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빛으로 물들이는 일꾼들이 되시기를 | 서울영등포 주미라

[상생 인터뷰]

도문 곳곳에서 활약하고 있는 여성 성직자 일꾼들을 만나 그들의 철학과 깨달음, 구도의 여정을 공유합니다. 이번 달은 서울영등포도장 주미라 수호사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구도의 과정에서 알게 된 조상님들과 상제님 진리의 인연, 도장 개창 과정과 자기 자신이 성장하는 과정에 대한 얘기를 나눴습니다. 주미라 수호사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통해 참마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Q 상제님 진리를 어떻게 만나셨나요?



저는 도기 133년 음력 5월 30일에 입도했습니다. 입도 전 어느 날, 저는 인천에 계신 외할머니 댁에 가기 위해 고속버스를 탔습니다. 버스 안에서 잠시 졸고 있다가 눈을 떴는데, 마침 창밖에 『이것이 개벽이다』 광고탑이 눈에 확 들어오는 거예요. 순간 너무 놀랐습니다. ‘아니, 도대체 저 책이 뭐길래 저렇게 대규모로 광고를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더 놀라운 건, 그 책이 제 방 책꽂이에 꽂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한 번도 펼쳐 보지 않고 그냥 꽂아만 두었던 책이었어요. 그 순간, ‘아, 저 책에 뭔가 중요한 내용이 있나 보다. 꼭 읽어 봐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이것이 개벽이다』를 읽기 시작했고,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는 자연스럽게 마음이 굳어졌습니다. ‘아, 개벽이 다가오고 있구나. 나는 반드시 신앙을 해야겠다.’라고 결심한 저는 광주상무도장을 찾아가 팔관법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Q 진리에 대한 확신을 어떻게 갖게 되셨는지요?



처음 공부를 시작했을 때는 마음속에 의문이 있었습니다. ‘이 진리가 과연 참된 진리일까? 누군가가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그 의문을 풀기 위해 저는 결심했습니다. ‘그래, 이게 참인지 아닌지, 한번 집중해서 공부해 보자.’

그때부터 『도전道典』, 『증산도의 진리』, 『이것이 개벽이다』, 태상종도사님과 종도사님 어록, 『관통증산도』 등 증산도의 주요 필독서들을 모두 읽었습니다. 그렇게 진리를 깊이 공부한 끝에, 저는 진리에 대한 확신, 종통에 대한 확신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확신이 제 마음속에 자리를 잡으면서 마침내 입도를 하였습니다.

저는 20대 시절부터 늘 이런 고민을 안고 살았습니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 인간은 죽으면 어디로 가는 걸까? 인생이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인간 존재에 대한 이런 근원적 질문들을 마음속에 품고 살다가, 서른한 살이 되어 입도를 한 것입니다. 진리를 만나면서 그동안 가슴속에 품고 있던 모든 의문들이 시원하게 풀렸습니다. 진리를 처음 접했을 때의 감격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컸습니다. 너무 기쁘고 벅차서 밤에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어요.

‘내가 어떻게 상제님 진리를 만날 수 있었을까? 내가 어떻게 이 진리를 찾게 되었을까? 나는 정말 복이 많은 사람이구나. 우리 조상님들의 음덕이 너무 크구나.’ 이런 생각이 들면서, 자연스럽게 ‘나는 반드시 조상님께 보은하는 신앙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겨났고, 그렇게 저는 신앙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Q 어머니가 상제님, 태모님과 특별한 인연이 있으셨다면서요?



저희 집안은 불교 집안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저는 어머니와 함께 절에 다니면서 108배를 따라 하며 자랐습니다. 어머니는 항상 우리 집은 불교 집안이기 때문에 너는 불교 신앙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언제나 어머니가 주방에서 청수를 모시며 기도하셨고, 저는 그 모습을 보며 성장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어머니들은 모두 제 어머니 같은 줄 알았어요. 그런데 20대가 되면서 어머니가 정말 특별한 정성이 있는 분임을 깨달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어머니는 늘 기도를 하셨고, 그 기도는 미륵 부처님, 천지신명님 등 모든 신들에게 바치는 기도였습니다. 어머니는 항상 우리 가족의 건강과 함께 모든 일이 잘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그런 어머니와 함께 신앙하면 참 좋겠다 싶어서 어머니께 진리를 전했습니다. “엄마, 개벽을 아세요?”라고 물었더니, 어머니는 “그거 아는데.”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알고 보니, 저의 외증조부님과 외증조모님께서 어머니가 어렸을 때 무릎에 앉혀 놓고 늘 개벽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다는 겁니다. “앞으로 개벽이 오고 괴질 병란이 오는데 십 리에 사람 하나 살고 다 죽는다. 네가 아직 어리지만 어른이 되면 분명 개벽을 보게 될 거야.”라는 말씀을 늘 듣고 자라셨다고 했습니다.

