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도시로 살펴보는 세계사 - 15608 @@대영 제국의 수도, 런던의 빛과 어둠

[열두 도시로 살펴보는 세계사]
이해영 전임기자 / 서울관악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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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크기는 면적으로만 측정되지 않는다. 시간의 두께와 공간의 깊이, 그리고 그 안을 채운 인간의 숨결이 겹겹이 쌓여 거대한 퇴적층을 이룰 때, 도시는 비로소 하나의 우주가 된다.

유럽의 서쪽 끝, 섬나라의 심장에 자리 잡고 있는 런던London은 바로 그런 도시다. 수천 년 동안 불타오르고, 무너지고, 피비린내 나는 폭력에 짓밟히면서도 끝내 다시 일어선 도시. 세계를 호령하던 제국의 영광과, 타국의 고혈을 짜내었던 식민 지배의 어두운 과오를 동시에 품고 있는 도시. 완만한 템스Thames강 분지 위에 세워진 이 메트로폴리스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과거의 기억을 품은 채 미래를 향해 도도히 흘러가고 있다. 역사와 지형, 문화, 그리고 그 길목을 지켜 온 상징물들을 이정표 삼아, 런던이라는 거대한 유기체의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본다.


템스강이 새긴 지형과 도시의 탄생: 론디니움



런던이라는 도시의 존재 이유를 찾으려면 가장 먼저 땅의 모양과 물의 흐름을 보아야 한다. 지형학적으로 런던은 영국 남동부를 완만하게 감싸안은 분지 지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분지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며 만물을 길러 내는 젖줄처럼 흐르는 존재가 바로 템스강이다.

템스강은 단순히 도시를 남과 북으로 가르는 경계선이 아니다. 이 강은 바다의 조석 영향을 강하게 받는 감조感潮 하천이다. 밀물이 밀려오면 바닷물이 내륙 깊숙한 곳까지 차오르기 때문에, 고대와 중세의 대형 선박들이 외해에서부터 자연스럽게 도시 한복판까지 진입할 수 있었다. 즉, 런던은 태생적으로 바다와 내륙을 잇는 천혜의 항구 조건이자 세계로 뻗어 나갈 수 있는 최적의 지형적 요충지였던 셈이다.

이 지형의 가치를 가장 먼저 알아본 이들은 로마 제국이었다. 기원전 700년경부터 켈트인이 이 습지 지대에 터를 잡고 살았으나, 본격적인 도시의 기틀은 기원후 43년 로마의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이 땅을 정복하면서 마련되었다. 로마군은 템스강 북쪽의 늪지대를 메워 요새이자 항구 도시를 건설했다. 켈트어로 ‘습지의 요새’를 뜻하는 이곳이 바로 런던이라는 이름의 시원이 된 ‘론디니움Londinium’이다. 로마 제국의 속주 ‘브리타니아Britannia’의 중심지가 된 이곳은 곡물과 자원을 대륙으로 보내는 거점이 되었고, 로마식 공중목욕탕과 항만 시설이 들어서며 번창했다.


로마인들은 이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견고한 성벽인 ‘런던 성벽(London Wall)’을 쌓았다. 5세기 로마 제국의 영향력이 쇠퇴하면서 게르만계 앵글로색슨족이 바다를 건너 유입되었고, 이들은 브리튼섬 중남부에 일곱 개의 왕국을 건설했다. 이 무렵부터 론디니움은 비로소 ‘런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로마 이후의 런던과 잉글랜드



9세기 북유럽 데인Dane족의 침공으로 웨섹스Wessex 왕국을 제외한 영토가 정복당하는 국가적 위기를 겪었으나, 웨섹스의 알프레드Alfred 왕이 데인족을 저지하고 런던을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후에 그의 손자인 애설스탠Æthelstan이 브리튼섬 중남부(잉글랜드)를 완전히 통일하면서 명실상부한 ‘잉글랜드 왕’의 칭호를 사용하게 된다.

