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심장, 강소국强小國의 표본 - 룩셈부르크 대공국
[세계지역문화탐방]
이해영 전임기자 / 서울관악도장
룩셈부르크Luxembourg는 룩셈부르크성에서 유래한 지명에서 비롯됐고, 정식 명칭은 룩셈부르크 대공국이다. 대공국은 공작公爵보다 한 단계 높은 위상을 지닌 대공大公이 다스리는 왕국급 독립국이다. 룩셈부르크Luxembourg라는 이름은 지그프리트 백작이 획득했던 성채의 이름인 루칠린부르후크Lucilinburhuc에서 유래했다. 이는 고대 독일어로 작은 성(Little Castle)이라는 뜻으로. 작은 성에서 시작된 나라가 오늘날 유럽의 중심이 된 셈이다.
국호에서 알 수 있듯이 대공이 존재하고 있다. 원래 이 땅을 다스리던 룩셈부르크 왕조는 한때 신성로마 제국의 제위帝位와 보헤미아 왕국을 차지했고, 헝가리 왕국과 크로아티아 왕국까지 차지했다. 지금은 가문이 사라지고 지명만 남았다.
한때 유럽의 많은 지역을 지배했던 가문은 자신들이 지배하던 시기나 권력에서 밀려나고도 후손들이 유럽 여러 지역으로 퍼져 나가 룩셈부르크 혹은 뤽상부르라는 이름을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 파리에도 뤽상부르 궁전이 있다.
룩셈부르크는 서유럽 내륙에 있는 소국으로, 벨기에⋅독일⋅프랑스에 둘러싸여 있다. 이 지리적 조건 때문에 역사적으로는 완충 지대이자 통로 역할을 해 왔고, 한편으로는 침략의 통로가 되기도 했다. 현재는 이를 역이용해 유럽연합(EU)의 주요 기관이 밀집한 행정 중심지로 거듭나, 전략적 입지가 강점이 된 나라이다.
자연환경을 살펴보면 아이슬렉Éislek 지역은 북부 아르덴고원의 일부로 울창한 숲과 구릉지가 펼쳐져 있으며, 남부의 구트란드Guttland 지역은 평탄하고 토양이 비옥하여 농업과 주거의 중심지가 된다. 면적은 2,586제곱킬로미터로 작지만, 국토가 밀도 높게 활용되고 교통망과 도시 기능이 촘촘하다.
룩셈부르크는 온화한 해양성 기후로 연평균 기온은 약 섭씨 9.7도, 연간 강수량은 828~878밀리미터이다. 여름은 쾌적하고, 겨울은 춥고 바람과 습도가 높다. 북부 산악 지역은 겨울에 더 춥고 눈이 많아서 계절별 기온 차와 강수량을 고려한 옷차림이 필요하다.
룩셈부르크의 역사는 고대 켈트족의 일파인 트레베리Treveri족이 거주하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으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로 활용되었다.
카롤루스Carolus 대제 사후 프랑크 왕국이 셋(서프랑크⋅중프랑크⋅동프랑크)으로 분할되었을 때, 잠시 로타리우스Lotharius 1세의 영지인 중프랑크에 속했다. 중프랑크의 영토 중 알프스 이북 지역은 로타리우스의 이름을 따서 로타링기아Lotharingia(로트링겐)으로 불린다. 로타리우스가 죽고 나서 로트링겐을 두고 서프랑크 왕국과 동프랑크 왕국의 분쟁이 벌어졌으나, 최종적으로 동프랑크 왕국을 계승한 독일 왕국에 병합되었다.
이후 브라반트 공국(브뤼셀 백국), 림뷔르흐 공국, 룩셈부르크 공국, 플란데런 백국 등이 있던 신성로마 제국에 속하게 되었다. 현대 룩셈부르크의 실질적인 시작은 서기 963년이다. 아르덴의 백작 지그프리트Siegfried가 자신의 일부 영지를 내주는 대신 코르네이뮌스터 수도원으로부터 알제트강 절벽 위에 자리한 작은 요새 부지를 받아낸다. 지그프리트는 이 자리에 성을 쌓았고, 그 성의 이름을 루칠린부르후크Lucilinburhuc로 하였다. 이 성을 중심으로 점차 도시가 형성되면서 ‘룩셈부르크’라는 지명이 자리를 잡았다.
이후 중세 시대에는 ‘북방의 지브롤터’라 불릴 만큼 강력한 요새 국가로 명성을 떨쳤다. 지그프리트 1세가 세운 룩셈부르크 가문은 결혼 동맹 덕분에 14세기 초 보헤미아 왕국을 획득,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로까지 선출되었다. 룩셈부르크 가문은 아예 본거지를 보헤미아의 프라하로 옮겼다. 룩셈부르크는 브라반트 공국, 림뷔르흐 공국 등과 합쳐졌다.
1437년 룩셈부르크 가문의 대가 끊겼고, 부르고뉴Bourgogne 공국이 새로 룩셈부르크를 지배했다. 이후 결혼 동맹을 통해 1477년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신성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Maximilian 1세가 부르고뉴 공국을 상속받아서 합스부르크 네덜란드를 형성하게 되었다. 막시밀리안 1세의 장손자 카를Karl 5세가 퇴위하고 합스부르크 가문이 둘로 나뉘었을 때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에 속해 있던 룩셈부르크는 스페인 압스부르고(합스부르크의 스페인식 발음) 왕조의 스페인령 네덜란드에 상속되었다.
17세기에 룩셈부르크는 프랑스 국왕 루이Louis 14세에 의해 잠시 프랑스에 병합되었다가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1714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넘어가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에 속했다.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난 후 대프랑스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1794년 프랑스 제1공화국이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점령했다. 1815년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열린 빈 회의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은 이탈리아반도 북부를 얻는 대가로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포기했다. 룩셈부르크는 대공국으로 승격되었고, 네덜란드 국왕이 룩셈부르크 대공을 겸했다. 또한 같은 해 세워진 독일 연방에 가입했다.
