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 진위 논쟁 - 『환단고기』 역주본 해제 강독

[삼랑대학 특강]
본 특강은 2022년 12월 7일 삼랑대학 교육에서 시행된 『환단고기桓檀古記』 역주본 해제 강독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환단고기』 진위 논쟁의 핵심 문제를 파악하고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환단고기桓檀古記』 역주본 해제 ‘1. 환단고기는 어떤 책인가?’ 파트의 여섯 번째 ‘환단고기 진위 논쟁’ 부분을 다 같이 살펴보겠습니다.

1. 중국에 의해 왜곡된 고대사


먼저 ‘중국에 의해 왜곡된 고대사’ 부분을 먼저 보겠습니다.
사마천 『사기史記』의 대표적 왜곡 사례는 세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본기本紀」에서의 ‘금살치우擒殺蚩尤’, 그리고 「세가世家」 편에서의 ‘기자조선箕子朝鮮’, 그리고 「열전列傳」에서의 ‘위만조선衛滿朝鮮’인데, 이것의 폐해가 굉장히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봉기자어조선 이불신야
封箕子於朝鮮 而不臣也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봉했으나 신하로 삼지 않았다. (『사기史記』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


사마천 『사기史記』에 보면 “기자를 조선에 봉했으나 신하로 삼지 않았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문장 자체로 보았을 때도 결국 ‘조선의 왕으로 봉하지 못했다.’라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리고 ‘신하로 삼지 않았다.’라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아, 기자가 조선에 뭔가 등극하지 못했구나. 전혀 그런 것이 아니구나.’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사대주의에서 비롯한 역사 왜곡과 심화
그런데 이러한 거짓 정보, 거짓 문헌과 기록이 확대 재생산되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게 이제 국내로 들어오게 되는데, 이것은 사대주의에 의한 역사 왜곡과 심화입니다.

윤내현 교수도 “우리 고대사가 잘못 시작된 것은 고려 중기 숙종 때부터였던 것 같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숙종 때면 1095년에서 1105년 사이인데, 이 숙종 시절인 1102년 예부에서 “‘우리나라의 교화와 예의가 기자箕子로부터 비롯하였는데도 사전에 등재되지 못하였습니다. 바라옵건대 그 무덤을 찾고 사당을 세워서 제사를 지내소서.’라고 하니 이를 따랐다.”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고려사』 권63 지 권제17 예5)


이런 연유로 결국에는 평양에 기자 사당을 짓게 됩니다. 나중에 조선의 세종 때는 평양에 단군 사당도 짓습니다. 이 세종 시절을 전후해서 조선 초기에 보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동방에서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은 모두 1천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태종실록 권10)라고 했고, “전조선의 왕은 단군이고 후조선의 왕은 기자다.”(세조실록 권3)라고 했습니다.

흔히 조선의 사대주의는 ‘명明사대주의’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또 하나는 ‘존주사대尊周事大’라고 합니다. ‘주나라를 존중하는 사대다.’라고 하는 것인데, 이 ‘주나라의 무왕이 기자를 봉했다.’라고 하는 것을 철석같이 믿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이 조선이 문명화되었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결국 ‘단군 천 년, 기자 천 년이 되었다.’라고 하는 것인데,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조선 시대에는 역사 말살책을 씁니다.


‘고대 사서 수서령收書令’, 또는 ‘수거령收去令’이라고 하는데요. 세조⋅예종⋅성종 50년에 걸쳐서 우리의 단군조선, 그리고 그 이전을 드러낼 수 있는 모든 사서들을 수거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환단고기』 속에 들어 있는 안함로 원동중의 「삼성기三聖記」와 「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 「조대기朝代記」, 「대변설大辯說」 등이 전부 다 수거령을 거치게 됩니다. 그리고 “책을 숨긴 자는 참형斬刑에 처한다.”라고까지 이야기했습니다.

이렇게 세조⋅예종⋅성종 50년을 거치면서 우리 역사가 파괴되고, 결국은 성종 때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완성하게 됩니다. 이 책은 ‘조선 시대 국정 교과서다.’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겠습니다. 『동국통감』을 통해서 기자 중심의 역사책을 편찬한 것입니다. 사서 중 ‘동국’이라고 쓰여 있는 모든 책에는 기자의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즉 태종 때의 역사관을 담은 권근의 『동국사략東國史略』, 세조 때부터 명을 받아서 성종 때 완성한, 서거정 중심의 『동국통감』이 그런 유형의 책입니다. 기자 중심의 역사책이 편찬되어 완성되는 과정에서 수서령을 거침으로써 우리의 온전하고 올바른 역사를 드러내는 책들이 금서화되고 숨겨지고, 불태워지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닉자처참
匿者處斬
숨긴 자는 참형에 처한다. (조선왕조 예종실록 1년)


그러면서 결국에는 기자조선箕子朝鮮, 그리고 기자조선의 끝에 준왕凖王이 있고, 그 준왕을 물리치고 찬탈한 위만의 위만조선衛滿朝鮮, 그리고 거기에서 한사군漢四郡에 이르게 되는 역사관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게 만들어진 기자조선의 폐해라는 겁니다.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기자조선의 끝에 준왕이 있고, 이를 찬탈한 위만과 그의 손자 우거, 이를 정벌한 한 무제와 한사군이 있는 이 역사를 완성하게 된다. 가짜 역사를 완성하였다는 겁니다. 결국에는 중국의 역사 왜곡에서 시작되어 고려 중기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사대주의의 역사 왜곡이 있었다는 겁니다.

