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문화가 하나로 융합되는 글로벌 메트로폴리스, 뉴욕
[열두 도시로 살펴보는 세계사]
이해영 전임기자 / 서울관악도장
하지만 19세기 초의 뉴욕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인구 10만 명의 작은 항구 도시였던 이곳이 미국 최대의 거대 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한 시장市長의 대담한 아이디어가 있었다.
19세기 전반, 금융업이 발달하며 뉴욕에는 신교도 중심의 안정된 중산층 사회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여기에 오대호五大湖(Great Lakes) 공업 지대와 뉴욕항을 잇는 이리Erie 운하가 열리며 물류에 혁명이 일어났다. 마차보다 훨씬 효율적인 운하 덕분에 운송비는 크게 줄었고, 무역액은 빠르게 늘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뉴요커’로 꼽히는 드윗 클린턴DeWitt Clinton 시장은 일찍이 뉴욕의 인구가 100만 명을 넘어설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의 구상은 1811년 ‘위원회 계획(Commissioners’ Plan)’으로 구체화되었다. 맨해튼Manhattan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넓은 애비뉴Avenue와, 그 사이를 촘촘히 잇는 155개의 스트리트Street가 직각으로 교차하는 격자형 도로망이었다. 이 단순하고도 대담한 설계는 이후 부동산 개발과 교통 흐름의 바탕이 되었다. 여기에 브루클린 브리지Brooklyn Bridge를 비롯한 수많은 다리와 해저 터널, 그리고 24시간 잠들지 않는 세계 최대 규모의 지하철망이 더해지며 도시의 혈관이 완성되었다.
그 결과 1835년, 뉴욕은 필라델피아Philadelphia를 제치고 미국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었다. 1891년에는 주변 지역을 합치며 지금의 맨해튼⋅브루클린Brooklyn⋅퀸스Queens⋅브롱크스Bronx⋅스태튼아일랜드Staten Island라는 다섯 개 자치구 체제가 완성되었다.
미국의 지방 행정은 보통 주州(state)-카운티county-시티city 순으로 구성되지만, 뉴욕은 예외적으로 다섯 개의 버로우borough(자치구)로 이루어져 있다. 뉴욕이 영역을 넓히면서 원래 있던 자치단체를 없애고 그 자리에 버로우를 세웠기 때문이다.
뉴욕시는 허드슨Hudson강이 대서양과 만나는 지점, 물이 깊어 배가 다니기 좋은 항구를 끼고 있어 일찍부터 무역항으로 번성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도시의 가장 큰 특징은 대부분의 구역이 ‘섬’이라는 사실이다. 다섯 자치구 중 미국 본토와 육지로 이어진 곳은 브롱크스뿐이다. 맨해튼과 스태튼아일랜드는 독립된 섬이고, 브루클린과 퀸스는 롱아일랜드Long Island섬의 서쪽 끝자락에 붙어 있다.
좁은 섬이라는 물리적 한계는 오히려 뉴욕만의 독창적인 도시 구조를 낳았다. 옆으로 넓게 뻗을 수 없으니 위로 솟아오른 것이다. 그 결과 세계에서 가장 밀도 높은 고층 빌딩의 숲이 맨해튼 위에 만들어졌다.
뉴욕의 다섯 자치구는 저마다 다른 역사와 표정을 지니고 있다. 하나의 도시 안에 다섯 개의 세계가 함께 있는 셈이다.
맨해튼에 유독 고층 빌딩이 많은 데는 이유가 있다. 단단한 땅(지반)이 고층 건축에 유리했고, 때마침 철골 구조 공법이 발달하며 더 높이 쌓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1811년의 이 ‘위원회 계획’은 단순히 길을 정리한 것이 아니었다. 땅을 반듯한 모양으로 나눠서 사고팔기 쉽게 만든, 일종의 ‘부동산 도구’였다. 이 계획 덕분에 19세기 내내 맨해튼의 땅값은 계속 오를 수 있었고, 이는 나중에 초고층 빌딩 개발의 경제적 동기가 되었다.
1920년대 후반은 그야말로 고층 빌딩 건설 붐이었다. 1930년 높이 283미터의 40 월 스트리트(40 Wall Street, 트럼프 빌딩)와 320미터의 크라이슬러 빌딩Chrysler Building이 잇달아 세워졌고, 이듬해에는 443미터, 102층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Empire State Building이 완공되며 1972년 세계무역센터(World Trade Center)가 들어설 때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 자리를 지켰다.
땅 위에서 빌딩이 하늘 높이를 다투는 사이, 땅속에서는 또 다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1904년에 문을 연 지하철이다. 늘어나는 인구와 마차로 붐비던 지상 교통의 대안이었다. 로어 맨해튼Lower Manhattan과 할렘Harlem을 잇는 14.6킬로미터의 첫 노선은 이후 몇 배로 늘어났고, 지금은 총길이 375킬로미터, 연간 이용객 17억 명에 달하는 거대한 노선망이 24시간 도시를 돌고 있다.
