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사관의 진실 | 환단고기가 처음 밝혀 주는 역사 진실(5)

[역사X파일]

동시에 종교 경전이요 문화 경전이다!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우리 역사, 문화의 원형을 밝혀 주는 보배로운 사서이다. 특히 환단고기에서는 다른 사서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역사 사실이 많이 실려 있다. 『환단고기 역주본』(상생출판)의 해제 편에서는 ‘환단고기에서만 전해 주는 새로운 역사 진실’이라고 하여 이를 52가지로 정리하여 밝혀 주고 있다. 이를 중심으로 환단고기의 진정한 역사적 가치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우리 역사, 문화의 원형을 밝혀 주는 보배로운 사서이다. 특히 환단고기는 다른 사서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역사 사실이 많이 실려 있다. 『환단고기 역주본』(상생출판)의 해제 편에서는 ‘환단고기에서만 전해 주는 새로운 역사 진실’이라고 하여 이를 52가지로 정리하여 밝혀 주고 있다. 이를 중심으로 환단고기의 진정한 역사적 가치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3 제천의 노래 어아가於阿歌 원문이 실려 있다!
@어아가는 고대 한민족의 애국가요 군가軍歌였다!



神市以來(신시이래)로 每當祭天(매당제천)이면
國中大會(국중대회)하야 齊唱讚德諧和(제창찬덕해화)하야
於阿爲樂(어아위악)하고 感謝爲本(감사위본)하니 神人以和(신인이화)하야 四方爲式(사방위식)하니
是爲參佺戒(시위참전계)라 其詞(기사)에 曰(왈)

신시 개천 이래로 매년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나라에 큰 축제를 열어 모두 삼신상제님의 덕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며 화합하였다. ‘어아’를 노래하며 음악으로 삼고 감사함을 근본으로 하여 하늘의 신명과 인간을 조화시키니 사방에서 모두 이를 본받았다. 이것이 「참전계」가 되었는데,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於阿於阿(어아어아)여
我等大祖神(아등대조신)의 大恩德(대은덕)은 倍達國我等(배달국아등)이 皆百百千千年勿忘(개백백천천년물망)이로다.
於阿於阿(어아어아)여
善心(선심)은 大弓成(대궁성)하고 惡心(악심)은 矢的成(시적성)이로다.
我等百百千千人(아등백백천천인)이 皆大弓絃同(개대궁현동)하고 善心(선심)은 直矢一心同(직시일심동)이라.
於阿於阿(어아어아)여
我等百百千千人(아등백백천천인)이 皆大弓一(개대궁일)에
衆多矢的貫破(중다시적관파)하니
沸湯同善心中(비탕동선심중)에 一塊雪(일괴설)이 惡心(악심)이라.
於阿於阿(어아어아)여
我等百百千千人(아등백백천천인)이 皆大弓堅勁同心(개대궁견경동심)하니
倍達國光榮(배달국광영)이로다.
百百千千年(백백천천년)의 大恩德(대은덕)은 我等大祖神(아등대조신)이로다.
我等大祖神(아등대조신)이로다.

어아 어아
우리 대조신의 크나큰 은덕이시여!
배달의 아들딸 모두
백백천천 영세토록 잊지 못하오리다.
어아 어아
착한 마음 큰활되고 악한 마음 과녁되네.
백백천천 우리 모두 큰 활줄같이 하나 되고
착한 마음 곧은 화살처럼 한마음 되리라.
어아 어아
백백천천 우리 모두 큰활처럼 하나 되어
수많은 과녁을 꿰뚫어 버리리라.
끓어오르는 물 같은 착한 마음 속에서
한 덩이 눈 같은 게 악한 마음이라네.
어아 어아
백백천천 우리 모두 큰활처럼 하나 되어
굳세게 한마음 되니 배달나라 영광이로세.
백백천천 오랜 세월 크나큰 은덕이시여!
우리 대조신이로세.
우리 대조신이로세. ( 『단군세기』 2세 단군 조)


