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B다시보기 | 한국의 성씨 40회 충주 지씨

[STB하이라이트]
는 상생방송 프로그램의 주요 내용을 요약하여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지난 프로그램과 회차는 《한문화중심채널 STB상생방송》 공식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한국의 성씨 40회 충주 지씨




프로그램 소개


〈한국의 성씨〉는 나의 존재의 근원이자 근본 뿌리인 성씨姓氏에 대해 그 기원과 틀을 바르게 알아보고 자신의 뿌리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프로그램입니다.

방영 정보


시청등급 : 일반 / 방송시간 : 30분 / 제작국가 : Korea / 담당PD : 김내연 / 제작 : STB 2020

충주 지씨忠州池氏 현황



2015년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지’로 발음되는 성은 ‘연못 지池’ 자를 성으로 쓰는 지씨池氏와 ‘지혜 지智’ 자를 성으로 쓰는 지씨智氏가 있습니다. 이 중 96%는 연못 지의 지씨池氏이고 지혜 지의 지씨智氏는 6,070명으로 4% 정도가 됩니다. 지금의 ‘봉산 지씨鳳山智氏’가 ‘지혜 지智’ 자를 성으로 쓰는 지씨智氏이며, 고려의 명장 지채문智蔡文을 시조로 모시고 있습니다.


‘연못 지池’의 지씨池氏는 『조선씨족통보』에 의하면 89본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는 충주忠州를 비롯하여 청주淸州⦁경주慶州⦁광주光州⦁홍농弘農 등 7본이 전해집니다. 이 중 ‘광주 지씨光州池氏’는 후백제 견훤의 사위인 지훤池萱을 시조로 모시고 ‘홍농 지씨弘農池氏’는 중국 명나라 홍농에서 조선 인조 때 귀화한 지명천 장군의 셋째 아들 지시염을 중시조로 모십니다.


‘충주 어씨忠州魚氏’는 충주 지씨忠州池氏에서 분적한 성씨입니다. 충주 어씨의 시조 어중익魚重翼은 본래 충주 지씨의 6세손 지중익池重翼으로 겨드랑이에 크고 빛나는 비늘이 있어 고려 태조 때 충주 어씨로 사성賜姓받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충주 지씨忠州池氏는 어떤 성씨일까요?


충주 지씨는 충청북도 충주시를 관향으로 하는 성씨입니다. 충주는 원래 고구려 때 ‘나라의 벌판’이란 뜻으로 국원성國原城이라 불렀고 신라 때는 처음에 국원소경國原小京이라 부르다가 후에 ‘가운데의 벌판’이란 뜻으로 중원소경中原小京이라 불렀습니다. 충주忠州란 지명은 서기 940년 고려 태조 23년에 처음 사용했고 이후 여러 차례 지명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1956년 충주시와 중원군으로 분리되었다가 1995년 다시 통합되어 현재의 충주시가 되었습니다.


2015년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충주 지씨忠州池氏는 약 15만 3천여 명이 우리나라에 살고 있으며 전체 지씨池氏의 96.5%를 차지하여 지씨池氏의 거의 대부분은 충주 지씨라 할 수 있습니다.


계파는 크게 충의군파忠義君派⦁충무공파忠武公派⦁충의공파忠義公派를 비롯하여 11개 파로 나뉘어 있는데 그 아래 다시 나누어져 총 43개 파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집성촌을 살펴보면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판운1리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조화리 장천 마을가장리 중산 마을을 비롯하여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대덕1리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부곡리, 충청남도 부여군 초촌면 초평리 등 전국에 크고 작은 집성촌이 있습니다. 이 중 영월군 주천면 판운1리는 병자호란 때 순절한 충성군 지계최池繼催의 고향이고, 여수시 율촌면의 집성촌은 임진왜란 때 24세손 지달사池達四가 양주에서 여수로 피난을 온 뒤에 형성되었습니다.

시조 소개


충주 지씨의 시조는 송나라 태학사인 지경池鏡입니다. 그는 서기 960년, 고려 광종 11년,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이 땅에 정착하였습니다. 그는 어떤 인물일까요?


지경池鏡, 903~1003(충주 지씨 시조)
서기 960년(고려 광종 11년) 송나라 단명전端明殿 태학사太學士로서 고려에 사신으로 들어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태보太保 평장사平章事 벼슬을 역임하고 고려에 정착하였다.


