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사관의 진실 | 환단고기가 처음 밝혀 주는 역사 진실(15)

[역사X파일]

환단고기는 인간이 천지광명을 체험하며 살았던 창세 역사 시대인 ‘환단 시대 이래 한민족의 역사 이야기책’이다!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우리 역사, 문화의 원형을 밝혀 주는 보배로운 사서이다. 특히 환단고기는 다른 사서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역사 사실이 많이 실려 있다. 『환단고기 역주본』(상생출판)의 해제 편에서는 ‘환단고기에서만 전해 주는 새로운 역사 진실’이라고 하여 이를 52가지로 정리하여 밝혀 주고 있다. 이를 중심으로 환단고기의 진정한 역사적 가치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41 임나의 위치를 밝혀 준다!


임나자 본재대마도서북계 북조해
任那者는 本在對馬島西北界하니 北阻海하고
유치왈국미성
有治曰國尾城이오 …
후 대마이도 수위임나소제고
後에 對馬二島가 遂爲任那所制故로
자시 임나 내대마전칭야
自是로 任那는 乃對馬全稱也라
자고 구주대마 내삼한분치지지야
自古로 仇州對馬는 乃三韓分治之地也오
본비왜인세거지
本非倭人世居地라.
임나 우분위삼가라 소위가라자 수읍지칭야
任那가 又分爲三加羅하니 所謂加羅者는 首邑之稱也라.
자시 삼한 상쟁 세구불해 좌호가라 속신라
自是로 三汗이 相爭하야 歲久不解하니 佐護加羅는 屬新羅하고
인위가라 속고구려 계지가라 속백제 시야
仁位加羅는 屬高句麗하고 雞知加羅는 屬百濟가 是也라.
영락십년 삼가라 진귀아
永樂十年에 三加羅가 盡歸我하니
자시 해륙제왜 실통어임나
自是로 海陸諸倭가 悉統於任那하야
분치십국 호위연정
分治十國하니 號爲聯政이라.
연 직할어고구려 비열제소명 부득자전야
然이나 直轄於高句麗하야 非烈帝所命이면 不得自專也니라
임나는 본래 대마도의 서북 경계에 위치하여 북쪽은 바다에 막혀 있다. 다스리는 곳을 국미성이라 했다 …… 뒤에 대마도 두 섬이 마침내 임나의 통제를 받게 되어 이때부터 임나는 대마도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다. 옛날부터 규슈九州와 대마도는 삼한이 나누어 다스린 땅으로, 본래 왜인들이 대대로 살던 곳이 아니다. 임나가 또 나뉘어 삼가라가 되었는데, 이른바 가라라는 것은 중심이 되는 읍을 부르는 이름이다. 이때부터 삼한이 서로 다투어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화해하지 못하였다. 좌호가라가 신라에 속하고, 인위가라가 고구려에 속하고, 계지가라가 백제에 속한 것은 이 때문이다.
영락 10년에 삼가라가 모두 고구려에게 귀속되었다. 이때부터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를 모두 임나에서 통제하여 열 나라로 나누어 다스리면서 연정이라 했다. 그러나 고구려에서 직접 관할하였으므로 열제의 명령 없이 마음대로 하지는 못하였다. (『환단고기桓檀古記』 「태백일사太白逸史」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임나는 어디일까? 그리고 왜 임나가 문제가 되는가? 그것은 아직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이 유효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임나일본부설은 문자적으로는 ‘임나任那에 있었던 일본日本의 부府, 즉 관청’이라는 말이다. 우파 일본인들은 『일본서기』의 내용을 근거로, 일본의 야마토 왜[大和倭]의 신공황후神功皇后가 369년 한반도 남부 지역에 진출하여 백제⋅신라⋅가야를 지배하고, 특히 가야에는 일본부日本府라는 기관을 두어 562년까지 직접 지배하였다는 설을 주장한다. 이것을 일명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이라고도 한다.