『환단고기』에는 다른 사서에는 없는 역사적 사실이나 자료를 언급하는 경우가 많다. 그중에 하나가 어아가於阿歌다. 『단군세기』 2세 부루 단군 조에 이 어아가의 원문이 실려 있다. 어아가는 배달국 시대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삼신상제님을 맞이하던 노래이다.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는 광개토열제 때 이 어아가를 전쟁에 임하는 군사들로 하여금 부르게 하여 사기를 돋우었다는 기록이 있다. ‘개대궁일皆大弓一에 중다시적관파衆多矢的貫破’라는 문구에서 모두 합심해서 적을 물리치겠다는 강한 의지가 묻어난다.

가사의 말미에 나오는 대조신大祖神은 「소도경전본훈」에서 ‘우주의 주재자 상제님’임을 밝히고 있다(大祖神은 謂三神이 爲天之主宰者也). 이로 볼 때 일찍이 예악禮樂이 제천문화를 소자출所自出로 하여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배달은 동방 예악 문화의 고향이었다. BCE 3000년경 배달 시대의 유적인 홍산문화에서 고조선 것보다 더 오래된 석경石磬(돌로 만든 아악기)이 출토된 사실이 이를 말해 준다.

14 가림토加臨土(加臨多) 문자의 존재를 밝혀 준다.
3세 가륵 단군 시절에 한글의 원형이 나왔다!



於是(어시)에 命三郞乙普勒(명삼랑을보륵)하사 譔正音三十八字(찬정음삼십팔자)하시니
是爲加臨土(시위가림토)라. 其文(기문)에 曰(왈)
이에 가륵 단군께서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시어 ‘정음正音 38자’를 짓게 하시니, 이것이 가림토加臨土이다. 글자는 다음과 같다.


세계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과학적이며 체계적인 문자로 칭송받는 한글, 사실 한글은 세종대왕이 처음 창제한 것이 아니다. 한글의 원형이 이미 고조선 시대에 존재하였다. 환단고기에서는 가림토加臨土, 가림다加臨多 문자라 하여 이미 3세 가륵 단군 2년(단기 153, BCE 2181)에 삼랑 을보륵이 ‘정음正音 38자’를 지었음을 밝히고 있다. 세종은 이를 모태로 하여 훈민정음 28자를 만들었다.

“언문 28자는 고전을 본떴다(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세종실록』 25년 12월

“언문은 다 옛 글자에 근본한 것이요, 새로운 글자가 아니다(諺文皆本古字, 非新字也).”- 『세종실록』 26년 2월

“형태를 본뜨되 글자는 고전을 본받았다(象形而字倣古篆).”- 『세종실록』 28년, 훈민정음 해례본 정인지鄭麟趾 서문


여러 차례 언급되는 본고자本古字, 방고전倣古篆이라는 문구를 통해서 당시 조선 사회에 한글의 원형 문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보다 3627년 앞서서 만들어진 ‘가림토 정음38자’를 토대로 하여 정음 28자를 선택했다. ‘발음 기관이 움직이는 모양을 연구하여’ 자음의 음가音價를 부여했고, 모음 •, ㅡ, ㅣ를 천지인 철학으로 설명하고 모음과 자음의 결합 원리를 고안했다. 이런 의미에서 ‘새로운 문자의 창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세종대왕은 어떻게 해서 원형 한글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까? 그 해답은 단군세기를 쓴 행촌 이암의 가계家系를 알면 금방 풀린다. 이암 선생의 아들은 이강李岡이고, 그의 손자가 용헌容軒 이원李原이다. 이원은 세종 재위 시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다. 그가 할아버지의 저작 유산인 『단군세기』를 세종에게 진상했고, 세종은 단군세기 속의 가림토 문자를 보았으리라. 이것은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추론이다.

