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력과 일심으로 좋은 열매를 맺는 신앙

[태상종도사님 말씀]
도기 137. 6. 4(월), 종의회, 증산도 교육문화회관 태을궁

상제님이 보신 역신해원 공사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동한다. 천지신명도 감동한다. 세상만사世上萬事는 언젠가는 사필귀정事必歸正으로, 바른 길로 돌아간다. 자연 섭리라는 것은 어떤 특정인을 위해서 만들어지지 않았다. 자연 섭리는 특정인의 생각에 따라서 진행되지 않는다. ‘나는 자연 섭리를 바탕으로 해서, 자연 섭리에 수용을 당해서, 순종해서 천지에 공을 쌓겠다.’는 사람은 좋은 열매를 맺어서 후천 5만 년을 내려갈 것이다.

상제님이 천지공사를 보실 때, 원신寃神은 세운 공사世運公事에 투사하시고 역신逆神은 도운 공사道運公事에 투사하셨다. 그래서 원신은 정치와 세상에 맡겨져서 정치하는 사람들, 사회인들과 함께 그 판에서 흡족하게 해원을 한다. 그런데 역신은 내적으로 우리 도운에 붙여서 해원하게 하셨다.

역신은 역모를 도모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다. ‘성즉군왕成則君王이요 패즉역적敗則逆賊이라,’ 역적 모의를 해서 성공하면 군왕이 된다. 예를 들어서 이연李淵이 아들 이세민李世民과 더불어 수隋나라 양제煬帝를 몰아냈다. 그렇게 성공했기 때문에 당唐나라를 세웠고 이세민이 당 태종唐太宗이 됐다. 수 양제를 몰아내지 못했으면 그 혈족이 다 죽었을 것 아닌가? 또 칭기즈 칸은 송宋나라를 정복하고 원 태조元太祖가 되었다. 주원장朱元璋은 원나라를 밀어치고 성공했기 때문에 명 태조가明太祖가 되었다. 이성계李成桂는 고려를 밀어냈고 조선을 건국해서 태조가 되었다.

반면에 전명숙全明淑은 역률逆律에 따라 죽었다. 자는 명숙이요 이름은 봉준琫準인데 세상에서는 녹두장군이라 했다. 녹두장군은 역적이 되려고 한 게 아니었다. 나라를 얻으려고 거사한 것이 아니었다. 조대비趙大妃의 조카인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이 얼마나 토색질을 했는가. 농민들이 농사를 지어도 세금으로 빼앗기고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녹두장군의 아버지가 좋게 말해서 데모를 하다가 매 맞아 죽었다.

전명숙 장군에게 왜놈들이 “우리 말을 들으면 일본 법을 써서 너를 죽지 않게 만들어 주마.”라고 했지만, 장군은 “나는 우리나라 법에 따라서 죽을 것이니 너희가 간섭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했다. 얼마나 정대正大한 말인가. 소인배가 아니라도 어지간한 사람은 자신의 잔명殘命을 구걸할 테지만 전명숙 장군은 ‘내가 영사寧死언정, 조선 사람으로서 어떻게 일본 사람 신세를 질 수 있겠느냐?’ 하는 의기를 가지고 역적으로 몰려서 죽었다. 그래서 역신이다.


정승 판서를 꿈꾼 신앙인들



역신에도 바른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결국은 바른 사람이 성공한다. 역신도 해원하면 좋은 신이 된다. 그런데 증산도를 믿는 사람은 보천교普天敎 때부터 그 특징이 하나 있다.

불교에서 왕천자王天子를 꿈꾸는 신도는 하나도 없다. 기독교에도 왕천자를 꿈꾸는 신도는 하나도 없다. 불교 3천 년을 통해서 ‘내가 부처를 잘 믿어서 통일천하를 하겠다.’는 스님은 없었고, 기독교 2천 년을 통해서 ‘나는 나라의 통치자가 되겠다.’ 하는 신도도 없었다. 이처럼 신앙을 해서 통치자가 되겠다는 신도가 나온 종단은 일찍이 없었다.

