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세계사 | 임시정부의 수호신, 독립운동의 거장!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

[역사인물탐구]
김종우 객원기자 / 서울동대문도장

충남 천안시 목천에 자리한 독립기념관 옆길을 지나 승용차로 5분 정도 나아가면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 선생의 생가와 석오이동녕기념관에 도착한다. 생가 뒤편에 나지막한 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마을 입구에는 조그마한 개울이 흘러 평화롭고 고즈넉한 시골 정취가 물씬 풍긴다. 개울을 연결하는 다리를 건너기 전 “민족의 혼이 깃든 애국지사 마을”이라고 적힌 표지석이 방문객을 맞이했다.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의 현실 앞에 평생을 일관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한 석오 이동녕 선생의 거룩한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 애국 충정의 정신을 가슴에 새겨보자.

임시정부의 정신적 지주 이동녕


이동녕李東寧은 1869년 9월 2일(양력 10월 6일)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동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황해도 연안이고 홍문관 교리와 경북 의성·영해 등지에서 군수를 지냈던 이병옥과 광주 안씨 사이에 2남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894년 풍산 김씨 김경선과 혼인하여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 자字는 봉소鳳所, 호는 석오石吾이다.

석오는 반제국주의와 자주독립이라는 거대한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국내와 중국 만주 지역·러시아 연해주 지역·중국 관내 지역 등 다양한 공간을 무대로 하여 독립협회·신민회·경학사·신흥무관학교·임시정부 등 여러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이러한 행적은 한국 독립운동사의 주요 역사적 흐름과 그 맥을 함께하고 있다. 따라서 석오에 대한 연구는 개인의 연구 차원을 넘어 한국 독립운동사의 연구를 확장·심화시키기 위해서도 반드시 천착해야 할 인물이다.

석오 이동녕에 대하여 탐구해 보는 것은 남북으로 갈라진 강토, 극단적 좌우 이념으로 분열된 정치 상황, 친일 식민사학이 버젓이 역사학계를 장악한 현실 등 대한민국의 난제를 풀어가는 데 한 줄기 빛이자 실마리일 수 있다. 한평생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석오 이동녕에 대해 제대로 아는 국민은 많지 않다. 그동안 독립운동사에 부각된 인물이 소수 몇 명에게만 집중 조명된 탓도 있으리라.

국난國難과 격동의 시대를 만나다


그의 나이 26세 때인 1894년 조선에서 동학혁명東學革命이 일어났다. 동학혁명은 근현대사의 새로운 출발점으로 자리한다. 동학혁명은 부정부패로 찌든 조선 왕조 체제하에서 억압받던 민중들의 항거였으며 인간 존엄에 대한 열망의 분출이었다. 또 한편 외세를 배격하고 자주독립 국가를 꿈꾸는 민중혁명이었다.

이 혁명의 불길은 조선 전역에 번졌으나 청·일 양국이 개입하여 청일전쟁淸日戰爭이 발발한다. 급기야 일본이 승리하고 조선 지배의 실권을 쥐게 된다. 조선의 백성 60만 명이 무참히 희생당하며 혁명은 실패로 끝난다.

청일전쟁의 전리품으로 만주의 지배권을 확보한 일본은 러시아의 남진 정책과 충돌, 1904년 러일전쟁露日戰爭이 터진다.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한 러시아는 슬라브족이 많이 살고 있는 유럽의 발칸반도로 발길을 돌렸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 속에 동학혁명이 동인動因, 원인遠因으로 작용한 것이다.

누란의 위기에 처한 조선 왕조를 바로 세워 보고자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활로를 찾던 고종高宗 황제의 꿈은 세계열강들의 침략 야욕에 무참히 꺾이고 결국 일본에 병탄竝呑되었다. 이때가 1910년이다. 동학혁명의 실패는 실패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항일 의병 운동으로, 3·1 만세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국권 회복을 위한 활동은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 전쟁과 민족의 역사와 혼을 불러일으키는 종교 부활 운동이라는 두 갈래 큰 줄기로 전개되었다. 나라를 팔아먹는 데 앞장선 이완용 등 을사오적乙巳五賊이 있었던 반면 조국 독립의 염원을 품고 독립운동에 나선 애국지사愛國志士도 수없이 많다.

한일병탄 후 9년 만인 1919년 3·1절 독립 만세 운동이 전국 규모로 일어났다. 그 여세를 몰아 대한민국 임시정부臨時政府가 수립되었다. 크게 노령, 상해, 한성의 임시정부이다. 통합된 상해임시정부가 들어서기까지 숱한 우여곡절이 있었다. 임시정부 출범에 산파역을 맡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신적 지주이자 임시정부의 안정적인 운영의 기초를 다지는 데 헌신적으로 노력한, 독립운동의 거장 석오 이동녕의 업적은 태산처럼 높고도 크다.