2. 일본의 역사 왜곡, 식민사관


이걸 받아서 일제의 식민사관植民史觀이 역사 왜곡을 완성하게 됩니다. 지금이 2022년인데, 일본의 기원이 2682년이라고 합니다. ‘한국은 일본보다 후진국으로 역사도 2천 년밖에 안 된 역사를 가진 나라다.’ 이런 인식과 주장을 맞게끔 하기 위한 일련의 작업을 합니다. 일본의 역사보다 훨씬 줄어든 조선의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 단군조선을 부정하고 단군왕검을 신화로 여기고, 그리고 기자조선도 없애 버리고……. 뭐 가짜 역사니까 없애 버리면 좋지만 그것을 불순한 의도로 없애 버렸다는 겁니다. 그 결과 위만조선과 한사군만 남겨 놓은 그런 역사를 만들게 됩니다.

1920년 조선총독부의 국사교육지침을 보면, ‘옛날에 반도의 북부는 조선朝鮮이라고 불렀다.’라고 해서 여기를 옛조선, 고조선이라고 하고 ‘남부는 진辰이다.’라며 이렇게 바꿔 놨습니다.

이것이 지금 100년 지났습니다. 100년이 지난 시점에서 우리의 모든 역사 교과서를 보면, ‘한반도 남쪽은 단군조선이 아니다.’는 100년 전 일제 시대의 지침에 충실하게 현재 고조선 지도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한반도 북부에 고조선이 있었는데 거기를 한 무제가 침탈해서 한사군을 설치했다.’, 그리고 ‘그것이 420년 동안 유지가 되었다.’, 그러면서 420년이 끝나는 시점을 313년으로 설정해 놨습니다. 이후 ‘320년에 삼한을 정벌했다.’라는 설을 가지고서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가 등장하게 되고, 거기엔 무리수가 있으니까 나중에는 369년으로 바꿔 버립니다.
결국 처음에 얘기한 것은 뭐냐 하면 ‘313년에 한사군이 멸망당하고 7년 후인 320년에 신공황후神功皇后가 삼한, 고구려⋅백제⋅신라를 정벌했다.’라고 하면서 그 주장이 먼저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420년에 200년을 더해 약 600년간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동그라미를 친 것은 일본이 얘기하는 한사군의 범위입니다. 일본은 한강을 포함한 곳을 한사군이라고 지금도 이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현재 이러한 지도를 일본의 교과서에 그리고 있고, 전 세계에서 그것을 받아서 쓰는 곳이 많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역사 말살책
조선 시대의 역사 말살책은 고대 사서의 ‘수서령收書令’이었고, 일제 강점기 때도 그들(일본)에 의해 자행된 역사 말살책이 있습니다. 이것 역시 우리의 고대 사서들을 수거한 ‘수거령’입니다. 물론 수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전국에서 고대 사서를 20여만 권을 압수해서 불태웠다. 남산에서 또는 경복궁에서 불태웠다.”라는 증언이 있습니다.

당시 조선에 머물렀던 미국인 저널리스트 나다니엘 페퍼Nathaniel Peffer의 증언을 보면 “한국의 역사는 절대 엄금이다. 일본인은 즉시 한국의 국사란 국사는 전부 압수하여 불태워 버렸다. 철저히 수색하여 폐기시켜 버렸다. 한국의 국사는 가지고만 있어도 범죄가 됐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분이 영어로 쓴 것을 우리 임시정부의 번역가분들이 번역을 했는데, 영어 원본엔 이렇게 나옵니다.

one of the first of these reforms was to go through all the public archives and private libraries and systematically #collect and burn# korean works of literature and history. (『한국독립운동의 진상』, 나다니엘 페퍼)


Collect and burn! 모아서 전부 불태웠다는 겁니다. 이렇게 ‘Korean Works of literature and history’, 한국에 관한 작품들, 문학, 역사들을 다 모아서 불태웠다는 분명한 증언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대마도 한 곳만 보더라도 고문서류가 6만 6천 매 이상, 고기록류 3,576책 등이 수거되어 불태워졌다는 증언이 나왔습니다.(일본 학자 하라타 사카에루 ‘역사와 현재’, 1981.04.25.)


일본 레이타쿠麗澤대 교수를 역임했던 후지모토 유키오藤本幸夫는 “이등박문伊藤博文(이토 히로부미)이 조선총독부를 은퇴하고 일본으로 올 때 조선 왕실의 기증이라면서 규장각 사서를 몇 수레나 일본으로 가져왔다. 일본 전역에 5만여 권의 한국 고대 사서가 있다.”는 얘기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다섯 군데 조사한 것이 거의 3천 종 5만여 권이 된다는 겁니다. 다섯 군데 조사한 것이 그 정도이니 더 많은 곳을 조사하면 더 많은 책들이 나오겠죠.

박상국 한국문화유산연구원장은 “이 책들은 목록이 전부 다 공개된 것이 아니다. 궁내청 쇼료부書陵部에 한국 도서가 얼마나 있는지 진짜 규모는 아무도 모른다. 숨겨 놓은 도서 목록이 따로 있다는 것이 어떤 재판 결과에서 밝혀졌다.”(박상국 한국문화유산연구원장, 2024.07.30. 조선일보 기사)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제가 51종에 20만 권 사서를 압수했다는 것은 절대 과장이 아니고, 사실은 51종이 아니라 거기에 숨겨진 목록이 더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조선사편수회의 역사 조작


일본은 수거령을 내려서 수십만 권의 책들을 수거하고 난 다음에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역사를 만들게 됩니다. 1922년 조선사편찬위원회, 그리고 1925년에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가 생기면서 약 16년간에 걸쳐 일제는 천문학적인 액수를 들여서 일본어로 만든 35권, 2만 4천 쪽 분량, 거기에 부록 두 권까지 해서 조선의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조작을 했다는 겁니다. 이러한 일제의 식민사학이 해방 이후에 한국 사회에 그대로 계승되었습니다.

