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역사 성인열전 | 고당 대전을 승리로 이끈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淵蓋蘇文

[역사인물탐구]

이해영 / 객원기자

*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9백 년 이래의 전통이었던 호족 공화제라는 구제도를 타파하여 정권을 통일하였고, 장수태왕 이래 철석같이 굳어 온 서수남진西守南進 정책을 변경하여 남수서진南守西進 정책을 세웠으며, 그리하여 영류태왕 이하 대신과 호족 수백 명을 도살하여 자기 집안의 독무대를 만들고 서국西國의 제왕인 당태종唐太宗을 격파하여 중국 대륙 침략을 시도하였으니 그 선악善惡과 현우賢愚는 별개의 문제로 하고, 여하간 당시 고구려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쟁사에서 유일한 중심 인물이었다.
- 단재 신채호의 연개소문에 대한 대략적인 평가

* 안시성주 양만춘楊萬春이 당태종唐太宗의 눈을 쏘아 맞히매, 태종이 성 아래서 군사를 집합시켜 시위示威하고, 양만춘에게 비단 백 필을 하사하여, 그가 제 임금을 위하여 성을 굳게 지킴을 가상嘉賞하였다. -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

* 연개소문은 범상한 인물이 아니라 하더니 과연 그렇다. 막리지(연개소문)가 살아 있을 때는 고구려와 백제가 함께 건재하였으나, 막리지가 세상을 뜨자 백제와 고구려가 함께 망하였으니, 막리지는 역시 걸출한 인물이로다.
-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왕안석王安石(왕개보王介甫)의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


642년 10월 고구려 수도 평양 장안성 남쪽 벌판의 정변


순식간이었습니다. 100여 명의 고구려 대신들은 열병식이 고조되어 가던 즈음 어디선가 울려 퍼지는 날선 호각과 북소리를 들었습니다. 이어 칼과 도끼 같은 병장기를 든 성난 눈빛의 군사들을 보았습니다. 수 제국과 맞서 빛나는 승리를 일군 백전노장들이었지만, 무방비 상태였기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한 채 쓰러졌습니다. “범과 이리가 문 가까이 왔거늘, 나를 구하기는커녕 도리어 죽이려 하는가?” 하는 큰 소리가 들렸습니다. 정변의 주인공 막리지莫離支 연개소문淵蓋蘇文이었습니다. 열병식장은 피비린내가 가득했습니다.

연개소문은 그대로 병사를 이끌고 궁궐에 난입하였습니다. 태왕을 지키는 시위병은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고, 변고를 들은 영류제榮留帝는 평복으로 몰래 달아나 고추모 성제가 다물도로 삼은 바 있는 송양松壤에 이르러 조칙을 내려 병사를 모집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라 사람이 한 명도 오지 않으니 이에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습니다.
불과 20년 전 수나라 수군을 일격에 섬멸하여 살수대첩의 신화를 만들어 낸 전쟁 영웅 고건무高建武의 최후는 이러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정변의 원인이 된 영류제의 저자세 외교


수나라의 멸망은 중원 정세에 급격한 변화를 불러왔습니다. 태원유수太原留守 이연李淵이 남하해 당나라를 건국한 것입니다. 이어 당 고조의 둘째 아들 이세민李世民은 626년 현무문의 변으로 형인 태자 건성建成과 동생 원길元吉을 죽이고 부왕에게서 왕위를 빼앗았습니다. 바로 당태종唐太宗으로 이후 내부 반란을 진압한 후, 돌궐까지 정복해 주변 여러 민족을 복속시켰습니다.

고구려는 수나라와 네 차례 전쟁에서 모두 이겼지만, 전쟁의 장소가 고구려였던 만큼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영양제嬰陽帝가 후사 없이 붕어하자, 이복동생인 고건무가 즉위하니 바로 고구려 제27세 영류제榮留帝입니다. 영류제는 당나라와 화친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전체적으로 저자세의 외교 노선을 견지하였습니다. 물론 수나라와 대전을 겪은 뒤이기에 전략적으로 친선을 도모할 필요성은 있지만, 당에게 고구려의 봉역도封域圖(강역도)를 바친 일(628년)이나, 당이 고구려에 침입하게 된다면 당의 후방을 견제해 줄 수 있는 세력인 돌궐 주력군이 당에 의해 격파되고, 힐리가칸頡利可汗이 사로잡혔을 때 수수방관한 부분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여기에 631년 대수對隋 전승기념탑인 경관京觀을 당의 요청으로 헐어 버렸습니다. 이는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전사한 병사들의 유가족들에게는 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강력한 상무尙武 정신과 주체 의식을 가진 연개소문을 위시한 대당 강경파들의 격렬한 반발을 사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642년 정월 영류제는 막리지인 연개소문에게 명하여 장성長城을 쌓는 역사를 감독하게 했습니다. 고구려의 장성은 중국의 만리장성 같은 담이 아닙니다. 만리장성은 한쪽이 뚫리면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는데, 고구려의 장성은 요동 지역에 있던 고구려 성들 사이의 협조와 연락 체계 그리고 몇 겹으로 강화된 방어망 정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 고당 전쟁 때 이 효과는 충분히 발휘되었습니다. 연개소문을 이 장성 축조의 감독으로 보내면서 그를 제거하고자 한 이들은 고구려 귀족들이었고, 같은 연씨 집안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영류제도 이를 묵인 또는 동의하였습니다.

