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극 실재로 나아가는 수행 과정과 빛의 의미에 대하여”
[빛과 어둠: 대결인가 상보인가 1부]
오강남 명예교수 /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비교종교학과
빛과 어둠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세 가지 대표적 이야기를 살펴봅니다. 첫째는 부처님의 성불 체험, 둘째는 플라톤의 동굴 비유, 셋째는 창세기의 “빛이 있으라.”는 선언입니다. 이 세 이야기는 모두 빛을 단순한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깨달음, 실재 인식, 세계 창조의 상징으로 보여 줍니다.
첫째, 부처님의 성불 체험은 경전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전해지지만, 일반적으로 보름달이 밝은 밤 보리수 아래에서 깊은 선정禪定에 든 장면으로 설명됩니다. 부처님은 네 단계의 선정, 곧 사선정四禪定을 거쳐 마음이 한 점에 모이고 티 없이 맑아진 상태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중 한 사람이 사슬을 끊고 동굴 밖으로 나옵니다. 처음에는 강한 빛 때문에 눈이 부셔 다시 동굴로 돌아가고 싶지만, 점차 밝은 햇빛 아래에서 그림자가 아니라 실재의 세계를 보게 됩니다. 이 경우 빛은 실재를 실제로 보게 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실재의 세계, 곧 이데아의 세계를 본 사람은 다시 동굴로 돌아가 아직 그림자만 보고 있는 사람들을 밖으로 인도하려 합니다. 플라톤은 이런 사람이 군주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고, 이를 철인왕哲人王(philosopher king)의 이상으로 설명했습니다.
여기서 빛은 하나님이 창조한 최초의 피조물로 나타나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으로 평가됩니다. 다만 이 대목에서 어둠은 악이나 죄가 아닙니다. 어둠은 빛과 함께 낮과 밤의 질서를 이루는 요소입니다. 따라서 창세기의 빛과 어둠은 처음부터 절대적 대결 관계라기보다 세계 질서를 구성하는 상보적相補的 요소로 볼 수 있습니다.
힌두교의 『우파니샤드』 전통에서는 브라흐만Brahman을 궁극 실재로 봅니다. 브라흐만은 빛이며, 개별 존재 안에 있는 참나인 아트만Ātman도 빛으로 이해됩니다. 또한 브라흐만과 아트만이 하나라는 범아일여梵我一如를 깨닫는 의식도 빛입니다.
이와 관련된 대표적 산스크리트어 표현이 “타트 트밤 아시”(tat tvam asi)입니다. 이는 “그것이 바로 너다.”, “너는 그것이다.”라는 뜻으로, 인간 안의 참된 자아가 궁극 실재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이슬람의 경전 『쿠란』에는 「빛의 장」이 있으며, 이슬람 전통에서는 알라Allah 자체가 빛으로 이해됩니다. 사원 내부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빛이나 내부를 밝히는 등불은 알라의 현존을 상징합니다. 알라뿐 아니라 무함마드와 그가 전한 『쿠란』도 인류를 어둠 속에서 방황하지 않게 이끄는 빛으로 설명됩니다.
예수도 자신을 빛으로 설명합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는 구절이 대표적입니다. 『요한복음』 12장 46절도 예수가 빛으로 세상에 왔음을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다른 대상들도 빛으로 묘사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라고 표현되고, 예수의 제자들은 “세상의 빛”이라 불립니다. 『요한복음』은 생명을 사람들의 빛으로 말합니다. 바울이 다마스쿠스, 곧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하늘로부터 오는 강한 빛을 경험한 장면에서는 빛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으로 나타납니다.
첫째, 서양 신비주의에서 말하는 신비의 길(mystical path)은 신과의 합일合一을 향해 나아가는 수행 과정입니다. 그 첫 번째 단계는 정화淨化(purgation)입니다. 수행자는 자신의 욕망, 질투, 이기심, 사랑의 부족함을 자각하고 이를 정화합니다. 두 번째 단계는 조명照明(illumination)입니다. 정화가 깊어지면 내면의 평화를 경험하고, 무엇보다 내면의 빛을 체험합니다. 세 번째 단계는 합일合一(unity)입니다. 이때 개체로서의 자기는 사라지고 오직 신과 하나 되는 경험이 강조됩니다. 서양의 신비 전통에서는 이를 신화神化(deification)라고도 불렀습니다.
바울의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는 표현, 곧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이러한 합일의 경험과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동학東學의 시천주侍天主, 인내천人乃天, 사인여천事人如天도 내 안의 하늘, 나와 하늘의 일체성, 이웃을 하늘처럼 섬기는 실천이라는 점에서 이 주제와 통합니다.
발보리심이 일어나면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겠다는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마음이 생깁니다. 이는 자신을 이롭게 하면서 남도 이롭게 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윤리로 이어집니다.
