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 반씨巨濟潘氏

[한국의 성씨]
[들어가는 말]
#우리나라의 반씨는 2015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뜨물 반潘 자를 쓰는 거제 반씨 5,183명, 광주 반씨 10,254명, 기성 반씨 7,631명, 남평 반씨 3,053명, 기타 반씨 1,941명으로 총 28,062명이다.#
거제 반씨는 후손들이 전국 각지에 산거하며 세거지에 따라 기성歧城, 충주忠州, 남평南平, 결성結城, 청도淸道, 홍천洪川, 광주光州 등 17본으로 갈리었으나 모두가 한 뿌리이다.


거제 반씨巨濟潘氏의 연원


반씨의 비조鼻祖(시조 이전의 선계 조상 중 가장 높은 사람)는 주周나라 시조 문왕文王 희창姬昌의 아들이자 무왕武王 희발嬉發의 동생으로, 무왕 때 은殷나라 정벌 후 필공畢公에 봉해져 제후가 된 필畢나라의 시조 희고姬高이다. 성왕成王과 강왕康王까지 삼대를 보필하며, 관직은 태사太史에 이르렀다. 희고의 아들 계손季孫이 반潘 땅에 봉해진 이후 그 후손들이 반씨를 이루었다. 반씨는 중국 춘추 시대 이후 유학자와 재상을 많이 배출하여 명문으로 일컬어졌다.

씨족사의 개요


시조 반부潘阜의 우리나라 정착 과정
반씨潘氏의 실제적인 시조始祖는 고려 시대의 문신인 반부潘阜이다. 자는 군수君秀, 호는 해려재海旅齋이며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문형文衡⋅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고 기성부원군岐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문절文節이라 시호되었다.

그는 본래 남송南宋 사람으로 한림학사를 지낸 뒤 이부상서에 이르렀고 그 후 송의 도종 연간에 몽고의 침입으로 연경燕京이 점령당하자 몽고군에 잡혀갔다. 원元의 세조는 그의 재능을 인정, 벌하지 않고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고려 충렬왕이 세자로 몽고에 갔을 때, 그의 충의를 높이 평가하여 화를 면하도록 했다고 병진보丙辰譜 세록世錄에 소개되어 있다. 그 뒤 고려 원종 7년 추밀원 부사 김방경金方慶이 원종 손위遜位(임금 자리를 내놓음)로 입몽入蒙했을 때 세자(충렬왕)의 부탁으로 그를 데려왔고 이름도 부阜로 고쳤다. 이듬해 기거사인起居舍人⋅예부시랑禮部侍郎⋅여몽특사麗蒙特使의 자격으로 두 차례 일본을 다녀왔고 원종 11년 권신 임연林衍의 반란을 평정하여 원종을 복위시켰다.

삼별초의 난 때는 원수로 공을 세웠고 지병마사知兵馬事로 여몽 연합군의 일본 정벌에 참가했다. 그가 기성岐城(거제巨濟의 별호)부원군府院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거제를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반씨는 기성岐城(거제의 옛 이름)을 비롯, 남평南平⋅광주光州⋅결성結城 등 4개의 관으로 분적됐으나 원뿌리는 거제 반씨巨濟潘氏다. 8세 반유현潘有賢은 남평南平으로, 7세 반충潘忠은 광주光州로, 16세 반일량潘日良은 결성結城으로 분관하여 각기 관조가 된 것이다.

왕을 멧돼지로부터 구한 반복해潘福海
증손 반익순潘益淳은 고려 32대 우왕禑王조에 우시중右侍中을 지냈고, 그의 두 아들 반덕해潘德海반복해潘福海도 각각 판도판서版圖判書,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를 지냈다. 특히 반복해는 정몽주에게 사사師事했고 무술에도 뛰어나 최영과 더불어 왜구의 격퇴에 공을 세웠다.

특히 반복해는 『고려사高麗史』 권124 열전 권37에 의하면 우왕이 옹진甕津에서 사냥을 하던 중 말에서 떨어져 멧돼지의 습격을 받게 된 순간 활을 쏘아 멧돼지를 잡아 위기에서 왕을 구했으며, 그 공으로 공신에 책록되고 왕씨라 사성賜姓을 받았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조선조의 반씨 가문
반복해의 아들 반자건潘自建은 조선 개국공신이었던 배극렴裵克廉의 사위로 그는 조선 태종 때 이조판서에 올랐다. 그의 아들 반충潘忠은 고려의 마지막 군주 공양왕 때 공조전서工曹典書에 올랐고 조선조 개국에 참여, 개국공신에 올랐다가 후에 광주백光州伯으로 봉해져 광주 반씨光州潘氏의 파조派祖가 되었다.

