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의 대명사, 장안長安

[열두 도시로 살펴보는 세계사]
이해영 전임기자 / 서울관악도장


13개 왕조의 수도, 장안



중국 5천 년 역사에서 수많은 왕조가 흥망성쇠를 겪었지만, 그 중심지는 몇 곳으로 요약할 수 있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 베이징北京과 난징南京, 황허 중류의 뤄양洛陽과 카이펑開封, 그리고 오늘날 시안西安으로 불리는 장안長安이다.

이 중 장안은 중국 서북부 관중關中 평야 한가운데 있으며 서쪽에는 황하, 북쪽에는 웨이수이강(渭水江)과 징수이강(涇水江)이 흐르는 도시이다. 흔히 사리의 옳고 그름과 시비의 분간을 이를 때 “경위涇渭가 바르다, 분명하다.”라는 말을 하는데, 이는 장안을 흐르는 징수이강과 웨이수이강에서 나온 말이다.

‘경’은 황하의 지류인 징수이강涇水江을 말하고, ‘위’는 또 다른 지류로 황하 최대 지류인 웨이수이강渭水江을 말한다. 이 두 개의 강은 시안西安 부근에서 만나 합쳐지는데, 징수이강은 항상 흐리고 웨이수이강은 맑아 두 물이 섞여 흐르는 동안에도 맑음과 흐림이 합쳐지지 않고 그 구별이 분명하다는 것에 비유하여 나온 말이다.

이 징수이강과 웨이수이강 특히나 시안을 둘러싸고 보호받는 경지 면적이 엄청나다. 시안이 자리한 관중 평야는 뤄양의 다섯 배에 달하는 넓은 옥토로, 금성천리金城千里(천 리 땅에 걸친 견고한 성)나 다름없으며 천부지국天府之國(하늘 곳간의 나라)이라고 불린 옥토의 땅이었다.

그래서 고대 중국 역사에선 이 관중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得關中者得天下)란 말이 언제나 있었을 정도의 요충지였다. 이를 증명하듯 역대 13개 왕조의 수도가 이곳에 세워질 정도로 장안은 유서가 깊은 곳이다. 장안은 서주西周⋅진秦⋅전한前漢⋅신新⋅전조前趙⋅전진前秦⋅후진後秦⋅서위西魏⋅북주北周⋅수隋⋅당唐 등 11개 왕조의 수도였고, 후한後漢과 서진西晉의 경우에는 수년간 임시 수도였다.


천혜의 요새로 지켜진 수도



중국 서북부 산시성陝西省에 있는 시안西安(장안長安)은 고대 중국의 수도이자 3천 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도시이며, 실크로드의 동쪽 기점으로서 동서 문명의 교류를 이끈 세계사의 핵심 도시이기도 했다. 최초로 이곳에 수도를 정한 나라는 주周나라다. 기원전 11세기경 주나라 무왕은 현재 시안시 서남쪽 근교인 호경鎬京을 수도로 정했다. 그 이유는 바로 군사적, 경제적 요건이 충족되었기 때문이다.

북쪽을 흐르는 웨이수이강과 남쪽으로 이어지는 2,000~3,000미터 높이의 친링산맥秦嶺山脈은 천연 요새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친링산맥은 중국 남북의 자연 경계가 되며 수많은 식물과 야생 동물들이 서식하는 곳으로 삼국 시절 촉한의 제갈량이 이 산맥을 넘기 위해 북벌을 시도했었다. 시안이 위치한 관중 평야는 비옥한 토질로 농업에 적합했다.

이후 주나라는 기원전 770년 무렵 황하 중류 허난성 뤄양시 서쪽의 낙읍洛邑으로 천도했다. 바로 동주東周 시대로 이후 주나라는 급속히 쇠퇴하였고, 춘추전국 시대에 돌입하게 된다. 당시 #지금의 시안 북서쪽에 수도를 정한 나라가 전국 시대에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전국 7웅 중 하나인 진秦나라#이다. 기원전 4세기에 웨이수이강 북쪽 연안의 셴양(함양咸陽)을 수도로 삼은 진나라는 드디어 기원전 3세기에 동주와 여섯 나라를 잇달아 멸망시키고, 기원전 221년 중국 역사상 최초로 통일 제국을 세웠다.

