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축복을 받은 도시, 바그다드Baghdad

[열두 도시로 살펴보는 세계사]
이해영 전임기자 / 서울관악도장


바그다드는 단순한 도시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중동의 중심부에 위치하면서 이슬람 문화와 역사가 깊게 자리 잡은 곳이다. 기원전 762년에 설립된 이후로, 아바스 왕조의 수도로 번성하며 학문과 예술 발전의 중심지가 되었다. 고대 문명과 현대가 공존하는 매력이 있는 곳으로. 한때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고 문화, 철학, 과학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던 곳이다. 최근에는 현대적인 모습도 갖추기 시작해서 새로운 매력을 더하고 있는 아라비안나이트의 도시가 바그다드다.

옛이야기와 문명의 요람



바그다드Baghdad는 이라크Iraq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로 중세 이슬람 제국의 수도 중 가장 유명한 도시다. 이라크의 옛 이름인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는 아시리아 문명의 발상지로 이집트, 그리스, 로마가 번성하기 이전 문명의 요람이었다. 메소포타미아는 세계 최초 문명권인 수메르Sumer와 기념비적인 건축과 미술품이 생겨난 곳으로 기독교 성서 속 아브라함의 출생지인 우르Ur도 이곳에 있다.

무에진muezzin(기도 시간을 알리는 사람)이 사원 탑에 올라 “알라후 아크바르Allāhu Akbar”(신은 위대하다)라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선뜻 떠오르는 바그다드는 모험과 사랑으로 가득 찬 이야기 ‘천일 야화千一夜話’의 도시다. 흔히 ‘아라비안나이트’로 알려진 이 이야기는 부와 권력과 미녀 그리고 마법이 있는 무궁무진한 상상력으로 다채롭게 짜인 양탄자와 같다. 그래서 바그다드는 꿈과 환상의 도시요 옛이야기의 본고장으로 세상 사람들의 영원한 동심 안에 자리를 잡고 있다.

평화의 도시, 바그다드



바그다드의 당대 명칭은 ‘마디나트 알 살람Madinat al-Salam’ 즉 ‘평화의 도시’였다. 하지만 이렇게 아름답게 만들어진 이름과 맞지 않게 과거엔 몽골Mongol 제국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으며, 현대에는 이라크 내전과 ISIL(Islamic State of Iraq and the Levant,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로 인해 정세가 혼란해지기도 하였다.

대부분 사막인 아랍 땅에서 티그리스Tigris강과 유프라테스Euphrates강을 잇는 운하로 둘러싸인 바그다드는 동서의 다양한 사람과 상품이 모이는 수상 도시로 발전했다. 아바스Abbās 왕조의 수도로 번성한 바그다드는 이후 몽골 제국을 비롯한 영국, 미국 등 강대국에 번갈아 침략당하기도 했지만, 현재 이라크의 수도이며 중동의 대표적인 대도시로 손꼽히고 있다.


신이 하사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중심지



티그리스강을 따라 펼쳐진 이라크 평원의 중앙에 있는 바그다드는 고대 바빌로니아Babylonia 왕국의 수도 바빌론Babylon에서 북쪽으로 약 9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이라크의 대부분 지역은 여름 기온이 섭씨 50도에 가까운 사막 기후지만, 바그다드를 포함한 티그리스강 유역은 비옥한 충적 평야로 문명 발전을 위한 조건이 형성되어 있었다.