1839년 런던 회의로 서쪽 영토 절반을 벨기에에 할양했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이 일어나고 나서인 1867년 독일 연방을 탈퇴하고 영세 중립국의 지위를 받았다. 1890년 네덜란드에서 빌헬미나Wilhelmina 여왕이 즉위하면서 룩셈부르크는 직위 계승 방식인 살리카법Lex Salica(여성의 왕위 계승이나, 여계 왕손을 인정하지 않는 프랑크 왕국만의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방계인 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의 아돌프Adolphe 대공에게 상속되어 네덜란드의 지배에서 벗어나 분리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 제국군에게 점령되었다가 종전 후인 1919년에 마리아델라이드Marie-Adélaïde 여대공이 물러나고 동생 샤를로트Charlotte가 즉위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도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되었는데, 네덜란드나 벨기에와 달리 아예 독일 본토로 합병되고 젊은이들은 독일 국방군으로 징집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인 1945년 영세 중립을 포기하고 NATO에 가입하였다.
룩셈부르크는 입헌군주제이자 의원내각제를 취하고 있다. 국가 원수는 대공이지만, 실제 권력은 의회와 정부가 행사한다. 의회는 단원제(Deputies' Chamber) 하원으로 운영되며, 민주주의 지수가 매우 높은 국가 중 하나이다. 정부는 의회 다수파의 지지를 바탕으로 구성된다. 헌법과 제도 측면에서 전통적 군주제와 현대적 의회 민주주의가 결합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현 국가 원수는 2025년 앙리 대공(Grand Duke Henri)이 퇴임하고 즉위한 장남 기욤Guillaume 5세(1981년생) 대공이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대공’이 국가를 대표하는 대공국이다.
의회(D’Chamber)는 60석 단원제로 구성되어 있으며, 임기는 5년이다. 전국을 4개의 선거구로 나누고(중앙: 21석, 동부: 7석, 북부: 9석, 남부: 23석), 개방명부식 비례대표제를 채택하고 있다. 즉, 선거구에 선출한 후보자 수만큼 투표할 수 있으며 여기서 여러 정당으로 투표(분할 투표제)를 하거나 한 후보에게 2표까지 투표(누적투표제)한다.
2015년 10월 2일까지는 최상위 행정구역으로 구區가 있었다. 룩셈부르크의 규모 때문에 구, 주, 코뮌은 각각 우리나라의 시(도농복합시), 읍/면, 리에 대응한다. 각 지역의 대표 지방자치단체의 이름은 상위 지방자치단체의 이름과 같다. 그래서 룩셈부르크국(國)의 수도인 룩셈부르크시(市)의 주소가 룩셈부르크국(國) 룩셈부르크구(區) 룩셈부르크주(州) 룩셈부르크시(市)였던 적이 있었다.
주요 도시는 수도이자 최대 도시 룩셈부르크시로 행정⋅금융⋅EU 기관 기능이 집중되어 있다. 과거에는 3개의 구(District)가 있었으나 현재는 행정 효율화를 위해 12개의 칸톤Canton(주州)으로 나뉜다.
룩셈부르크시Luxembourg City : 수도이자 최대 도시. 금융 센터와 EU 주요 기관(유럽사법재판소 등)이 위치한 국제도시이다.
에슈쉬르알제트Esch-sur-Alzette : 제2의 도시. 과거 철강 산업의 중심지였으나 현재는 교육과 문화의 도시로 변모했다.
디페르당주Differdange : 산업적 배경을 가진 주요 도시 중 하나이다.
룩셈부르크는 매우 개방적인 인구 구조로 되어 있다. 전체 인구 구성은 전통적 룩셈부르크인 비중이 가장 크지만, 외국계 주민 비중도 매우 높다. 특히 포르투갈계 이민자가 전체 인구의 약 15퍼센트를 차지하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프랑스인, 이탈리아인, 벨기에인들이 뒤를 잇는다.
언어는 룩셈부르크어, 프랑스어, 독일어가 함께 쓰이는 삼중 언어 체계가 특징으로, 일상어, 행정, 입법, 사법에서 언어의 쓰임이 다층적으로 분화되어 있어 다언어 국가의 전형으로 자주 거론된다. 룩셈부르크 헌법 제29조에 근거하여 제정된 1984년 2월 언어규정법에 따르면 룩셈부르크어는 ‘국어⋅행정⋅사법 언어’이고, 그 외 프랑스어는 ‘입법⋅행정⋅사법 언어’, 독일어는 ‘행정⋅사법 언어’로 규정되어 있다. 교육을 통해 언어를 접하는 순서는 룩셈부르크어 → 독일어 → 프랑스어 순이다.
프랑스어는 사실상 공용어의 역할을 한다. 우선 입법 활동은 프랑스어만 사용한다. 정확히 말하면 법안 작성 등 글로 쓰는 건 프랑스어로, 토론 등 말로 하는 것은 룩셈부르크어로 한다(1980년대까지만 해도 프랑스어로 토론했다). 결과적으로 룩셈부르크 법률은 프랑스어로만 되어 있고 기타 공적 영역에서도 프랑스어 위주의 사용이 두드러진다. 룩셈부르크는 유엔, 유럽연합 등 국제 무대에서도 꾸준히 프랑스어를 사용한다.
