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양오행으로 보는 문화 이야기 | 원은 영원한 생명의 고향 - 0무극 -

[한문화]
김덕기 / 본부도장


들어가는 말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유한합니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무한을 동경하고 추구해 왔습니다. 유한의 세계는 인과율이 지배하는 상대계입니다. 그에 반해 무한의 세계는 일체의 분별이 끊어진 절대계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세계의 근원에 자리한 ‘무無’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현대 물리학의 위대한 발견


E=mc2(에너지=질량×광속2)


1905년,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1879~1955)이 특수상대성 이론에서 발표한 ‘질량-에너지 등가원리’입니다. 질량과 에너지가 사실상 동등하며 상호 교환될 수 있음을 보여 준 이 공식은 물질과 에너지의 경계를 허물었습니다. 이에 따르면 우주에서 정지한 물체는 그 질량에 상응하는 에너지를 지닙니다. 물체가 질량質量을 가졌다면 그만큼 에너지로 변환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파동波動(wave)이나 빛과 같은 순수 에너지가 입자粒子(particle)로 변환될 수도 있습니다. 특수상대성 이론은 핵물리학의 기초 이론을 제공하여 핵물리학이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대 물리학의 새 장을 연 질량-에너지 등가원리는 아인슈타인이 독창적으로 발견한 것이 아닙니다. 기존에 있던 에너지보존의 법칙과 질량보존의 법칙을 확장하여 수식으로 간단명료하게 정리한 것입니다.*1)
*1) 국가핵융합연구소, 『핵융합의 세계』 참고


에너지보존의 법칙은 19세기 중반 독일의 의사이자 물리학자인 율리우스 마이어Julius Robert von Mayer(1814~1878)가 발견했습니다. 질량보존의 법칙은 1774년 프랑스의 화학자 라부아지에A.L. Lavoisier(1743~1794)에 의해서 발견됐습니다.*2) 두 법칙은 대상만 다를 뿐 ‘외부에서 유입되거나 밖으로 빠져나가는 무언가가 없다면 질량과 에너지는 항상 총합이 일정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 파악하고 질량을 포함한 새로운 에너지보존 법칙을 제시한 사람이 아인슈타인입니다.
*2) 에너지보존의 법칙 - 에너지가 다른 에너지로 전환될 때, 전환 전후의 에너지 총합은 항상 일정하게 보존된다. / 질량보존의 법칙 - 화학반응의 전후에서 반응물질의 모든 질량과 생성물질의 모든 질량은 같다.


이처럼 서양에서 물질과 에너지의 관계를 인식한 건 최근의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만물의 근원을 물⦁불⦁바람⦁흙의 4원소나 원자(Atomos) 등의 물질로 여겨 왔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氣를 뜻하는 ‘에너지energy’가 활력活力이란 의미의 그리스어 ‘에네르기아energeia’에서 유래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추상적인 관념으로 지금과는 의미가 달랐습니다.

과학적인 에너지 개념의 실마리를 제공한 사람은 라이프니츠G.W. Leibniz(1646~1716)입니다. 그도 활력이라는 뜻의 ‘비스비바vis viva’라고 불렀습니다. 그 후 1807년에 토마스 영Thomas Young(1773~1829)이 에네르기아와 비스비바를 결합하여 ‘에너지energy’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습니다. 에너지란 개념이 폭넓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건 열과 빛, 전기, 자기 등의 현상이 규명되기 시작한 19세기 중반 이후입니다.