이에 반발한 연개소문은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이 정변은 단순한 쿠데타가 아니고 지나친 대당 굴욕 외교로 일관한 영류제와 그 세력에 대한 연개소문과 대당 강경파의 혁명 기의였습니다. 즉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독자적인 천하관을 지닌 정치 세력이었다면, 전쟁의 참화를 직접 겪은 영류제는 독자적인 천하관을 포기하고, 당 제국에 복속됨으로써 존속을 도모하는 정치 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세계관의 차이는 정변을 불러왔고,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고구려 전권을 장악한 연개소문은 누구인가?


부정적 인식의 이유
연개소문에 대해서 많은 사람이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임금을 시해한 무자비한 독재자이고, 고구려 멸망에 책임이 있다는 통설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는 그를 악인으로 만들려는 조직적 작업의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현재 그를 다룬 대부분의 사료는 중국 측 자료로, 고구려 측 사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거기에 중국에서 그렇게 자랑하는 당태종의 침략을 보기 좋게 막아 내고, 그의 최후를 만들어 낸 인물이 연개소문이기에 더더욱 후세에 그를 다룬 기록은 연개소문에게 무척 부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연개소문에 대한 공포는 더 크게 퍼져서 지금까지 내려오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환단고기』에 수록된 「태백일사」 고구려본기 편을 보면 연개소문은 본래 우리의 고유한 신교 문화의 상무 정신을 크게 떨친 희대의 대영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연개소문의 조상들
연개소문은 일명 개금蓋金이라 하고 호는 금해金海입니다. 성은 연씨淵氏이고, 선조는 봉성鳳城 사람입니다. 스스로 말하기를 “물속에서 태어나서 종일 물에 잠겨 헤엄쳐도 더욱 기력이 솟고 피로한 줄 모른다.” 하니, 무리가 모두 놀라서 땅에 엎드려 절하면서 “창해滄海의 용신龍神이 다시 화신化身하였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물속에서 태어났다는 구절에 따라 성을 연淵이라 했다고 합니다. 「태백일사」 고구려본기에서 전하는 부친의 이름은 태조太祚이고, 할아버지는 자유子遊, 증조부는 광廣이며 대대로 막리지를 지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현세 중국 낙양에서 출토된 연개소문의 큰아들 남생의 묘지명 기록과 정확히 들어맞고 있습니다. 부친 연태조는 26세 영양태왕 때 명을 받고 등주를 토벌하여 총관 위충을 잡아 죽인 공이 있습니다.

출생과 성장
603년 영양제 홍무 14년 5월 10일에 태어난 그는 아홉 살에 조의선인皁衣仙人이 되었습니다. 그의 출생지에 대해서 강화군의 향토지인 『강도지江島誌』에 따르면 연개소문이 강화도 고려산 서남쪽 봉우리인 시루봉 기슭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강화군은 이곳을 향토유적 제26호로 지정하고 하점면 지석묘 앞 고인돌 공원 들머리 큰길가에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유적비’를 만들어 세워 놓았습니다. 연개소문은 몸가짐이 웅장하고 훌륭하였고, 의기가 장하고 호탕하였습니다.

다섯 자루 칼의 진실
또한 몸에 다섯 개의 큰 칼을 차고 다녔으며, 혹자는 이를 오만한 독재자의 모습으로 묘사하는데 그것은 잘못입니다. 즉 고구려 남성들은 허리에 은띠를 차고, 왼쪽에는 숫돌을 오른쪽에는 칼 다섯 자루를 달고 다닌다는 『한원翰苑』의 기록을 통해 본다면, 이는 고구려 남성들의 일상적인 풍습이었습니다. 상무적 기상이 충만했던 고구려였고, 사냥 등 생활 속에서 각종 무예를 연마해야 했기에 당연히 이 정도의 칼은 가지고 다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대인의 풍모를 지닌 연개소문


연개소문은 늘 병사들과 함께 섶에 나란히 누워 자고, 손수 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셨으며, 무리 속에 섞여 있어도 자신이 최선을 다하였고, 일이 혼란하게 얽혀 있더라도 미세한 것까지 분별해 내었습니다. 하사받은 상은 반드시 나누어 주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호하며, 상대방의 진심 어린 마음을 헤아려서 거두어 품어 주는 아량이 있었습니다. 또한 온 천하를 잘 계획하여 다스리는 재주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다 감복하여 딴마음을 품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합니다.