티그리스강은 길이 약 1,850~1,900킬로미터에 달하는 서아시아의 대표적인 국제 하천으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원지 중 하나이다. 성서에서는 에덴동산 근처를 흐르는 강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튀르키예 타우루스Taurus산맥의 하자르호에서 시작해 시리아와 이라크를 거쳐 유프라테스강과 합류하여 샤트 알아랍Shatt-al-Arab강으로 흘러가고, 수메르Sumer, 아카드Akkad, 바빌로니아Babylonia, 아시리아Assyria 제국 등이 이 강 유역에서 성장하였다. 풍부한 물과 범람으로 인한 비옥한 토양 덕분에 밀, 보리, 대추야자 등 농업이 발달하였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유목이나 상업 활동에 종사한 아랍인이 기원전 8세기경부터 집락을 형성했고, 그 이후 바그다드는 3~7세기에 중동을 지배한 사산Sasan 왕조 페르시아Persia의 농산물 집적지가 되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중심부에 있는 도시지만, 중심지 역할은 고대 이래로 바빌론과 셀레우키아Seleukia, 크테시폰Ctesiphon이 수행해 왔다. 바빌론은 바빌로니아의 도읍으로 번창했고, 셀레우키아는 셀레우코스Seleukos 왕조의 대도시로 번성했고, 크테시폰은 아르사키드Arsacid 왕조 파르티아Parthia 제국과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로 번영했다.

기원전 14세기에는 카시트Kassite 왕조의 쿠리갈주Kurigalzu 1세가 바그다드 중심에서 서쪽으로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거대한 아칼쿠프Aqar Quf 지구라트를 비롯한 도시를 건설했으며 이 도시 유적의 위치는 현재 바그다드주에 속해 있다. 사산 제국 시기 크테시폰의 교외 마을로 형성된 바그다드는 페르시아어로 ‘신이 하사한, 건설한’의 뜻을 지녔고, 아람어(Aramaic)를 쓰는 아랍계 나바테아Nabatea인이 거주했다.


아바스 칼리파 왕조의 수도



610년, 아랍족 출신 무함마드Muhammad가 이슬람교를 창시하자 이슬람 교단 조직이 사산Sasan 왕조를 대신해서 아라비아 일대를 지배하게 되었다. 사산 왕조는 224년부터 651년까지 약 400년간 존속했던 이란 제국과 그 지배 왕조로 사산 왕조란 말은 제국의 황실인 사산 가문을 가리킨다.

이슬람교 창시자 무함마드의 후계자인 이슬람권 최고 종교 지도자 겸 군주인 ‘칼리파Khaliifa’는 합의로 선출했다. 5대 칼리파 무아위야Muawiyah 일족은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를 중심으로 우마이야Umayya 왕조(661~750)를 세웠다. 한편, 4대 칼리파인 알리Ali 일족을 지지하는 세력은 시아Shiah파라 불리며 다수파인 수니Sunni파와 대립하게 된다. 우마이야 왕조에서는 아랍계 민족이 권력을 독점했기 때문에 페르시아인을 비롯한 다른 민족의 반발이 거세졌다.

결국 750년에 우마이야 왕조는 아불 아바스Abu’l Abbās에 의해 무너지고 아바스Abbās 왕조(750~1258, 카이로 아바스 왕조는 1261~1517)가 탄생했다. 아바스 왕조의 이름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숙부 알 아바스(하심 가문)에서 유래하였다. 아바스 왕조는 애초 유프라테스강 유역에 있는 쿠파를 수도로 삼았다. 하지만 같은 땅을 거점으로 한 시아파 세력과 정쟁이 발생하자, 아바스 왕조 2대 칼리파인 알 만수르al-Manṣūr는 수도를 옮길 것을 결심했다. 만수르는 여러 후보지 중에서 티그리스강을 끼고 있는 바그다드를 수도로 선택하였다. 하천을 통한 물적 유통이 편리한 데다 군사 주둔지로서 안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수도의 건설은 762년에 시작됐는데, 이슬람권 각지에서 불러 모은 수천 명의 설계가, 공학자, 법률가, 측량가, 목수, 대장장이 등이 바그다드로 몰려들었다. 이 건설 작업에 모두 합쳐 약 10만 명의 노동력이 동원되었다. 알 만수르는 그들의 보수를 일시불로 지급하는 호탕함을 보여 주기도 했다.


