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B다시보기 | 상징으로 보는 여행 3회 - 합스부르크 역사의 시작

[STB하이라이트]


강사: 오동석 인문여행작가

들어가는 말


이번 시간에는 비엔나를 중심으로 유럽을 주름잡았던 합스부르크Habsburg 가문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합스부르크 가문만큼 유럽 역사에서 확실한 족적을 남기고 많은 문화적인 사건을 만든 가문은 없을 것입니다. 이 합스부르크 왕가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연달아 배출하고 적극적인 결혼 정책을 통해 영토를 넓혔으며, 오스트리아를 약 600년 동안 지배했습니다.

“남들은 전쟁을 하도록 내버려 둬라. 너,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결혼을 하라.” 전쟁 없이 영토를 넓혀 가는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해 주변 국가에서 조롱을 섞어 한 이 말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모토가 되었습니다.

카를 5세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대표적인 인물이 카를 5세Karl V입니다. 카를 5세는 친가와 외가의 할아버지로부터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지역의 영토를 물려받게 되는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이후에는 영역을 더욱 넓히게 됩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하고 나서 스페인인들이 남북아메리카의 태평양 연안 지역을 식민지로 정복하게 되는데 이 땅까지 모두 포함하게 됩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영역은 지금의 독일권에 해당합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로마를 지배하는 황제가 아니고 독일을 지배하는 황제로 나중에 변질이 됩니다.

펠리페 2세


카를 5세의 뒤를 이은 펠리페 2세Felipe II는 더욱 영토를 넓혔습니다. 펠리페 2세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왕을 겸하게 되는 시기가 60여 년 정도 되는데 이 시기를 거치면서 두 나라가 갖고 있었던 해외 식민지들을 모두 차지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명실상부하게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됩니다. 펠리페 2세가 이런 영토 확장을 기념해서 가장 동쪽에 있는 땅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필리핀Philippines’입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주요 정책


합스부르크는 어떤 정책을 쓰고, 어떤 활동을 하면서 역사를 만들고 문화를 이끌어 나갔을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가 결혼 정책입니다. 이 결혼 정책을 통해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신성로마제국과 오스트리아를 통틀어 20명의 황제가 배출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황금양털기사단’이란 조직의 운영입니다. ‘황금양털기사단’은 현재까지도 남아 있는 기사단으로 유럽의 당대 최고 엘리트 집단입니다. 합스부르크가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 전 유럽의 왕들과 귀족들을 중심으로 이 기사단을 모집했으며, 기사단장은 역대 합스부르크 황제가 연임을 했습니다.

세 번째는 소금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소금은 매우 중요합니다. 샐러리Salary라는 말은 급여, 임금을 의미하는데 이 샐러리는 소금을 사기 위한 돈을 의미하는 ‘Salarium’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유럽의 소금 광산은 모두 합스부르크 왕가가 차지했습니다. 소금의 유통도 합스부르크 왕가의 허가를 받아야 가능했습니다. 이 소금을 독점하면서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음악가 후원입니다. 동양에서도 음악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예악 사상이 있듯이 유럽에서도 음악은 왕실 궁전의 분위기를 높이는 최고의 소재로 활용되었습니다. 합스부르크 왕가도 음악가들의 후원을 굉장히 많이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모차르트, 베토벤, 하이든, 요한 슈트라우스, 브람스 등 많은 음악가들과 예술가들을 후원했습니다. 이런 후원을 통해 왕실 내부에 화가를 두어 합스부르크 왕가의 철학에 맞는 그림을 그리게 했습니다. 당시에는 카메라가 없었기 때문에 그림으로 왕족의 성장 과정이나 중요한 사건들에 대해 그리게 한 것입니다. 또 합스부르크 왕가는 예술가 후원뿐 아니라 작품에 대한 수집도 열성적이어서 미술, 고고학, 보물 등 할 것 없이 분야를 가리지 않고 시대의 작품들을 수집했습니다.

유럽에 가면 많은 미술관과 박물관이 있는데 특히 오스트리아에는 미술사 박물관, 자연사 박물관, 무기 박물관, 악기 박물관를 비롯해서 수많은 박물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스페인을 가면 마드리드에 있는 국립 프라도Prado 미술관을 꼭 방문하는데 이 프라도 미술관의 전시품들도 대부분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집품들입니다. 그래서 유럽의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선 유럽의 왕실 문화를 꼭 알아야 합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사상


합스부르크 가문은 부와 권력을 대대로 지속시키기 위해 사상에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입니다. 이 신플라톤주의는 플라톤 철학에서 나왔지만 플라톤 철학이 확장된 사상으로 신神과의 합일을 강조하는 것이 핵심 내용입니다. 그리고 헤르메스주의(Hermeticism)가 있습니다. 이 헤르메스주의 역시 신과의 합일을 강조하는데 이를 통해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들은 신적인 인물이 되어서 영생을 누리고 영적인 승화를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외모적 특징


