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 “수행은 욕심과 집착, 어리석음이라는 먼지에 가려진 내면의 빛을 닦아 내는 과정”

[빛과 어둠 : 대결인가 상보인가]
오강남 명예교수 /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비교종교학과

본 기사는 삼랑대 강좌 내용을 정리한 강좌입니다. 빛과 어둠: 대결인가 상보인가 2부의 내용입니다. [편집자 주註]




지난 호에서는 빛을 이해하는 세 가지 이야기, 곧 부처님의 성불 체험과 플라톤의 동굴 비유, 창세기의 “빛이 있으라.”를 살펴봤습니다. 이어서 궁극 실재와 진리의 상징으로서의 빛, 수행 과정에서 나타나는 빛, 도통한 존재에게서 드러나는 빛을 정리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그 논의를 이어, 우리 안에 있는 빛과 어둠의 의미를 살펴보고 빛과 어둠을 대결이 아니라 상보相補의 관계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합니다.

빛과 관계되는 구체적인 사례



내 속에 있는 빛



빛은 멀리 있는 초월적 존재에게서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종교 전통은 인간의 내면에도 빛이 있다고 말합니다. 기독교 정경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도마복음』은 내 속에 빛으로 계신 하나님을 깨닫는 일을 중요하게 다룹니다. 여기서 깨달음은 그노시스gnōsis, 곧 참된 인식입니다. 인간은 자기 안에 있는 빛을 깨달을 때 자유로운 새사람이 되고, 죽음의 두려움도 넘어설 수 있다고 설명됩니다.

기독교 계통의 퀘이커Quaker도 내면의 빛을 중시합니다. 퀘이커의 침묵 예배에서는 조용히 앉아 내 속에 빛으로 계신 하나님의 움직임을 기다립니다. 누군가 내면의 빛이 움직였다고 느끼면 짧게 말하고, 공동체는 다시 침묵으로 돌아갑니다. 이 예배의 핵심은 외부의 소리보다 내면에서 움직이는 빛에 귀를 기울이는 데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우리 안에 스스로 빛나는 불성佛性이 있다고 봅니다. 수행은 밖에서 새로운 빛을 가져오는 일이 아니라, 욕심과 집착, 어리석음이라는 먼지에 가려진 내면의 빛을 닦아 내는 과정입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기 전 제자들에게 남겼다고 전해지는 자등명自燈明과 법등명法燈明의 가르침도 이와 연결됩니다. 자등명은 자신을 등불로 삼으라는 뜻이고, 법등명은 진리를 등불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힌두교 『문다카 우파니샤드Muṇḍaka Upaniṣad』에서도 우리 내부에 스스로 빛나는 존재가 있다고 말합니다. 『우파니샤드』의 일관된 기조는 절대자 브라흐만Brahman이 빛이며, 동시에 참나 아트만Ātman도 빛이라는 것입니다. 절대자와 인간 내면을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보지 않고, 인간의 깊은 내면에서 궁극 실재의 빛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힌두교 삼키아Sāṃkhya 전통은 우주를 정신적 원리인 푸루샤Puruṣa와 물질적 원리인 프라크리티Prakṛti의 결합으로 설명합니다. 프라크리티에는 세 가지 성질, 곧 구나guṇa가 있습니다. 빛과 지혜의 속성인 사트바Sattva, 어둠의 속성인 타마스Tamas, 변화와 활동의 속성인 라자스Rajas가 그것입니다. 사트바가 우세해지면 평온함과 기쁨, 지혜, 깨달음을 향한 갈망이 생겨난다고 설명됩니다.


어둠을 바라보는 세 가지 관점



빛이 긍정적인 것으로 묘사되는 데 비해, 어둠은 종종 빛과 대조되어 부정적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종교와 철학의 전통을 자세히 살펴보면 어둠에는 한 가지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둠은 중성적 의미, 부정적 의미, 긍정적 의미를 모두 지닙니다.