오늘날 영국의 정식 국명은 ‘그리이트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으로, 흔히 UK나 브리튼Britain으로 줄여 부른다. 이는 브리튼섬 중남부의 잉글랜드England, 북부의 스코틀랜드Scotland, 서부의 웨일스Wales, 아일랜드섬 북부의 북아일랜드Northern Ireland로 구성된 4개국의 연합체다.

런던이 이 거대한 연합 국가의 수도이자 잉글랜드의 수도를 겸하게 된 배경에는 역사적으로 잉글랜드가 주도적인 권력 중심이 되어 다른 세 나라를 차례로 병합해 나간 역사가 자리하고 있다. 오늘날 거대한 금융 빌딩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 ‘시티 오브 런던City of London’ 지역이 바로 로마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던 이 고대 핵심 지구와 정확히 일치한다. 서울로 치면 역사적인 ‘사대문 안’에 해당하는 셈이다.


세월이 빚어낸 역사적 이정표: 정치의 중심과 노르만 정복



런던의 역사는 결코 평탄한 대로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거대한 재앙과 파괴, 그리고 이를 악물고 버텨낸 복구의 서사시에 가깝다. 로마 성벽 안의 시티가 상업과 금융의 핵으로 자랐다면, 그 서쪽은 영국의 영혼을 지탱하는 정치의 핵으로 성장하며 독특한 ‘쌍둥이 핵’ 구조#를 완성했다. 1015년 덴마크의 크누트Cnut가 이끄는 데인족이 다시 잉글랜드를 정복한 혼란기를 지나, 1042년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 참회왕(Edward the Confessor)은 템스강 왼편에 고풍스러운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을 건립했다.

에드워드 왕이 서거한 이후인 1066년, 프랑스의 노르망디 공 기욤Guillaume이 브리튼섬으로 밀고 들어와 왕위를 찬탈하고 윌리엄William 1세로 즉위하는 ‘노르만 정복’이 일어난다. 이 사건은 영국 역사의 물줄기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에 프랑스풍의 봉건 문화와 언어가 깊숙이 유입되었고, 노르만인 귀족들이 영토를 지배하는 새로운 지배 계급으로 부상했다.

윌리엄 1세의 대관식은 바로 에드워드 왕이 지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되었으며, 이후 잉글랜드 국왕들의 즉위식은 대부분 이곳에서 치러지며 정통성을 상징하는 의례로 굳어졌다.

11세기에 사원 옆에 지어진 웨스트민스터 궁전(Palace of Westminster)은 1295년 에드워드Edward 1세가 개최한 ‘모범 의회(Model Parliament)’를 시작으로 영국 의회 정치의 요람이 되었다. 1529년 헨리Henry 8세가 왕궁을 화이트홀 궁전으로 옮긴 이후 지금까지 이곳은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다우닝가 10번지의 총리 관저(10 Downing Street 또는 Number 10)와 영국 왕실의 상징인 버킹엄 궁전(Buckingham Palace)이 이 웨스트민스터 지구에 모여 정치의 심장부를 이루고 있다.

한편, 정복왕 윌리엄이 외부의 침입을 막는 동시에 반발하는 런던 시민들을 감시하고 왕권을 과시하기 위해 템스강 변에 세운 견고한 요새인 런던탑(Tower of London)은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과 비극의 역사를 고스란히 박제한 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대재앙의 시간을 견디며: 인내와 재건의 역사



화려한 연대기 뒤로 런던은 끔찍한 재앙의 터널을 통과해야 했다. 1558년에 즉위해 영국 절대왕정의 전성기를 이끈 엘리자베스Elizabeth 1세 시기를 지나며 도시는 급격히 팽창했으나, 17세기 찰스Charles 2세 치세에 두 가지 파멸적인 재앙이 연이어 도시를 덮쳤다.

첫 번째는 1665년의 대페스트(Great Plague)로, 불과 1년 만에 인구의 5분의 1에 달하는 7만 5천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통곡 소리가 채 가시기도 전인 1666년 9월 2일 새벽, 푸딩 레인의 한 빵집에서 일어난 작은 불씨가 사흘 밤낮 동안 도시를 집어삼킨 런던 대화재(Great Fire of London)가 발생했다.