19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뉴욕과 별개의 독립된 공업 도시였다. 1883년 브루클린 브리지가 놓이고 1898년 뉴욕에 합쳐지며 배후 주거지로 자리 잡았고, 20세기 후반에는 예술가들이 버려진 공장을 작업실(아틀리에)로 바꾸며 뉴욕에서 가장 트렌디한 문화 구역으로 다시 태어났다. 고풍스러운 다리 브루클린 브리지, 그리고 붉은 벽돌 건물 사이로 맨해튼 브리지Manhattan Bridge가 액자처럼 걸리는 사진 명소 덤보DUMBO가 대표적이다.
합쳐지기 전까지 브루클린은 미국에서 네 번째로 큰 독립 도시였다. 조선업과 설탕 정제업, 인쇄업이 발달한 공업 도시였고, 브루클린 브리지는 완공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긴 다리(현수교)였다. 강철 케이블 기술이 만들어 낸 상징적인 성과였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제조업이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가며 브루클린은 오랫동안 낙후 지역으로 여겨졌다.
반전은 1990~2000년대에 찾아왔다. 값싼 임대료를 찾아 예술가들이 윌리엄스버그Williamsburg, 부시윅Bushwick 같은 옛 공장 지대에 자리를 잡았고, 이는 ‘브루클린 감성(Brooklyn aesthetic)’이라는 독자적인 문화 브랜드로 발전했다. 지금은 오히려 맨해튼보다 임대료가 비싼 구역도 생겼을 정도로 위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본래 농경지와 전원 마을이었던 이곳은 20세기 초 다리와 지하철이 연결되며 빠르게 도시화되었다. 1964년 세계 박람회(World’s Fair) 개최, 그리고 JFK 국제공항(JFK International Airport)과 라과디아 공항(LaGuardia Airport)의 건설을 거치며 뉴욕의 관문으로 떠올랐다. 전 세계 100개국 이상에서 온 이민자들이 어우러져 사는, 지구상에서 가장 인종적으로 다양한 지역이다.
도시화의 결정적 계기는 1900년대 이스트East강 지하철 터널 개통과 1909년 퀸스보로 브리지Queensboro Bridge였다. 이후 1939년과 1964년 두 차례 세계 박람회를 열며 국제적인 시설(플러싱 메도스 코로나 파크Flushing Meadows-Corona Park 등)을 갖췄고, JFK⋅라과디아 공항이 건설되며 이름 그대로 뉴욕의 관문이 되었다. 특히 잭슨하이츠Jackson Heights 같은 지역은 한 동네 안에 수십 개 언어권 사람들이 함께 사는, 지구상에서 인구 대비 언어⋅민족이 가장 다양한 곳으로 꼽힌다.
네덜란드 이주민 요나스 브롱크Jonas Bronck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다섯 자치구 중 유일하게 미국 본토와 직접 이어진 곳이기도 하다. 20세기 중반 도심이 낙후되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1970년대 거리 파티에서 아프리카계⋅라틴계 청년들이 힙합Hip-hop과 그래피티Graffiti 문화를 만들어 낸 발상지로 다시 주목받았다. 넓은 뉴욕 식물원(New York Botanical Garden), 그리고 명문 구단 뉴욕 양키스New York Yankees의 홈구장이 이곳에 있다.
도심이 낙후된 배경에는 도시계획가 로버트 모지스Robert Moses가 고속도로를 건설하며 지역 공동체가 물리적으로 갈라진 사정이 있다. 여기에 경기 침체와 화재, 인구 유출까지 겹치며 상황은 더 나빠졌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힘든 시기, 사우스 브롱크스South Bronx의 거리 파티 문화에서 1970년대 힙합이 탄생했다. DJ 쿨 허크(DJ Kool Herc)의 파티가 열렸던 지역이 오늘날 힙합의 발상지로 공식 기념되고 있다.
다른 자치구보다 발전이 늦었지만, 1964년 베라자노-내로스 브리지Verrazzano-Narrows Bridge가 브루클린과 이어지며 조용한 교외 주거지로 성장했다. 번화한 다른 자치구와 달리 지금도 전원적이고 차분한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맨해튼과 이곳을 오가는 무료 페리Ferry에서는 자유의 여신상(Statue of Liberty)을 가까이서 볼 수 있어 여행자들에게도 인기다.
뉴욕의 역사는 네덜란드가 이곳에 정착하기 전, 원래 이 땅의 주인이었던 레나페Lenape족 원주민들로부터 시작된다. 그들은 맨해튼섬을 ‘언덕이 많은 섬’이라는 뜻의 ‘만하타Manahatta’라 불렀다.
