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

[이 책만은 꼭]

영웅의 그늘을 벗긴 청춘 안중근의 마지막 일주일


지은이 김훈
1948년 무자년 5월 5일 서울 태생으로 본관은 김해이다. 부친 김광주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 휘하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고려대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1973년부터 한국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하였고 이후 1994년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을 시작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2001년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내면세계를 깊게 통찰해서 지은 스테디셀러 『칼의 노래』(동인 문학상 수상작)로 대중적 사랑을 많이 받았고, 이후 출간하는 작품마다 관심을 받으며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꾸준히 새로운 작품들을 집필하고 있다.

늘어트린 문장이나 형이상학적인 표현을 거의 쓰지 않고, 매우 일상적인 단어들과 단문 형식 문장만 사용해서 문장 전체가 한 번에 읽히는 특징이 있다. 이런 특징은 『칼의 노래』에서 두드러진다. 한국어를 다루는 능력에서만큼은 그 누구와도 차원을 달리하는 수준으로 이어령 교수로부터 어휘의 달인이라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현재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소설가, 문학 평론가이다.

이등박문을 만나심

이등박문伊藤博文은 명치를 도와 일본의 근대화에 앞장서고, 조선에 통감부를 세워 한일합방을 주도한 인물이라. 그가 일찍부터 상제님의 성예聲譽를 접하고 여러 번 뵙기를 청하거늘 기유년 봄에 상제님께서 형렬을 데리고 친히 통감부를 찾으시니라.

상제님께서 형렬과 함께 안내를 받아 통감의 집무실에 드시니 이등박문이 상제님의 용안을 뵙자마자 정신을 잃고 고꾸라지니라. 잠시 후 그가 깨어나매 형렬이 “대왕인 그대가 어찌 천자를 보고 쓰러지느냐!” 하니 이등박문이 놀라며 “천자라니 무슨 천자인가?” 하거늘 형렬이 “조선의 천자다.” 하고 다시 “○○이 있느냐? 그것이 있어야 우리 선생님과 대면하지 없으면 상대를 못 한다.” 하니 이등박문이 기세에 눌려 말을 더듬는지라

형렬이 “네가 어디서 벼슬을 사 왔든지 훔쳐 온 게로구나! 진짜가 아니니 말을 더듬는 것 아니냐? 대왕치고 어찌 그것이 없냐? 가짜도 있고, 참짜도 있냐? 뿌리 없는 대왕이 어디 있느냐?” 하니 이등박문이 “그대는 통변을 하면서 어찌 증산 선생만 위하고 나는 쳐서 말하는가?” 하니라.

이에 형렬이 “나는 평평하게 공도로써 바로 말하지 사사로이 하지 않는다. 그런 걸로 조조 간신이 있지 않느냐? 어째서 우리 선생님과 대면하려 했느냐?” 하거늘 이등박문이 “내가 전부터 증산 선생의 명성을 익히 들어 혜안慧眼을 얻고자 상우相遇를 청하였다.” 하거늘 형렬이 “그런다고 하늘에서 정하여 준 재주가 늘겠느냐? 신명 탓이지. 네가 아무리 올라가고 싶어도 신명 위로는 못 올라가는 것이다. 네가 글을 배워도 헛것을 배웠구나. 대왕은 당치도 않다.” 하니라.

이때 상제님께서 자리에서 일어나시며 형렬에게 이르시기를 “말도 알아들을 만한 것보고 해야지, 말 못 알아듣는 건 사람도 아니니 가리지 말고 우리가 돌아서자.” 하시니 이등박문이 상제님께 달려들며 “제 편이 되어 저를 도와 주시오!” 하고 사정하거늘 상제님께서 “나는 누가 말해도 안 듣는다. 나는 너희와는 상종相從이 못 되니 이만 가노라.” 하시고 곧장 밖으로 나오시니라. 상제님께서 안암동安岩洞으로 돌아 다음 날 구릿골로 돌아오시니라.