원형 성곽의 도시



767년에 수도 건설이 마무리된 바그다드는 지름 약 2.35킬로미터에 달하는 삼중의 원형 성벽으로 에워싸였는데, 중심 벽의 높이가 약 34미터나 되었다. 성벽을 쌓은 재료는 한 변의 길이가 50센티미터인 진흙 벽돌이었다. 주로 햇볕에 말린 벽돌을 사용했는데, 아무래도 구워서 굳힌 소성燒成 벽돌보다 내구성이 낮은 탓인지 현재 성벽은 잔해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강둑과 주요 건물들에는 대리석도 쓰였다. 훗날 건설된 이슬람 국가의 도시들은 육각형 또는 팔각형 구조가 많았지만 바그다드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도시를 본떠 원형 성곽으로 만들어져 있다.


모스크 중앙 배치의 전통이 시작된 곳



아바스 왕조는 신도들 간의 평등을 주장한 이슬람교의 교의에 따라 등용에 차별을 두지는 않았다. 수도 바그다드를 건설할 때도 페르시아인 건축 기사를 참여시켜 왕궁의 중정 배치 등에 페르시아의 건축 양식이 반영되도록 했다. 지름 약 1.8킬로미터의 중앙 광장에는 궁전과 모스크를 건축했는데. 궁전은 천구를 본뜬 녹색 돔으로 덮여 있었다고 한다.

이후 이슬람 도시에서는 중앙에 모스크를 배치하고 그 주위에 시장이 펼쳐지도록 하는 구조가 일반적인 형식이 된다. 하지만 바그다드에서는 치안 유지를 고려해서 시장이나 서민의 주거지는 성벽 밖에 만들고, 성의 내부에는 왕족이나 고위 군인만 거주했다.

동서에서 유입된 문물 - 실크로드의 요충지



원형 성곽 도시는 피자를 나눠 자른 모양과 같이 중앙 광장에서부터 네 군데로 뻗은 큰길에 의해 4등분되었다. 네 개의 큰길 끝에 있는 성문에는 각기 다른 곳으로 향하는 길이 이어져 있었다. 동북쪽의 ‘호리산 문’은 페르시아나 중국 방향으로, 동남쪽의 ‘바스라 문’은 티그리스강을 거쳐서 인도양으로 뻗어 나가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서북쪽의 ‘시리아 문’은 지중해 연안의 그리스나 북아프리카로, 서남쪽의 ‘쿠파 문’은 아라비아반도에서 이슬람교의 성지인 메카로 이어졌다.

중세의 바그다드는 서양의 동로마 제국과 동양의 당唐나라를 연결하는 실크로드의 요충지였다. 이 도시는 이른바 세계의 십자로라 불리며 수많은 상인과 물자가 모여드는 곳으로 유명했다. 아바스 왕조는 상업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시장세를 징수하지 않았다.

아바스 왕조는 시가지의 바깥을 에워싸듯이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을 잇는 운하들을 만들어 선박을 이용한 물자 이송이나 농업용수로 활용했다. 무역은 크게 번창해서,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는 도자기•견직물•향료가, 인도에서는 철이, 중앙아시아에서는 유리•직물 등의 상품들이 유입되어 들어왔다. 이 외에도 동유럽에서 온 벌꿀•호박(보석)•모피•노예, 아프리카 대륙에서 온 상아 등 다양한 상품이 바그다드의 시장으로 흘러들었다. 이에 시장에서는 중앙아시아의 면직물업자나 북아프리카의 노예 상인과 같은 식으로 구분하여 직업과 출신지에 따른 구획을 설치하기도 했다.


중세 이슬람의 황금 시절



이 시대 이슬람의 아바스 왕조는 당시 지구상에서 가장 학문적으로 발달한 세계였다. 이 시기부터 페르시아인들이 이슬람 세계의 핵심 계층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아바스 왕조가 페르시아인들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그들의 입김이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 10세기부터 튀르크인들이 그 뒤를 따랐다. 9세기부터 이른바 이슬람 황금기라 불리는 문화적 번영기를 구가했으나 10세기부터는 시아파 제국들의 융성 및 지방 왕조들의 독립과 함께 쇠락했다.

