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로 전파된 프랑스 문화의 발신지, 파리Paris

[열두 도시로 살펴보는 세계사]
이해영 전임기자 / 서울관악도장


파리의 간략한 역사




프랑스의 수도 파리(Paris)는 센Seine강을 중심으로 수천 년 동안 유럽의 정치, 경제, 예술의 심장부 역할을 해 온 도시이다. 파리는 센강의 작은 섬인 시테Cité섬에서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기원전 3세기경 켈트족의 한 갈래인 파리시Parisii 부족이 정착하면서 형성된 이 정착지는 이후 로마 제국에 정복당해 ‘루테티아Lutetia’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서서히 도시의 기틀을 다졌다. 508년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Clovis 1세가 이곳을 수도로 지정하면서 파리는 본격적인 정치와 권력의 중심지로 도약하였다.

중세 시대를 거치며 파리는 고딕 건축의 정수인 노트르담Notre Dame 대성당을 착공하고 파리 대학교를 설립하는 등 유럽의 학문과 종교를 선도하는 도시로 명성을 쌓았다. 17세기와 18세기에는 절대 왕정의 상징인 베르사유Versailles 궁전으로 왕실이 이동하기도 했으나, 파리는 여전히 계몽주의 사상이 소용돌이치는 지성의 용광로였다. 이러한 지적 자양분은 결국 1789년 파리 시민들이 바스티유Bastille 감옥을 습격하며 발발한 프랑스혁명으로 이어졌고, 파리는 전 세계 근대 민주주의와 인권 선언의 발상지가 되었다.


빛의 도시(La Vile Lumère) 파리



프랑스 왕국이 성립한 것은 카롤링거 제국의 분열 이후 서프랑크 왕국이 건국되는 9세기지만 파리가 줄곧 그 수도의 자리를 지켰던 것은 아니다. 16~17세기 프랑스 왕들은 영내를 이동하며 지냈는데, 18세기 말까지 이어진 부르봉 왕조는 베르사유 궁전이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을 때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때 시민들 사이에서 자유로운 문화가 발전했지만, 아름다운 파리의 모습이 자리를 잡은 것은 혁명과 전란이 휘몰아친 19세기가 되고 나서다.

이후 파리는 관광지로도 큰 인기를 얻으며 ‘꽃의 도시’라는 찬사를 받았다. 에펠Eiffel탑, 개선문 등 세계적인 관광 명소가 많은 파리에서는 프랑스인의 미의식을 반영하여 건물 높이와 옥외 광고에 관한 사항까지 거리의 미관을 해지치 않도록 세세하게 규칙을 정해 놓았다. 또 전등이 보급되면서 에펠탑에 불을 밝혀 아름다운 야경을 연출하여 ‘빛의 도시’라는 이름도 얻었다.

센강의 작은 섬에서 발원하다



파리는 프랑스의 수도권에 해당하는 일드프랑스Île-de-France 레지옹(지역정부)의 주도이자 그랑 파리Grand Paris 메트로폴(기초연합 대도시권)의 핵심 코뮌이다. 현재의 파리의 행정구역은 20개의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크게는 센강을 기준으로 우안(rive droite)과 좌안(rive gauche)으로 나뉜다. 우안은 전통적으로 정치, 경제 기능이 집중된 곳으로 정부 기관, 사무실, 백화점, 주요 기차역 등이 집중해 있다. 반면 좌안은 교육 기능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좌안의 라틴 지구에는 소르본Sorbonne을 비롯한 대학과 그랑제콜Grandes écoles, 연구소 등이 집중해 있다.


그중 1구는 센강의 시테섬 서부를 포함한 일대로, 22만 제곱미터 크기의 이 섬에서 파리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센강은 프랑스 중북부를 흐르는 길이 777킬로미터의 강으로 의외로 그리 크지 않은 규모를 가졌다. 길이는 대한민국의 한강보다는 다소 길지만, 강폭은 그보다 훨씬 좁은 편이다. 서울을 관통하는 지점의 한강 폭은 1킬로미터에 육박하지만, 파리를 지나는 지점에서 센강의 강폭은 100~200미터에 불과하다. 평균 유량 역시 한강보다 다소 적다.

