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중심이었던 천 년 고도古都, 교토京都
[열두 도시로 살펴보는 세계사]
이해영 전임기자 / 서울관악도장
이후 1331년 가마쿠라 바쿠후(막부幕府)에 맞서 일으킨 고다이고後醍醐 천황의 반란과 파벌 싸움으로 인해 1333년 가마쿠라 막부는 무너졌고, 1336년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가 고묘光明 천황를 옹립해 북조北朝를 수립한 뒤 교토를 세력 거점으로 삼아 무로마치室町 막부를 개창했다.
이러한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교토는 무사 정신과 예술이 결합한 독특한 문화를 꽃피웠다. 교토의 명물인 금각사金閣寺(킨카쿠지)와 은각사銀閣寺(긴카쿠지)가 이 무로막치 막부 시기에 세워졌다.
그런데 1467년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將軍 후계자 문제를 두고 교토 한복판에서 11년 동안 내전이 벌어진다. 바로 오닌応仁의 난이다. 이 전쟁으로 교토 시내의 절반 이상이 잿더미가 되었고, 우리가 지금 보는 교토의 사찰들은 대부분 그 이후에 재건된 것들이다. 이 내전은 일본 센코쿠(전국戦国) 시대의 시작을 알린 사건으로, 당시 조선은 세조世祖에서 성종成宗으로 이어지던 시기였다.
무로마치 막부는 1573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 의해 무너졌다. 그 뒤를 이어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거쳐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1603년 에도江戶 막부 시대를 열면서 일본은 근세로 이행하였다.
에도 시대 말기, 천황을 지키려는 세력과 막부를 지키려는 세력이 교토 골목골목에서 칼부림을 벌였다. 애니메이션이나 드라마의 단골 소재인 ‘신센구미(신선조新選組)‘가 활약한 무대가 바로 이때의 교토이고, 메이지 유신의 주역인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가 암살된 곳도 이곳이다. 신센구미는 막부 휘하에서 활동한 치안 및 준군사조직 중 하나를 의미한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과 교류 과정을 겪고 #메이지 정부군이 1868년 에도성에 무혈 입성함으로써 에도 막부는 붕괴#하였고, 일본은 근대 시대로 이행하였다.
교토는 “땅을 파기만 하면 유물이 나온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역사가 깊은 곳이다. 일본 왕에 대해 알고 싶다면 교토 어소京都御所 궁궐을, 바쿠후(막부) 시대를 알고 싶다면 니조성二条城 성곽을, 그리고 전쟁의 아픔을 느끼고 싶다면 산주산겐도三十三間堂 사찰을 찾으면 된다. 산주산겐도의 원래 이름은 연화왕원蓮華王院으로 기둥에 수많은 화살촉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소설을 관통하는 핵심 정서는 모노노아와레物の哀れ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사물이나 풍경을 보며 느끼는 애잔하고 덧없는 정취’를 뜻하며, 수많은 여인과의 만남과 이별, 계절의 변화, 화려한 궁중 의례 등을 통해 결국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고 덧없다는 불교적 무상관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3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교토 분지에 있는 교토의 옛 명칭은 ‘헤이안쿄平安京’다. 이 도시는 794년에 간무桓武 천황이 이곳으로 천도하면서 탄생했다. 헤이안쿄 이전에는 나라奈良의 헤이조쿄平城京가 수도였다. 헤이조쿄는 덴무天武 천황계의 혈족을 지지하는 귀족과 기존 불교 세력의 영향력이 강한 곳이었고 물 사정이 좋지 않은 곳이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덴무 천황과 대립하던 덴지天智 천황계의 혈족과 간무 천황은 784년에 교토 부근의 나카오카쿄長岡京로 천도했다.
그런데 천도의 책임자이자 신뢰하던 대신인 후지와라노 다네츠구藤原種継가 누군가의 화살에 맞아 암살당하자, 간무 천황은 친동생인 황태제 사와라早良 친왕親王을 의심하며 아와지淡路로 귀양을 보냈다. 유배지로 떠나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무죄를 호소하며 단식하던 사와라 친왕은 결국 죽음을 맞았다.
그 후 간무 천황의 생모와 황후 등이 잇따라 병사하고 홍수와 기근에 전염병까지 발생하자, 사람들은 사와라 친왕 원령의 저주 때문에 흉흉한 재해가 생기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간무 천황은 천도를 결심했고, 그때 선택한 곳이 교토 분지다. 간무 천황은 동생 사와라 친왕에게 스도 천황崇道天皇의 시호를 올려 추존하고 정중히 제사를 지내며 그 노여움을 달래고자 했다.