다음 단계는 서원誓願입니다. 사홍서원四弘誓願처럼 보살이 함께 세우는 서원도 있고, 보살마다 고유하게 세우는 서원도 있습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의 48서원, 특히 제18서원은 아미타불의 이름을 지극한 믿음으로 부르는 이를 서방정토西方淨土에 왕생하게 하겠다는 서원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서원에는 실천을 밀고 가는 힘이 있으므로 원력願力이라고도 합니다.
이후 보살은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의 육바라밀六波羅蜜(pāramitā)을 실천합니다. 『화엄경』에서는 보살도의 전 과정을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십지十地, 등각等覺, 묘각妙覺의 52단계로 설명합니다.
그 가운데 십지十地는 환희지歡喜地, 이구지離垢地, 발광지發光地, 염혜지焰慧地, 난승지難勝地, 현전지現前地, 원행지遠行地, 부동지不動地, 선혜지善慧地, 법운지法雲地의 열 단계입니다. 이후 등각等覺과 묘각妙覺에 이르러 52단계가 완성됩니다.
그 첫 번째는 외천하外天下, 곧 세상의 일을 잊는 단계입니다. 두 번째는 외물外物, 곧 물질적 욕망을 잊는 단계입니다. 세 번째는 외생外生, 곧 생존에 대한 집착을 잊는 단계입니다. 네 번째 단계가 조철朝徹입니다. 조철은 “아침의 밝음”이라는 뜻으로, 모든 집착이 사라진 자리에 아침 햇살이 비치듯 지혜와 깨달음의 빛이 환하게 비치는 경지를 가리킵니다.
이어서 하나를 보는 견독見獨, 과거와 현재의 구분이 사라지는 무고금無古今, 죽음과 삶의 구분을 넘어서는 불사불생不死不生의 단계가 이어집니다.
이는 서양 신비주의에서 말하는 eternal now, 곧 ‘영원永遠한 현재現在’와도 통하는 표현입니다.
주자는 인간 안에 하늘로부터 받은 밝은 덕, 곧 명덕明德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욕심 때문에 거울에 먼지가 쌓이듯 ‘명덕의 빛이 흐려진다.’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격물치지는 마음의 거울에 쌓인 먼지를 닦아 내는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격물치지를 통해 앎이 극에 이르면 어느 날 갑자기 활연관통豁然貫通하여 빛을 보게 된다고 합니다. 활연豁然은 환하게 트인다는 뜻이고, 관통貫通은 꿰뚫어 통한다는 뜻입니다. 이 과정은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로 이어집니다. 수행의 목적은 개인의 수양에만 머물지 않고 세계의 질서와 평화에 이바지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첫째, 부처님이 성불한 뒤 자신과 함께 수행하던 다섯 수행자에게 다가갔을 때, 그들은 처음에는 부처님을 모른 척하려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가까이 올수록 그에게서 저항할 수 없는 힘을 느꼈고, 결국 일어나 공손히 맞이했습니다. 종교사의 관점에서 이 힘은 깨달은 존재에게서 나오는 광채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둘째, 『화엄경華嚴經』 「광명각품光明覺品」에는 정각正覺을 이룬 부처님에게서 빛이 나오는 장면이 극적으로 나타납니다. 부처님이 보광명전普光明殿에서 설법하실 때 양 발바닥 수레바퀴 무늬에서 백억광명百億光明이 뿜어져 나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비추고, 나아가 법계法界와 허공계虛空界, 온 우주를 두루 비추었다고 합니다. 이 빛을 따라 마음을 여는 이들은 보살도菩薩道의 초입인 십신十信에 들어선다고 설명됩니다.
셋째,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경우에는 부처님에게서 빛이 나올 뿐 아니라 부처님 자신이 빛의 이름을 지닙니다.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 가운데 하나인 『무량수경無量壽經』에 따르면, 어느 왕이 출가하여 법장法藏(Dharmākara)이라는 비구가 되었고,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서방정토西方淨土를 세우겠다는 서원을 합니다.
오랜 수행 끝에 그는 정토에 상주하는 부처가 됩니다. 그 이름이 아미타바Amitābha, 곧 무량광無量光이며, 또 아미타유스Amitāyus, 곧 무량수無量壽입니다. 무량광은 한없는 빛이고, 무량수는 한없는 생명입니다. 불상 뒤에 그려지는 배광背光이나 후광後光도 깨달음을 얻은 존재에게서 나오는 빛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섯째, 예수의 경우에도 빛의 체험이 나타납니다. 예수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갔고, 그곳에서 모습이 변하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고 전해집니다. 이 사건을 변화산 사건이라고 부르며, 『마태복음』 17장 1~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성화에서 예수의 머리 주변에 후광後光(halo 또는 aureola)을 그리는 것도 단순히 인물을 식별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특별한 영적 경지에 이른 존재가 뿜어내는 빛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
본 기사는 삼랑대 강좌 내용을 정리한 강좌입니다. 빛과 어둠: 대결인가 상보인가 1부의 내용입니다. [편집자 주註]