이해 10월 26일, 이등박문이 의사義士 안중근安重根의 저격을 받아 하얼빈 역에서 죽음을 당하니라. (증산도 도전道典 5:365:1~18)



들어가며


10월 26일! 우리 근현대사에 두 번의 큰 사건이 있던 날이다. 1909년 기유년 10월 26일은 만주 하얼빈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伊藤博文)를 황해도 사람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安重根이 사살한 날이다. 이후 국권은 피탈되었지만, 우리 민족의 항일 운동은 지속되어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였다.

또 한 번은 1979년 10월 26일로, 대한민국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에게 암살된 날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안중근 장군을 ‘민족정기의 화신’으로 추앙하며, 안중근 기념관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현충사에 버금가는 성역으로 조성하려고 하였다.

그동안 영웅 안중근에 대해서는 여러 매체에서 다루었다. 이제 그 영웅의 그늘을 살짝 걷어 낸, 실탄 일곱 발과 여비 백 루블만을 지녔던 청년 안중근의 가장 치열했던 일주일을 다룬 김훈의 『하얼빈』을 통해 그의 ‘대의’를 또 다른 시각에서 만나 보는 시간을 가져 보자.

이 책이 나오게 된 배경 - 작가의 말을 중심으로


안중근 의사를 다룬 『하얼빈』은 작가의 청년 시절부터 품었던 이야기이다. 70년대 신문사 기자로 사회생활을 한 작가는 당시 엄혹했던 유신 체제에서 방황하던 청년이었다. 그때 안중근 의사의 신문訊問 조서를 읽으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 『난중일기』를 읽고 이순신에 대해서 쓰기로 했듯이, 안중근에 대해서도 쓰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 후 50여 년이 지난 지금 그 이야기를 썼는데, 이를 『하얼빈』 책 속의 <작가의 말> 편을 통해 살펴보자.

안중근의 빛나는 청춘을 소설로 써 보려는 것은 내 고단한 청춘의 소망이었다. 나는 밥벌이를 하는 틈틈이 자료와 기록들을 찾아보았고, 이토 히로부미의 생애의 족적을 찾아서 일본의 여러 곳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그 원고를 시작도 하지 못한 채 늙었다. 나는 안중근의 짧은 생애가 뿜어 대는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했고, 그 일을 잊어버리려고 애쓰면서 세월을 보냈다. 변명하자면, 게으름을 부린 것이 아니라 엄두가 나지 않아서 뭉개고 있었다.

2021년에 나는 몸이 아팠고, 2022년 봄에 회복되었다. 몸을 추스르고 나서, 나는 여생의 시간을 생각했다. 더 이상 미루어 둘 수가 없다는 절박함이 벼락처럼 나를 때렸다. 나는 바로 시작했다. (작가의 말, 305~306쪽)


이 작품은 작가가 치밀한 조사와 자료를 완전히 소화한 뒤에 집필했다. 그리고 이를 극도로 압축하여 많은 부분이 생략되었다. 작가는 이토 히로부미의 야욕에 대한 내용을 삭제한 부분과 안중근 의사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으로 가는 여정을 건강과 코로나 때문에 언급하지 못한 점을 굉장히 아쉬워하였다.

작품에서 주목할 특징 1 - 청년 안중근


이 작품은 영웅 안중근이 아닌, 인간 그리고 청년 안중근을 주로 다루고 있다. <작가의 말> 편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이 작품의 특징을 말하고 있다.