또 하시는 말씀이 정읍에 여자 교주님이 계셨는데, 그분이 마당에 단을 높이 쌓아 올리고 그 단에 올라가서 마당에 모인 사람을 바라만 봐도 병이 나았단 말씀을 해 주셨다는 겁니다. 저희 외가는 남원이 뿌리이고 정읍으로 이사하면서 거기에 터를 잡고 사셨어요. 그런데 그 일대가 다 상제님 신앙을 했잖아요. 저의 외가 쪽이 태모님 초기 교단 신앙을 하신 겁니다. 외증조부님 외증모님이 태모님 신앙을 하셨던 거죠.

그래서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늘 진리 이야기를 듣고 자라신 거예요. 어머니가 한 번도 그런 얘기를 해 주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때 우리 집안이 상제님 진리와 인연이 있고 나는 도를 닦아야 된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입도를 하고 한 달 후 어머니도 입도를 하셨고, 지금까지 신앙을 하고 계십니다. 어머니는 저에게 최고의 신앙 동반자이자 가장 가까운 영적 지원자십니다. 또한, 어머니는 제가 봉직을 하는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시고 자부심을 느끼고 계십니다. 그래서 저는 신앙을 열심히 해서 어머니를 더 기쁘게 해 드리고 효도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습니다.

Q 입도 후 1년 만에 봉직을 시작한 사연은 뭔가요?


제가 신앙을 시작한 지 21년, 봉직을 시작한 지 20년이 되었어요. 제 신앙의 모든 것은 봉직의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기 133년(2003년)에 입도를 하고, 134년에 도장이 개창되면서 봉직의 길을 걷기 시작했기 때문에 제 모든 신앙은 봉직의 신앙입니다. 입도 후 처음 1년간, 저는 하루도 빠짐없이 도장에 가서 매일 105배를 올리고 수행 주문을 외우며, 진리 공부와 포교 활동을 했습니다. 때로는 밤을 새워 여덟 시간씩 삼천 배를 올리면서 ‘어떻게 하면 사람을 많이 살릴 수 있을까?’ 하는 고민 속에서 기도했습니다. 늘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주문을 읽고, 기도하고, 배례하고, 수행하면서 포교를 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순간 ‘사람을 많이 살리려면 도장을 개창해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 지역에 도장이 없으면 의통을 집행할 수도 없고, 사람을 많이 살릴 수도 없다는 생각이었죠. 하지만 그때는 신앙을 시작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신입이었기 때문에, 도장을 개창한다고 말하면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할 것 같아 그 생각을 마음속에만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34년 5월, 광주 지역 순방 군령 때 태상종도사님과 종도사님께서 오셨습니다. 그 당시 종도사님께서 “광주와 나주는 개벽의 일번지다. 나주에 도장을 반드시 개창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저는 나주도장 개창 팀에 합류하였고, 나중에는 개창 팀장이 되어 8월의 무더위 속에 정말 힘든 고생을 하며 3개월 만에 도장을 개창했죠. 그 경험은 제 인생에서 최고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봉직자의 길을 걷게 되었어요. 봉직의 길을 가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살아가면서 가장 궁금했던 것이 ‘인간이 태어나면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였고, 그 고민이 진리를 통해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다니던 직장에서 월급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과 사람을 살리는 성직의 길을 걷는 것의 가치는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직장을 그만두고 도장을 개창하며 봉직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Q 도장을 개창하실 때 힘이 되었던 성구가 있다고요?



도장을 개창하는 동안, “천하사를 하는 자는 먼저 망한 뒤에야 흥하고, 죽음에 들어가야 살길을 얻게 되느니라.”(도전道典 8:22:1)라는 성구 말씀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도를 닦으려면 한 번은 죽어 봐야 한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어요.