통일에 성공한 진나라의 제31대 군주이자 초대 황제인 시황제는 진의 도읍인 셴양이 주나라와 관련한 유서 깊은 땅이라는 점을 이유로 웨이수이강 남쪽 연안에 아방궁阿房宮을 건설하였다. 이에 따라 도시 면적이 확대되어 웨이수이강은 셴양의 동서를 가로지르게 되었다. 지금 관광 명소로 유명한 진시황릉도 이때 조성되었다.

몰락과 부흥 - ‘영원히 평안한 도시’




그러나 천하를 통일한 진 제국은 시황제가 49세로 사망한 후 진나라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진나라는 통일의 대업을 이룬 지 15년 만에 붕괴했다. 진의 수도였던 셴양은 초패왕 항우項羽에 의해 초토화되었다. 이후 초한 전쟁에서 항우에게 승리한 유방劉邦은 한漢 왕조를 세웠다. 한 고조 유방은 동주의 수도인 뤄양에 수도를 세우고자 했지만, 동쪽에 함곡관, 서쪽에 산관, 남쪽에 무관, 북쪽에 소관 등 네 관문으로 둘러싸인 한중漢中 지역이 방어력과 높은 농업 생산력을 갖춘 땅이라고 주장하는 신하들의 진언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시황제가 웨이수이강 남쪽으로 확장한 셴양(함양咸陽) 자리에 수도 장안을 건설했다.

진나라 시대 옛 지명에서 유래한 장안의 이름은 ‘영원히 평안하다(長安)’의 뜻을 담고 있다. 즉 ‘영원한 도시’를 뜻한다. 이후 한 왕조는 진나라 시대 별궁을 중축하고 새 궁전도 짓는 등 장안은 수도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애초에 셴양 남부를 중심으로 수도를 정비했기 때문에, 궁궐이 장안의 남단에 위치하고 북쪽을 향한 도시가 펼쳐지는 독특한 구조가 되었다.

한 무제武帝 시대에 장안은 제국의 수도로서 가장 번영했다. 당시 장안성長安城의 대부분은 장락궁과 미앙궁 등의 궁궐과 관청들이 차지하고 있어, 황제와 고급 관료들을 위해 설계된 도시라고 할 수 있었다. 장안성의 모양은 북쪽이 북두칠성北斗七星, 남쪽이 남두육성南斗六星의 모양을 하고 있어 두성斗城이라 불렸다. 경제 활동은 주로 도시 북서쪽의 서시西市와 동시東市에서 행해졌는데, 두 시장은 웨이수이강에 가깝게 위치했다.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도시가 아니어서 궁궐 주변의 빈 곳에 관청을 짓고, 또 그 주위에 관리들의 숙소를 짓는 등 건물 배치도 잡다했다.

그러나 기원후 1세기 정치 실권을 장악한 외척 왕망王莽이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신新나라를 건국했다. 하지만 반란으로 신나라는 곧바로 무너졌고, 혼란을 수습하고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가 28장의 도움으로 후한後漢을 건국하여 뤄양(낙양洛陽)으로 수도를 옮겼다. 그 배경에는 뤄양이 신성한 땅이기 때문이라는 주장, 뤄양이 광무제의 세력 기반이었다는 주장, 장안이 황폐화했기 때문이라는 여러 주장이 있다.

내란으로 폐허가 된 장안은 후한 말기 점차 활기를 되찾는 듯했다. 그러나 황건적의 난을 가까스로 진압하여 수명 연장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지만은 않았던 후한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 버린 인물 동탁董卓이 어린 황제 헌제를 마음대로 주무르며 국정을 농단하였고, 무작정 장안으로 천도를 감행했다. 하지만 동탁은 왕윤과 여포에 의해 살해당하고 장안은 동탁의 부하 무장들에 의해 참혹하게 파괴되었으며, 이후 위魏⋅촉蜀⋅오吳 삼국 시절과 위진魏晉 남북조南北朝의 혼란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장안은 삼국 시대에 위나라의 주둔지가 되었고, 이후 북위를 거쳐 동서로 분열된 서위西魏 및 북주北周, 수隋나라, 당唐나라 때 꾸준히 수도로 기능하여 뤄양과 함께 북송北宋대 이전까지 중국의 중심 도시였다.


주도면밀한 계획도시



남북조 시대 말기 북주는 장안을 수도로 정했는데, 황실의 외척이던 양견楊堅이 제위를 양위 받아 수隋나라를 건국했다. 수 문제文帝는 자신의 작위였던 대흥군공大興郡公에서 이름을 따 장안을 ‘대흥성大興城’으로 개칭하고, 전한 시대부터 이어진 장안 도심에서 동남쪽으로 약 10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에 새롭게 도시를 건설했다.

