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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사관의 진실 | 환단고기가 처음 밝혀 주는 역사 진실(10)


    환단고기는 인간이 천지광명을 체험하며 살았던
    창세 역사 시대인 ‘환단 시대 이래
    한민족의 역사 이야기책’이다!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우리 역사, 문화의 원형을 밝혀 주는 보배로운 사서이다. 특히 환단고기는 다른 사서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역사 사실이 많이 실려 있다. 『환단고기 역주본』(상생출판)의 해제 편에서는 ‘환단고기에서만 전해 주는 새로운 역사 진실’이라고 하여 이를 52가지로 정리하여 밝혀 주고 있다. 이를 중심으로 환단고기의 진정한 역사적 가치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26 마한 36세 왕의 이름과 통치 연도를 밝혀 준다.


    檀君王儉(단군왕검)이 旣定天下(기정천하)하시고
    分三韓而管境(분삼한이관경)하실새 乃封熊伯多(내봉웅백다)하사
    爲馬韓(위마한)하시고 都於達支國(도어달지국)하시니
    亦名曰(역명왈) 白牙岡也(백아강야)라
    단군왕검께서 천하를 평정하고 삼한으로 나누어 다스릴 때, 웅백다熊伯多를 마한 왕(부단군)으로 임명하셨다. 도읍을 달지국達支國에 정하였는데, 백아강白牙岡이라고도 불렀다.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

    丙辰(병진)에 上將丘勿(상장구물)이 遂斬獵戶頭目宇和冲(수참엽호두목우화충)하고
    移都藏唐京(이도장당경)할새 先以加利之孫典奈(선이가리지손전)로
    入承莫朝鮮(입승막조선)하니 自是로(자시) 國政(국정)이 益衰(익쇠)하니라
    典奈(전내)가 薨(훙)하니 子進乙禮(자진을례)가 立(입)하니라
    進乙禮(진을례)가 薨(훙)하니 乙卯(을묘)에 子孟男(자맹남)이 立(입)하니라
    병진(단기 1909, BCE 425)년에 상장 구물丘勿(후에 44세 단군으로 즉위)이 마침내 사냥꾼 두목 우화충宇和冲을 죽이고 도읍을 장당경으로 옮겼다. 먼저 가리의 손자 전내典奈로 하여금 막조선을 계승(막조선 34세 왕)하게 하였는데, 이때부터 국정이 더욱 쇠퇴하였다.
    전내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 진을례進乙禮(35세 왕)가 즉위하였다. 진을례가 세상을 뜨자, 을묘(BCE 366)년에 아들 맹남孟男(36세 왕)이 즉위하였다.


    단군조선은 나라를 진한眞韓·번한番韓·마한馬韓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이것이 단군조선 통치 제도의 핵심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이다. 『환단고기』에서는 단군조선의 역사 전모를 밝혀 준다. 특히 삼한의 중심이었던 진한을 통치했던 47세 단군의 이름과 재위 연도, 퇴위 연도를 가르쳐 준다. 이뿐만이 아니다. 『환단고기』 「삼한관경본기」에서는 마한과 번한의 통치자 이름과 통치 연도를 밝혀 준다. 또 마한, 번한과 진한의 대단군 사이에 있었던 중요 사건을 간략하게 전하고 있다. 이것들은 오직 『환단고기』에서만 찾을 수 있는 기록들이다. 이로 볼 때 『환단고기』는 사료의 부족으로 고조선 역사의 전모를 밝히지 못하고 있는 우리 사학계에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27 번한 75세 왕의 이름과 통치 연도를 밝혀 준다.

    於是(어시)에 檀君王儉(단군왕검)이 擇蚩尤後孫中(택치우후손중)에
    有智謀勇力者(유지모용력자)하사
    爲番韓(위번한)하사 立府險瀆(입부험독)하시니
    今亦稱王儉城也(금역칭왕검성야)라.
    蚩頭男(치두남)은 蚩尤天王之後也(치우천황지후야)라
    以勇智(이용지)로著聞於世(저문어세)러니
    檀君(단군)이 乃召見而奇之(내소견이기지)하사
    卽拜爲番韓(즉배위번한)하시고 兼帶監虞之政(겸대감우지정)하시니라
    이때 단군왕검께서 치우천황의 후손 중에서 지모와 용력이 뛰어난 자를 택하여 번한 왕으로 임명하고 험독險瀆에 수도를 세우시니, 지금은 왕검성이라 칭한다.
    치두남蚩頭男은 치우천황의 후손이다. 용맹과 지혜로 세상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단군께서 불러 만나 보시고 기특하게 여겨 곧 번한 왕으로 임명하고 아울러 우순의 정치를 감독하게 하셨다.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



    『환단고기』 「삼한관경본기」에 의하면 마한 왕은 36세까지 이어져 내려왔고 번한 왕은 75세까지 이어 내려왔다. 마한보다 번한이 왕의 대수代數가 두 배 가까이 많다. 이는 중국과 국경이 인접해 있어서 양국 간에 발생하는 외교 문제나 전쟁 등의 국제 문제가 많아 아마도 왕들의 심신이 과로하게 된 여파로 보여진다. 「삼한관경본기」에서는 번한 왕 75분의 이름과 재위 연도를 소상히 밝혀 주고 있다.