1624년,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Dutch West India Company)가 맨해튼 남단에 모피 무역 기지를 세우며 ‘뉴암스테르담New Amsterdam’의 역사가 시작됐다. 1626년 총독 페터 미노이트Peter Minuit가 원주민에게서 맨해튼섬을 단돈 60길더(현재 가치로 약 24달러) 상당의 물건으로 사들였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회자된다. 1664년 영국령이 되면서 이 도시는 영국 국왕 찰스Charles 2세의 동생인 요크York 공의 이름을 따 ‘뉴욕’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후 뉴욕은 미국 독립 전쟁의 격전지가 되었다. 전쟁 비용을 마련하려 식민지에 세금을 매긴 영국에 맞서 1773년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이 벌어졌고, 이는 독립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를 우군으로 삼은 미국은 마침내 독립을 이뤄냈다. 참고로 뉴욕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은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1886년 프랑스가 선물한 것인데, 이 선물을 위해 프랑스가 지나치게 많은 돈을 쓴 것이 훗날 프랑스 대혁명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1788년 9월 13일, 뉴욕은 미국의 첫 수도가 되었다. 이듬해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이 월 스트리트의 연방홀(Federal Hall)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1790년, 정부는 임시 수도인 필라델피아로 옮겨 갔다. 뉴욕이 수도로 머문 기간은 채 1년이 되지 않았다. 도시 간 발전 격차에 대한 걱정, 이미 경제 도시로 빠르게 성장하던 뉴욕의 위상, 여기에 바닷가 지역이라 방어하기 어렵다는 약점까지 겹치며 새로운 내륙 수도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진 결과였다.
수도의 자리는 워싱턴Washington D.C.에 넘겨주었지만, 뉴욕의 성장은 멈추지 않았다. 1825년 이리 운하가 열리며 대서양 무역의 주도권을 쥐었고, 이는 뉴욕을 미국 최대의 경제 중심지로 확실히 자리 잡게 했다. 1920년대 흑인 예술과 문학의 부흥이 뉴욕을 세계 문화의 중심으로 끌어올렸지만, 1929년 월가(Wall Street)의 증시 붕괴는 세계 경제 위기와 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유럽 이민자들이 돌아오며 경제 붐이 일었으나, 조선업과 의류 산업 같은 전통 제조업이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가며 뉴욕은 서비스 중심 경제로 빠르게 바뀌었다. 1980년대 이후 월가는 다시 세계 금융의 심장으로 되살아났고,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보스턴Boston에서 워싱턴 D.C.까지 이어지는 인구 4천만 명의 거대 도시권, 그 압도적인 중심에 뉴욕이 있다. 도시 발전사를 넘어, 뉴욕의 역사는 세계사의 무대 위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사건을 써 내려간 한 편의 대서사시나 다름없다.
1792년, 금융업자들이 월 스트리트의 플라타너스(버튼우드buttonwood) 나무 아래 모여 거래 규칙을 정한 ‘플라타너스 협정(Buttonwood Agreement)’은 오늘날 NYSE의 시초가 되었다. 골드만삭스Goldman Sachs, 모건스탠리Morgan Stanley, JP모건 체이스(JPMorgan Chase) 같은 투자 은행과 수많은 헤지 펀드hedge fund, 자산 운용사가 모여 있는 이곳에서 정해지는 금리와 주가는 지구 반대편의 경제까지 흔들 만큼 큰 영향력을 지닌다.
19세기 이리 운하 개통으로 뉴욕이 대서양 무역의 관문이 되면서 자본이 몰리기 시작했고, 20세기 들어 JP 모건(John Pierpont Morgan) 같은 금융가들이 미국 산업화(철도, 철강)에 필요한 자금을 대며 월 스트리트는 세계 자본 시장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1929년 대공황(Great Depression)을 불러온 증시 붕괴, 1987년 블랙 먼데이Black Monday, 2008년 리먼 브라더스Lehman Brothers발 금융 위기까지, 월스트리트의 오르내림은 곧 세계 경제사의 이정표였다.
전통적으로 금융과 미디어의 도시였던 뉴욕은 최근 IT 산업이 성장하며 산업 구조가 다양해지고 있다. 서부의 실리콘 밸리Silicon Valley에 맞서 ‘실리콘 앨리Silicon Alley’라 불리는 기술 생태계가 빠르게 만들어졌고, 구글Google⋅메타Meta⋅아마존Amazon 같은 빅테크 기업의 대규모 거점이 자리 잡았다. 금융(핀테크Fintech), 미디어, 헬스케어, 교육(에듀테크EduTech) 등 뉴욕의 전통 강점 산업과 기술이 결합한 스타트업들도 활발히 성장하고 있다.