교토 지역이 선택된 이유는 당시 일본인들이 믿던 ‘사신상응四神相應’의 조건에 합치했기 때문이다. 이는 각 방위에 수호신을 두는 풍수지리에서 유래한 것으로, 북쪽에 바위(현무玄武), 동쪽에 강(청룡靑龍), 남쪽에 큰 연못(주작朱雀), 서쪽에 도로(백호白虎)가 있는 형세의 토지를 명당으로 간주한다. 교토 분지 일대에는 북쪽에 후나오카산船岡山, 동쪽에 가모가와강鴨川, 남쪽에 오구라 연못小倉池(현재는 매립됨), 서쪽에 산인도山陰道가 자리 잡고 있었기 이곳이 틀림없는 명당이라고 생각하고 천도했을 가능성이 크다. 도시의 동서남북을 지키는 신사들과 귀문을 막는 사찰들이 배치된 구조를 알고 보면 교토라는 도시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영적 방어막’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헤이안쿄는 당나라의 장안長安(오늘날의 시안西安)을 본떠 남북 약 5.3킬로미터, 동서 약 4.5킬로미터 길이의 외성을 건축한 직사각형 도시였다. 북쪽에 황궁인 다이다이리大内裏, 혹은 헤이안궁이 있었고 황궁의 아래로는 주요 도로인 주작대로가 뻗어 있었다. 도시의 정남쪽 입구에는 '라쇼몽(나생문羅城門)’이라는 거대한 문이 있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의 소설과 구로사와 아키라黒澤明 감독의 영화로 유명한 그 ‘라쇼몽’이다. 헤이안쿄 말기, 도시가 황폐해지자 이 거대한 문에는 시신이 유기되고 귀신이 나온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화려했던 도시의 영광과 몰락을 동시에 상징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헤이안쿄 동쪽에 우쿄구右京区, 서쪽에는 사쿄구左京区가 위치한다. 경내는 동서남북으로 달리는 대로와 소로에 의해서 40장(약 120미터) 사방의 정町으로 구획되었다. 동서 방향으로 늘어선 정을 4열씩 모은 것(북변의 2열은 제외)을 조条, 남북 방향의 정을 4열씩 모은 것을 방坊이라고 부르며, 같은 조⋅방에 속하는 16개 마을에는 각각 번호가 매겨져 있었는데 이를 조방제條坊制라고 한다. 이에 따라 각 마을은 ‘우쿄오조삼방십사정(右京五条三坊十四町)’ 따위의 고유 주소를 갖게 되었다. 현재 교토 시내의 주소도 역시 조방제에게 기초하고 있다.
길 폭은 4장(약 12미터)에서 대로는 8장(약 24미터) 이상이었다. 주작대로는 28장(약 84미터)의 폭이었다. 사쿄와 우쿄에는 24개의 대로와 48개의 소로가 있다. 대로의 폭은 85미터 주작대로를 필두로 약 50미터, 36미터, 30미터, 24미터 등 다섯 개의 규격이 있지만, 소로의 폭은 약 12미터로 통일되어 있다. 동서와 남북으로 뻗은 이 길들에는 각각의 명칭이 있었다.
헤이안쿄로 천도한 지 100년쯤 지나자, 서쪽의 우쿄는 쇠퇴하고 황폐해졌다. 우코가 가쓰라가와강桂川 주변 습지대 위에 조성되어 자주 범람하고 온대성 말라리아가 발생한 탓에 사람들이 사쿄로 빠져나간 것이 주요 원인이었다. 반면 사람들이 몰려든 사쿄는 번창했다. 이치조一条 대로의 북쪽으로 구역을 넓혀 대로와 소로가 증설되었다.
이렇게 장안성長安城에 비교되던 우쿄구가 쇠퇴하고 낙양성洛陽城에 비교되던 사쿄구가 발전했기 때문에, ‘낙양(라쿠요洛陽)’이라는 호칭이 헤이안쿄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후 교토가 ‘경락京洛’이라 불리면서 교토에 들어가는 것을 ‘상락上洛’ 또는 ‘입락入洛’이라고 불렀다. 가마쿠라鎌倉 시대에 이르러 수도의 중심이 아예 사쿄(낙양성)로 옮겨지고 도시의 구조가 변화하면서 헤이안쿄라는 호칭은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도심 안에 사원 건립이 허가되었기 때문에 무로마치室町 시대에는 선종禪宗을 비롯해 니치렌종日蓮宗과 같은 신흥 종파의 절들도 건립되었다. 1336년에 시작된 무로마치 막부는 3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에 이르러 정권의 안정을 이루었다. 그러자 상공업자들이 마치町 소로(현재의 신마치도리新町通)에 점포를 차리기 시작했고, 15세기에 이르러 교토는 상업 도시의 일면도 갖게 되었다. 인구가 증가한 교토에서는 도시 재편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16세기에 니조二条 대로를 경계로 해서 북으로 ‘가미교上京’, 남으로 ‘시모교下京’라는 두 개의 커다란 공동체가 생겼다.
이대로 교토는 계속 발전해 나가는 듯했지만, 1467년에 유력 다이묘大名(봉건 영주)와 바쿠후 쇼군將軍 사이에 벌어진 정쟁을 계기로 ‘오닌應仁의 난’이 일어났다. 10년 이상 계속된 이 내란으로 귀족과 조정 관료, 무가의 집들이 몰려 있는 가미교는 폐허가 되었고 100정 3만여 호가 소실되는 피해를 보았다. 하지만 상공업자가 많은 시모교의 피해는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다.