옛 장안은 건축물의 노후화, 토양 염화 현상으로 인한 생활용수 확보의 어려움, 저지대라는 지형적 조건으로 인해 자주 발생하는 수해 등 여러 문제가 있어 수도로서 조건이 좋지 않았다. 또 이민족의 침입이나 인구 증가에 대비해 군사와 치안 기능을 강화할 필요도 있었다. 그래서 친링秦嶺산맥의 풍부한 물을 이용할 수 있는 구릉 지대에 새로운 수도를 조성한 것이다.

새로운 장안, 대흥성은 옛 장안과는 대조적으로 계획도시로 건설되었다. 우선 중앙 북단에 황궁, 그 남쪽에 관청들이 늘어선 황성을 짓고 성벽으로 에워쌌다. 그리고 황성의 남단부터 폭이 약 150미터에 달하는 주작대로朱雀大路를 남쪽으로 4킬로미터가량 길게 뻗도록 했다. 동서 양쪽으로는 시장을 설치하고, 주작대로를 중심축으로 좌우가 완전히 대칭하는 거리를 건설했다. 거리는 벽과 문을 갖추어 작은 도시와 같은 기능을 하도록 구획한 110개의 ‘방坊’으로 나누었고, 그 안에 집과 사원 등을 건축하였다. 이렇게 바둑판처럼 반듯하게 정비된 거리의 외곽에는 높이 5미터 정도의 성벽을 세웠다.

또한 태양의 운행과 북극성의 관찰 등에 의해 방위를 측정하고, 남북의 중심축과 궁성의 위치를 결정한 후 황성과 나머지 거리를 조정했다. 외곽 성벽 공사는 수나라 2대 황제인 양제煬帝 시대에 시작하여 당나라 3대 황제인 고종高宗 때 비로소 완성되었다.

이토록 거대한 도시를 건설한 이유는 수 제국의 기원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북조를 이은 수나라 황실은 북방 유목민인 선비족 출신이었다. 그런데 한족 황제가 다스린 남조는 한나라부터 이어진 중국 고전 문화를 계승했다며 왕권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조를 무너뜨리고 남북을 통일한 문제는 수나라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음양오행과 풍수 사상을 토대로 하여 계획적으로 새로운 제국의 수도를 만들었다.

전통적으로 동양에서 수도首都의 건설은 이상적인 도시 계획을 담은 『주례周禮』를 바탕으로 했다. 음양 사상을 토대로 한 좌우 대칭의 배치나 남북의 중심축 위에 놓인 궁성은 그곳에 거처하는 황제가 질서의 근원임을 의미했다. 한편, 『주례』에 담긴 이상적인 도시의 모습에는 궁성이 도시의 중앙에 위치하지만, 대흥성에서는 중앙 북단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이유가 북극성을 하늘의 중심으로 절대시한 사상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남북축을 이용한 의례를 행하기 위해서라는 설도 있다.


문화의 용광로 장안



618년 수나라는 무리하게 고구려를 침공하다 건국한 지 37년 만에 멸망하였다. 수나라 멸망 후 혼란 상황에서 수 양제의 이종사촌 형인 이연李淵이 아들 이세민의 도움을 받아 당唐나라를 세웠다. 당 제국은 대흥성을 그대로 이어받아 장안으로 이름을 바꾸고 수도로 정했다.

장안성은 외성의 길이가 동서 9.7킬로미터, 남북 8.6킬로미터에 달했으며 동서남북의 성벽에 각각 세 개씩 총 열두 개의 성문이 있었다. 내부는 110개의 방坊으로 구획되어 엄격한 통금이 실시되었고, 황성의 정문인 주작문 앞으로 곧게 뻗은 폭 150미터의 주작대로를 경계로 동서 지역인 장안현長安縣과 만년현萬年縣으로 나뉘었다. 장안현과 만년현에는 각각 동시東市와 서시西市라는 상업 전용 구역이 설치되었다. 특히 서시는 실크로드의 시발점이자 종점 역할을 해 세계 각국의 상인들이 몰려들었다.