여기에 미디어, 패션, 부동산, 법률, 컨설팅 같은 고부가가치 서비스 산업까지 더해진다. 블룸버그Bloomberg와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 같은 세계적 미디어 기업의 본사가 이곳에 있고, 뉴욕 패션위크Fashion Week는 세계 패션과 유통 시장을 이끈다. 맨해튼의 상업⋅주거용 부동산 시장은 세계에서 가장 자산 가치가 높고 거래가 활발한 곳 중 하나다.
뉴욕 광역권의 경제 규모는 웬만한 국가의 GDP(국내총생산)를 웃돈다.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다양한 인재와 더불어 컬럼비아Columbia 대학교와 뉴욕New York 대학교 같은 우수한 교육 기관이 맞물리며 이 도시는 끊임없이 경제적 혁신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 도시에서는 무려 800개 이상의 언어가 쓰인다. 세계에서 언어가 가장 다양한 도시라는 뜻이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 온 이민자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뉴욕의 음식과 예술, 생활 양식을 만들어 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문화의 중심지 할렘, 중국과 이탈리아의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차이나타운Chinatown과 리틀 이탈리아Little Italy가 그 생생한 증거다.
미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뉴욕은 그 자체로 하나의 갤러리(미술관)와 같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인류 전체의 역사적 유물을 아우른다면, 현대 미술관(Museum of Modern Art, MoMA)은 앤디 워홀Andy Warhol과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같은 거장들의 발자취를 품고 있다. 나선형 구조로 유명한 구겐하임Guggenheim 미술관과 휘트니Whitney 미술관은 지금도 시각 예술의 새로운 실험을 지원한다.
공연 예술의 상징인 브로드웨이Broadway는 매일 밤 세계 최고 수준의 뮤지컬과 연극으로 극장가를 밝히고, 링컨 센터Lincoln Center에서는 뉴욕 필하모닉New York Philharmonic 오케스트라, 메트로폴리탄Metropolitan 오페라, 뉴욕 시티New York City 발레단이 클래식 예술의 정점을 보여 준다. 1920년대 흑인 예술가들이 이끈 ‘할렘 르네상스Harlem Renaissance’는 재즈와 문학의 황금기를 열었고, 1960년대 그리니치 빌리지Greenwich Village의 포크 음악 운동은 밥 딜런Bob Dylan 같은 시대의 목소리를 낳았다. 1970년대 브롱크스의 거리에서 태어난 힙합은 오늘날 전 세계 청년 문화를 대표하는 주류 음악이 되었다. 여기에 펑크Punk, 살사Salsa, 디스코Disco까지, 뉴욕은 셀 수 없이 많은 음악 장르가 태어난 곳이었다.
패션에서도 뉴욕 패션위크가 세계적인 흐름을 이끌고, 미국 최대의 미디어 시장답게 뉴욕 타임스와 월 스트리트 저널The Wall Street Journal 같은 신문, ABC⋅CBS⋅NBC 같은 방송사 본사가 이곳에 모여 있다. 세계 광고 산업의 중심지 역시 뉴욕이다.
사건 직후 미국 전역에서 추모의 물결이 일었다. 시민들은 국기를 내걸며 슬픔과 연대를 표했고, 수천 명의 소방관과 경찰, 의료진이 구조에 나섰다.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라 불린 세계무역센터 부지는 오랜 시간 복구 작업을 거쳐야 했고, 그 여파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와 불안장애를 겪는 이들이 크게 늘었지만, 꾸준한 상담과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많은 이들이 조금씩 일상을 되찾았다.
지금 그 자리에는 ‘9⋅11 메모리얼 & 뮤지엄(9/11 Memorial & Museum)’이 서 있다. 미국 사회는 테러 앞에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다시금 되새겼다. 뉴욕의 9⋅11 메모리얼은 단순한 역사의 현장이 아니라, 상실과 회복, 기억과 희망이 함께하는 공간으로 남아 세계인의 발길을 맞이하고 있다. ■
‘워싱턴’은 건국의 아버지이자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에서, ‘콜롬비아’는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고 알려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에서 따온 이름이다. 1790년 조지 워싱턴이 새로운 수도 건설을 제안하면서, 프랑스인 건축가 피에르 랑팡Pierre L’Enfant의 지휘 아래 바둑판 모양의 구역에 대각선 도로를 얹은 독특한 도시 계획이 세워졌다. 1800년 완성된 이 계획은 지금까지도 워싱턴 D.C.의 골격으로 남아, 미국의 심장부 역할을 이어 가고 있다.


도시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

하지만 19세기 초의 뉴욕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인구 10만 명의 작은 항구 도시였던 이곳이 미국 최대의 거대 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한 시장市長의 대담한 아이디어가 있었다.