당시 런던은 토지가 좁아 건물을 위로 빽빽하게 증축한 목조 가옥들이 밀집해 있었고, 오랜 가뭄과 강풍이 겹친 데다 템스강 변까지 가옥들이 들어차 방수용 물조차 확보하기 어려웠다. 이 화재로 중세 런던 유산의 80퍼센트가 순식간에 재로 변했고, 수많은 시민이 부서진 집터 위에서 통곡했다.

하지만 런던의 진짜 저력은 이 비극의 폐허 위에서 증명되었다. 당시 국왕 찰스 2세와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 경(Sir Cristopher Wren)을 비롯한 런던인들은 완전히 새로운 바둑판식 계획도시를 만드는 대신, 몸에 익은 과거의 구불구불한 길과 토대를 그대로 살려 건물을 다시 올렸다. 다만 국왕의 지시로 런던재건법(Rebuilding of London Act 1670)을 빠르게 정비해 도로 폭을 넓히고 건물 층수를 제한했으며, 벽돌과 석조 이외의 목조 건축물을 새로 건설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다.

또한 찰스 2세는 악취를 뿜던 템스강 주변의 공장들을 외곽으로 이전시키고, 강과 건물 사이 공간에 하선장을 만들어 향후 늘어날 물동량 증가에 선제적으로 대응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해상 무역에만 한정되어 있던 손해보험의 범위를 내륙 건축물까지 확대하여, 1680년 세계 최초의 화재보험 회사인 ‘파이어오피스The Fire Office’가 탄생한 것도 이 대화재가 남긴 위기 극복의 유산이다.

크리스토퍼 렌의 지휘 아래 런던의 스카이라인을 상징하는 세인트 폴 대성당(St. Paul’s Cathedral)이 이때 아름답게 재건되었고, 도시의 위생과 주거 환경이 눈에 띄게 개선되면서 더 이상 흑사병이 발붙이지 못하게 되었다. 비극을 지우는 대신 비극을 딛고 과거의 기억 위에 도시를 재건한 이 현명한 선택 덕분에, 런던의 인구는 1700년 50만 명을 돌파하며 유럽 최대 규모의 도시로 우뚝 서게 되었다.

도시의 인내는 현대사에서도 고스란히 재현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은 영국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1940년부터 1941년까지 런던을 집중적으로 폭격했다. 이른바 ‘더 블리츠The Blitz(번개)’라 불리는 무차별 야간 공습이었다. 57일 연속으로 폭탄이 하늘에서 떨어졌고, 수많은 주택과 공장, 소중한 문화재가 파괴되었으며 수만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런던 시민들은 지하철역(Tube)을 방공호 삼아 서로를 위로했고, 날이 밝으면 파괴된 잔해를 치우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다시 출근길에 올랐다. 당시 정부가 내걸었던 “평정심을 유지하고 하던 일을 계속하라(Keep Calm and Carry On)”라는 구호처럼, 그들은 공포와 폭격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도도한 시민 정신으로 끝내 도시를 지켜 냈다.


폭증하는 인구와 두 개의 얼굴: 시티 밖, 그리고 이스트엔드의 슬럼



1600년에서 1650년 사이, 런던의 역사에는 매우 흥미로운 인구학적 변화가 일어난다. 중심부인 ‘사대문 안’ 시티 오브 런던의 인구는 거의 변하지 않았음에도, 런던 전체 인구는 20만 명에서 40만 명으로 두 배나 폭증한 것이다. ‘사대문 밖’ 외곽 지대의 인구가 무섭게 팽창한 결과였다. 1550년까지만 해도 런던 인구 7만 5,000명 중 시티 외곽 인구는 6,000명(약 8퍼센트)에 불과했으나, 1801년이 되면 시티 인구는 12만 9,000명에 머문 반면 시티 밖 인구는 82만 8,000명으로 증가해 전체의 86.5퍼센트를 차지하게 된다.