기온 마쯔리의 기원은 86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교토에 무서운 전염병이 돌았는데, 사람들은 이것이 신의 노여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일본의 66개국을 상징하는 66개의 창(기호)을 세우고 기온 신사의 신을 모셔 와서 제사를 지냈다. 이것이 축제의 시작인 ‘기온 고료에祇園御霊会’이다. 즉, 이 축제는 즐기기 위한 행사가 아니라 도시의 생존을 건 거대한 방역 기도회였던 셈이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거대한 수레인 ‘야마보코山鉾’ 행진이다. 수레를 장식한 태피스트리 중에는 16세기 벨기에에서 제작된 서양 카펫도 있다. 당시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온 귀한 보물들을 아낌없이 쏟아부었기 때문에 야마보코 행진은 ‘움직이는 미술관’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 거대한 수레(높이 약 25미터, 무게 최대 12톤)는 오직 밧줄만 사용해서 고정했다. 못을 쓰지 않고 나무를 엮는 전통 방식을 고수하는데, 이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되어 있다.
행진의 가장 앞선 수레인 ‘나기나타보코長刀鉾’에는 화려하게 분장한 어린 소년인 ‘치고稚児’가 탄다. 치고로 선정된 소년은 축제 동안 신의 사자使者로 간주한다. 땅의 기운에 오염되지 않도록 발이 땅에 닿으면 안 되며, 식사도 남자가 만든 것만 먹는 등 엄격한 계율을 따른다. 행진 시작 전, 소년이 칼로 길에 쳐진 새끼줄(결계)을 단칼에 끊는데, 이는 인간 세상과 신의 세상 사이의 벽을 허물고 행진을 시작한다는 아주 강렬한 상징이다.
기온 마쯔리는 장마철인 7월 한 달 내내 열린다. 재미있는 점은 비가 와도 절대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레에 귀한 보물들이 달려 있어 비에 젖으면 큰일이지만, 사람들은 축제 날에 비가 오는 것은 부정한 것을 씻어 내기 위함이라고 믿으며 비닐을 씌워서라도 행진을 강행한다고 한다.
수레 행진이 끝나면 수 시간 내에 그 화려했던 야마보코를 빛의 속도로 해체해 버린다. 야마보코는 행진하면서 거리의 온갖 나쁜 기운(역병의 신)을 빨아들인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쁜 기운이 다시 퍼지기 전에 빨리 부수어 정화하는 의미가 있다.
행진 전날 밤(14~16일)에는 거리 곳곳에 수레를 세워 두고 전등을 밝힌다. 또한 이때만 먹을 수 있는 간식과 액운을 막아 주는 부적인 ‘치마키粽’를 파는데, 이 밤의 정취가 정말 아름답다.
일본 통일을 꿈꾸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혼노지本能寺에서 가신인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배신으로 쓰러진 후, 그를 모시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1590년에 통일의 대업을 완수했다. 그 뒤 도요토미는 황폐해진 교토를 대대적으로 부흥시켰다.
우선 옛 황궁의 자리에 자신이 머무는 정청 겸 저택인 주라쿠다이聚楽第를 건설했다. 그리고 조방제條坊制를 부활했다. 교토의 구획은 바둑판과 같은 정사각형의 이미지가 있었는데, 이때 구획을 나누면서 남북으로 길쭉한 직사각형 구획이 만들어졌다. 또 도심 주위에 외적 방어와 가모가와강의 치수를 목적으로 약 23킬로미터에 이르는 흙담(오도이御土居)을 쌓았다. 이 흙담을 경계로 도성의 안팎을 구별했다.
이후 정권을 장악한 에도 막부는 교토에 니조성을 쌓고 바쿠후의 직할지로 삼아 산업을 보호했다. 고급 비단인 니시진오리西陣織 산업을 극진히 보호한 것이 교토 진흥의 핵심이었다. 교토의 거상인 스미노쿠라 료이角倉了以는 교토와 후시미伏見를 연결하는 운하를 만들었는데, 이 덕분에 오사카부터 요도가와강淀川을 거쳐서 물자를 교토 시내로 실어 올 수 있게 되었다. 다양한 기반 시설 정비가 추진된 덕분에 교토는 인구가 35만 명까지 증가하여 에도, 오사카의 뒤를 잇는 도시로 발전했다. 히데요시가 교토를 다시 발전시킨 이후 에도 시대 후반에 신사나 절 등 옛 유적지를 찾아 걷는 여행이 유행하면서 많은 사람이 교토를 찾게 되었다.
막부 시대 말기의 교토는 바쿠후와 존황양이파 조슈 번長州藩의 여러 무사와 지사의 격전지가 되어 치안이 악화하였다. 1864년에는 바쿠후군과 조슈 번의 군이 교토 황궁 부근에서 충돌한 금문禁門의 변変이 발생하기도 했다. 1867년, 에도 막부 15대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가 정권을 천황에게 반환(대정봉환大政奉還)하고 에도 막부는 막을 내렸다. 하지만 그 이후 신정부군과 구막부군이 교토 교외에서 충돌하며 보신전쟁戊辰戰爭의 서막을 여는 도바鳥羽-후시미伏見 전투가 벌어졌다. 보신전쟁은 왕정복고로 수립된 메이지 정부와 옛 바쿠후 세력 간에 벌어진 내전이다. 보신전쟁에서 승리하고 에도성에 무혈입성한 메이지 정부의 수뇌부는 수도 이전 논의를 본격화했다.
