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영광과 왈츠의 선율이 함께 흐르는 유럽 문화의 수도, 빈Wien

[열두 도시로 살펴보는 세계사]
이해영 전임기자 / 서울관악도장


제국이 남긴, 하나의 예술 작품 같은 도시





“빈Wien은 도시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음악회장이다." 이는 오늘날 오스트리아Austria의 수도 빈Wien(영어 명칭은 비엔나Vienna)을 묘사하고 요약하는 최적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바로크 궁전과 고딕 성당, 화려한 오페라 극장이 한데 어우러진 이 도시는 걷는 것만으로도 한때 전 유럽을 호령한 제국의 위엄을 온몸으로 느끼게 한다.

유럽의 민족 분포를 보면 대체로 북서 게르만어권(독일), 남서 라틴어권(이탈리아), 러시아를 비롯한 동부 슬라브어권으로 크게 나뉘는데, 빈은 이 세 지역의 중간쯤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빈은 13세기에 합스부르크Habsburg 왕가의 본거지가 된 후 신성로마 제국의 수도가 된다. 다양한 민족이 모여든 빈에서 특히 18세기 이후 많은 음악가, 예술가, 학자가 배출되었다 로마 제국 시대부터 물류의 요충지였던 빈은 하이든Haydn, 슈베르트Schubert, 모차르트Mozart, 베토벤Beethoven과 같은 위대한 작곡가들이 활약한 ‘음악의 도시’로 명성이 높은 한편, ‘숲의 도시’라는 이름으로도 유명하다. 실제로 항공 사진을 보면, 빈 북부의 아우가르텐Augarten 공원과 중앙부를 흐르는 다뉴브Danube강을 따라 형성된 일대 등 녹지가 상당히 많다. 인구는 뉴욕이나 도쿄에 비하면 200만 명 남짓으로 소박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꼽히는 데 주저함이 없는 곳이다.


작은 군사 기지에서 제국의 수도가 되다



빈의 시작은 로마Roma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에 서유럽을 지배하던 로마인은 서기 1세기 무렵, 라인강과 도나우강*을 동유럽 게르만 세력과의 경계선으로 삼고, 도나우강과 빈 강이 교차하는 지역에 군대의 주둔지를 설치했다. 이곳을 ‘빈도보나Vindobona’라고 불렀다.
*도나우Donau강 – 다뉴브Danube강의 독일어 이름이다. 다뉴브는 영어식, 도나우는 독일식 발음으로 남동 중부 유럽의 젖줄과도 같은 강이다.


빈도보나는 북쪽 발트해 지방에서 산출된 호박이나 모피를 남쪽 지중해 연안으로 옮기는 ‘호박의 길(Amber Road)’과 유럽의 동서를 잇는 ‘다뉴브의 길’이 교차하는 물류의 요충지였다. 게르만인은 이곳을 ‘빈Wien’이라 불렀다. 이 도시는 3세기에 인구 약 1~2만 명의 자치 도시로 발전했지만, 476년에 서로마 제국이 해체된 이후에 황폐해졌다. 8세기에 프랑크 왕국의 카를Karl(카롤루스Karolus) 대제는 빈 일대를 ‘오스트마르크Ostmark(동쪽의 변방)’라 이름 짓고 지방 행정관인 변경 백작(변경백邊境伯)에게 통치하게 했다. 변경 백작은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고자 제국이나 왕국의 변두리에 설치하였던 군사 행정단위를 관할하던 관직에서 파생된 봉건 귀족 작위의 일종이다. 눈치챘겠지만, 이 오스트마르크는 훗날 ‘오스트리아’의 유래가 되었다.

11세기에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자 유럽에서 중동으로 향하는 중계지로서 빈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이와 더불어 빈은 차츰 상업 도시로서 성황을 이루었다. 12세기에는 남독일의 귀족 바벤베르크Babenberg 가문이 오스트리아를 지배했다. 이때 빈에 왕성을 쌓았는데, 현재 빈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약 3제곱킬로미터의 영역을 성벽으로 둘러싸면서 도시의 골격이 잡히기 시작했다. 후사가 끊긴 바벤베르크가家의 영지는 1246년에 보헤미아(현재의 체코 서부)를 다스리던 오타카르Otakar 2세의 손에 넘어갔다.