이 폭발적인 인구 성장을 견인한 것은 다름 아닌 세계 상업 무역의 중심으로 우뚝 선 런던항의 물동량이었다. 1700년 무렵 영국 해외 무역량의 75~80퍼센트가 템스강의 런던항을 통해 유통되었다. 부두 인근에는 하역과 창고 건설에 투입될 수없이 많은 일용직 노동자가 필요했고, 자연스럽게 이들을 위한 저렴한 숙박 시설, 주점, 야시장들이 템스강 하류인 런던 동부 지역에 빽빽하게 들어찼다. 이곳이 바로 ‘이스트엔드East End’다.

지리적⋅사회적 요인으로 인해 런던은 명확하게 두 개의 얼굴로 쪼개졌다. 서풍이 주로 부는 런던의 기후 특성상, 공장의 매연과 악취는 항상 동쪽인 이스트엔드로 흘러갔다. 이 때문에 서부(웨스트엔드)에는 부유층이 거주하며 쾌적하고 화려한 주거지를 형성했지만, 동부(이스트엔드)는 과밀 상태의 공업 지대와 열악한 슬럼가가 형성되었다.

이스트엔드의 화이트채플 같은 지역은 가난과 범죄, 콜레라 같은 전염병의 온상이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추리 작가 코난 도일이 탐정 소설 『셜록 홈스』 시리즈를 통해 그려낸 음산한 안개 속 도시의 풍경, 뮤지컬 〈지킬 앤드 하이드〉, 〈스위니 토드〉, 그리고 19세기 런던을 공포로 몰아넣은 실제 연쇄살인마의 이야기를 다룬 『잭 더 리퍼』의 어두운 배경이 바로 이 이스트엔드다.

오늘날까지 영국 BBC에서 1985년부터 방영 중인 장수 드라마 〈이스트엔더스East Enders〉 역시 이 지역 서민들의 고단하고 치열한 삶을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다. 한강 서부보다 동부가 비교적 부유한 서울의 구조와 달리, 런던은 템스강 하류의 국제 무역항 발달과 일용직 노동자 정착 과정으로 인해 ‘동빈서부東貧西富’라는 독특한 지리적⋅계급적 정체성을 갖게 된 것이다.


대영 제국의 심장과 금융의 메카 ‘시티’의 명암



1837년 즉위한 빅토리아Victoria 여왕 시대(1837~1901)에 이르러 영국은 전 세계 영토의 4분의 1을 지배하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 제국(British Empire)의 정점에 섰다. 이 시기 런던은 세계 금융, 무역, 정치, 문화의 절대적인 중심지였다. 전 세계의 자본이 런던의 은행으로 흘러들었고, 전 세계의 원자재와 상품이 템스강의 부두를 가득 채웠다. 런던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인구 100만을 돌파한 현대적 의미의 거대 도시(Mega city)가 되었으며, 제국의 권위와 풍요를 과시하는 웅장한 건축물들이 차례로 들어섰다.

이 시기의 영광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축물이 바로 템스강 변에 있는 국회의사당(웨스트민스터 궁전)과 그 끝에 우뚝 솟은 거대한 시계탑 빅벤Big Ben(공식 명칭 엘리자베스 타워)이다. 고딕 복고 양식으로 지어진 이 압도적인 건축물은 대의 정치와 의회 민주주의의 산실이자, 전 세계를 움직이던 영국 정치권력의 위엄을 시각적으로 웅변한다. 그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버킹엄 궁전은 제국의 구심점이었던 영국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며, 19세기 말에 완공된 타워 브리지Tower Bridge는 과거의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새로운 산업 시대의 기술을 받아들인 런던의 정체성을 가장 잘 요약해 준다.

1851년에는 세계 최초의 만국박람회(The Great Exhibition)를 개최해 압도적인 국력을 과시했고, 1884년에는 런던 교외의 ‘그리니치 천문대’를 통과하는 자오선을 경도 0도로 삼아 ‘그리니치 표준시(Greenwich Mean Time, GMT)’를 제정했다. 런던이 지리적으로나 시간상으로 지구의 완전한 중심이 된 순간이었다.