19세기 전반, 금융업이 발달하며 뉴욕에는 신교도 중심의 안정된 중산층 사회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여기에 오대호五大湖(Great Lakes) 공업 지대와 뉴욕항을 잇는 이리Erie 운하가 열리며 물류에 혁명이 일어났다. 마차보다 훨씬 효율적인 운하 덕분에 운송비는 크게 줄었고, 무역액은 빠르게 늘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뉴요커’로 꼽히는 드윗 클린턴DeWitt Clinton 시장은 일찍이 뉴욕의 인구가 100만 명을 넘어설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의 구상은 1811년 ‘위원회 계획(Commissioners’ Plan)’으로 구체화되었다. 맨해튼Manhattan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넓은 애비뉴Avenue와, 그 사이를 촘촘히 잇는 155개의 스트리트Street가 직각으로 교차하는 격자형 도로망이었다. 이 단순하고도 대담한 설계는 이후 부동산 개발과 교통 흐름의 바탕이 되었다. 여기에 브루클린 브리지Brooklyn Bridge를 비롯한 수많은 다리와 해저 터널, 그리고 24시간 잠들지 않는 세계 최대 규모의 지하철망이 더해지며 도시의 혈관이 완성되었다.
그 결과 1835년, 뉴욕은 필라델피아Philadelphia를 제치고 미국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었다. 1891년에는 주변 지역을 합치며 지금의 맨해튼⋅브루클린Brooklyn⋅퀸스Queens⋅브롱크스Bronx⋅스태튼아일랜드Staten Island라는 다섯 개 자치구 체제가 완성되었다.
섬 위에 쌓아 올린 도시
미국의 지방 행정은 보통 주州(state)-카운티county-시티city 순으로 구성되지만, 뉴욕은 예외적으로 다섯 개의 버로우borough(자치구)로 이루어져 있다. 뉴욕이 영역을 넓히면서 원래 있던 자치단체를 없애고 그 자리에 버로우를 세웠기 때문이다.
뉴욕시는 허드슨Hudson강이 대서양과 만나는 지점, 물이 깊어 배가 다니기 좋은 항구를 끼고 있어 일찍부터 무역항으로 번성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도시의 가장 큰 특징은 대부분의 구역이 ‘섬’이라는 사실이다. 다섯 자치구 중 미국 본토와 육지로 이어진 곳은 브롱크스뿐이다. 맨해튼과 스태튼아일랜드는 독립된 섬이고, 브루클린과 퀸스는 롱아일랜드Long Island섬의 서쪽 끝자락에 붙어 있다.
좁은 섬이라는 물리적 한계는 오히려 뉴욕만의 독창적인 도시 구조를 낳았다. 옆으로 넓게 뻗을 수 없으니 위로 솟아오른 것이다. 그 결과 세계에서 가장 밀도 높은 고층 빌딩의 숲이 맨해튼 위에 만들어졌다.
다섯 개의 얼굴, 다섯 개의 이야기
뉴욕의 다섯 자치구는 저마다 다른 역사와 표정을 지니고 있다. 하나의 도시 안에 다섯 개의 세계가 함께 있는 셈이다.
맨해튼Manhattan

맨해튼에 유독 고층 빌딩이 많은 데는 이유가 있다. 단단한 땅(지반)이 고층 건축에 유리했고, 때마침 철골 구조 공법이 발달하며 더 높이 쌓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1811년의 이 ‘위원회 계획’은 단순히 길을 정리한 것이 아니었다. 땅을 반듯한 모양으로 나눠서 사고팔기 쉽게 만든, 일종의 ‘부동산 도구’였다. 이 계획 덕분에 19세기 내내 맨해튼의 땅값은 계속 오를 수 있었고, 이는 나중에 초고층 빌딩 개발의 경제적 동기가 되었다.
1920년대 후반은 그야말로 고층 빌딩 건설 붐이었다. 1930년 높이 283미터의 40 월 스트리트(40 Wall Street, 트럼프 빌딩)와 320미터의 크라이슬러 빌딩Chrysler Building이 잇달아 세워졌고, 이듬해에는 443미터, 102층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Empire State Building이 완공되며 1972년 세계무역센터(World Trade Center)가 들어설 때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 자리를 지켰다.
땅 위에서 빌딩이 하늘 높이를 다투는 사이, 땅속에서는 또 다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1904년에 문을 연 지하철이다. 늘어나는 인구와 마차로 붐비던 지상 교통의 대안이었다. 로어 맨해튼Lower Manhattan과 할렘Harlem을 잇는 14.6킬로미터의 첫 노선은 이후 몇 배로 늘어났고, 지금은 총길이 375킬로미터, 연간 이용객 17억 명에 달하는 거대한 노선망이 24시간 도시를 돌고 있다.