룩셈부르크어는 1984년에서야 국어로 지정되었다. 개별 언어로서 정립된 지가 오래되지 않아서 어휘량이 부족하고, 철자법 체계도 통일되지 않은 상황이다. 그래서 토박이들 사이에서 비전문적이고 짧은 일상 대화 위주로만 사용되고 있다.
독일어는 행정 언어라기보다는 룩셈부르크어의 문어체라는 인식이 더 강하다. 룩셈부르크어가 독일어와 같은 뿌리를 두고 있어 친밀도가 높지만, 그렇다고 해서 독일어를 아주 반기지도 않는다. 그래서 프랑스어와 달리 독일어는 글을 쓰는 수단일 뿐, 말로써는 자주 사용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룩셈부르크 토박이들은 다국어 화자話者이며,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유창하게 한다.
영어는 제도적으로 지정된 언어는 아니지만 사실상 제2의 공용어 역할을 한다. 세계적인 회계법인이 많은 나라로서 영어를 구사하는 인력이 중요시되고 있기에 중⋅고등 교육 과정부터 영어를 가르친다. 룩셈부르크 시내에선 대부분의 공공 기관에서도 영어로 소통할 수 있고 생활하는 데 큰 문제가 없다.
룩셈부르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건국자 격인 지그프리트Siegfried이다. 그는 10세기 아르덴Ardennes 지방의 백작이었다. 정확한 출생 연도는 불분명하지만 대략 922년경 태어나 998년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신성로마 제국의 유력 귀족 가문 출신으로, 황제 오토Otto 1세와도 가까운 관계였고 여러 영지와 수도원의 보호자(advocatus) 역할을 맡고 있었다. 963년 4월 17일의 거래를 통해 룩셈부르크의 시작을 만들었다.
중세 때는 하인리히Heinrich 7세, 얀Jan(Johann), 카를Karl 4세 같은 룩셈부르크가家 인물들이 유럽 제국사에서 큰 역할을 했다. 이들은 신성로마 제국 황제와 보헤미아 왕 등을 지내며, 작은 영지 출신 가문이 유럽 권력의 중심으로 올라선 사례를 보여 준다. 이 밖에 현대에는 EU 창립 지도자, 현대 정치 지도자, 그리고 문화⋅과학 분야의 세계적 인물까지 다양한 시대에 걸쳐 국제적 영향력을 발휘한 인물들을 배출했다. 이들을 다음처럼 구분해 보았다.
샤를로트 여공(Grand Duchess Charlotte, 1896~1985) : 룩셈부르크 역사상 가장 사랑받는 인물 중 한 명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점령을 피해 망명정부를 이끌며, 라디오 방송을 통해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었던 독립과 저항의 상징으로 통하는 인물이다.
로베르 슈만Robert Schuman(1886~1963) : 프랑스 외무장관을 지낸 그는 사실 룩셈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룩셈부르크 사람들은 그를 자신들의 자랑스러운 아들로 여기며, 그의 평화 철학을 높이 평가한다. 유럽연합의 기초가 된 ‘슈만 선언(Schuman Declaration)’을 통해 ‘유럽의 아버지’, ‘유럽 통합의 설계자’로 불린다.
에드워드 스타이컨Edward Steichen(1879~1973) : 룩셈부르크 출신의 미국 사진작가이자 화가이다. 현대 사진 예술의 거장으로 불리며, 그가 기획한 세계적인 전시회 〈인간 가족(The Family of Man)〉은 현재 룩셈부르크 클레르보Clervaux성에 영구 전시되어 나라의 큰 문화 자산이 되고 있다.
종교 구성은 전통적으로 가톨릭이 우세하다. 이민자 유입과 세속화가 진행되면서 종교 지형은 더 복합적으로 변해 왔다. 그럼에도 역사적으로 가톨릭은 사회와 문화의 핵심 배경이었다. 전통적으로 로마 가톨릭 국가(약 70퍼센트 이상)이지만, 정교분리가 명확하며, 이슬람교, 개신교, 유대교 등 다양한 종교가 공존한다.
현재 룩셈부르크에는 1개의 교구가 있으며 국민의 95퍼센트인 약 35만 명이 가톨릭 신자(1982년 기준)이다. 노트르담 대성당(Cathedrale Notre-Dame)은 룩셈부르크의 주교좌 성당답게 룩셈부르크를 다스리는 대공 가문이나 주요 인사의 결혼식, 장례식 등 국가적인 행사가 개최된다. 그리고 대성당을 세울 당시 예수회에서 대성당 입구 왼쪽에 대학 역할을 하는 도서관을 만들었는데 이 역사적 건물은 현재도 성당 옆에 붙어서 국립중앙도서관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한마디로 룩셈부르크는 1인당 GDP가 세계 1위를 다투는 초부유국이다. 과거에는 철강 산업(ABED, 세계 철강업계 1위인 현 아르셀로미탈ArceloMittal의 모태)이 국가 경제를 지탱했다면, 현재는 금융 서비스업이 전체 경제의 30퍼센트 이상을 차지한다. 세계적인 펀드 허브이자 프라이빗 뱅킹private banking의 중심지이다. 최근에는 우주 광물 채굴(Space Mining) 산업에 적극 투자하며 미래 먹거리를 준비하고 있다. 이는 금융업에 대한 높은 의존도를 우주 산업을 통해 분산시켜 미래를 준비하려는 정부 차원에서의 체계적인 산업 육성이라고 할 수 있다.
독립 후 지정학적 이점을 기막히게 활용하여 금융업과 철강 산업을 필두로 전 세계에서 가장 1인당 소득이 높은 나라가 되었다. 룩셈부르크의 1인당 GDP는 2024년 IMF 통계 기준 131,384달러로 명실상부 세계 1위 수준이며, 심지어 경제 규모도 국가 규모에 비해 대단히 큰 편이다. 당장 인구는 70만 명도 되지 않는 소국이지만 GDP 순위는 71위일 정도로, 인구가 1억에 육박하는 콩고민주공화국에 비견되는 수준을 자랑한다. 1993년 이후로 1인당 GDP 순위에서 줄곧 1위를 차지해 오고 있다.