그렇지만 우리 증산도는 불교, 기독교와 다르다. 보천교 때 차경석車京石(1880~1936) 성도가 십일전十一殿을 지었다. 열 십十에 한 일一을 보태면 흙 토土 자다. 수화금목水火金木을 기준으로 삼아 수주水主, 금주金主, 목주木主, 화주火主를 사정방四正方에 간부로 딱 정해 놓았다. 그 네 사람은 영의정 격이다. 수화금목은 흙을 떠나면 안 되는데, 토주土主가 교주敎主다. 그 토주가 교주가 되어 주관하는 집이 십일전이다. 그 교주가 갑자년에 등극한다고 했지만 갑자년에 등극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저 말단 신도도 다 판서나 높은 벼슬아치의 격이었다. 누구는 군수이고, 누구는 도지사이고 그렇게 관직 아닌 관직이 다 매겨져 있었다.

내가 2변을 개척할 때 가만히 보니까 2변의 주체는 사실상 여기 앉아 있는 증산도 종도사였다. 2변에도 조직은 있었는데 나는 그 조직에서 빠진 사람이었다. 이상호, 이정립과 나는 동지적 위치에서 만났다. 나는 그 사람들에게 교를 받은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이상호李祥昊(1888~1967), 이정립李正立(1895~1968)과 나 사이에는 갈등이 생기게 되었고 나중에는 마치 빙탄氷炭, 얼음과 숯끼리 만난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 신도들은 거의 다 내 사람이었다.

그런데 신도들을 보면, 누가 그렇게 가르치지도 않았건만 다 정승 판서를 꿈꾸었다. 인간 됨됨이, 인성이 덜 갖추어져서 격이 안 됐는데, 군수 자격도 안 되고 심지어 통장 자격도 안 되는데 정승 판서를 꿈꾼 것이다. 상제님 신앙을 하라고 했는데, 가만히 보면 보천교 때도 그 사람들의 정신이 마치 무슨 정치 단체 사람들처럼 그랬다.

나는 그런 걸 알기 때문에 어지간한 것은 잘 수용하려 한다. 역신들이 달라붙어서, 역신에게 사로잡혀서 그렇겠거니 하고 그저 좋게 이해하고 만다. 그렇지만 우리 증산도에 들어와서 천지에 공功 쌓을 생각은 하지 않고 명예욕을 탐하는 것이 당연시되면 안 된다.


올바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상제님 진리를 대표적으로 묶어서 말하면 상생相生, 상생 문화다. 지금 세상 사람이 먼저 상생을 찾고 있다. “증산도에서 말하는 상생이라는 두 글자만 가지고도 이 세상을 세 번 고치고 남는다.”고 말한 철인도 있다. 그런데 진리가 아무리 좋아도 세상만사라는 것은 다만 사람이 하는 것이다. 귀신, 도깨비가 하는 게 아니다.

그래서 사람이 그렇게 귀한 것이다. 인간 두겁을 썼다고 다 사람은 아니다. 인간은 천태만상이다. 사람이 제대로 사람 노릇을 하려면 우선 자신이 중심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사람은 공도公道에 입각해서 생활해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공도를 집행하기 위해서 밥 먹고 잠자고, 경제 행위도 한다.’ 정신이 이렇게 돼야 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 되면 안 된다.

내가 통성 기도通聲祈禱를 하라고 했다. 통성 기도를 하게 한 이유가 있다. 하늘땅 사이에 사람이 사는데 사람은 세상에 수용당해 있다. 천지의 역사적인 신명들도 있다. 통성 기도란 무엇인가? 이 만유가 존재하는 현실 속에서, 65억 인류가 생존하는 현실 역사 속에서, 또 상제님과 태모님을 비롯해서 천지신명이 듣고 보는 그 속에서 “저는 이렇게 하겠습니다. 이렇게 맹세합니다. 꼭 이렇게 되게 해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실천實踐 역행力行을 하지 않으면서 통성 기도를 계속하기는 어렵다. 어떻게 천지신명을 속이나? 천지신명 앞에서 매일 거짓말하지는 못하잖는가? 상제님, 태모님과 천지신명 앞에서, 신앙 동지들 앞에서 이렇게 맹세하면, 통성 기도를 계속하면 심술꾸러기, 욕심쟁이도 스스로 공정한 사람, 좋은 사람이 될 것이다. 자기 과오를 스스로 고쳐서 새사람이 되고, 신앙도 새롭게 잘할 것이다.


