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억 세계인의 성씨 15회, 왕실 가계도로 보는 영국 역사

[STB하이라이트]

마그나카르타의 영향



1215년, 영국의 국왕 존John은 대헌장인 ‘마그나카르타Magna Carta’에 서명을 하게 됩니다. 이 그림은 종교계의 최고 지도자와 귀족들이 모여 있는 상태에서 사인을 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존 국왕은 이제 귀족과 신하들의 결정에 사인을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잉글랜드에는 조금씩 민주주의의 싹이 트기 시작했습니다. 라틴어로 쓰인 영국 최초의 헌법이자 현대 민주주의의 초석으로 여겨지는 ‘마그나카르타’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항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그나카르타의 두 가지 원칙

원칙1. 대표 없는 곳에 세금 없다.(세금을 내는 귀족과 신하들의 동의가 필요)
원칙2. 자유인의 체포와 처벌은 법에 따라 행해져야 한다.


마그나카르타로 인해 최초의 민주주의가 탄생하였고, 프랑스혁명을 거쳐 현재의 민주주의가 형성되었습니다. 프랑스대혁명은 1789년부터 1799년까지 프랑스에서 일어난 중요한 사건으로, 이 기간 동안 프랑스의 정치, 사회 및 경제 구조가 크게 변화했습니다. 대혁명은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고, 귀족의 특권을 폐지하며, 군주제를 폐지하는 등의 변화를 이끌었습니다. 결국 존 국왕은 국민들과 신하들로부터 못난 왕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사망하였습니다. 그의 아들인 헨리Henry가 왕위를 계승하였지만, 헨리 3세는 프랑스 친척들을 영국으로 불러들이면서 영국 내부의 귀족들과 불화를 일으켰습니다.


잉글랜드 왕실이 차지했던 땅이 변천되는 모습을 보여 주는 지도 두 장을 가져왔는데요. 왼쪽 지도는 1180년에 잉글랜드 왕실이 보유하고 있던 영토를 붉은색으로 표시한 것입니다. 파란색으로 표시된 부분은 프랑스 왕실이 소유하고 있던 영토입니다. 잉글랜드 왕실의 영토가 훨씬 더 큰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1223년 헨리 3세의 통치 시기에 잉글랜드 왕실은 대부분의 영토를 상실하였습니다. 남은 영토는 약 10퍼센트 정도로, 상당한 변화를 겪었습니다. 헨리 3세는 프랑스 귀족들을 불러 정치를 했습니다. 그의 전략은 교회를 이용하여 파문하는 것이었습니다.
파문破門
신도로서의 자격을 빼앗고 종문宗門에서 내쫓는 일. 가톨릭교에서 공식적으로 행해짐



‘시몽 드 몽포르 등장’ 이후 영국의 변화



이러한 전략으로 인해 헨리 3세는 지나치게 행동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매부인 시몽 드 몽포르Simon de Montfort가 등장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시몽 드 몽포르는 군사를 이끌고 왕을 체포했습니다. 이후 1265년, 시몽 드 몽포르는 잉글랜드의 각 주와 자유 도시에서 2명의 대표를 선출하여 런던으로 보냈습니다. 이를 통해 잉글랜드 최초의 의회(Parliament)가 형성되었습니다. 즉, 대헌장이 1215년에 만들어진 후 약 50년 뒤인 1265년에 잉글랜드 최초의 의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시몽 드 몽포르 이후에는 순수 영국인에 의한 잉글랜드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프랑스어 대신 영어를 사용하며, 공문서도 영어로 작성되었습니다. 학교에서는 프랑스어 사용이 금지되었습니다. 이전까지 법령은 라틴어, 왕실과 귀족은 프랑스어, 민중은 영어를 사용했지만, 이제는 모두 영어로 통일되기 시작했습니다.

시몽 드 몽포르는 헨리 3세와 그의 아들 에드워드Edward를 체포합니다. 에드워드는 프랑스로 도망가고, 다음 해 몽포르는 에드워드와의 전투에서 사망합니다.


영국의 언어를 통일한 에드워드 1세



몽포르는 전사했지만, 영국 의회는 점차 안정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그 후, ‘영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왕’인 에드워드 1세가 등장했습니다. 그는 국가를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모두가 같은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프랑스 영토를 되찾는 것보다 브리튼섬을 통합하는 데 더 집중했습니다.