이에 반해 동양에서는 만물의 근원을 ‘기氣’로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기가 집중되면 유형의 물질이 되고, 흩어지면 무형의 기가 된다.’고 했습니다. ‘무에서 유가 생겨나고, 유는 다시 무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기氣는 ‘형세⦁기운⦁조짐⦁생명력⦁힘⦁정기’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에 비해 에너지는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기의 특수한 상태가 에너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취즉형성 기산즉형망
氣聚則形成 氣散則形亡
기가 모이면 형을 이루고, 기가 흩어지면 형이 없어진다. - 유창, 『의문법률醫門法律』


축구로 본 무와 유


노자老子께서는 “유생어무有生於無(있음은 없음에서 생겨난다.)”(『도덕경道德經』 제40장)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노자께서 말씀하신 무無는 유형의 반대 개념인 무형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있음과 없음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밝은 햇살이 방 안을 환히 비춥니다. 거리엔 자동차가 달리고, 건물들 사이로 사람들이 바삐 움직입니다. 하늘엔 해가 있고, 달과 별이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일까요? 허공虛空은 하늘땅 사이에 비어 있는 공간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비어 있는 줄 알았던 공간을 공기空氣가 채우고 있습니다. 공기는 산소, 질소, 아르곤, 이산화탄소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단지 사람이 볼 수 있는 가시可視 영역을 벗어나서 보이지 않았던 것뿐입니다.

그럼 무형의 기氣는 어떨까요? 기도 종류와 성질에 따라 전기, 자기, 온기, 냉기 등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역易 철학에서는 사물이나 기의 다양한 성질을 음양陰陽의 상대성相對性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음양의 상대성으로 발생한 원인과 결과의 인과율因果律이 존재하는 현상계現象界입니다. 노자께서 말씀하신 ‘유有’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에 반해 음양의 상대성을 초월해 있는 절대계絶對界(본체계本體界)가 있습니다. 노자께서 말씀하신 ‘무無’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음양의 양극단이 없는 자리를 ‘무극無極’이라고 합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축구장의 비유를 들어 보겠습니다.

심판의 호각 소리로 경기가 시작되면 양 팀 선수들이 공을 중심으로 활발히 움직입니다. 둥근 공의 향방과 선수들의 운동에 따라 다양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렇게 #실제 변화하는 상태를 ‘황극皇極’이라고 합니다.# 황극에는 ‘변화의 주재자’라는 뜻도 있습니다.*3)
*3) 전창선ㆍ어윤형, 『음양이 뭐지?』참고


그럼 경기가 시작되기 직전의 상황을 살펴볼까요? 22명의 선수가 11명씩 양 팀으로 나뉘어서 경기장에 입장합니다. 경기장도 중앙선을 경계로 나뉘어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경기를 시작하지 않은 상태로 긴장감만 흐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음극과 양극의 극성은 나타났지만 아직 동動하지 않은 상태를 ‘태극太極’이라고 합니다.

이제 이보다 좀 더 전의 상황으로 가 보겠습니다. 22명이 축구를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아직 팀이 나뉘지 않았습니다. 축구장도 장소만 있을 뿐 골대도 없고 중앙선도 그어져 있지 않습니다. 이처럼 양극과 음극의 극성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상태를 ‘무극無極’이라고 합니다. 음양의 극성은 없지만 구성원은 있으므로 절대적인 무無가 아닌 상대적인 무無입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허虛’, ‘생명 에너지로 충만한 무無’라고 합니다.*4)
*4) 서양에서 인식해 온 무는 ‘절대적인 무’에 가깝다. 그래서 ‘존재자는 있으며, 무는 아니다.’, 또는 ‘무에서는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다.’는 사고방식이 지배적이었다. 서양에서 무는 현대의 실존철학에서 처음으로 주제화되었다
.

무극의 본질인 무無는 절대적인 것은 아니고 상대적인 무無인즉 그것은 순수한 무無일 수는 없고 다만 상象일 뿐인 것이다. - 한동석, 『우주변화의 원리』 42쪽


없음을 있음으로 표현하면?