들어가면서
빛과 어둠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세 가지 대표적 이야기를 살펴봅니다. 첫째는 부처님의 성불 체험, 둘째는 플라톤의 동굴 비유, 셋째는 창세기의 “빛이 있으라.”는 선언입니다. 이 세 이야기는 모두 빛을 단순한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깨달음, 실재 인식, 세계 창조의 상징으로 보여 줍니다.
첫째, 부처님의 성불 체험은 경전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전해지지만, 일반적으로 보름달이 밝은 밤 보리수 아래에서 깊은 선정禪定에 든 장면으로 설명됩니다. 부처님은 네 단계의 선정, 곧 사선정四禪定을 거쳐 마음이 한 점에 모이고 티 없이 맑아진 상태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중 한 사람이 사슬을 끊고 동굴 밖으로 나옵니다. 처음에는 강한 빛 때문에 눈이 부셔 다시 동굴로 돌아가고 싶지만, 점차 밝은 햇빛 아래에서 그림자가 아니라 실재의 세계를 보게 됩니다. 이 경우 빛은 실재를 실제로 보게 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실재의 세계, 곧 이데아의 세계를 본 사람은 다시 동굴로 돌아가 아직 그림자만 보고 있는 사람들을 밖으로 인도하려 합니다. 플라톤은 이런 사람이 군주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고, 이를 철인왕哲人王(philosopher king)의 이상으로 설명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 『창세기』 1:1~5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 『창세기』 1:1~5
여기서 빛은 하나님이 창조한 최초의 피조물로 나타나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으로 평가됩니다. 다만 이 대목에서 어둠은 악이나 죄가 아닙니다. 어둠은 빛과 함께 낮과 밤의 질서를 이루는 요소입니다. 따라서 창세기의 빛과 어둠은 처음부터 절대적 대결 관계라기보다 세계 질서를 구성하는 상보적相補的 요소로 볼 수 있습니다.
빛과 관계되는 구체적인 사례
궁극 실재나 신으로서의 빛