룩셈부르크는 ‘중립국’의 역사적 한계를 극복하고 적극적인 다자주의 외교를 펼쳤다. 베네룩스 3국(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를 일컫던 말), NATO, EU의 창설 회원이며, 소국임에도 불구하고 유럽 통합의 중재자 임무를 수행했다. 주변국들과는 문화적으로도 관련이 매우 깊어서 대체로 매우 협력적인 편이다.
룩셈부르크와 한국은 매우 특별하고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6.25 전쟁 당시 룩셈부르크는 당시 인구 20만 명의 작은 나라였음에도 불구하고, 참전국 중 인구 대비 가장 많은 병력을 보낸 국가 중 하나이다. 벨기에 대대에 소속되어 총 100명의 자원병을 파병했으며, 이는 참전국 중 유일하게 전투 병력을 보낸 소국으로 기록되어 있다.
경제 협력 부문에서 세계 최대 철강 회사인 아르셀로미탈이 한국 기업들과 긴밀히 협력하고 있으며, 금융 및 항공 물류(카고룩스) 분야에서도 활발히 교류 중이다. 1962년 정식 수교하였으며, 최근 2023년에는 서울에 룩셈부르크 대사관이 정식 개설되어 양국 관계가 더욱 공고해졌다.
룩셈부르크의 군대는 1881년 2월 16일에 창설되었다. 내륙국인 관계로 해군은 없으며,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지만 공군도 없다. 육군만 편제되어 있고, 규모는 900명 수준으로 유럽에서 가장 작은 군대다. 1967년부터 모병제를 시행 중이다. 그래서 군 자체로는 유의미한 전력은 아니지만, 룩셈부르크는 탄탄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베네룩스 3국 가운데 육군에 특화된 벨기에군과 해군에 특화된 네덜란드군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 결과 군대의 규모에 비해 국방비는 많은 편이다.
룩셈부르크 주민들의 성명은 프랑스식 이름 + 독일식 성 형태가 꽤 자주 보인다. 외국인이 많고, 국적만 해도 170개국이 넘는다. 다만 이 중 대부분은 포르투갈,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처럼 그리 멀지 않은 국가 출신들이다. 해외에서 많은 사람이 이민을 고려하나 3개 국어를 사용하기에 상당히 가기 힘든 국가다.
룩셈부르크는 공영 방송 영향력이 강한 유럽에서 유일하게 공영 방송이 없는 나라이다. 1955년 CLT(Compagnie Luxembourgeoise de Télédiffusion)라는 이름으로 창립된 첫 텔레비전 방송국도 민영이었다. CLT는 여러 인수 합병을 거쳐 현재는 유럽 최대의 방송국인 RTL이 되었다.
미디어 규제가 유럽에서 가장 느슨한 나라로, 규제를 피하려는 미디어 기업들을 유치해 왔다. 1980년대 이전 영국과 핀란드를 제외한 모든 유럽 국가는 민영 방송이 원천 금지되었는데, RTL은 가까이는 독일과 프랑스, 멀리는 영국까지 전파를 송출하며 규제를 피해 갔다. 특이한 타이틀로는 세계 최초로 아날로그 TV 방송을 종료하고 디지털 전환을 단행한 국가이다. 그다음은 네덜란드다.
룩셈부르크 음식은 프랑스⋅독일⋅벨기에의 영향을 받아 고기, 감자, 콩, 빵을 중심으로 한 푸짐하고 소박한 요리가 많다. 대표적으로 ‘유드 맛 가르데보넨Judd mat Gaardebounen(훈제 돼지고기와 콩 요리)’과 ‘부네슐루프Bouneschlupp(녹두 콩 수프)’가 국민 음식으로 꼽힌다.
룩셈부르크 대공국(Groussherzogtum Lëtzebuerg), 통칭 룩셈부르크Lëtzebuerg는 서유럽에 있는 입헌군주제 국가이다. 유럽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대공국大公國(Grand Duchy)이다.
대공국은 큰 나라로부터 ‘공公’의 칭호를 받은 군주가 다스리는 나라다. 이름에 걸맞게 나라의 크기가 아주 작다.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절대 작지 않은 나라이다. 성곽 도시에서 출발한 이 국가는 유럽 열강의 경쟁 속에서 영토를 잃고 지위를 바꾸면서도, 결국 대공국과 입헌군주국이라는 형태로 주권을 굳혀 왔다.
은행⋅보험업, 철강업을 기간산업으로 하는 서비스 산업국이자 공업국으로 실업률은 유럽연합 국가 중 최저이며, 1인당 국내총생산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유럽 금융과 국제 정치의 결절점으로 기능하며, 다언어⋅다문화 사회의 모델이다. 우리 대한민국과는 우호 관계를 바탕으로 외교와 경제의 실무 협력을 이어 가고 있다.
대공국은 큰 나라로부터 ‘공公’의 칭호를 받은 군주가 다스리는 나라다. 이름에 걸맞게 나라의 크기가 아주 작다.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절대 작지 않은 나라이다. 성곽 도시에서 출발한 이 국가는 유럽 열강의 경쟁 속에서 영토를 잃고 지위를 바꾸면서도, 결국 대공국과 입헌군주국이라는 형태로 주권을 굳혀 왔다.
은행⋅보험업, 철강업을 기간산업으로 하는 서비스 산업국이자 공업국으로 실업률은 유럽연합 국가 중 최저이며, 1인당 국내총생산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유럽 금융과 국제 정치의 결절점으로 기능하며, 다언어⋅다문화 사회의 모델이다. 우리 대한민국과는 우호 관계를 바탕으로 외교와 경제의 실무 협력을 이어 가고 있다.