항상 자기 겨레를 음해하는 자를 소인이라 여기고, 당나라 사람을 능히 대적하는 자를 영웅으로 여겼습니다. 기뻐할 때는 신분이 낮고 미천한 사람도 가까이할 수 있지만, 노하면 권세 있고 부귀한 자도 모두 두려워하니 진실로 일세를 풍미한 시원스러운 호걸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인간적인 면모와 영웅적인 면모를 함께 지닌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법을 운용할 때는 엄격하고 명백히 밝히어 귀천을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다스렸습니다. 만약 법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누구라도 용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비록 큰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조금도 놀라지 않고, 당나라 사신과 말을 나눌 때도 자기 뜻을 굽히지 않는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또한 『금해병서』를 저술하기도 한 당대 최고의 병법가로 당태종을 도운 이정李靖의 스승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자주적이고 공명정대한 성품을 지닌 병법가였던 것입니다.

내정을 안정시키다


연개소문은 정변을 일으킨 뒤 영류제의 아우 대양왕의 아들 보장제寶臧帝를 제위에 올렸습니다. 그리고 모든 법을 공정 무사한 대도로 집행함으로써 자신을 성취하여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되고(성기자유成己自由), 만물의 이치를 깨쳐 차별이 없게(개물평등開物平等) 되었으며, 조의선인들에게 이 계율을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그는 무조건적인 강경책을 펴지는 않았습니다. 당의 국교인 도교 수입을 자청하여 독자적인 천하관을 유지하면서도 전술의 유연성을 택하는 정치가의 면모를 보여 주었습니다. 이후 내정을 안정시킨 뒤 당태종과 건곤일척의 대결을 벌여 승리로 이끈 출중한 지용智勇과 비상한 통솔력統率力을 지닌 영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연개소문의 외교정책


정권을 잡은 연개소문은 강성해지는 당나라에 대비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외교정책을 펼쳤는데, 우선 백제의 상좌평 성충成忠과 함께 양국이 병존하는 방안을 세웠습니다. 성충은 연개소문과 만나고 의자왕에게 보고하길 “만약 연개소문이 10년만 일찍 고구려 대권을 잡았으면 능히 당나라를 멸망시켰을 것”이라며 연개소문을 높게 평가하였습니다.

연개소문이 보기에 만일 성충과 계백 등이 있는 백제를 적으로 돌린다면 백제와 당의 수군이 서해에서 연합함대를 형성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큰일이 발생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실제로 고구려 멸망 때의 상황을 살펴보면 백제를 멸망시킨 나당 연합군이 이런 방식으로 평양성을 포위하였습니다. 만약 백제가 멸망하지 않았다면 고구려의 멸망도 다른 형태였을 것입니다.

그 무렵 남쪽에는 백제와 신라가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보장제와 비슷한 시기에 즉위한 의자왕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라의 서부 40여 성을 빼앗았고, 장군 윤충允忠은 신라의 수도 서라벌을 지키는 요충지인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성주 김품석 내외를 죽였습니다. 이때 계책을 낸 인물이 노련한 전략가인 성충입니다. 김품석은 바로 김춘추의 사위로 김춘추는 사랑하는 자신의 딸 고타소랑을 죽인 백제에 대해 깊은 원한을 품게 되고, 바로 이 일이 삼한일통三韓一統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백제의 거듭된 공격에 신라는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게 되어, 김춘추를 고구려로 파견하였습니다. 이에 연개소문은 자신의 집에 그를 머무르게 하고 다음과 같이 권유하였다고 합니다.

당나라 사람들은 도의에 어긋나고 불순하여 짐승에 가깝소. 그대에게 청하노니, 모름지기 사사로운 원한은 잊어버리고 이제부터 핏줄이 같은 우리 삼국 겨레가 힘을 모아 곧장 장안을 무찌른다면, 당나라 괴수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오. 승리한 후에는 우리 옛 영토에 연합 정권을 세워 함께 인의仁義로 다스리고, 서로 침략하지 않기로 약속하여 그것을 영구히 지켜 나갈 계책으로 삼는 것이 어떠하겠소?