합스부르크 왕가 사람들은 외모적으로 독특한 특징이 있는데 바로 턱입니다. 턱이 굉장히 도드라지게 앞으로 나와 있는, 일명 주걱턱이라고 하는 턱의 형태입니다. 주걱턱으로 인해 밥을 먹지 못할 정도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이 주걱턱은 근친혼에 의한 유전병으로 발생하는 외모적 특징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시작


합스부르크 왕가는 스위스의 합스부르크성城 또는 하비히츠부르크성(매의 성)에서 유래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매사냥을 즐겨했던 사람이 매사냥 도중에 좋은 땅을 발견해서 성을 만들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합스부르크 왕가의 시조는 루돌프 1세Rudolf I로 합스부르크 왕가 최초의 신성로마제국 황제입니다. 강력한 영토 확대 정책을 시행하면서 향후 600여 년간 유럽을 통치하는 절대 왕가인 합스부르크 왕가를 탄생시킨 인물입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3명의 대주교와 4명의 왕 혹은 제후들에 의해 선출이 되는데 루돌프 1세의 황제 선출에 유독 반대했던 인물이 보헤미아의 오타카르 2세Otakar II였습니다. 보헤미아는 지금의 체코 땅이며, 오타카르 2세는 단테의 신곡에서 싸움을 잘하는 왕으로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루돌프 1세는 오타카르 2세에게 상대가 되지 못했지만 매복 작전을 통해 루돌프 1세가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합스부르크 왕가가 탄생하게 됩니다.

루돌프 4세


합스부르크 왕가의 부흥에 큰 역할을 한 인물이 역사에 등장하는데 바로 루돌프 4세Rudolf IV입니다. 루돌프 4세는 장인이 되는 보헤미아의 국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를 4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선출 가문에서 합스부르크 왕가를 제외시키자 장인이지만 정적이라 여기고 문서를 위조하게 됩니다.

당시 유럽 사회는 문서 위조가 빈번했다고 합니다. 유럽 최고의 문서 위조 사건은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대제가 로마 제국의 수도를 지금의 이스탄불인 콘스탄티노플로 옮기면서 교황청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서유럽을 다스리는 것을 승인하는 것을 위조한 사건이었습니다. 이처럼 루돌프 4세도 특허장이라고 하는 중요 문서를 가짜로 만들게 됩니다.

그리고 루돌프 4세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위상을 격상시키기 위해 대공작이라는 의미인 ‘대공大公’이란 명칭으로 관직을 만들게 됩니다. 또한 비엔나 대학교를 만들게 되는데 비엔나 대학교는 독일어권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대학교입니다.

카를 4세


루돌프 4세의 장인이기도 한 카를 4세Karl IV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카를 4세의 동상을 보면 오른손에 카를 대학교 설립 인가 증서를 쥐고 있습니다. 당시 대학은 황제에 의해 설립이 인가되었고, 가르치는 분야도 철학, 신학, 법학, 의학 4개였습니다. 알프스 이북 최초의 대학인 카렐 대학교가 카를 4세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가톨릭 신자들의 마음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을 이슬람인들에게 빼앗기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자 카를 4세가 가톨릭을 수호하고 새로운 예루살렘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예루살렘 도시의 모습을 그려 놓은 그림 -유럽에 약 140여 장이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를 구해 프라하에 예루살렘을 본뜬 도시를 만들게 됩니다. 14세기에 계획된 신도시를 만든 것입니다.

이 신도시 안에 구시가지와 프라하성을 연결하는 카를교가 있는데 굉장히 유명한 다리입니다. 지금은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다리가 되었습니다. 약 510미터 정도 되는 돌다리인데, 이 돌다리를 대충 만든 것이 아니라 숫자의 법칙을 가지고 만들었습니다. 다리를 만들 때 1, 3, 5, 7, 9, 7, 5, 3, 1이라는 숫자의 법칙으로 다리의 굴곡진 형태를 만들었는데 이 숫자도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1357년 7월 9일 5시 31분에 카를 4세가 다리의 초석을 놓으면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다리가 튼튼해지기를 바라면서 돼지 피를 뿌리면서 의식을 행하고 건축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다리를 지을 때 튼튼해지기를 기원하는 의식으로 돼지 피를 뿌린다고 하는데 카를 4세도 이런 동양적인 사고방식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또 카를 4세는 건축하는 데 600년이나 걸린 고딕 양식의 ‘성 비투스 대성당’을 건축하기도 합니다. 유럽의 성들은 성당을 건축하는 데 있어 전쟁이나 전염병의 시기를 피해 건축하기 때문에 몇백 년이 걸리는 게 보통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