한눈에 보는 룩셈부르크
국가 정보

국기國旗

여행 정보


국명
룩셈부르크성(작은 성)에서 시작한 나라
룩셈부르크Luxembourg는 룩셈부르크성에서 유래한 지명에서 비롯됐고, 정식 명칭은 룩셈부르크 대공국이다. 대공국은 공작公爵보다 한 단계 높은 위상을 지닌 대공大公이 다스리는 왕국급 독립국이다. 룩셈부르크Luxembourg라는 이름은 지그프리트 백작이 획득했던 성채의 이름인 루칠린부르후크Lucilinburhuc에서 유래했다. 이는 고대 독일어로 작은 성(Little Castle)이라는 뜻으로. 작은 성에서 시작된 나라가 오늘날 유럽의 중심이 된 셈이다.
국호에서 알 수 있듯이 대공이 존재하고 있다. 원래 이 땅을 다스리던 룩셈부르크 왕조는 한때 신성로마 제국의 제위帝位와 보헤미아 왕국을 차지했고, 헝가리 왕국과 크로아티아 왕국까지 차지했다. 지금은 가문이 사라지고 지명만 남았다.
한때 유럽의 많은 지역을 지배했던 가문은 자신들이 지배하던 시기나 권력에서 밀려나고도 후손들이 유럽 여러 지역으로 퍼져 나가 룩셈부르크 혹은 뤽상부르라는 이름을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 파리에도 뤽상부르 궁전이 있다.

지정학적 위치와 자연환경
침략의 통로에서 유럽의 중심지로
룩셈부르크는 서유럽 내륙에 있는 소국으로, 벨기에⋅독일⋅프랑스에 둘러싸여 있다. 이 지리적 조건 때문에 역사적으로는 완충 지대이자 통로 역할을 해 왔고, 한편으로는 침략의 통로가 되기도 했다. 현재는 이를 역이용해 유럽연합(EU)의 주요 기관이 밀집한 행정 중심지로 거듭나, 전략적 입지가 강점이 된 나라이다.
자연환경을 살펴보면 아이슬렉Éislek 지역은 북부 아르덴고원의 일부로 울창한 숲과 구릉지가 펼쳐져 있으며, 남부의 구트란드Guttland 지역은 평탄하고 토양이 비옥하여 농업과 주거의 중심지가 된다. 면적은 2,586제곱킬로미터로 작지만, 국토가 밀도 높게 활용되고 교통망과 도시 기능이 촘촘하다.
룩셈부르크는 온화한 해양성 기후로 연평균 기온은 약 섭씨 9.7도, 연간 강수량은 828~878밀리미터이다. 여름은 쾌적하고, 겨울은 춥고 바람과 습도가 높다. 북부 산악 지역은 겨울에 더 춥고 눈이 많아서 계절별 기온 차와 강수량을 고려한 옷차림이 필요하다.

역사 History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로 선출된 룩셈부르크 가문

고대
룩셈부르크의 역사는 고대 켈트족의 일파인 트레베리Treveri족이 거주하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으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로 활용되었다.
카롤루스Carolus 대제 사후 프랑크 왕국이 셋(서프랑크⋅중프랑크⋅동프랑크)으로 분할되었을 때, 잠시 로타리우스Lotharius 1세의 영지인 중프랑크에 속했다. 중프랑크의 영토 중 알프스 이북 지역은 로타리우스의 이름을 따서 로타링기아Lotharingia(로트링겐)으로 불린다. 로타리우스가 죽고 나서 로트링겐을 두고 서프랑크 왕국과 동프랑크 왕국의 분쟁이 벌어졌으나, 최종적으로 동프랑크 왕국을 계승한 독일 왕국에 병합되었다.

