도 백아강白牙岡(지금의 평양), 저울추는 번한의 수도 안덕향安德鄕(지금의 허베이성 탕산唐山)이고 저울대는 진한의 수도 소밀랑蘇密浪(송화강 아사달, 하얼빈)이다. 번한은 험독險瀆, 낭야성琅耶城, 탕지湯地, 개평蓋平, 한성汗城 등으로 수도를 옮겼다. 마한은 처음부터 끝까지 백아강이었다.
대단군을 중심으로 이 세 나라의 수도가 하나의 저울이 되어 균형을 유지하는 동안에는 단군조선이 융성하였다. 그 핵심은 병권兵權을 대단군만 쥐고 있느냐 부단군까지 쥐게 되었느냐였다. 병권을 부단군까지 쥐게 되면서 삼한관경제는 무너졌고, 그 과정에서 단군조선은 몰락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장당경 아사달 시대
이후 43세 물리 단군이 사냥꾼 우화충于和冲의 반란으로 붕어하고 단군조선의 국가 시스템인 삼한관경제가 완전히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우화충의 반란을 진압한 44세 구물丘勿 단군은 수도를 장당경藏唐京 아사달, 지금의 랴오닝성遼寧省 카이위안開原으로 이전하였다. 이때를 단군조선 제3왕조 시대, 장당경 아사달 시대라고 하며, 나라 이름을 대부여大夫餘로 고쳤다. 이 왕조는 BCE 425년부터 47세 고열가高列加 단군 때인 BCE 238년까지 188년간 지속되었고, 후에 단군조선의 종통은 해모수 단군이 세운 북부여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백두산 인근에 터 잡은 신시 배달倍達(밝달)국

이때 오가五加의 우두머리가 모두 대답하며 추천한 인물이 바로 서자부庶子部 부족의 수장首長인 환웅桓雄이었다. 그들은 환웅이 어질고 용기와 지혜를 겸비한 인물로 일찍부터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세상을 개혁하려는 뜻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추천의 의사를 밝혔다. 이에 환인께서는 환웅에게 종통과 국통 계승의 상징으로 천부天符와 인印 세 종류를 주시며 다음과 같이 당부하셨다.
이제 인간과 만물이 이미 제자리를 잡아 다 만들어졌으니, 그대는 노고를 아끼지 말고 무리 3천 명을 이끌고 가서, 새 시대를 열어 가르침을 세우고[開天立敎], 세상을 신교의 진리로써 다스리고 깨우쳐서[在世理化] 이를 만세 자손의 큰 규범으로 삼을지어다. 더불어 천신에게 제사를 지내 부권父權을 세우고 노인은 부축하고 어린이는 이끌어 평화롭게 하나 되게 하여 사도師道를 세우고 세상을 신교의 진리로 다스려 깨우쳐서 자손만대의 홍범洪範으로 삼을지어다.
- 『환단고기桓檀古記』 「삼성기三聖紀」 하下, 「태백일사太白逸史」 <신시본기神市本紀>
- 『환단고기桓檀古記』 「삼성기三聖紀」 하下, 「태백일사太白逸史」 <신시본기神市本紀>
환국의 마지막 환인께서는 환웅을 환국의 정통 계승자로 정하였고 그 증표가 바로 천부天符와 인印이다. 천부란 환인이 ‘세상을 다스리는 권한의 표징’으로 내려 주신 태고의 문서로 흔히 알고 있듯이 무속巫俗 세계에서 쓰는 방울이나 거울 같은 물건은 아니다. 그리고 인印이란, ‘환국의 종통을 전하는’ 사실을 인증하는 도장으로 임금의 옥새와 같은 것이다.
