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성 구씨綾城具氏와 창원 구씨昌原具氏

[한국의 성씨]

이명규(객원기자) / 서울목동도장

우리나라에서 갖출 구具 자를 쓰는 구씨具氏는 2015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능성 구씨綾城具氏 108,209명, 능주 구씨 62,574명, 릉성 구씨 1,460명, 창원 구씨昌原具氏 13,339명, 회산구씨 2,762명, 기타 구씨 4,736명 등 총 193,080명이다. 능성 구씨와 창원 구씨에 대해 알아보자.

능성 구씨綾城具氏의 연원


시조는 구존유具存裕
능성 구씨의 시조는 구존유具存裕, 고려 문괴文魁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검교상장군檢校上將軍에 올랐던 사람이다. <병인보丙寅譜> 세록 편을 보면, 송宋나라가 몽고(원元)에게 패망하자, 구존유는 고려 고종 11년 엽공제葉公濟·진조순陳祖舜 등 7학사와 함께 우리나라에 망명하여 전남 나주의 옛 이름인 금성錦城에 정착하였다. 그 뒤 원元이 이들 망명객을 추적하자, 그는 적덕積德으로 이름을 고쳐 능주綾州(능성綾城) 노정리老亭里에 숨어 살았다고 한다.

그의 배필은 능성 주씨綾城朱氏로, 장인은 주잠朱潜인데 송나라 사람으로 호는 청계淸溪이고 한림학사를 지냈다. 주청계朱淸溪의 딸이 구존유에게 출가하면서 능성 구씨 번영의 기틀을 세우게 된 것이다. 유명한 회암晦菴 주희朱熹(주자朱子)는 처고조가 된다.
능성 구씨의 시조인 구존유는 주잠의 딸과 결혼하고 생활 터전을 능성에 두게 되면서 관향을 능성으로 정하게 된 것으로 보이며, 이에 비추어 판단해 보면 능성 구씨는 13세기에 시작되었다 할 것이다.

능성 구씨는 토착 성씨
이와는 달리 구씨가 중국에서 건너온 성씨가 아니라 우리나라 토착 성씨라는 주장도 있다. 백제 멸망 시 나주에서 포로로 잡혔던 백제 장군 구도具道의 아들 단서端舒가 있고 궁예의 태봉국 시중으로 임명되었던 구진具鎭이라는 사람도 있었던 사실이 『고려사高麗史』에서 확인된다. 그리고 결정적인 부분은 중국 측 주朱씨의 기록에는 구존유가 고려인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 현재 중국에는 구씨具氏 성을 가진 씨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능성현綾城縣 토성土姓 조條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능성현綾城縣 성씨姓氏 조條에는 구씨가 능성현의 가장 대표적인 성씨로 되어 있다. 따라서 구존유 이전에도 구씨는 능성현의 토착 성씨로 살아왔다고 판단된다.

씨족사의 개요


능성 구씨綾城具氏가 세족世族으로 자리 잡기까지
능성 구씨가 세족世族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각 파조가 활동하던 고려 말 조선 초 이후다. 구성량具成亮, 구성노具成老 등이 이성계의 집권에 동조하여 고관에 오르고 조선 개국 후에까지 세력을 계속 확장함으로부터다. 그리고 구성노의 손자인 구치관具致寬이 세조 즉위 때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이 되고 성종 즉위 때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이 되어 능성부원군綾城府院君에 봉해지고, 후에 영의정에까지 오름으로써 능성 구씨는 확실히 세족으로 자리를 잡았다.