중세
이후 브라반트 공국(브뤼셀 백국), 림뷔르흐 공국, 룩셈부르크 공국, 플란데런 백국 등이 있던 신성로마 제국에 속하게 되었다. 현대 룩셈부르크의 실질적인 시작은 서기 963년이다. 아르덴의 백작 지그프리트Siegfried가 자신의 일부 영지를 내주는 대신 코르네이뮌스터 수도원으로부터 알제트강 절벽 위에 자리한 작은 요새 부지를 받아낸다. 지그프리트는 이 자리에 성을 쌓았고, 그 성의 이름을 루칠린부르후크Lucilinburhuc로 하였다. 이 성을 중심으로 점차 도시가 형성되면서 ‘룩셈부르크’라는 지명이 자리를 잡았다.
이후 중세 시대에는 ‘북방의 지브롤터’라 불릴 만큼 강력한 요새 국가로 명성을 떨쳤다. 지그프리트 1세가 세운 룩셈부르크 가문은 결혼 동맹 덕분에 14세기 초 보헤미아 왕국을 획득,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로까지 선출되었다. 룩셈부르크 가문은 아예 본거지를 보헤미아의 프라하로 옮겼다. 룩셈부르크는 브라반트 공국, 림뷔르흐 공국 등과 합쳐졌다.
1437년 룩셈부르크 가문의 대가 끊겼고, 부르고뉴Bourgogne 공국이 새로 룩셈부르크를 지배했다. 이후 결혼 동맹을 통해 1477년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신성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Maximilian 1세가 부르고뉴 공국을 상속받아서 합스부르크 네덜란드를 형성하게 되었다. 막시밀리안 1세의 장손자 카를Karl 5세가 퇴위하고 합스부르크 가문이 둘로 나뉘었을 때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에 속해 있던 룩셈부르크는 스페인 압스부르고(합스부르크의 스페인식 발음) 왕조의 스페인령 네덜란드에 상속되었다.
근대
17세기에 룩셈부르크는 프랑스 국왕 루이Louis 14세에 의해 잠시 프랑스에 병합되었다가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1714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넘어가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에 속했다.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난 후 대프랑스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1794년 프랑스 제1공화국이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점령했다. 1815년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열린 빈 회의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은 이탈리아반도 북부를 얻는 대가로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포기했다. 룩셈부르크는 대공국으로 승격되었고, 네덜란드 국왕이 룩셈부르크 대공을 겸했다. 또한 같은 해 세워진 독일 연방에 가입했다.
1839년 런던 회의로 서쪽 영토 절반을 벨기에에 할양했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이 일어나고 나서인 1867년 독일 연방을 탈퇴하고 영세 중립국의 지위를 받았다. 1890년 네덜란드에서 빌헬미나Wilhelmina 여왕이 즉위하면서 룩셈부르크는 직위 계승 방식인 살리카법Lex Salica(여성의 왕위 계승이나, 여계 왕손을 인정하지 않는 프랑크 왕국만의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방계인 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의 아돌프Adolphe 대공에게 상속되어 네덜란드의 지배에서 벗어나 분리되었다.

현대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 제국군에게 점령되었다가 종전 후인 1919년에 마리아델라이드Marie-Adélaïde 여대공이 물러나고 동생 샤를로트Charlotte가 즉위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도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되었는데, 네덜란드나 벨기에와 달리 아예 독일 본토로 합병되고 젊은이들은 독일 국방군으로 징집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인 1945년 영세 중립을 포기하고 NATO에 가입하였다.
정치 제도
의원내각제를 취하는 대공大公의 입헌군주제 나라
룩셈부르크는 입헌군주제이자 의원내각제를 취하고 있다. 국가 원수는 대공이지만, 실제 권력은 의회와 정부가 행사한다. 의회는 단원제(Deputies' Chamber) 하원으로 운영되며, 민주주의 지수가 매우 높은 국가 중 하나이다. 정부는 의회 다수파의 지지를 바탕으로 구성된다. 헌법과 제도 측면에서 전통적 군주제와 현대적 의회 민주주의가 결합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현 국가 원수는 2025년 앙리 대공(Grand Duke Henri)이 퇴임하고 즉위한 장남 기욤Guillaume 5세(1981년생) 대공이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대공’이 국가를 대표하는 대공국이다.

의회
의회(D’Chamber)는 60석 단원제로 구성되어 있으며, 임기는 5년이다. 전국을 4개의 선거구로 나누고(중앙: 21석, 동부: 7석, 북부: 9석, 남부: 23석), 개방명부식 비례대표제를 채택하고 있다. 즉, 선거구에 선출한 후보자 수만큼 투표할 수 있으며 여기서 여러 정당으로 투표(분할 투표제)를 하거나 한 후보에게 2표까지 투표(누적투표제)한다.

행정구역과 주요 도시
행정구역은 현재 12개 주와 100개 코뮌Commune
2015년 10월 2일까지는 최상위 행정구역으로 구區가 있었다. 룩셈부르크의 규모 때문에 구, 주, 코뮌은 각각 우리나라의 시(도농복합시), 읍/면, 리에 대응한다. 각 지역의 대표 지방자치단체의 이름은 상위 지방자치단체의 이름과 같다. 그래서 룩셈부르크국(國)의 수도인 룩셈부르크시(市)의 주소가 룩셈부르크국(國) 룩셈부르크구(區) 룩셈부르크주(州) 룩셈부르크시(市)였던 적이 있었다.
주요 도시는 수도이자 최대 도시 룩셈부르크시로 행정⋅금융⋅EU 기관 기능이 집중되어 있다. 과거에는 3개의 구(District)가 있었으나 현재는 행정 효율화를 위해 12개의 칸톤Canton(주州)으로 나뉜다.
룩셈부르크시Luxembourg City : 수도이자 최대 도시. 금융 센터와 EU 주요 기관(유럽사법재판소 등)이 위치한 국제도시이다.
에슈쉬르알제트Esch-sur-Alzette : 제2의 도시. 과거 철강 산업의 중심지였으나 현재는 교육과 문화의 도시로 변모했다.
디페르당주Differdange : 산업적 배경을 가진 주요 도시 중 하나이다.

