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성씨昌寧成氏

[한국의 성씨]

이명규(객원기자) / 서울목동도장

창녕 성씨昌寧成氏 가문에서는 성석린成石璘·성삼문成三問·성현成俔·성혼成渾 등과 같은 기라성 같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역사적 기록을 보면 번조선과 한나라와의 전쟁 때 끝까지 나라를 지키다가 암살당한 성이成已 장군, 백제의 충신 성충成忠, 신라의 성저成貯 등이 등장한다. 성씨의 유래에 대해서는 중국 유래설과 토착 성씨설이 있다.

(※ 성씨成氏의 경우, 2015년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창녕 성씨가 182,377명, 창령 성씨가 5,433명, 창영 성씨가 7,500명 등으로 되어 있으나, 한국어의 발음 특성상 같은 ‘창녕 성씨’로 보는 것이 맞다고 판단되어, 여건상 표를 아래와 같이 수정하였다.)

성씨成氏의 득성 유래


성씨의 득성 유래에 관하여는 아래와 같이 중국 유래설과 토착 성씨설이 있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중국 성씨에서의 유래설
문헌에 의하면 중국의 성씨成氏는 중국 주周나라 때 처음 생성되었다. 주나라 문왕의 다섯째 아들 희숙무姬叔武라는 사람이 백작의 지위로 성郕나라를 세웠는데 성나라가 초나라에 멸망하자 우부방 읍阝을 떼고 성成씨라고 하였다. 따라서 성씨의 본래 성은 주나라 왕족의 성인 희씨였다.

성씨成氏의 관향은 하북성 상곡이었고 당나라 때 상곡上谷 사람 성경이成鏡以라는 학사가 우리나라로 건너와 정착하여 성씨가 있게 되었으며 백제 때 좌평 성충成忠, 신라의 대관 성저成貯가 역사에 보이는데 백제 의자왕 때 성충은 현재의 창녕 성씨와의 관계는 알 수 없으며, 창녕 성씨 시조 중윤공中尹公 성인보成仁輔는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와 「창녕성씨문헌지昌寧成氏文獻誌」 선세고적先世故蹟 편에 의하면 신라 대관 성저成貯의 후예라는 것이다.

창녕 성씨는 토착 성씨이다
그런데 창녕 성씨 대종회 홈페이지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창녕 성씨의 시조는 고려 때 호장戶長 중윤中尹을 지낸 인보仁輔이시다. 중국에서 성씨가 유래하였다는 기록과는 별도로, 「성씨약사成氏略史」에는 시조 인보께서 고려 문종 때 우리 성씨를 처음 만든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족보 외 문헌 사료에도 시조는 인보로서 윗계보는 밝혀지지 않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한편으로는 태조 왕건이 개국 초기부터 측근 세력을 구축하기 위한 유화 정책의 일환으로 새 왕조를 수립하는 데 공을 세운 중앙 세력에게 성姓을 많이 하사하였는데, 성씨의 경우는 성을 하사받았다는 기록은 없어, 고려 이전부터 사용하던 것으로 판단된다. 또 고려 초기에 백성을 통솔하는 사람을 호장戶長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고려의 독특한 제도이다. 이 호장戶長을 시조로 하는 성씨로는 창녕 성씨를 포함하여 광주 이씨, 한산 이씨 등 17개 성姓이 있다.”(출처: 성씨姓氏의 유래由來, 작성자 화풍.)

뿌리공원 조형물에 새겨진 창녕 성씨昌寧成氏의 유래
시조 중윤공께서 조정사朝正使로 송경松京에 가서 머무르시던 중 병환을 얻어 그곳에서 돌아가시자 아들인 문하시중공門下侍中公 성송국成松國께서 애통해 하시다가 천리부시千里負屍하시어 고향인 창녕에 가시던 중 현풍현에 이르자 눈이 많이 내렸다. 그래서 청산원의 바깥채 마루에 시신을 모시고 잠이 들었다. 새벽에 깨어 보니 밤새 눈이 많이 내리고 이상하게도 시신 주변의 눈 위에 범의 발자국이 있어 이상히 여긴 시중공께서 범의 발자국을 따라가 보았더니 지금의 맥산 묘소 자리까지 와서 범의 발자국은 끝이 나고 자리 한 잎 넓이만큼 눈이 녹아 있어 그곳에 중윤공의 장례를 모시니 이곳이 바로 자손만대의 명당이다. (: 대전 뿌리공원 내 창녕 성씨 조형물 내용)