분명 황당하기 그지없는 이 주장은 19세기 후반 ‘정한론征韓論’을 타고 크게 성장했다. 온갖 근거를 다 끌어와서 임나일본부 주장을 뒷받침하려 했다. 아시다시피 광개토대왕비문을 왜곡한 것이나 백제 왕이 일본 후에게 하사한 칠지도七支刀의 명문銘文을 왜곡하여 해석하는 것도 그런 일환이다.
그리고 임나일본부 주장의 후속 작업으로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을 주장했다. 일본이 가야를 200년간 지배했다는 주장이 사실이 되려면 『삼국사기』에 그런 내용이 조금이라도 나와야 한다. 하지만 삼국사기 어디를 찾아봐도 ‘임나일본부’ 비슷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일제 식민사학자 3인방 가운데 한 사람인 쓰다 쏘우키치津田左右吉라는 학자가 ‘『삼국사기』 내용 중 고구려, 백제, 신라의 건국 초기 기록은 인정할 수 없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언뜻 보아도 이상해 보이는 이 주장을 당시 일제에 부역했던 우리나라 사학자들이 정설로 받아들였고 그들이 해방 이후에도 역사학계의 주류가 되면서 그대로 계승되어 내려왔다. 그 결과 우리의 학교 역사 교과서에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의 여독이 그대로 남아 있다. 통탄할 일이다.

임나 7국
비자발比自㶱, 남가라南加羅, 녹국㖨國, 안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 - 『일본서기』 369년 조


임나 10국
가라국加羅國, 안라국安羅國, 사이기국斯二岐國, 다라국多羅國, 졸마국卒麻國, 고차국古嵯國, 자타국子他國, 산반하국散半下國, 걸찬국乞湌國, 임례국稔禮國 - 『일본서기』 562년 조


하지만 더 황당한 일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으니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 7국, 임나 10국의 지명 중 일부를 우리나라 쪽으로 옮기려는 움직임이다. 경상도 합천과 전라도 남원에 있는 문화 유적을 각각 다라국과 기문국의 유적으로 인정하여 유네스코에 등재하려는 것이다. 유네스코 등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문제는 누구의 것으로 하느냐이다. 만약 그 유물의 주체를 기문국과 다라국으로 등재한다면 일본의 임나 위치 비정을 인정해 주는 격이다. 일본은 여전히 ‘임나=가야’라고 주장하며 구체적으로 임나 7국, 임나 10국을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만약 다라국이나 기문국을 한반도로 옮겨 버리면 나머지 임나 국가들도 자연히 그 근방으로 옮겨 오게 된다. 이는 자연스레 임나를 한국의 남부 지역으로 옮겨 오게 되는 것이다. 일본의 침략사관 ‘임나일본부’를 우리가 승인해 주는 꼴이 아닌가?

바로 여기서 역사 수호자로 자리를 잡은 『환단고기』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환단고기』에서는 임나의 위치를 정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으며, 대마도의 서북 경계가 임나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또 대마도를 고구려, 백제, 신라가 삼등분하여 통치하였고 각기 인위가라仁位加羅, 계지가라雞知加羅, 좌호가라佐護加羅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 기록대로 대마도에는 아직까지 좌호, 인위, 계지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학교 이름, 우체국 이름, 지도, 버스 표지판 등에서 세 지명을 흔히 볼 수 있다. 현지인의 안내에 의하면 이런 지명이 사용된 것은 천 년도 넘었다고 한다. 대마도에 계지, 인위, 좌호라는 지명이 있다는 것은 오직 『환단고기』에만 나오는 내용이다.
『환단고기』에서는 ‘분치십국分治十國’이라 하여 ‘임나 10국’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임나에서 해륙제왜海陸諸倭, 바다와 육지의 모든 왜를 10국으로 나누어 다스렸다고 한다. 임나가 대마도라면 임나 10국이 어디에 있어야 합당할까? 당연히 임나 10국 모두 일본 본토와 주변 섬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환단고기』에는 이미 단군조선 때부터 일본 열도를 정벌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렇다면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이주한 사람을 가리키는 ‘도래인渡來人’의 역사는 그 이전 까마득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렇게 넘어가는 사람들의 중간 기착지였던 곳이 대마도였다. 대마도의 이름 ‘대마對馬’는 말 그대로 ‘마한馬韓을 마주 대對하고’ 있는 곳이다. 이곳 대마도의 가장 위 북단, 고향 땅이 잘 보이는 곳에서 이들은 고향을 그리워하며 절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곳 이름이 임나任那이다. 임나는 ‘님의 나라, 님의 땅’이라는 말이다.