민족 구성
포르투갈 이민자가 전체의 15퍼센트, 불어가 사실상 공용어
룩셈부르크는 매우 개방적인 인구 구조로 되어 있다. 전체 인구 구성은 전통적 룩셈부르크인 비중이 가장 크지만, 외국계 주민 비중도 매우 높다. 특히 포르투갈계 이민자가 전체 인구의 약 15퍼센트를 차지하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프랑스인, 이탈리아인, 벨기에인들이 뒤를 잇는다.
언어는 룩셈부르크어, 프랑스어, 독일어가 함께 쓰이는 삼중 언어 체계가 특징으로, 일상어, 행정, 입법, 사법에서 언어의 쓰임이 다층적으로 분화되어 있어 다언어 국가의 전형으로 자주 거론된다. 룩셈부르크 헌법 제29조에 근거하여 제정된 1984년 2월 언어규정법에 따르면 룩셈부르크어는 ‘국어⋅행정⋅사법 언어’이고, 그 외 프랑스어는 ‘입법⋅행정⋅사법 언어’, 독일어는 ‘행정⋅사법 언어’로 규정되어 있다. 교육을 통해 언어를 접하는 순서는 룩셈부르크어 → 독일어 → 프랑스어 순이다.
프랑스어는 사실상 공용어의 역할을 한다. 우선 입법 활동은 프랑스어만 사용한다. 정확히 말하면 법안 작성 등 글로 쓰는 건 프랑스어로, 토론 등 말로 하는 것은 룩셈부르크어로 한다(1980년대까지만 해도 프랑스어로 토론했다). 결과적으로 룩셈부르크 법률은 프랑스어로만 되어 있고 기타 공적 영역에서도 프랑스어 위주의 사용이 두드러진다. 룩셈부르크는 유엔, 유럽연합 등 국제 무대에서도 꾸준히 프랑스어를 사용한다.
룩셈부르크어는 1984년에서야 국어로 지정되었다. 개별 언어로서 정립된 지가 오래되지 않아서 어휘량이 부족하고, 철자법 체계도 통일되지 않은 상황이다. 그래서 토박이들 사이에서 비전문적이고 짧은 일상 대화 위주로만 사용되고 있다.
독일어는 행정 언어라기보다는 룩셈부르크어의 문어체라는 인식이 더 강하다. 룩셈부르크어가 독일어와 같은 뿌리를 두고 있어 친밀도가 높지만, 그렇다고 해서 독일어를 아주 반기지도 않는다. 그래서 프랑스어와 달리 독일어는 글을 쓰는 수단일 뿐, 말로써는 자주 사용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룩셈부르크 토박이들은 다국어 화자話者이며,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유창하게 한다.
영어는 제도적으로 지정된 언어는 아니지만 사실상 제2의 공용어 역할을 한다. 세계적인 회계법인이 많은 나라로서 영어를 구사하는 인력이 중요시되고 있기에 중⋅고등 교육 과정부터 영어를 가르친다. 룩셈부르크 시내에선 대부분의 공공 기관에서도 영어로 소통할 수 있고 생활하는 데 큰 문제가 없다.
주요 인물
국부國父는 지그프리트 백작
룩셈부르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건국자 격인 지그프리트Siegfried이다. 그는 10세기 아르덴Ardennes 지방의 백작이었다. 정확한 출생 연도는 불분명하지만 대략 922년경 태어나 998년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신성로마 제국의 유력 귀족 가문 출신으로, 황제 오토Otto 1세와도 가까운 관계였고 여러 영지와 수도원의 보호자(advocatus) 역할을 맡고 있었다. 963년 4월 17일의 거래를 통해 룩셈부르크의 시작을 만들었다.
중세 때는 하인리히Heinrich 7세, 얀Jan(Johann), 카를Karl 4세 같은 룩셈부르크가家 인물들이 유럽 제국사에서 큰 역할을 했다. 이들은 신성로마 제국 황제와 보헤미아 왕 등을 지내며, 작은 영지 출신 가문이 유럽 권력의 중심으로 올라선 사례를 보여 준다. 이 밖에 현대에는 EU 창립 지도자, 현대 정치 지도자, 그리고 문화⋅과학 분야의 세계적 인물까지 다양한 시대에 걸쳐 국제적 영향력을 발휘한 인물들을 배출했다. 이들을 다음처럼 구분해 보았다.

국가의 상징과 독립의 수호자
샤를로트 여공(Grand Duchess Charlotte, 1896~1985) : 룩셈부르크 역사상 가장 사랑받는 인물 중 한 명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점령을 피해 망명정부를 이끌며, 라디오 방송을 통해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었던 독립과 저항의 상징으로 통하는 인물이다.

유럽 통합의 아버지들
로베르 슈만Robert Schuman(1886~1963) : 프랑스 외무장관을 지낸 그는 사실 룩셈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룩셈부르크 사람들은 그를 자신들의 자랑스러운 아들로 여기며, 그의 평화 철학을 높이 평가한다. 유럽연합의 기초가 된 ‘슈만 선언(Schuman Declaration)’을 통해 ‘유럽의 아버지’, ‘유럽 통합의 설계자’로 불린다.

문화와 예술의 아이콘
에드워드 스타이컨Edward Steichen(1879~1973) : 룩셈부르크 출신의 미국 사진작가이자 화가이다. 현대 사진 예술의 거장으로 불리며, 그가 기획한 세계적인 전시회 〈인간 가족(The Family of Man)〉은 현재 룩셈부르크 클레르보Clervaux성에 영구 전시되어 나라의 큰 문화 자산이 되고 있다.