위 내용을 종합해 보면, 고려 초기에는 성씨가 많이 사용되지 않다가, 고려 사족士族들로부터 시작된 모화사상慕華思想과 역대 유학자들의 시조 미화 과정, 그리고 고려 문종 9년(1055)에 ‘성씨姓氏가 없으면 과거에 급제할 수 없다.’는 제도의 변화 등이 중첩적으로 영향을 미치면서, 시조의 연원을 중국으로부터 급조(?)하여 각색된 내용을 누군가가 문헌에 포함시킨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창녕 성씨의 기원과 관련해서는 중국유래설에 따르기보다는 토착성씨설에 의거해 판단함이 타당할 것으로 사료된다.

씨족사의 개요


성씨가 중앙 조정의 관직에 진출, 명문으로 성장하게 된 것은 성인보成仁輔의 아들 성송국成松國 대부터이다. 그는 문하시중, 혹은 군기감을 역임했다 한다. 창녕 성씨의 계보는 성송국의 아들 성송필成松弼(판도판서版圖判書 추증)·한필漢弼(찬성사贊成事) 등 형제 대에서 <노상파路上派>와 <노하파路下派>의 2개 파로 갈리었다. 길을 가운데에 두고 아래윗마을에 갈라 살았던 데서 계파의 명칭이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그 이후의 분파는 6세조를 파조로 하여 13개 파로 나누어진다. 성기成紀의 후손이 판서공파判書公派, 성석린成石璘의 후손이 독곡공파獨谷公派(문경공파文景公派), 성석용成石瑢의 후손이 회곡공파檜谷公派(문숙공파文肅公派), 성석연成石珚의 후손이 상곡공파桑谷公派(정평공파靖平公派), 성석번成石璠의 후손이 중낭장공파中郎將公派이다. 성연成連의 후손은 판사공파判事公派로 나누어지고 성준成遵의 후손은 시랑공파侍郞公派, 성사제成思齊의 후손은 정절공파貞節公派, 성태준成台俊의 후손은 사인공파舍人公派, 성사준成士俊의 후손은 좌랑공파佐郞公派, 성갑신成甲臣의 후손은 평리공파評理公派, 성을신成乙臣의 후손은 검교공파檢校公派, 성언신成彦臣의 후손은 지사공파知事公派로 나누어진다.

가문을 번성시킨 성씨 3형제
성씨는 조선 개국기에 성석린成石璘, 성석용成石瑢, 성석연成石珚 3형제가 개국에 참여, 고관에 오름으로써 가문의 번성을 가져왔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성씨는 조선조에 138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다. 이 중 상신相臣(영의정·좌우정·우의정) 5명, 대제학 10명, 청백리 5명 등 숱한 석학·절신을 배출, 명문의 이름을 떨쳤다. 독곡獨谷 성석린成石璘(태종조, 영의정)과 회곡檜谷 성석용成石瑢(태조조, 예문관 대제학), 상곡桑谷 성석연成石珚(태종조, 예조·호조판서 및 양관대제학) 등 3형제는 조선 초에 성씨 가문의 번성을 가져온 중추적 인물들이다. 삼곡三谷으로 불린 이들 3형제는 고려 말의 절신 성여완成汝完의 아들들이다.

성석린成石璘은 공민왕조에 등과하고, 이성계 등과 함께 공양왕을 세워 찬화공신贊化功臣 창성군충의군昌城郡忠義君에 봉해졌다. 조선 개국 후 정종 때 평양부윤平壤府尹을 지내고 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으로 창녕백昌寧伯에 봉해졌으며 좌정승에 올랐다. 태종 1년 좌명공신佐命功臣 3명으로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에 진봉되고, 태종 15년 영의정이 되었다. 당대 명필로 이름을 날렸으며, 조선 태조의 건원릉신도비建元陵神道碑를 써서 현재에 남아 전한다.

성석용은 우왕 2년 등과했다. 공양왕 말에 형 성석린과 함께 이색 등의 일파로 몰려 한때 귀양살이를 했다.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개국원종공신으로 책록되어 개성유후開城留後, 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대제학에 이르렀다.

성석연은 우왕 3년 과거에 오르고, 조선 개국 후 예조판서에 올랐으며, 태종 6년에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우군총제, 대사헌, 우정승, 예조⋅호조판서를 역임했다.