나는 이 세 단어(포수, 무직, 담배팔이)가 다른 말들을 흔들어 깨우고 거느려서 대하를 이루는 흐름을 소설의 주선율로 삼고, 그 시대의 세계사적 폭력과 침탈을 배경음으로 깔고, 서사 구조는 역사적 사건의 전개에 따르되, 이야기를 강도 높게 압축해서 긴장의 스파크를 일으키자는 기본 설계를 가지고 있었다. (작가의 말, 304쪽)


위에 언급한 포수는 안중근이 체포된 후 일본인 검찰관이 진행한 첫 신문訊問에서 자신의 직업을 ‘포수’라고 밝힌 부분이다. 이후 기소된 후 재판정에서는 ‘무직’이라고 말했다. 그의 동지인 우덕순禹德淳은 직업이 ‘담배팔이’라고 일관되게 말하고 있다.

이들은 평범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 이를 저자는 순수성과 청춘의 언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포수나 무직 그리고 담배팔이처럼 대한의 평범한 청년들은 제국주의에 맞서고 행동할 만한 사상과 행동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말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핵심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는 부분이 아니라, 이를 준비하는 과정과 일본 검사와 재판정에 맞서 재판하는 과정일 것이다. 그 영웅 안중근이라면 당연히 주목할 이토의 사살 부분은 1개의 장(15장)에만 나와 있다.

작품에서 주목할 특징 2 - 좌고우면하지 않은 청년 안중근


청년 안중근의 특징은 좌고우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토를 사살하기 위한 과정이 오랫동안 준비되고 굉장히 치밀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굉장히 담백하면서도 즉각적이었다.

시간이 없구나. 연추煙秋를 떠나자. 운신할 수 있는 자리로 가자. 내 몸을 내가 데리고 가서 몸을 앞장세우자. 몸이 살아 있을 때 살아 있는 몸으로 부딪치자..

신문 속 이토의 사진을 보면서 안중근은 조준점 너머에서 자신을 부르는 손짓을 느꼈다. 우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이토의 일정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토를 죽여야 한다는 생각은 내내 분명하지 않았다. 이토를 죽여야 한다는 생각은 자각 증세가 없는 오래된 암처럼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었는데, 만월대의 사진을 보는 순간 암의 응어리가 폭발해서 빛을 뿜어내는 것 같았다. 안중근은 몸을 떨었다. 안중근은 10월 19일 아침에 하숙집을 나왔다. (책 7장 97쪽)

하얼빈으로 가는 열차는 10월 21일 아침 여덟 시 오십 분에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났다.

출발 전날, 안중근은 이석산李錫山을 권총으로 협박해서 백 루블을 빼앗았다. 이석산은 재력이 있었고 극동 한인 사회에서 인망이 높았다. 이석산은 러시아 암시장에서 무기를 구입해서 의병 부대에 보내기도 했다.
- 돈이 급히 필요하니 백 루블을 빌려 달라.
- 용처가 무엇이냐?
- 용처를 말할 수 없으나 사용私用은 아니다.
- 네가 돈을 갚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용처가 합당하면 그냥 주겠다. 용처를 말하라.
안중근이 품 안에서 권총을 꺼내 이석산을 겨누었다. (11장 132~133쪽)


안중근이 여비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이석산으로부터 여비를 ‘빌린’ 사건은 훗날 자신에게 여비를 제공한 이석산에게 화가 닥칠 것을 염려했기 때문에 용처를 말하지 않았다. 같은 황해도 출신 의병장 이석산은 안중근의 진심을 알았기 때문에 순순히 돈을 내주었다.

작품에서 주목할 특징 3 - 총과 말[言], 모두에서 승리하다


안중근 장군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사살한 사건에 대해 제국주의 일본의 심장을 쏘았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이 작품 초반에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의 입장에서는 철천지원수이다. 하지만 일본의 시각에서는 일본 근대화를 이끈 사람이고, 조선을 강점強占하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이루었으며, 더 나아가 만주와 대륙으로 진출해 전 세계로 뻗어 나가려는 계획과 야심을 가진 인물임을 알려 주고 있다. 한마디로 폭력적인 제국주의 일본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일본 정계의 거물을 사살한 안중근은 두 가지 전쟁을 함께 수행해야 했다. 하나는 직접적으로 이토를 사살하는 일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이 한 행위의 정당성을 재판 과정에서 드러내는 일이었으며, 그 결과는 모두 승리였다.