석오의 주요 업적


독립협회 참여
석오는 1890년대 후반 본격적으로 구국 운동에 뛰어들었다. 1896년 7월 독립협회獨立協會가 창립되었다. 한민족 최초의 근대적인 사회 정치 단체였던 독립협회는 한반도의 자주독립과 내정 개혁을 발표하였다. 석오는 독립협회의 회원으로서 의회 설립과 개혁적인 내각을 세우는 데 앞장섰다. 석오는 독립협회에 참여하여 한민족의 민주주의와 자주적인 근대화를 추구했고 민족 최초의 시민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윤치호와 이상재·이승만·안창호·이동휘·주시경 등 애국 계몽운동을 주도하고 깊이 참여했던 인사들과의 교류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후 전개되는 애국 계몽운동과 비밀 결사, 나아가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을사늑약 무효화 운동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세계열강들로부터 보호해 주겠다며 보호조약을 강제로 체결하려 하자, 이동녕은 상동교회에서 을사늑약乙巳勒約 반대 범국민 운동을 진두지휘하였으며 을사늑약을 무효로 돌리기 위해 도끼를 메고 격렬히 상소 운동을 전개하여 을사늑약의 무효화만이 탈취당한 우리의 외교권을 되찾아 원상 복귀를 시키는 유일의 방법임을 주장하였다.

이동녕은 을사늑약 체결 장소인 덕수궁의 대안문 앞에서 혈서로 ‘사수독립’이라는 글자를 써 대궐 문 앞에서 상소하였다. “이는 분명히 내정 간섭이요. 일본이 우리 국권을 강탈하여 우리 이천만 신민을 노예로 삼는 조약을 억지로 맺으니 최후의 일인까지 죽음을 초월하여 싸워야 합니다.”라는 격렬한 애국 연설을 하였다.

언론인 석오
석오 이동녕은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바로잡을 수 있는 방도에 대해 고민하던 중 <제국신문帝國新聞>을 창간한 이종일을 찾아가 그의 신문 사업에 가담, <제국신문>의 비상임 논객으로 사설을 집필하면서 체제의 개혁과 시국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모색하였다.

훗날 석오는 재러시아 한인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 줄 방법은 신문을 통한 계몽이라고 보았고, 이에 <해조신문海潮新聞>, <대동신문大東新聞>을 발행하였다. <해조신문>은 대한제국 말기에 러시아 지역에서 발행된 한글 신문으로 러시아 거주 한국인이 발행한 최초의 순 한글 신문이라는 의미가 있다.

서전서숙 설립
1906년 이후 석오는 국내에서의 민족 운동이 여의치 못하자 국외로 나아가 동포들에게 교육 구국의 의지와 신념을 심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그는 길림성 용정촌에 한국 최초의 해외 사립학교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건립하였다. ‘서전’이란 말은 용정 일대의 넓고 쓸모 있는 평야를 서전대야瑞甸大野라고 부른 데에서 유래한 말이다.

서전서숙은 교육 항쟁을 통해 독립 정신을 제2세 국민에게 불어넣어 주었다는 점에서 큰 성과를 거뒀다고 할 수 있다.

신민회 활동
신민회新民會는 항일 비밀 투쟁 단체로서 1907년 4월 하순경 이동녕의 주도로 안창호·양기탁·전덕기·이동휘·유동열·이갑 등 7명이 창설하였다. 이동녕은 신민회의 총무로서 사실상 실무 책임자였다. 이동녕은 신민회의 활동 방향을 국권 회복에 두고 군주제가 아닌 공화정제로의 대전환을 목표로 하였다.

신민회는 세 가지로 항일 투쟁의 방침을 확정하였다. 첫째는 민족 교육과 그 실천, 둘째는 민족 기업의 육성과 효과적인 활용, 셋째는 서적을 편찬하여 민족의식을 널리 선양하고 국민정신을 고친다는 미래지향적인 국민정신 교육이었다.

신흥무관학교 초대 교장
이동녕은 이회영 등과 함께 중국 동삼성 유하현 삼원보에 1910년 해외 민족 독립 투쟁의 가장 핵심적인 인재 배출 요람인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설립하여 초대 교장으로 활동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임시정부와 독립군 지원을 최대 과제로 삼고, 광복 투쟁 정신으로 무장된 항일 민족 투사로 단련하는 것을 전제로 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이렇게 광복 투쟁을 주도적으로 담당할 역군을 길러 낸 문무겸전 인재 육성의 요람이었으며 이는 곧 이동녕의 구국적 기상과 신념의 소신이었다.