그런데 이런 의문이 듭니다. ‘없음’인 무(무극)를 ‘있음’으로 표현하면 어떻게 될까요? 이를 풀기 위해 축구에 대해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어릴 적 초등학교에서 친구들과 축구를 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인원수도 맞지 않고 축구공도 아니었지만, 골을 넣고자 하는 열정만은 대단했습니다. 학교 운동장은 그나마 좋았습니다. 너른 운동장에 골대도 있었으니까 말이죠. 동네에서는 좁은 골목이나 공터가 축구장이었습니다.

어느덧 축구 경기가 끝나고 아이들이 집에 갈 준비를 합니다. 모두가 친구일 뿐 어느 팀이었는지는 의미가 없습니다. 이제 골대를 치우고 축구장 가운데의 경계선도 지워 보겠습니다. 그러면 축구장엔 사각형의 경계만 남습니다. 골목의 담도 축구장의 경계로 충분합니다. 그럼 이것으로 무극이 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무극은 음양의 양극성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상태라고 했습니다. 사각형은 각角을 중심으로 수평과 수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담장도 각을 기준으로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짜 무극이 되려면 이런 각이나 그로 인한 성질이 전혀 없어야 합니다. 각이 전혀 없어 성질조차 없는 형태가 ‘원圓’입니다. 그래서 무극은 원으로 상징합니다.
원은 동양의 고전에서 그 모습을 곳곳에 드러내고 있습니다. 중국 명나라 때의 이천李梴은 『의학입문醫學入門』에서 ‘선천도先天圖’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장경악張景岳(1563~1640)은 『유경도익類經圖翼』에서 ‘태허도太虛圖’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진흠陳鑫(1849~1929)은 『진씨태극권도설陳氏太極拳圖說』에서 ‘무극도無極圖’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이름만 다를 뿐 모두 무극으로서의 원을 설명한 것입니다.

무에는 수數, 양量, 공간, 시간 따위에 제한이나 한계가 없는 ‘무한無限’의 의미가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서기전 610~서기전 546)는 만물의 근원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무한인 ‘아페이론apeiron(무한자)’이라고 했습니다. ‘만물은 무한자에서 생성되고 다시 무한자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서양의 중세 시대에는 ‘신神’이 무한으로 여겨졌으며, 근대에는 세계의 시간적⦁공간적 무한성이 주장되었습니다.

그런데 무한에는 무한소無限小와 무한대無限大가 있습니다. 무한을 나타내는 기호는 ‘∞’입니다. 우연의 일치일진 몰라도 원(○)을 두 개 이어 붙인 모양입니다. 하나는 무한대, 다른 하나는 무한소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무한대와 무한소는 이미 대와 소라는 음양의 성질이 나타난 상태이므로, 성질조차도 없는 무극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렇게 무한대와 무한소의 성질이 통일되어있는 상태를 ‘태극太極’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무극은 ‘무한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태극이란 개념은 한마디로 말하면 극히 클 수 있는 바탕을 지니면서도 극히 작은 상象을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 한동석, 『우주변화의 원리』 371~372쪽


암각화에 새겨진 고대의 상징


우리나라에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사시대의 암각화巖刻畫가 있습니다. 1971년 발견되어 1995년 국보로 지정된 ‘반구대盤龜臺 암각화(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유적입니다. 고래를 사냥하는 매우 사실적인 이 그림은 지구상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림은 주제에 따라 사람의 전신이나 얼굴을 표현한 인물상, 바다와 육지 동물을 표현한 동물상, 배와 작살 같은 수렵이나 어로와 관련된 도구상 등 307점의 형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유적과 멀지 않은 곳에 전혀 다른 주제를 담고 있는 또 다른 암각화가 있습니다. 울주군 두동면에서 발견된 ‘천전리川前里 암각화’입니다. 각석의 상부에는 선사 시대의 기하학적 문양과 각종 동물상이 새겨져 있고, 하부에는 삼국 및 통일신라 시대의 그림과 명문이 있습니다. 기하학적 문양은 마름모꼴 무늬⦁굽은 무늬⦁둥근 무늬⦁우렁 무늬⦁십자 무늬⦁삼각 무늬 등이 연속적으로 나타납니다. 이들 문양은 곡식이나 음식물 등이 풍요롭기를 바라는 청동기 시대인의 기원을 담고 있습니다.