구민첨具民瞻은 시조 구존유의 아들로서 전주목사록全州牧司錄·참군參軍 겸兼 장서기掌書記였으며 동평장사同平章事의 관직에까지 올랐다. 3세조 구연具珚은 등과하여 안동면도감판관安東面都監判官을 지냈다 한다. 5세조 구영검具榮儉은 『고려사高麗史』 열전에 수록된 인물이다. 전리판관典理判官을 지냈고 공민왕조에 면성군沔城君에 봉해졌다. 7세조 구현좌具賢佐는 사재감판사司宰監判事를 역임했고 조선 개국 후 해미海美 국사산國師山에 들어가 벼슬하지 않았다. 구현노具賢老는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냈는데, 전서파典書派의 경우 <병인보丙寅譜>에는 11세 이후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구성노具成老는 고려 32대 우왕 14년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요동 정벌에 출전하였다가 위화도 회군에 참여하였다. 이성계파에 속하여 고려 말 동지밀직同知密直, 경상도도절제사慶尙道都節制使를 거치고 조선 개국 후 자헌대부資憲大夫로서 판안동대도호부사判安東大都護府事, 강원도도원수江原道都元帥에 이르렀다.

8세조 구인문은 세종 23년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집현전 교리를 지냈다. 세조 즉위 후 사육신이 화를 당한 것에 대해 직언을 했다가 외직에 나가게 되자 청맹靑盲을 자처하고 해미에 돌아가 두문불출했다. 정조 때 사육신이 복관復官될 때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충장忠莊의 시호가 내려졌다.

영의정을 지낸 구치관
9세조 충렬공忠烈公 구치관具致官은 구성노의 손자이며, 공주목사를 지낸 구양具揚의 아들이다. 조선 전기 능성 구씨에서 배출한 대표적인 인물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능성현綾城縣 인물 조에 기록되었다. 세종 16년 알성문과에 급제, 계유정란 이후 좌승지에 오르고, 세조 즉위 후 좌익공신 3등으로 능성부원군綾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우의정을 거쳐 세조 7년 영의정이 되었다. 건주위建州衛 여진女眞을 칠 때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으로 출전하였다. 예종 때 원상院相
으로 호조판서를 겸하고 성종 즉위 후 다시 이조판서를 겸임하였다. 성품이 엄정하였고 재산을 늘리지 않았으며 청백리에 책록되었다.
※ 원상院相은 조선 시대에 왕이 죽은 뒤 어린 왕의 즉위로 섭정이 이루어질 때, 임금을 보좌하여 정무를 맡아보던 임시 관직이다.


뛰어난 문장가였던 구봉령具鳳齡
13세조 문단공文端公 백담栢潭 구봉령具鳳齡은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 구홍具鴻의 6세손이다. 명종 15년 별시문과에 급제, 후에 다시 문신정시文臣庭試에서 장원을 했다. 이조참의, 대사간, 대사성, 부제학, 대사헌 및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했다. 당시 동서 당쟁이 시작되던 무렵이었으나 거기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시문에 뛰어났는데 ‘삼대인물양한문장三代人物兩漢文章’이란 찬사를 들었다.

인헌왕후를 배출한 능성 구씨 가문
능원위綾原尉 구사언具思諺은 중종의 부마이며, 명종 때 능원군綾原君으로 봉해졌다. 팔곡八谷 구사맹具思孟은 명종조에 등과하여 정언, 교리, 이조정랑을 거쳐 이조판서, 좌찬성,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청렴결백하고 시문에 뛰어났고, 능안부원군綾安府院君으로 추봉되었다. 딸이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定遠君에게 시집을 간 인헌왕후仁獻王后다.

인헌왕후(1578~1626)는 인조仁祖의 어머니로 1623년 인조반정으로 부부인府夫人에 진봉進封되었고, 궁호宮號를 계운궁啓運宮이라 하였다. 1632년 이조판서 이귀李貴의 주청으로 부군인 정원군이 원종으로 추존됨에 따라, 인헌왕후로 추봉되었다. 능은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장릉)에 있으며 병풍석이나 난간석은 설치하지 않고 보호석만 둘렀다. 묘 아래에는 영조 29년(1753)에 세운 ‘조선국원종대왕장릉朝鮮國元宗大王章陵 인헌왕후부좌仁獻王后府左’라고 새긴 비각이 있다.