대한독립선언서 선포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주장하는 국제 정세에 대처하기 위해 이동녕은 광복 투쟁의 동지인 김동삼, 조소앙 등과 함께 평화와 자유를 애호하는 전 세계 민족 앞에 호소할 독립선언서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나서 문안을 작성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3.1 혁명에 영향을 준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였다.(1918.12.)

이에 동참 서명한 독립지사는 이동녕과 대종교 제2대 교주인 김교헌을 필두로 하여 조소앙·신규식·박은식·안창호·김동삼·이시영·신채호·유동열·김좌진·김규식·이승만 등 39명이었다.

임시정부 수립의 주역
1919년부터 1940년까지 20여 년의 기간은 이동녕이 대한민국 임시정부臨時政府를 조직, 국내외를 효과적으로 다스리던 결산기였다. 석오는 군주제를 청산하고 민주 공화제를 처음 실시하여 의회민주정치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그 실천을 진두지휘했던 법통성의 첫 주자로서, 세 번의 의정원의장 등 입법부 수반을 역임하였다. 그 외에도 각부 총장(장관), 국무총리, 국무령, 대통령 대리, 4회의 주석 등 행정부 수반으로 임시정부를 후원하며 실질적으로 이끈 우익 단체의 지도자였다.

그는 김구 등과 함께 독립 투쟁을 벌임과 더불어 한국독립당 등을 운영 조직하면서 10여 곳의 임정 수도를 여건에 맞게 이동하였다. 또한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막후에서 결의한 뒤 김구로 하여금 계획 지도케 하였다. 이동녕은 임시정부의 내정, 교통, 군사, 외교, 교육, 문화, 사법, 재정 정책을 적당히 조절 집행하며 내외 동포에게 자신감과 용기, 신념을 불어넣어 주는 중심 역할을 하였다.

독립운동의 동력원 대종교에 귀의하다


명문 양반 가문 출신이지만 일찍이 평등 개념을 품고 있었던 이동녕은 민족운동의 산실 상동교회에서 기독교인 전덕기와 함께 민족의식과 평등평화사상을 확고히 하게 되었다.

이후 이동녕은 대종교大倧敎가 곧 민족 정통 사상이자 핵심 맥이라고 판단하였다. 원래 기독교 신자였던 그가 대종교에 귀의하게 된 배경은 대종교가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시키는 데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20세기 초 한민족 자생 종교로 홍암 나철이 중광한 대종교가 민족의 문제를 해결하고 그것을 신앙적 차원에서 이끌고 갈 사명 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하였다. 단군의 홍익인간 이념을 민족의 정통 사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석오는 대종교를 통해 2천만 동포에게 민족의 자긍심을 심어 주기 위해 모든 힘을 다 쏟았다.

석오의 최후


이동녕은 1939년 임정의 네 번째 주석(1939 ~ 1940)이 됨으로써 김구와 합심하여 전시 내각을 구성, 서안西安에 대한군사단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후 반평생을 해외에서 임시정부를 이끌며 조국 광복의 일념으로 투쟁하던 그는 1940년 3월 13일 72세 때 중국 쓰촨성四川省 기강綦江에서 과로로 영면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국장國葬으로 장례를 치렀으며, 광복 후인 1948년 9월 22일 김구의 주선으로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여 사회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여기서 하나 비판하고 싶은 것은 독립운동가의 서훈 등급이다.

대한민국 전체 독립유공자는 현재(2022년 12월)까지 17,664명이다. 그중 최고 등급인 ‘대한민국장’을 받은 분은 33명이고 2등급인 ‘대통령장’을 받은 분은 90명이다. ‘손문孫文, 장개석蔣介石, 송미령宋美齡, 진기미陳其美, 진과부陳果夫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최고 등급인 ‘대한민국장’을 받은 33명 중 5명의 외국인 명단이다. 모두 중국인이다.

정부가 1962년 2월 독립유공자의 명단 208명을 발표하던 당시, 김구·안창호·안중근 등 18명이 1등급, 이동녕·신채호·신돌석·이위종·이상설 등 58명이 2등급, 유관순·김도현·김마리아·장지연·이회영 등 132명이 3등급을 받았다.

임시정부의 상징 인물 이동녕 선생의 포상이 어찌 외국인보다 뒤처진 2등급이고 이회영 선생이 3등급이 될 수 있는가. 누가 봐도 아쉬운 대목이다. 이동녕 선생 서훈 1등급 상향을 촉구하는 시민운동에 필자도 뜻을 같이한다.