… 이토는 죽었는가? 이토가 죽었다면, 나의 목숨이 이토의 목숨 속에 들어가서 박힌 것이다. 그러나 이토가 죽었다면 일본 영사관 직원들과 헌병들이 이처럼 조용할 수가 있을까.

이토를 살려 놓고 이토를 죽이는 이유를 이토에게 말해 주었으면 좋았겠는데 이토가 죽었다면 이토를 죽인 이유를 이토에게 말해 줄 수가 없겠구나. 메이지는 이토가 총을 맞은 이유를 알고 있을까. 이토가 죽었다면 이토 없는 세상에서 이토를 죽인 이유를 말해야 하지만, 그 세상은 이토가 만들어 놓은 세상이므로 내 말을 알아듣기가 어렵겠구나. …

이토가 죽지 않고 병원으로 실려 가서 살아났다면, 이토의 세상은 더욱 사나워지겠구나. 이토가 죽지 않았다면 이토를 쏜 이유에 대해서 이토에게 말할 자리가 있을까. (193쪽)


신문 과정에서 이토의 절명 사실을 안중근은 알게 되었다. 이후 그의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되었다.

안중근에 대한 신문은 처음부터 혼란스러웠다. 안중근은 사실 관계를 분명히 진술했지만, 미조부치는 안중근의 진술에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시키는 정치적 신념이 작동하고 있음을 초장부터 알았다. 안중근의 정치성을 부재하는 것으로 몰고 나갈 수는 없었고, 그 정치성이 이토의 문명개화주의와 동양 평화 구상에 대한 오해와 무지에서 비롯된 몽매의 소산이라는 것을 신문을 통해 드러내기는 쉽지 않았다. (213쪽)


안중근의 재판 과정은 이 작품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18장부터 시작한 신문과 재판 과정(18장, 22장, 23장이 안중근의 재판 과정이고, 20장은 안중근의 부인 김아려金亞麗를 신문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음)을 통해서 우리는 일본 정부가 어떻게 재판을 이끌려고 했는지, 이에 대해 안중근과 우덕순이 얼마나 담담히 자신들의 신념을 말하고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당시 관동 지방법원 검찰관 미조부치 다카오溝淵孝雄는 안중근을 신문했던 자이고, 재판장은 마나베 주조真鍋十蔵였다. 당시 재판은 러시아, 일본, 청, 영국의 외교관과 정부 관리, 법률가들이 참관하였다. 재판 과정은 서양으로 알려졌고 그 기록은 지금도 남아 있다.

마나베는 안중근에게 물었다.
문)어디를 겨누었는가?
답) 심장을 겨누었다.
문) 거리는?
답) 십 보 정도였다.
문) 성공하면 자살할 생각이었는가?
답) 아니다. 한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서는 단지 이토를 죽인 것만으로는 죽을 수 없다.
문) 그런 원대한 계획이었다면 범행 후 체포당하지 않으려 했을 텐데, 도주할 계획을 세웠는가?
답) 아니다. 나쁜 일을 한 것이 아니므로 도주할 생각은 없었다.

질문이 답변을 누르지 못했다. (233~234쪽)


일본 검찰의 신문 과정과 재판에서 안중근은 이토의 죄악상과 자신의 신념을 모두 밝혔다. 그리고 종교적으로 고해성사告解聖事를 받으면서 본인이 하려던 모든 일을 다 이루었다. 당시 한국 천주교에서는 안중근이 요청한 고해성사와 병자성사病者聖事(임박한 죽음을 앞두고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천주교 의식) 요구를 거절했다.