능성 구씨들의 항일抗日 활약상
임진왜란 당시 창의기병唱義起兵하였던 20세조 구희具喜의 정신을 이어받은 능성 구씨들은 항일 독립운동에 커다란 활약을 하였다. 그중 구춘경具春慶은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살해되자 의병을 이끌고 일본군과 싸우다가 체포되어 사형되었다. 구춘선具春先은 1919년 동간도東間島 국민회를 창설하여 회장에 취임, 항일 투쟁을 하였다. 1920년에는 동만주東滿洲의 여러 단체가 합쳐져 간북총판부墾北總辦部가 결성되었을 떼 자신은 남부총판부의 총판이 되어 활약하였다.

구영필具榮必은 1910년 한일합방 후 만주로 망명하여, 1919년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재무위원에 피선, 1922년 영고탑寧古塔에서 한교회韓僑會·간민회墾民會 등을 설립하고 독립운동을 기도하다가 일본군에게 살해당했다. 구정서具禎書는 동대문교회 전도사로 있으면서 보안회·자강회에 가입, 기독교 운동을 통해 항일 운동을 전개했고, 1900년에는 국채보상운동을 벌였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항쟁하다가 1907년 체포되어 사형당했다. 구연영具然英은 1896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애국 운동을 시작했다.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고 구국회를 조직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일진회一進會 규탄에 전력을 다하다가 체포되어 사형당했다.

현대 주요인물
구자춘具滋春(1932 ~ 1996) - 대한민국 육군 군인, 경찰, 제16대 서울특별시장, 제38대 내무부 장관을 역임한 공무원이자 제13·14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가이다.

구본무具本茂(1945 ~ 2018) - LG그룹 회장을 지낸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다. LG화학 대표이사 회장, LG전자 대표이사 회장을 역임하며 23년 동안 LG그룹의 핵심 사업을 이끌었다.

구본길具本佶(1989~ ) - 대한민국의 펜싱 선수로 주 종목은 사브르이다. 2012년 하계 올림픽에서 단체전에 출전하여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대한민국 펜싱 역사상 처음으로 나온 단체전 금메달이었다.

창원 구씨昌原具氏


씨족의 연원
능성 구씨綾城具氏와 같은 갖출 구具 자를 성씨로 쓰는 창원 구씨昌原具氏가 있다. 그런데 창원 구씨는 처음에는 원수元帥 구仇 자를 성씨로 사용하였다. 시조는 구성길仇成吉, 자는 완지完之, 고려조 찬성사贊成事를 지냈다. 고려 혜종 2년, 서경의 대광大匡 왕식렴王式廉과 함께 입경하여 권신 왕규王規의 전횡專橫을 토벌하여 세운 공으로 의창군義昌君이란 호와 함께 서경에 봉해진 인물이다.

그런데 구성길仇成吉 이후의 구설仇雪 대까지의 세계가 확실치 않음이 <임오보壬午譜>와 <정사보丁巳譜>의 불일치로 드러났다. 그리고 이 기간이 혜종조에서 공민왕조까지 4백년이 넘는다. 그래서 부득이 <임오보>에 따라 구설仇雪로부터 계세計世키로 하여 원대손遠代孫이라 부르고 있다.

창원 구씨昌原具氏에 대한 역사 기록
1762년(영조 38)의 창원 구씨 초간세보初刊世譜인 <임오보壬午譜>에는 “구씨仇氏는 멀리 신라로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어진 재상이 이어졌다.”라고 되어 있는데, 신라 진흥왕 때의 구진仇珍 장군, 진평왕 때의 대사大舍인 구문仇文, 문무왕 때의 사찬 구진천仇珍川, 술간述干 구기仇杞, 구근仇近 등이 삼국을 통일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고 전한다. 《세종실록》에는 “의창義昌의 촌성村姓이 구仇”라는 구절이 있으며, 후대의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미 전국 각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으로 볼 때, 구仇 성은 창원에서 시작된 성씨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김해 금관국의 마지막 왕의 이름이 구해仇亥였던 사실, 함안을 중심으로 번성했던 안라국의 인물 중 구례사기모久禮斯己母, 구취유리久取柔利라는 이름이 있었다는 사실, 창원 지역의 옛 지명에 구사모라久斯牟羅, 구사군仇史郡이 있었다는 사실 등은 구仇라는 성씨가 창원 지방의 지명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에 힘을 실어 준다.