실제로 도장 개창 준비를 하면서 굉장히 큰 사고가 났어요. 비가 오는 날, 차의 조수석에 타고 신호 대기를 하고 있었는데 뒤에서 봉고차가 전속력으로 부딪쳤어요. 꽝 소리가 나서 돌아봤는데 순간 뒤에 트렁크가 보이더라고요. 트렁크를 밀고 들어온 거예요. 저는 앞쪽으로 밀려 부딪혔다가 몸이 활처럼 뒤로 휘어졌는데 그 순간 정신을 잃었어요. 너무 세게 부딪쳐서 문이 안 열리는 바람에 조수석 문을 부수고 저를 빼냈다고 합니다. 눈을 떴을 때는 병원이었어요. 일단 어디를 다쳤는지 제 몸을 한번 만져 봤는데 멀쩡하더군요. 망가진 차를 찾으러 정비소에 갔는데 그 상태가 정말로 처참했습니다. 그런데 망가진 차에 ‘식물인간’이라고 쓰여 있는 거예요. 정비사들이 봤을 때 이런 사고 정도면 차에 탄 사람이 죽거나 아니면 식물인간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예측한 거죠. “차에 탄 사람이 바로 저예요.”라고 했더니 깜짝 놀란 표정으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며 이건 기적 같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전 입도하고 매일매일 태을주를 삼천 독씩 읽었어요. 그 사고 당시에도 저는 태을주를 읽고 있었는데 그 태을주가 저의 보호막이 되어서 지켜 주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사고가 전화위복이 되어 도장을 개창하는 동력으로 작용했습니다.

도장 개창은 열정만으로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자금이 뒷받침되어야 도장 개창을 할 수 있죠. 당시에 돈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었는데 도장을 개창하는 데 가장 크게 도와주신 분이 바로 제 어머니셨어요. 처음에는 입도 1년밖에 안 된 딸이 직장을 그만두니까 어머니가 너무 심란해하셨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딸이 뭘 한다고 저러나 하셨는데 교통사고가 나고도 멀쩡했잖아요. 그때 ‘우리 딸이 조상님의 은혜로, 상제님의 은혜로 살았구나.’ 하는 생각에 어머니의 마음이 움직인 거예요. 그래서 어머니가 도장 개창 성금을 크게 헌성하셨습니다. 또한 광역에서 많은 분들이 도와주신 덕분에 무사히 도장을 개창할 수 있었습니다.


Q 도장을 성장시키는 데 있어 ‘자기 성장’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도장을 개창하는 것보다 도장을 성장시키는 데는 열 배, 백 배의 노력과 정성이 필요합니다. 저에게는 매일 백오 배, 삼백 배, 오백 배, 일천 배의 배례와 더불어 하는 수행이 기본적인 일상이었습니다. 135년에 태상종도사님께서 “통성 기도를 해라. 그래야 신명이 안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저는 매일 통성 기도를 10년 동안 꾸준히 올렸습니다. 간절한 마음을 천지에 고했습니다. 하지만 기도만 해서는 도장이 성장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열정이 뛰어나도 진리 전달 능력이 있어야 하고 시간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진리 공부에 집중했습니다. 『도전道典』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읽은 날도 많았습니다. 팔관법, 진리 맥 잡기, 증산도 진리 관련 책들을 반복해서 공부했습니다. 일주일 중 3일은 포교, 4일은 공부로 채우는 생활을 했습니다.

도장이 처음 시작할 땐 도생이 여덟 명이었습니다. 치성 때 도생이 한 명만 와도 저는 그분을 위해 강훈을 준비했습니다. 『도전』을 읽고, 태상종도사님 말씀을 정리하며 한 사람을 위한 교육을 준비했죠. 그렇게 쌓인 노력은 자신감으로 이어졌고, ‘이제는 내가 진리 교육을 통해 일꾼을 키워 낼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때부터 사람들도 하나둘씩 찾아왔습니다. 다른 도장에서 사람을 보내 주고, 방문자도 생기기 시작했죠.

하지만 도장의 성장은 늘 직선이 아니었습니다. 성장하다가 멈추고,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고, 또다시 무너지는 과정이 반복됐습니다. 그 시기에는 너무 절박했습니다. ‘나는 여기까지인가? 이게 나의 한계인가?’라는 생각이 들었고, 불평불만과 미움도 올라왔습니다. 결국 건강이 무너졌고 저는 그만두어야겠다는 마음으로 휴직을 결심했습니다.

휴직 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지내던 그 시기는 태상종도사님께서 어천하시고 난법이 극심했던 때였습니다. 저는 종도사님께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 드리고자 칠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하루에 오백 독, 육백 독, 많게는 천 독까지 정성껏 읽었습니다.