그 막대한 제국의 자본은 모두 런던의 심장인 ‘시티 오브 런던City of London’으로 집결했다. 단 2.9제곱킬로미터에 불과한 이 구역은 1571년 왕립거래소, 1694년 영국중앙은행인 잉글랜드 은행이 설치되었고, 오늘날에도 세계 금융의 절대적 중심지다. 시티는 대런던(Greater London)의 자치 체제 속에서도 고유의 독립성을 유지하여, 일반 런던 시장과는 다른 별도의 시장이 정무를 맡고 독자적인 경찰 조직을 운영한다. 오랜 자치 전통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국왕을 비롯한 왕족이라 할지라도 시티 시장의 허가 없이는 이 구역에 함부로 발을 들일 수 없다. 말 그대로 ‘런던 안의 또 다른 독립된 런던’인 셈이다.

그러나 이 찬란한 자본의 금융 제국 이면에는 결코 씻을 수 없는 과오가 짙게 박혀 있다. 대영박물관(British Museum)의 그 웅장한 유리 천장 아래 전시된 로제타석, 파르테논 신전의 대리석, 이집트의 미라들은 인류 문명의 정수들이지만, 동시에 제국주의 시절 전 세계 식민지를 무력으로 침탈하고 수탈해 온 ‘약탈 문화재’라는 비판을 피하지 못한다. 그리스와 이집트를 비롯한 수많은 국가가 끊임없이 문화재 반환을 요구하고 있으나, 영국은 “세계의 유산을 가장 잘 보존하고 전시할 수 있는 곳은 런던”이라는 논리를 내세우며 거부하고 있다.

런던의 자본주의가 성장한 배경 역시 어둡다. 17~18세기 런던의 수많은 상인과 금융가들은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노예로 잡아 아메리카 대륙에 팔아넘기는 ‘삼각무역’에 깊숙이 관여했다. 노예 무역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자금은 런던의 은행을 채웠고, 이는 산업혁명의 종잣돈이 되었다.

또한 영국의 동인도 회사(East India Company)는 인도 대륙을 피로 물들인 채 수탈했고, 중국과의 무역 적자를 메우기 위해 아편을 밀수출하여 아편전쟁(Opium Wars)을 일으키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르기도 했다. 아프리카 대륙을 자로 잰 듯 제멋대로 나누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민족⋅종교 분쟁의 씨앗을 뿌린 곳도 바로 런던의 외무성 집무실이었다. 런던은 인류 문명의 발전을 이끈 영광의 도시인 동시에, 제국주의적 폭력과 수탈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역사의 죄인이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폭격의 상흔을 딛고 현대의 용광로로: 대런던계획과 문화의 공존



20세기에 접어든 런던은 또다시 전쟁의 포화와 대기 오염이라는 현대적 재앙을 마주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체펠린 비행선(Zeppelinluftschiff) 공습으로 시민들은 미증유의 공포를 겪었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나치 독일의 무차별 폭격으로 시가지가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여기에 산업혁명 이래 가득했던 화석 연료의 매연이 겹치며 치명적인 대기 오염이 도시를 덮쳤다. 특히 1952년 12월의 ‘런던 대스모그’는 발밑조차 보이지 않는 최악의 환경 재앙을 유발하여 무려 1만 2천여 명의 귀중한 목숨을 앗아 갔다.


이 과밀과 파괴의 수렁에서 런던을 구원한 것은 1944년부터 가동된 ‘대런던계획(Greater London Plan)’이었다. 전쟁의 상흔을 복구하는 동시에, 인구 집중과 건물의 과밀 상태를 해소하려는 거대한 도시공학적 도전이었다. 이 계획의 골자는 ‘녹지대 지정(그린벨트)’, ‘뉴타운법’, ‘직주근접(직장과 주거의 일치)’의 세 가지였다. 런던 중심부 외곽 30~50킬로미터 일대에 울창한 녹지대를 지정해 무분별한 도시 확장을 막았고, 그 바깥쪽에 스티버니지, 할로 등 8개의 계획적인 ‘뉴타운’을 건설했다. 이 직주근접 모델은 전 세계 현대 도시 계획의 위대한 교과서가 되었다.