1. 중성적 어둠: 빛이 오기 이전의 상태


창세기 1장에서 어둠은 빛이 창조되기 이전의 태초 상태입니다.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누어 낮과 밤의 질서를 세웠다고 할 때, 어둠 자체가 곧 악이나 죄로 제시되지는 않습니다. 어둠은 빛과 함께 세계 질서를 이루는 요소입니다. 따라서 창세기의 어둠은 먼저 중성적 성격을 지닌다고 볼 수 있습니다.

힌두교와 불교에서 무명無明(avidyā)은 밝음, 곧 앎(vidyā)이 없는 상태입니다. 무명은 벗어나야 할 대상이지만, 반드시 악한 존재나 빛과 싸우는 실체로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플라톤의 동굴에서도 어둠은 무지의 상태이지 죄악 그 자체는 아닙니다. 어둠은 빛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상태, 또는 실재를 보지 못하는 상태로 이해됩니다.


2. 부정적 어둠: 죄, 악, 사탄의 권세



어둠을 빛과 대립하는 악의 원리로 보는 대표적 전통은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입니다. 이 전통에서는 선한 영과 악한 영이 대립하며, 선한 영은 빛과, 악한 영은 어둠과 연결됩니다. 세계는 빛과 어둠의 대쟁투가 벌어지는 현장으로 이해됩니다.

기독교에서도 빛과 어둠을 대립 관계로 보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 14절은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라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26장 18절도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한다고 말합니다. 이 경우 어둠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상태, 죄와 사탄의 권세를 상징합니다.

우파니샤드 전통에서 널리 인용되는 기도에도 “거짓에서 진리로,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불멸로 인도하소서.”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여기서 어둠은 해방되어야 할 부정적 상태로 나타납니다. 이처럼 일부 전통에서 어둠은 진리와 생명, 하나님과 반대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3. 긍정적 어둠: 쉼, 신비, 통합의 조건



그러나 어둠은 긍정적으로도 이해됩니다. 일상생활에서 밤은 인간에게 쉼을 주고, 깊은 잠을 가능하게 합니다. 어두운 터널 끝의 빛처럼 어둠은 희망을 더 선명하게 보이게 하는 배경이 되기도 합니다. 어둠이 없다면 별빛도 밝게 드러나기 어렵습니다.

도가道家 전통은 어둠을 특히 긍정적으로 이해합니다. 『도덕경道德經』 제1장은 도道를 현玄이라고 부르고, 현지우현玄之又玄 중묘지문衆妙之門이라고 말합니다. 현玄은 검고 어둡다는 뜻이지만, 동시에 깊고 신비롭다는 뜻을 지닙니다. 여기서 어둠은 모든 신비의 문이며, 만물의 근원과 연결됩니다.

음양陰陽 사상에서도 음陰은 어둠, 양陽은 밝음으로 이해되지만, 본래의 음양에는 가치의 우열이 없습니다. 음이 없으면 양도 없고, 양이 없으면 음도 없습니다. 두 원리는 서로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상보적相補的(complementary)으로 작용합니다. 빛과 어둠의 관계도 이처럼 한쪽이 다른 한쪽을 제거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드러내고 완성하는 관계로 볼 수 있습니다.

칼 융Carl Jung의 심층심리학도 이와 연결됩니다. 융은 인간 마음속의 어둠을 그림자(shadow)라고 불렀습니다. 그림자는 억눌린 욕망이나 부정적 요소를 뜻하지만, 무조건 제거할 대상은 아닙니다. 어둠을 인식하고 빛과 통합할 때 온전한 자기(Self)가 형성됩니다. 이 과정이 개성화(individuation process)입니다.


한국의 다석多夕 유영모 선생도 어둠을 깊이 사유했습니다. 다석이라는 호는 저녁 석夕 자를 세 번 겹친 말입니다. 어두울수록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고, 신에게 가까이 갈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중세 기독교 신비주의의 “영혼의 어두운 밤(the dark night of the soul)”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어둠은 신에게 다가가기 전 겪어야 하는 고통이자 영적 성장의 통과 과정입니다.