즉 삼국이 연합하여 당나라를 정벌한 뒤에 배달국, 단군조선 때의 중국 본토 내 조선족의 본고장이요 본래 우리 땅이던 황하와 양쯔강 중류 이동에 연합 정권을 세워 함께 다스려 나가자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세 번 권유하여도 김춘추는 딸을 잃은 원한과 당에 대한 사대주의에 사로잡혀 끝내 듣지 않았습니다. 그 후 김춘추는 당태종과 밀약을 맺었고, 백제와 고구려는 내부 분열과 나당 연합군의 침입으로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당태종 고구려를 침공하다.


전쟁은 시간문제였습니다. 천하 제국으로 고구려를 당의 세력권에 넣으려는 당태종과 천손 자손으로 고구려의 독자적 천하관을 유지하는 연개소문 사이의 대립은 세계관의 차이였고, 이는 거대한 전쟁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연개소문의 반정 소식을 들은 당태종은 고구려 침략을 결심하였습니다. 당태종은 수나라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주도면밀하게 준비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내부에서는 이세적李世勣 같은 소수의 장수를 제외하면, 군신 대부분이 고구려 원정을 반대했습니다. 그래도 태종은 고집을 부렸습니다. 당태종이 보기에 고구려 막리지 연개소문은 단순히 당의 침공만을 막을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당을 멸망시켜 고구려에 편입시키고자 하는 거대한 정치가였습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선수를 쳐야 하고, 자신이 직접 나서야 한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출진과 고구려 요동방어선 붕괴
드디어 645년 보장제 개화開化 4년 당태종은 다음과 같은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요동은 본래 우리 중국 땅이다. 수나라가 네 번이나 군사를 일으켰으나 그곳을 얻지 못하였다. 내가 이제 출병하여 우리 자제子弟들의 원수를 갚고자 하노라.


당태종 이세민은 직접 활과 화살을 메고 이정李靖과 함께 무장의 쌍벽이라 불리는 이세적李世勣을 포함해서 정명진程名振, 장손무기長孫無忌 등의 쟁쟁한 장수 60여 명과 수십만 정예병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였습니다.

전략은 수륙병진책과 기동전이었습니다. 수양제隋煬帝가 엄청난 대군을 몰고 갔다면 당태종 이세민은 그보다는 못하지만 상당한 규모의 정예 병력만으로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당태종의 본군本軍 20만에 고구려의 눈이 쏠려 있을 때, 이세적군 6만과 장량의 수군 4만의 움직임은 전혀 포착되지 않았습니다.

당군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출몰하여 요동 지역의 지휘 체계와 연락망 협력 체제를 무너뜨리는 전법을 구사하였고, 초기에 이런 전략의 성공으로 고구려는 대혼란과 공포에 빠져들었습니다. 동시다발적인 파상 공세에 고구려의 요동 지역 수비선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습니다. 고구려는 개모성蓋牟城에 이어 수군 기지 비사성卑沙城이 당군에게 함락되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졌습니다.

당태종을 잡을 큰 그림을 그린 연개소문


연개소문은 침략 소식을 미리 알고 전국 비상대책 위원회를 소집하여 전략 회의를 열었습니다. 연개소문이 정한 전략은 이러했습니다.

요동성을 비롯한 안시성 등 굳게 지켜야 할 성을 제외하고는 나머지는 전통적인 청야淸野 전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이후 기회를 보아 진공하기로 하였고, 최후의 결전장으로 삼은 곳은 양만춘이 성주로 있는 안시성安市城이었습니다. 이 안시성의 후방 구원 책임은 대로對盧 고정의高正義와 오골성 성주 추정국鄒定國으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연개소문은 당군이 돌아갈 길을 차단하고 중원까지 진격하여 당태종을 사로잡을 계획이었습니다. 반드시 사로잡아 항복을 받아 내야 이 전쟁이 완전히 끝난다고 보았습니다.

반정 이후 연개소문이 세력 규합에 실패하였다면 대당 전쟁은 그가 몰락할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국운이 걸린 중대한 문제 앞에 군부와 민심은 그를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습니다. 다시 한번 우리 민족의 일치된 힘으로 중국 역사상 가장 강력하다는 당과의 치열한 전투 끝에 통쾌한 대승을 거둠으로써 고구려의 자존과 자긍심을 대내외적으로 선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치열하게 전개되는 요동 전역戰役


안시성 유인의 기본 전략
고구려는 수양제의 백만 대군을 막아 낸 난공불락의 성인 요동성을 1차 저지선으로 삼아 전열을 정비하였습니다. 하지만 평지성平地城이었던 요동성은 당군이 끌고 온 공성 무기의 입체적 공격과 때마침 불어 오는 강풍을 이용한 화공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백암성 성주 손대음孫代音의 항복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거짓 항복으로 빈틈을 타서 반격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연개소문은 지켜야 할 곳과 반드시 사수해야 할 곳을 미리 정해 두고, 당군을 안시성으로 유인한다는 기본적인 작전을 지켰습니다.