기원전 3세기경, 유럽에 정착한 켈트족의 일파인 파리시족이 시테섬에 집락을 형성했다. 고대 로마인은 프랑스를 ‘갈리아’, 시테섬 주변을 ‘루테티아’라고 불렀는데, 기원전 52년에 카이사르Caesar가 이끄는 로마군이 이 루테티아를 점령했다. 이 과정을 카이사르는 실용적이고 간략한 문체로 쓴 『갈리아 전기』(Commentarii de Bello Gallico)에 담고 있다.

루테티아는 분지의 중심에 위치하고, 프랑스 중남부의 부르고뉴Bourgogne에서부터 서부 연안의 르아브르Le Havre에 이르는 센강이 가로질러 흐른다. 이러한 지리적 환경 덕분에 북쪽의 브리튼Britain섬이나 남쪽의 지중해 방면과 교역 활동을 하는 데 적합했다. 브리튼섬은 지금의 영국을 말하며 그 기원은 로마 시대의 브리타니아Britannia에서 왔다. 로마인은 이 땅에 식민 도시를 건설하고 서쪽의 루앙Rouen이나 남쪽의 오를레앙Orléans으로 통하는 도로를 부설했다.

시테섬을 매개로 센강의 양측을 잇는 다리를 놓고, 바둑판 모양의 도시 구획을 정비해서 대규모 극장과 원형 경기장을 건설했다. 지중해 여러 도시에서 생산한 도기, 금속 제품, 의류 등은 루테티아를 거쳐서, 갈리아 북부와 브리튼 섬으로 유통되었다. 이때 파리시Parisii인의 대다수는 선원으로 일했다. 3세기에 로마인들 사이에서는 루테티아가 아니라 '파리시인이 사는 마을'이라는 통칭이 널리 퍼져 이내 '파리'라는 지명이 자리를 잡았다.


프랑스의 원형이 된 서프랑크 왕국



한편 동쪽에서 게르만인이 갈리아로 침입해 왔다. 로마 황제의 일족인 율리아누스Julianus는 갈리아의 탈환을 위해 파리에 거점을 두고 싸웠다. 이후 율리아누스는 361년에 서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했다. 5세기에 게르만 출신 용병대장 오도아케르Odoacer에 의해 서로마 황제가 폐위되었다. 이후 갈리아에는 게르만계 세력이 뒤섞여 들어왔고, 프랑크인을 이끌던 클로비스Clovis가 481년에 프랑크 왕국 메로빙거Merovingian 왕조를 건국했다. 클로비스는 로마 교회와 협력 관계를 맺고, 그리스도교 아타나시우스파(삼위일체를 주장한 종파)로 개종한 후, 파리의 센강 왼편을 중심으로 많은 교회와 수도원을 건설했다. 이 무렵 파리의 인구는 1~2만 명 정도였다. 당시 파리는 동방에서 온 유대인이나 시리아 상인과 교류했고, 고대 로마 시대부터 이어 온 브리튼섬과의 교역 활동도 활발히 계속해 나갔다.

프랑크 왕국에서는 8세기에 피핀Pippin 3세가 왕위에 올라 카롤링거Carolingian 왕조가 시작되었다. 그 아들인 카롤루스Karolus 대제(카를Karl 1세)는 서유럽 대부분을 정복했다. 그런데 카를 대제는 거듭되는 원정 때문에 파리가 아니라 현재 독일 땅인 아헨Aachen에 주로 머물렀다. 카롤링거 왕조는 843년 베르됭Verdun 조약에 의해 서부, 중부, 동부 등 세 지역으로 분할되었고, 이때 성립한 서프랑크 왕국이 프랑스의 원형이 되었다. 곧이어 북유럽에서 노르만인 바이킹Viking족이 센강을 거슬러 침입해 와 파리의 교회를 파괴하고 약탈을 일삼았다.

이에 카롤링거 가문의 방계이자, 파리 일대를 통치하던 외드Eudes 백작이 바이킹을 몰아냈다. 987년에 카롤링거 가문이 단절되자 로베르가의 위그 카페Hugues Capet가 즉위하여 프랑스 왕국 카페Capet 왕조를 창시했다. 카페 왕조는 파리 센강의 우측을 중심으로 크게 발전했는데, 이 시기에 시테섬의 북동 지역 레알(중앙시장) 지구에서 많은 농산물과 상품이 거래되었다. 시테섬의 남동 지역에서는 1163년에 ‘노트르담 대성당’ 건설이 시작되었다. 독특한 두 탑이 있는 이 교회는 천장 높이가 35미터인, 중세 고딕 건축 기준으로는 파격적인 크기의 건축물로 1345년에 완공되었다. 교회는 거대한 규모로 신의 권위를 과시했다.