선사인들이 바위나 토기에 새긴 기하학 문양은 전 세계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고대의 상징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서로 흡사한 상징적 무늬와 신화적 모티브가 공통의 연원을 가졌으며, 그 연원은 구석기 시대에 생성된 신화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일례로 자주 발견되는 ‘수직의 직선, 지그재그 선, 물결선이 그려진 사람 모양의 신석기 시대 그릇들은 비를 관장하는 하늘 여신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동심 반半타원이나 동심원도 자주 발견되는 문양입니다. 동심원은 가끔 나선으로 바뀌어서 표현되기도 합니다. 신석기 시대에 반타원은 비구름을 의미했습니다. 비의 주인이 하늘 여신이므로 동심원 형태의 구름 기호는 ‘하늘’이란 의미를 얻게 되었습니다. 즉 반타원은 구름, 타원이나 원은 하늘을 의미하고 두 형태는 모두 하늘 여신을 상징합니다.

구석기 시대에 형성된 하늘 여신에 대한 신화는 신석기 시대에 이르러 큰 발전을 이루었다가 청동기 시대 인도유럽인들의 도래와 함께 하늘신의 신화로 바뀌었음을 논증하고 있다. 하늘이 여성이었고, 땅이 남성이었으며, 태양이 여성이었고, 달이 남성이었다는 신화적 관념이 청동기 시대가 되면 그 반대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 아리엘 골란, 『세계의 모든 문양』 7쪽


상평통보에 새긴 하늘과 땅


원圓이 상징하는 하늘에는 ‘하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늘의 다른 말이 ‘한울’인 것에서도 이를 알 수 있습니다. ‘한’은 ‘큰’이라는 뜻이고, ‘울’은 ‘우리’의 준말입니다. ‘한울’은 ‘큰 나(참나)’ 또는 ‘온 세상’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늘로 대표되는 원은 음양의 상대성을 초월하여 하나 된 무차별⦁무경계의 절대계를 상징#합니다. 이를 반영하듯 불교 화엄종에서는 막힘과 분별과 대립이 없으며 일체의 거리낌이 없이 두루 통하는 상태를 ‘원융무애圓融無礙’라고 합니다.

원에는 세계의(그리고 우리 자신의) 깊은 완전성과 통일성, 뛰어난 디자인, 전체성, 그리고 신성한 자연이 투영돼 있다. …… 종교미술은 전통적으로 이러한 신성한 상태를 ‘하늘’, ‘천국’, ‘영원’, ‘깨달음’의 상징으로 나타내는 데 원을 사용해 왔다. - 마이클 슈나이더, 『자연, 예술, 과학의 수학적 원형』 2~3쪽


이에 비해 ‘방方(네모)’은 수직선과 수평선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수직선은 양陽에 해당하고, 수평선은 음陰에 해당합니다. 만물은 음과 양이라는 서로 다른 기운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복합체이고, 땅은 이들이 존재하는 터전입니다. 그래서 땅으로 대표되는 방은 음양의 상대성으로 인해 분별과 경계가 생긴 현상 세계를 상징합니다.*5)
*5) 하나는 만물이 통일된 상태이고, 둘은 분열한 상태이다. 하늘은 하나와 음이 비슷하고, 땅은 둘과 비슷하다.