다행히 니콜라 빌렘Nicolas Joseph Marie Willhelm(한국식 이름은 홍석구洪錫九) 신부가 안중근의 고해성사를 듣고, 병자성사를 집전해 주었다. 이 부분은 29장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결국 안중근은 총으로도 말로도 모두 승리하였다.

작품에서 주목할 특징 4 - 하얼빈에서 만나자


작품 제목이 왜 ‘하얼빈’일까? 하얼빈에 대해 작가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하얼빈역 구내에서 철도는 여러 갈래로 겹쳐 있었다. 바이칼 호수에서 오는 철도가 하얼빈역에 닿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오는 철도가 하얼빈역에 닿았다. 평양에서 오는 철도와 대련에서 오는 철도가 하얼빈역에 닿았다. 북태평양과 바이칼이 하얼빈에서 연결되었고 철도는 하얼빈으로 모여서 하얼빈에서 흩어졌다. 하얼빈역에서는 옴과 감이 같았고 만남과 흩어짐이 같았다. (137쪽)

이토의 나라는 대련을 쳐부수어서 차지했고, 대련을 발판으로 하얼빈으로 진출했다. 하얼빈의 플랫폼은 내가 이토를 쏘기에 알맞은 자리고, 이토가 죽기에 알맞은 자리다. 나는 이토가 온 철도를 거슬러 가고 있다. 대련은 이토의 세상이다. 대련은 내가 말하기에 편안한 자리이고 내가 죽기에도 알맞은 자리이다. (194쪽)


안중근과 우덕순은 출발한 지 40시간이 지난 22일 밤 아홉 시쯤 도착하였다. 그와 함께 안중근의 아내도 하얼빈으로 오고 있었다. 안중근은 이토를 사살한 뒤 자신의 가족들이 조선에서는 살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만주로 오라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청나라도, 러시아도 이기고 조선 병탄을 넘어 만주까지 정복하려는 이토는 전승자, 지배자로 만주의 중심 하얼빈으로 오고 있었다.

하얼빈은 우리 민족과도 연관이 깊은 장소이다. 바로 단군조선의 단군왕검檀君王儉께서 처음 도읍하신 역사적 장소이기 때문이다. BCE(기원전) 2333년 단군왕검께서 신시 배달의 법도를 되살리고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셨는데, 이곳은 지금 송화강 변에 있는 하얼빈의 완달산完達山이다. 기차가 오고 가고, 운명이 충돌하는 장소가 바로 하얼빈이었다.

안중근의 유언을 우리는 지켜야 한다


자신의 목숨으로 조국을 사랑한 청년 안중근은 어머니가 보내 주신 명주옷을 입고 본래 집행일보다 하루 늦은 1910년 경술년 3월 26일 순국하였다. 3월 25일은 대한제국 황제 순종의 서른일곱 살 생일이었기 때문이다. 하관 때 가는 비가 내렸고, 문상객은 없었다. 3월 27일은 부활절이었다. 3월 29일 관동도독부는 안중근 사건 수사와 재판과 사형 집행에 애쓴 이들에게 상여금을 내렸다.

소설은 빌렘 신부가 ‘나의 시체를 하얼빈에 묻으라.’는 안중근의 유언을 신자들에게 전했고, 안중근은 여순 감옥 공동묘지에 묻혔다고 전하고 기도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우리는 아직도 안중근 장군의 유해가 있는 곳도 모르고, 고국으로 모셔 오지도 못하고 있다.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伊藤博文, 1841∼1909)