시민이 힘을 기른 중세 후기



1180년에 즉위한 필리프Philippe 2세는 시내의 도로를 판돌로 깔고 센강 양쪽에 성벽을 건설했다. 또 현재 유럽에서 오래된 대학 중 하나가 된 파리 대학을 세웠다. 필리프 2세가 건설한 ‘루브르Louvre성’은 이후 수백 년 동안 증개축을 반복했고, 16세기 중기에는 르네상스 양식의 화려하고 장엄한 궁전이 되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 이 성은 박물관으로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파리의 인구는 13세기에 이미 10만 명에 달했다. 1302년에는 성직자(제1신분), 귀족(제2신분), 평민(제3신분)의 대표들이 모여 세제 등을 논의하는 ‘삼부회三部會(États généraux)’가 처음으로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열렸다. 평민 대표도 당당히 참여하게 된 것은 상업이 크게 발달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왕실 및 귀족을 거래 상대로 하는 모직물 상인, 귀금속상, 금융업자 등 정치적으로 유력한 거상이 늘어난 것이다.

직종별 협동조합(길드Guild)이나 교회에 소속 의식을 가지면서, 시민들 사이에서는 혈연이나 지연에 속박되지 않은 개인주의적 기질이 생겨났다. 이를 뒷받침하듯 당시에 여성이 상점 주인이나 의사와 같은 직업을 가지고 가구주가 된 기록도 많이 발견되었다.


흑사병(페스트)의 창궐



1328년에는 카페 왕조가 끝나고 발루아Valois 왕조가 시작되었다. 9년 뒤 영국과 백년전쟁百年戰爭에 돌입하면서 프랑스 시민들과 농민들은 무거운 세금과 식량난에 허덕이게 되었다. 결국 1358년에 파리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은 116년 만인 1453년에 끝이 났지만, 기나긴 전란 후에 페스트Peste(흑사병)까지 유행하면서 중세 말기의 파리는 그야말로 피폐해졌다. 전염병이 창궐한 한 원인으로 열악한 위생과 환경 문제를 들 수 있는데, 당시에는 오물을 그냥 길거리에 내버렸다고 한다.

흑사병 이전의 세계 인구는 4억 5천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14세기를 거치며 거의 1억 명이 줄었다. 인구가 흑사병 이전 수준까지 회복되는 데는 17세기까지 300여 년의 시간이 걸렸다. 예언가로 유명한 노스트라다무스Nostradamus는 1546년에 남부 프랑스에 흑사병이 퍼졌을 때 새로운 치료법으로 흑사병을 치료하는 데 공헌했다. 점성가이면서 의사이기도 했던 그는 당시로서는 생소한 ’위생‘이라는 새로운 관념을 가지고 치료에 임한, 시대를 꽤 앞서 나간 모습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종교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16세기 프랑스에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Renaissance 문화가 널리 퍼지는 한편, 독일에서 활발히 진행되던 종교 개혁宗敎改革(Réforme)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 후 프랑스의 가톨릭 신도와 신교도(위그노) 사이에 대립이 격화되면서 결국 위그노Huguenot 전쟁이 벌어졌다. 1572년 8월, 파리에서 신교도가 대량 학살을 당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Massacre de la Saint-Barthélemy)이 발생했고 종교 간 분쟁은 각지로 확산하였다. 이후 1593년에 가톨릭으로 개종한 나바라 왕국의 앙리가 앙리Henri 4세로 선포되고 위그노에게 상당한 권리와 자유를 부여하는 낭트 칙령(Édit de Nante)을 발표하면서 1598년 타협으로 끝났다. 그러나 가톨릭교도들은 개신교도와 앙리에 대한 불만을 계속 표출했으며, 1610년 그의 암살은 1620년대에 새로운 위그노 반란을 촉발하기도 했다.

앙리 4세는 정쟁 때문에 암살당한 앙리 3세의 뒤를 이어 1589년에 카페 왕조 분가인 부르봉Bourbon 왕조를 창시했다. 앙리 4세는 이전부터 공사가 진행되던, 시테섬 서쪽 끝과 오른편 강가를 잇는 석조 다리 ‘퐁뇌프Pont Neuf(새로운 다리)’를 완성했다. 또 루브르 궁전의 동북쪽에 ‘루아얄Royal 광장(지금의 보주Vosges 광장)’을 만들었다.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파리시의 위생 환경 개선을 위해 상수도를 정비했다.