브루클린Brooklyn
19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뉴욕과 별개의 독립된 공업 도시였다. 1883년 브루클린 브리지가 놓이고 1898년 뉴욕에 합쳐지며 배후 주거지로 자리 잡았고, 20세기 후반에는 예술가들이 버려진 공장을 작업실(아틀리에)로 바꾸며 뉴욕에서 가장 트렌디한 문화 구역으로 다시 태어났다. 고풍스러운 다리 브루클린 브리지, 그리고 붉은 벽돌 건물 사이로 맨해튼 브리지Manhattan Bridge가 액자처럼 걸리는 사진 명소 덤보DUMBO가 대표적이다.
합쳐지기 전까지 브루클린은 미국에서 네 번째로 큰 독립 도시였다. 조선업과 설탕 정제업, 인쇄업이 발달한 공업 도시였고, 브루클린 브리지는 완공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긴 다리(현수교)였다. 강철 케이블 기술이 만들어 낸 상징적인 성과였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제조업이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가며 브루클린은 오랫동안 낙후 지역으로 여겨졌다.
반전은 1990~2000년대에 찾아왔다. 값싼 임대료를 찾아 예술가들이 윌리엄스버그Williamsburg, 부시윅Bushwick 같은 옛 공장 지대에 자리를 잡았고, 이는 ‘브루클린 감성(Brooklyn aesthetic)’이라는 독자적인 문화 브랜드로 발전했다. 지금은 오히려 맨해튼보다 임대료가 비싼 구역도 생겼을 정도로 위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퀸스Queens
본래 농경지와 전원 마을이었던 이곳은 20세기 초 다리와 지하철이 연결되며 빠르게 도시화되었다. 1964년 세계 박람회(World’s Fair) 개최, 그리고 JFK 국제공항(JFK International Airport)과 라과디아 공항(LaGuardia Airport)의 건설을 거치며 뉴욕의 관문으로 떠올랐다. 전 세계 100개국 이상에서 온 이민자들이 어우러져 사는, 지구상에서 가장 인종적으로 다양한 지역이다.
도시화의 결정적 계기는 1900년대 이스트East강 지하철 터널 개통과 1909년 퀸스보로 브리지Queensboro Bridge였다. 이후 1939년과 1964년 두 차례 세계 박람회를 열며 국제적인 시설(플러싱 메도스 코로나 파크Flushing Meadows-Corona Park 등)을 갖췄고, JFK⋅라과디아 공항이 건설되며 이름 그대로 뉴욕의 관문이 되었다. 특히 잭슨하이츠Jackson Heights 같은 지역은 한 동네 안에 수십 개 언어권 사람들이 함께 사는, 지구상에서 인구 대비 언어⋅민족이 가장 다양한 곳으로 꼽힌다.
브롱크스Bronx
네덜란드 이주민 요나스 브롱크Jonas Bronck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다섯 자치구 중 유일하게 미국 본토와 직접 이어진 곳이기도 하다. 20세기 중반 도심이 낙후되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1970년대 거리 파티에서 아프리카계⋅라틴계 청년들이 힙합Hip-hop과 그래피티Graffiti 문화를 만들어 낸 발상지로 다시 주목받았다. 넓은 뉴욕 식물원(New York Botanical Garden), 그리고 명문 구단 뉴욕 양키스New York Yankees의 홈구장이 이곳에 있다.
도심이 낙후된 배경에는 도시계획가 로버트 모지스Robert Moses가 고속도로를 건설하며 지역 공동체가 물리적으로 갈라진 사정이 있다. 여기에 경기 침체와 화재, 인구 유출까지 겹치며 상황은 더 나빠졌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힘든 시기, 사우스 브롱크스South Bronx의 거리 파티 문화에서 1970년대 힙합이 탄생했다. DJ 쿨 허크(DJ Kool Herc)의 파티가 열렸던 지역이 오늘날 힙합의 발상지로 공식 기념되고 있다.
스태튼아일랜드Staten Island
다른 자치구보다 발전이 늦었지만, 1964년 베라자노-내로스 브리지Verrazzano-Narrows Bridge가 브루클린과 이어지며 조용한 교외 주거지로 성장했다. 번화한 다른 자치구와 달리 지금도 전원적이고 차분한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맨해튼과 이곳을 오가는 무료 페리Ferry에서는 자유의 여신상(Statue of Liberty)을 가까이서 볼 수 있어 여행자들에게도 인기다.

단 1년이었지만, 미국의 첫 수도였던 뉴욕
뉴욕의 역사는 네덜란드가 이곳에 정착하기 전, 원래 이 땅의 주인이었던 레나페Lenape족 원주민들로부터 시작된다. 그들은 맨해튼섬을 ‘언덕이 많은 섬’이라는 뜻의 ‘만하타Manahatta’라 불렀다.