장안성 남동쪽에는 당 현종玄宗 때 파내어 생긴 곡강지曲江池가 인근의 부용원芙溶園과 더불어 명승지로 유명했다. 장안성 내에는 수나라와 당나라 초기 황실의 정궁인 태극궁太極宮과 두 궁전이 추가되었다. 저지대에 있는 궁성에서 염해鹽害가 발생하여 수질이 악화한 점 등을 이유로, 7세기 전반부터 중반에 걸쳐 궁성의 동북쪽에 있는 고지대에 두 번째 궁전인 대명궁大明宮을 건설했고, 8세기 전반 현종 시대에는 동시東市 근처에 세 번째 궁전인 흥경궁興慶宮을 건설했다. 당 현종이 친왕이었을 때 살았던 저택을 궁궐로 증축한 것이 흥경궁이며, 지금은 폐허로 남았지만 정전이 중국 역사상 최대 크기의 건축이라는 함원전을 가진 대명궁은 당 태종 때 장안성 외성 북쪽에 맞닿아 건축되었다.

새 궁전들은 좌우 대칭이 정연한 도시 계획을 무너뜨렸을 뿐 아니라 거주민의 주거 환경에도 영향을 미쳤다. 대명궁과 흥경궁에 가까운 동쪽 시가지 북부부터 중부에 걸쳐 관인官人이 모여 살기 시작했고, 동시와 그 주변에는 관인들을 주 고객으로 삼은 고급 상점가가 형성되었다. 대조적으로 서쪽 시가지에는 서시를 중심으로 서민촌이 형성되어 소규모 점포가 늘어섰다.

당나라의 장안성은 정교한 도로망과 시장 체계를 갖추었고, 이런 모습은 7~8세기 동아시아 수도의 표준처럼 여겨졌다. 대진국(발해)의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와 신라의 금성金城, 일본의 헤이조쿄平城京(지금의 나라奈良)와 헤이안쿄平安京(지금의 교토京都)는 장안성을 모방했기 때문에 도시 외양이 비슷해졌다. 다만 신라의 금성은 대진국이나 일본과 달리 원래 존재하던 도시를 개조한 셈이라 장안성의 구조를 똑같지는 않고 부분적으로 도입하였다. 그리고 후대 동아시아 국가들도 풍수지리, 유교, 불교, 도교 사상도 반영하느라 조금씩 변형되긴 했지만, 기본적인 도성 구조에서 당 제국의 수도 장안의 영향이 계속 남았다.


실크로드의 중심지



7세기에 당나라는 유목민 국가인 돌궐突厥을 무찔렀다. 이를 계기로 서역 오아시스 도시를 정복하고 실크로드의 요충지를 확보했다. 장안은 실크로드의 동쪽 기점으로서 비단, 도자기, 차, 종이 등이 서방으로 전해졌다. 반대로 서역에서 온 보석, 향료, 음악, 종교가 장안에 유입되었다. 이 교류는 동서 문명의 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각국에서 조공 사절과 수많은 상인이 모여들었다. 동서 교역의 중심지로서 페르시아⋅아라비아⋅인도⋅중앙아시아 상인들이 모여드는 국제도시였다. 특히 이란계 사산 왕조가 멸망했을 때 많은 페르시아인이 이주해 와서 장안의 서쪽에는 서역인 거주 지역이 따로 생길 정도였다.

장안에는 불교와 도교뿐만 아니라 조로아스터교, 이슬람, 그리스도교 일파인 경교景敎(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마니교 등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며 문화적 융합을 이끌었다. 그에 따라 다양한 종교 사원이 건립되기도 하였는데 그중 특히 많았던 사원은 절이다. 중국 소설 『서유기」에 등장하는 삼장법사의 모델인 현장법사가 서역에서 불경을 가지고 돌아오자, 이를 보관하기 위해 대자은사大慈恩寺에는 대안탑大雁塔과 소안탑小雁塔이 세워지기도 했다. 7층 전탑塼塔인 대안탑 위에 오르면 시내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었다고 한다. 당나라 최전성기를 맞이한 현종 시대에 장안의 인구는 약 100만 명을 넘는 세계 최대 도시로 번영했다. 이때 장안은 당시 장안과 함께 세계 3대 도시로 일컬어지던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아바스 왕조의 수도 바그다드보다도 인구가 많았고 규모 또한 압도적이었다.


당 제국 멸망 이후



하지만 ‘개원開元의 치治’로 당 제국의 중흥을 이루었던 현종도 말년에는 여러 실정을 거듭하였다. 현종에게 총애받던 양귀비를 등에 업고 양귀비 일족이 실권을 장악하였고 환관들이 발호하기 시작했다. 이에 지방에서 강력한 군권을 가지고 있던 범양 절도사 안녹산安祿山과 부하인 사사명史思明, 그리고 그 자녀들이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켰다.