이들 삼곡 집안 중 특히 회곡檜谷의 후손에서는 성삼문成三問⋅성담수成聃壽 등 절신이 나와 유명한가 하면 상곡桑谷의 후손에서는 성현成俔⋅성혼成渾 등 이름난 학자가 많이 나왔다.

수많은 절신을 배출한 가문
창녕 성씨가 고관대작을 많이 낸 가문으로 유명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成三問을 배출하여 절개로 이름난 문중이 되기도 하였다. 고려의 국운이 기울 무렵 성씨 문중은 절신節臣 성여완成汝完(정당문학政堂文學⋅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과 성부成溥(형부총관刑部摠郞), 성사제成思齊(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를 배출했다.

성여완은 공양왕 4년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되자 국운이 기울었음을 통탄하고 경기도 포천抱川 주왕산周王山에 은거, 끝까지 절개를 지켰다. 성박成溥은 조견趙狷⋅남을진南乙珍과 더불어 유양삼은維楊三隱이라 불렸던 절신이다.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가 대사간에 임명했으나 거절하고 양주에 은거했으며, 후에 두문동杜門洞에 입산했다.

성사제成思齊는 고려 멸망 후 ‘영위왕씨귀寧爲王氏鬼 부작이가신不作李家臣’이란 시를 지어 절의를 나타낸 뒤 부인과 아들은 선산을 지키도록 귀향시키고 자신은 만수산萬壽山에 들어가 일생을 마친 두문동 명현 중의 한 사람이다.

훈민정음 반포에 결정적 역할을 한 절신節臣 성삼문成三問
매죽헌梅竹軒 성삼문成三問은 도총제都摠制 성승成勝의 아들이며 성석용의 증손자이다. 성삼문은 1418년에 태어나 1456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까지 38년의 짧은 생애를 살았으나 역사상에 남긴 그의 행적은 참으로 큰 것이었다. 1447년 문과에 장원 급제, 집현전 학자로서 정음청에서 겨레의 자랑인 훈민정음 창제와 음운 연구에 종사했었다. 세종이 훈민정음 28자를 만들 때 정인지鄭麟趾, 최항崔恒,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 이개李塏 등과 함께 이를 도왔다. 특히 신숙주와 같이 명나라 요동을 여러 번 왕래하면서, 그곳에 유배 중인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黃瓚을 만나 음운에 관하여 질문하기도 하였다. 또한 명나라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음운과 교장敎場 제도를 연구해 와 1446년 훈민정음을 반포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성삼문은 1456년(세조 1년)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탄로가 나자 유학자로서 신념과 절의를 위해 목숨까지 버렸던 사육신死六臣의 한사람이다. 정권의 변동기에 고고하게 절의에 충실했던 그는 창녕 성씨의 정신적 지주로 일컬어져 오고 있다.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세조는 “나의 녹을 먹는 자가 어찌 반역을 꾸몄느냐.”고 물었다. 이때 매죽헌은 “나으리는 나라를 도둑질했거니와 삼문三問은 신하된 도리로서 임금이 쫓겨남을 차마 볼 수 없어 옛 임금을 다시 모시고자 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 사건으로 성삼문의 일문은 멸족의 비운을 겪었다. 그의 아버지 성승成勝과 삼고三顧·삼빙三聘·삼성三省 등 세 아우, 그리고 원元·맹첨孟瞻·맹평孟平·맹종孟終과 갓난아기 등 아들들까지 모두 죽음을 당했다. 성삼문은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세종과 문종의 당부를 배신한 신숙주를 꾸짖었다고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세조가 가산을 몰수해 보니 세조가 왕위에 오른 뒤의 녹은 한 톨도 손대지 않은 채 쌓여 있었고 그의 방에는 거적만이 깔려 있었다 한다.
뒷날 남효온南孝溫은 「추강집秋江集」 육신전六臣傳에서 대의를 위해 흔연히 죽음의 길을 택한 그의 높은 절의를 기록, 후세에 전하였다. 숙종 17년(1691) 신원되었고, 영조 34년(1756)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성풍세成豊世 효자비
성풍세成豊世의 본관은 창녕昌寧으로 영의정을 지낸 성석린成石璘의 후손이다. 성풍세는 선조 5년(1572년)에 고령군 다산면茶山面 나정동羅亭洞에서 태어났다. 비록 가난하고 배우지는 못하였지만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성주 노곡魯谷으로 피난을 간 성풍세는 전쟁으로 인해 생활이 어려웠음에도 낮에는 상주진관尙州鎭管에서 의병 활동을 하고, 호랑이의 도움을 받아 거리가 먼데도 불구하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에는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돌보았다. 어머니의 연세 83세 때 도끼로 얼음을 깨서 잉어를 구해 드렸으며 어머니가 한겨울에 대추를 원하자 눈 속을 헤매어 대추를 구해 드렸다고 한다. 성풍세의 효행에 하늘도 감명하여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상막에 드릴 반찬이 없어 걱정하자 산 꿩이 스스로 날아와 죽었다고 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생육신生六臣 성담수成聃壽
성담수成聃壽는 조선 전기의 학자로 자는 이수耳叟, 호는 문두文斗다. 예문관대제학 성석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개槪이고, 아버지는 홍문관 교리 성희成熺이며, 어머니는 호조판서 이견기李堅基의 딸이다.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유명한 성담수는 성삼문과 육촌 간이다. 그는 아버지 성희成熺(교리校理)가 단종 복위 사건에 관련되어 혹독한 형을 받고 유배되었다가 돌아와 죽자 벼슬길을 단념하고 고향 파주에 은거했다.