그리고 각角은 하늘땅의 성정性情을 온전히 이어받은 인간을 상징합니다. 이 때문에 사람은 유한한 땅의 세계에 살면서, 무한한 하늘의 세계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이 수행修行으로, 수행을 통해 오감과 감정, 생각을 넘어서면 절대계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역 무사야 무위야 적연부동 감이수통천하지고
易 无思也 无爲也 寂然不動 感而遂通天下之故
역은 사특한 생각이 없고 인위적인 함도 없어 고요히 움직이지 않다가 문득 느껴서 천하의 연고에 통하니라. - 『주역』 「계사상전」 10장


하늘의 원만한 성질과 땅의 방정한 성질을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고 합니다. 옛사람들은 이런 하늘땅의 성정을 본받고 삶의 양식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몸에 지닐 수 있도록 생활에 꼭 필요한 필수품을 천원지방의 형태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1633년 인조 때 최초로 시험 주조되고, 1678년 숙종 대부터 유통되기 시작한 상평통보常平通寶입니다. 상평은 상시평준常時平準의 준말로, 물가의 안정을 꾀하는 의도와 노력을 반영한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화폐를 세는 단위도 둥근 동전 모양에서 따왔습니다. 우리나라의 ‘원’과 중국의 ‘위안(元)’, 일본의 ‘엔(円)’은 모두 ‘둥글 원圓’ 자에서 유래했습니다. 중국은 16세기 후반 스페인과의 무역을 통해 은화를 들여왔습니다. 그리고 둥글게 생긴 은화를 ‘은원銀圓’이라고 불렀는데, 이때부터 ‘원圓’이 화폐 단위로 등장했습니다. 지금은 글자의 획이 많고 복잡하다는 이유로 음이 동일한 ‘위안元(圆)’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일본도 다양한 형태의 돈을 원형으로 통일하여 ‘엔円(圓)’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원’은 옛 화폐 단위인 ‘원圓’과 ‘환園’에서 소리와 뜻을 가져온 순우리말입니다.

원의 속성은 발음이 같은 글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원源(원原)’은 ‘근원, 근본, 기원’이라는 의미이고, ‘원元’은 ‘으뜸, 처음, 시초’라는 뜻입니다. 특히, 『주역周易』에서는 ‘원元’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건 원형이정
乾 元亨利貞
건은 크고, 형통하고, 이롭고 바르다 하니라. - 『주역』 「건乾괘」 괘사


건괘(䷀)는 양효陽爻로만 구성된 괘로 하늘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천도天道, 성인지도聖人之道를 의미합니다. 원형이정은 하늘의 네 가지 덕성입니다. 원元은 만물을 탄생시키는 봄의 덕성입니다. 형亨은 만물을 성장시키는 여름의 덕성입니다. 이利는 만물을 열매 맺게 하는 가을의 덕성이고, 정貞은 만물의 씨앗을 저장하는 겨울의 덕성입니다. 그중에서도 원元은 만물의 시작을 주관하는 하늘의 덕성을 대표합니다.

건지대시 곤작성물
乾知大始 坤作成物
건은 크게 시작하는 것을 주장하고, 곤은 만물을 이루는 일을 짓는다. - 『주역』 「계사상전」 1장


원元은 ‘으뜸 원’으로 천지인 삼재가 문을 열고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봄의 뜻이 들어 있습니다. 즉 위의 이二는 상천과 하지, 좌우로 나뉜 아래의 인儿(人)은 음양(좌양우음)의 씨앗(人)으로 땅속에서 뿌리가 움직여 밖으로 나오려는 모습입니다. - 김석진, 『대산 주역강의1』



도란 무엇인가?



공자의 도


바위와 계곡물, 꽃, 나무, 새와 곤충. 낮은 앞산만 보더라도 종류를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생물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작은 산도 이러할진대, 대우주는 어떨지 상상조차 되지 않습니다. 각양각색의 만물이 생겨나기 전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인류를 교화하는 사명을 맡은 성인들도 세상의 근원에 대한 의문을 풀고자 심사숙고하였습니다. 그 결과 우주와 인생에 대한 깨달음을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전했습니다.