반유현潘有賢은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올라 감찰어사監察御史를 지냈다. 그의 증손이 진도군수珍島郡守를 지낸 뒤 남평南平에 터를 잡음으로써 남평 반씨南平潘氏의 파조가 되었다.

태종 때의 반제로潘悌老(진사進士), 반효손潘孝孫(황주목사黃州牧使・예조참판禮曹參判), 세종 때의 반사제潘思濟(이판吏判), 성종 때의 반희潘熙(경상좌도수사慶尙左道水使) 등이 조선조 초기 반씨 인물들이다. 특히 반희는 의주목사義州牧使・장흥부사長興府使를 역임하는 동안 선정을 베풀어 청렴한 관리로 이름이 났다.

반우형潘佑亨#은 성종조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교리校理・장령掌令을 거쳐, 각지의 명산대천에서 사직社稷의 복을 기도하는 사신으로 뽑혀 양진楊津에 파견되었다. 연산군조 사간司諫・대사성大司成・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등을 지내다가 갑자사화 때 파직당하였다. 그 후 박원종朴元宗 등과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으로 이성군利城君에 봉해졌다. 이어 대사헌에 발탁되어 기성군岐城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가 기묘사화 때 유배당했다. 이후 명종 때 신원伸寃(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 버림)되었다>

이외에 반씨는 충효로 이름이 난 인물들이 많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문경새재(조령鳥嶺)에서 의병장으로 왜군과 싸운 [[반인후潘仁後
는 반석평의 손자이며 반중인潘仲仁반중경潘仲慶 형제와 반관해潘觀海는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활약, 각각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는 등 반씨에서만 15명의 선무원종공신을 배출했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킨 반흡반계수는 순국 후 두 부인들이 남편을 따라 모두 자결하였기에 나라에서는 정문旌門을 세워 기렸고, 『동국삼강행실도東國三綱行實圖』에 정렬貞烈의 표상으로 수록되어 후세에 전하기도 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반전潘腆, 반유潘濡, 반석철潘碩徹이 실려 있다. 반전潘腆은 고려 우왕 때 산원散員으로 향리에 있었는데 왜구가 침공하여 아버지를 잡아가자 적중에 들어가 애걸하여 아버지를 구출해 냈다. 그때 아버지를 업고 피난하다가 무릎이 벗겨져 피 흘린 흔적이 바위에 남아 있다 하여 그 바위를 반전암潘賟岩이라 한다고 전해진다.

하늘을 감동시킨 반석철潘碩徹 등 반씨 가문의 효행
반석철潘碩徹은 조선 세조조世祖朝에 승의랑장흥고承議郎長興庫 주부注簿(종6품)를 지냈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3년간 시묘를 할 때는 호랑이가 곁을 지켰다고 전한다. 김해읍지金海邑誌 효행편에 실린 기록에 의하면 오뉴월의 시기, 농사철이 한창인 진례면 들녘에는 긴 가뭄이 들어 농민들이 시름에 잠겨 있었다. 모내기를 한 논에는 물이 말라 벼가 붉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몰리더니 소나기로 변했다. 그런데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줄기는 마을 한편에 있는 반석철의 논으로만 쏟아져 내렸다. 이후에도 이런 일이 반복되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그의 논 한 귀퉁이에서 샘물이 솟았다. 그해 온 들녘이 흉년이었지만 그의 벼농사만큼은 풍작이었다. 김해시 진례면 ‘하촌 효 문화 마을’에는 반석철의 효자비孝子碑와 그의 외손녀인 조효녀曺孝女의 정려비旌閭碑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반유潘濡는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상을 당했을 때 3년간 여묘廬墓를 하였는데,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旌閭하였다. 반석철도 효자로서 향민의 칭송을 받았다.

반충潘沖은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모친을 극진히 봉양하였고 모친상을 당하여서는 3년간 여묘 생활을 하였다. 문정왕후의 상을 당했을 때도 3년간 육식을 금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충효정비忠孝旌閭가 세워졌으며 달계서원達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춘천시 효자동의 유래


반희언潘希彦은 ‘효자동孝子洞’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된 인물이다. 조선 중기의 인물인 반희언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중병에 걸린 어머니를 지극 정성으로 보살폈다. 하지만 어머니의 병환은 하루하루 깊어져만 갔다.