1282년 합스부르크 가문이 오스트리아를 손에 넣으며 빈은 무려 640년 가까이 이어질 거대한 제국의 심장부가 되었다. 작은 군사 기지에서 출발한 도시가 신성로마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유럽 대륙 한복판이라는 지리적 이점과 결혼 정책으로 영토를 늘려 간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랜 통치가 있었다.


합스부르크 왕가(House of Habsburg)와 빈





합스부르크 가문은 원래 스위스 북부에 근거지를 둔 소규모 백작 가문에 불과했다. 그러나 13세기 말 루돌프Rudolf 1세가 신성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면서 유럽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후 오스트리아를 중심 근거지로 삼아 서서히 세력을 키워 나갔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유럽 최고의 왕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은 전쟁이 아니라 결혼이었다. “다른 이들은 전쟁하게 하라, 그대 행복한 오스트리아는 결혼하라(Bella gerant alii, tu felix Austria nube)”라는 말은 이 가문의 전략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이러한 정략결혼을 통해 스페인, 네덜란드, 보헤미아, 헝가리 등 유럽 곳곳의 영토를 차지했으며, 15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 신성로마 제국 황제 자리를 사실상 독점하다시피 했다. 다만 16세기 카를 5세 시대를 거치며 가문은 스페인 합스부르크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로 갈라지게 되었고, 스페인 계열은 1700년에 대가 끊겼지만, 오스트리아 계열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존속하며 오스트리아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다스렸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도가 바로 빈이었다. 루돌프 1세가 오스트리아 지배를 확실히 하기 위해 빈으로 천도했지만, 외지인 합스부르크가가 들어와서 자치권을 빼앗아 가자, 빈의 상인과 시민이 반발하기도 했다.

14세기에 빈은 다른 유럽 도시처럼 페스트를 겪었고, 많은 시민이 사망하는 재난을 맞았다. 이후 30년 전쟁으로 신성로마 제국의 국제적인 영향력이 쇠퇴한 1683년에 오스만 제국이 빈을 포위하였다(제2차 빈 공방전).

오스만 제국은 두 차례에 걸쳐 이 도시를 포위했다. 제1차 빈 공방전이 벌어진 1529년에 제10대 술탄인 술레이만Suleiman 1세의 대군이 도시 성벽 앞까지 밀려왔으나 실패했었다. 다시 1683년 제2차 공방전에 나선 오스만 제국은 1차 때보다 더 많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왔는데, 로마 교황의 요청으로 폴란드와 스페인 등 가톨릭 국가의 지원군이 빈에 집결했다. 이때 폴란드 국왕 얀Jan 3세 소비에스키Sobieski가 이끄는 연합군이 극적으로 도시를 구해 냈다. 특히 폴란드의 날개 기병(윙드 후사르Winged Hussars)의 활약으로 오스만 제국군은 철수해야만 했다. 윙드 후사르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정예 중기병 부대로 등이나 안장에 부착한 상징적인 날개 장식으로 유명하다.

오스만 제국의 공격에 대항하여 빈을 성공적으로 방어한 일은 그리스도교 세력이 이슬람 세력보다 우위로 올라서는 계기가 되었다. 빈은 ‘유럽을 오스만의 침략으로부터 지켜낸 방파제’라는 상징적 위상을 얻게 되었다.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는 이 승리를 발판 삼아 헝가리 영토를 점차 오스만으로부터 되찾아 나가며 제국의 영역을 넓혀 갔다.

점차 거주민도 증가하면서 시내에 건축 공사가 활발히 이뤄졌다. 17세기 말에는 빈의 남서쪽에 1.7제곱킬로미터 규모의 쇤브룬Schönbrunn 궁전(아름다운 샘이란 뜻)이 개축되었고 성벽은 외곽인 리니엔발Linienwall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또한 가로등이 설치되면서 밤에도 안전하게 걸을 수 있게 되었고 도시의 치안이 크게 개선되었다.