에드워드 1세는 프랑스의 봉신으로서 충성을 다하기 위해 매년 프랑스 왕 필립Philippe 4세에게 오마주Hommage를 바쳤습니다. 이 그림은 그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에드워드 1세는 키가 188cm로 매우 컸으며, 별명은 ‘다리 긴 왕’이었습니다. 그는 전투력도 뛰어났는데, 중세 시대에는 왕의 조건으로 전투력이 중요시되었습니다. 에드워드 1세는 웨일즈와 스코틀랜드를 정복하였으며, 그의 업적으로 이후 300년 동안은 비교적 안정적인 훌륭한 왕들이 나왔습니다.


백년전쟁그런데 에드워드 3세의 시기에 백년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백년전쟁(1337~1453)
116년간 단속적斷續的으로 지속된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전쟁


백년전쟁은 100년 동안 지속된 전쟁으로,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를 요구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전쟁은 1337년부터 1453년까지 전투와 휴전의 반복으로 이어졌으며, 유럽 역사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유럽의 모습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백년전쟁의 원인은 다음과 같습니다. 프랑스가 스코틀랜드를 지원하면서 잉글랜드와의 관계가 악화되었습니다. 잉글랜드는 프랑스의 봉건적 지배를 받았지만, 프랑스의 행동에 분노하였습니다. 당시 프랑스 왕은 샤를Charles 4세로, 아들이 없이 사망하였습니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샤를 4세의 조카이자 왕위 계승권자로서 프랑스 왕위를 요구하였습니다. 5세기 말 프랑크 왕국의 살리 프랑크족이 제정한 살리카법(Salic Law)은 장자가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에드워드 3세는 이 법을 잘 알고 있었지만, 샤를 4세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친척으로서 왕위를 주장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살리카법은 ‘여자는 어떤 유산도 상속받을 수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 법은 여성이 왕위를 계승할 수 없고, 남성 후계자만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럽 왕실들은 친인척 관계였기 때문에, 만약 왕에게 아들이 없다면 이웃 나라가 살리카법을 근거로 왕위를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에드워드 3세는 살리카법을 인용하여 프랑스 왕위를 요구했지만, 이는 프랑스에서는 웃긴 일이었습니다. 프랑스 왕의 신하인 나라의 왕이 프랑스 왕위를 요구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프랑스는 “모계의 자식은 왕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했습니다.


크레시 전투



당시 프랑스 인구는 잉글랜드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잉글랜드는 약 300만 명이었고, 프랑스는 약 1000만 명이었습니다. 1346년에는 유명한 크레시Crécy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 전투는 유럽 전역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영국의 칼레 지역과 가장 가까운 프랑스 도시에서 전쟁이 벌어졌고, 영국은 이 지역에서 승리를 거둡니다. 한때 파리까지 점령하기도 했습니다. 영국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림에서 보면 오른쪽은 잉글랜드, 왼쪽은 프랑스입니다. 왕실 문장 깃발이 걸려 있으며, 오른쪽의 영국 병사들은 장궁(Longbow)을 들고 있고 왼쪽의 프랑스 병사들은 쇠뇌(Crossbow)를 들고 있습니다. 장궁은 프랑스 병사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기사들은 40~60킬로그램의 투구를 쓰고 있어 움직임이 제한적입니다. 말 위에서 떨어지면 생존할 수 없습니다.

영국의 병사들은 화살로 말을 공격했습니다. 말이 놀라서 펄쩍 뛰면 기사들은 땅에 쓰러지고, 그 즉시 공격을 받아 죽었습니다. 이는 기사도가 사라진 전쟁으로, 기사들끼리 말 타고 일대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름 모를 평민에게 화살로 죽는 전투였습니다. 게다가 부상자와 포로들은 즉시 처형되어 기사 정신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전쟁이었습니다.

이 전투로 인해 약 1만 2천 명이 사망했습니다. 프랑스 귀족의 3분의 1이 사망했으며, 왕자 11명과 1,200명의 기사가 모두 사망했습니다. 필리프 6세 왕도 부상을 입고 나중에 사망했습니다. 하지만 페스트 전염병이 발생하고, 이후 잔 다르크Jeanne d'Arc의 등장으로 전황이 역전되어 프랑스가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백년전쟁이 종결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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