결국 에도 막부 시대의 관청을 그대로 이용할 수 있다는 이점을 고려해서 에도(도쿄)를 수도로 선택했다. 1868년에 마침내 천황이 도쿄로 옮겨간 후, 교토는 1,000년 이상 이어 온 일본 수도의 기능을 상실했다. 이후 교토는 2차 세계대전에서 전화를 모면했고, 지금도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천 년의 수도로서 축적해 온 유산으로 전 세계의 관광객을 매료시키고 있다.
교토는 일본 고유 신앙인 신도神道의 심장부와 같은 곳으로 교토 사람들에게 신도는 종교라기보다 일상 속의 공기 같은 존재이다.
신도는 자연 만물에 신神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범신론적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1,000년 넘게 수도였던 교토는 전국 각지의 신神들이 모여드는 거대한 “신들의 집합소’가 되었다.
외국인들이 교토에 오면 “신사神社와 절의 차이가 뭐냐?”고 묻곤 한다. 왜냐하면 교토의 많은 사찰 마당 안에 작은 신사가 있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부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원래 살고 있던 토착신土着神들에게 ‘잠시 머물러도 되겠습니까?’라고 허락을 구하고 함께 지낸다.”라는 믿음 때문이다. 19세기 메이지 정부가 강제로 둘을 분리하기 전까지, 교토 사람들에게 부처님과 신령님은 한 지붕 아래 사는 이웃이었다.
교토 사람들은 신을 부를 때 친근하게 ”오카미상(신神님)“이라고 부르며 대화하듯 기도한다. 교토를 걷다 보면 집 대문 옆에 작은 제단이나 부적이 붙어 있는 것을 자주 보게 될 텐데, 그게 바로 1,000년 넘게 이어 온 교토식 ‘영적 보안 시스템’이다. ■
금각사金閣寺는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가 자신의 권력을 과시할 목적으로 지었다. 실제로 진짜 금박을 입히기도 했다. 1950년에 한 젊은 승려가 “아름다움에 질투를 느꼈다.”라는 이유로 불을 질러 전소되었으나, 이후 예전보다 더 화려하게 복원되었다.
은각사銀閣寺는 금각사를 보고 자극받은 손자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가 “나는 은으로 도배하겠다!”라며 지으려 했다. 하지만 전쟁 때문에 예산이 부족해 은박은 구경도 못 하고 나무 건물로 남게 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미완성’의 느낌이 일본 특유의 정적인 미학인 와비사비侘び寂び의 정점으로 꼽히게 되었다. 와비사비는 덜 완벽하고 단순하며 본질적인 것을 뜻하는 ‘와비’와 오래되고 낡은 것을 뜻하는 ‘사비’가 합해진 단어로 ‘부족하지만, 그 내면의 깊이가 충만함’을 의미한다. 일본의 문화적 전통 미의식, 미적 관념의 하나이다.
니조성二条城 복도를 걷다 보면 ‘삐걱삐걱’ 하는 새소리 같은 소리가 들린다. 이건 바닥이 낡아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 일부러 소리가 나도록 설계된 보안 시스템이다. 닌자나 암살자가 침입했을 때 발소리를 숨기지 못하도록 못과 철판이 마찰하게 만든 것이다. 당시 쇼군들은 이 소리 덕분에 밤에 발 뻗고 잘 수 있었다고 한다. 현대인들에게는 운치 있는 소리지만, 당시 권력자들에게는 생명줄이었던 셈이다.
[그림10] 게티_1137726088 / 캡션 - 기요미즈데라
기요미즈데라清水寺는 교토의 명소로 꼽히는 유명 사찰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도 등록되어 있다. 일본에는 ‘기요미즈의 무대에서 뛰어내릴 각오로’라는 속담이 있는데, 이는 아주 큰 결심을 할 때 쓰는 말이다. 에도 시대의 기록에 따르면, 여기 기요미즈데라에서 뛰어내려 살아남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미신 때문에 실제로 234명이나 뛰어내렸지만 놀랍게도 생존율은 약 85퍼센트였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절대 금지이며, 안전 펜스가 설치되어 있다. 한편 기요미즈데라의 본당 무대는 거대한 나무 기둥들을 짜 맞춘 것으로, 못을 단 하나도 사용하지 않은 채 절벽 위에 세워졌다는 점에서 문화적 경이로움이 있다.
일본의 경주, 교토

교토 역사의 핵심적인 흐름, 네 가지
헤이안平安 시대: 꽃피는 귀족 문화 (794~1185)

무로마치室町 시대: 화려함과 전쟁의 공존 (1336~1573)
이후 1331년 가마쿠라 바쿠후(막부幕府)에 맞서 일으킨 고다이고後醍醐 천황의 반란과 파벌 싸움으로 인해 1333년 가마쿠라 막부는 무너졌고, 1336년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가 고묘光明 천황를 옹립해 북조北朝를 수립한 뒤 교토를 세력 거점으로 삼아 무로마치室町 막부를 개창했다.
이러한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교토는 무사 정신과 예술이 결합한 독특한 문화를 꽃피웠다. 교토의 명물인 금각사金閣寺(킨카쿠지)와 은각사銀閣寺(긴카쿠지)가 이 무로막치 막부 시기에 세워졌다.