봉직자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봉직해야 하는가? 저는 ‘진리 수호’와 ‘종통 사수’의 정신으로 봉직에 임했습니다. 그렇게 칠성경을 읽는 가운데, 제 마음속 깊은 곳에서 ‘다시 한번 해 보자.’는 내면의 외침이 들려왔습니다. 다시 시작할 때는 잘하려는 욕심을 내려놓았습니다. 아팠던 이유가 바로 그 ‘잘하려는 욕심’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비우고, 도생들이 잘되도록 돕는 마음으로 임했습니다. 그때부터 다시 도장에 사람들이 오기 시작했고, 이후 2년 만에 도장은 두 배로 성장했습니다. 타 지역에서 가족 단위로 전입하는 도생들도 생기면서 도장은 중형 도장으로 승급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제가 성장한 만큼 도장도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확신합니다.
“나의 성장이 곧 도장의 성장이다.”



Q 나주도장에서 오랜 시간 봉직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곳에서의 시간이 어떤 의미였는지 궁금합니다.


처음 봉직을 시작할 때 마음속으로 다짐했습니다. 나는 나주에 뼈를 묻는다, 나주가 성장하기 전에는 절대 떠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주에서 5년, 10년이 지나자 본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나주에 있었으니 다른 도장으로 옮기는 건 어떻겠냐.”라는 제안이었죠. 하지만 저는 마음이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아직 나주도장을 성장시키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도장을 성장시킬 수 있을지, 오직 그것만 생각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다른 책임자들이 “살아 있는 나주의 기지신”이라고 놀릴 정도였지만 저는 그 말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간절하게 하다가 결국 몸과 마음이 병들었습니다. 이후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내려놓은 후에야 도장이 성장했습니다.

나주도장을 중형 도장으로 승급시키면서 자연스럽게 내가 나주를 떠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즈음, 본부 홍보국장으로 오라는 전화를 받고 본부로 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나주도장에는 훌륭한 성심과 심법을 지닌 여성 일꾼이 있었고, 그분이라면 도장을 잘 이끌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분이 지금의 장보경 포정님입니다. 그렇게 16년간의 나주 봉직을 마무리하고 본부를 거쳐 서울강남도장, 지금은 서울영등포도장에서 봉직한 지 1년이 되었습니다.

상제님 신앙을 하다 보니 제 사주엔 없던 역마살이 생긴 것 같습니다. 계속 이동을 하게 되는데, 그 이동이 제게는 큰 성장과 소중한 경험을 안겨 주는 최고의 역마살이 되었습니다. 제가 여성 봉직자다 보니 사명감 아닌 사명감을 갖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여성 일꾼들을 키울 수 있을까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Q 봉직의 길을 꿈꾸는 분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씀이 있을까요?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마세요. 자신이 정말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결과가 안 좋은 경우도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 생각이 아예 없이 그냥 비우고 했는데 결과가 좋을 때도 많아요. 왜 그럴까 생각해 보면 진심이었을 때, 내가 욕심 없이 진심을 다했을 때 가장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뭘 완벽하게 갖추어서 시작하려고 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아요. 내가 부족해도 봉직을 하며 부족한 것을 더 보완하고 또 노력하면 그 과정에서 성숙합니다. 저도 정말 힘든 과정을 거치면서 이만큼 왔어요. 완벽하게 준비해서 갖춰진 다음에 시작하려고 하지 마시고 좀 부족해도 당국하면 다 됩니다. 진심이면 돼요. 잘하려고 하지 마세요. 있는 그대로 하시면 됩니다.


Q 여성 일꾼들에게도 해 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미래를 이끌어 갈 여성 일꾼들이 많이 성직에 종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여성 일꾼들은 남성들하고 경쟁하기 위해서 있는 건 아닙니다. 남성과 여성이 서로 똑같은 일꾼으로서 같은 상제님 도를 닦아 가는 거잖아요. 저는 남성과 경쟁한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어요.

책임자는 조화와 균형을 맞추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미래를 이끌어 갈 여성 일꾼들, 우리 모두 앞으로 반짝반짝 빛이 나고 세상을 빛으로 아름답게 물들이는 일꾼들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마치며]


나주도장을 처음 개창했던 8월, 그 뜨거운 날씨만큼이나 열정적이고 간절하게 보직 생활에 임했다고 회고하는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그 뜨거운 마음으로 한결같이 임했기에, 결국 ‘진심’에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열정으로 불타올랐던 그 시간이 있었기에, ‘진심’을 찾아가는 과정 또한 깊은 울림을 줍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진심을 찾아가는 길을 걷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 마음들이 모여, 함께 세상을 더 따뜻하게 물들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