충주 지씨의 시조 지경池鏡은 중국 송宋나라(북송北宋) 홍농弘農 출신입니다. 당시 관직은 지금으로 보면 우리나라의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역임했습니다. 고려의 왕(고려 광종)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사신으로 와서 “말은 있으나 글이 없기 때문에 완전한 국가를 형성하기 어려우니 빠른 시일 내에 말과 글이 형성되어야 한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때 고려의 왕이 지경을 붙잡았지만 이 나라의 백성이 아니라는 이유로 세 번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문학적으로 뛰어난 지경池鏡의 모습을 보고 고려에서 송宋으로 다시 사신을 보냈습니다. 이후 고려에 글을 만들어 주라는 명을 받은 지경은 ‘나를 포함한 여덟 명의 학자가 건너가 학회를 만들어 연구하겠다.’고 하며 고려에 오게 되었습니다. 지경과 함께 넘어온 여덟 명이 8학사八學士의 근본이 되었습니다.

충주 지씨 인물 소개


충주 지씨는 고려조에서 36명의 평장사平章事*1)와 24명의 대장군을 배출할 정도로 가문이 크게 번성하였습니다. 또한, 조선조에서도 충절忠節을 지킨 역사적인 인물들이 많이 탄생하였습니다. 충주 지씨에는 어떤 인물들이 있을까요?
*1) 평장사平章事 : 중서문하성의 정2품 부총리급. 충주 지씨는 고려 시대에 대대로 36명의 평장사平章事를 배출하였다.


지문4걸池門四傑 : 지윤⦁지용기

충원부원군忠原府院君 지용기池湧奇는 시조의 17세손으로 고려 말 왜구를 격퇴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입니다.


지윤池奫은 시조의 15세손으로 고려 말 왜구와 홍건적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입니다.

지문4걸池門四傑 : 지용도⦁지용수

충의공忠懿公 지용도池龍圖와 충무공忠武公 지용수池龍壽는 형제간으로 고려 말 국난기에 많은 공을 세운 인물입니다.

지석영池錫永
지석영池錫永은 구한말 개화기 인물로 우리나라에 우두법牛痘法을 최초로 보급하였습니다. 그는 1855년 지금의 서울 낙원동에서 가난한 양반 가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한의학에 정통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한학과 의학을 배우게 되고 서양 의학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1879년 전국에 천연두天然痘가 창궐하여 수많은 아이들이 생명을 잃자 서양의 종두법을 도입하려 애를 썼습니다.

부산에 있던 일본 해군병원인 제생의원濟生醫院에서 우두법을 배우고 이듬해 26세 때는 수신사 김홍집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직접 건너가 두묘痘苗*2)의 제조와 저장법 등을 완전히 습득하였습니다. 귀국한 뒤 그는 전주와 공주를 필두로 전국에 우두국을 설치하고 우두 접종을 시행하였습니다.

1883년 고종 20년,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참의, 동래부사를 지내고 1894년 갑오개혁과 함께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면서 승정원 좌승지와 한성부윤에 올랐습니다. 이때 그는 전국의 모든 어린이들에게 우두를 의무적으로 접종하게 하여 19세기 말 수많은 어린이들의 생명을 구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의학 교육에도 헌신하는데 1899년 최초의 의학교인 ‘경성의학교*3)’를 설립하여 10년간 교장으로 있기도 했습니다. 그는 한글 보급에도 큰 업적을 남겼는데 지석영은 개화가 늦어지는 이유가 어려운 한문을 쓰기 때문이라 보고 쉬운 한글을 쓸 것을 주장했습니다. 이에 1905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인 신정국문新訂國文 6개조를 상소하여 시행케 했습니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그는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초야에서 여생을 보내며 1914년 유유당幼幼堂이라는 소아 진료소를 차려 평생 아이들의 건강을 돌보다 생을 마쳤습니다.
*2) 두묘痘苗 : 두창에 걸린 소에서 뽑아낸 천연두 백신
*3) 경성의학교 : 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


지청천池靑天
지청천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여 일본군 중위로 복무하던 중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부대를 탈출하여 만주로 망명합니다. 그리고 신흥무관학교 교성대장이 되어 독립군 양성에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이후, 신흥무관학교에서 배출한 독립군은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의 근간이 되어 마침내 봉오동과 청산리 대첩의 쾌거를 이루어 냅니다.

지금까지 중국의 송나라에서 고려로 귀화한 선의공宣懿公 지경池鏡을 시조로 모시는 충주 지씨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한국 성씨의 뿌리를 찾아 떠나는 시간, <한국의 성씨> 많은 시청 바랍니다.


『한국의 성씨』를 시청하시려면?
매주 화요일 오후 3시, 오후 10시 30분
온 가족이 함께 보면 더 좋은 방송 STB상생방송! 많은 시청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