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역사를 창업하는 진리 도꾼(道軍)

[종도사님 말씀]
도기 135년 4월 3일 증산도대학교

성공학의 요체는 말씀을 얼마나 제대로 봉명하느냐에 달려 있다.
지도자의 말씀 속에 들어 있는 뜻을 정확히 받들 수 있는가,
정말로 큰 기운을 받을 수 있는, 제대로 된 '번역'에 가까운
봉명(奉命)을 할 수 있는가, 바로 거기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있다.
그건 오직 쓰는 사람만이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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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은 곧 번역이다


생명의 소리 속에 진리의 메시지가 들어있을 때, 그것을 '말씀'이라고 한다.}} 그 말씀이 나를 건강하게 하고, 나를 깨어나게 하며, 나를 진리의 혼(魂)속으로 인도하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있다. 그게 무엇일까?

물론 그대로 쭉 듣는 것도 좋다.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정신을 집중해 들으면서 그 말씀의 소리, 기운, 또 그 속에 깃들어 있는 영성(靈性)까지 온몸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직접적으로 내 혼속에, 나의 영대(靈臺)에 충격을 주면서 진리 말씀이 깨달아지게 하는 과정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쓰는 것, 말씀을 기록하는 것이다!

아주 재미를 붙여서 기록하는 사람과 의무적으로 어거지로 쓰는 사람, 또 멍하니 정신 놓고 앉아서 그냥 듣기만 하는 사람은 말씀을 통해 받는 기운이 전혀 다르다.

그러면 말씀을 어떻게 기록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그 핵심을 기술적으로 잘 따 담을 수 있을까? 그 말씀이 내 인생의 먼 미래에까지 나의 가슴속에서 출렁거리며 살아 숨 쉬는 생명의 말씀으로 남아 있게 하려면 어찌 해야 하겠는가?

그것은 말씀에 대한 나의 체험 철학과 같이 '말씀을 받드는 것은 단순한 기록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이것은 번역(飜譯)이다!' 이런 생각을 갖고 기록을 해야 한다.

태사부님 말씀을 기록할 때는 태사부님의 삶과 지혜와 밝은 영성(靈性) 그리고 천지에 충만한 도기(道氣)가 나의 영성과 합일된다. 바로 그 때 태사부님의 도기가, 밝은 신성한 기운이 그대로 내 영대(靈臺)에 들어오는 것이다.

왜 영(靈)이 안 열리고 말씀이 크게 깨지지 않는가? 왜 포교를 해도 상대방이 이론으로 알아듣고 마는가? 왜 우주일년을 전할 때 마치 학원 강사가 지식 전하는 정도에서 그치고 마는가? 왜 듣고 나서 이틀만 지나면 한 10분의 1 정도만 남고 거의 다 잊어버리는가? 그것은 영혼의 문을 열어주지 못하고 진리의 혼을 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근본 이유가 무엇인가?

말씀을 기록할 때 번역을 제대로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에서 열까지 크고 작은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이 바로 거기에 있다. 일꾼으로서 자질과 품격 향상, 인성 개발, 인재 양육, 진리교육, 가을개벽 상황 극복과 의통 구호대 활동, 천지살림 경영과 사교 등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 성공학의 요체는 오직 말씀을 얼마나 제대로 봉명하느냐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서 지도자의 말씀 속에 들어 있는 뜻을 얼마나 정확히 받들 수 있는가, 정말로 큰 기운을 받는 번역에 이르는 정도의 봉명(奉命)을 할 수 있는가, 바로 거기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외국 영화를 상영할 때, 그 영화 제목을 잘 번역하여 붙이면 관객이 한 10만 명 정도가 덤으로 더 붙는다고 한다. 아주 대박을 터트리는 영화는 그 제목 때문에 한 30만 명은 더 온다고도 한다. 언어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얘기다.


오직 쓰는 사람만이 안다


아까 태사부님께서 막판에 하신 말씀, "싫으면 그만 둬~." 그 말씀을 들으면서, '태사부님은 과연 어떤 심정으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이 대우주의 질서가 바뀌는 가을개벽기에 과연 어떤 경계에서 내려주신 말씀일까?' 이것을 한번 깊이 사색해 보라.

나도 집에 앉아서 태사부님 말씀을 들으면서 기록을 하고, 또 여기 교육관을 오기 위해 넥타이를 매고 양복을 입으면서도 계속 집중해서 들었다. 내 정성을 보면 참 놀랍지 않은가. 나는 그렇게 하늘에서도 감동할 만큼 신앙을 한다. 어떤 때는 점심을 먹으면서도 밥상 옆에 앉은뱅이책상을 붙여 놓고 먹다가 쓰다가, 쓰다가 먹다가 한다.

그럼 내가 태사부님 말씀을 들을 줄을 몰라서? 그 말씀을 해석할 줄 몰라서? 느낄 줄을 몰라서 그렇게 쓰나? 그게 아니잖은가. 여기에는 말할 수 없는, 정말 언설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그런 문제가 있다. 그 '엑스X'가 뭐냐? 그건 쓰는 사람만이 안다, 오직 쓰는 사람만이.


동양문화의 도풍(道風)


가정에는 가풍(家風)이라는 게 있고, 한 나라에는 국풍(國風)이 있다. 그 민족의 정서, 전통, 문화와 역사가 있다. 마찬가지로 도의 세계에는 도풍(道風)이 있다.

동양의 전통에서는 도를 전할 때 10대가 됐든 어린 소년이 됐든, 스무 살 먹은 청년이 됐든, 젊은 여인이 됐든 존댓말을 쓰지 않는다. 불가(佛家)만 해도 그렇다. 법상(法床)에 올라가면, "대중들은 듣거라~!" 이렇게 말을 놔 버린다. 오늘날 서교가 들어와서 신부, 목사들이나 현대물 먹은 중들이 더러 경어(敬語)를 써주고 있지만, 사실 이것은 깨서는 안 될 동양문화의 도(道) 세계의 도풍이다.

하다못해 무도(武道) 세계에서도 말을 놓는다. 예를 들어, 우리 신도중에 지금 미국 엘에이(LA)에서 태권도장을 운영하는 신도가 있다. 그 신도만 해도 태권도를 가르칠 때는 젊은 사람, 늙은 사람 할 것 없이 누구에게도 반말을 한다. 아니 태권도 가르치는데 "앞으로 가요" "뒤로 돌아서요" 이러나? 그건 정신병자지. (하하하)

하물며 문무를 겸한 후천 오만 년 새우주의 도법을 전하는데 어떻게 말을 올려서 "잘 들리십니까?" "이해가 되십니까?" 이런단 말인가. 그건 동양문화의 뿌리 깊은 전통을 깨는 일종의 문화반역이다. 도를 전해주면서 경어를 쓰면 그 도판의 격이 떨어지거든.

그래서 내가 이것을 다시 한 번 얘기하는 거니까, 처음 온 초심자들은 미리 이런 문화전통을 알고 잘 들으란 말이다. 아, 지금 일생일대의 생사문제를 정리하는데 묵은 기운을 후려갈기는 맛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