15만 안시성 지원군의 진실
그래서 북부 욕살 고연수高延壽와 남부 욕살 고혜진高惠眞 등에게 말갈군을 포함한 15만 대군을 거느리게 해 당군과 안시성 근처에서 일대 회전을 벌이게 합니다. 이른바 주필산 전투로 알려진 이 일에 대해 기존 사료에서는 고구려군이 대패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환단고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이때 고구려 구원군은 안시성과 연결되는 보루를 쌓고, 당군에게 지구전을 펼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북부 욕살 고연수가 군사를 이끌고 전진하여 안시성으로부터 40리쯤 떨어진 곳에 이르러 대로 고정의高正義에게 대책을 물었습니다. 이는 고정의가 연륜이 깊어 일 처리에 능숙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고정의의 계책은 이러하였습니다.

“세민이 안으로 군웅群雄을 제거하고 나라를 차지하였으니 역시 범상한 인물이 아니오. 지금 모든 당나라 군사를 이끌고 왔으니 그 예봉銳鋒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되오. 우리 계책은 병력을 움직이지 말고 싸우지 않으며, 여러 날을 끌면서 기습 부대를 나누어 보내 군량을 운반하는 길을 끊는 것이 가장 좋소. 양식이 다 떨어지면 싸우려야 싸울 수 없고 돌아가려 해도 길이 없을 것이니, 반드시 이길 것이오.”


고연수 등은 그 계책을 좇아 당군이 오면 막고 물러가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기습 부대를 보내 군량을 불태우거나 빼앗았습니다.

기존에 알려진 대로 주필산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고 하면서, 당군은 두 달 동안 이 일대를 떠나지 못했습니다. 전투에서 이겼다면 의당 그 여세를 몰아 진격해야 할 군대가 토산을 쌓는다 어찌한다고 하면서 안시성 공략에 진땀을 흘리는 것만 보아도 주필산 전투는 고구려의 승리였으며, 서전에서 작은 패배를 크게 부풀리거나 왜곡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튼 이세민은 온갖 계략으로 맞섰지만, 허망하게 사상자만 늘어나고, 진퇴양난에 빠졌습니다. 요동으로 출병하여 전쟁한 것을 한탄하고 후회하였지만,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나라 군대는 고구려의 흑기黑旗만 봐도 두려워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당군은 붉은 깃발[赤旗]을 사용하였고, 고구려는 검은색 깃발을 사용하였습니다. 검은색의 ‘검’은 신성神聖을 상징하며, 북방 수기 물[水]을 상징합니다. 이는 남방 화기인 붉은 색을 이기는 수극화水克火의 이치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당태종 최후의 발악, 안시성 전투


안시성은 고구려 태조열제 시대 당시 요동 정벌에 나선 후 서부 방면을 경영하기 위해 설치한 성으로 바다와 육지를 잇는 요새 중의 요새였습니다. 성벽을 높이 쌓고 정예병을 두었으며 수십만 석의 양식을 쌓아 둔 철옹성이었습니다. 여기에 성주 양만춘楊萬春(梁萬春)의 지도력과 군관민의 혼연일체가 된 단결력, 명분 없는 당군의 침공을 막아 내겠다는 결사 항전의 의지가 있었습니다.

안시성은 고구려와 당군 양측 모두에게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당태종에게는 조여 오는 포위망을 뚫고 고구려에 일격을 가할 마지막 결전지가 안시성이었으므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늦여름부터 시작하여 겨울까지 계속된 당군의 파상 공세를 안시성은 막아 냈습니다. 당태종은 토산을 쌓다는 둥 여러 가지 꾀를 내었으나, 아무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즈음 연개소문은 어양에 남아 있던 정예군 3만을 이끌고 만리장성을 넘어 베이징北京 북쪽 상곡 등지를 급습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유약한 당의 태자 이치李治(훗날 당고종唐高宗)의 혼을 빼 놓아 국가의 위급을 알리는 봉화를 올리게 하였습니다. 당태종이 우려했던 일이 현실화되었습니다. 양만춘과 안시성 사람들은 갑자기 올라온 봉화의 뜻을 제대로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도망치는 적들을 뒤쫓아 가는 일뿐이었습니다. 마침내 당태종은 645년 9월 18일 철군하고 말았습니다. 표면적 이유는 양식이 다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고구려가 당의 보급로를 차단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장량의 수군이 비사성 함락 이후 어떤 활약도 보여 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동안 점령된 성들이 고구려에 의해 다시 탈환되었음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요택으로 패주하는 당태종