종교
국민의 95퍼센트가 가톨릭 신자
종교 구성은 전통적으로 가톨릭이 우세하다. 이민자 유입과 세속화가 진행되면서 종교 지형은 더 복합적으로 변해 왔다. 그럼에도 역사적으로 가톨릭은 사회와 문화의 핵심 배경이었다. 전통적으로 로마 가톨릭 국가(약 70퍼센트 이상)이지만, 정교분리가 명확하며, 이슬람교, 개신교, 유대교 등 다양한 종교가 공존한다.
현재 룩셈부르크에는 1개의 교구가 있으며 국민의 95퍼센트인 약 35만 명이 가톨릭 신자(1982년 기준)이다. 노트르담 대성당(Cathedrale Notre-Dame)은 룩셈부르크의 주교좌 성당답게 룩셈부르크를 다스리는 대공 가문이나 주요 인사의 결혼식, 장례식 등 국가적인 행사가 개최된다. 그리고 대성당을 세울 당시 예수회에서 대성당 입구 왼쪽에 대학 역할을 하는 도서관을 만들었는데 이 역사적 건물은 현재도 성당 옆에 붙어서 국립중앙도서관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경제
세계 최고 수준의 1인당 소득과 강한 금융 부문
한마디로 룩셈부르크는 1인당 GDP가 세계 1위를 다투는 초부유국이다. 과거에는 철강 산업(ABED, 세계 철강업계 1위인 현 아르셀로미탈ArceloMittal의 모태)이 국가 경제를 지탱했다면, 현재는 금융 서비스업이 전체 경제의 30퍼센트 이상을 차지한다. 세계적인 펀드 허브이자 프라이빗 뱅킹private banking의 중심지이다. 최근에는 우주 광물 채굴(Space Mining) 산업에 적극 투자하며 미래 먹거리를 준비하고 있다. 이는 금융업에 대한 높은 의존도를 우주 산업을 통해 분산시켜 미래를 준비하려는 정부 차원에서의 체계적인 산업 육성이라고 할 수 있다.
독립 후 지정학적 이점을 기막히게 활용하여 금융업과 철강 산업을 필두로 전 세계에서 가장 1인당 소득이 높은 나라가 되었다. 룩셈부르크의 1인당 GDP는 2024년 IMF 통계 기준 131,384달러로 명실상부 세계 1위 수준이며, 심지어 경제 규모도 국가 규모에 비해 대단히 큰 편이다. 당장 인구는 70만 명도 되지 않는 소국이지만 GDP 순위는 71위일 정도로, 인구가 1억에 육박하는 콩고민주공화국에 비견되는 수준을 자랑한다. 1993년 이후로 1인당 GDP 순위에서 줄곧 1위를 차지해 오고 있다.


외교
유럽 통합의 중재자
룩셈부르크는 ‘중립국’의 역사적 한계를 극복하고 적극적인 다자주의 외교를 펼쳤다. 베네룩스 3국(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를 일컫던 말), NATO, EU의 창설 회원이며, 소국임에도 불구하고 유럽 통합의 중재자 임무를 수행했다. 주변국들과는 문화적으로도 관련이 매우 깊어서 대체로 매우 협력적인 편이다.
대한민국과의 관계: 잊지 못할 혈맹
룩셈부르크와 한국은 매우 특별하고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6.25 전쟁 당시 룩셈부르크는 당시 인구 20만 명의 작은 나라였음에도 불구하고, 참전국 중 인구 대비 가장 많은 병력을 보낸 국가 중 하나이다. 벨기에 대대에 소속되어 총 100명의 자원병을 파병했으며, 이는 참전국 중 유일하게 전투 병력을 보낸 소국으로 기록되어 있다.
경제 협력 부문에서 세계 최대 철강 회사인 아르셀로미탈이 한국 기업들과 긴밀히 협력하고 있으며, 금융 및 항공 물류(카고룩스) 분야에서도 활발히 교류 중이다. 1962년 정식 수교하였으며, 최근 2023년에는 서울에 룩셈부르크 대사관이 정식 개설되어 양국 관계가 더욱 공고해졌다.
기타 주목할 점들
군사
룩셈부르크의 군대는 1881년 2월 16일에 창설되었다. 내륙국인 관계로 해군은 없으며,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지만 공군도 없다. 육군만 편제되어 있고, 규모는 900명 수준으로 유럽에서 가장 작은 군대다. 1967년부터 모병제를 시행 중이다. 그래서 군 자체로는 유의미한 전력은 아니지만, 룩셈부르크는 탄탄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베네룩스 3국 가운데 육군에 특화된 벨기에군과 해군에 특화된 네덜란드군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 결과 군대의 규모에 비해 국방비는 많은 편이다.
사회 특징
룩셈부르크 주민들의 성명은 프랑스식 이름 + 독일식 성 형태가 꽤 자주 보인다. 외국인이 많고, 국적만 해도 170개국이 넘는다. 다만 이 중 대부분은 포르투갈,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처럼 그리 멀지 않은 국가 출신들이다. 해외에서 많은 사람이 이민을 고려하나 3개 국어를 사용하기에 상당히 가기 힘든 국가다.
문화 특징
룩셈부르크는 공영 방송 영향력이 강한 유럽에서 유일하게 공영 방송이 없는 나라이다. 1955년 CLT(Compagnie Luxembourgeoise de Télédiffusion)라는 이름으로 창립된 첫 텔레비전 방송국도 민영이었다. CLT는 여러 인수 합병을 거쳐 현재는 유럽 최대의 방송국인 RTL이 되었다.
미디어 규제가 유럽에서 가장 느슨한 나라로, 규제를 피하려는 미디어 기업들을 유치해 왔다. 1980년대 이전 영국과 핀란드를 제외한 모든 유럽 국가는 민영 방송이 원천 금지되었는데, RTL은 가까이는 독일과 프랑스, 멀리는 영국까지 전파를 송출하며 규제를 피해 갔다. 특이한 타이틀로는 세계 최초로 아날로그 TV 방송을 종료하고 디지털 전환을 단행한 국가이다. 그다음은 네덜란드다.

주요 음식
룩셈부르크 음식은 프랑스⋅독일⋅벨기에의 영향을 받아 고기, 감자, 콩, 빵을 중심으로 한 푸짐하고 소박한 요리가 많다. 대표적으로 ‘유드 맛 가르데보넨Judd mat Gaardebounen(훈제 돼지고기와 콩 요리)’과 ‘부네슐루프Bouneschlupp(녹두 콩 수프)’가 국민 음식으로 꼽힌다.
●주요 전통 음식

●디저트와 음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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