* 이때 청국과 일본은 조선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사태(동학농민혁명)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으니 당시 일본의 총리대신은 이등박문伊藤博文이라. (증산도 도전道典 1:49:6)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일본이 봉건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 나아가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되는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이끈 인물 중 하나로, 대일본제국 헌법 초안 작성, 현 일본 내각제 시행 및 의회 제도 확립, 일본 민법 제정 등에 기여한 일본 근대화의 주역이며 현대 일본의 기초를 쌓는 데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일각에서는 한국 합병에 대해서 반대하고 간접 지배를 하자고 한 온건한 인물로 알려진 그가 하얼빈에서 사살당해 한일 강제 병합의 시기가 앞당겨졌다는 의견이 있다. 실제로 일본 육군의 아버지라 불리는 강경파 인물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이토가 사살당한 후 적극적으로 한국 직접 지배를 추진해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를 통감統監으로 올렸고, 결국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倂合하였다.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급진적인 강제 병합을 반대했던 것이지, 병합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일본에 대한 한국인들의 부정적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스스로 한복을 입기도 하고, 본 작품 3장에서 언급한 순종 황제의 전국 순행에 동참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이토는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체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여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고, 조선총독부의 전신인 통감부統監府를 설치, 초대 통감이 되어 한국 병탄倂呑의 기초 공작을 수행했다.

이후 헤이그 특사特使 사건을 빌미로 대한제국군 강제 해산, 고종 황제 강제 퇴위 등을 주도하였다. 1909년 4월에는 조선 병합에 대해 찬성하는 입장을 표명하며 통감 자리를 사임하고, 추밀원枢密院 의장이 되어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체프Kokovsev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을 방문하였다가 안중근에게 사살당하였다.

만약 이토의 계산대로 온건하게 강제 병합이 이루어졌다면, 당시 근대화된 일본의 발전 모습에 감화된 한국 젊은이들이 병합에 별다른 거부감을 지니지 않았을 가능성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어차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전하면서 광복이 이루어졌으리라 볼 수 있으나, 이토 히로부미는 당시 팽창주의를 주장하는 급진적인 군부 세력과 정치적으로 대립되는 위치였다.

무조건 전쟁보다는 협상을 우선시하면서 해당국 주민들의 지지를 얻는 방식이었다면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었을지 모른다. 역사의 아이러니인데, 이토의 죽음으로 가속화된 강제 병합과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강경 노선, 그리고 걷잡을 수 없어진 일본의 군국주의화에 의한 폭거는 대한국인들의 지속적인 항일 운동으로 이어졌다. 이토와 같은 영리한 정치인의 부재로 말미암아 일본은 외교적 고립을 자초하여 미국을 공격하는 등 그들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넣게 된 결정적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토 히로부미 사후 1932년 이토의 명복을 빌고 그 업적을 기리는 사찰 박문사博文寺가 서울 장춘단奬忠壇 공원 동쪽 언덕에 세워졌다. 장충단은 1895년 일제에 의한 명성 황후明成皇后 살해 사건 때 순국한 무관들을 제사하던 최초의 국립묘지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이때 조선 왕궁인 경희궁의 흥화문을 옮겨서 박문사 정문으로 삼았다. 마땅히 이곳은 원형으로 복원되고 안중근 기념관이 들어섰어야 했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그러지 못했다. 오히려 해방 후 박문사 부지는 삼성 재벌에 매각되었고, 이 자리에 신라 호텔이 들어섰다.

두 가지 동양 평화론과 두 젊은이의 죽음
이 작품은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를 제시하며 극적인 재미와 함께 생각할 거리를 주고 있다. 하나는 서로 상반되는 동양 평화론으로 이토 히로부미와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이다. 이토의 동양 평화론의 결론은 일본을 정점으로 하여 모든 아시아 국가가 그 지배 아래에 있다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이 세계는 인간이 만드는 구조물이다. 제국은 동양 천지에서 고래古來의 거악巨惡과 싸워 가며 이 구조물을 제작하고 있다. 이것이 동양 평화의 틀이고 조선 독립의 토대이다. 조선은 스스로 이 틀 안으로 들어옴으로써 존망의 위기를 벗어나 황제와 백성이 함께 신생을 도모할 수 있다. 헛된 힘을 쓰지 마라. 쉬운 길을 두고 험로로 들어가지 마라. 제국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조선은 닦여진 길로 들어오라. 조선의 사직은 제국의 품 안에서 안온할 것이니 한 때의 석민惜閔을 버리고 장대한 미래를 맞으라. (81쪽~82쪽)


반면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은 지금의 유럽 연합(European Union)과 비슷하다. 서양 열강이 동양을 침범해 옴에 따라 한중일 3국이 서로 돕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 생각하여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려 했으나, 일본은 약속과 다르게 사형을 집행해서 완성되지 못했다. 공용 화폐나 평화 회의와 3국 청년들로 구성된 군단을 창설하는 등의 주장을 담으려고 했다.