경성제국대학 교수요 조선학회의 대표격인 다카하시 토오루高橋亨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1950년대에 연세대에서 만든 ‘동방학지’ 제1집을 읽고 한국 사학계를 평했습니다. “한국에서의 동방학 연구는 자기들이 깔아 놓은 레일 위를 달리고 있으며, 따라서 일제 시기의 조선 연구와 금후에 한국에서의 조선 연구 사이에 단층은 없다.”라고 했습니다. 서로 어긋나는 게 없고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더라, 완벽히 계승되어 있더라는 겁니다. (김용섭 교수,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 중)

일제가 깔아 놓은 레일을 가는 학자들, 신석호
일제가 깔아 놓은 레일 위를 가는 학자들은 이병도李丙燾와 이기백李基白, 노태돈盧泰敦, 송호정宋鎬晸, 그리고 지금의 젊은 사학도들까지 연결되고 있습니다. 이병도의 경우 조선사편수회의 명단에 그의 이름이 분명하게 나와 있죠. ‘이병도는 실제적인 친일을 한 적이 없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사람도 있는데, 실제로는 1943년 매일신보에 쓴 글을 보면 “일본 제국의 학도병이 되는 것은 광영이며 이보다 더 큰 감격이 없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신석호申奭鎬는 덜 알려져 있지만 어떻게 보면 더 악질이죠. 신석호는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여 조선 시대 전기를 정리하는 촉탁 수사관, 수사관보를 지냈습니다. 광복된 해인 1945년에 지금 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의 전신인 국사관國史館을 창설하게 됩니다. 이병도와 신석호는 광복 후 친일 세력이 다시 집권하자 조선사편수회의 경력을 발판 삼아서 역사학계를 장악해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하나뿐인 정설로 승격시키게 되는데요.

신석호의 원래 이름이라고 할까요? 창씨 개명된 이름은 데라타니 슈죠寺谷修三입니다. 그는 미 군정기인 1946년 3월에 설립된 국사관을 거쳐서 건국 직후 대한민국에서 국사편찬위원회의 창립에 진력하게 됩니다. 광복 후에 성명을 복구해서 옛날 명칭으로 돌아온 것이 바로 신석호입니다.

그에 대해 이덕일 교수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사무국장 신석호가 총괄했는데, 국사 편찬의 역사를 보면 신석호의 재임 기간을 1929년 4월에서 1961년 1월 21일이라고 적어 놓고 있다.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가 조선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를 계승했다고 당당하게 밝혀 놓고 있는 셈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조선사편수회라고 하는 것이 해방 때까지 존재했는데요. 그러고 나서 여기에 있는 사료들을 모아 가지고 ‘우리 역사서를 좀 더 정리를 해야 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만든 것이 미 군정 때 ‘국사관’이고, 이후 몇 년 뒤에 ‘국사편찬위원회’로 이름을 바꿉니다. 편찬위원회라고 하는 것이 생각나죠? 조선사편수회 바로 이전에 1922년에 조선사편찬위원회라고 했잖아요. 이제 우리 역사니까 ‘조선사’ 대신 ‘국사’라고 한 겁니다. 그래서 조선사편찬위원회, 조선사편수회, 그리고 그것이 국사관, 국사편찬위원회로 바뀌었는데 그 흐름이 바로 계승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겁니다.

일본 학자가 논문을 썼는데 거기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일본 통치기의 조선사 계통이다.’라고 하는데, 그 계통에 나카 미치요那珂通世, 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 이나바 이와키치稲葉岩吉,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이마니시 류今西龍까지 나오죠. 그다음이 누구냐면 신석호입니다.

일본 통치기의 조선사학 계통이 신석호로 계승되었음을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신석호의 단군관을 보면 그것을 명확히 알 수 있는데, 신석호 전집을 보면 “단군이 조선을 개국하고 나서 아사달에 들어가서 산신이 되었다. 이것을 역사적 사실로 믿을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삼척동자도 믿지 아니할 것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목이 ‘단군신화 시비’인데요. ‘역사적 사실로 믿을 사람이 어딨느냐. 삼척 동자도 믿지 않는다.’ 이거는 일본 학자들보다 더 과격한 그런 언사가 쓰여 있다는 겁니다. 한국인이 아니라 데라타니 슈죠죠.

한국역사연구회와 기관지 <역사와 현실>

이 국사편찬위원회가 지금 어디까지 와 있는가?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이 김인걸이라는 교수인데 이분이 뭐라고 했냐면 작년 전라도 천년사 편찬위원회에서 “몽고와의 전쟁 이후 새로운 정체성의 기반이 된 단군 민족의식이 자리 잡았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몽고와의 전쟁 이후에 단군 의식이 나왔다 하는 식으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전라도 천년사는 당초 천 년 역사를 기록하려다 편찬 범위를 넓혀서 5천 년 역사를 기록하게 됩니다. 그래서 집필진도 112명에서 213명으로 늘리고 예산도 24억 원으로 증액했습니다. 여기에는 뭐가 담겨 있냐? ‘단군은 신화다.’, ‘고조선의 남쪽은 진이다. 그러니까 전라도도 진국이다.’ 이런 내용들이 들어갈 것이 불을 보듯 뻔한 겁니다.