당태종은 철군 길을 요하 하구, 즉 요택遼澤으로 잡았습니다. 굳이 이 길을 택한 이유는 다른 길은 이미 고구려군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는 연개소문이 돌아갈 길을 끊고, 뒤에서는 양만춘과 추정국 등의 추격대가 눈에 불을 켜고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요택은 ‘진흙과 물이 있어 마차가 통하지 못하는 곳’이며, ‘풀을 베어 길을 메우고 물이 깊은 곳은 수레로 다리를 삼았으며’, ‘당태종 스스로 말채찍 끈으로 섶을 묶어 진창을 메워야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때 진흙탕에 빠지고 얼어 죽은 병사들이 속출하였고, 당태종 몸에도 등창이 생겼다고 합니다. 겨우 빠져나온 이들은 이정의 구원군이 당도한 뒤에야 가까스로 사지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당태종이 처한 상황이 매우 급했음을 알려주는 단서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베이징 조양문 밖에서 산해관에 이르기까지 황량대라는 지명이 10여 곳 있습니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당태종이 모래를 쌓아 양식을 저장해 놓은 곳처럼 꾸민 곳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쫓겨 가는 중 죽은 병사들의 시신을 장사 지내기 위해 크고 작은 구덩이를 팠는데, 위에 흙을 덮으니 마치 돈대처럼 생겼다고 해서 적골대라고 하였습니다. 베이징 동쪽 적곡돈의 유래입니다.

이때 당나라 군대를 완전히 제압한 연개소문은 양만춘과 함께 당태종을 추격하었고 수도 장안에 입성하여 상당한 영토를 할양받았습니다. 이에 따라 산시성陝西省, 허베이성河北省, 산둥성山東省 등지가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전쟁 이후 변화하는 당나라의 대고구려 전략


고구려와 당나라는 동아시아 패권을 걸고 운명적인 대전쟁을 벌였고, 고구려가 승리하였습니다. 고구려 원정 후 당태종은 병상에 드러눕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안시성 전투 때 눈에 화살을 맞는 상처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와중에서도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한 야욕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당태종은 649년 5월 ‘고구려에 대한 한恨’을 품고 51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언은 요동의 전역戰役을 파하라, 즉 고구려 침공을 그만두라는 것이었습니다. 당대의 영웅이지만 말년에 고구려를 침공하여 후회와 치욕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후 당은 고구려에 대한 전략을 새로 세웠습니다. 수시로 고구려를 침입하여 고구려가 항시적인 전시 상태를 유지하게 함으로써 국력을 서서히 소진시키는 전략을 구사하였습니다. 제국 전역에서 징발한 압도적인 물자를 바탕으로 한 국지적인 소모전과 요동을 우회한 상륙전 등으로 고구려의 국력 고갈을 시도했고, 실제로 많은 전투가 평양성 근처에서 벌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연개소문이 사망한 후, 연개소문 아들끼리의 다툼과 내분을 이용해 668년 마침내 평양성을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영웅의 퇴장과 고구려 멸망


당나라의 첫 침략 이후에도 계속되는 당의 도발을 막아 내며, 고구려의 절대 권력을 행사한 연개소문은 657년 10월 7일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며 세상을 떠났습니다. 묘는 운산의 구봉산에 있었습니다. 이후 660년 7월 백제가 당군 13만과 신라군 5만으로 구성된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면서 정세는 급변하였습니다. 서쪽과 남쪽으로부터 동시에 공격을 받게 된 고구려는 이에 굴하지 않고 맞서 싸웠습니다. 662년 정월에는 평양 부근 사수蛇水에서 당의 장수 방효태龐孝泰와 그 아들 열세 명을 포함한 당군 전원을 몰살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의 사서에서는 이 사수 대첩의 주역이 연개소문으로 나오기 때문에 연개소문의 사망 시기를 665년 이전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아무튼 백제가 망하고 고립된 상황에서도 고구려는 당의 대군을 맞아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싸워 이겨 내는 투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연개소문의 부재는 국력 통합의 구심점에 공백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는 그의 장남과 동생들 간의 권력 투쟁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막리지 지위를 이은 큰아들 남생은 동생들과 분쟁을 벌이다가 적국인 당에 투항하고,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淵淨土는 신라에 투항하였습니다. 이런 연씨 집안의 싸움은 천 년 제국 고구려의 멸망이라는 파국적 결말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연개소문은 나라가 망하느냐 존속하느냐 하는 비상시국에서 고구려의 자존을 지키며 존속을 이루어 낸 지도자였음은 분명합니다. 이런 그를 단재 신채호는 우리 4천 년 역사에서 첫째로 꼽을 수 있는 영웅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참고문헌>