여제女帝 마리아 테레지아와 빈




합스부르크 가문의 역사에서 특히 주목할 인물이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다. 그녀의 아버지 카를 6세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가문의 영지를 상속받을 수 있도록 ‘국사조칙國事詔勅’이라는 특별한 법령을 마련해 두었다. 하지만 1740년 카를 6세가 세상을 떠나자, 프로이센Preußen(Prussia)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이 이 상속을 인정하지 않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일으켰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 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헝가리 귀족들 앞에 나아가 지지를 호소했다. 호소에 감격한 헝가리 귀족들은 다음처럼 외쳤다. “모리아무르 프로 레게 노스트로, 마리아 테레지아(Moriamur pro rege nostro, Maria Theresia)!” 이는 “우리의 여왕을 위해 죽으리라, 마리아 테레지아여!”라는 뜻으로, 그 결과 1741년 헝가리의 여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당시 마리아 테레지아의 나이는 만 24세였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신성로마 제국 황제 자리에는 직접 오르지 못했지만, 남편 프란츠 슈테판Franz Stephan을 황제로 세우면서도(프란츠 1세) 실질적인 통치권은 자신이 행사하는 방식으로 제국을 이끌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녀를 열여섯 명이나 두었는데, 그중 막내딸이 바로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훗날 프랑스의 루이Louis 16세와 결혼하여 프랑스 왕비가 되었으며, 이는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사이의 동맹을 굳히려는 정략결혼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이후 프랑스대혁명으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었다.


예술의 도시 빈과 합스부르크 왕가의 몰락



독일 북부의 신흥 세력 프로이센에 군사적 위협을 받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빈의 귀족과 부호 및 우호 세력의 지지를 얻기 위해 연극이나 음악회 같은 문화 행사에 힘을 쏟았다. 문화⋅예술계 인사도 후원하여, 특히 오페라를 만드는 음악가는 정부로부터 든든한 지원을 받아 기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또 출판물의 검열 제도도 완화하여 신문이나 잡지 간행이 활발해졌다. 이에 자유로운 표현 활동을 추구하는 문화인이 빈으로 모여들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들 요제프Joseph 2세는 어머니보다 더 선진적인 계몽전제군주였다. 그는 황실의 사냥터였던 프라터Prater 지구를 시민에게 개방하고 평상복을 입고 시내의 녹지를 산책했다. 또 1781년에 종교관용령을 반포하고 신교도나 유대교인의 활동 규제를 대폭 완화했다. 이에 따라 빈은 점점 더 다양한 민족이 모여드는 도시가 되었다. 이 무렵 빈은 인근 지역을 포함하여 인구가 약 20만 명에 달하는 대도시로 성장했다. 이는 런던, 파리, 나폴리에 이어 유럽에서 손꼽히는 수준이었다.

빈은 수백 년에 걸쳐 제국의 정치와 문화가 응축된 심장부 역할을 했다. 쇤브룬Schönbrunn 궁전과 호프부르크Hofburg 왕궁은 황실의 여름 거처이자 겨울 거처로 사용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빈을 대표하는 명소로 남아 있다. 다민족 제국의 수도답게 빈에서는 음악과 미술, 건축이 눈부시게 발전했는데, 하이든과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같은 거장들이 이곳에서 활동하며 빈은 ‘음악의 도시’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18세기 말, 서부의 본에서 온 베토벤이 빈에서 활약했다. 그가 교향곡 「영웅」의 모티브로 삼은 나폴레옹Napoléon은 1805년에 빈을 점령했다. 이후 황제 프란츠Franz 2세는 퇴위하고 신성로마 제국은 해체되었지만, 1804년에 성립한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의 지위는 유지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프란츠 요제프Franz Joseph 1세가 통치하던 시기에는 도시를 순환하는 대로인 링슈트라세Ringstraße가 건설되며 도시가 현대적으로 정비되었고,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나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같은 인물들이 활약하며 학문과 예술의 황금기를 맞이하기도 했다.