755년에 시작된 이 ‘안녹산과 사사명의 난’은 9년 후 763년 2월에야 가까스로 진압되었지만, 이 기간에 당나라는 인구의 5분의 1 정도가 줄었다고 한다. 이 반란은 위구르족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위구르에 의해 장안은 황폐해졌다. 당나라는 안사의 난으로 인해 제도와 지배력 등이 많이 떨어졌지만 강남의 풍부한 경제력 덕분에 명맥을 유지했으나, 875년 일어난 ‘황소黃巢의 난’으로 인해 재기 불능의 상태에 빠졌다.

난을 일으킨 황소군의 간부였던 주온朱溫(주전충朱全忠)은 당 왕조에 투항한 뒤 요직에 올라 실권을 장악했다. 주전충은 뤄양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여, 장안의 왕궁과 관청, 주택을 허물고 건축 자재를 웨이수이강에서 황허강을 거쳐 뤄양으로 운반하여 신도시 건설에 이용했다. 황제와 백성들도 모두 뤄양으로 옮겨간 후 장안은 폐허가 되었고, 907년 당나라는 멸망했다.

주전충이 황허강에 인접한 변경(현재의 카이펑開封)을 수도로 삼고 후량後梁을 건국한 뒤, 중원 지역은 여러 왕조가 흥망을 거듭하는 오대십국五代十國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때 장안은 대안부大安府로 개칭하였으며 당의 후신을 칭한 후당을 포함해서 이후의 5대 왕조는 뤄양(낙양洛陽)과 카이펑(개봉開封)을 도읍으로 삼았다. 이때 이후로 장안은 뤄양과 함께 이후 두 번 다시는 옛 영광을 회복하지 못했다.

10세기 중반에는 카이펑을 중심으로 건국한 송宋(북송北宋)이 여진족의 금金나라에 쫓겨 남하해서, 방어에 좋은 린안臨安(현재의 항저우杭州시)을 거점으로 왕조(남송南宋)를 재건했다. 이후 강남 지역의 개발이 진행되었다.


중국사의 중심에서 밀려난 장안



당 제국 멸망 이후 장안은 폐허가 되었다. 그 이유는 후한 말부터 이어진 계속된 전란과 환경 파괴로 인한 산시陝西, 산시山西 일대의 토지 염화 때문이었다. 장안은 지금의 산시성陝西省 지역의 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 산시성 지역 자체가 전체적인 중국 본토 기준으로 아주 살짝 서쪽으로 치우친 위치이며 장안 주변 지형도 험준한 산지에 한정된 입구만이 존재하는 폐쇄적인 분지 지형이지만, 그 안의 분지가 비옥하다는 강점이 있다. 즉, 지키기 좋으면서 매우 비옥한 지역이기도 하여 세력 확장의 기반으로서도 최고의 지역이었다.

전성기에는 이 일대의 부양력만으로도 어느 정도 뒷받침되었으므로, 장안은 수천 년간 중국의 수도이자 가장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그래서 장안을 수도로 정한 통일 제국은 그 세력을 떨쳐 나가려고 했다. 전한이나 당나라가 그러했고, 중원으로 들어가 뤄양 등지에 수도를 옮긴 나라는 내부 안정을 꾀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후한 말부터 이어진 계속된 전란으로 관개 시설이 파괴되는 일이 잦았고, 여기에 수천 년간 계속된 농사 및 산림 벌채로 산시陝西, 산시山西 일대의 강수량이 감소했다. 또한 토지 염화로 장안을 포함한 관중 분지의 생산력은 감소되고 식량 자급조차 쉽지 않게 되었다. 이미 진秦과 한漢나라 시절에 중국에서 가장 풍요로운 곳이라던 관중 지역이 아니게 된 것이다. 이렇게 농사에 치명적인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잠시 화북을 통일한 북위는 관개 시설을 복구하는 한편 물을 적게 사용하는 밀 농사로 대체하며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수-당나라 시기에는 부양해야 할 인구가 이전 시대에 비해 엄청나게 늘었고 토지 염화 문제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았다. 그래서 수나라는 현재까지도 쓰인다는 그 유명한 대운하 개발을 통해 강남 지역의 물자를 관중 지역으로 수송하기 위한 사업에 착수하여 이를 완성한 것이다. 하지만 당나라 말기에는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버틸 수 있을 만큼의 토지, 관개 시설 관리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농업 기반 시설이 붕괴하였다. 게다가 당나라 말기의 정치적 불안은 외부 물자를 수송할 대운하 통제의 상실로 이어져 장안이 수도로서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결국 주전충이 당 소종昭宗을 움직여 뤄양으로 천도했으며 이후 장안에서 멀지 않은 뤄양도 비슷한 이유로 중국사의 중심에서 밀려났다.