만수르는 영토 내의 주요 도시를 파발 형식의 연락망으로 묶어, 각지의 사정을 칼리파에게 전하는 정보 전달망을 구축했다. 이에 따라 바그다드는 중동, 지중해 연안, 아시아 각국의 동향이나 풍속 및 전승 등 온갖 정보가 한데 모이는 장소가 되었다. 이것이 훗날 『천일 야화(아라비안나이트)』 속 다양한 이야기의 원형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구 100만의 세계 최대 도시



786년에는 아바스 왕조 5대 칼리파 하룬 알 라시드Harun al-Rashid가 즉위하여 왕조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아바스 왕조의 중심지 바그다드에는 아랍인을 비롯해 그리스도인, 유대인, 페르시아인, 북아프리카의 베르베르인 등 다양한 여러 인종과 민족이 드나드는 국제도시로 인구 120~200만 명에 달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도시라는 영예를 누렸다. 같은 시기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인구가 약 30만 명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바그다드는 당나라의 장안長安과 함께 당대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

이슬람교에서는 신체를 청결하게 유지하는 것을 의무화했는데, 목욕탕이 있는 주택이 많지 않아 대도시의 하맘Hamam(공중목욕탕)이 시민들의 사교장이 되었다. 로마 제국의 공중목욕탕과 마찬가지로 사우나와 같은 증기탕이 있었으며, 하룬의 시대에는 바그다드에만 무려 약 3만 개의 하맘이 있었다고 한다.

하룬은 문화와 예술의 진흥에도 힘썼다. 그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에서 천문학, 수학, 건축학, 철학, 의학 등 동로마 제국의 문헌을 수집해서 바그다드에 대규모의 도서관을 세웠다. 이 도서관은 하룬의 아들인 알 아민 시대에 확충되어 ‘지혜의 전당’이라 불렸고, 중동 각지의 학자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그 뒤를 이은 칼리파 알 마문은 지식 탐구에 관심이 많아 학자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한편 ‘지혜의 집’(Bayt-al-Hikma)을 세워 바그다드를 세계 최고의 경제, 학문의 중심으로 발돋움시키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 이 무렵 아바스 왕조의 학자들이 고대 그리스, 로마 제국의 고서들을 수집한 덕분에 유럽에서 자취를 감춘 헬레니즘 문명의 지식이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다. 11~13세기에는 이슬람권의 영토를 침공한 십자군을 통해 고대 그리스⋅로마의 학술이 서구 세계로 역수입되어 확산하였다.

오스만 제국에 의한 부활



바그다드는 원형 성벽으로 둘러싸여 인구가 증가해도 도시를 확장할 수 없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하룬의 사후, 813년에 이어진 내란으로 성벽이 파괴되고 도시의 중심은 티그리스강의 동쪽으로 옮겨졌다. 8대 칼리파 알 무타심 시대에는 튀르크인 용병의 수가 급증했고, 바그다드에서 북쪽으로 100킬로미터쯤 떨어진 사마라Samarra에 새로운 왕성을 건설했다.

10세기에 접어들자, 아바스 왕조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각지에서 유력자들이 잇따라 독립하고, 북아프리카에서는 카이로를 중심으로 한 파티마Fātima 왕조가 새롭게 자리 잡았다. 점점 쇠퇴하던 아바스 왕조는 1258년에 몽골 제국의 침략을 받았고, 이때 바그다드는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당시 지혜의 집, 니자미야, 무스탄스리야 등 유명한 학문의 금자탑이 잿더미로 변한 사실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소실 이상으로 인류의 손실이었다. 또한 이때 몽골군에 의해 운하 등 관개 시설들이 파괴되며 일대의 농업 생산량이 급감하게 되었고, 향후 도시의 인구 부양력 및 사막화 방지에 돌이킬 수 없는 악영향을 미쳤다.