    번한의 초대 왕, 치두남蚩頭男은 치우천황의 후손이라고 한다. 『환단고기』에서는 치우천황의 성姓이 강성姜姓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치우천황도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의 후손이다. 『환단고기』는 인류 최초의 성씨가 우리 동방의 한민족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밝혀 준다.

    이제 다른 사서에 없는 새로운 사실을 전하는 『환단고기』의 가치를 깨달아야 한다. 『환단고기』는 새로운 역사 사실을 밝혀 줄 뿐만 아니라 우리 신교神敎 문화의 백과사전과 같은 책이다. 상투적인 위서론僞書論으로 책을 매도하고 더 나아가 음모론陰謀論(Conspiracy theory)에 가까운 주장으로 저자들을 매도하는 행위는 더 이상 학문 활동이 될 수 없다. 이것은 악의적 목적으로 행하는 선동煽動, 선전宣傳일 뿐이다. 결국 일부 지식인들이 학자라는 간판을 달고서 벌이고 있는 ‘대국민 사기극’은 언젠가는 그 실체가 탄로 날 것이며 그들은 역사의 심판대에서 준엄한 평가를 면치 못할 것이다.

    28 구물 단군 때 천상의 상제님께 받아 내린 〈구서지회九誓之會〉가 있었다.


    日(일)에 帝得天帝之夢敎(제득천제지몽교)하시고
    因欲改新大政(인욕개신대정)하사 命天帝廟庭(명천제묘정)에
    立大木懸鼓(입대목현고)하시고 三七爲期(삼칠위기)하야
    序齒相飮(서치상음)하시며 勸化成册(권화성책)케 하시니
    是爲九誓之會(시위구서지회)라
    어느 날 구물 단군께서 꿈에 천상의 상제님께 가르침[夢敎]을 받고, 정치를 크게 혁신하려 하셨다. 그리하여 명을 내려 천제의 묘정廟庭에 큰 나무를 세워 북을 매달게 하고, 삼칠일(21일)을 기약하여 나이 순서에 따라 서로 술을 마시게 하며 교화에 힘쓰시어 그 내용을 책으로 만들게 하시니, 이것이 구서지회九誓之會(아홉 가지 계율을 맹세하는 모임)이다. 모일 때마다 이 구서九誓의 글로써 백성을 교화하셨다.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


    우리 민족의 역사는 상제님과 함께한 역사였다. 왕들에서부터 일반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항상 상제님께 기도를 하며 크고 작은 대소사에 신교神敎(신의 가르침)를 받아 내렸다. 정화수를 떠놓고 간절히 기도하는 그 마음에 감응하시어 삼신상제님께서는 주로 몽교夢敎를 통해 계시를 내려 주셨다. 환국 시대 이래 각 왕조를 개척한 역사의 지도자들 역시 삼랑으로서 삼신상제님의 신앙인이며 구도자로서 천상 칠성에 계신 상제님께 천제를 올리고 역사의 방향성과 홍익인간의 길을 여쭈었다.

    『조선왕조실록』을 통해서 우리는 조선조 역대 왕들이 얼마나 많이 상제님과 교감하며 살아왔는지를 알 수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선왕조실록’ 사이트에서 한자 ‘상제上帝’를 검색해 보면 총 336회의 용례를 찾을 수 있다. 특히 중종 43회. 선조 25회, 효종 24회, 고종 때 17회로 나타나는데 이를 볼진대 국난기에 처했을 때는 더 간절히 상제님께 매달리고 교감했음을 알 수 있다.