1962년에 시작한 독립운동가 포상에 대하여 재평가 작업을 벌여야 한다는 여론이 상당하다. “동일한 공적에 대해서는 훈장 또는 포장을 거듭 수여하지 않는다.”는 ‘상훈법’ 제4조가 걸림돌이라고 하는데, 국회에서 하루빨리 걸림돌을 제거하는 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나라가 광복된 지 거의 80년이 되어 가고 있다. 이 시대에 사는 우리는 나라의 독립과 민족정신의 고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독립운동가들의 삶과 정신을 보다 진중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분들의 헌신과 은덕으로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후대의 국민으로서, 이제 우리에게는 독립유공자에 대해 제대로 된 정당한 평가와 예우를 해 드릴 책무가 있다.

글을 마치며


이동녕 선생의 호號 석오石吾를 풀이해 보면, 돌 석石 자, 나 오吾 자이다. 돌이 상징하는 바는 ‘불변’이고, 대표적인 쓰임새는 ‘주춧돌’이다. ‘석오’라는 호가 의미하듯 이동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석을 놓았다. 분열과 주장이 강했던 임시정부 구성원들 간의 의견 차를 줄이고 통합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인격적으로 원만한 성품을 소유한 덕인이었다는 점과 한국 독립운동사의 전 기간에 걸쳐 변치 않는 일심으로 독립운동의 중심에 있으면서 주요 독립운동가들과 교유交遊한 인물이었기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1948년 8월 15일 정식으로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임시정부의 국호, 연호, 헌법을 계승하여 재건하였다. 따라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의 뿌리이자 기원이다.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은 외형적으로 임시정부를 계승했지만 그 내용에서는 아직 조선총독부 역사관의 지배하에 있다. 1945년에 나라는 광복되었지만, 우리의 역사관은 일제의 식민사관을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다. 역사는 나라를 지탱하는 혼이자 원동력이다. 대한민국은 독립운동가들의 역사관에 바탕한 나라를 새로 건설해야 한다.

동학혁명이 미완의 혁명으로 끝났지만 현재 진행형이듯 대한의 역사 독립운동 역시 여전히 진행형이다. 독립운동가들의 치열했던 삶을 오늘에 되살려 역사 광복을 향한 진군의 발걸음을 힘차게 내딛을 때다.

<참고자료>
1) 오대록, 『이동녕』, 역사공간(2016)
2) 이덕일, 『한국 독립전쟁사의 재조명』, 만권당(2019)
3) 김병기, 『대한민국임시정부사』, 이학사(2019)
4) 문영숙·김월배, 『임시정부 100년』, 서울셀렉션(2019)

< 인터넷 자료 >
1) 석오이동녕기념관 홈페이지(https://www.cheonan.go.kr/leedn.do)
2) 이기환의 Hi-story(50):독립운동가의 서훈 등급, 재평가 필요하다(2022.09.26. 주간경향 1495호)
3) 사단법인 독립유공자유족회(www.815family.or.kr)



석오 이동녕 선생 추모의 글
“최후의 1인까지 존경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바로 석오이다. 이동녕이 나를 밀어주었고 공적을 뒤로하고 인화 단결에 앞장선 큰 인물이다. 이利를 보면 겸양을 생각하고 의義를 보면 위험을 무릅쓴다.

또한 선생은 재덕才德이 출중하나, 일생을 자기만 못한 동지를 도와 선두에 내세우고 스스로는 남의 부족을 보충하고 고쳐 인도했으니 그것이 일생의 미덕이었다.” - 김구, 『백범일지』

“지난 일이지만 임시정부에서 총수로 모실 분은 오직 석오 선생뿐이었다. 석오와 백범의 관계를 말한다면 선생은 늘 백범을 아껴 주었으며 자신이 놓은 자리는 꼭 김구에게 넘겨주는 일을 잊지 않았다.

김구는 늘 석오를 따랐고 큰일이나 작은 일이나 모두 석오와 의논하며 스승처럼 혹은 부모와 같이 또는 형님처럼 섬겼다. 선생은 인자하고 다정다감하여 사람을 잘 다루었으며 다른 사람에게도 꼭 공경할 만큼 의리가 있었다. 좋은 일이라면 늘 앞장서 하되 그 공과 명예는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돌리니 과연 영수다운 자격이 있었다.” - 임정 말기 국무위원 조경한

“나는 상해에서 석오 선생을 모시고 돌아가실 때까지 지켜본 사람이다. 선생은 임정에서 공직을 일곱 번이나 맡았으나 이는 누구도 못 했던 일이다.

한 가지 잊을 수 없는 것은 한민족의 대동단결을 위해서는 자신의 명예나 지위 따위에는 조금도 구애받지 않았던 점이다. 선생은 그만큼 정결하고 겸양하며 모두가 우러러볼 만큼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 임정의 비서장 조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