이후 16세기에는 튀르크계 오스만Osman 왕조가 중동 이슬람 세계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어 바그다드를 재건했다. 17세기 중반 이래로 바그다드에서는 1733년 나디르 샤Nadir Shah의 침공으로 벌어진 바그다드 공성전 외에는 큰 전쟁이 없었지만, 이따금 콜레라 등 역병이 돌아 한번은 주민 중 3분의 2가 사망하는 등의 참극을 겪었다. 그럼에도 바그다드는 대부분의 시기에 서아시아 최대 도시였고, 오스만 총독이 상주했다.


과거의 활기를 되찾다



19세기 말, 중동에서 세력 확대를 도모하는 영국에 대항하여, 독일은 자국과 페르시아만을 연결할 수 있는 요충지로서 바그다드를 주목했다. 그리고 베를린, 비잔티움, 바그다드를 잇는 바그다드 철도 부설을 계획했다. 독일이 바그다드 철도를 건설하던 중인 1914년에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은 이라크를 침공하고 바그다드를 점령#했다.

1차 세계대전 종결 후 이라크의 아랍족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할 뜻을 굳히고 1921년에 바그다드를 수도로 하는 이라크 왕국을 건국했다. 하지만 영국을 추종하는 왕실에 대한 국민의 반발이 거세져 1958년에 혁명이 일어났고, 결국 왕정이 무너지고 이라크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현대의 바그다드



혁명을 전후해서 살펴보면, 1947년에 약 50만 명이었던 바그다드의 인구가 1965년에는 150만 명까지 크게 늘었다. 석유 산업의 발전으로 일자리가 늘어나자, 인근 농민이 대거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21세기에 접어든 이래 바그다드는 2003년의 이라크 전쟁, 테러 조직 ISIL과의 항쟁으로 피해를 보았고, 치안도 크게 악화하였다. 하지만 ISIL의 영향력이 약화한 이후에는 시민들이 밤거리를 자유로이 돌아다닐 정도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주의가 필요하다. 바그다드 국제 박람회장에 수만 명이 방문하는 등 활기를 되찾고 있다. 이 밖에 바그다드에서 가 볼 만한 유적지로는 바그다드 박물관, 알 무타나비 거리, 바빌론 유적지가 있다. 바그다드의 날씨는 여름엔 매우 덥고, 건조하며 겨울엔 적당히 온화하다. ■

꼭 알아야 할 상식


#또 다른 이야기, 바빌론 유수幽囚#

기원전 6세기 유대인들의 유다 왕국이 신바빌로니아(칼데아 제국)의 네부카드네자르Nebuchadnezzar 2세에게 멸망하고, 유대인들이 약 70년간 바그다드 남쪽에 위치한 바빌론에 억류되었던 사건이 발생한다. 이를 바빌론 유수幽囚라고 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유대인들은 나라를 잃고 적국의 수도로 끌려가 지옥 같은 노예 생활을 겪었으나, 민족 정체성을 지키려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페르시아(이란) 제국의 키루스Cyrus 2세가 그런 신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고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을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유대인의 구원자가 된 키루스 2세는 유대인을 풀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유대교 경전이나 제구들을 손대지 않고 고향인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돌아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으며 심지어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돕기까지 했다. 그러한 키루스 2세의 관대한 처우에 유대인들은 감격하여 그를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즉 메시아라고 칭송했을 정도였다.


#이슬람 수니파⋅시아파?#

이슬람의 수니Sunni파시아Shiah파는 같은 쿠란quṙān(코란)을 믿고 같은 신을 섬기지만, 무함마드의 정당한 후계자(계승자) 문제에서 의견 차이가 생겨 분열한 두 주요 분파이다. 이들 간 차이는 아들이 없던 무함마드의 계승자를 누구로 보느냐에 따라 발생한다. 수니파는 공동체의 합의로 후계자를 정하는 방식을,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혈통(알리와 그 후손) 중심의 계승을 강조한다. 수니파가 전 세계 무슬림의 8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시아파의 주요 국가는 이란, 이라크, 아제르바이잔 등이다.


〈참고문헌〉
* 『30개 도시로 읽는 세계사』, 조 지무쇼 저자(글)⋅최미숙 번역⋅진노 마사후미 감수, 2020, 다산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