환웅천황님이 환인천제에게 정통으로 이어받은 이념은 바로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라.’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이다. 대부분 단군조선의 국가 이념으로 알고 있지만, 이는 잘못이다. 홍익인간 사상은 사실 9천 년 전 환국의 통치 이념으로 천지 광명의 뜻과 대이상을 성취한 인간이란 뜻이 있다. 거발환居發桓 환웅은 재세이화在世理化를 기반으로 홍익인간을 실천하였다. 다시 말해서 삼신상제님의 진리, 즉 신교로써 세상을 다스리고 깨우쳐 널리 인간 세계를 이롭게 하는 것이다.
민족의 성산聖山, 백두산
환웅천황과 3천의 무리가 향한 곳은 동방의 태백산, 즉 지금의 백두산 일대이다. 환웅천황은 이 지역을 천명 받고 나라를 연 하늘 평야, 즉 ‘역사의 개척지’라는 뜻으로 천평天坪이라고 하였다. 이곳에 우물을 파고 그곳을 중심으로 청구靑邱에 농사짓는 땅을 구획하여 민생을 도모하였다. 그리고 백두산 신단수神檀樹 아래에서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려 나라 세움을 고하였다.
환웅천황님과 3천 명의 개척단이 터를 잡은 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성산이다. 백두산은 백산白山 이외에도 삼신산三神山, 개마산蓋馬山, 불함산不咸山, 장백산長白山등으로 불렸다. 또한 인류 구원의 완성이며, 모든 진리 도맥의 완성인 시루산(증산甑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인근에 자리 잡은 배달국 사람들은 아침에 동산에 올라 태양을 경배하고, 밤에는 달을 맞이하는 광명光明의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터 잡은 백두산에 대해서 『삼한비기三韓祕記』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백두산이라는 거대한 산악이 광활한 대지 가운데 장중하게 자리 잡아 가로로 천 리를 뻗고, 높이는 2백 리를 우뚝 솟았다. 웅장한 고산준령이 꿈틀거리며 널리 덮어 배달천국倍達天國의 진산鎭山이 되었다.
여기서 진산은 한 국가나 도시 또는 각 지방에 있는 주산主山이라는 뜻으로, 백두산은 우리 배달국 환웅천황님과 제세핵랑군 3천 명이 터전을 잡고, 홍익인간의 큰 뜻을 펴신 민족의 성산이다.
배달국 사람들
한편 이때 환웅천황을 따랐던 무리 3천을 이유립李裕岦 선생은 ‘제세핵랑군濟世核郞軍’이라 하였다. 제세핵랑濟世核郞은 세상을 건지는(濟世) 핵심이 되는 랑(核郞)이라는 뜻으로 낭郞은 삼신상제님을 수호하는 관직 이름이기도 했다. 환국 이래 환웅, 단군 시대에 나라를 이끌어 가는 지도층이 이 제세핵랑에서 나왔다.
이들은 삼신상제님께 올리는 제사를 주관한 신교의 핵심 일꾼으로, 신교의 가르침을 받들어, 신교의 성소인 소도의 경당扃堂에서 문무를 겸전하였다. 시대에 따라 단군조선의 국자랑國子郞, 북부여의 천왕랑天王郞, 고구려의 조의선인皁衣仙人, 백제의 무절武節, 신라의 화랑花郞, 고려의 재가화상在家和尙 등으로 호칭은 다르지만, 그 전통을 면면히 이어 오고 있다. 최근세에는 갑오 동학혁명, 항일 구국 운동과 광복군의 독립운동 등 민족의 위기 때마다 이 낭가郎家의 정신은 유감없이 드러나 불의를 뿌리 뽑고 정의를 실현하였다.
나라 이름과 도읍지, 배달과 신시
백두산에 도착한 환웅은 나라 이름을 배달倍達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흔히 우리를 부로는 배달겨레라는 말은 실질적인 한민족사의 첫 번째 나라인 배달에서 그 근원을 찾아볼 수 있다. 외부에서는 구려九黎, 청구靑丘라고도 불렀다.