신성로마 제국에서 이중 제국까지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뒤인 1814~1815년에는 오스트리아의 수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Klemens von Metternich의 주재 아래 ‘빈 회의(Congress of Vienna)’가 열려 전후 유럽의 질서를 새로 짰다. “회의는 춤춘다, 그러나 진전은 없다”라는 당대의 풍자처럼, 화려한 무도회와 외교가 함께 펼쳐진 이 회의는 이후 한 세기 가까이 유럽에 평화를 가져다준 것으로 평가받는다.

1867년에는 헝가리와의 타협(Ausgleich)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Austro-Hungarian Empire)이 출범하며 빈과 부다페스트Budapest가 나란히 제국의 두 수도가 되었다. 그러나 1914년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가 암살되며 제1차 세계대전이 촉발되었고, 1918년 전쟁의 패배와 함께 640여 년을 이어 온 합스부르크 제국은 막을 내렸다. 거대한 제국의 수도였던 빈은 하루아침에 작은 공화국의 수도로 몸집이 줄어드는 극적인 반전을 겪었다.


1938년, 병합과 상실의 기억



빈의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장면은 1938년 3월에 찾아왔다. 나치 독일(Deutsches Reich)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안슐루스Anschluss’ 사건 직후, 히틀러는 빈 도심에 있는 헬덴플라츠Heldenplatz 광장에서 환호하는 군중 앞에 섰다. 이후 오스트리아 태생인 유대인 약 20만 명 가운데 상당수가 추방되거나 강제 수용소로 끌려갔고, 제2차 세계대전 뒤에는 연합군의 폭격으로 도심 곳곳이 파괴되었다.

종전 후 빈은 베를린처럼 미국⋅영국⋅프랑스⋅소련 4개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고, 도심 일부는 4개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국제지구로 남았다. 이 시기의 어수선한 풍경은 영화 〈제3의 사나이(The Third Man)〉에도 담겨 있다. 1955년, 오스트리아는 ‘국가조약(Staatsvertrag)’을 통해 영세중립국의 지위를 조건으로 완전한 주권을 되찾았다.

빈의 도심 유덴플라츠Judenplatz 광장(독일어로 ‘유대인 광장’을 뜻함)에는 영국의 예술가 레이첼 화이트리드Rachel Whiteread가 만든 홀로코스트 추모비 ‘이름 없는 도서관(Nameless Library)’이 서 있고, 거리 곳곳의 보도블록에는 나치에 희생된 이들의 이름을 새긴 ‘슈톨퍼슈타인Stolperstein(걸림돌)’이 박혀 있다. 화려한 제국의 유산 못지않게, 상실을 잊지 않으려는 이 조용한 기억의 장치들 역시 오늘날 빈의 얼굴을 이루고 있다.


외교와 혁신이 공존하는 도시



제국을 잃은 빈은 냉전기 동서 진영이 만나는 완충 지대라는 지정학적 위치를 발판 삼아 국제 외교의 무대로 다시 태어났다. 1965년 석유수출국기구(OPEC) 본부가 자리를 잡았고, 1979년에는 뉴욕⋅제네바⋅나이로비에 이어 네 번째 유엔 사무소(UNOV)가 도나우 시티Donau City에 들어섰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본부 역시 빈에 있어, 이 도시는 지금도 국제 협상과 회의가 끊이지 않는 ‘작은 뉴욕’으로 불린다.

동시에 빈은 오랫동안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이나 머서Mercer가 발표하는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순위에서 꾸준히 상위권에 오른다. 안정적인 사회보장 제도와 촘촘한 대중교통, 풍부한 문화 인프라가 어우러진 결과다. 최근에는 금융⋅보험업이라는 전통적 강점에 더해, 바이오⋅건강관리와 인공지능 스타트업이 빠르게 성장하며 도시의 산업 구조도 조금씩 다변화하고 있다.


예술인과 문화인이 모여드는 교류지



오스트리아 제국의 공용어는 독일어지만, 실제로 19세기에 제국에서 사용된 언어는 매우 다양했다. 당시 그곳에는 서슬라브어권에 속하는 체코와 폴란드, 남슬라브어권에 속하는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아시아계 마자르어를 사용하는 헝가리, 라틴어권인 루마니아 등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뒤섞여 있었다. 1859년에는 오스트리아 제국 영내에서의 이동이 자유로웠기 때문에 각지의 다양한 민족이 빈으로 흘러 들어왔다. 1890년에 기록된 약 136만 명의 인구 중에서 빈에서 태어난 시민은 45퍼센트에 불과했다.