16~17세기의 프랑스 국왕은 파리에만 머물지 않고 지방을 순회하면서 생활했다. 각지의 신민에게 왕의 모습을 보여주며 방문지에서 세금을 거두기 위해서다.


프랑스혁명의 중심지가 된 파리




1643년에 즉위한 루이Louis 14세는 자주 정변이나 전란에 휩싸이던 파리를 어릴 때부터 꺼렸다. 그래서 파리에서 서남쪽으로 약 20킬로미터 떨어진 베르사유Versailles에 새로운 궁전을 건설했다. 루이 14세는 재위 중반까지 루브르 궁전에서 정무를 보다가 1680년경부터 정치의 중심을 베르사유 궁전으로 옮겨갔다. 이에 따라 왕실과 파리 시민의 일체감은 점차 사라졌다.

파리에서는 1670년에 성벽이 헐리고 루브르 궁전의 서쪽 끝부터 북서쪽으로 이어지는 ‘샹젤리제Champs-Élysées 거리’가 완성되었다. 이듬해에는 국립 극장(Théâtre National)이 문을 열었다. 국왕이 없는 파리에서는 부유한 시민들 사이에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가 정착했다. 특히 많은 예술가와 학자가 모여 의견을 나누는 자유로운 토론 문화가 형성되었고 왕후王侯, 귀족과 교회의 권위를 부정하는 볼테르Voltaire루소Rousseau의 계몽사상이 확산하였다.

18세기 말, 파리의 인구는 약 65~70만 명에 달했는데, 당시 무리한 대외 전쟁과 흉작이 계속되던 탓에 시민들의 조세 부담이 가중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결국 1789년에 파리 시민들이 바스티유Bastille 감옥을 습격한 일을 시작으로 프랑스혁명이 일어났다. 삼부회의 평민 대표를 중심으로 한 국민의회(Assemblée nationale)가 실권을 잡으며 부르봉 왕조는 무너졌고, 1792년에 공화정이 선포되었다(제1공화정). 의회가 있던 파리는 다시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고, 구체제의 산물이 된 교회와 귀족의 저택들은 파괴되었다. 이때 루브르 궁전은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나폴레옹이 연 제정 시대



프랑스혁명 후 파리에서는 급진 세력과 왕정복고파에 의한 정변이 반복되었다. 최종적으로 혁명 정권과 적대국들을 물리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가 권력을 장악하고 의회의 지지를 얻어 황제에 즉위했다. 이로써 1804년에 프랑스 제1제정이 시작되었다. 2년 후,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샹젤리제 거리에 개선문 건설을 시작했지만, 완공은 그가 실각한 뒤인 1836년에 이루어졌다.

1814년에 나폴레옹이 실각하자 부르봉 왕조가 부활했다. 하지만 왕조는 1830년 7월 혁명으로 다시 무너지고 입헌군주정의 오를레앙Orléans 왕조(7월 왕정)가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이 역시 1848년 2월 혁명으로 무너지고 제2공화정 시대로 접어든다. 같은 해 12월 나폴레옹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Louis Napoléon Bonaparte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2년 후에는 국민투표로 신임을 얻어 황제(나폴레옹 3세)로 즉위하여 제2제정을 시작했다. 그사이 1837년에는 파리와 생제르맹앙레Saint-Germain-en-Laye 사이에 철도가 개통되었다.


오스만 남작의 파리 대개조 사업



19세기 중반, 파리는 찬란한 명성과 달리 비좁고 불결한 골목길, 오물이 넘쳐나는 하수도, 그리고 이에 따라 창궐하는 콜레라로 신음하던 낙후된 도시였다. 마차 한 대조차 지나가기 힘들 정도로 과밀화된 중세의 구조를 깨부수고 오늘날 우리가 아는 ‘빛의 도시’ 파리를 탄생시킨 인물이 바로 나폴레옹 3세와 그의 손발이 되었던 조르주 외젠 오스만Georges-Eugène Haussmann 남작이다. 1853년부터 약 17년간 진행된 이 거대한 ‘파리 도시 대개조 사업(Haussmann’s Renovation of Paris)’의 구체적인 내용과 이로 인한 도시의 변화는 크게 네 가지 축으로 나눠 볼 수 있다.