『역주본 환단고기』(안경전, 상생출판, 2012)
『이덕일의 한국통사』(이덕일, 다산북스, 2020)
『광개토대왕이 중국인이라고』(월간중앙 역사탐험팀, 중앙일보 시사미디어, 2004 )
『당 태종이 묻어버린 연개소문의 진실』(신영란, 작은키 나무, 2006 )
『민족사를 바꾼 무인들』 (황원갑, 인디북, 2004)



24장將 중 병법의 대가인 이정李靖은 연개소문의 제자였다
당태종을 도와 당나라를 반석을 올린 24명의 명장이 있습니다. 이들은 후대에 24장將이라고 불렸는데, 그중에 위국공衛國公 이정李靖이 있습니다. 그는 당나라 북쪽의 돌궐 설연타와 위구르 그리고 츨륵 등 튀르크 계통의 유목 민족을 정벌한 당대 제일의 명장입니다. 그가 저술한 『이위공병법李衛公兵法』은 무경칠서武經七書의 하나이며, 조선 시대 무과의 이론 과목 중 하나일 정도로 최고의 병법서입니다.

그런데 단재 신채호 선생은 현재 전해지지 않은 『해상잡록海上雜錄』을 인용해 당나라 제일의 명장 이정이 연개소문의 제자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즉 당태종이 출병하기 전에 이정을 행군대총관으로 삼으려고 하자, 이정은 “제가 일찍이 태원太原에 있을 때 연개소문을 만나 병법을 배워 그 뒤로 폐하를 도와 천하를 평정함이 다 그 병법의 힘을 입었음인즉, 오늘날 신이 어찌 감히 전날에 사사했던 개소문을 치리까?”라고 사양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정은 천하의 모든 군대가 동원된 고구려 침공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당태종은 “개소문의 병법이 과연 옛사람의 누구와 견주겠느냐.”라고 묻자, 이정은 “옛사람은 알 수 없으나 오늘날 폐하의 모든 장수 가운데에는 적수가 없고, 비록 천위天威로 임臨하실지라도(당태종이 친정하더라도) 가히 승리하기 어려울까 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태종이 “중국의 거대함과 인민의 수로나 병력의 강함으로 볼 때 어찌 일개 개소문을 두려워하랴.”하고 불쾌해하자, 다시 이정은 “연개소문이 비록 1인이나 재주와 지략이 만인에 뛰어난즉 어찌 두렵지 아니하리까.”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더불어 단재는 본래 『이위공병법李衛公兵法』에는 연개소문에게 병법을 배운 이야기와 연개소문을 숭앙崇仰하는 어구가 많으므로, 당과 송 시대를 지나면서 연개소문에게 병법을 사사해 명장이 됨이 실로 큰 수치라고 하여 병법서를 모두 없애 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현존하는 병법서는 후인의 위작으로 원본이 아니라고 하는 내용을 『조선상고사』를 쓰기 20년 전 서울 명동에서 만난 노상운盧象雲이라는 노인의 구전口傳을 통해 전하고 있습니다.

연개소문의 호적수, 당태종 이세민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은 수나라 개황開皇 18년인 598년 12월에 당국공 이연李淵과 두태후의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세민이란 이름은 제세안민濟世安民,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이세민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생각함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어떤 상황이 닥치면 과단성 있게 처리하고 작은 일에 구애를 받지 않아서 사람들이 그의 마음을 짐작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수양제가 고구려 침공에서 실패해 전국이 혼란해지자, 이세민은 남몰래 천하를 편안하게 할 큰 뜻을 품고 선비들과 교유하며, 널리 호걸들과도 친분을 맺었습니다.

617년 6월 14일 우유부단한 부친 이연을 설득하여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이세민은 군기를 엄격하게 하여 약탈을 금지하였습니다. 이연은 근거지인 태원太原을 떠나 관중 지방으로 들어가기로 했는데, 수양제가 정예군을 이끌고 남쪽 양도에 있었기 때문에 관중 지역의 중심지인 장안은 비어 있었으며, 제국의 수도인 장안을 점령하는 일은 명분상으로도 우위에 서는 일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연은 막내 이원길을 태원에 남기고 장남 이건성과 이세민을 앞세워 장안으로 진격하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수많은 유민, 반란 세력들이 합류하여 주력군을 이끈 이세민의 군사는 3만에서 무려 13만으로 증가하였고, 이연의 전군은 20만이 넘는 대군으로 성장하였습니다. 617년 11월 장안을 함락한 이연은 13세의 양유를 허수아비 황제로 내세우며 스스로 당왕唐王을 자처했습니다. 장안성 점령으로 승기를 잡은 당은 천하 제패의 길에 나서게 됩니다.