전라도 천년사든 또 옆에 있는 경상도 천년사든 역사를 보는 시각 자체에 문제가 있고, 요즘에는 김해 역사를 발간한 김해 지사도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왜냐? 일제의 식민사관으로 그 지역의 향토사를 정리하려다 보니 결국에는 모든 책들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한반도 남쪽은 단군조선이 아니라는 100년 전 지침에 충실하게 전라도사도 그렇게 완성이 될 것이라는 겁니다.

김인걸 씨는 원래 한국역사연구회 회장을 역임했는데 이 한국역사연구회도 1980년대 후반에 나왔습니다. 이 시기에 나왔다는 건 뭘 의미하는가? 1986년에 『환단고기』가 출현하고 세상에 알려져서 100만 부 이상이 팔렸습니다. 그렇게 『환단고기』에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니까 위기의식을 느껴서 나온 단체들이 전부 다 이 1980년대 후반에 나왔어요.

‘한국역사연구회’의 취지문에 “우리 모두 새로운 각오로 단결하자.” 이렇게 나옵니다. 이게 뭡니까? ‘단결해 가지고 민족사관을 몰아내자.’라는 의식으로 만든 게 한국역사연구회입니다. 이곳의 기관지가 〈역사와 현실〉인데, 최근에 기고한 여러 사람들 가운데 장신이라고 하는 사람이 2020년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유립의 계연수 날조기’라고 해서 “이유립은 단단학회의 전신으로 단학회라는 걸 설정했다.”라고 썼습니다. “설정했다.”, 이건 없는 걸 만들어 냈다는 주장입니다. 이런 글을 버젓이 기관지의 논문으로 싣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나중에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발탁이 되어 인문학부 교수로 들어갔습니다. 이 부분은 조금 뒤에 살펴보겠습니다.

4. 제국 대학 출신들이 장악한 한국 역사학계


일제 시대에는 일본에 충성하는 인물들을 배출하기 위해 제국대학을 만들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우리나라 조선에 있었고 나머지는 전부 다 일본 열도에 있었습니다. 조선에 있던 대학이 ‘게이조京城 대학’, 한자로 보면 경성 제국 대학京城帝國大學이고 이게 나중에 서울대학교가 됩니다.
이 경성 제국 대학에 있었던 사람들이 전부 다 들어와서 우리나라 학술 부분을 장악하게 됩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됐는데, 바로 다음 날 이 제국 대학 출신들이 모두 모여서 “우리가 모든 부분을 잡자.”라고 합니다. 해방 이후로 새로운 개척을 해야 되니까 좋은 의도도 있었겠죠. 그런데 그렇지 않은 부분이 많았다는 겁니다.

이들이 해방 다음 날인 8월 16일에 모였는데 그중에서도 역사⋅철학 부분을 누가 맡았느냐? 바로 이병도李丙燾라는 겁니다. 제국 대학은 아니지만 와세다 대학 출신의 이병도가 역사⋅철학이라는 부분을 장악했습니다. 이게 조선학술원朝鮮學術院입니다. 그 조선학술원이 현재의 대한민국 학술원이 됩니다. 이 대한민국 학술원은 30년 이상 학업에 큰 기여를 한 사람만이 회원이 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학술원의 지금 수장이 바로 이병도의 손자인 이장무李長茂입니다. 이병도의 손자가 지금 대한민국 학술원을 이끌고 있다는 겁니다.

일제가 깔아 놓은 레일을 가는 학자들, 이기백
다시 넘어와서, 다카하시 토오루高橋亨는 해방 이후에도 한국에 대해 지속해서 관심을 가집니다. 조선사편수회 간사였고 경성 제국 대학 교수였던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와 함께 ’조선학회朝鮮學會‘를 조직했고, 1951년에 ’조선학보朝鮮學報‘를 창간했습니다. 그는 끝까지 식민사관을 버리지 않았으며, 한국학에 꾸준히 영향력을 주려고 했다는 겁니다. 그는 해외에도 제자를 두었는데, 미국 하버드 대학의 와그너 박사가 대표적인 제자라는 거예요.

에드워드 와그너Edward W. Wagner 박사는 군 복무 후 하버드 대학으로 돌아와서 석사 과정을 거치고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이 다카하시 토오루 교수를 스승으로 해서 한국사를 지도받았다는 겁니다. 3년 동안 한국사 지도를 바로 일제 식민사학자에게 받았다는 거예요. 그러고 나서 하버드 대학에 한국어 강좌를 개설하고 한국학연구소를 열게 됩니다.

와그너 교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이홍범 박사에게도 “동학을 공부해 보라.”라는 조언을 할 정도로 한국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 분이지만,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식민사관을 배운 거예요. 그게 한국학에 투영이 된 겁니다. 그다음에 이분이 한 일이 이기백李基白의 『한국사 신론』을 번역해서 하버드 대학 출판부와 일조각에서 동시에 출간하였습니다. 여기 보시면 상생방송에도 나왔지만, 이 번역본 책에 동이東夷를 동방 야만족으로 왜곡 번역하고 있더라는 겁니다. 이거 하나를 보면 열 가지를 아는 거죠. 그래서 이 책에서 수많은 왜곡들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1990년에 와그너 박사와 이기백 교수가 서로 공조한 책도 해당 분야에서 널리 인정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하버드 대학은 미국 동부에 있는데, 서부로 가보면 유명한 대학 UCLA(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가 있습니다. LA의 UCLA에 한국학 연구소가 있는데 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분이 한국학의 대부로 알려진 존 던컨John Duncan이라고 하는 분입니다. 이분이 강의한 영상이 유튜브에서 수십만 건 조회가 되고 있죠.