‘배’는 밝다는 뜻이다. 고대어는 한자의 의미보다는 음가音價에 따라서 그 의미가 정해지기도 한다. ‘달’은 땅을 상징한다. 우리가 응달, 양달 할 때 그 달이 땅을 가리키는 말로 결국 배달은 광명의 동방 땅을 뜻한다. 배달을 ‘땅의 광명[地光明]’을 가리키는 ‘단檀’ 자를 써서 단국檀國이라고도 부른다. 그래서 환국과 배달을 합쳐서 환단桓檀 시대라 통칭하기도 한다.
건국 초기 배달의 강역은 도읍지를 크게 벗어나지 않아서 도읍지와 국호는 서로 상통하였다. 거발환 환웅은 도읍 이름을 신시神市라 하였는데, 이는 신의 도시라는 뜻이다. 신시 배달은 환국의 광명 사상을 그대로 계승하여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광명개천光明開天의 3대 정신으로 백성들을 교화하며 1,565년 동안 지속되었다.
배달국의 호족과 웅족 이야기
이제 우리는 전 국민이 왜곡된 채로 잘못 알고 있는 우리 민족의 시원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아마도 한 번쯤은 들어 보았을 ‘단군신화’에 관한 것이다. 환웅천황께서 마늘과 쑥을 주며 곰과 호랑이를 동굴에 들어가게 했는데, 곰만 여자가 되었고 그 아들인 단군께서 조선을 건국했다는 이야기 말이다. 과연 이 신화 같은 이야기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그 진실은 이렇다.
환웅천황이 동방 백두산 문명을 새로 세울 당시 ‘백두산에서 송화강’에 이르는 만주 일대에는 본래 거주하던 원주민 호족虎族과 새로 이주해 온 웅족熊族이 살고 있었다. 호족은 탐욕이 많고 잔인하여 오로지 약탈을 일삼았다. 웅족은 어리석고 괴팍하며 고집이 센 편이라 함께 어울리며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비록 같은 곳에서 살았으나 두 부족은 세월이 지날수록 사이가 멀어졌다. 서로 물건을 빌리거나 빌려주지도 않고 혼인도 하지 않으며, 매사에 서로 불복하여 함께 같은 길을 가지 않았다.
이에 환웅천황께서 신령한 덕으로 통치하심을 알고 있던 웅족의 여왕은 무리를 거느리고 환웅천황을 뵙고서 “원하옵건대 저희에게 살 곳을 내려 주십시오. 저희도 하나같이 삼신의 계율을 따르는 환족의 백성이 되고자 하옵니다.”라고 간청하였다. 이를 들은 환웅께서는 “가히 가르칠 만하도다.” 하시고, 신령한 주문의 도술로써 환골換骨케 하여 정신을 개조시키셨다.
이때 먼저 삼신께서 전해 주신 정해법靜解法(몸과 마음을 고요히 수행하여 해탈하는 법)으로 그렇게 하셨는데, 쑥 한 묶음과 마늘 스무 줄기를 영험하게 여겨 이를 주시며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말고 기도하여 참된 인간이 되는 길을 알려 주셨다. 쑥은 몸속의 냉冷을 치료하고, 마늘은 구워 먹으면 마魔를 물리친다고 한다. 마늘은 각종 질병의 치료제로 쓰이며 육체의 힘을 솟아나게 하는 신비로움이 있다는 믿음으로 고대부터 현대까지 여러 가지 용도로 쓰여 왔다.
이에 웅족뿐 아니라 호족도 함께 쑥과 마늘을 먹으면서 삼칠일三七日, 즉 21일 수행을 하며 외부와 만남을 끊고 지냈다. 웅족은 능히 굶주림과 추위를 참아 내고 계율을 지켜 온전한 인간의 참모습을 얻었지만, 호족은 방종하고 게을러 계율을 지키지 못하여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후에 웅족 여인[熊女]들이 시집갈 곳이 없어 매일 신단수 아래에 와서 주문을 외우며 아이 갖기를 빌었다. 예전에 아이를 갖기 위해 명산대천에서 100일 정성 공부나 치성을 드리던 모습과 유사하다. 이에 환웅께서 이들을 임시로 환족으로 받아들여 환족 남자들과 혼인하게 하였고 아이를 낳으면 환桓의 핏줄을 이은 자손으로 입적시켰다. 이렇게 환족과 웅족은 협력하여 ‘신의 도시’란 뜻의 신시神市를 수도로 하는 배달국을 흥왕하게 하였다. 이것이 배달과 단군조선의 바른 역사인 『단군사화檀君史話』의 내용이다.