예를 들면 빈에서 활약한 음악가 슈베르트와 심리학자 프로이트는 둘 다 모라비아Moravia(체코 동부) 출신이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처럼 빈에서 태어나고 자라 성인이 된 후에 해외에서 활약한 사람도 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의 빈은 음악가 말러Mahler, 화가 클림트, 작가 호프만스탈Hofmannsthal 등 쟁쟁한 문화 예술인에 의해 ‘세기말 빈(Fin-de-siècle Vienna)’이라 불리는 문화 조류를 창출했다.


도나우강과 숲이 감싸안은 도시



빈은 알프스산맥의 동쪽 끝자락과 판노니아 평원이 만나는 지점, 도나우강(다뉴브강)이 도시를 가로지르는 자리에 있다. 강 본류와 함께 흐르는 ‘노이에 도나우Neue Donau’ 운하 사이에는 여름철 시민들의 휴양지인 도나우섬(Donauinsel)이 길게 뻗어 있다. 서쪽으로는 ‘빈의 숲(Wienerwald)’이라 불리는 완만한 구릉과 삼림 지대가 도시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 이 숲은 베토벤이 산책하며 악상을 떠올렸다고 전해지는 곳이자, 지금도 빈 시민들이 포도밭 사이 오솔길을 걷고 ‘호이리게Heurige’라 불리는 그해 담근 와인을 마시며 여가를 즐기는 공간이다. 산과 강, 평야가 균형을 이루는 지형 덕분에 빈은 대도시이면서도 녹지 비율이 절반에 가까운, 보기 드물게 여유로운 도시로 남을 수 있었다.


23개의 구, 제국의 얼굴들



빈은 미국의 여러 도시처럼 별도의 자치단체를 합병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의 시가지를 23개의 '베치르크Bezirk(구區)'로 나누는 독특한 행정 체계를 갖고 있다. 각 구는 저마다 다른 시대, 다른 계층의 흔적을 품고 있어 숫자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도시의 역사를 읽을 수 있다.


인네레슈타트Innere Stadt — 1구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던 옛 도심으로, 순환 도로 ‘링슈트라세Ringstraße’ 안쪽에 자리한다. 1857년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가 낡은 성벽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놓은 이 대로를 따라 국회 의사당, 시청사, 부르크 극장, 빈 대학교 같은 화려한 역사주의 양식 건물이 줄지어 서 있다.

슈테판 대성당(Stephansdom)과 호프부르크 왕궁이 있는 이 구역은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레오폴트슈타트Leopoldstadt — 2구

도나우 운하 건너편에 자리한 이 구는 19세기 후반 동유럽 유대인 이민자들이 대거 정착하며 빈 유대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던 곳이다. 지금은 대관람차로 유명한 놀이공원 프라터Prater와 넓은 녹지가 있는 가족 나들이 명소로 사랑받는다.

노이바우Neubau — 7구

19세기 말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가 주도한 ‘빈 분리파(Wiener Secession)’ 운동의 무대였던 곳으로, 지금도 개성 있는 편집 숍과 갤러리, 카페가 골목마다 자리한 빈의 대표적인 예술⋅디자인 지구로 꼽힌다.

도나우슈타트Donautadt — 22구

수도 빈의 23개 구역 중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구역이다. 독일어로는 ‘다뉴브시(City on the Danube)’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구역 내에는 도나우강 북쪽에 조성된 신도시 도나우 시티Donau City가 자리 잡고 있는데, 이곳에는 국제연합 빈 사무소(UNOV)가 있는 ‘빈 국제 센터(Vienna International Centre)’가 들어서 있다. 유리로 뒤덮인 고층 빌딩들이 스카이라인을 이루는 이곳은 제국의 유산이 가득한 구시가지와 대조적으로, 빈이 21세기 국제도시로서 지닌 또 다른 얼굴을 보여 준다.