1624년,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Dutch West India Company)가 맨해튼 남단에 모피 무역 기지를 세우며 ‘뉴암스테르담New Amsterdam’의 역사가 시작됐다. 1626년 총독 페터 미노이트Peter Minuit가 원주민에게서 맨해튼섬을 단돈 60길더(현재 가치로 약 24달러) 상당의 물건으로 사들였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회자된다. 1664년 영국령이 되면서 이 도시는 영국 국왕 찰스Charles 2세의 동생인 요크York 공의 이름을 따 ‘뉴욕’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후 뉴욕은 미국 독립 전쟁의 격전지가 되었다. 전쟁 비용을 마련하려 식민지에 세금을 매긴 영국에 맞서 1773년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이 벌어졌고, 이는 독립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를 우군으로 삼은 미국은 마침내 독립을 이뤄냈다. 참고로 뉴욕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은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1886년 프랑스가 선물한 것인데, 이 선물을 위해 프랑스가 지나치게 많은 돈을 쓴 것이 훗날 프랑스 대혁명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1788년 9월 13일, 뉴욕은 미국의 첫 수도가 되었다. 이듬해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이 월 스트리트의 연방홀(Federal Hall)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1790년, 정부는 임시 수도인 필라델피아로 옮겨 갔다. 뉴욕이 수도로 머문 기간은 채 1년이 되지 않았다. 도시 간 발전 격차에 대한 걱정, 이미 경제 도시로 빠르게 성장하던 뉴욕의 위상, 여기에 바닷가 지역이라 방어하기 어렵다는 약점까지 겹치며 새로운 내륙 수도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진 결과였다.
수도의 자리는 워싱턴Washington D.C.에 넘겨주었지만, 뉴욕의 성장은 멈추지 않았다. 1825년 이리 운하가 열리며 대서양 무역의 주도권을 쥐었고, 이는 뉴욕을 미국 최대의 경제 중심지로 확실히 자리 잡게 했다. 1920년대 흑인 예술과 문학의 부흥이 뉴욕을 세계 문화의 중심으로 끌어올렸지만, 1929년 월가(Wall Street)의 증시 붕괴는 세계 경제 위기와 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유럽 이민자들이 돌아오며 경제 붐이 일었으나, 조선업과 의류 산업 같은 전통 제조업이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가며 뉴욕은 서비스 중심 경제로 빠르게 바뀌었다. 1980년대 이후 월가는 다시 세계 금융의 심장으로 되살아났고,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보스턴Boston에서 워싱턴 D.C.까지 이어지는 인구 4천만 명의 거대 도시권, 그 압도적인 중심에 뉴욕이 있다. 도시 발전사를 넘어, 뉴욕의 역사는 세계사의 무대 위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사건을 써 내려간 한 편의 대서사시나 다름없다.
돈이 모이는 곳, 월 스트리트에서 실리콘 앨리까지

1792년, 금융업자들이 월 스트리트의 플라타너스(버튼우드buttonwood) 나무 아래 모여 거래 규칙을 정한 ‘플라타너스 협정(Buttonwood Agreement)’은 오늘날 NYSE의 시초가 되었다. 골드만삭스Goldman Sachs, 모건스탠리Morgan Stanley, JP모건 체이스(JPMorgan Chase) 같은 투자 은행과 수많은 헤지 펀드hedge fund, 자산 운용사가 모여 있는 이곳에서 정해지는 금리와 주가는 지구 반대편의 경제까지 흔들 만큼 큰 영향력을 지닌다.
19세기 이리 운하 개통으로 뉴욕이 대서양 무역의 관문이 되면서 자본이 몰리기 시작했고, 20세기 들어 JP 모건(John Pierpont Morgan) 같은 금융가들이 미국 산업화(철도, 철강)에 필요한 자금을 대며 월 스트리트는 세계 자본 시장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1929년 대공황(Great Depression)을 불러온 증시 붕괴, 1987년 블랙 먼데이Black Monday, 2008년 리먼 브라더스Lehman Brothers발 금융 위기까지, 월스트리트의 오르내림은 곧 세계 경제사의 이정표였다.
전통적으로 금융과 미디어의 도시였던 뉴욕은 최근 IT 산업이 성장하며 산업 구조가 다양해지고 있다. 서부의 실리콘 밸리Silicon Valley에 맞서 ‘실리콘 앨리Silicon Alley’라 불리는 기술 생태계가 빠르게 만들어졌고, 구글Google⋅메타Meta⋅아마존Amazon 같은 빅테크 기업의 대규모 거점이 자리 잡았다. 금융(핀테크Fintech), 미디어, 헬스케어, 교육(에듀테크EduTech) 등 뉴욕의 전통 강점 산업과 기술이 결합한 스타트업들도 활발히 성장하고 있다.
여기에 미디어, 패션, 부동산, 법률, 컨설팅 같은 고부가가치 서비스 산업까지 더해진다. 블룸버그Bloomberg와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 같은 세계적 미디어 기업의 본사가 이곳에 있고, 뉴욕 패션위크Fashion Week는 세계 패션과 유통 시장을 이끈다. 맨해튼의 상업⋅주거용 부동산 시장은 세계에서 가장 자산 가치가 높고 거래가 활발한 곳 중 하나다.