나가며: 빛과 어둠의 상보성



여러 종교와 철학에서 빛은 대체로 긍정적인 것으로 묘사됩니다. 빛은 깨달음, 진리, 생명, 지혜, 신의 현존을 상징합니다. 반대로 어둠은 무지, 죄, 악, 죽음, 소외의 상징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둠을 오직 부정적으로만 이해해서는 빛과 어둠의 전체 관계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어둠은 때로 빛이 오기 이전의 중성적 상태이고, 때로는 쉼과 회복의 조건이며, 때로는 신비의 깊이와 내면 성찰의 공간입니다. 빛은 어둠 속에서 더 선명해지고, 어둠은 빛을 통해 의미를 얻습니다. 따라서 빛과 어둠은 단순한 대결 관계라기보다 상생相生적이고 상보相補적인 관계로 보아야 합니다.

물론 악으로서의 어둠은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중성적이거나 긍정적인 어둠은 인간의 삶과 수행에 도움을 줍니다. 빛만을 좋아해서도 안 되고, 어둠만을 좋아해서도 안 됩니다. 두 요소가 함께 갈 때 더 균형 잡힌 종교적⋅철학적 통찰에 이를 수 있습니다.


질의응답




1. 장자 철학에서 조철과 어둠의 관계
질의자: 원정근 상생문화연구소, 위진현학⋅장자주 전공


장자莊子 철학에서 빛과 어둠의 핵심 쟁점은 양자의 경계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에 있습니다. 빛과 어둠은 가장 확실하면서도 가장 불확실하고, 가장 명확하면서도 가장 불명확한 양가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빛이면서 동시에 어둠인 관계가 빛과 어둠의 진정한 관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장자의 수행론 중 외천하外天下에서 불사불생不死不生으로 나아가는 과정 가운데 조철朝徹을 들어, 아침 해가 솟아 온 누리를 밝히듯 지혜가 솟아오르는 경지로 설명하셨습니다. 다만 조철이라는 비유는 자칫 어둠을 불태워 없애야만 지혜가 나온다는 식으로 오해될 수 있습니다.

장자가 말하는 지혜의 원천은 무지지지無知之知, 곧 앎이 없는 앎이며, 개별적이고 편파적인 앎을 부정하고 전체적인 앎으로 나아가는 데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조철 안의 밝음은 이미 어둠을 품고 있는 밝음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은지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응답: 장자에서는 쓸데없는 것이 없다는 무용지물無用之物의 관점(생존과 자유를 위한 쓸모없음)이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둠도 쓸모가 있으며, 결코 단순히 제거해야 할 대상만은 아닙니다. 다만 수행 단계에서 말하는 조철은 의식이 확 바뀌며 밝음이 드러나는 경험을 가리키는 것이지, 어둠을 정죄하거나 어둠 자체를 나쁜 것으로 본다는 뜻은 아닙니다.

노장老莊 철학에서 밝음과 어둠은 상대적입니다. 어둠이 없으면 밝음도 없고, 밝음이 없으면 어둠도 없습니다. 음양陰陽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점에서 어둠을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은 장자나 노자의 기본 입장과 맞지 않습니다. 어둠을 없애야 한다기보다, 빛과 어둠의 상관성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질의 2. 빛의 다층적 의미와 어둠의 재해석
질의자: 황경선 상생문화연구소, 서양철학 전공



빛이라는 개념은 일의적一義的(univocal)이지도 않고, 완전히 다의적多義的(equivocal)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유비적類比的(analogical)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창세기의 “빛이 있으라.”에서 빛은 자연의 빛으로 볼 수 있고, 플라톤의 동굴 비유에서 빛은 이성의 빛 또는 인식 가능성을 열어 주는 빛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불교의 적광寂光이나 적조寂照는 적멸의 경지에서 피어오르는 깨달음의 빛이므로 앞의 빛들과 구별될 필요가 있습니다.

