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사관의 진실 | 환단고기가 처음 밝혀 주는 역사 진실(12)

[역사X파일]

환단고기는 인간이 천지광명을 체험하며 살았던
창세 역사 시대인 ‘환단 시대 이래
한민족의 역사 이야기책’이다!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우리 역사, 문화의 원형을 밝혀 주는 보배로운 사서이다. 특히 환단고기는 다른 사서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역사 사실이 많이 실려 있다. 『환단고기 역주본』(상생출판)의 해제 편에서는 ‘환단고기에서만 전해 주는 새로운 역사 진실’이라고 하여 이를 52가지로 정리하여 밝혀 주고 있다. 이를 중심으로 환단고기의 진정한 역사적 가치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33 고구려 열제의 연호를 밝혀 준다!



『환단고기』에서는 고주몽 성제를 비롯하여 고구려 몇몇 제왕의 연호를 밝혀 준다. 연호年號는 군주君主 제도하에서 임금 자리에 오른 해부터 물러날 때까지 치세 연차治世年次에 붙이던 칭호이다. 종주국이 사용하고, 조공을 바치는 속국은 종주국의 연호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통례였다.

연호는 하나의 세계관이다. 자신의 연호가 없고 종주국의 연호를 따라서 사용하는 것은 대국의 세계관을 수용한다는 의미이고 이것은 자연스럽게 정치, 문화, 경제의 종속으로 이어졌다. 그러므로 고구려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는 것은 곧 당시 동북아를 지배한 대제국이었다는 증거이다.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망할 때까지 모든 열제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이 중에서 고구려 장수제 때의 연호는 건흥建興이다. 건흥 연호는 1915년 충북 충주시 노은면에서 출토된 불상의 광배명光背銘
에 나타나 있다. 이 고구려 불상에 ‘건흥오년세재병진建興五年歲在丙辰’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한때 백제 불상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성스러운 빛을 형상화한 배광背光, 불광佛光이다. 광배光背는 신성한 존재로서의 위대함과 초월성을 상징한다.



그런데 광개토대왕릉비문에 따르면 광개토열제는 임자년인 412년에 붕어하였다. 즉위년 칭원법稱元法에 따라 이 해를 장수왕 즉위 원년으로 할 경우 장수왕 5년은 병진년이다. 따라서 불상 광배명과 『태백일사太白逸史』를 통해 ‘건흥’이 장수왕 때의 연호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환단고기桓檀古記』의 사료적 신빙성을 입증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34 고주몽의 출자와 혈통에 대해 분명히 밝혀 준다!


稾離郡王高辰(고리군왕고진)은 解慕漱之二子也(해모수지이자야)오
沃沮侯弗離支(옥저후불리지)는 高辰之孫也(고진지손야)니 皆以討賊滿(개이토적만)
功(공)으로 得封也(득봉야)라.
弗離支(불리지)가 嘗過西鴨綠(상우서압록)이라가
遇河伯女柳花(우하백녀유화)하야 悅而娶之(열이취지)하고

生高朱蒙(생고주몽)하니 時則壬寅五月五日也(즉임인오월오일야)오
乃漢主弗陵元鳳二年也(내한주불릉원봉이년야)라.
弗離支(불리지)가 薨(붕)하고 柳花率子朱蒙(유화솔자주몽)하야
歸于熊心山(귀우웅심산)하니 今舒蘭也(금서란야)라.

고리군稾離郡의 왕 고진高辰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고, 옥저후沃沮侯 불리지弗離支는 고진의 손자이다. 모두 도적 위만을 토벌한 공으로 봉토를 받았다. 불리지가 일찍이 서압록을 지나다가 하백의 딸 유화를 만나 기뻐하며 장가들어 고주몽을 낳았다. 때는 임인(단기 2255, BCE 79)년 5월 5일이요, 한漢나라 왕 불릉弗陵(소제昭帝) 원봉元鳳 2년이었다. 불리지가 세상을 뜨자, 유화 부인이 아들 주몽을 데리고 웅심산으로 돌아가니 지금의 서란舒蘭이다. (『태백일사太白逸史』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환단고기』에서는 고구려 시조 고추모 성왕의 혈통과 고구려의 개국조로 등극한 과정을 상세히 전해 준다. 주몽은 북부여를 개창한 해모수 단군의 5세손(고손자)이다. 『환단고기』에서는 해모수의 둘째 아들 고진이 고구려후로 봉해졌고 그의 증손자로 고주몽이 태어났다고 말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해모수와 고주몽을 부자 관계로 그리면서 신원을 혼돈스럽게 만들었고 또 그가 알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역사 인물의 신빙성마저 떨어뜨리는 마당에 『환단고기』의 기록은 너무나 명확하게 그의 존재를 밝혀 준다. 『환단고기』의 북부여기北夫餘紀와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는 단군조선의 멸망 후 북부여로 국통이 이어지고 다시 고구려로 계승되는 과정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이로써 잃어버린 우리 역사의 국통맥을 밝혀 주는 『환단고기』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35 연개소문의 선조들 이름을 밝혀 준다!


朝代記(조대기)에 曰(왈) 「淵蓋蘇文(연개소문)은 一云蓋金(일운개금)이니
姓(성)은 淵氏(연씨)오 其先(기선)은 鳳城人也(봉성인야)라
父曰太祚(부왈태조)오 祖曰子遊(조왈자유)오 曾祖曰廣(증조왈광)이니
並爲莫離支(병위막리지)라」
『조대기朝代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연개소문은 일명 개금蓋金이라고도 한다. 성은 연씨淵氏이고, 선조는 봉성鳳城 사람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태조太祚이고, 할아버지는 자유子遊, 증조부는 광廣인데 모두 막리지를 지냈다. (『태백일사太白逸史』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환단고기』의 「태백일사太白逸史」에는 연개소문 할아버지의 이름이 ‘자유子遊’, 증조부의 이름이 ‘광廣’이라는 것도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태백일사」 외에는 어느 사료에도 없는 내용이다. 1923년 중국 낙양에서 출토된 연개소문의 큰아들 남생의 묘지墓誌에는 “남생의 증조부 자유子遊(연개소문의 할아버지)와 조부 태조太祚(연개소문의 아버지)가 모두 막리지莫離支를 지냈다[曾祖子遊·祖太祚, 竝任莫離支.]”라고 기록되어 있다(「천남생묘지泉男生墓誌」). 이것은 『환단고기』 내용의 정확성이 고고학 발굴로 입증된 사례이다.
그러나 강단사학자들은 이를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는다. 그들은 환단고기가 1923년 천남생묘지가 출토된 이후 쓰였고. 묘지의 내용을 베낀 것이라고 주장한다. 오로지 ‘환단고기는 1978년 이후에 쓰인 위서僞書’라는 도그마에 갇혀 모든 내용을 여기에 맞추어서 해석한다. 이들에게는 ‘사료적 가치’니 ‘교차검증’이니 ‘서지학적 검토’니 하는 학문 용어들은 오히려 과분한 치사다.
진실을 이야기하자면, 이들은 학문 양심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학문 권력이나 학문을 빙자한 정치 선전꾼에 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