점차 중국의 중심은 경제력이 풍부한 강남 동쪽(해안) 지역으로 옮겨가게 되었고, 중원 대륙 진출의 필요성을 느낀 거란, 여진, 몽골 등의 북방 민족이 중원 대륙을 거쳐 가는 요충지로 베이징北京을 택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송나라가 정강의 변으로 양쯔강 이남 동해안 일대로 도망가면서, 장안과 뤄양은 완전히 도시 기능이 파괴되어 더 이상 중국사에서 수도로 등장하지 못하였다. 이후에 중국의 정치 중심지는 베이징으로, 경제 중심지는 상하이上海시와 홍콩 등 강남의 동부 해안 지역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서북의 지방 도시로 전락하다



송나라 시대 이후 장안은 지방 도시의 하나로 전락했다. 당대 말기에 보수된 황성은 원元나라 시대에 ‘서북 지역을 안정시킨다.’라는 바람이 담긴 ‘안서성安西城’, ‘원을 높이 받든다.’라는 의미의 ‘봉원성奉元城’이란 이름으로 차례로 바뀌며 중국 서북부의 군사 거점이 되었다. 13세기에는 『동방견문록』을 쓴 마르코 폴로Marco Polo도 장안을 방문했다.

1368년에 주원장朱元璋(홍무제洪武帝)이 명明을 건국한 뒤에 그의 차남이 옛 장안 일대를 통치했는데, 그때부터 오늘날의 호칭인 ‘시안西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곳은 오이라트, 내몽골과 맞닿은 명나라 서부의 요충지였고, 서역과의 교통로로서 중시되었다. 그래서 서안이라는 이름에는 원나라 시대의 안서성安西城과 마찬가지로 ‘서쪽 지역을 편안히 한다.’라는 의미와 바람이 담겨 있다. 지금도 남아 있는 서벽과 남벽에서 당나라 시대의 자취를 볼 수 있지만, 동벽과 북벽은 명나라 때 증개축한 것이다. 현재 시안의 상징이 된 종루鐘樓와 고루鼓樓도 명나라 시대에 세워졌다.


근대의 시안 사건과 현대의 시안西安(Xi’an) 모습



20세기에 접어들어 #1936년에 ‘시안 사건西安事件’#이 일어났다. 당시는 중국에서 공산당과 국민당이 계속 내전을 벌이던 시기였는데, 국민당의 장쉐량張學良이 장제스蔣介石 총사령관을 감금한 뒤 내전 정지와 항일전 참전을 요구한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에서는 일본에 대한 저항 운동, 즉 ‘항일 민족 통일전선’이 결성되었다. 이듬해에 시작된 중일전쟁 때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군이 일본군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황허강을 인공적으로 범람시켰는데, 이때 이재민 일부가 옛 대명궁 유적에 들어가 살기도 했다.

현재의 시안은 중국 서북 지방의 경제와 산업의 중심 도시이자 산시성陝西省의 성청 소재지다. 장안은 매우 유서 깊은 역사를 품고 있는 중국 6대 고도古都(시안西安, 베이징北京, 뤄양洛陽, 난징南京, 카이펑開封, 항저우杭州)로 꼽히고 있다. #오늘날 서안은 중국 내륙의 중심 도시로, 첨단 산업과 관광이 결합한 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동시에 실크로드 경제벨트의 핵심 거점으로서 다시금 동서 교류의 상징적 도시로 주목받고 있다.

그래서 서안은 단순한 중국의 옛 수도가 아니라, 동서 문명의 교차점이자 세계사적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장안의 번영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국제적인 도시의 모습을 보여 주었고, 실크로드의 출발점으로서 인류 문명 교류의 상징이다.# ■

〈참고문헌〉
* 『30개 도시로 읽는 세계사』, 조 지무쇼 저자(글)⋅최미숙 번역⋅진노 마사후미 감수, 2020, 다산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