    구서지회九誓之會는 부여구서夫餘九誓라고도 한다. 그 내용은 효孝·우友⋅·信·충忠·손遜·지知·용勇·염廉·의義를 말한다.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에는 “소도蘇塗의 설립에는 반드시 계율이 있었나니, 충忠·효孝·신信·용勇·인仁 오상五常의 도道가 그것이다.”라고 하였다. 부여구서는 상고 시대로부터 내려오던 소도의 계율을 더 구체화시킨 것이다. 그 원형은 환국 시대 때 있었다던 〈환국오훈桓國五訓〉이었을 것이다. 부여구서를 계승한 고구려의 다물오계多勿五戒 역시 ‘충忠·효孝·신信·용勇·인仁’이다. 신라 화랑도의 세속오계世俗五戒도 그 내용이 같다. 이들은 모두 한민족에게 전래되는 신교의 실천 윤리 덕목을 이어받은 것이다.

    29 해모수의 출현과 북부여의 기원에 대해 밝혀 준다.


    壬戌五十七年(임술오십칠년)이라 四月八日(사월팔일)에 解慕漱(해모수)가
    降于熊心山(강우웅심산)하사
    起兵(기병)하시니 其先(기선)은
    稾離國人也(고리국인야)시니라.
    재위 57년 임술(환기 6959, 신시개천 3659, 단기 2095, BCE 239)년 4월 8일에 해모수가 웅심산熊心山으로 내려와 군사를 일으켰다. 해모수의 선조는 고리국稾離國 사람이다. (「단군세기檀君世紀」)

    初(초)에 箕丕(기비)가 與宗室解慕漱(여종실해모수)로
    密有易璽之約(밀유역새지약)하고
    勤贊佐命(근찬좌명)하니
    使解慕漱(사해모수)로 能握大權者(능악대권자)는 惟箕丕其人也(유기비기인야)라
    일찍이 기비가 종실宗室 사람 해모수와 함께 몰래 옥새를 바꿔 치려는 (새 나라를 열자는) 약속을 하고, 힘을 다해 천왕天王이 되는 것을 도와주었다. 해모수로 하여금 능히 대권을 잡을 수 있게 한 사람은 오직 기비 그 사람이었다.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


    해모수解慕漱는 한민족 고대사의 잃어버린 고리, 북부여北夫餘의 시조이다. 단군조선의 47세 고열가高列加 단군께서 제위를 버리고 아사달에 은거하자(BCE 238) 2,096년 동안 장구하게 지속된 단군조선의 삼한관경 체제는 마침내 그 막을 내리고, 과도기로서 오가五加의 공화정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종실宗室인 해모수가 웅심산熊心山에서 일어나(BCE 239) 마침내 6년간의 공화정을 철폐하고(BCE 232) 단군조선의 대통을 이어 나라 이름을 북부여北夫餘라 하였다.

    『환단고기』에서는 해모수에 대해 ‘신인대해모수神人大解慕漱’(삼성기三聖紀 상上), ‘종실해모수宗室解慕漱‘(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라 하였고, 또 ‘해모수의 선조는 고리국 사람’(其先은 離國人也- 단군세기檀君世紀)이라고 하여 그의 신원을 알려 주고 있다. 먼저 ‘신인대해모수’라면 그의 기개와 품성이 예사 영웅들과 차별화됨을 밝혀 주는데 이는 해모수 스스로가 자신을 천왕랑天王郞이라 칭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천왕랑은 삼랑三郎의 우두머리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면 삼랑은 무엇인가? 삼랑은 삼신시종지랑三神侍從之郞의 준말로서 그들은 곧 삼신상제님을 섬기는 구도자요 수행자요 무사도들이다.

    ‘종실해모수’에서 종실은 종친宗親과 같은 뜻으로 왕족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는 해모수가 고열가高列加 단군의 후손임을 짐작하게 한다. 고열가 단군의 후손 중에 또 한 명의 영웅이 있으니 바로 북부여의 5세 단군 고두막한高豆莫汗이다. 이분 역시 고리국 사람으로 해모수와 고향이 같다. 만약 두분이 혈연과 지연이 같은 사람이라면 우리는 고두막한의 아들 고무서高無胥 단군이 자신의 사위였던 고주몽高朱蒙에게 대권을 이양한 사건의 내막을 속시원하게 해소할 수 있다.

    북부여라는 국호는 단군조선의 44세 구물丘勿 단군께서 도읍을 장당경으로 옮기면서 국호를 조선에서 대부여大夫餘로 바꾼 데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시조 해모수 단군이 나라 이름을 북부여로 정한 것은 대부여 곧 고조선의 정신과 법통을 그대로 계승하겠다는 역사의식을 나타낸 것이다. 또한 부여의 정통을 이어받은 고구려도, 해모수의 둘째 아들 고구려후高句麗侯 고진高辰의 증손인 고주몽이 “나는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다[我是北夫餘天帝之子].”(광개토대왕비문)라고 한 데에서 알 수 있듯이 북부여 계승 의식을 강하게 보여 주고 있다. 그리하여 ‘고조선古朝鮮―북부여北夫餘―고구려高句麗’로 이어지는 한민족사의 국통은 정신적인 정통 맥일 뿐만 아니라, 동일한 선령先靈의 혈맥을 타고 발전해 온 것이다.