그 후 조카 성몽정成夢井이 경기도 관찰사가 되면서 그의 집을 찾아가 보니 방안에 자리조차 없어 몽정이 돌아와 자리를 보냈으나 끝내 거절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정조 6년(1782)에 김시습金時習·원호元昊·남효온南孝溫 등과 함께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세상에서 김시습金時習·이맹전李孟專·원호元昊·조려趙旅·남효온南孝溫·성담수成聃壽 등을 생육신生六臣이라 일컬어 함안의 서산서원西山書院에 함께 봉향하였다. 창녕의 물계서원에 성송국成松國·성삼문成三問·성수침成守琛·성운成運·성제원成悌元·성혼成渾 등 성씨 일문의 여러 현인들과 함께 제향되고 있다.

수많은 저술을 남긴 성현成俔
성현成俔(1439~1504)은 서거정 이후 사가四家의 한 사람으로 불리는 한문학의 대가이다. 조선 초기의 학자로 자는 경숙磬叔, 호는 용재慵齋·부휴자浮休子·허백당虛白堂·국오菊塢, 시호는 문재文載이다. 아버지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성염조成念祖이다.

성현은 세조 8년(1462) 23세로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홍문관정자를 역임하고 대교侍敎 등을 거쳐 사록司錄에 올랐다. 그는 형 성임成任을 따라 북경北京에 갔다. 그는 가는 길에 지은 기행시를 「관광록觀光錄」으로 엮었다. 1475년에는 한명회韓明澮를 따라 재차 북경에 다녀오기도 하였으며, 147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병과로 급제하여 부제학·대사간 등을 지냈다.

1485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후 평안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조서를 가지고 온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과 왕창王敞의 접대연에서 시를 서로 주고받음으로써 그들을 탄복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이해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사은사가 되어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에 대사헌이 되었다.

성현은 1493년에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으나, 음률에 정통하여 장악원 제조掌樂院提調를 겸하였기 때문에, 한 달 만에 예조판서로 제수되었다. 이해에 유자광柳子光 등과 함께 당시의 음악을 집대성하여 『악학궤범樂學軌範』을 편찬하였다. 또 성종의 명에 의해 고려가사 중에서 <쌍화점雙花店〉·〈이상곡履霜曲〉·〈북전北殿〉 등의 표현이 지나치게 노골적이라는 연유로 고쳐 쓰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관상감·사역원·전의감(殿醫監)·혜민서(惠民署) 등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그곳에 딸린 관원들을 종전대로 문무관의 대우를 받도록 하였다. 성현은 연산군이 즉위한 후에 한성부판윤을 거쳐서 공조판서가 되었다. 그리고 그 뒤에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죽은 뒤에 수개월 만에 갑자사화가 일어나서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으나, 후에 신원되었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대표적 저술인 『용재총화』는 조선 초기의 정치·사회 제도 및 문화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 밖에 「허백당집虛白堂集」, 「풍아록風雅錄」, 「부휴자담론浮休子談論」, 「경륜대궤經綸大軌」, 「태평통재太平通載」 등 많은 저술이 있다.