매일 한숨과 눈물로 지새던 어느 날 산신령이 꿈에 나타나 “대룡산에 있는 시신 세 구 중 가운데 시신의 머리를 고아 드리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희언은 산신령의 말대로 따랐고 신기하게도 어머니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알고 보니 간밤에 베어 온 머리는 그의 효심에 감동한 산신령이 내려 준 산삼이었다고 한다.
같은 해 겨울, 갑자기 딸기가 먹고 싶다는 어머니를 위해 온 산을 뒤져 딸기를 구해 오던 반희언은 호랑이와 마주쳤는데, 지극한 효심에 감동한 호랑이가 그를 해치는 대신 등에 태워 집까지 데려다줬다는 설화도 전해 내려온다. 반희언의 효행은 마침내 한양까지 소문이 났고, 조선 선조 41년에 반희언의 효행을 칭송하는 효자문孝子門이 내려졌다. 마을 입구에 세워진 커다란 문이 바로 그것이다.

거제 반씨의 분파


반씨는 시조로부터 7세에 이르러 분파가 시작되는데, 큰아들 반준潘濬이 군수를 하면서 거제 파조가 되고 반유潘濡는 찰방察訪으로 예천 파조가 되며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된 반정潘珽이 청도 파조가 되었다.

광주 반씨光州潘氏
광주 반씨의 시조 반충潘忠은 반부潘阜의 7세손이다. 반충은 정헌대부正憲大夫로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하고,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해양군海陽君 광주백光州伯에 봉해지면서 광주 반씨로 분적하였다. 반충의 현손인 반석평潘碩枰은 중종조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지내고 공조판서工曹判書와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역임하였다. 반석평의 16세손이 UN 사무총장 반기문潘基文이다.

남평 반씨南平潘氏
남평 반씨 시조 반유현潘有賢은 반부의 8세손이며 1369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5세손 반침潘琛은 진도군수珍島郡守를 지내고 남평南平에 자리를 잡았다. 그의 증손 반상주潘尙周 이후로 전라도 장성에서 대대로 거주하였다.

거제 반씨는 모두 17본으로 갈렸으나 모두가 한 뿌리이기 때문에 「거제 반씨巨濟潘氏 정미대동보丁未大同譜」를 편찬할 때 거제 반씨로 합보하였다.
집성촌으로는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포천리, 전남 장성군 서삼면 송현리, 경북 청도군 이서면 구리동, 경북 칠곡군 칠곡면 매천동 등이 알려져 있다.

거제 반씨 가문의 현대 주요 인물
반재현潘在鉉(1919~1974) -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일제강점기 말기에 보통고시, 변호사예비시험에 합격해 조선총독부 경상북도 군속, 청도군청 내무과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경북 청도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자유당 중앙위원 및 청도신문사 사장으로 활동하였다.

반기문潘基文(1944~ ) - 대한민국의 제7대 외교통상부 장관을 역임한 외교관이자 제8대 유엔UN 사무총장이다. 외무고시에 차석으로 합격, 외무부 미주국장, 외교정책실장 등을 거쳐 2004년부터 2006년까지 노무현 정부에서 외교통상부 장관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2016년까지 제8대 유엔 사무총장을 역임하였다.

반기문은 2013년 미국의 경제 잡지 《포브스Forbes》가 선정한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선정된 바 있다. 또한 미국의 외교⋅안보 잡지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는 국제적인 리더십으로 기후변화 문제 해결의 금자탑이 된 파리협정(Paris Agreement, 2015)을 성사시키고 1년 만에 국제법으로 발효시킨 공로를 인정하여, 반기문을 세계의 사상가 100인 중 정책결정자 부문에 선정했다.

반장식潘長植(1956~ ) - 기획예산처 예산총괄심의관, 기획예산처 재정운용실장, 기획예산처 차관을 지냈으며 2021년부터 2023년까지 제24대 한국조폐공사 사장을 역임하였다.

[참고자료]
1)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2) 김태혁, 『한민족 성씨의 역사』, 보문서원, 2015

<참고사이트>
1) 한국인의 족보 (https://www.youtube.com/watch?v=QV4Xl8PoGtI)
2) 위키백과 거제 반씨 등
3) 성씨 정보(http://www.surname.info)
4) 뿌리를 찾아서 (http://www.rootsinfo.co.kr)
5) 김성회의 성씨 이야기
6) 통계청 홈페이지
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거제 반씨巨濟潘氏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