그런데 1467년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將軍 후계자 문제를 두고 교토 한복판에서 11년 동안 내전이 벌어진다. 바로 오닌応仁의 난이다. 이 전쟁으로 교토 시내의 절반 이상이 잿더미가 되었고, 우리가 지금 보는 교토의 사찰들은 대부분 그 이후에 재건된 것들이다. 이 내전은 일본 센코쿠(전국戦国) 시대의 시작을 알린 사건으로, 당시 조선은 세조世祖에서 성종成宗으로 이어지던 시기였다.
무로마치 막부는 1573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 의해 무너졌다. 그 뒤를 이어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거쳐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1603년 에도江戶 막부 시대를 열면서 일본은 근세로 이행하였다.
에도江戶 시대와 막부幕府: 변화의 소용돌이 (1603~1868)

에도 시대 말기, 천황을 지키려는 세력과 막부를 지키려는 세력이 교토 골목골목에서 칼부림을 벌였다. 애니메이션이나 드라마의 단골 소재인 ‘신센구미(신선조新選組)‘가 활약한 무대가 바로 이때의 교토이고, 메이지 유신의 주역인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가 암살된 곳도 이곳이다. 신센구미는 막부 휘하에서 활동한 치안 및 준군사조직 중 하나를 의미한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과 교류 과정을 겪고 #메이지 정부군이 1868년 에도성에 무혈 입성함으로써 에도 막부는 붕괴#하였고, 일본은 근대 시대로 이행하였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과 현대: 수도의 지위를 넘겨주다 (1868~현재)

교토는 “땅을 파기만 하면 유물이 나온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역사가 깊은 곳이다. 일본 왕에 대해 알고 싶다면 교토 어소京都御所 궁궐을, 바쿠후(막부) 시대를 알고 싶다면 니조성二条城 성곽을, 그리고 전쟁의 아픔을 느끼고 싶다면 산주산겐도三十三間堂 사찰을 찾으면 된다. 산주산겐도의 원래 이름은 연화왕원蓮華王院으로 기둥에 수많은 화살촉 흔적이 남아 있다.
교토를 이해하는 키워드 1 - 『겐지 이야기(源氏物語, 겐지 모노가타리)』

이 소설을 관통하는 핵심 정서는 모노노아와레物の哀れ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사물이나 풍경을 보며 느끼는 애잔하고 덧없는 정취’를 뜻하며, 수많은 여인과의 만남과 이별, 계절의 변화, 화려한 궁중 의례 등을 통해 결국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고 덧없다는 불교적 무상관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교토를 이해하는 키워드 2 - ‘사신상응四神相應’의 땅
3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교토 분지에 있는 교토의 옛 명칭은 ‘헤이안쿄平安京’다. 이 도시는 794년에 간무桓武 천황이 이곳으로 천도하면서 탄생했다. 헤이안쿄 이전에는 나라奈良의 헤이조쿄平城京가 수도였다. 헤이조쿄는 덴무天武 천황계의 혈족을 지지하는 귀족과 기존 불교 세력의 영향력이 강한 곳이었고 물 사정이 좋지 않은 곳이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덴무 천황과 대립하던 덴지天智 천황계의 혈족과 간무 천황은 784년에 교토 부근의 나카오카쿄長岡京로 천도했다.
그런데 천도의 책임자이자 신뢰하던 대신인 후지와라노 다네츠구藤原種継가 누군가의 화살에 맞아 암살당하자, 간무 천황은 친동생인 황태제 사와라早良 친왕親王을 의심하며 아와지淡路로 귀양을 보냈다. 유배지로 떠나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무죄를 호소하며 단식하던 사와라 친왕은 결국 죽음을 맞았다.
그 후 간무 천황의 생모와 황후 등이 잇따라 병사하고 홍수와 기근에 전염병까지 발생하자, 사람들은 사와라 친왕 원령의 저주 때문에 흉흉한 재해가 생기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간무 천황은 천도를 결심했고, 그때 선택한 곳이 교토 분지다. 간무 천황은 동생 사와라 친왕에게 스도 천황崇道天皇의 시호를 올려 추존하고 정중히 제사를 지내며 그 노여움을 달래고자 했다.
