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나들이 [을씨년스럽다]

[STB하이라이트]
※ 말 속에 담긴 시간과 이야기를 찾아 떠나는 우리말 시간 여행


우리말 나들이 [을씨년스럽다]




여러분 ‘을씨년스럽다’는 말 들어 보신 적 있으세요? 날씨가 흐리거나 기분이 가라앉을 때 우리는 무심코 이런 말을 하곤 합니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을씨년스럽다’를 날씨가 분위기 따위가 스산하고 쓸쓸한 느낌이 드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이 단어는 네 개의 요소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을’, ‘씨’, ‘년’, 그리고 ‘스럽다’입니다. ‘을’은 어두운 소리를 지닌 접두어로, 부정적 정서를 암시하고 ‘씨’와 ‘년’은 부정적 강조 표현으로 특히 ‘년’은 여성 비하의 의미도 있어서 조심스럽게 다뤄져야 하죠. 그리고 ‘스럽다’는 형용사를 만드는 접미사입니다. 그래서 이 말 전체는 분위기나 상황이 쓸쓸하고 스산한 느낌을 준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단순한 소리 조합만은 아니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민간설 중 하나는 바로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1905년, 조선의 외교권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박탈당한 해. 바로 을사년, 을사늑약의 해입니다. 나라가 침탈당하고, 말조차 잃었던 시기. 고종은 조약 서명을 끝까지 거부했지만, 대신 매국노 다섯 명이 몰래 서명을 했습니다. 바로 ‘을사오적乙巳五賊’입니다. 그해 조선의 백성들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분노와 아픔 속에 빠졌습니다. 텅 빈 거리, 웅크린 민심, 절망의 계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와 같은 분위기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참 을사년스럽다…’ 그리고 그 말이 차츰 바뀌어 ‘을씨년스럽다’가 되었다는 겁니다. 비록 국어사전에는 나오지 않지만, 시대의 상처가 어떻게 단어에 스며드는지를 보여 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이 단어는 ‘소리의 느낌’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조어造語, 즉 조합된 말로 해석됩니다. ‘을’은 어둡고 약한 소리로, ‘년’은 부정적 표현을 강조하고, ‘스럽다’가 붙어 형용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을씨년스럽다는 말은, 실제 역사와는 무관하더라도, 사람들의 귀와 마음속에 남아 있던 ‘어두운 기억’과 ‘감정의 이미지’가 말로 형상화된 결과일 수도 있겠죠.
‘을씨년스럽다’ — 이 단어를 들으면 왠지 모르게 우울하고 허전한 느낌이 듭니다. 단어는 단지 뜻을 담는 도구가 아니라, 감정을 저장하는 그릇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즘은 이 말을 조금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을씨년’이라는 표현 속에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이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을씨년스럽다’ 대신, ‘스산하다’, ‘우울하다’, ‘허전하다’ 같은 표현으로 바꾸려는 시도도 많아졌습니다.

단어 하나에도 감수성이 필요한 시대. 이건 우리가 더 섬세하게 서로를 존중하게 되었다는 증거 아닐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