문) 그대가 말하는 동양 평화란 어떤 의미인가?
답) 동양의 모든 나라가 자주독립하는 것이다.
문) 그중 한 나라만이라도 자주독립하지 못하면 동양 평화가 아니란 말인가?
답) 그렇다. (218쪽)


한편 25장에서 작가는 뮈텔Gustave-Charles-Marie Mutel 신부의 시각으로 양극단에 선 두 젊은이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도 무려 100년 전에 처형당한 천주교인 황사영黃嗣永과 안중근을 비교하면서 말이다. 안중근의 사형 선고 소식을 들은 뮈텔 신부는 그동안 있었던 순교의 기록을 찾으면서 황사영 백서帛書 사건을 언급하였다.

황사영은 1801년 신유박해 당시 베이징의 주교 구베아Gouvea에게 1만 3천 자에 달하는 비단 보자기 글을 보냈다. 순교와 박해의 실상을 소상히 기록하고 서양 나라의 선박 수백 척과 군사와 대포로 조선 조정을 협박해서 천주교인을 죽인 죄를 물어 달라는 내용으로 이른바 황사영 백서 사건이다. 이 백서는 전달 과정에서 발각되었고, 황사영은 토굴에서 체포되어 몸이 여섯 토막으로 잘려서 거리에 버려졌으며 일족은 멸문되었다. 황사영은 정약용의 맏형인 약현若鉉의 딸 명련命連과 혼인했고, 이로 인해 정약용 집안은 폐족廢族되었다. 황사영이 죽을 당시의 나이는 27세. 이 죽음을 작가는 뮈텔의 시각에서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뮈텔은 조선 조정의 문서 창고를 뒤져서 황사영의 보자기 글 원문을 찾아내 프랑스어로 번역해서 본국으로 보냈다. 황사영의 글을 번역하면서 뮈텔은 이 천둥벌거숭이의 몽매함에 한숨 쉬었고 순수한 신앙의 열정에 목이 메었다. 안중근은 자신에게 영세를 베푼 사제를 향해서 ‘국가 앞에서는 종교도 없다.’는 황잡한 말을 하고 교회 밖으로 나가서 이토를 죽였는데, 황사영은 서양 군함을 몰고 와서 국가를 징벌해 달라고 북경의 주교에게 빌고 있었다. 두 젊은이는 양극단에서 마주 서서, 각자의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었다. 황사영은 국가를 제거하려다가 죽임을 당했고, 안중근은 국가를 회복하려고 남을 죽이고 저도 죽게 되었는데, 뮈텔은 이 젊은이들의 운명을 가로막고 있는 ‘국가’를 가엾이 여겼다. ......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인간이 헤아리기 어려웠다. (250쪽~251쪽)


기억해야 할 안중근 집안 이야기
본 작품의 후기에서는 안중근 집안의 박해, 시련과 굴욕, 유랑과 이산과 사별 이야기가 담겨 있다. 간략히 정리해 본다.