가장 먼저 단행된 것은 방사형 대로(Boulevard)의 개설과 도로망의 확충이었다. 오스만 남작은 개선문을 중심으로 12개의 대로가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방사형 도로망을 구축했다. 미로 같던 구시가지의 골목길들을 과감하게 밀어 버리고 폭 20~30미터에 달하는 넓고 곧은 대로들을 뚫었는데, 이는 단순히 교통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당시 잦은 시민 혁명과 폭동으로 골치 아프던 나폴레옹 3세 정부에게, 군대가 신속하게 이동하고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기 어렵게 만드는 넓은 도로는 체제 유지를 위한 강력한 군사적 무기이기도 했다.

도로가 뚫리자, 도시의 미관을 통일하는 건축 규제와 ‘오스만 양식’의 도입이 뒤를 이었다. 오스만 남작은 새로 조성된 대로변에 지어질 건물들의 높이, 층수, 심지어 외벽의 색상과 재료까지 엄격하게 법으로 제한했다. 파리 근교에서 채굴한 크림색 석회암(Lutetian limestone)을 외벽 자재로 통일하고, 건물의 높이는 도로 폭에 맞추어 최고 5~6층으로 제한했다. 특히 2층에는 고급스러운 테라스를, 맨 위층에는 비스듬한 경사의 맨사드 지붕(Mansard roof)과 하인들이 머무는 다락방을 배치하도록 정형화했는데, 이 규격화된 우아한 건물들이 오늘날 파리 시내 풍경의 정체성이 되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화려함 아래에는 근대적인 하수도망과 급수 시스템의 혁명이 깔려 있었다. 오스만은 엔지니어 외젠 벨그랑Eugène Belgrand과 손잡고 파리 지하에 총길이 수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지하 하수도 터널을 건설했다. 센강으로 직접 흘러들던 오물을 격리하고 외곽에서 깨끗한 식수를 끌어오는 분리형 상하수도 시스템을 구축하면서, 파리는 고질적인 전염병 공포에서 벗어나 위생적인 근대 도시로 거듭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도시의 숨통을 틔워 줄 녹지 공간과 공공시설의 확충이 이루어졌다. 영국 런던의 공원들을 부러워했던 나폴레옹 3세의 뜻에 따라, 파리 동쪽의 뱅센Vincennes 숲과 서쪽의 불로뉴Boulogne 숲을 대규모 시민 공원으로 정비했다. 도시 내부에도 뷔트 쇼몽Buttes-Chaumont, 몽수리Montsouris 공원 같은 녹지대를 조성하여 시민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했으며, 오페라 가르니에Opéra Garnier를 비롯한 문화 시설과 대형 기차역들을 배치해 도시의 허브 기능을 강화했다.

이 대개조 사업은 파리에 파멸적인 파괴와 눈부신 현대화를 동시에 안겨 주었다. 중세의 귀중한 역사적 건축물과 서민들 삶의 터전이 대거 철거되면서 수많은 빈민이 도시 외곽(방리유Banlieue)으로 밀려나는 부작용을 낳았고, 막대한 국가 재정 채무를 지우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오스만 남작의 뚝심은 파리를 어둡고 비위생적인 중세의 허물에서 벗겨 내어, 전 세계 모든 근대 도시들이 모방하고자 했던 19세기 자본주의와 문화의 중심이자 ‘가장 아름다운 세계의 수도’로 바꾸어 놓았다.

현재도 파리에는 지어진 지 100년 이상 된 가옥이 적지 않은데. 그 대부분은 제2제정 시기에 건설된 것이다. 이때 파리시는 행정구를 20구로 정했다. 시테섬의 서쪽을 출발점인 제1구로 정하고 시계 방향으로 둥글게 뻗어 가듯 제20구까지 숫자로 배정했다. 그리고 길 양쪽으로는 홀수 번지와 짝수 번지가 마주 보도록 규칙적으로 정리했다. 1850년대에는 파리에서 세계 최초의 백화점이 문을 열었다. 또 철 기둥과 유리 지붕을 이용한 아케이드식의 상점가(파사쥬Passage)에서 쇼핑인 상업 지구가 생겼다.