5. 왜곡된 한국사로 가득한 전 세계 역사 교과서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한국 역사’라는 강의에서 존 던컨 교수는 “한국 역사를 반만년이라고 알고 있잖아요. 그거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라고 하면서 “우리 역사학자들은 한국사 시작점을 언제로 보냐면 기원전 1세기 또는 기원후 1세기까지 한국은 역사 시대로 완전히 진입하지 않았다고 보고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한국학의 대부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한국의 역사는 2천 년도 안 된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이분도 당연히 식민사관에서 영향을 받았겠죠. 이런 사람들이 포진을 하다 보니까 결국 전 세계의 세계사 책들이 전부 다 문제가 됩니다.

최근에 어떤 도생님께서 아이를 가르치려고 세계사 책을 사러 갔는데, 전 세계에 300만 부 이상이 팔렸다는 가장 유명한 세계사 서적의 끝판왕 『더 타임즈 세계사』라고 있거든요. 그 책을 보니까 완전히 역사 왜곡으로 도배되어 있더라는 겁니다. 우리나라에 관한 한은 그렇다는 거예요. 중국과 일본의 역사로 도배되어 있으면서 그 사이에 우리나라의 역사는 없더라는 겁니다.

여기 보시면 한나라 때 ‘낙랑’이라고 쓰여 있잖아요. 저 우측에 보면 낙랑, 현도라고 두 개가 쓰여 있는데, 저 한강 아래쪽에는 일본의 영향인지 모르겠지만 ‘한사군’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전부 다는 ‘Han Dynasty’ 영역으로 되어 있어요. 세계사 교과서가 모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또 다른 지도에도 보시면 중국의 식민지나 일본의 식민지였던 사실은 반드시 표기하고 넘어갑니다. 그리고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만주족에 예속되고, 일본령이 되었고……. 이런 것들은 정밀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국의 역사는 침략을 받았던 역사라는 겁니다. 그리고 왜곡된 지도 같은 것들이 가득합니다.

6. 해방 이후 일본의 역사 왜곡


해방 후에도 일본의 역사 왜곡은 계속되었는데요. 아까 보셨던 다카하시 토오루가 와그너 박사의 스승이 되어서 가르쳤다고 하는데, 그 사람만 가르친 게 아니겠죠. 그중의 하나가 김원룡金元龍 교수입니다.

해방 세대 역사학자로 식민주의 역사관 극복에 힘을 쏟았던 김용섭金容燮 교수가 서울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데, 당시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김원룡 교수가 수업에 찾아와서 “일제 때 경성제대에서 내가 교육을 받았던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 선생님인데, 김 선생님 강의를 참관하고자 하시기에 모시고 왔어요. 그래도 되겠죠?”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렇게 수업에 들어왔고, 결국 김용섭 교수는 1975년 서울대를 떠나 연세대 사학과로 옮겨서 역사 교육을 하게 됩니다.


이걸 보면 스에마쓰 야스카즈는 해방 후에도 국내로 들어와서 자신의 제자들을 이런 방식으로 관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잖아요. 그렇게 해서 나온 게 ‘원삼국론原三國論’입니다. 이 김원룡 교수가 ‘원삼국, Proto-Three Kingdoms’이라고 해서 한국은 CE(기원후) 300년까지는 원시 시대였고 그 이후에 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주장합니다. 이게 전 세계에 알려져 있습니다. 대영박물관의 한국관에 가보면 한⋅중⋅일 역사 연표가 있습니다. 거기에도 ‘Proto-Three Kingdoms’, ‘한국은 CE 300년까지가 Proto, 원시 시대다.’라고 지금까지도 이렇게 되어 있는 거죠.


다카하시 토오루는 1950년 조선학회를 창립하고, 10년이 지나서 1961년 12회 조선학회 때 열 명의 한국학자들을 초청했습니다. 한일 간에 정식 외교 개통이 되기 이전에 학자들부터 보내 민간 교류를 활성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우리 학회의 대표가 바로 이병도예요.

이 당시 1961년의 교류를 보시면 한국 학자들의 좌장은 이병도, 조선학회의 좌장은 다카하시 토오루입니다. “다카하시 토오루는 열 명의 한국 학자들을 마치 고향 사람 만난 듯이 기뻐하는 내색으로 반겨 주었으며, 한국의 학자들도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도 있어 반가운 인사와 기쁜 표정으로 서로 얼싸 안았다.”라고 합니다. 이건 실제로 이병도가 쓴 글입니다.

성삼제成三濟 계명대 교수는 2021년 대한사랑⋅세계환단학회 국제학술문화제에 토론자로 참석하여 “2001년 일본 학자들과 일본 언론인들을 만나 뵙고 하는 과정에서 제가 한국에서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에 대해 ‘대책반 실무반장’을 맡고 있다고 하니까, 어느 한 분이 진지하게 저한테 하시는 얘기가 ‘우리 일본이 조선을 식민 통치하기 위해서 역사를 조작해 놓은 게 있다. 당신네 한국이 해방되면 당연히 복원될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가 지나도 그대로 있더라. 그래서 우리 일본을 탓하기 전에 당신네들 거를 먼저 봐라.’라고 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충격을 저는 아직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일본인이 이렇게 얘기하더라는 거예요.