가림토 문자의 흔적은 의외로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일본의 신대문자神代文字(한자가 전래되기 이전 고대 일본에서 사용된 문자), 인도의 구자라트 문자, 몽골의 파스파 문자, 산스크리트 문자 등이다. 혹자는 이를 통해 한글이 이들 문자를 모방한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데, 이는 고대 가림토 문자의 존재를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소리다. 이들 문자들은 단군조선의 가림토 문자가 전파되어 변형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환단고기』에는 ‘초대 환웅천황이 신지臣智 혁덕赫德에게 명하여 녹도문鹿圖文을 창제하게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환단고기』는 배달과 고조선이 창제한 문자를 기록하여 고대 한국이 문자 문명의 발원처임을 밝혀 준다.

15 북방 유목 민족의 기원을 밝혀 준다!
흉노와 몽골은 단군조선의 명을 받는 제후국이다!



甲辰六年(갑진육년)이라 命列陽褥薩索靖(명열양욕살삭정)하사
遷于弱水(천우약수)하시고
終身棘置(종신극치)러시니 後(후)에 赦之(사지)하사 仍封其地(잉봉기지)하시니
是爲凶奴之祖(시위흉노지조)라.

재위 6년 갑진(단기 157, BCE 2177)년, 임금께서 열양列陽 욕살 삭정索靖을 약수弱水 지방에 유배시켜 종신토록 감옥에 가두셨다. 후에 용서하여 그 땅에 봉하시니, 흉노凶奴의 시조가 되었다. ( 『단군세기』 3세 가륵 단군 조)

甲申元年(갑신원년)이라. 封皇弟烏斯達(봉황제오사달)하사
爲蒙古里汗(위몽고리한)하시니
或曰今蒙古族(혹왈금몽고족)이 爲其後云(위기후운)이라
오사구 단군의 재위 원년은 갑신(단기 197, BCE 2137)년이다. 임금께서 아우 오사달烏斯達을 몽고리한으로 봉하셨다. 혹자는 지금의 몽골족이 그 후손이라 말한다. ( 『단군세기』 4세 오사구 단군 조)


환단고기는 북방 유목 민족의 기원에 대해서 밝혀 준다. 먼저 흉노匈奴의 시조에 대한 기록이 있다. 3세 가륵 단군 시절 북쪽 열양列陽 땅을  관장하던  욕살褥薩(지방 장관)  삭정索靖이라는 사람을 약수弱水 지역의 제후에 봉하신다. 약수는 만주 흑룡강으로 보거나 감숙성 장액현張掖縣으로 보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감숙성 장액현 지역은 흉노의 주 활동 영역이었기 때문에 삭정이 유배된 곳으로 볼 수 있다.

흉노(훈족)는 고조선의 문화권 안에서 단군 임금의 통치를 받는 제후국이다. 따라서 단군조선의 제도와 문화가 온전히 그들에게 전수되었다. 단군조선의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를 본떠 그들 역시 나라를 셋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즉 대칸 밑에 좌현왕과 우현왕을 두어 중앙은 대칸이 다스리고 동쪽은 좌현왕이, 서쪽은 우현왕이 통치하게 했던 것이다.

몽골 역시 한국인과 같은 갈래에서 나왔다. 그들 역시 단군조선의 제도와 문화를 그대로 흡수하여 동방의 삼신과 제천문화를 생활화하였다. 몽골과 한국은 유사한 풍속이나 언어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북방 민족을 오랑캐로 여긴 것은 어디까지나 중화주의에 빠진 중국인의 편견이다. 흉노匈奴라는 호칭 역시 오랑캐와 노예, 포로라는 의미이다.

북방 유목민은 결코 야만인이 아니었다. 실제로 기마술과 야금술, 금속가공 기술은 세계에서 가장 앞선 사람들이다. 그들은 가장 역동적이고 창의적인 사람들이었고 또한 모든 것을 포용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북방 유목 민족이 크게 이동할 때마다 세계사의 향방이 크게 바뀌게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단군세기에는 고조선과 북방 민족(흉노, 몽골, 선비) 간의 관계를 밝혀 주는 귀중한 기록들이 많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