교토 지역이 선택된 이유는 당시 일본인들이 믿던 ‘사신상응四神相應’의 조건에 합치했기 때문이다. 이는 각 방위에 수호신을 두는 풍수지리에서 유래한 것으로, 북쪽에 바위(현무玄武), 동쪽에 강(청룡靑龍), 남쪽에 큰 연못(주작朱雀), 서쪽에 도로(백호白虎)가 있는 형세의 토지를 명당으로 간주한다. 교토 분지 일대에는 북쪽에 후나오카산船岡山, 동쪽에 가모가와강鴨川, 남쪽에 오구라 연못小倉池(현재는 매립됨), 서쪽에 산인도山陰道가 자리 잡고 있었기 이곳이 틀림없는 명당이라고 생각하고 천도했을 가능성이 크다. 도시의 동서남북을 지키는 신사들과 귀문을 막는 사찰들이 배치된 구조를 알고 보면 교토라는 도시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영적 방어막’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교토를 이해하는 키워드 3 - 당나라 ‘장안’을 모방한 계획도시 만들기
헤이안쿄는 당나라의 장안長安(오늘날의 시안西安)을 본떠 남북 약 5.3킬로미터, 동서 약 4.5킬로미터 길이의 외성을 건축한 직사각형 도시였다. 북쪽에 황궁인 다이다이리大内裏, 혹은 헤이안궁이 있었고 황궁의 아래로는 주요 도로인 주작대로가 뻗어 있었다. 도시의 정남쪽 입구에는 '라쇼몽(나생문羅城門)’이라는 거대한 문이 있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의 소설과 구로사와 아키라黒澤明 감독의 영화로 유명한 그 ‘라쇼몽’이다. 헤이안쿄 말기, 도시가 황폐해지자 이 거대한 문에는 시신이 유기되고 귀신이 나온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화려했던 도시의 영광과 몰락을 동시에 상징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헤이안쿄 동쪽에 우쿄구右京区, 서쪽에는 사쿄구左京区가 위치한다. 경내는 동서남북으로 달리는 대로와 소로에 의해서 40장(약 120미터) 사방의 정町으로 구획되었다. 동서 방향으로 늘어선 정을 4열씩 모은 것(북변의 2열은 제외)을 조条, 남북 방향의 정을 4열씩 모은 것을 방坊이라고 부르며, 같은 조⋅방에 속하는 16개 마을에는 각각 번호가 매겨져 있었는데 이를 조방제條坊制라고 한다. 이에 따라 각 마을은 ‘우쿄오조삼방십사정(右京五条三坊十四町)’ 따위의 고유 주소를 갖게 되었다. 현재 교토 시내의 주소도 역시 조방제에게 기초하고 있다.
길 폭은 4장(약 12미터)에서 대로는 8장(약 24미터) 이상이었다. 주작대로는 28장(약 84미터)의 폭이었다. 사쿄와 우쿄에는 24개의 대로와 48개의 소로가 있다. 대로의 폭은 85미터 주작대로를 필두로 약 50미터, 36미터, 30미터, 24미터 등 다섯 개의 규격이 있지만, 소로의 폭은 약 12미터로 통일되어 있다. 동서와 남북으로 뻗은 이 길들에는 각각의 명칭이 있었다.
교토가 경락京洛, 상락上洛이 된 이유
헤이안쿄로 천도한 지 100년쯤 지나자, 서쪽의 우쿄는 쇠퇴하고 황폐해졌다. 우코가 가쓰라가와강桂川 주변 습지대 위에 조성되어 자주 범람하고 온대성 말라리아가 발생한 탓에 사람들이 사쿄로 빠져나간 것이 주요 원인이었다. 반면 사람들이 몰려든 사쿄는 번창했다. 이치조一条 대로의 북쪽으로 구역을 넓혀 대로와 소로가 증설되었다.
이렇게 장안성長安城에 비교되던 우쿄구가 쇠퇴하고 낙양성洛陽城에 비교되던 사쿄구가 발전했기 때문에, ‘낙양(라쿠요洛陽)’이라는 호칭이 헤이안쿄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후 교토가 ‘경락京洛’이라 불리면서 교토에 들어가는 것을 ‘상락上洛’ 또는 ‘입락入洛’이라고 불렀다. 가마쿠라鎌倉 시대에 이르러 수도의 중심이 아예 사쿄(낙양성)로 옮겨지고 도시의 구조가 변화하면서 헤이안쿄라는 호칭은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도시 안 선종禪宗과 상업 발전
도심 안에 사원 건립이 허가되었기 때문에 무로마치室町 시대에는 선종禪宗을 비롯해 니치렌종日蓮宗과 같은 신흥 종파의 절들도 건립되었다. 1336년에 시작된 무로마치 막부는 3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에 이르러 정권의 안정을 이루었다. 그러자 상공업자들이 마치町 소로(현재의 신마치도리新町通)에 점포를 차리기 시작했고, 15세기에 이르러 교토는 상업 도시의 일면도 갖게 되었다. 인구가 증가한 교토에서는 도시 재편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16세기에 니조二条 대로를 경계로 해서 북으로 ‘가미교上京’, 남으로 ‘시모교下京’라는 두 개의 커다란 공동체가 생겼다.
이대로 교토는 계속 발전해 나가는 듯했지만, 1467년에 유력 다이묘大名(봉건 영주)와 바쿠후 쇼군將軍 사이에 벌어진 정쟁을 계기로 ‘오닌應仁의 난’이 일어났다. 10년 이상 계속된 이 내란으로 귀족과 조정 관료, 무가의 집들이 몰려 있는 가미교는 폐허가 되었고 100정 3만여 호가 소실되는 피해를 보았다. 하지만 상공업자가 많은 시모교의 피해는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다.
@교토를 이해하는 키워드 4 - 기온 마쯔리祇園祭

축제의 시작: “전염병아, 물러가라!”
기온 마쯔리의 기원은 86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교토에 무서운 전염병이 돌았는데, 사람들은 이것이 신의 노여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일본의 66개국을 상징하는 66개의 창(기호)을 세우고 기온 신사의 신을 모셔 와서 제사를 지냈다. 이것이 축제의 시작인 ‘기온 고료에祇園御霊会’이다. 즉, 이 축제는 즐기기 위한 행사가 아니라 도시의 생존을 건 거대한 방역 기도회였던 셈이다.