일제가 깔아 놓은 레일을 가는 학자들, 노태돈

결국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 우리 역사학계를 누가 장악하고 있습니까? 이병도의 행적을 보면 1955년에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1960년에 문교부 장관과 학술원장. 쭉 이렇게 이어지고 있잖아요. 일제가 깔아 놓은 레일 위를 이렇게 달려가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거기에 누가 있냐면 노태돈이 있습니다. 이병도, 이기백 이후에 노태돈盧泰敦이 있습니다.

노태돈은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인데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환단고기』는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나라의 뿌리 상고사 자체를 복원하는 데 자료적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환단고기』는 19세기 말 20세기 초미에 쓰인 책이다. 그런 만큼 이 책을 통해서 상고사를 복원할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환단고기』를 위서僞書라고 단언을 하고 있는 것이죠. 이런 사람들이 전부 이렇게 『환단고기』를 폄하하고 있습니다.


2022년 4월에 노태돈 교수가 부산에 가서 강의를 했는데, “중국의 만리장성이 여기 평안도까지 이르렀다. 북한은 이 장성이 만리장성이라는 증거가 나올까 봐 발굴을 하지 않고 있다.”는 황당한 주장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역사 왜곡을 하고 있습니까? 지금 사이버 외교 단체 〈반크〉에서 만리장성이 북한 땅으로 들어온 걸 전부 신고하고 있고 잘못됐다고 얘기를 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노태돈으로 대표되는 우리 학계가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일제가 깔아놓은 레일을 가는 학자들, 송호정
이제 노태돈에서 송호정宋鎬晸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노태돈이 석사 때부터 지도했던, 원래 부여사를 연구하고 싶어 했던 송호정을 격려해서 고조선사를 연구하게 합니다. 그저 순수하게 ‘고조선을 열심히 연구해 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윤내현 교수가 치달아서 새로운 고조선을 얘기하고 있으니 자기 제자를 내세워서 반박을 하고 싶은 거죠. 그래서 고조선 박사를 만들어서 박사 논문을 쓰게 합니다. 박사 논문을 쓰고 나와서 송호정 교수가 한 것은 “단군은 신화다. 단군은 실재한 역사가 아니다. 요하 문명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고조선 문화를 대표하는 전성기는 바로 위만조선 시대다.”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이 그대로 학계에 반영이 되어서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가 보시면 국조國祖가 없어요. 고구려⋅백제⋅신라⋅가야 부분에 국조가 쓰여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단군조선에도 ‘단군이 건립했다.’는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건국 시기 BCE 2333년이라는 것도 역사 연대표의 맨 앞쪽에만 있고, 실제 고조선실로 들어가면 ‘BCE 2333년에 건립했다.’는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결국에는 건국조가 다 빠져 있고, ‘한반도 북부에 420년 동안 낙랑이 있었다.’라는 이야기만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게 학계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잖아요.

7. 환단고기 역주본 출간과 위서론의 등장


2012년 『환단고기 역주본』이 출간됩니다. 그리고 『환단고기』의 역사와 문화가 풍미하게 되고, 10년 동안 〈환단고기 북콘서트〉가 상생방송을 통해서 세상에 전해집니다. 그와 함께 식민사관을 비판하는 책들이 2010년대를 전후해서 굉장히 많이 나오게 되거든요. 그러면서 그때 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2014년에 『우리 안의 식민사관』이라는 책을 이덕일 교수가 냈는데, 그 책 속에 김현구 고려대 명예교수가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을 추종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여 명예훼손으로 소송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2017년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게 됩니다. 그 와중에 2016년 6월 미사협(미래로 가는 바른 역사 협의회)이 발대식을 가졌습니다.


이때 강단사학계의 사람들은 뭘 하고 있었냐 하면 경희대에서 〈10회 콜로키움 : 위서의 사회사〉를 열고 『환단고기』는 위서라는 내용을 주제로 젊은 학자들을 동원해 발표를 하게 합니다. 이 행사의 주관이 어디라고 되어 있습니까? ‘한국 고대사 고고학 연구소 웹진 팀(젊은 역사학자 모임)’이라고 나오잖아요. 젊은 역사학자들을 홍위병紅衛兵처럼 내세우기 시작한 것인데, 그때의 대표는 경희대의 조인성 교수입니다.

강단사학계의 반발
2016년에 나왔던 또 황당한 논문 중의 하나가 뭐냐면 〈정말 일제는 한국 고사서를 불태웠을까?〉라는 논문입니다. 이 논문에서는 ‘51종 서적의 대부분은 애국 계몽 서적이고 일제가 압수한 서적의 분량은 10만 권을 넘지 않는 수준이다.’라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10만 권이나 20만 권이나 도긴개긴인데, 말도 안 되는 그런 논문을 쓴 겁니다.


이걸 쓴 사람이 누구냐면 나중에 〈이유립의 계연수 날조기〉라는 논문을 쓰게 되는 장신이라고 하는 사람이죠. 이 사람이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인문학부 교수로 갔습니다. 인문학부 교수를 뽑을 때 이 사람의 논문 같은 걸 보잖아요. 〈이유립의 계연수 날조기〉 이런 걸 썼구나라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교수로 임명을 한 것입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무엇을 했냐? 환단고기가 위서라고 얘기하는 것, 그다음에는 식민사관을 비판한 책을 출판 금지시키는 것입니다.


그 실례實例로 출판을 금지시킨 책이 바로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에서 만든 연구서 〈조선사편수회 식민사관 비판1〉, 〈독립운동가가 바라본 한국 고대사〉, 〈이병도, 신석호는 해방 후에 어떻게 한국사학계를 장악했는가?〉 〈한국 실증주의 사학과 식민사학〉 4종입니다. 원래 이 4종의 연구서는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진흥사업단의 공모에 응시해서 낸 거였습니다. 그 공모의 주제가 바로 ‘일제 강점기 민족 지도자들의 역사관과 국가 건설론 연구’였습니다.