천하사 일꾼이 되어야



포교를 하려면 자존심부터 빼어 버려야 한다. 자신이 세상에 공을 쌓고 사람 노릇을 해야 남이 존경하고 같이 접촉도 한다. 그런데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앉아서 ‘나를 위해 다오.’라고 한들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을 위해 주겠는가? 아니 하늘이 저를 위해서 생겼어? 땅이 저를 위해서 생겼어? 세상 사람들이 저를 위해서 생겼어? 누구나 똑같이 자존심 있지, 저만 자존심이 있는가?

도장을 개창하려면 사실 힘이 많이 든다. 그렇게 도장을 만들었으면 그 도장이 채워질 때까지 부지런히 포교해야 할 것 아닌가? 선하심후하심先何心後何心이라. 먼저는 무슨 마음이고 나중에는 무슨 마음이냐는 말처럼, 왜 도장을 열고 포교를 하지 않는가 말이다. 포교는 안 하니까 안 되는 것이다.

유시무종有始無終으로 바람만 일으키고 매듭을 못 짓는 사람은 보처자保妻子도 못 한다. 도장을 만들어 놓았으면 그 공간을 채워야 하는데 왜 안 채우나? 왜 못 하나? 정성이 부족해서, 일심이 부족해서 그렇다.

2변 때 양일환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머슴살이를 하면서도 8백여 명을 포교했다. 초등학교(초등학교)도 못 다니고 전실前室 자식이라 해서 서모庶母에게 쫓겨난 사람이었다. ‘일심소도一心所到에 금석金石을 가투可透라.’ 정성精誠이 지극하면 능히 쇠와 돌을 뚫을 수 있다. 꿩 잡는 게 매다. 박사가 백 개면 무슨 소용이 있나. 신앙하러 들어왔으면 올바르게 신앙해야지, 사기 신앙을 하면 안 된다.
이왕 만든 도장을 다른 도장과 통합하는 것도 좋지만 그 작은 도장 하나도 못 채우고 주체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큰일을 할 수 있겠는가? 거저 손바닥만 한, 북통만 한 것도 못 채워서 다른 도장과 합해야겠다는 쫄보들과 무슨 큰일을 하나? 이것은 천하사여, 천하사! 일당백 일당천 일당만, 혼자서 백 명 노릇도 하고, 천 명 노릇도 하고, 만 명 노릇도 할 수 있는 걸걸장부傑傑丈夫가 필요하다.


인성, 인망을 갖춘 사람



사람은 인성人性이 제대로 돼야 한다. 이전에는 포정이 도장의 핵심이었다. 물론 수호사도 있지만 포정이 도장의 구심점, 중심체였단 말이다. 그런데 내가 드문드문 들어 보면, 포감들이 포정을 우습게 알고 “간섭하지 말라.”고 한다는 것이다. 여기 좋은 포감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포감도 있으니까 내 귀에까지 그런 말이 들어온 것 아닌가? 그런 포감은 돌연변이突然變異처럼 인성이 잘못된 사람이다.

‘조문도朝聞道면 석사夕死라도 가의可矣라.’ 아침에 좋은 것을 배우면, 도를 얻으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다. 포감은 포정의 도움을 받고 일을 배워야 한다. 일을 배워서 자기 구역을 성장시키고 나아가서 능히 한 도장을 경영할 수 있어야 한다.

상제님 진리는 불의를 뿌리 뽑고 정의를 규명한다. 여기에는 비뚤어진 생각, 허황된 생각, 과시욕을 가진 사람은 다 소용없다. 그런 사람이 하는 행동은 자가중상自家中傷, 제 칼로 제 목을 찌르고 자승자박自繩自縛, 제 끈으로 제 몸뚱이를 묶는 격이다.