42 구야한국과 다라한국의 위치와 존재를 밝혀 준다!



초 변진구야국인 선재단취 시위구야한국
初에 弁辰狗邪國人이 先在團聚하니 是爲狗邪韓國이오
다파라 일칭다라한국 자홀본이래
多婆羅는 一稱多羅韓國이니 自忽本而來하야
여고구려 조이정친고 상위열제소제
與高句麗로 早已定親故로 常爲烈帝所制라
다라국 여안라국 동린이동성
多羅國은 與安羅國으로 同隣而同姓이오
구유웅습성 금구주웅본성 시야
舊有熊襲城하니 今九州熊本城이 是也라.
처음에 변진弁辰 구야국狗邪國 사람이 먼저 들어와서 모여 살았는데 이것을 구야한국狗邪韓國 이라 하였다. 다파라多婆羅를 일명 다라한국多羅韓國이라 불렀다. 이곳 사람들은 홀본忽本(졸본)에서 이주해 와서 일찍이 고구려와 친교를 맺었으므로 늘 고구려 열제의 통제를 받았다.
다라국은 안라국安羅國과 서로 이웃하고 성씨도 같았다. 옛날에는 이곳에 웅습熊襲(구마소)성城이 있었는데, 지금의 큐슈 구마모토熊本성이 바로 그곳이다.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선시 협보 분남한 거마한산중
先是에 陜父가 奔南韓하야 居馬韓山中하니
종이출거자 수백여가
從而出居者가 數百餘家라
미기 세련대겸 유리편로 협보 내지장혁
未幾에 歲連大歉하야 流離遍路어늘 陜父가 乃知將革하고
유중과량 주종패수이하 유해포이잠항
誘衆裹糧하야 舟從浿水而下하고 由海浦而潜航하야
직도구야한국 내가라해북안야 거수월
直到狗邪韓國하니 乃加羅海北岸也라 居數月에
전사우아소산이거지 시위다파라국지시조야
轉徙于阿蘇山而居之하니 是爲多婆羅國之始祖也라
이에 앞서 먼저 협보陜父가 남한南韓으로 달아나 마한산(지금의 평양)에 은거하고 있을 때, 따라와서 사는 자가 수백여 가구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해 흉년이 들어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길에 가득하였다. 이때 협보가 장차 변란이 있을 줄 알고 무리를 꾀어 양식을 싸서 배를 타고 패수를 따라 내려왔다. 해포海浦를 거쳐 몰래 항해하여 곧장 구야한국狗邪韓國에 이르니, 곧 가라해加羅海의 북쪽 해안이었다. 몇 달 지내다가 아소산阿蘇山으로 옮겨 살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다파라국多婆羅國의 시조이다.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협보陜父는 오이烏伊, 마리摩離와 함께 고주몽성제의 고구려 건국을 도운 창업 공신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는 ‘2세 유리명열제가 사냥을 나가 5일 동안 회궁하지 않자 대보大輔인 협보가 직간하였다. 열제가 듣지 않자 협보는 남한南韓(대동강 부근 지역)으로 달아났다.’고 하였다.
『환단고기』에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협보가 바다 건너 규슈九州에서 #다파라국多婆羅國#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와 왜의 교류가 초기부터 시작되었음을 알수 있다. 『환단고기』에서는 다파라국을 일명 #다라한국多羅韓國#이라 불렀다고 했고 고구려의 통제를 받았다고 한다. #구야한국狗邪韓國# 역시 규슈九州에 있었는데 이곳은 변진 12국 중 구야국 사람들이 일본에 건너가서 세운 나라이다.
고구려 계통의 사람들이 세운 나라가 하나 더 있었으니 #안라국安羅國#이다. 안라국은 일명 #아소국阿蘇國#이었다. 아소산 근처에 있어 아소국이다. 아소산은 아사달阿斯達의 전음轉音이고, 안라국은‘ 아스벌 나라’라는 뜻이다. 안라는 본래 고구려 계통에 속한 관가官家였기 때문에 (광개토열제비문에도 나오는 것처럼) 광개토열제가 왜倭를 정벌한 후 안라인을 수병戍兵(수비병)으로 한 것이다. 우리 민족의 일본 열도 이주사는 삼국시대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