창원 구씨의 시조 구성길仇成吉
구성길仇成吉은 고려 혜종 때 찬성사를 지냈다. 혜종이 죽은 뒤 권신 왕규가 전권을 행사할 목적으로 충신 박술희朴述熙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정종은 서경의 수비대장인 왕식렴王式廉을 동원해 진압하였다. 이때 왕식렴을 따라 공을 세운 이가 구성길이었다. 그래서 의창군義昌君의 칭호를 받고 의창(현 창원)에 봉해졌다. 그 아들 구설仇喜도 찬성사를 지냈고 손자인 구경은 수안현감遂安縣監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세계는 뒤에 <임오보壬午譜>와 <정사보丁巳譜> 등에 상치되는 점이 있어 <갑자보甲子譜>에서는 시조를 5대 구설仇雪로 삼는다. 아무튼 찬성사 구성길은 창원昌原(의창義昌)에서 식읍하고 조선의 음덕으로 앞서 언급된 바처럼 그 자손의 벼슬과 덕행이 세대를 이었다고 한다.

창원 구씨의 중흥中興
2세손 구종길仇宗吉은 昌原 具氏의 중조中祖로 숭앙받은 인물이다. 조선 세종조 문과에 합격, 홍문관직제학을 하였는데, 천성이 정직, 엄격하고 재능도 뛰어나 세종의 은총을 입어 강론도 하였다. 그가 역학에 밝아 왕이 향주香酒와 주역周易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그의 큰아들 구복한仇復漢은 일찍이 무과에 출세하여 벼슬이 충청도사忠淸都事를 거쳐 강계부사 겸 전라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 둘째 아들 구동설仇東薛은 진사를 지냈고, 셋째 아들 구동직仇東直은 문종 때 승지를 지냈다. 그의 아들 삼 형제와 동생 구원길의 아들, 즉 구종길의 조카를 합하여 총 네 파조로 분파되었다.

구복한의 증손 구자평仇自平은 사헌부장령으로 있을 때 단종의 손위遜位를 당하여 벼슬을 버리고 귀향, 절개를 지키다 일생을 마친 분으로 뒤에 명신록名臣錄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의 사충 구응진 가문
창원 구씨가 자랑하는 인물 가운데서 빼놓을 수 없는 분이, 이른바 사충四忠으로 일컬어지는 구응진仇應辰·응성應星·응삼應參·동棟 등이다. 구응진仇應辰은 임진왜란을 맞아 분충창의奮忠倡義로 김해에서 전사했고, 아우인 응삼應參과 종재傱才 응성應星, 그리고 그의 아들 동棟은 구응진仇應辰을 도와 전공을 세워 사충四忠으로 불리게 되었다.

특별히 임진왜란과 연관하여 기록해야 될 것은 구정려仇廷呂에 관한 행적이다. 그는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으로 있으면서 전란의 와중에서 이 태조의 어진御眞과 전주 사고史庫에 보존되었던 왕조실록을 정읍현 내장산 용굴암에 보관, 이듬해 강화까지 무사히 옮기는 일을 수행하였다.

학문에 큰 족적을 남긴 분으로는 구상덕仇尙德이 있다. 그는 특히 ‘철수재문장鐵收齋文章’에 일가를 이루었고, 후학 양성에도 힘써 월봉서실月峰書室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저서로서 대표적인 것이 「승덕명록勝德明錄」이다.

창원 구씨 가문의 현대 주요 인물
구상찬具相燦(1957~ ) - 대한민국의 제18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이다. 2013년 주상하이 총영사로 부임했다.

구종태具鍾泰(1934~ ) - 대한민국의 제16대 국회의원이자 세무사이다. 본관은 창원이며, 경상남도 사천 출신이다.

구남수具南秀(1961~ ) - 대한민국의 제5대 부산가정법원장을 역임하였다.