    대륙의 고조선이 망하고 북부여가 이를 계승하여 북방에 자리 잡을 즈음 한강 이남에는 대륙삼한大陸三韓을 계승한 남삼한南三韓이 자리 잡게 된다. 인류 문명을 매듭짓고 새로운 문명을 창출하는 구원의 성지 남조선南朝鮮, 그 간艮도수가 발동하는 시점에 출현한 해모수라는 영걸에 의해 우리 역사는 새로운 마디로 굽이치게 된다. 해모수가 개창한 북부여, 그리고 북부여에서 나온(출자북부여出自北夫餘) 고구려의 이름이 아직까지 전 세계에 유효하게 쓰이고 있는 것을 볼 때 해모수의 영광스런 이름은 청사靑史에 길이 빛날 것이다.

    30 낭야성의 기원에 대해 밝혀 준다.


    頭男(두남)이 薨(훙)하니 子琅邪(자낭야)가 立(입)하니라
    是歲庚寅三月(시세경인삼월)에 改築可汗城(개축가한성)하야
    以備不虞(이비불우)하니라
    可汗城(가한성)은 一名琅邪城(일명낭야성)이니
    以番韓琅邪(이번한낭야)의 所築故(소축고)로 得名也(득명야)라.
    치두남이 세상을 뜨자 아들 낭야琅邪(2세 왕)가 즉위하였다. 이 해 경인(단기 83, BCE 2251)년 3월에 가한성可汗城을 개축하여 뜻밖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가한성은 일명 낭야성琅邪城이라 하는데, 번한 왕 낭야가 쌓아서 낭야성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


    낭야성琅邪成은 지금의 산둥성山東省 제성현諸城縣 동남에 있다. 낭야성은 워낙 유명하여 거의 모든 중국의 고지도에 그 위치가 표기되어 있다. 지금도 구글에서 ‘琅邪’라고 검색하면 중국 여러 곳에서 유사 지명을 찾을 수 있다. 낭야가 왜 유명한 곳인가? 그것은 낭야성이 동방 한민족과 중국과의 외교 관계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4,300년 전 동아시아 대륙에서 9년 홍수가 일어났을 때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한 순舜임금의 우虞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단군왕검께서 특명 대사로 부루태자扶婁太子를 파견하게 된다. 이때 부루태자가 도산으로 항해하는 중에 중간 기착지로 들러서 반달 동안 머무른 곳이 바로 낭야성이다. 이곳 낭야성에서 태자 부루는 우순虞舜에게서 치수에 대한 모든 일을 보고받으시고, 번한 왕에게 경내에 경당扃堂을 크게 일으키고 태산泰山에서 상제님께 천제天祭를 올리라고 명하신다. 이로부터 삼신을 받드는 옛 풍속이 산둥성과 회수, 사수 지역 일대에서 크게 행하여졌다고 한다.

    이때 감우소監虞所를 낭야성에 설치했는데 이는 단군조선의 중앙 정부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을 직접 통치하기 어려워 분조分朝를 둔 것이다. 이곳에서 주기적으로 순임금의 정치를 감독하고 보고를 받았다. 『환단고기』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에서는 “진국辰國(단군조선)은 천제(상제님)의 아들이 다스리므로 5년에 한 번 낭야를 순행하였으나, 순舜은 (조선의) 제후이므로 진한에 조근朝覲한 것이 네 번이었다(辰國은 天帝子所治故로 五歲에 巡到琅耶者一也오 舜은 諸侯故로 朝覲辰韓者四也라).”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서경書經』에 이른바 “순임금이 동쪽으로 순행하여 멀리 산천을 바라보며 제사 지내고, 동방 천자를 알현하였다(동순망질東巡望秩 사근동후肆覲東后).”라는 구절이 유래된 것이다.

    『환단고기』에서는 낭야성이 원래 가한성可汗城이고 일명 낭야성이라고 한 것은 번한의 두 번째 왕 낭야가 쌓아서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지금도 산둥성 교남시 바닷가에 있는 산에 낭야대가 있고 거기에는 진시황의 석상이 위치하고 있다. 옛날 진시황秦始皇이 불로초를 구하러 서불徐巿을 동방으로 보냈던 역사적 사건을 형상화한 것이다. 지금도 남아 있는 낭야성의 모습을 통해 동방 신교의 종주국 단군조선의 위용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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