그러니까 연구서를 충분히 책으로 낼 수가 있는 건데, 내고 나니까 출간을 금지시키고 연구비를 환수하려는 겁니다.

잘 아시겠지만 여기뿐만 아니라 인하대 고조선연구소도 연구비를 환수당했습니다. 일제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 만들었던 일본어로 된 조선사 35권을 전부 다 번역하라고 해서 했는데, 번역한 것을 세상에 내선 안 된다고 하면서 연구비를 환수하겠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죠. 이런 일제 강점기에나 일어날 수 있는 탄압들이 21세기에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8. 민족사학을 말살하는 젊은 홍위병들


조선 시대와 일제 강점기의 역사 말살책이 결국에는 『환단고기』류에 속해 있는 책들의 수거령이었습니다. 지금의 강단 주류 사학계의 역사 말살책 역시 ‘환단고기 위서론僞書論’입니다. 이제는 옛날처럼 수거는 못 하는 시대잖아요. 그래서 수거 대신에 ‘환단고기를 위서로 몰아라.’라는 명령이 강단 주류 사학계에 떨어진 것이죠. 그래서 사학과에 들어가면 무조건 ‘환단고기는 위서다.’라는 얘기부터 듣게 됩니다.


최근에 〈이것이 K-정신이다〉라는 글이 한겨레신문에 연재가 됐어요. 몇 분의 필진 중에 이기동李基東 교수가 나와서 K-정신에 대해 얘기를 할 때 『환단고기』를 언급했습니다. 이기동 교수는 ‘이 책을 읽고 한국인을 보면 다 멋있어 보입니다. 이 책을 읽지 않았던 것을 참회합니다.’ 뭐 이런 내용을 얘기했습니다.

그랬더니 “나도 발언 기회를 달라.”고 하면서 한승훈이라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 종교학자가 나와서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합니다. “근래의 정밀한 연구들에 의하면 『환단고기』는 근대 이후 단군 계열 종교들에서 활발하게 생산된 역사서 형식의 경전들을 모방하여 1960~1970년대 사이에 성립된 것이 명백하다. 거기에 어떤 심오한 철학이 있다면 그것은 수천 년 전 조상들이 아니라 박정희 시대의 한국인들의 산물이다.” 이렇게 써 놨어요.

이기동 교수는 유학을 공부하여 논어⋅맹자⋅중용⋅시경⋅서경⋅ 역경 등 사서 삼경을 전부 국내 최초로 완역하신 분입니다. 그분 이전에는 국내에 완역본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유학 5천 년』이라고 하는 역사를 다시 썼잖아요. 이걸 정리할 수 있는 유학자가 이기동 교수밖에 없다는 거죠. 그래서 ‘유학이나 동양의 고전들을 전부 다 정리해 보니까 그 결론이 『환단고기』더라.’라고 하는 겁니다. 그게 그냥 단순하게 『환단고기』만 읽어서 나온 결론이 아니라는 거죠.

위서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까 얘기한 한승훈, 그리고 젊은 역사학자 위가야, 기경량, 그리고 안정준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2016년 당시에 역사비평에서 이런 내용들을 썼고요. 2018년에 소설가 이문영 씨가 『유사 역사학 비판』이라는 책에서 '환단고기와 일그러진 고대사'라는 소제목으로 글을 썼습니다. 그래서 2016년, 2017년, 2018년으로 이어지면서 『환단고기』 역주본이 나온 이후로 위서론에 대한 주장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국 고대사』, 『사회부 역사학』, 『유사 역사학 비판』, 『욕망 너머의 한국 고대사』 등이 등장했고 이후에도 책은 계속 나오겠죠. 이런 책들을 쓰고 팟캐스트에서 라디오 방송을 하는 사람들이 『환단고기』를 위서라고 떠들고 있습니다. 기경량, 안정준, 위가야 등이 있습니다.


위가야 이 사람은 가야伽倻를 얘기할 것 같지만 임나任那를 얘기하는 사람이죠. 그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추종 학자는 우리나라에도 없고 일본에도 없다.’는 식으로 얘기하면서도 ‘가야는 임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한국 일본의 어디에도 임나일본부 하는 사람 없어요.” 이런 식으로 반박을 하는 거죠. 그리고 또 하나는 ‘한사군 한반도설은 식민사학의 산물인가’라는 논문을 아까 〈역사와 현실〉 같은 부류의 역사 비평 기관지에 냅니다. 결국 동북아역사재단을 비호하는 논문을 쓴 거예요.

동북아 역사재단에 대한 한사군 한반도설로 비판을 하는데, 그게 아니라 ‘동북아 역사재단과 역사학계의 역사관이 식민사학이라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라는 논문을 써요. 이 논문을 써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위가야는 2022년에 보니까 동북아 역사재단 소속으로 되어 있습니다. 참 알 수 없는 일이죠.