내가 포감들에게 그 포정들, 전직 포정들을 상전으로 모시라는 게 아니다. “잘 도와주십시오. 잘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단체를 운영하던 사람들에게 배워야 할 것 아닌가? 포감 중에는 수호사 못지않은 능력이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런 포감들은 더 중요한 자리에 등용될 것이다. 그러니 경력을 많이 쌓아라.

내가 어떤 보직을 금방 받은 사람에게 늘 하는 말이 있다. ‘거상이교즉망居上而驕則亡이라’, 권위가 있다고 교만하고 거만을 떨면 망한다는 말이다. 사람을 부리려면 그 사람이 당할 기한飢寒부터 알아야 한다. 옛날에 종을 부리는데 “너, 서울 누구 집에 갔다 오라. 박대감 집에 가서 이 편지를 전하고 오라.” 하고 시킬 때는 우선 그 하인이 옷을 따뜻하게 입었는지 여비가 충분한지 살펴야 한다.

인성이 안 된 사람이 자리를 차지하면 뭘 하나? 사람은 인망人望을 얻어야 할 것 아닌가? 윗사람한테 인망을 얻고, 아랫사람한테도 인망을 얻고. 사람은 제 품성이 있다. 내가 늘 “덕자德者는 본야本也요 재자財者는 말末이라.”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지 않았는가? 덕이라는 것은 바탕이 되고, 재물은 말단이다. 또 “부윤옥富潤屋이요 덕윤신德潤身이라.”라는 말도 있다. 부자는 집을 아주 이쁘게, 호화스럽게 가꾸고, 덕德이 있는 사람은 그 덕이 줄줄 흘러서 사람이 아주 돋보인다. 사람은 덕이 있어야 한다. 윗사람이건 아랫사람이건 사람인지라 부덕不德하면 안 된다. 그래서 내가 늘 덕인德人이 되라고 하는 것이다.


함께 천하사를 할 일꾼



도장을 통폐합하더라도 발전을 시켜야 한다. 포교를 해서 꽉꽉 채워 넣어라. 포교하기 싫은 사람은 신앙을 안 해도 된다.

아니 포교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러고서 혈식천추血食千秋 도덕군자道德君子가 될 수 있는가? 포교해서 천지에 공을 쌓고 훌륭하게 돼야 혈식천추 도덕군자도 되는 것이지, 가만히 앉아서 무슨 혈식천추 도덕군자가 되겠는가. 그것은 절대로 되지 않는다.

일꾼! 나는 일꾼이 필요하다. 함께 천하사를 할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여기는 포교를 해서 이 지구상에 사는 사람을 살리려는 곳이다. 우리의 목적이 그렇게 되어 있다. 여기는 건설적인 인물이 필요하다. 건설적이고 창조적인 인물, 그런 사람이 아니면 이 사회에서 어디를 가든 붙어 있지 못한다. 격이 안 된 사람이 낙오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원력, 일심으로 포교하라



원력願力이라는 것이 있다. 오늘도 기도하고 내일도 기도하고 모레도 기도하라. 아까도 하고 현재도 하는 그 기도에 담긴 원력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자꾸 축적된다. 계속 쌓인다. 열 번, 스무 번, 백 번, 천 번, 한 시간, 두 시간, 열 시간 그 원력이 축적되어서 자연히 포교가 된다. 그런 원력, 일심, 일편단심이 있어야 포교가 되는 것이다.

포교는 다닐 행行, 다리 각脚, 행각行脚이다. 걸어 다니면서 포교한다는 말이다. 포교는 가만히 앉아서 하는 것이 아니다. 찾아가서 하고 거리에서도 하는 것이다. 어떻게 편히 앉아서 포교되기를 바라나?

천지 기운을, 자연 섭리를 백 프로 그대로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빈 쭉정이밖에 안 된다. ‘길화吉花는 개길실開吉實하고 흉화凶花는 개흉실開凶實이라.’ 좋은 꽃은 좋은 열매를 맺고, 몹쓸 꽃은 몹쓸 열매를 맺는다. 천지 기운을 제대로 받아야, 금목수화토 오행 기운을 제대로 받아야 좋은 열매를 맺는다. 이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