인류의 시원 국가 환국桓國 그리고 마고麻姑

환국桓國
우리의 국통 맥은 환국桓國-배달倍達-단군조선檀君朝鮮으로 이어진다. 우리나라 족보가 그렇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역사를 전해 주는 사서가 『환단고기桓檀古記』이다. 『환단고기』에서는 인류 최초의 나라이자 동서 인류 최초의 문명국인 환국의 시조와 정치, 문화, 생활상, 그리고 고대 환국 사람들이 지녔던 삶의 가장 소중한 가치, 나라가 얼마나 지속되었는지 등을 소상히 밝혀 주고 있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환국은 지금으로부터 9,200년 전에 건국됐다. 중앙아시아 동부, 천산天山을 중심으로 남북 5만 리, 동서 2만 리에 걸쳐 열두 나라로 구성되어 있었다. 또한 「삼성기三聖紀」 상上권과 하下권, 「태백일사太白逸史」의 〈환국본기桓國本紀〉에 의하면 중국 고대 문명은 물론 서양 문명의 근원이 되는 수메르 문명의 출원지가 바로 환국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국호인 한국韓國이라는 이름, 대한민국이라는 이름도 인류가 세운 최초의 나라인 환국에서 왔다. 『환단고기』 중 「삼성기」 상권의 첫 문장 ‘오환건국吾桓建國 최고最古’라는 구절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첫 나라를 선포하고 기록한 것이다. 환국은 광명한 삶을 인생의 가장 소중한 가치로 삼았다. 그래서 나라 이름도 광명을 뜻하는 환국이라 했다.
환국은 3,301년 동안 역사가 지속됐다. 오늘의 과학주의, 실증주의 사관은 유물론적 편향이 있어서 역사적 사실들의 이면, 즉 인류의 정신문화는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역사서들은 태고 문명이라 하면 그저 움집에서 열매나 따 먹고 소박하게 살던 문화로 그려 낸다. 그러나 환국 시대 사람들의 생활은 모두가 광명을 지향하면서 누구나 무병장수 문명을 누리던 삶이었다.
중앙아시아 일대를 강역으로 삼았던 환국 시대를 종식한 가장 중요한 요인은 기후氣候의 변화였다. 학자들에 의하면 중앙아시아 지역은 지금부터 수천 년 전에는 오늘날처럼 건조하지 않았다고 한다. 강우량이 풍부해 대단히 살기 좋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중앙아시아에는 적당한 비가 내려, 질 좋은 초원이 유지되고 살기 좋은 곳이 곳곳에 잔존해 있다.
환국의 기후가 전반적으로 건조해지고 사람들이 살기 어려워지면서 많은 주민이 환국의 동쪽과 서쪽, 남쪽으로 이주하였다. 배달을 세운 환웅족의 이주는 동쪽으로 옮겨간 경우이며 나중에 수메르 문명을 세운 수메르인들은 환국에서 서쪽으로 이주한 사람들이다.
환국이 사라지고 해당 지역이 건조화되면서 그 일대에는 물을 구할 수 있는 오아시스 지역이나 초원에만 사람들이 생존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예전과 같은 국가는 찾아보기 힘들게 됐고, 흉노凶奴(匈奴) 같은 유목 국가가 등장하여 실크로드를 지배하기 전에는 부족 지배 형태가 국가 체제를 대체했다. 최근 내셔널 지오그래픽 방송에서도 소개된 적이 있는 것처럼 환국 문명의 중심지였던 중앙아시아 동방 바이칼호 지역에서 인류 문명의 기원을 찾는 역사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어 그 연구 결과가 기대된다. 아시아 대륙을 지배했던 환국이 실재했음을 입증하는 유적과 유물은 앞으로 더 발굴될 것이다.