힌두교의 『우파니샤드』 전통에서는 브라흐만Brahman을 궁극 실재로 봅니다. 브라흐만은 빛이며, 개별 존재 안에 있는 참나인 아트만Ātman도 빛으로 이해됩니다. 또한 브라흐만과 아트만이 하나라는 범아일여梵我一如를 깨닫는 의식도 빛입니다.
이와 관련된 대표적 산스크리트어 표현이 “타트 트밤 아시”(tat tvam asi)입니다. 이는 “그것이 바로 너다.”, “너는 그것이다.”라는 뜻으로, 인간 안의 참된 자아가 궁극 실재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이슬람의 경전 『쿠란』에는 「빛의 장」이 있으며, 이슬람 전통에서는 알라Allah 자체가 빛으로 이해됩니다. 사원 내부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빛이나 내부를 밝히는 등불은 알라의 현존을 상징합니다. 알라뿐 아니라 무함마드와 그가 전한 『쿠란』도 인류를 어둠 속에서 방황하지 않게 이끄는 빛으로 설명됩니다.

예수도 자신을 빛으로 설명합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는 구절이 대표적입니다. 『요한복음』 12장 46절도 예수가 빛으로 세상에 왔음을 말합니다.
기타 빛으로 묘사된 것들
성경에서는 다른 대상들도 빛으로 묘사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라고 표현되고, 예수의 제자들은 “세상의 빛”이라 불립니다. 『요한복음』은 생명을 사람들의 빛으로 말합니다. 바울이 다마스쿠스, 곧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하늘로부터 오는 강한 빛을 경험한 장면에서는 빛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으로 나타납니다.
궁극 실재를 경험했을 때의 의식 빛


수행 과정에서 나타나는 빛

첫째, 서양 신비주의에서 말하는 신비의 길(mystical path)은 신과의 합일合一을 향해 나아가는 수행 과정입니다. 그 첫 번째 단계는 정화淨化(purgation)입니다. 수행자는 자신의 욕망, 질투, 이기심, 사랑의 부족함을 자각하고 이를 정화합니다. 두 번째 단계는 조명照明(illumination)입니다. 정화가 깊어지면 내면의 평화를 경험하고, 무엇보다 내면의 빛을 체험합니다. 세 번째 단계는 합일合一(unity)입니다. 이때 개체로서의 자기는 사라지고 오직 신과 하나 되는 경험이 강조됩니다. 서양의 신비 전통에서는 이를 신화神化(deification)라고도 불렀습니다.
바울의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는 표현, 곧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이러한 합일의 경험과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동학東學의 시천주侍天主, 인내천人乃天, 사인여천事人如天도 내 안의 하늘, 나와 하늘의 일체성, 이웃을 하늘처럼 섬기는 실천이라는 점에서 이 주제와 통합니다.

발보리심이 일어나면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겠다는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마음이 생깁니다. 이는 자신을 이롭게 하면서 남도 이롭게 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윤리로 이어집니다.
다음 단계는 서원誓願입니다. 사홍서원四弘誓願처럼 보살이 함께 세우는 서원도 있고, 보살마다 고유하게 세우는 서원도 있습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의 48서원, 특히 제18서원은 아미타불의 이름을 지극한 믿음으로 부르는 이를 서방정토西方淨土에 왕생하게 하겠다는 서원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서원에는 실천을 밀고 가는 힘이 있으므로 원력願力이라고도 합니다.
이후 보살은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의 육바라밀六波羅蜜(pāramitā)을 실천합니다. 『화엄경』에서는 보살도의 전 과정을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십지十地, 등각等覺, 묘각妙覺의 52단계로 설명합니다.
그 가운데 십지十地는 환희지歡喜地, 이구지離垢地, 발광지發光地, 염혜지焰慧地, 난승지難勝地, 현전지現前地, 원행지遠行地, 부동지不動地, 선혜지善慧地, 법운지法雲地의 열 단계입니다. 이후 등각等覺과 묘각妙覺에 이르러 52단계가 완성됩니다.