9. 결론, 『환단고기』는 진서다


이기동 교수의 위서론 반박은 결국엔 이겁니다. 지금까지 쭉 봐 왔던 것이 뭐냐, 러시아 사학자 부틴Yuri Mikhailovich Butin의 말처럼 ‘일본이나 중국은 없는 역사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런데 한국인은 어째서 원래 있는 역사, 올바른 역사, 진짜 역사를 없다고 그러는가? 도대체 알 수 없는 나라다.’라는 겁니다. 편견偏見에 잡혀 있다는 거죠. 편견을 영어로 Prejudice라고 하는데요. Pre, 미리 판단한다는 거예요. 미리 판단하고 심판하고 재단을 한다는 겁니다. 지금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환단고기』를 보지도 않고서 ‘환단고기는 위서다.’라고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식민사관을 거쳤고, 그러한 교과서들을 보면서 대학생이 되고, 사회로 나와서도 역사서를 보지 않으면서 그때의 선입견이 그대로 박혀 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의 두뇌가 식민사학의 작품이 되어 버린 겁니다. 그래서 이기동 교수도 “저도 환단고기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환단고기는 이미 유력한 강단사학자들에 의해서 위서로 판명된 책입니다. 저도 그들의 판단만 믿고 읽어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환단고기』를 실제로 읽어 보니까 너무나 큰 충격에 빠졌다는 거죠. 그는 또한 “저를 충격에 빠뜨린 것은 바로 『환단고기』에 담겨 있는 우리의 고유의 철학과 사상이었습니다.”라는 내용을 자신이 썼던 『환단고기』 책의 서문에 담기도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런 위서론에 빠져서 코리아 디스카운트Korea Discount, 식민지 멘탈리티(Colonisal Mentality)를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결국은 환단고기에 관한 100건의 논문이 있으면 그중에 90건이 진서론에 관한 책이라는 겁니다. 환단고기가 진서가 아니고서는 이렇게 압도적인 비율로 논문이 나올 수 없잖아요.


그리고 『환단고기』가 위서라고 주장하는 내용들에 대한 수많은 답변들, 해답이 있습니다. 아무리 새로운 주장이 나오더라도 『환단고기』가 진서이기 때문에 분명히 답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이제 마무리를 하자면, ‘지금은 총성 없는 동북아의 역사 전쟁 현장에 서 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부에서 서로 총질을 하고 있죠. 우리가 총질을 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강단사학자들이 지금도 ‘환단고기는 위서다.’라고 하면서 총과 대포를 우리에게 겨누고 있습니다.


‘한국 여성학의 큰 어머니’라고 불리는 이효재 선생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효재 선생이 제주도에 사실 때 이주한 선생이 찾아가 만났는데, 그때의 일을 글로 남기신 게 있습니다. 당시 이효재 선생이 “역사책을 많이 보신다 들었는데 이 책 어떻게 생각하세요?”라면서 책을 내놓았다는 겁니다. 이 책은 ‘어떤 사료’라고만 쓰여 있습니다. 즉 “‘어떤 사료’에 대한 내 생각을 물으시며 눈을 빛내셨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어떤 사료’가 뭐냐? 이것을 올해 2022년 10월에 이주한 선생이 증언을 했습니다. “그때는 책의 내용을 『환단고기』라고 못 썼는데. 이 ‘어떤 사료’라고 하는 것은 바로 『환단고기』였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성학의 대모라는 이분이 『환단고기』를 보면서 마지막에는 “우리가 통일을 하려면 『환단고기』가 필요하다.”라는 얘기를 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또 한 분, ‘여성신학의 대모’라고 할 수 있는 박순경 교수가 있습니다. 이분은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가신 적이 있어요. 나중에 출옥할 때 사진이 딱 찍혔는데 가운데가 박순경 교수고, 그 오른쪽에 계신 분이 이효재 교수입니다.


우리나라 여성신학, 통일신학의 선구자 박순경 교수는 “우리나라 진보적인 식자들은 역사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아. 서구에서 공부를 잘못해서 그럴 거야. 한국 사학자들도 민족 시원을 잘 몰라. 그래서 내가 『환단고기』를 보면서 독학으로 공부하는 거야.”라고 하면서 “시대, 인물, 상황이 구체적으로 나온 걸 보면 『환단고기』는 결코 위서가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공부를 많이 하신 분들은 『환단고기』는 결코 위서가 아니라고 합니다. 박순경 교수는 그걸 확인하기 위해 ‘근 1년 동안 상생방송을 보면서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상생방송의 〈환단고기 북콘서트〉를 보라는 거죠. 『환단고기』가 결코 위서가 아님을 알 수 있다는 겁니다.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최영성 교수는 한마디로 이렇게 얘기합니다. “천부경, 환단고기를 부정하는 사람, 그게 학자입니까? 학자예요?”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기동 교수는 대한사랑 문화제에 참석해서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환단고기는 짐승이 사람 되는 대중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환단고기에는 일반 대중이 모여서 합숙하면서 진리를 깨치는 21일간의 수련 과정을 설정하고 있다. 이 수련 과정은 오늘날 매우 중요하다. 이 21일간의 수련 과정이 복원된다면, 짐승이 되어 버린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구원의 빛으로 다가올 것이다. 환단고기에 들어 있는 진리로 오늘날 사람들이 공감하는 진리관을 재창출하고, 21일간의 수련 과정을 오늘날의 상황에 맞게 복원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절체절명의 과제다.”라고 했습니다.

이 절체절명의 과제가 어디에서 완수되고 있습니까? 바로 증산도의 ‘무병장수 선려화 치유 수행’을 통해서 상고 시대 우리의 전통 수행법을 복원하고 있는 과정에 우리는 함께하고 있습니다. 이걸 통해서 인류에게 광명을 줄 수 있다. 이것이 절체절명의 과제다. 우리가 하는 얘기가 아니라, 사회에서 고전을 다 보신 분들이 그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마무리하면서, 위서론에 꺾이지 말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거기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상 마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