일음일양지위도
一陰一陽之謂道 - 『주역』 「계사상전」 5장

역 철학을 공부하면 처음 마주치게 되는 구절로, 우주의 변화 원리를 파악할 수 있도록 공자께서 기록한 핵심 내용입니다. 일반적으로는 ‘한 번은 음 운동을 하고 한 번은 양 운동을 하는 것을 도라고 한다.’로 해석합니다. 도를 음과 양의 변화 원리原理로 설명한 것입니다. 이와 달리 ‘한 번 음이 되도록 하고, 한 번 양이 되도록 하는 힘의 근원(역원力源)을 도라고 한다.’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도를 음양 운동의 원동력인 기氣로 설명한 것입니다.
이처럼 공자께서는 도를 우주 만물의 근원(본체)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공자께서 말씀하신 도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한 답도 『주역』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역유태극 시생양의 양의생사상 사상생팔괘
易有太極 是生兩儀 兩儀生四象 四象生八卦
역에는 태극이 있으니, 태극이 양의를 생하고, 양의가 사상을 생하고, 사상이 팔괘를 생한다. - 『주역』 「계사상전」 11장

앞 구절에서는 ‘음 운동과 양 운동을 하는 것이 도’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는 ‘태극이 음과 양을 생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자께서 말씀하신 도는 태극을 의미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노자의 도


노장사상老莊思想의 핵심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고 합니다. 무위자연이란 ‘꾸밈이 없이 자연의 순리에 따른 삶을 산다.’는 의미로, ‘사람이 의도적으로 일을 만든다.’는 ‘인위人爲’에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노자 철학을 무위無爲의 철학이라고 할 만큼, 노자께서는 무無를 중시하였습니다. 그래서 『도덕경道德經』 곳곳에서 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명천지지시 유명천지지모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무는 천지의 시작을 지칭하고, 유는 만물의 어미를 지칭한다. - 『도덕경』 1장*6)

*6) ‘이름이 없을 때는 하늘땅의 시작점이 되며, 이름이 있을 때는 만물의 어미가 된다.’로도 푼다.


일반적으로 천지는 만물의 부모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유有는 천지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무無는 천지가 시작될 때의 상태, 또는 천지의 운동을 시작하게 한 존재입니다. 노자의 무에 대한 인식은 다음 글귀에서 좀 더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천하만물생어유 유생어무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천하의 모든 사물은 있음에서 생겨나고, 있음은 없음에서 생겨난다. - 『도덕경』 40장


도생일 일생이 이생삼 삼생만물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도가 일을 생하고, 일이 이를 생하고, 이가 삼을 생하고, 삼이 만물을 생한다. - 『도덕경』 42장


우주 수학의 원전인 『천부경天符經』에서도 이와 관련한 내용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일시무시일
一始無始一
하나는 천지 만물이 비롯된 근본이나 무에서 비롯한 하나이니라. - 『천부경』


이 구절을 『도덕경』처럼 바꾸면 ‘무생일無生一’로 표현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므로 위의 세 구절을 비교해 보면 노자께서 말씀하신 도道는 무無와 같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에서 일⋅이⋅삼의 과정을 거쳐서 생겨난 유가 천지 만물을 낳는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북송 시기의 역학자이자 도사인 진단陳摶(871~989)의 글에서도 ‘노자의 도가 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는 태극이 아직 나타나기 이전, 한 점의 텅 비고 신령스러운 기운으로서 이른바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그것이다.(無者 太極未判之時 一點太虛靈氣 所謂 視之不見 聽之不聞也) - 진단, 『정역심법주正易心法註』


노자께서는 ‘상덕불특常德不忒 복귀어무극復歸於無極(항상 덕은 어긋남이 없어 무극의 상태로 돌아간다 - 『도덕경』 28장)’이라 하여 무를 무극으로도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도생일道生一 일생이一生二’는 ‘무극생태극無極生太極 태극생음양太極生陰陽’으로 바꿔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상을 통해 공자는 도를 태극太極으로, 노자는 도를 무극無極으로 인식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