당이 천하의 대세를 장악하자, 이세민의 공적은 하늘을 찌르게 되었습니다. 이에 형인 태자 이건성과 동생인 이원길의 불안감이 높아졌습니다. 양측이 대립하던 중 626년 이세민은 태극궁 북문인 현무문에서 형과 아우를 제거하는 이른바 ‘현무문玄武門의 변’을 일으켰고, 이후 당고조의 양위를 받고 30세의 나이에 대당 제국 황제 자리에 올랐습니다. 연호는 정관貞觀이었습니다. 그는 현무문의 변에서 자신의 반대편에 섰던 위징을 비롯한 여러 인재를 포용함으로써 개국 초기의 혼란을 잠재웠습니다.

이후 당태종은 돌궐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으며, 이런 당의 위세에 압도된 유목민 집단들은 당태종을 유목 세계의 패자라는 뜻을 지닌 천가한天可汗(텡그리 카간Tengri qaghan)으로 추대하였습니다. 국왕 앞에 하늘을 뜻하는 ‘텡그리’ 자가 붙은 이 호칭은 최고의 존칭입니다. 돌궐 패망과 함께 그간 돌궐의 세력에 예속되어 있던 거란, 해, 습飁 등 동부 내몽골의 홍안령 기슭 일대에 거주하던 유목 민족들이 당나라에 투항하여, 당태종은 중원(천자)과 초원(가칸) 양쪽 모두의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동으로 서해에 이르고, 서로는 언기焉耆, 북으로는 고비사막, 남으로는 임읍林邑에 이르는 지역이 모두 당의 주현으로 편제되었습니다. 이제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 중 대적할 수 있는 나라는 오직 고구려만 남게 되었고, 이에 고구려를 침공하였지만, 그 결과는 본문에서 확인해 보셨을 것입니다.

정관지치의 실상
그의 정치는 이상적으로 평가받아 ‘정관貞觀의 치治’라고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의 치세는 수 제국의 업적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수양제 대업 2년인 606년 전국 호구는 890만여 호였습니다. 정관 시대보다 무려 세 배 가까이 되었습니다. 당현종唐玄宗 시기인 천보 13년(754년)의 호구가 907만 호였다고 하니 이전 수준으로 회복하는 데 150년의 시간이 걸렸던 셈입니다. 이는 두 가지 사실을 알려 줍니다. 수나라 때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고, 수당 교체의 혼란기와 무리한 고구려 원정 등으로 인해 무수한 백성들이 희생되었다는 점입니다. 객관적으로 정관지치를 지나면서야 비로소 수 제국의 전성기 수준을 회복할 수 있는 물꼬가 열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 제국인 당 제국의 초석을 닦은 태종 이세민
그렇지만 탁월한 정치 수완과 그가 이룬 업적을 경시할 수는 없습니다. 돌궐을 복속시키면서 농경과 유목 지역을 통괄하는 최고 통치자가 되어, 세계 제국의 위치를 공고히 하게 되었습니다. 경제 제도인 균전제均田制, 조용조租庸調 제도로 세금을 걷으면서 국가 재정은 풍족해졌고 민생은 안정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뛰어난 인재를 곁에 두고 수시로 조언을 들으며 이를 정책에 반영하여 군신이 함께 지혜를 모아 치국평천하에 임하는 자세를 중시하는, 이른바 천하위공을 펼쳤습니다. 당태종 때는 예악과 인의, 충서, 중용 등 유가가 강조하는 덕치가 꽃을 피웠습니다. 그의 치세에는 유교와 불교 도교 등 삼교가 정립하는 형세로 사상적인 자유와 그 내용이 풍성해졌습니다.

중앙 통치제도인 3성 6부제와 인재 등용 방식인 과거제는 동아시아의 기본적인 통치 체제로 자리 잡게 하여, 모든 제도가 제 기능을 발휘하는 통치의 전범을 세웠습니다. 당태종 시기에 당나라는 국제적인 개방성과 실질성과 실용성을 숭상하는 특징과 함께 여러 민족의 문화를 하나로 녹여 새롭게 변용한 문화를 만들어 내고, 낙천적이며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는 대범한 자세를 견지하였습니다. 이런 그였기에 고구려 불세출의 영웅 연개소문의 호적수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