마고성麻姑城 율국律國
여기서 좀 더 나아가 보자. 지금으로부터 2만 5천 년 전 환국 이전의 인류 시원 문명국이 있었다. 바로 #마고성麻姑城 율국律國#이다. 이곳의 주인공은 #마고삼신#麻姑三神으로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 곳곳에 남아 있는 여신 문화의 주인공이다. 이에 대해서 『환단고기』 「삼성기」 하下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류의 시조는 나반那般이시다. 나반께서 아만阿曼과 처음 만나신 곳은 아이사비阿耳斯庀이다. 두 분이 꿈에 천신(상제님)의 가르침을 받고 스스로 혼례를 올리시니 환족의 모든 족속[九桓族]이 그 후손이다.’
- 『환단고기桓檀古記』 「삼성기三聖紀」 하下
- 『환단고기桓檀古記』 「삼성기三聖紀」 하下
여기에서 나반과 아만이 바로 마고성의 나반 대성부와 마고 대성모님이다. 이 마고성에서 인류 신선 문화가 시작되고 그 후손들이 이후 환족이 되어 환국을 열게 되었다. 마고성은 천하의 가장 큰 성[마고대성麻姑大城]으로 그 나라 이름이 율국律國이다. 율국은 우주의 조화 생명 그 자체인 ‘율려律呂’의 ‘율’을 사용해서 칭한 것으로 마고성의 율국은 율려 조화권을 내려 주는 신선 문명의 모체가 된다는 뜻이다.
그럼, 마고성의 위치는 어디였을까? 지금 러시아 바이칼호 북쪽에 네 개의 호수가 있는데 거기에서 북극해까지를 네 등분을 했을 때의 4분의 1 지점, 아주 신성한 곳에 있었다. 겨울에는 눈이 조금 흩날릴 정도로 온화하고 좋은 날씨였다. 주로 채집 생활을 하면서 고기를 잡기 위해서 몇 번 정도 사냥을 하고, 밤낮으로 수도를 하며 살았다.
전 세계 모든 창세 신화의 시작이 된 태고 시대 마고삼신은 대우주가 하나의 빛과 파동으로 일어난 기운을 뭉쳐 놓은 우주의 모체 소리를 바탕으로 조화신선 도통 문화를 처음 열어 주셨다. 조화의 문화, 신선 문화, 치유 문화, 영성 문화 등의 근원인 마고성 율국은 약 1만 년 전 #환국桓國 이전의 문명#으로 여성 지도자가 15세를 전하며 이어졌다. 이후 남성 중심 문화인 환국으로 맥이 이어져 현재까지 내려오게 된 것이다.
마고대성이 무너지는 날 사람들은 다시 한번 마고성의 모습을 되찾는 복본復本을 다짐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마고성의 역사는 신화와 전설이 되어 버렸지만, 155년 전 인간으로 오신 우주의 통치자 상제님께서는 그 잃어버린 인류의 원형 조화신선 도통 수행 문화, 곧 우주 빛꽃 선려화仙呂花와 선정화仙定花 수행법을 복원시켜 전해 주셨다.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인류 국통 맥의 기원을 찾았다면, 이를 바탕으로 향후 펼쳐질 미래의 중심지, 21세기의 마고성은 어떤 모습일지도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최종회에서 우주 변화의 원리와 한민족의 사명에 기반하여 알아볼 예정이다. ■

〈참고문헌〉
* 『역주본 환단고기』, 안경전, 2012, 상생출판
* 『온 국민을 위한 대한민국 역사교과서 1』,대한민국 역사교과서 편찬위원회, 2024,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 『역주본 환단고기』, 안경전, 2012, 상생출판
* 『온 국민을 위한 대한민국 역사교과서 1』,대한민국 역사교과서 편찬위원회, 2024,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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