현대의 런던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에너지는 바로 문화적 역동성이다. 런던의 문화는 ‘가장 고집스러운 클래식Classic(전통⋅고전)과 가장 파격적인 아방가르드Avant-garde(현대⋅전위예술)의 우아한 충돌과 융합’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 시절부터 이어져 온 연극 문화는 오늘날 웨스트엔드West End라는 거대한 뮤지컬 극장가로 발전해 뉴욕 브로드웨이와 함께 세계 공연 예술의 양대 산맥을 이룬다.

반면,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있던 옛 뱅크사이드 화력발전소를 개조한 테이트 모던Tate Modern 미술관은 전 세계에서 가장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현대 미술 작품들로 채워져 있다. 낡은 산업 유산에 문화적 숨결을 불어 넣어 완전히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내는 런던 특유의 유연성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유연성은 음악과 패션에서도 발휘된다. 런던은 비틀스, 퀸으로 이어지는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베이스캠프였으며, 1970년대에는 기성세대의 엄숙주의에 반기를 든 하위문화인 ‘펑크 록(Punk Rock)’의 발상지이기도 했다. 신사들의 고장에서 가장 반항적인 하위문화가 탄생했다는 점은 매우 역설적이다.

무엇보다 오늘날의 런던은 전 세계에서 몰려든 이민자들이 가져온 문화가 매끄럽게 녹아든 거대한 용광로(Melting Pot)다. 과거 대영 제국 시절 지배했던 식민지의 후손들인 인도인, 파키스탄인, 자메이카인을 비롯해 전 세계 수백 개국에서 온 사람들이 이 도시에 둥지를 틀었다.

길거리의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영국의 선술집(Pub)에서는 전통 에일 맥주와 함께 인도식 치킨 티카 마살라 커리가 자연스럽게 국민 음식으로 소비된다. 과거 제국주의 역사의 과오로 인해 유입된 다양한 인종과 문화적 배경은, 세월이 흐른 지금 역설적으로 런던을 그 어느 도시보다 다양성과 포용성을 갖춘 글로벌 문화의 메카로 탈바꿈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에필로그: 안개와 비의 도시가 건네는 위로



런던을 떠올릴 때 흔히 연상되는 이미지는 우중충한 회색 하늘, 도시를 흐릿하게 감싸안는 안개, 그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내리다 그치기를 반복하는 흩뿌리는 빗방울이다. 기후학적으로 런던은 서안 해양성 기후에 속해 맑고 쾌적한 날보다 흐린 날이 더 많다.

그러나 이 어둡고 축축한 날씨야말로 런던이라는 도시의 내면을 완성하는 마지막 조각이다. 화려하고 찬란한 햇빛 아래서는 감추어지기 마련인 영혼의 무게가, 흐린 하늘 아래서는 고스란히 표면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빗물에 젖어 검게 빛나는 아스팔트 위로 붉은색 이층 버스가 선명한 궤적을 그리며 지나갈 때, 빅벤의 묵직한 타종 소리가 낮은 구름 사이로 울려 퍼질 때, 런던은 비로소 특유의 우울하면서도 깊이 있는 아름다움을 뿜어낸다.

그 비가 그친 뒤, 구름 사이로 잠깐 고개를 내민 석양이 템스강 물결과 타워 브리지의 석조 벽면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순간의 극적인 감동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다. 그것은 마치 수많은 재앙을 견뎌 내고, 영광과 잘못의 세월을 통과해 온 도시가 살아남은 자들에게 건네는 따뜻한 위로와도 같다.

지형이 터를 제공하여 도시의 씨앗을 뿌렸고, 역사가 피와 땀으로 뼈대를 세웠으며, 제국의 영광과 과오가 살을 붙였고, 문화가 다채로운 숨결을 불어 넣은 도시. 런던은 단순히 과거의 유산이 박제된 박물관이 아니다. 그것은 거대한 상처와 성취를 한 몸에 안은 채, 템스강의 물줄기처럼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가며 자신을 스스로 재창조해 나가는 거대한 살아 있는 유기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도시의 거리를 걸으며, 인류가 걸어온 길의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목격하고,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을 끊임없이 되짚어 보게 되는 것이다. ■


〈참고문헌〉
* 『30개 도시로 읽는 세계사』, 조 지무쇼 저자(글)⋅최미숙 번역⋅진노 마사후미 감수, 2020, 다산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