음악이 흐르는 도시, 커피 하우스의 전통




빈을 이야기할 때 음악을 빼놓을 수는 없다. 모차르트는 1781년 잘츠부르크Salzburg를 떠나 이곳에서 활동했고, 하이든과 베토벤, 슈베르트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빈 고전파’ 음악가들이 모두 이 도시에서 걸작을 남겼다. 왈츠의 왕이라 불리는 요한 슈트라우스Johann Strauss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An der schönen blauen Donau)’는 지금도 빈을 상징하는 선율로 남아 있다.

매년 1월 1일,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관현악단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Wiener Philharmoniker)가 무지크페라인Musikverein 황금홀에서 여는 신년 음악회 ]]는 전 세계로 생중계되며 빈의 존재감을 새삼 확인시켜 준다. {{국립 오페라 극장(Wiener Staatsoper)에서는 연중 거의 매일 세계 최정상급 오페라와 발레 공연이 열린다.

음악만큼이나 빈을 규정하는 것이 ‘카페하우스Kaffeehaus’ 문화다. 신문과 책을 손님이 자유롭게 읽고, 종업원이 한 잔의 커피와 함께 넉넉한 시간을 내어 주는 이 전통은 프로이트와 클림트 같은 지식인⋅예술가들의 사교 공간이기도 했다. 2011년 유네스코는 빈의 카페하우스 문화를 ‘인류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합스부르크가에 의해 풍요로운 문화가 발전한 빈에서는 현재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려 생활하고 있다. 음악의 도시이자 숲의 도시인 빈을 찾는 발길은 전 세계에서 여전히 끊이지 않는다. ■


이중 제국의 나머지 절반, 부다페스트




1867년 이후 합스부르크 제국이 ‘오스트리아-헝가리’라는 이중 제국 체제로 바뀌면서, 빈과 더불어 또 하나의 수도가 탄생했다. 바로 헝가리 왕국의 수도 부다페스트Budapest다. 도나우강을 사이에 두고 언덕 위 왕궁 지구 ‘부다Buda’와 평지의 상업 지구 ‘페슈트Pest’가 1873년 하나의 도시로 합쳐지며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빈이 황실과 관료제의 중심이었다면, 부다페스트는 헝가리 민족주의의 구심점이었다. 두 도시는 하나의 제국 아래 있으면서도 각자의 의회와 정부를 유지하는 독특한 이원 체제를 이뤘고, 이는 오늘날까지 두 나라의 관계와 도시 정체성에 깊은 흔적을 남기고 있다. ‘세체니 다리(Széchenyi Chain Bridge)’로 대표되는 부다페스트는 지금도 ‘도나우강의 진주’라 불리며 빈과 함께 옛 이중 제국의 기억을 나누어 간직하고 있다.


프라하, 중세의 모습이 감도는 ‘북쪽의 로마’




합스부르크가가 15세기에 신성로마 제국의 황위를 독점하기 전까지 제국의 수도였던 곳이 프라하Praha다. 8세기경부터 블타바Vltava강(독일어로 몰다우Moldau강)이 가로지르는 일대에 마을이 형성되어 동서 유럽 통상의 요충지로 번성했다. 이 지역을 다스리던 보헤미아Bohemia의 왕이 1355년에 신성로마 제국의 카를Karl 4세로 즉위했다.

이 시기 프라하에는 515미터 길이의 카를교와 중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프라하 대학 그리고 교회 등이 건설되었다. 당시 프라하는 유럽 각지에서 상인과 학자가 모여들었고, ‘백탑의 거리’, ‘황금의 프라하’, ‘북쪽의 로마’라고 불렀던 융성한 도시였다.

17세기 이후 이곳은 합스부르크가의 지배를 받았고, 18세기에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치세에 공업 지대로 발전했다. 1918년에는 독립한 체코슬로바키아Czechoslovakia의 수도가 되었고, 1993년에 동부 슬로바키아Slovakia가 분리해 나간 후에도 여전히 체코Czech의 수도로 남아 있다.


〈참고문헌〉
* 『30개 도시로 읽는 세계사』, 조 지무쇼 저자(글)⋅최미숙 번역⋅진노 마사후미 감수, 2020, 다산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