창원 구씨昌原具氏는 구씨仇氏에서 구씨具氏로 사성된 뒤 뛰어난 인물이 적어 종문宗門을 이끌 인재가 없었던 탓인지 <정사보丁巳譜> 이래 127년 동안 수보修譜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 때문인지 후손 중에는 사성賜姓의 경위를 알지 못한 이들이 능성綾城(능주綾州)만 본관인 줄 알거나 혹은 일제의 호적령戶籍令 공포 때 관향이 와전된 대로 등재, 세습된 종문도 많다고 한다. 일부 창원 구씨 사람들이 능성 구씨, 회산 구씨로 본관을 바꾸어 이탈하는 등의 일도 일어났다.

이것을 바로잡기 위한 운동으로 1924년 <갑자보甲子譜>를 간행할 때 ‘일가찾기위원회’를 구성했다. 구영학 전 대종회 회장의 후원과 구수만 ‘일가찾기위원장’의 노력으로 이탈한 후손들의 많은 수가 환본還本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타본과 법정 문제까지 불거졌다. 창원 구씨 측에서는 구具씨는 본이 창원과 능성으로 두 개뿐이므로 능주(現 지명)는 근본이 창원의 이탈 문중으로 보고 있다. 참고로 중국에서 구仇를 최초로 이름으로 사용한 것은 춘추春秋 시대 때 진晉나라 9대 임금 목후穆侯가 아들(11대 문후)에게 이름을 구仇라 작명한 것에서 유래하였다.


[참고자료]
1)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2) 김태혁, 『한민족 성씨의 역사』, 보문서원, 2015

<참고사이트>
1) 한국인의 족보 (https://www.youtube.com/watch?v=QV4Xl8PoGtI)
2) 위키백과 능성구씨, 창원구씨 등
3) 성씨 정보(http://www.surname.info)
4) 뿌리를 찾아서 (http://www.rootsinfo.co.kr)
5) 김성회의 성씨 이야기
6) 통계청 홈페이지
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능성구씨, 창원구씨 등




경기도 광주시 실촌읍 열미리 마을
경기도 광주시 실촌읍 열미리悅美里 마을의 유래를 살펴보면 조선 시대에는 상열미동, 중열미동, 하열미동이 있었는데 1914년 일제 강점기에 행정 구역을 통폐합하면서 열미리로 하였다. 이 마을에는 조선 세조 대에 영의정을 지낸 구치관의 묘소가 있는데, 그 묘소의 형국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고 하여 연미혈燕尾穴이라 하고, 연미리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열미가 되었다고 한다. 하열미는 열미리에서 가장 큰 중심 마을이며, 영의정을 지낸 구치관의 후손들이 마을을 이루어 대대로 살아오고 있다. 양달말, 음달말, 아랫말로 이루어져 있는데, 아랫말을 ‘벌열미’라고도 부른다. 이 마을에는 500년이 넘은 보호수 느티나무가 있다. 실촌읍은 2011년 곤지암昆池岩읍으로 개칭되었다.

구씨仇氏가 구씨具氏로 바뀌게 된 배경
구씨仇氏가 구씨具氏로 개성改姓하게 된 것은 조선 정조 때다. 정조 15년 7월, 구시창仇始昌이 초관哨官의 후보자로 왕에게 천거되었다. 정조가 “구仇 성姓은 예부터 있었지만 구具 자字로 하느니만 못하니 구具 자로 고쳐서 올려라.”라고 하는 사성연교문賜姓筵敎文을 보냈는데, 더 확실한 문적門籍이 필요하다고 구문仇門에서 상서上書하자, 1798년 일성록日省錄 및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사성賜姓 사실을 기록하고 확증지었다. 이 교시에 따라 정조 22년 6월부터 모든 공사 문서에 구씨具氏로 실행을 보게 되었다.

정조의 사성 배경은 구仇 자의 의미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구仇는 원수元首 구仇 자로 국가 주권의 최고 대표자라는 의미가 있고 또 원수元帥의 의미도 있어 군대를 통솔하던 장수를 나타낸다. 이 밖에 짝구, 배필配匹의 의미로도 사용되어 왔다. 정조의 입장에서는 국가 원수의 의미가 담긴 구 자가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혹시 일어날지 모르는 반역反逆의 기운을 제어하기 위해 성을 바꿔준 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