'움직이는 미술관', 야마보코山鉾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거대한 수레인 ‘야마보코山鉾’ 행진이다. 수레를 장식한 태피스트리 중에는 16세기 벨기에에서 제작된 서양 카펫도 있다. 당시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온 귀한 보물들을 아낌없이 쏟아부었기 때문에 야마보코 행진은 ‘움직이는 미술관’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 거대한 수레(높이 약 25미터, 무게 최대 12톤)는 오직 밧줄만 사용해서 고정했다. 못을 쓰지 않고 나무를 엮는 전통 방식을 고수하는데, 이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되어 있다.
"치고稚児(소년 신사, 작은 수호신)"가 된 소년의 신비로운 의식
행진의 가장 앞선 수레인 ‘나기나타보코長刀鉾’에는 화려하게 분장한 어린 소년인 ‘치고稚児’가 탄다. 치고로 선정된 소년은 축제 동안 신의 사자使者로 간주한다. 땅의 기운에 오염되지 않도록 발이 땅에 닿으면 안 되며, 식사도 남자가 만든 것만 먹는 등 엄격한 계율을 따른다. 행진 시작 전, 소년이 칼로 길에 쳐진 새끼줄(결계)을 단칼에 끊는데, 이는 인간 세상과 신의 세상 사이의 벽을 허물고 행진을 시작한다는 아주 강렬한 상징이다.
비가 와도 멈추지 않는 행렬
기온 마쯔리는 장마철인 7월 한 달 내내 열린다. 재미있는 점은 비가 와도 절대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레에 귀한 보물들이 달려 있어 비에 젖으면 큰일이지만, 사람들은 축제 날에 비가 오는 것은 부정한 것을 씻어 내기 위함이라고 믿으며 비닐을 씌워서라도 행진을 강행한다고 한다.
축제가 끝나면 빛의 속도로 해체
수레 행진이 끝나면 수 시간 내에 그 화려했던 야마보코를 빛의 속도로 해체해 버린다. 야마보코는 행진하면서 거리의 온갖 나쁜 기운(역병의 신)을 빨아들인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쁜 기운이 다시 퍼지기 전에 빨리 부수어 정화하는 의미가 있다.
행진 전날 밤(14~16일)에는 거리 곳곳에 수레를 세워 두고 전등을 밝힌다. 또한 이때만 먹을 수 있는 간식과 액운을 막아 주는 부적인 ‘치마키粽’를 파는데, 이 밤의 정취가 정말 아름답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도시 개조 계획
일본 통일을 꿈꾸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혼노지本能寺에서 가신인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배신으로 쓰러진 후, 그를 모시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1590년에 통일의 대업을 완수했다. 그 뒤 도요토미는 황폐해진 교토를 대대적으로 부흥시켰다.
우선 옛 황궁의 자리에 자신이 머무는 정청 겸 저택인 주라쿠다이聚楽第를 건설했다. 그리고 조방제條坊制를 부활했다. 교토의 구획은 바둑판과 같은 정사각형의 이미지가 있었는데, 이때 구획을 나누면서 남북으로 길쭉한 직사각형 구획이 만들어졌다. 또 도심 주위에 외적 방어와 가모가와강의 치수를 목적으로 약 23킬로미터에 이르는 흙담(오도이御土居)을 쌓았다. 이 흙담을 경계로 도성의 안팎을 구별했다.
이후 정권을 장악한 에도 막부는 교토에 니조성을 쌓고 바쿠후의 직할지로 삼아 산업을 보호했다. 고급 비단인 니시진오리西陣織 산업을 극진히 보호한 것이 교토 진흥의 핵심이었다. 교토의 거상인 스미노쿠라 료이角倉了以는 교토와 후시미伏見를 연결하는 운하를 만들었는데, 이 덕분에 오사카부터 요도가와강淀川을 거쳐서 물자를 교토 시내로 실어 올 수 있게 되었다. 다양한 기반 시설 정비가 추진된 덕분에 교토는 인구가 35만 명까지 증가하여 에도, 오사카의 뒤를 잇는 도시로 발전했다. 히데요시가 교토를 다시 발전시킨 이후 에도 시대 후반에 신사나 절 등 옛 유적지를 찾아 걷는 여행이 유행하면서 많은 사람이 교토를 찾게 되었다.
근대의 교토
막부 시대 말기의 교토는 바쿠후와 존황양이파 조슈 번長州藩의 여러 무사와 지사의 격전지가 되어 치안이 악화하였다. 1864년에는 바쿠후군과 조슈 번의 군이 교토 황궁 부근에서 충돌한 금문禁門의 변変이 발생하기도 했다. 1867년, 에도 막부 15대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가 정권을 천황에게 반환(대정봉환大政奉還)하고 에도 막부는 막을 내렸다. 하지만 그 이후 신정부군과 구막부군이 교토 교외에서 충돌하며 보신전쟁戊辰戰爭의 서막을 여는 도바鳥羽-후시미伏見 전투가 벌어졌다. 보신전쟁은 왕정복고로 수립된 메이지 정부와 옛 바쿠후 세력 간에 벌어진 내전이다. 보신전쟁에서 승리하고 에도성에 무혈입성한 메이지 정부의 수뇌부는 수도 이전 논의를 본격화했다.