또 노자의 현玄이나 다석 유영모 선생의 빈탕한 경계는 단순한 어둠이라기보다 도道의 경계로서의 또 다른 빛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강의에서는 이런 빛의 다양한 층위가 충분히 세분화되지는 않은 듯합니다.

응답: 플라톤의 동굴 비유에서 나오는 빛은 이성의 빛으로 볼 수도 있지만, 본래 이야기에서는 태양 빛이 중요합니다. 동굴 밖으로 나온 사람이 처음에는 눈이 부셔 힘들어하지만, 점차 태양 빛 아래에서 이데아의 세계를 보게 됩니다.

빛에도 여러 스펙트럼이 있듯이, 빛의 종류를 하나하나 분석하는 작업은 충분히 가치가 있습니다. 다만 이 강의는 세부 분석이라기보다 빛과 어둠에 관한 여러 전통의 사례를 서론적으로 묶어 본 것입니다. 무지無知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불교나 힌두교에서는 벗어나야 할 무지가 있지만, 중관학中觀學의 창시자 용수龍樹나 『도덕경』에서 말하는 무지는 오히려 좋은 의미의 무지입니다. 궁극 실재에 대해서는 우리가 안다고 말할 수 없으며,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질의 3. 범아일여와 자아⋅절대자의 관계
질의자: 강시명 상생문화연구소, 인도철학 전공



범아일여梵我一如는 브라흐만도 빛이고, 아트만 곧 진아眞我도 빛이며, 브라흐만과 아트만이 하나임을 깨닫는 인식의 열림도 빛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도 수행 전통에서는 “아함 브라흐마스미ahaṃ brahmāsmi”, 곧 “나는 브라흐만이다.”라는 표현이나 “타트 트밤 아시tat tvam asi”, 곧 “그것이 바로 너다.”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샹카라차리야Shankaracharya는 브라흐만과 아트만의 동일성을 강하게 주장했지만, 이후 라마누자Ramanuja, 카슈미르 시바이즘Kashmir Shaivism, 마드바Madhva 등 여러 학파는 이 무분별한 동일성을 비판하며 출발했습니다. 신과 인간을 단순히 하나로 보면 개체의 정체성과 윤리성이 약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 서문序文처럼 진아와 일신을 동일시하지 않고, 진아를 일신이 거처하는 궁으로 보는 관점이 상보적 관계를 설명하는 데 더 적합하지 않은지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응답: 아트만이나 자아를 말할 때는 두 가지 차원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처님이 부정한 아트만은 영어로 하면 소문자 self, 곧 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현재의 자아입니다. 그러나 대문자 Self까지 부정했는지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견해가 다릅니다. 작은 self를 버리면 큰 Self를 얻을 수 있지만, 작은 self에 얽매이면 큰 Self를 잃게 됩니다.

동학의 인내천人乃天도 마찬가지입니다. 욕심으로 가득 찬 지금의 내가 곧 하늘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하늘이라는 뜻이지, 왜곡된 자아를 하늘과 동일시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나가르주나Nāgārjuna(용수龍樹)의 공空도 단순히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궁극 실재는 우리의 생각이나 이론이 들어갈 수 없다는 의미에서 공입니다. 따라서 아我를 말할 때도, 공空을 말할 때도 차원을 분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무리: 한밝 문화와 남은 과제



질의응답을 마치며 오강남 교수는 한밝 문화에 충분히 주목하지 못한 점을 새롭게 깨달았다고 말했습니다. 한국 역사에서 밝음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가, 흰옷을 입는 배달민족의 밝음은 무엇이었는가 하는 문제는 앞으로 반드시 보충되어야 할 중요한 주제라고 밝혔습니다. 이는 빛과 어둠의 상보성을 한국 사상과 문화의 맥락에서 다시 탐구할 수 있는 다음 과제로 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