율곡 이이李珥와 성리학의 쌍벽을 이룬 우계牛溪 성혼成渾
성혼成渾(1535~1598)은 좌찬성 직책을 지낸 조선 중기의 문신, 작가, 시인이며 성리학자, 철학자, 정치인이다. 자字는 호원浩原, 호는 우계牛溪 또는 묵암默庵이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윤선거尹宣擧의 외할아버지이자 윤증尹拯의 진외증조부이다. 성수침成守琛의 아들이자 문하에서 수학하다 휴암 백인걸 문하에서 배웠다. 이때 이이李珥를 만나 평생 친구로 지냈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거듭 사퇴하였으나 이이의 권고로 출사했고, 이이 사후에 출사하여 의정부좌찬성에 이르렀다.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1593년 세자 광해군 분조의 부름을 받고 우참찬에 올랐고, 좌참찬, 좌찬성을 역임했다. 1594년(선조 24년) 의주파천에서 환도한 후 영의정 유성룡 등과 함께 일본과 화의를 체결할 것을 주장했다가 동인의 맹공격을 받았다. 1594년 좌참찬으로 있을 때 영의정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주화론을 주장한 일이 문제되어 매국노로 낙인찍혀 정계에서 은퇴한다.

성혼成渾은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함께 선조宣祖 시기에 성리학의 쌍벽을 이룬 거유이며, 상곡桑谷 성석연成石珚의 6대손이다. 그는 일찍부터 이이와 친분이 두터웠으나 학설에 있어서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하는 이이와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논쟁을 벌여 유학계의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성혼은 사후 문묘에 배향되었는데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대표적 인물로는 조헌趙憲·이귀李貴·정엽鄭曄·안방준安邦俊·강항姜沆 등이 있다.

창녕 성씨 주요 현대 인물


창녕 성씨중 유명한 현대 인물로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있다.

성낙인成樂寅 - 1950년 출생, 서울대학교 법대 교수를 지낸 대한민국의 법학자이며, 제26대 서울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성윤모成允模 - 1963년 출생, 대전광역시 출신이다. 1988년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1990년 산업자원부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한 후 주로 산업 정책 분야에서 근무하였다. 박근혜 정부에서 산업통상자원부 대변인과 국무조정실 경제조정실장을 지냈다. 문재인 정부에서 특허청장을 지냈고, 2018년 9월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성일환成日煥 - 1954년 출생, 대한민국의 제33대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예비역 공군 대장이며, 제11대 한국공항공사 사장을 역임했다.

[참고자료]
1)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2) 김태혁, 『한민족 성씨의 역사』, 보문서원, 2015

<참고사이트>
1) 한국의 성씨와 족보, 서울대학교 출판부, 이수건
2) 위키백과 창녕 성씨 등
3) 성씨 정보(http://www.surname.info)
4) 뿌리를 찾아서 (http://www.rootsinfo.co.kr)
5) 김성회의 성씨 이야기
6) 통계청 홈페이지



성삼문의 임사부절명시臨死賦絶命詩
“격고최인명擊鼓催人命 회두일욕사回頭日欲斜 황천무객점黃泉無客店 금야숙수가今夜宿誰家(북소리가 이 목숨을 재촉하는데 돌아보니 지는 해는 서산을 넘어, 황천길에 주막도 없을 것이니 오늘 밤은 뉘 집 찾아 쉬어 갈거나)

사육신 성삼문이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수레를 따르던 대여섯 살 딸에게 건넸다고 알려져 있는 절명시이다. 또 이 시는 지금도 숱한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 주고 있지만,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에 따르면 사실은 명나라 손분孫賁이 남옥藍玉의 옥사 때 형장에 끌려가면서 지은 시라고 한다.

「성삼문 문집」에는 처형 직전에 지었다는 절필시絶筆詩가 아래와 같이 전해 온다.

食君之食衣君衣(식군지식의군의)
임이 주신 밥을 먹고 임이 주신 옷 입었으니

素志平生莫有違(소지평생막유위)
일평생 한마음이 어길 줄 있었으랴

一死固知忠義在(일사고지충의재)
한 번 죽음이 충의인 줄 알았으니

顯陵松柏夢依依(현릉송백몽의의)
현릉(문종)의 송백이 꿈속에 어렴풋하구나
(출처 : 김시습 평전, 심경호, 돌베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