결국 에도 막부 시대의 관청을 그대로 이용할 수 있다는 이점을 고려해서 에도(도쿄)를 수도로 선택했다. 1868년에 마침내 천황이 도쿄로 옮겨간 후, 교토는 1,000년 이상 이어 온 일본 수도의 기능을 상실했다. 이후 교토는 2차 세계대전에서 전화를 모면했고, 지금도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천 년의 수도로서 축적해 온 유산으로 전 세계의 관광객을 매료시키고 있다.
마지막 이야기 - 교토와 신도神道 문화
교토는 일본 고유 신앙인 신도神道의 심장부와 같은 곳으로 교토 사람들에게 신도는 종교라기보다 일상 속의 공기 같은 존재이다.
팔백만 신神의 거처: "모든 곳에 신이 있다."
신도는 자연 만물에 신神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범신론적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1,000년 넘게 수도였던 교토는 전국 각지의 신神들이 모여드는 거대한 “신들의 집합소’가 되었다.
신사와 절의 기묘한 동거 (신불습합神佛習合)
외국인들이 교토에 오면 “신사神社와 절의 차이가 뭐냐?”고 묻곤 한다. 왜냐하면 교토의 많은 사찰 마당 안에 작은 신사가 있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부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원래 살고 있던 토착신土着神들에게 ‘잠시 머물러도 되겠습니까?’라고 허락을 구하고 함께 지낸다.”라는 믿음 때문이다. 19세기 메이지 정부가 강제로 둘을 분리하기 전까지, 교토 사람들에게 부처님과 신령님은 한 지붕 아래 사는 이웃이었다.
일상 속의 신도: "오카미상"
교토 사람들은 신을 부를 때 친근하게 ”오카미상(신神님)“이라고 부르며 대화하듯 기도한다. 교토를 걷다 보면 집 대문 옆에 작은 제단이나 부적이 붙어 있는 것을 자주 보게 될 텐데, 그게 바로 1,000년 넘게 이어 온 교토식 ‘영적 보안 시스템’이다. ■
#교토를 여행하는 데 필요한 소소한 이야기#
금각사(킨카쿠지)와 은각사(긴카쿠지)의 '현실 타협'

금각사金閣寺는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가 자신의 권력을 과시할 목적으로 지었다. 실제로 진짜 금박을 입히기도 했다. 1950년에 한 젊은 승려가 “아름다움에 질투를 느꼈다.”라는 이유로 불을 질러 전소되었으나, 이후 예전보다 더 화려하게 복원되었다.
은각사銀閣寺는 금각사를 보고 자극받은 손자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가 “나는 은으로 도배하겠다!”라며 지으려 했다. 하지만 전쟁 때문에 예산이 부족해 은박은 구경도 못 하고 나무 건물로 남게 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미완성’의 느낌이 일본 특유의 정적인 미학인 와비사비侘び寂び의 정점으로 꼽히게 되었다. 와비사비는 덜 완벽하고 단순하며 본질적인 것을 뜻하는 ‘와비’와 오래되고 낡은 것을 뜻하는 ‘사비’가 합해진 단어로 ‘부족하지만, 그 내면의 깊이가 충만함’을 의미한다. 일본의 문화적 전통 미의식, 미적 관념의 하나이다.
니조성의 '꾀꼬리 마루'(나이팅게일 플로어)
니조성二条城 복도를 걷다 보면 ‘삐걱삐걱’ 하는 새소리 같은 소리가 들린다. 이건 바닥이 낡아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 일부러 소리가 나도록 설계된 보안 시스템이다. 닌자나 암살자가 침입했을 때 발소리를 숨기지 못하도록 못과 철판이 마찰하게 만든 것이다. 당시 쇼군들은 이 소리 덕분에 밤에 발 뻗고 잘 수 있었다고 한다. 현대인들에게는 운치 있는 소리지만, 당시 권력자들에게는 생명줄이었던 셈이다.
기요미즈데라(청수사)의 ’무모한 도전‘
[그림10] 게티_1137726088 / 캡션 - 기요미즈데라
기요미즈데라清水寺는 교토의 명소로 꼽히는 유명 사찰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도 등록되어 있다. 일본에는 ‘기요미즈의 무대에서 뛰어내릴 각오로’라는 속담이 있는데, 이는 아주 큰 결심을 할 때 쓰는 말이다. 에도 시대의 기록에 따르면, 여기 기요미즈데라에서 뛰어내려 살아남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미신 때문에 실제로 234명이나 뛰어내렸지만 놀랍게도 생존율은 약 85퍼센트였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절대 금지이며, 안전 펜스가 설치되어 있다. 한편 기요미즈데라의 본당 무대는 거대한 나무 기둥들을 짜 맞춘 것으로, 못을 단 하나도 사용하지 않은 채 절벽 위에 세워졌다는 점에서 문화적 경이로움이 있다.
〈참고문헌〉
* 『30개 도시로 읽는 세계사』, 조 지무쇼 저자(글)⋅최미숙 번역⋅진노 마사후미 감수, 2020, 다산북스
* 『30개 도시로 읽는 세계사』, 조 지무쇼 저자(글)⋅최미숙 번역⋅진노 마사후미 감수, 2020, 다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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