뉴욕 광역권의 경제 규모는 웬만한 국가의 GDP(국내총생산)를 웃돈다.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다양한 인재와 더불어 컬럼비아Columbia 대학교와 뉴욕New York 대학교 같은 우수한 교육 기관이 맞물리며 이 도시는 끊임없이 경제적 혁신을 만들어 내고 있다.
800개의 언어가 함께하는 문화 수도

이 도시에서는 무려 800개 이상의 언어가 쓰인다. 세계에서 언어가 가장 다양한 도시라는 뜻이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 온 이민자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뉴욕의 음식과 예술, 생활 양식을 만들어 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문화의 중심지 할렘, 중국과 이탈리아의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차이나타운Chinatown과 리틀 이탈리아Little Italy가 그 생생한 증거다.
미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뉴욕은 그 자체로 하나의 갤러리(미술관)와 같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인류 전체의 역사적 유물을 아우른다면, 현대 미술관(Museum of Modern Art, MoMA)은 앤디 워홀Andy Warhol과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같은 거장들의 발자취를 품고 있다. 나선형 구조로 유명한 구겐하임Guggenheim 미술관과 휘트니Whitney 미술관은 지금도 시각 예술의 새로운 실험을 지원한다.
공연 예술의 상징인 브로드웨이Broadway는 매일 밤 세계 최고 수준의 뮤지컬과 연극으로 극장가를 밝히고, 링컨 센터Lincoln Center에서는 뉴욕 필하모닉New York Philharmonic 오케스트라, 메트로폴리탄Metropolitan 오페라, 뉴욕 시티New York City 발레단이 클래식 예술의 정점을 보여 준다. 1920년대 흑인 예술가들이 이끈 ‘할렘 르네상스Harlem Renaissance’는 재즈와 문학의 황금기를 열었고, 1960년대 그리니치 빌리지Greenwich Village의 포크 음악 운동은 밥 딜런Bob Dylan 같은 시대의 목소리를 낳았다. 1970년대 브롱크스의 거리에서 태어난 힙합은 오늘날 전 세계 청년 문화를 대표하는 주류 음악이 되었다. 여기에 펑크Punk, 살사Salsa, 디스코Disco까지, 뉴욕은 셀 수 없이 많은 음악 장르가 태어난 곳이었다.
패션에서도 뉴욕 패션위크가 세계적인 흐름을 이끌고, 미국 최대의 미디어 시장답게 뉴욕 타임스와 월 스트리트 저널The Wall Street Journal 같은 신문, ABC⋅CBS⋅NBC 같은 방송사 본사가 이곳에 모여 있다. 세계 광고 산업의 중심지 역시 뉴욕이다.
2001년 9월 11일, 상실과 회복의 기록

사건 직후 미국 전역에서 추모의 물결이 일었다. 시민들은 국기를 내걸며 슬픔과 연대를 표했고, 수천 명의 소방관과 경찰, 의료진이 구조에 나섰다.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라 불린 세계무역센터 부지는 오랜 시간 복구 작업을 거쳐야 했고, 그 여파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와 불안장애를 겪는 이들이 크게 늘었지만, 꾸준한 상담과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많은 이들이 조금씩 일상을 되찾았다.
지금 그 자리에는 ‘9⋅11 메모리얼 & 뮤지엄(9/11 Memorial & Museum)’이 서 있다. 미국 사회는 테러 앞에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다시금 되새겼다. 뉴욕의 9⋅11 메모리얼은 단순한 역사의 현장이 아니라, 상실과 회복, 기억과 희망이 함께하는 공간으로 남아 세계인의 발길을 맞이하고 있다. ■
워싱턴 D.C., 건국의 아버지를 기리는 수도

‘워싱턴’은 건국의 아버지이자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에서, ‘콜롬비아’는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고 알려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에서 따온 이름이다. 1790년 조지 워싱턴이 새로운 수도 건설을 제안하면서, 프랑스인 건축가 피에르 랑팡Pierre L’Enfant의 지휘 아래 바둑판 모양의 구역에 대각선 도로를 얹은 독특한 도시 계획이 세워졌다. 1800년 완성된 이 계획은 지금까지도 워싱턴 D.C.의 골격으로 남아, 미국의 심장부 역할을 이어 가고 있다.
〈참고문헌〉
* 『30개 도시로 읽는 세계사』, 조 지무쇼 저자(글)⋅최미숙 번역⋅진노 마사후미 감수, 2020, 다산북스
* 『30개 도시로 읽는 세계사』, 조 지무쇼 저자(글)⋅최미숙 번역⋅진노 마사후미 감수, 2020, 다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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