이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풍요로운 ‘벨 에포크Belle Époque(아름다운 시절)’ 시대를 지나며 파리의 상징인 에펠탑이 세워졌고, 전 세계의 수많은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파리로 모여들어 문화적 전성기를 꽃피웠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라는 비극 속에서도 파리 시민들은 도시의 문화적 유산을 기적적으로 지켜 내며 현대까지 그 가치를 이어 오고 있다.


현대의 파리



1870년에 발생한 독불전쟁(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하자 나폴레옹 3세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종전 직후 혼란 속에서 임시정부 공화정이 들어선 한편, 파리에서는 일시적으로 노동자 계급에 의한 자치 정부(파리 코뮌Paris Commune)가 탄생했다. 하지만 자치 정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임시정부를 발전시킨 제3공화정이 수립됐다. 이후 1889년에는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세계 만국박람회가 열렸다. 이때 7구의 센강 변에 높이 300미터가 넘는 ‘에펠탑’이 세워졌다. 석조 건축물이 대부분이었던 당시에 이 거대한 철골 노출형 탑이 공개되자 파리의 경관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시민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하지만 이 탑은 점차 관광 명소로 자리 잡으며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20세기에 들어서, 코코 샤넬Coco Chanel이 파리에서 모자 가게를 창업해서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로 키워 나갔다. 또 화가 피카소Picasso, 소설가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 등 많은 문화인이 모여든 덕분에 파리는 전위적인 초현실주의 예술 등 새로운 문화의 발신지로서 그 지위를 확립했다.

1914년에 발발한 1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군이 파리를 포격했지만, 파리는 다행히 큰 피해를 모면하고 종전 후 강화 회의의 개최지가 되었다. 그 후 2차 세계대전 때 파리는 독일군에 점령당했지만, 시민들은 과감한 저항 운동을 벌여 나갔다. 1944년에 연합군이 파리를 해방한 후, 미국 군인들이 기념 선물을 사기 위해 샤넬의 가게 앞에서 장사진을 쳤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중에 영국으로 망명해서 항전을 계속했던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 장군은 1959년에 제18대 프랑스 대통령으로 정식 취임했다. 하지만 그의 권위적인 정책에 노동자와 학생의 불만이 고조되었고, 1968년에 파리를 중심으로 대규모 폭동(5월 혁명)이 일어나 대통령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프랑스 현대사에 많은 업적을 남긴 드골을 기리기 위해 에투알Étoile 개선문이 서 있는 장소를 ‘에투알 광장’에서 ‘샤를 드골 광장’으로 개칭했다.

프랑스인은 시민의 손으로 이루어 낸 프랑스혁명과 도시 개발로 가꾼 파리에 대해 상당히 강한 자부심과 애착을 느끼고 있다. 프랑스는 1985년부터 파리의 라데팡스La Défense 지역에 신新개선문(그랑드 아르슈Grande Arche) 건설을 시작하여 4년 후에 완공했다. 이 구조물은 1989년 프랑스 혁명 200주년을 기념하여 만든 것이다. ■

세계 예술의 수도, 파리


파리의 문화는 미술과 건축, 미식과 패션에 이르기까지 인류 예술의 정수를 보여 준다. 고대 유물부터 모나리자까지 인류의 보물을 간직한 루브르Louvre 박물관, 인상주의 거장들의 걸작이 숨 쉬는 오르세Orsay 미술관, 그리고 파격적인 현대 미술의 메카인 퐁피두Pompidou 센터는 파리가 왜 세계 예술의 수도인지를 증명한다.



또한, 사르트르Sartre나 헤밍웨이Hemingway 같은 문학가와 철학자들이 모여 밤새 토론을 벌이던 생제르맹데프레Saint-Germain-des-Prés의 노천카페들은 파리 특유의 깊이 있는 지성적 분위기를 대변한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프랑스식 코스 요리와 미식 문화, 그리고 샤넬Chanel과 디올Dior로 대표되는 오트쿠튀르Haute couture(최상급의 맞춤복 패션 디자인 제작물) 고급 패션은 파리를 세련미와 우아함의 대명사로 만들었다.

이처럼 파리는 천천히 흐르는 센강의 물줄기 위에 수천 년의 역사와 찬란한 예술적 성취를 겹겹이 쌓아 올린,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살아 있는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30개 도시로 읽는 세계사』, 조 지무쇼 저자(글)⋅최미숙 번역⋅진노 마사후미 감수, 2020, 다산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