그 첫 번째는 외천하外天下, 곧 세상의 일을 잊는 단계입니다. 두 번째는 외물外物, 곧 물질적 욕망을 잊는 단계입니다. 세 번째는 외생外生, 곧 생존에 대한 집착을 잊는 단계입니다. 네 번째 단계가 조철朝徹입니다. 조철은 “아침의 밝음”이라는 뜻으로, 모든 집착이 사라진 자리에 아침 햇살이 비치듯 지혜와 깨달음의 빛이 환하게 비치는 경지를 가리킵니다.
이어서 하나를 보는 견독見獨, 과거와 현재의 구분이 사라지는 무고금無古今, 죽음과 삶의 구분을 넘어서는 불사불생不死不生의 단계가 이어집니다.
이는 서양 신비주의에서 말하는 eternal now, 곧 ‘영원永遠한 현재現在’와도 통하는 표현입니다.

주자는 인간 안에 하늘로부터 받은 밝은 덕, 곧 명덕明德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욕심 때문에 거울에 먼지가 쌓이듯 ‘명덕의 빛이 흐려진다.’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격물치지는 마음의 거울에 쌓인 먼지를 닦아 내는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격물치지를 통해 앎이 극에 이르면 어느 날 갑자기 활연관통豁然貫通하여 빛을 보게 된다고 합니다. 활연豁然은 환하게 트인다는 뜻이고, 관통貫通은 꿰뚫어 통한다는 뜻입니다. 이 과정은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로 이어집니다. 수행의 목적은 개인의 수양에만 머물지 않고 세계의 질서와 평화에 이바지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도통한 분들에게서 나오는 빛

첫째, 부처님이 성불한 뒤 자신과 함께 수행하던 다섯 수행자에게 다가갔을 때, 그들은 처음에는 부처님을 모른 척하려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가까이 올수록 그에게서 저항할 수 없는 힘을 느꼈고, 결국 일어나 공손히 맞이했습니다. 종교사의 관점에서 이 힘은 깨달은 존재에게서 나오는 광채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둘째, 『화엄경華嚴經』 「광명각품光明覺品」에는 정각正覺을 이룬 부처님에게서 빛이 나오는 장면이 극적으로 나타납니다. 부처님이 보광명전普光明殿에서 설법하실 때 양 발바닥 수레바퀴 무늬에서 백억광명百億光明이 뿜어져 나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비추고, 나아가 법계法界와 허공계虛空界, 온 우주를 두루 비추었다고 합니다. 이 빛을 따라 마음을 여는 이들은 보살도菩薩道의 초입인 십신十信에 들어선다고 설명됩니다.
셋째,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경우에는 부처님에게서 빛이 나올 뿐 아니라 부처님 자신이 빛의 이름을 지닙니다.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 가운데 하나인 『무량수경無量壽經』에 따르면, 어느 왕이 출가하여 법장法藏(Dharmākara)이라는 비구가 되었고,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서방정토西方淨土를 세우겠다는 서원을 합니다.
오랜 수행 끝에 그는 정토에 상주하는 부처가 됩니다. 그 이름이 아미타바Amitābha, 곧 무량광無量光이며, 또 아미타유스Amitāyus, 곧 무량수無量壽입니다. 무량광은 한없는 빛이고, 무량수는 한없는 생명입니다. 불상 뒤에 그려지는 배광背光이나 후광後光도 깨달음을 얻은 존재에게서 나오는 빛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섯째, 예수의 경우에도 빛의 체험이 나타납니다. 예수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갔고, 그곳에서 모습이 변하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고 전해집니다. 이 사건을 변화산 사건이라고 부르며, 『마태복음』 17장 1~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성화에서 예수의 머리 주변에 후광後光(halo 또는 aureola)을 그리는 것도 단순히 인물을 식별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특별한 영적 경지에 이른 존재가 뿜어내는 빛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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