안중근은 1910년 뮈텔 주교의 판단에 따라, 이후 80년 동안 한국 천주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살인죄를 범한 죄인’ 상태로 남아 있었다. 1993년 8월 21일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인 김수환 추기경은 안중근 추모 미사를 집전했다. 이는 한국 천주교회가 안중근을 공식적으로 추모하는 최초의 미사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안중근의 행위가 ‘정당방위’이고, ‘국권 회복을 위한 전쟁 수행으로서 타당하다고 보아야 한다.’고 했다. 1945년 광복 직후 김구金九는 뤼순旅順 감옥 공동묘지에 묻힌 안중근의 유해를 발굴해서 봉환하려는 노력을 시작했고, 이후 지속되었으나 유의미한 정보는 없다. 현재 서울 용산구 효창 공원에 가묘가 마련되어서 유해가 봉환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안중근의 자녀들은 암살되거나 일제의 선전 도구에 이용당하는 등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다. 장남 안분도安芬道의 본명은 우생祐生이다. 1909년 11월 7일 관동도독부 검사 미조부치는 5살 분도를 신문하였다. 안중근 일가는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서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으로 이주했는데, 분도는 7살에 암살로 추정되는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차남 안준생安俊生은 아버지를 본 적이 없었다. 안중근 역시 차남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안준생은 1939년 10월 15일 박문사를 찾아 이토의 위패에 분향하고 “죽은 아버지의 죄를 내가 대신 속죄한다.”는 담화를 발표했고, 이튿날에는 이토 히로부미의 차남 이토 분키치伊藤文吉를 만나 사죄하는 쇼(이른바 박문사 화해극)에 이용되었다. 조선총독부의 기획과 연출에 이용된 안준생을 김구는 교수형에 처해 달라고 중국 관헌에 부탁할 정도였다. 1952년 한국전쟁 중 부산에서 죽었다.

장녀 안현생安賢生은 안분도와 안준생의 누나이다. 안현생 역시 1941년 3월 26일 아버지 안중근의 기일에 박문사를 참배했다. 궁핍하게 살다가 1959년 사망하였다. 부인 김아려金亞麗는 러시아 극동 지역과 만주滿洲, 상하이上海를 옮겨 다녔다. 중일전쟁 이후 상하이에 남아 있다가 1946년 그곳에서 사망했다. 김아려의 생애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고, 그의 고통과 슬픔에 대한 기억이나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어머니 조마리아(조성녀趙姓女) 여사는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했다. 생애에 대해서 상세한 기록은 없지만, 여러 항일 혁명가들은 조마리아의 애국심과 희생정신과 용기를 기리고 있다. 1927년 상하이에서 사망하였다.

동생 안정근安定根은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하였고, 잡화상을 경영해서 독립운동을 위한 물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25세 무렵부터 대가족의 가장 역할을 떠맡았고 북만주 독립운동의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독립운동 자금 모금과 모병, 교육에 헌신했고, 청산리 전투에 참가했다. 그의 딸 미생美生은 김구의 장남 인仁과 혼인하였다. 광복 후 귀국하지 못하고 1949년 망명지 상하이에서 사망했다.

동생 안공근安恭根은 상해에서 구미 공사관의 통역과 정보원으로 활동하면서 여러 독립운동 단체에서 지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김구의 최측근으로 활동하며 이봉창, 윤봉길 의거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다. 1939년 5월 충칭重慶에서 실종되었다.

사촌동생 안명근安明根은 안중근의 거사에 감화받아서 무장 독립 투쟁의 길로 나섰다. 북간도에서 독립군을 양성할 군사학교를 세우려고 황해도 일대 부호들을 설득해 기부금을 받아 내는 과정에서 검거되었다. 일제는 이를 데라우치 총독 암살 모의 사건(이른바 안악安岳 사건, 또는 105인 사건)으로 부풀리고 관련자들에게 내란미수죄를 적용했다. 이후 만주로 망명해서 독립투쟁을 계속하다가 지린성吉林省에서 죽었다.

안중근 장군의 집안은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 사십 명이 넘고, 독립유공자 훈장을 탄 사람도 열 명이 넘는 명문가이지만, 해방된 조국에서 이들은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이후 득세한 친일파들에 의해 소외되고 박해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